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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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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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산축(1571~1597)
    양산축梁山軸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유석維石이다. 1571년 박뫼마을에서 송천 양응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예의범절이 어른들과 다름없었으며 두 형 양산룡梁山龍과 양산숙梁山璹을 본받아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외우고 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아버지 유언에 따라 일찍이 율곡 이이를 찾아가 대학을 배우고 1년 후 돌아왔다. 성인이 되어 제봉 고경명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룡, 산숙 두 형과 창의하였고 정유재란 당시 가족들과 함께 무안 삼향포로 피난 중 적병을 만나 함께 투신하여 순절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27세였다.양산축의 부인 장흥고씨는 고경명 의병장의 손녀이다. 전 가족이 순절하던 날 고씨는 양산축의 뒤를 따라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두 여종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뱃 속의 아이 만용을 낳아 후손을 잇게 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삼강문은 충민공 양산숙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 동네에 세워주는 문을 뜻한다. 양씨삼강문은 정면 5칸·측면 1칸짜리 맞배지붕의 평범한 건물이다.
    2020-05-11 | NO.255
  • 엄덕록
    엄덕록(嚴德祿), 湖節3下-178-1,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254
  • 엄순
    엄순(嚴純), 湖節5中-135-3, 光州, 戊申, 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253
  • 여의손 呂義孫 태조 6년(1397) 3월 26일∼태조 7년(1398) 3월 20일
    여의손 呂義孫 태조 6년(1397) 3월 26일∼태조 7년(1398) 3월 20일여의손(?∼?)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393년 제주 첫 목사가 되어 1395년까지 제주 만호를 겸임하고 제주향교를 설립하였다. 1396년 제주목사 재임 시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을 조성할 때 당대의 석공을 동원하여 석물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표창을 받은 뒤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404년 10월 25일 보빙사 (報聘使)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업무를 소홀히 한 죄로 진도로 유배되었다. 『금성일 기』 「정축년 1397년」에 “목사 여의손이 3월 26일 도임하였다가 6월 2일 임금의 명에 의해 목포진첨절제사 겸임하였다가 1398년 3월 20일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 “정축(1397년) 3월 26일 도임, 무인(1398년) 10월 20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52
  • 오달선 吳達善 고종 15년(1878) 4월 22일∼고종 18년(1881) 6월 20일
    오달선 吳達善 고종 15년(1878) 4월 22일∼고종 18년(1881) 6월 20일오달선(1811∼1892)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행(汝⾏), 오최선(吳最善)으로 개명하 였다.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오치수(吳致壽)로 오치준(吳致俊)에게 입양되었다. 아들 오익 영(吳益泳)은 문과 급제 후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850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856년 동부도사, 1857년 사옹봉사, 1860년 상의별제·공조좌랑, 1861년 공조정 랑·종묘서령, 1863년 낭청, 1864년 안의현감, 1866년 천안군수, 1868년 보성군수, 1871년 장흥부사, 1874년 충주목사, 1875년 남원부사, 1877년 홍주목사를 지냈다. 1878년 2월 28월 전임 나주목사 김선근과 바꿔 제수되어 4월 2일 부임하였다. 5월 3일에는 청주에서의 일로 죄진 채 나무목사 일을 본다. 1879년 6월 11일에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나주목의 유망(流亡) 세미(稅⽶) 6182석에 대하여 전라감사 심이택이 보고 자하자 세미는 절반에 한하여 상정(詳定) 하여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고, 반드시 당년 안에 수량대로 납부하도록 한다. 1882년 6월 공조참판, 호군, 동의금, 1883년 동지중 추부사, 1890년 행호군, 1892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878년) 2월 28일에 홍주목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4월 22일 부임하였고 신사(1881년) 6월 20일에 경주부윤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서는 1880년 8월 임기 만료가 가까워지자 전라감사 심이택(沈履澤)이 장계를 올려 오 목사의 임기를 연장시켜 달라고 이조에 청한 결과 “오달선을 한 임기 동안 연장하라”는 인사가 있어서 결국 1년 더 재직하여 1881년 6월 20일까지 2년 4개월 동안 나주목사 직을 수행하였다. 1881년 6월 경주부윤에 부임하자 10월에 자기 이름이 역적의 이름과 같다 하여 ‘最 善’으로 바꾸었다. ‘㝡善’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251
  • 오빈(吳賓)
    오빈(吳賓)의 본관은 낙안이며 자는 관국(觀國)이다.1543년(중종38) 식년시 생원 3등 66위로 입격하였다.권지성균관을 지냈다.
