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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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화 尹⿍和 숙종 16년(1690) 12월 8일∼숙종 17년(1691) 7월 15일
- 윤정화 尹⿍和 숙종 16년(1690) 12월 8일∼숙종 17년(1691) 7월 15일윤정화(1648∼?)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열지(說之)이다. 아버지는 성균관진사 윤필양(尹必讓)이다. 1675년 식년시 생원‧진사에 합격하였고, 같은 해 증광시에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81년 예조정랑, 1689년 정언, 1690년 지평·사간, 1690년 10월 15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8일 도임하여 1691년 7월 15일에 제주목사로 이임하였다. 1690년(숙종 16) 12월 11일 기록에 “고을 백성이 굶주리는 정상을 극진히 아뢰고, 유사(有司)의 신하를 시켜 너그러이 돌보는 정사를 다시 의논하여 여러 가지 조곡(糶穀)은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고 여러 가지 신역(⾝役)을 전감(全減)하고 전세(⽥稅)·대동(⼤同)도 머물러 두었다가 진휼에 쓰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비국에 내렸으나, 복주(覆奏)에는 채택하여 시행한 바가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 1694년에는 민정중(閔⿍重)에게 극형을 내리도록 간언을 올렸는데, 잘못된 간언으로 인하여 김원섭(⾦ 元燮)‧조식(趙湜) 등과 함께 유배를 당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오(1690년) 12월 8 일 도임하였고 신미(1691년) 7월 15일 제주목사로 이임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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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지화(尹之和)
- 조선 전기의 문신 남촌(南村) 윤지화(尹之和 1476~1558)의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순경(順卿)이다. 현감(縣監) 윤응(尹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봉상시(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尹起畝)이다. 연산군의 외삼촌인 참판(參判) 윤구(尹遘)의 아들이자, 첨정(僉正) 윤지임(尹之任)의 동생이며, 사복시 첨정 윤지청(尹之淸) 형으로, 제헌왕후(齊獻王后 폐비윤씨) 조카다.1476년에 태어나니 낳아서부터 총명하고 효우(孝友)와 문장이 출충하며 지조가 굳건하고 기상이 엄준 하였다.1504년(연산군 10) 갑자(甲子) 식년(式年) 사마시(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여 1506년(연산군 12) 벼슬이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이르렀다. 동년(중종1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 외척으로 전남 장흥(長興)으로 부처(付處)된 후 1513년에 해배(解配)되여 30대 초반에 광주(光州)로 이거 함안윤씨 입향조 세거지로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에 자리 잡고 살아왔다.1535년에 아들 제(霽)가 죽음을 당하니 이후로 매우 두려워하여 장차 깊은 못에 빠지는 것 같아 세상에 뜻이 없어, 당시 문장으로 유명한 하천(霞川) 고운 (高雲 1479~1530, 고경명 장군의 조부) 눌재 (訥齋) 박상(朴祥), 양곡 소세양(蘇世讓) 감사(監司) 정만종(鄭萬鍾) 선생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어 시와 술로 창수(唱酬)하며 세월을 보내다 1558년(명종13) 83세로 세상을 떠났다.중종 때에 서사정랑(筮仕正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귀향 후 은거하여 도학을 강명(講明)하고 후학을 개진(開進)하니, 눌재 박상이 시를 평하기를 ‘동양천화작지선(同養天和作地仙)’이라 하였다.스스로 찬한 지(誌)에 따르면, ‘아홉 마디의 창양(昌陽)은 수명의 긴 것과 같고 높은 뫼는 그 성품의 굳셈과 같다. 겸공(謙恭)을 밖으로 들어내고 성경(誠敬)을 안으로 간직하였다. 오유(五遊)하고 추창(趨昌)하며 구원(邱園)에서 숨어 살아 문장을 스스로 머금고 광채를 스스로 감추었다. 문을 닫고 생도를 가르치며 혹은 방으로 들어가고 혹은 마루로 오른다’라 하였다.성종의 계비인 윤씨가 폐위되자 광주(光州)로 낙향하였다. 묘는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행암동(구 孝友面 龜巖)에 있다.저서로 현재 남촌유고(南村遺稿)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남아 있다.
