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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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이승 柳以升 숙종 12년(1686) 8월 9일∼숙종 13년(1687) 6월 7일
- 유이승 柳以升 숙종 12년(1686) 8월 9일∼숙종 13년(1687) 6월 7일유이승(1638∼1692)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중진(仲進), 호는 동호(東湖)이다.아 버지는 평양부윤 유심(柳淰)이다. 1657년에 진사가 된 뒤 1673년 금부도사·예빈별제·호 조좌랑, 1674년 호조정랑·낭청·공조정랑, 1675년 정선군수, 1676년 풍덕부사, 1678년 해주목사, 1680년 청주목사, 1682년 해주목사, 1684년 부사과, 1685년 사옹첨정, 1686년 6월 14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8월 9일 도임하였다. 1689년 서흥부사·상주목사, 1690년 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인(1686년) 8월 9일 도임하 였고 정묘(1687년) 6월 7일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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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 柳綎 영조 13년(1737) 11월 22일∼영조 15년(1739) 5월
- 유정 柳綎 영조 13년(1737) 11월 22일∼영조 15년(1739) 5월유정(1684∼1752)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여신(汝信)이다. 170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0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710년 사변가주서, 1711년 부사정, 1713년 사록, 1714년 승문원 저작, 1717년 옥구현감, 1727년 병조참지, 1728년 병조참의·동부승지, 1729년 충원현감, 1736년 승지, 1737년 좌승지를 지냈다. 1737년 10월 27일 금성현감에 제수되어, 11월 9일 하직하고 11월 22일 부임하게 되었다. 1738년 1월 11일에 금성현이 나주목으로 환원되고, 1월 12일 전광도(全光道)가 다시 전라도(全羅道)가 되었다. 1739년 2월 가선대부에 가자되었고, 5월에 한성우윤, 1740 년 동의금, 1741년 강릉부사, 1743년 부총관, 1744년 남양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 읍지』에는 “정사(1737년) 11월 22일 도임하였고 기미(1739년) 5월에 한성우윤으로 옮겨 간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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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근(柳晉根)
- 유진근(柳晉根, 1853~?)의 본관은 서산이며 자는 중진(仲進)이며 호는 나재(懶齋)이다. 광주 동각에 살았다.부 : 柳是漢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1929년 羅燾圭 문인들의 昭義契案에 참여했다.
- 2020-08-05 | NO.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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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철 兪㯙 현종 원년(1659) 9월 22일∼현종 원년(1659) 11월 19일
- 유철 兪㯙 현종 원년(1659) 9월 22일∼현종 원년(1659) 11월 19일현감 유철(1606∼1671)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방숙(⽅叔), 호는 취옹(醉翁)이 다. 아버지는 예조참의 유성증(兪省曾)이며, 어머니는 구준(具濬)의 딸이다. 1627년 생원 시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1년 성균관 장의, 1634 년 가주서, 1636년 통선랑 행승정원 주서 겸 춘추관참찬관·설서(說書), 1637년 부수찬· 부교리, 1638년 교리, 1639년 이조정랑, 1640년 응교, 1641년 우부승지, 1644년 승지, 1645년 경상도관찰사, 1646년 승지, 1647년 대사간, 1647년 경기도관찰사, 1648 년 대사간, 1652년 예조참판, 1655년 형조참판, 1656년 대사간, 1659년 7월 11일 금성현감을 제수 받아 9월 22일 도임한다. 1660년 경기도관찰사, 1661년 대사헌, 1662 년 병조참판, 1663년 좌윤·대사헌, 1664년 병조참판, 1667년 개성유수, 1669년 병조 참판·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는 『취옹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기해(1659년) 9월 22일 도임하였는데 동년 11월 19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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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평(柳玶 : 1577~1645)