    2024-11-18 | NO.250
  • 오상 吳祥 명종 3년(1548) 7월 25일∼명종 7년(1552) 11월 상경
    오상 吳祥 명종 3년(1548) 7월 25일∼명종 7년(1552) 11월 상경오상(1512∼1573)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상지(祥之), 호는 부훤당(負暄堂)이다. 아버지는 예조좌랑 오예손(吳禮孫)이다. 1531년 진사시 합격, 153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가독서를 하였다. 1540년 사간원 정언, 1541년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1542년 홍문관 수찬, 1543년 홍문관 부교리, 1544년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강원도 재상어사, 1547년 사간원 사간, 1548년 7월 25일 나주목사가 되어 8월 16일 배사할 때 “근래에 백성들이 곤궁한 것을 깊이 유념하여 환자[糴]를 받아들일 때 가혹 하게 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 구휼하는 마음으로 하여 민폐를 모두 없애도록 하라.”는 전교를 받았다. 1552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1555년 시독관,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1557년 강원도관찰사, 1558년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1559년 승정원 좌부승지, 가선대부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 1560년 병조참판, 1562년 예문관 제학, 1563년 병조참판, 경상도관찰사, 1564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1567년 예조참판, 1571년 호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문집으로 『부훤 당유고』 1책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신(1548년) 9월에 도임하였고, 임자(1552년) 1월에 홍문관 수찬으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대사헌에 제수되었을 때 사관이 『명종실록』에 기록하길, “오상이 재주가 있었는데, 왕이 그의 사조(詞藻)를 좋아하여 더욱 두텁게 사랑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선조실록』 그의 졸기에는, “유희춘(柳希 春)의 일기(⽇記)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사람은 안정(安靜)하고 자상하며 사장(詞章)에도 능한 선량한 사람이다. 조정(朝廷)이 좋은 선비를 잇달아 잃으니 누가 한탄하지 않겠는가.’”라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49
  • 오자치 (吳自治)
    본관은 나주이며 금성군 오신중(錦城君 吳愼中)의 아들로 태어났다.조선 전기의 무신 오자치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무예를 닦으며 자라면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고 병서를 두루 읽으며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후 무과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오자치는 주부벼슬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부장 조석문과 더불어 3개월에 걸친 토벌전 끝에 이시애, 이시합의 형제를 평정하여 왕이 훈장을 내렸다. 1476년(성종 7) 9월 부친의 봉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현재 그의 영정인 ‘오자치 영정(吳自治影幀)’이 남아 있는데 조선 초기 화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초상화로 보물 1190호로 지정되었다. 또 광산구 지평리에는 오자치가 자신의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자연석을 깨뜨려 만들었다는 ‘오자치 용마’가 있다. 오자치의 용마바위에 관한 전설은 오자치의 강인함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인 오자치 장군은 민가에 피해를 주던 야생마를 단숨에 잡아 길들이고 말과 함께 무예를 닦던 중 하루는 ‘말이 화살보다 느릴 경우 목을 베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복룡산을 향해 화살을 쏜 오자치는 말을 타고 달려 산위에 도착해 화살을 찾아보았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의 목을 벴다. 그 순간 화살이 뒤에 날아와 꽂혔고 오자치 장군은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치며 그곳에 놓인 자연석을 이용해 비석을 세운 뒤 죽은 말을 달랬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바위를 부숴 도로공사에 사용하려고 했다가 돌을 떨어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일이 있었다는 등 이 용마바위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신령함이 깃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그의 묘와 영당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용진산 아래 원당마을 원당영각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자치 장군의 재실인 시기재와 근처엔 재현된 용마바위가 놓여있다.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 일이 생기면 꽃을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2020-03-02 | NO.248
  • 오재문 吳在⽂ 정조 9년(1785) 1월 22일∼정조 10년(1786) 2월 13일