- 2018-07-06 | NO.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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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용 尹致容 철종 7년(1856) 8월 7일∼철종 8년(1857) 10월 15일
- 윤치용 尹致容 철종 7년(1856) 8월 7일∼철종 8년(1857) 10월 15일윤치용(1798∼?)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대수(⼤受)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윤경렬(尹慶烈), 동생은 이조판서 윤치정(尹致定)이다. 1822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8년 혜릉참봉, 1832년 장원별제·공조좌랑, 1833년 신계현령, 1837년 사옹첨정, 1839년 보은군수, 1840년 함흥판관, 1843년 활인별제, 1844년 공조정랑, 1845년 서흥부사, 1847년 광주목사, 1849년 충주목사를 지냈다. 1856년 7월 5윌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7월 17일 부임하였다. 1857년 1월 7일 『승정원일기』에 “선혜청이 엄한 것은 조법(漕法)이라 하면서 근년 이래 기강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해져 곡주관(穀主官) 이 된 자가 재운(再運)이라고 칭하면서 늦게 짐을 꾸려 얼음에 닿는 해가 없는 해가 없다 하면서 작년의 대동미(⼤同⽶)에 나주의 9척이 얼음이 얼 때가 되어 해가 지나도록 납부하지 않았다.”하여 나수하라는 전교가 내렸다. 1858년 강릉부사, 1860년 광주(廣 州)판관, 1861년 형조참의, 1862년 우부승지, 1862년 돈녕도정, 1863년 영변부사, 1865년 도총관, 공조참판, 1867년 동돈녕, 1868년 행호군, 1871년 공조판서를 역임 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진(1856년) 7월 5일에 광흥수에서 옮길 것을 제수받고, 7 월 17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8월 7일에 부임하였으며 정사(1857년) 10월 15일에 여주목사로 옮겨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주객사 금성관내에 1861년에 세운 철비(鐵碑) 「목사 윤후치용 청덕휼민영세불망비」가 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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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치응 尹致膺 헌종 13년(1847) 8월 12일∼헌종 15년(1849) 5월 1일
- 윤치응 尹致膺 헌종 13년(1847) 8월 12일∼헌종 15년(1849) 5월 1일윤치응(1794∼?)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취여(就汝)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윤명렬(尹命烈)이다. 음관으로 1831년 7월 경릉참봉, 1834년 부사용, 1835년 호조좌랑, 1836년 의빈도사, 1837년 가례도감 낭청·돈녕판관·휘경원령, 1839년 진천현 감, 1841년 공주판관, 1844년 금산군수, 1846년 12월 선산부사를 지냈다. 1847년 7 월 13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8월 12일 부임하였다. 1849년 4월 25일에는 성묘하는 일로 경기의 삭녕(朔寧)에 말미를 받았는데 속히 고을로 돌아가라는 관문을 감사에게 통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윤4월 17일에는 돌아갈 것을 경기감사에게 통지했으나 신병 으로 어려워 파출되었다. 1848년 9월 10일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849년 7월 호군, 1853년 돈녕도정, 1854년 동부승지, 1855년 첨지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정미(1847년) 8월 12일에 부임하였고 기유(1849년) 5월 1일에 상경 후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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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태원 尹泰元 고종 23년(1886) 9월 10일∼고종 25년(1888) 7월 10일
- 윤태원 尹泰元 고종 23년(1886) 9월 10일∼고종 25년(1888) 7월 10일윤태원(1833∼1906)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정보(正甫)이다. 부친은 통훈대부행 건원릉령 윤후성(尹厚成)이다. 1865년 식년시에 진사로 합격하여 1875년 광릉참봉, 1877년 빙고별제, 1882년 장수현감, 1883년 평양서윤, 1885년 금산군수를 지냈다. 1886년 7월 29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10일 부임하였다. 1888년 7월 장성부사, 1890년 공조참의, 1892년 상주목사, 1893년 충주목사, 1902년 동지돈녕원사를 역임 하고 70세가 되어 기로소(耆⽼所)에 들면서 4품 이상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승급에서 종2품으로 진급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임금의 피난을 수행하여 공로를 세웠고, 이 공로로 사망 후 종1품 참정대신(參政⼤⾂)에 추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술(1886년) 7월 29일에 금산군수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같은 해 9월 10일 부임하 였고 무자(1888년) 7월 10일 장성부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1883년 9 월 13일 『승정원일기』에 참찬관 홍종영(洪鍾永)이 “전 나주목사 윤태원은 고을을 다스린 지 3년 동안 묵은 포흠을 거두어들인 것이 8000여 섬이고, 정해년 조에 원납전(元 納錢)과 아울러 잡비 2만 4000석을 수량에 맞추어 봉실하였으니, 사방에서 모두 칭송 하다.”