- 지난해도 봄바람 삼월 봄일 때 /한번 둘러 서로 봐 말로는 그려 이제처럼 또 바래 남쪽은 멀어 /예대로 수양버들 푸릇푸릇 나 去歲春風三月時 一回相見語相思 如今又向南天遠 依舊垂楊사명대사(四溟大師)가 송암(松庵) 유평(柳玶)과 헤어지며 이 시를 읊었다.유평(柳玶)은 1577년 설강 유사의 여섯째 아들인 아버지 유경진과 금호 임형수의 딸 평택임씨 사이에서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창교에서 태어났다.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서산인(瑞山人)으로 을사명신(乙巳名臣)인 광주 호가정 주인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손자이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체구가 건장하였으며, 용력이 남달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이름이 나란히 하였다.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거인장덕(鋸人長德)이라며 칭하였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는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난하여 3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선생이 일찍이 효우(孝友)가 독실하다고 허여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1624년(인조 2)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광해군 때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채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이때 그의 스승 김장생은 이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면서 ‘그대의 높은 의기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이때 조선 중기 유학자요 같이 김장생에게 동문수학했으며 의병을 일으키며 유유상종했던 영광출신 성재(省齋) 신응순(辛應純 1572 선조 5∼1636 인조 14)에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긴다.인간세상 허망한 것 멋대로 되라지!/툭 트인 회포는 구주(九州 중국 땅)가 좁다.초당(草堂)이 높이 누워 이따금 잠을 깨고/양보음(梁甫吟) 읊조리니 귀밑에 가을이 왔구나.천문(天門)에서 사책(射策 과거시험)하는데 나는 뜻이 없고 /종사(宗社)사 넘어짐을 그 누가 붙잡을꼬?자유롭고 노는 것이 일월(日月 생명)을 늦추는 것/나라의 안위(安危)는 대신(大臣)들의 근심거리라네여기서 양보음(梁甫吟)은 제갈량(諸葛亮)이 남양 융중(南陽隆中)에 은거할 때 부르던 노래 이름으로 제(齊)의 태산(太山) 기슭에 있는 양보산(梁甫山) 지방을 노래한 것이다. 어진 사람이 세상에서 박해받음을 탄식하고 제의 안평중(晏平仲)이 모략으로 세 선비를 죽인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고사다. 두보(杜甫)는 등루(登樓)라는 시에서 "가련타, 후주도 사당에 모셔졌구나. 해 저무는 날 애오라지 양보음을 읊조리네.可憐後主還祀廟 日暮聊爲梁父吟"하며 읊었다.이후 인조반정을 일으킨 뒤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 1587~1624)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곡(義穀)을 끌어 모았다. 정묘년의 난리 때 선생이 공을 뽑아 양향유사(糧餉有司)로 삼자, 그는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달려와서 동궁을 호위하는 등 공을 세웠다.그는 슬하에 유창익(柳昌翊), 유명익(柳明翊), 유소익(柳昭翊), 유형익(柳亨翊) 4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가훈으로 이렇게 훈계했다.구세(九世)를 집에서 같이 살았던 장공예(張公藝)는 바로 나의 스승이다.다만 서로가 화목하게 지내야지 어째서 의(意) 상하고 살아야 하나.일을 당하면 인(仁)자를 생각하고 심점을 논할 때는 사(私)를 먼저 끊으라시를 쓰는 것이 진실로 뜻이 있으니 그 누가가 나의 슬픔을 알리요.시에서 장공예(張公藝)는 당(唐) 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9세(世)의 친족을 한집안에서 거느리며 생활하였다. 이에 당 황제 고종(高宗)이 직접 그 집을 방문하여 그 비결을 물었는데, 그가 지필(紙筆)을 청한 뒤 단지 참을 인(忍) 자만 백여 차례 쓰자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비단을 하사하였다 한다. 舊唐書 卷188. 그 뜻은 백 번 참는 것이 한집에서 대가족이 다투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것이다.병자호란이라는 난리를 맞는다. 