    오재문 吳在⽂ 정조 9년(1785) 1월 22일∼정조 10년(1786) 2월 13일오재문(1743∼1800)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성장(聖章)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 중에 한 명인 오달제(吳達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 형조판서 오언유(吳彦儒)이다. 1762년(영조 38)에 도목정사(都⽬政事)에서 오달제의 후손이라 하여 음직으로 명릉랑(明陵郞)에 제수된 후에 1764년 전설별검, 1766년 금부도사, 1768년 한성판관, 1768년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개령현감으로 자리를 옮긴다. 1773년 한성서윤, 1776년 의성현령, 1779년 해주판관, 1782년 옥천군수, 1783년에 울산부사를 역임한다. 1784년 12월 19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나주는 호남의 큰고을으로서 물산이 많고 땅이 커서 평소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지므로 가려 차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의를 하여 제수된다. 1786년(정조 10) 2월 13일 의금부의 계에 따라 잡혀 가는데, “표류해 온 사람을 접대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매우 중요한데, 해당 고을에서 쫓아 보내는 일” 때문이었다. 1787년 풍기군수, 1789년 부사과, 1792년 예빈주부를 거쳐 1800년에 사망하였다. 1854년 증직으로 이조참의에 올랐다. 『금성읍 지』에는 “갑진(1784년) 12월 18일 울산부사에서 나주로 제수되어 을사(1785년) 1월 22일에 도임하였고, 병오(1786년) 2월 13일에 표류인을 문정하는 일을 지체하였기 수영(⽔營)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247
  • 오준 吳竣 인조 14년(1636) 5월 4일∼*인조 15년(1637) 8월
    오준 吳竣 인조 14년(1636) 5월 4일∼*인조 15년(1637) 8월오준(1587∼1666)의 본관은 동복(同福)이며,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南)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오백령(吳百齡)이다. 동생 오단(吳端)은 1636년(인조 14)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8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1624년 지평, 장령, 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 3월 9일 가의대부 행 나주 목사에 임명되어 5월 도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체부 종사관 김광혁을 인견할 때 동부승지 한형길 등이 입시하여 변란 때의 전라도 정황에 대해 논의한 내용 가운데 “나주 고을은 지역도 크고 사람들도 거칠지만, 목사 오준이 상당히 잘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놀란 뒤부터 성 안이 모두 비고 태수만 남았는데, 밤마다 관아 안에 화살을 비 오듯이 쏘면서 옥문(獄⾨)을 부수고 중죄수(重罪囚)를 모두 빼냈습니다.”란 부분이 있다. 이로 보아 목사로써 선정을 베풀었음과 변란 때의 행적을 알 수 있다. 1639년 한성부 판윤,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 예조 판서, 형조판서·대사헌, 1660년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삼전도비,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 구례 화엄사의 벽암대사비, 칠장사의 벽응대사비 등의 비문이 전해 온다. 저서로 『죽남당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636년) 5월 4일 도임하였고 체직 일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 목사의 도임시기로 보아 1637년 8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246
  • 오한원 吳翰源 순조 10년(1810) 8월 29일∼순조 12년(1812) 5월 25일
    오한원 吳翰源 순조 10년(1810) 8월 29일∼순조 12년(1812) 5월 25일오한원(1750∼?)의 본관은 나주(羅州)로 담양 출신이다. 자는 공예(公藝)로 아버지는 사간원 헌납을 지낸 오현주(吳鉉冑)이고, 사간원 대사간 오정원(吳⿍源)이 형이 된다. 177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고, 1775년에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등용되었는데, 1775년 가주서, 1793년 사헌부 장령, 1796년 장악정, 1799년 정언·봉상시정, 1800년 헌납·부수찬, 1801년 부교리 겸 중학교수, 1805년 병조참지·승지, 1806년 동래부사, 1809년 부호군, 1809년 대사간, 1810년 우부승지를 지냈다. 1810년 8월 17일 나주목 사로 제수되었다. 12월 29일 『승정원일기』에 “나주목사의 상소에 정식(定式)에 어긋나고 오자(誤字)가 었으므로 도로 내려보내 다시 수정하여 올려보내야 하는데, 원래의 상소가 민사(民事)에 관계되므로 부득이 봉입(捧⼊)하더라도 해당 목사를 경책하지 않을 수 없어 추고”하는 내용이 있다. 상소 내용은 기근에 대한 것과 섬 지방의 결총에 대한 것이다. 1812년 6월에 의주부윤, 1815년 대사간·우윤, 1818년 동지사 부사, 1821년 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오(1810년) 8월 17일 승지에서 본직을 제수받고 당일 사조한 후 동월 29일에 도임하였고 임신(1812년) 5월 25일에 대동미를 실은 배가 파손 침몰된 일로 서울로 나포되어 체직되어 돌아갔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245
  • 우복룡 禹伏⿓ 선조 35년(1602) 10월 3일∼선조 38년(1605) 1월 4일