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참로 장중하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 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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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행 尹⾏ 명종 15년(1560) 8월 24일∼명종 16년(1561) 8월
- 윤행 尹⾏ 명종 15년(1560) 8월 24일∼명종 16년(1561) 8월윤행(1508∼1592)의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대용(⼤⽤), 호는 졸재(拙齋)로 윤효정(尹孝貞)의 아들이다. 윤효정은 해남윤씨의 해남 입향조이며 나주 출신 금남 최부(崔溥)와 동서간이다. 형 윤구(尹衢)와 동생 윤복(尹復)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1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되었다. 1553년 해주목사를 지내고 1560년 7월 7일 나주 목사에 제수되어 8월에 나주목사에 부임한다. 1561년에 7월에 나주 토호들이 대낮에 양민의 얼굴에 재를 바르고 때려죽인 뒤 물속에 시체를 버린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나 가족들이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토호들이 도망간 몇 달 뒤에야 관찰사에게 보고한 다. 이 사실을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밝혀지자 파직당한다.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1563 년 동래부사, 1566년 상주목사, 1571년 광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 신(1560년) 8월 24일 도임하였고, 신유(1561년) 8월에 살인수 김응란을 체포하지 못한 일로 파직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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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효손 尹孝孫 성종 17년(1486)∼성종 18년(1487) 3월
- 윤효손 尹孝孫 성종 17년(1486)∼성종 18년(1487) 3월윤효손(1431∼1503)의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1473년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대사헌을 지내고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임(外任)을 청하자 1486년(성종 17) 가선대부 행 나주목사가 되어 6월 17일 사조(辭朝)하고 부임하였다. 12월 29일에는 윤효손 목사가 올린 철장(鐵場) 도회(都會)를 폐지하지 말라는 상서에 대해 의논하는 기록이 『성종실 록』에 있다. 창평 등을 사례로 언급하였다. 철장은 철을 캐내어 제련해 생산하던 곳이고 도회는 사람을 모으거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설치하는 곳이다. 1490년 정조사(正朝 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이후 황해도관찰사, 형조판서,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효(⽂孝)이다.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묘소에 있는 신도비는 보물이고 석등과 석비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이다. *상세이력은 전주부윤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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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흡 尹潝 영조 16년(1740) 12월∼영조 19년(1743) 8월
- 윤흡 尹潝 영조 16년(1740) 12월∼영조 19년(1743) 8월윤흡(1689∼1753)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화숙(和叔)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윤세수(尹世綏)이다. 오음 윤두수(尹⽃壽)의 후손이다. 1726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725년 휘릉참봉, 1726년 선릉참봉, 1730년 형조좌랑, 1730년 함흥 판관, 1734년 배천군수, 1740년 호조정랑을 지냈다. 1740년 11월 29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2월 16일에 하직하고 부임하여 재임하다가 1743년 8월 29일 체포된 뒤파직되었다. 재임 때에 금성관을 보수하고 망화루를 중건하였다. 1746년 황주목사, 1749년 수원부사, 1751년 원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740년) 12 월에 도임하였고 계해(1743년) 8월에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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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각(李恪, 1553~?) 광주목사