전남지역에서 옥과현감 이흥순(李興淳)과 대동찰방 이기순(李起淳) 형제는 순창현감 최온(崔殡)· 전한림(前翰林) 양만용(梁漫容)· 전 찰방 유즙(柳楫) 등과 더불어 '거의격문(擧義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 여산(礪山)에서 집결하여 국란을 구제할 것을 외쳤다. 유평(柳坪)은 두 아들 유명익(柳明翊), 유세익(柳世翊)을 거느리고 탁양루(拆楊樓)에서 의병을 거의한다. 당시의 관군들의 한심한 꼴을 고발하는 시를 이렇게 남긴다.난리의 소식이 진실을 알기 어려워/몇 사람 의를 위해 생명을 버렸던가.무너진 관군들 앞 다투어 병갑을 버리고/지모있다는 장수들 목숨보전 급급했다.亂離消息若難眞 仗義忘生問幾人 遺散官軍爭棄甲 智謀諸將競全身남한산 바라보면 창자가 찢어진 듯/북진을 위한 심정 수건에 눈물 젖는다.일편의 외로운 성일발 마냥 위태로우니/진평같은 비계를 뉘라서 써보리오望南漢日膓如裂 拱北辰時淚滿巾 一片孤城危一髮 陣平秘計竟誰陣 여기서 진평(陳平: B.C. ? ~ 179)은 전한(前漢)의 건국 공신이며 정치가로 유방 고조가 흉노에 포위되었을 때 벗어나게 했던 인물이다. 유평은 나주의 김선(金璇)·나해봉(羅海鳳) 등과 더불어 1월 20일 여산에서 모였으며 당시 대사간(大司諫) 으로 있던 정홍명(鄭弘溟)이 소모사(召募使)로 공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홍명을 대장으로 삼고 칼을 들고서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청주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서 되돌아갔다. 이때 유즙(柳楫)에게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읊는다.서울의 소식은 멀어서 알 수 없으나 /산상의 외로운 성이 포위 속에 있다고 쇄하고 병든몸이 말을 만지며 슬퍼하노니/ 그 누가 이 시대를 구제하는 공을 세울꼬 그러고는 마침내 세상일을 사절한 채 산자락에 집을 짓고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崇禎日月)’이라는 8자를 써 붙여서 충분(忠憤)의 뜻을 붙였다. 익산군수를 제수받기도 했는데, 제봉 고경명이 죽자(1592), 이듬해에는 권율의 막하로 가서 행주싸움에 참여했던 사람 탄음(灘陰) 고부민(高傅敏, 1577-1642)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했다. 그가 보내온 시는덧없는 인생 뒤숭숭하고 갈림길도 많아 / 우리의 만남 헤아려 보면 지금으로 몇번인가?서로의 입장과 심정 멀지 않음을 아는데 /소식 한자 받기가 어찌 수후의 구슬, 화씨(천하의 보배)의 구슬 얻기처럼 어려운가? 浮生擾擾路岐多 屈指交遊今幾何 兩地心情知不隔 書來奚 得隋和조정에서 천거하여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림(士林)들은 대명처사(大明處士)라고 불렀으며, 경렬사(景烈祠)에 향사되었다. 그는 어느날 넋두리 하며 읊은 시로 마무리한다.이(利)의 이름 돌아오면 세상이 내게 오고/공업(功業)이 이룩되면 유명(有名)하고 능(能)하다고 하니공(功)과 이(利)가 다투느라 끊날 날이 없이/세상의 사람들은 자기만 잘나려 하는구나.利名來處世歸我功業成時莫顯能爭功爭利無時己人世人皆好己勝그는 어느날 광주읍성에 절양루에 올랐다. 공북루(拱北樓)의 옛 이름이다. 1669년 부임한 목사 오두인(吳斗寅)이 절양루를 공북으로 고쳤으며, 1875년 목사 신석유(申錫游)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절양(折楊)’은 버드나무를 꺾는다는 뜻으로 이별을 의미하는데, 주로 관리들이 이임하며 이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유평은 ‘병자(1636)년에 의청을 광주의 절양루에 설치했다(丙子說募義廳于 光州折楊樓)’는 통문(通文)을 여러 고을에 보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병사와 양식을 모아 함께 국난을 이겨내자고 독촉한 글이다. 아! 우리 유림으로 뜻을 가다듬고 학문을 한 사람치고 그 누가 부모님께 효하고 임금께 충하는 의(義)를 강습하지 않을 분이 있겠는가? 어버이께 효하면서 임금께 불충한 사람은 없고 임금께 충하면서 어버이께 불효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문(門)에서 구한다는 것이니 어버이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人子)의 도리요,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신하(臣子)의 직분입니다. 이것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통의(通義)인데 이제 우리 군부(君父)께서 포위의 속에 계시니 신하(臣子)로서 통분을 어떻다고 하리요. 하물며 이 교서(敎書)가 포위(包圍) 속에서 나왔는데 모두가 애통하신 말씀이어서 받들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목이 메어 통곡을 하게 합니다. 즉시 통문을 돌리노니 원컨대 열읍(列邑)의 모든 군자(君子)들은 행여 지체하거나 관망하지 말고 각기 분발하여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동지들을 규합하여 병량(兵粮)을 도와주어 군부(君父)의 급함을 구함이 어떠합니까? 이는 다만 국가를 저버리지 않는 대의일 뿐 아니라 장부가 공명을 세울 수도 있는 기회입니다. 통문이 도달하면 시각을 지체하지 말고 경내에 돌리고 알려서 힘을 합하고 서로 붙잡아 같이 국난을 건지도록 부디 바라는 바입니다.