- 이각(李恪, 1553~?) 광주목사로 1641.11~1643년까지 있었다.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 ~1655)의 문집인 《포저집(浦渚集)》 제33권 / 묘지명(墓誌銘)에 '사위 진사 이상주(李相冑)의 묘지명'에 "나의 사위 진사 이상주는 나의 벗인 병조 판서 연양군(延陽君) 이돈시(李敦詩)의 장손(長孫)이다. 돈시는 증 영의정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諱) 귀(貴)의 사자(嗣子)이다. 나의 사위는 돈시의 아들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이각(李恪)의 아들이다. 나와 돈시의 관계는 골육의 형제와 같은데, 두 집안이 잇따라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들였으니, 내 아들 내양(來陽)은 돈시의 사위가 되었고 돈시의 손자 상주는 내 사위가 되었다"고 했다.또 '망녀(亡女)의 묘지문'에는 "진사 이상주(李相冑)의 처(妻) 조씨(趙氏)는 전 예조 판서 익(翼)의 딸이요, 고려 개국 공신(開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휘(諱) 맹(孟)의 후예이다. 나의 5남 1녀 중에서 이 딸이 또 가장 늦게 태어났으므로 우리 부처가 귀중하게 여긴 것이 매우 남달랐다.나이 16세에 이상주에게 출가하였는데, 상주는 증 영의정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휘 귀(貴)의 증손이요, 병조 판서 연양군(延陽君) 휘 시백(時白)의 손자요, 광주목사(光州牧使) 휘 각(恪)의 아들이다. 연평은 종사(宗社)에 큰 공훈을 세워서 귀한 신분이 되고 총애를 받은 것이 조정의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으며, 그 집안은 대대로 혁혁한 공적을 세운 성대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상주의 사람됨을 보면 온아(溫雅)하고 간결(簡潔)하였으며 문사(文思)가 또 영발(穎發)하였으니, 뭇 선비들 중에서 으뜸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 했다.
- 2023-08-09 | NO.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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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갱생 李更⽣ 인조 20년(1642) 10월 10일∼인조 23년(1645) 10월 18일
- 이갱생 李更⽣ 인조 20년(1642) 10월 10일∼인조 23년(1645) 10월 18일이갱생(1585∼1646)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숙향(叔向), 아버지는 승지에 추증된 이유(李綏)이다. 1623년에 김화현감, 1624년 소모관, 1631년 공조정랑, 1632년에 풍덕군수, 1635년 통훈대부 한성부 서윤, 1638년 청도군수, 1642년 인천도호부사, 1642년 9월 11일 나주목사를 제수받고 10월 10일 부임하였다. 백성을 잘 보살펴 1643년 9월 19일에는 반숙마(半熟⾺) 1필 하사받았다. 1645년 7월 11일 주리(州吏) 양한룡(梁漢⿓) 등이 목사 이갱생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나주의 칭호를 강등시켜 금성현(錦城縣)이라 하고, 전라도를 전남도(全南道)라 이름을 바꾸었다. 1645년 7월 19일 실록에 의하면 나주목사의 교체 논의가 있었으나 그대로 복무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가 10월 18일에 교체되었다. 『인조실록』에 이갱생 목사는 성품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으며, 총명하고 관찰력이 있어 본디부터 고을을잘 다스리기로 이름이 났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형벌을 함부로 가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리 양한룡 등이 임금에게 진상할 전죽(箭⽵)을 훔치다가 발각되어 다스리는 과정에서 양한룡의 족당(族黨) 10여 인이 양한룡을 감옥에서 탈출시키고, 칼을 가지고 아문(衙⾨)으로 들어가 목사를 찔러 상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목이 현이 되고 도명이 바뀌고 관찰사는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나주의 삼향죽전은 가장 유명한 토산이었다. 『금성읍지』에는 “임오(1642년) 10월 10일에 도임하여 을유(1645년) 8월 28일 오리(惡吏)로 되었기에 목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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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록 李慶祿 선조 24년(1591) 3월 20일∼선조 25년(1592) 7월