- 2018-10-16 | NO.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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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 柳漢 세종 20년(1438) 4월 1일∼세종 22년(1440) 11월 23일
- 유한 柳漢 세종 20년(1438) 4월 1일∼세종 22년(1440) 11월 23일유한(?∼1448)의 본관은 서산(瑞⼭)이며, 1389년(창왕 1)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하였다. 아버지는 관찰사 유후(柳厚)이고 유기(柳沂)가 형이다. 형 유기가 1409년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관련되어 유배를 당하였고, 이듬해인 1410년에 해남에서 사사되었다. 그렇게 되자 1415년에 대호군이던 아우 유한(柳漢)을 파직시킨다. 이후 1426년 7월에 판옥구현사(判沃溝縣事)가 되었고 이어서 중군 동지총제, 정조사, 1432년에는 전라도도절 제사에 부임한다. 그 이후로도 중추원부사, 상호군, 우사간, 전라도처치사, 동지중추원 사, 첨지중추원사 등을 거친 후 1438년 3월에 판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재직하다가 1440년 11월에 인수부윤으로 자리를 옮긴다. 『금성일기』 「무오년 1438년」에 “판목사 가정대부 유한이 4월 1일 도임하였다.”라고 기록되었으며, 경신(1440년) 기록에는 “판 목사 가정대부 유한이 인수부윤으로 체환되어 11월 23일 상경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오(1438년) 4월 1일 도임, 인수부윤과 교체되어 경신(1440년) 11 월 23일에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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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갈 兪漢葛 정조 10년(1786) 2월 30일∼정조 10년(1786) 2월
- 유한갈 兪漢葛 정조 10년(1786) 2월 30일∼정조 10년(1786) 2월유한갈(1722∼1795)의 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자는 여수(汝⽔), 호는 소요헌(逍遙軒)이 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충주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지낸 유언탁(兪彦鐸)이고 성균진사 유언전(兪彦銓)에게 입적되었다. 1747년(영조 23)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으며, 1756년 선릉참봉, 1757년 종묘 부봉사, 1758년 상서 부직장, 1759년 공조좌랑·용인현령, 1762년 대흥군수, 1757년 사복주부, 1768년 남원부사, 1771년 돈녕부 판관, 1772년 균역청 낭청, 1777년 제천현감, 1780년 사복판관, 1780년 무주부사, 1783년 평양서 윤을 역임하였다. 1786년 2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1786년 3월 6일 부임을 지체한 일로 전라감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 이후에도 1787년 부사과, 1794 년 첨지·오위장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병오(1786년) 2월 30일 도임하였으나 같은 해 3월에 부임을 지체한 일로 순영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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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봉 박우(1476~1547)
- 박우朴祐(1476~1547)의 본관은 충주. 자는 창방昌邦, 호는 육봉六峰. 박광리朴光理의 중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며, 어머니는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광주 출신으로 1476(성종7년)년 광주시 서구 절골, 불암마을에서 태어났다. 형은 하촌 박정, 눌재 박상이며 아들은 선조시절에 정승을 14년이나 지낸 사암 박순(1523-1589)이다.박우는 젊어서 아버지를 여의고 큰형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개성유수 등을 하였다.1507년에 진사, 3년 후인 150년(중종5) 식년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등용되어 곧 전적(典籍)이 되었다. 그 해 흥덕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으로 복직하고 이어서 호조정랑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경연에서 고금 제왕들의 치란흥망(治亂興亡 선정과 악정 및 부흥과 망함)에 관한 이유를 설파하니 모두 감탄하였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임했다가 다시 공조정랑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병조정랑ㆍ장령ㆍ집의ㆍ성균관사예ㆍ성균관사성ㆍ세자시강원필선ㆍ직제학ㆍ좌승지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스스로 검약을 지켜 지방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또한 박우는 1538년에 장성의 '삼마태수라'는 별칭을 얻은 청백리 지지당 송흠(1459-1547)이 말년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 관수정에도 들려 시를 남겼다.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바른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원해 남원부사가 되었다. 그 때 권세가 허확(許確)이 전주부윤으로 내려왔으나 찾아가 인사하지 않았다. 허확과 그의 아들 허항(許沆) 등이 몇 번 초청하므로 마지못해 잠시 찾아보고 곧 돌아와 버렸다. 병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나주 옛집으로 내려가서 2년을 지냈다. 다시 도승지로 있을 때 탄핵을 받고 공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파면되었으며 다시 해주목사, 대사성을 거쳐 병조, 이조 참의, 한성부 우윤, 개성부 유수 등을 지냈다. 인종 때는 한성부 좌윤 겸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을 감수하였다. 성품이 곧아 윗사람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당시 세도가인 김안로나 허확의 부자들로부터 심한 박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 2020-04-28 | NO.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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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격 尹檄 현종 4년(1663) 5월 25일∼현종 4년(1663) 9월 9일
- 윤격 尹檄 현종 4년(1663) 5월 25일∼현종 4년(1663) 9월 9일현감 윤격(1596∼?)의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자는 경빈(景賓)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禦侮將軍) 윤형언(尹衡彦)이다. 162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는데, 관직은 1638년 내시교관(內侍敎官)부터 시작하였다. 1642년 강원도 평릉찰방, 1643년 감찰, 1652년 호조좌랑, 1654년 영천군수, 1655년 인천부사를 역임하였다. 1659년 서산군수로 부임하다가, 1663년 5월 25일 금성현감으로 부임을 한다. 그러나 서산군수로 있을 때의 부정과 나이가 들어 능력이 없다는 대사간의 청원에 1663년 8월 23일 금성현감에서 파직을 당한다. 그러나 그 뒤로도 1664년 오위장·부평부사·원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금성읍지』에는 “서산군수에 이동하여 계묘(1663년) 5월 25일 도임하였고 동년 9월 9 일에 체직되었다.”라 기록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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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
- 윤경(尹?), 湖節4下-131-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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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면교 尹勉敎 영조 19년(1743) 8월 22일∼영조 21년(1745) 4월
- 윤면교 尹勉敎 영조 19년(1743) 8월 22일∼영조 21년(1745) 4월윤면교(1691∼1766)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자강(⼦强)이다. 아버지는 호조정랑 증이조참판 윤부(尹扶)이다. 경은부원근(慶恩府院君) 김주신(⾦柱⾂)의 사위이며, 윤면 교의 처는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아우이다. 1721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27년 서부참봉, 1729년 내시교관, 1732년 호조좌랑·문경현감, 1733년 대구판관, 1736년 호조정랑, 1740년 삭녕군수, 1743년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743년 8월 28일 나주 목사로 제수되어 11월 2일 하직하고 바로 부임한다. 1745년(영조 21) 3월 7일 『승정 원일기』에 하리들이 포흠(逋⽋)한 것을 적발해 다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있다. 1746년 호조정랑, 1747년 평양서윤, 1750년 청주목사, 1751년 대흥군수, 1755년 청주목사, 1757년 도정, 1760년 형조참의, 1762년 우윤을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계해(1743 년) 8월 22일 도임하였고 을축(1746년) 4월에 체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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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익 尹相翊 고종 28년(1891) 12월 29일∼고종 30년(1893) 8월 21일
- 윤상익 尹相翊 고종 28년(1891) 12월 29일∼고종 30년(1893) 8월 21일윤상익(1847∼?)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은필(殷弼)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윤자승(尹滋承)이며, 어머니는 나주임씨 임기수(林驥洙)의 딸이다. 1877년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시작으로 1880년 설서, 1881년 기사관·검열·부수찬, 1883년 동학교수, 1884년 교리·사서, 1885년 동부승지, 1886년 우부승지, 1889년 좌부승지를 지냈다. 1891년 11월 1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2월 29일 부임하였다. 1894년 1월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묘(1891년) 11월 13일 제수되어 12월 29일 부임하여 재직하다가 계사(1893)년 8월 21일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고 기록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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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수익 尹守翼 정조 24년(1800) 윤4월 11일∼정조 24년(1800) 7월 26일