- 이경록 李慶祿 선조 24년(1591) 3월 20일∼선조 25년(1592) 7월이경록(1543∼1599)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백수(伯綏), 아버지는 회덕현감 이간(李幹)이다. 1576년(선조 9) 식년시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고, 이어 호조좌랑, 하동현감, 고성현령, 경흥부사로 발탁되었다. 1588년 1월 북병사 이일(李鎰)과 함께 여진족을 물리치고, 1589년 김해목사가 되었다. 1591년 2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 는데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야 한다는 사간원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대로 임명되었다. 1592년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 (⾦千鎰)을 도와 공을 세우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2년 7월 13일 제주목사로 전직되 었다가 1598년 춘위장으로 사직했다. 완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영의정으로 추증되 었다. 『금성읍지』에는 “신묘(1591년) 3월 20일에 도임하였으나, 임진(1592년) 8월에 당상관에 오르고 제주목사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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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계인(李繼仁)
- 이계인(李繼仁)용인(龍仁) 출신. 도학과 문장이 탁월하여 명류(名流) 가운데 그 이름이 뛰어났다. 을묘사화(乙卯士禍)에 그 장자 윤(允)이 조정암(趙靜菴)과 함께 화를 입자, 명류사회(名流社會)에 이름을 감추고자 광산군(光山郡) 서방면(瑞坊面) 오치(梧峙), 현 서산동(瑞山洞)에 터를 닦고 이주하여 후학에 도의(道義)를 가르치며 여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지
- 2018-07-06 | NO.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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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계종(李啓琮)
- 이계종(李啓琮, 1857~?)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명숙(明淑), 호는 삼산(三山) 이다. 광주 서방면 오치리에 살았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典賓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10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 2020-08-05 | NO.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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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교 李晈 세종 6년(1424) 10월 19일∼세종 7년(1425) 7월
- 이교 李晈 세종 6년(1424) 10월 19일∼세종 7년(1425) 7월이교(?∼1446)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이요정(⼆樂亭)이다. 아버지는 이성계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義安⼤君) 이화(李和, ?∼1408)으로 이교는 다섯 째 아들이다. 1388년에 음직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호군이 되고, 1409년에 원윤(元尹)에 임명되었다. 1412년에 좌군 동지총제, 1417년 동지돈녕부사, 1424년 중군총제를 역임하였다가 1424년 10월부터 1425년 7월까지 나주목사를 역임한다. 이후 우군총제, 동지돈녕, 동지총제, 지중추원사, 충청도도절제사, 지돈녕부사, 경상도도절제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일기』「계묘년 1423년」의 기록에 “신임 병마도절제사 이교가 1424년 10월 4일에 나주에 왔다가 1425년 7월에 서울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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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노영 李魯榮 헌종 8년(1842) 9월 24일∼헌종 9년(1843) 10월 20일
- 이노영 李魯榮 헌종 8년(1842) 9월 24일∼헌종 9년(1843) 10월 20일이노영(1781∼?)의 본관은 덕수(德⽔)이며, 자는 공무(公茂)이다. 아버지는 이정모(李正 模)로 1788년 4월부터 1789년 4월까지 나주목사로 재직했다. 1810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13년 부사직, 1817년 헌릉참봉, 1819년 내섬봉사, 1820년 금부도사, 1822년 사복주부, 1823년 신계현령·남평현감, 1826년 한산군수, 1830년 선혜청 낭청, 1832년 금산군수, 1841년 보은군수를 지냈다. 1842년 8월 9일 나주목사로 제수 되어 9월 24일 부임하였다. 1843년 6월에 조법(漕法)에 관한 일로 해임 논의가 있었고 윤7월에는 표류해 온 사람이 중도에서 도망하여 감일등 논의가 있었다. 10월 21일 에는 전라감사 서기순(徐箕淳)의 공문에 따라 이조에서 “나주목사 이노영이 상경한 지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임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데, 현재 환곡의 상환(償還)이 한창 진행되어 고을을 비우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니 재촉하여 내려보내라.”고 했으나 신병이 중해져 내려갈 수 없다하여 파출 전교가 내린다. 1847년 아산현감을 역임 하였고. 1860년에 통정대부가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임인(1842년) 9월 24일에 부임하였고 계묘(1843년) 10월 20일에 상경하여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