- 윤수익 尹守翼 정조 24년(1800) 윤4월 11일∼정조 24년(1800) 7월 26일윤수익(?∼1800)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버지는 목사를 지낸 윤면원(尹勉遠)이고 숙부 승지 윤면헌(尹勉憲)에게 입양되었다. 음관으로 1783년 현릉참봉, 1784년 사옹주 부, 1785년 감찰·사직령, 1788년 순창군수, 1791년 한성주부, 1792년 현륭원령·홍산 현감, 1793년 의성현령·안주목사를 지냈다. 1795년 8월 11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으나 병이 중하여 8월 21일 체차, “나주목사의 후임은 특례로 각별히 가려 차임하여 하비를 기다려 즉시 내려보내라.”하였다. 1797년 시흥현령을 거쳐 1800년 4월 25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30일 하직하고 도임하였다. 1800년 7월 24일 나주목사 윤수 익을 가까운 곳의 수령과 바꾸라는 대왕대비전의 전지가 있었고 7월 26일 청주목사 서교수(徐敎修)와 서로 바꾸었다. 1802년 장원별제, 1804년 장악원정, 1806년 청도군 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800년) 윤4월 11일에 도임하였고 동년 7월 26일 청주목사와 교대하면서 이임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청주목사로 간 윤수익은 병이 심하여 1800년 12월 22일 별세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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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우신 尹⼜新 선조 21년(1588) 4월 23일∼선조 22년(1589) 7월 28일
- 윤우신 尹⼜新 선조 21년(1588) 4월 23일∼선조 22년(1589) 7월 28일윤우신(1534∼1594)의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자는 선수(善修)이다. 할아버지는 목사 윤시영(尹時英)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윤징(尹澄)이다. 1561년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하였다. 아들 윤섬(尹暹)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1573 년 안악군수, 함흥판관이 되었다. 1581년 창원부사로 있다가 옥사를 늦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2년 7월부터 1583년 6월까지 인천도호부 부사로 재직하였고, 지중추 부사를 지냈다. 1587년 영위사(迎慰使), 안주목사에 제수되었다가 파직되고, 재직 중병사한 임윤신을 대신하여 1588년 4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서용하지 않는 준기 불서(準期不敍)로 있었으나 특별히 서용하여 차송(差送)하였다. 1589년 7월 28일 허술하게 근무한다는 이유로 교체되었다. 1590년 전주부윤이 되었 다. 3)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지중추부사로 급고사(急告使)가 되었으며, 같은 해 호조 참판이 되었다. 이 후 동지의금부사가 되었으며 정헌대부에 가자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무자(1588년) 1월 17일에 도임하였으나, 체직된 일자는 기록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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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익 尹以益 숙종 2년(1676) 10월 3일∼숙종 3년(1677) 2월 15일
- 윤이익 尹以益 숙종 2년(1676) 10월 3일∼숙종 3년(1677) 2월 15일윤이익(1616∼?)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자는 수지(受之)이다. 아버지는 윤세징(尹世徵), 동생 윤이제(尹以濟)는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판서를 지냈다. 1642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였다. 1648년 의금부도사·사포별제, 1655년 감찰·형조좌랑, 1656년 태인현 감, 1662년 영평현감, 1665년 인의 겸 참군·형조좌랑, 1667년 개천군수, 1672년 의금부도사, 1673년 금산군수, 1675년 밀양부사를 거쳐 1675년 10월 3일 도임하였는 데, 1677년 2월 증광 회시(會試)에서 윤이익의 수종(隨從)인 최해원이 초시를 보지 않았음에도 시권도 없이 과거를 보는 일이 발각되어 파직당하였다. 당시 시권이 없는 사람이 12인이었다. 『금성읍지』에는 “밀양부사에서 이동하여 병진(1676년) 10월 25일 도임하였다. 증광 회시를 보려고 상경하였으나 과장에 시종을 데리고 들어간 일로 정사(1677년) 2월 15일 의금부에 하옥되고 체직 당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