    우복룡 禹伏⿓ 선조 35년(1602) 10월 3일∼선조 38년(1605) 1월 4일우복룡(1547∼1613)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자는 현길(⾒吉), 호는 구암(懼庵) 또는 동계(東溪)이다. 아버지는 우숭선(禹崇善)이다.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곳에서 수령을 역임한 우경석(禹敬錫)이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1577년 이이(李珥)의 천거로 소문전 참봉이 되었고, 1582년 내섬시 직장과 김포현령을 역임하였다. 1585년 목천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에는 용궁현감으로서 끝까지 고을을 지킨 공이 인정되어 안동부사로 승진하였다. 1596 년 강화도호부사로 있을 때에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권세가의 횡포를 금단하니,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아 1599년 홍주목사로 전임되었다. 1602년 충청도관찰사를 임명하 였으나 사간원 등의 파직 상소가 이어지자 8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 고, 1604년에는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를 건립하였다.  1605년 1월 이임하여 충주목 사로 이동하였다. 1612년 성천부사에 부임했으나 사간원의 청원으로 교체되었다. 문집 으로 『구암집(懼庵集)』과 『동계잡록(東溪雜錄)』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임인(1602년) 10월 3일 도임하였고, 계묘(1603년) 4월 어사 목장흠이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고 관리 들이 청렴하며 군병의 훈련이 잘 되었다는 계를 올리자 향표리 1습을 내렸으며, 갑진 (1604년) 정월에는 본도 순시병련어사 윤훤(尹暄)이 백성 다스림이 도내 제일이라는 계에 따라 표리 1습을 받았으며, 같은 해(1604년) 10월에 본도 순찰사의 계에 따라 조련 숙마 4필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나주객관 금성관 안에 1605년에 세운 「목사우공복룡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244
  • 우하 禹夏 태조 1년(1392) 9월∼태조 1년(1392) 윤12월
    우하 禹夏 태조 1년(1392) 9월∼태조 1년(1392) 윤12월우하(?∼?)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1383년 6월, “왜구가 경상도 길안·안강·기계·영주 등을 노략질하였기에 전의령 우하(禹 夏)를 경상도에 파견하여 원수들이 왜구를 제대로 방어하는지 감찰하게 하였다.”는 기록과 1383년 7월, “우하(禹夏)가 여러 병마사를 독려하여 의성에서 왜구와 싸워 3급을 베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임신년 1392년」에 “목사 우하가 9월 10일 도임하였다가 윤12월에 돌아갔다.”는 기록과, 『금성읍지』에는 “임신(1392년) 9월 도임, 동년 윤12월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43
  • 우홍부 禹洪富 태종 3년(1403) 3월 6일∼태종 3년(1403) 7월 25일
    우홍부 禹洪富 태종 3년(1403) 3월 6일∼태종 3년(1403) 7월 25일우홍부(?∼1414)의 본관은 단양(丹陽)이며, 단양백 우현보(禹⽞寶)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입사하여, 1382년 장복서령으로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였다. 아버지와 형 우홍수 (禹洪壽), 동생 우홍강(禹洪康), 우홍득(禹洪得), 우홍명(禹洪命)도 모두 문과 급제자다.1392년 6월 전의감 부령으로 재직 중에 이성계 일파의 구신(舊⾂) 제거와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까지 갔으나, 1398년 윤5월에 직첩을 환급받았다. 1400년 11 월 개성유후사 부유후를 지내고 1412년 원종공신에 추록, 예안군(禮安君)에 봉해졌다.『금성일기』 「임오년 1402년」에 “목사 우홍부가 3월 6일 도임하였다가 동년 7월 25일 판내섬시사로 임명되어 갔다.”로 되어 있는데, 사섬시(司贍寺)와 내섬시(內贍寺)로 달리 표기되어 있다. 『금성읍지』에 “계미(1403년) 3월 6일 도임, 동년 7월 25일 판사섬시 사(判司贍寺事)로 승진 이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42
  • 원경하(元景夏)
    《영조실록》 영조 23년 정묘(1747) 10월 2일(기미)호남 양전사 원경하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상소하다호남 양전사 원경하(元景夏, 1698~1761)가 상소하였다. (원경하는 여주 출신으로 영조의 조력자이자 정조의 스승이다) 대략 이르기를,“신이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그윽이 우견(愚見)이 있어 감히 이를 덧붙여 진달합니다. 부안(扶安)의 격포(格浦)는 곧 삼남(三南) 해로의 인후이며 심도(沁都)를 막아 지키는 땅입니다. 옛날 인묘조(仁廟朝)에 검영(檢營)을 특별히 설치하고 또 행궁(行宮)을 세웠는데, 곡식을 쌓아 놓고 배를 감추어 두었으니, 이는 먼 훗날을 헤아린 깊은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설의 규모가 중간에 여러 번 바뀌어 검영을 이미 파하고 다만 별장(別將) 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신이 변산(邊山)에 들어와 바다를 따라 60리를 가면서 형세를 두루 살펴보았더니, 고군산(古群山)ㆍ위도(蝟島)가 아득한 대양(大洋)의 중간에 나란히 우뚝 솟아 있는데, 양도(兩島)에 대해 바람을 타고 돛을 달면 3, 4일 지나지 않아 배를 댈 수 있습니다. 연미(燕尾)의 아래 격포는 양도와 함께 서로 기각(掎角)이 되고, 산이 항구 깊숙이 둘러져 있어 거센 바람과 심한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조선(漕船)ㆍ상박(商舶)은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무서운 파도와 큰 물결에 의해 표탕(漂蕩)되어 가끔 침몰하기도 하는데, 얼마 전에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칠산(七山)의 위험을 지나서 격포에 정박하면 뱃사공들은 술을 부어 그 살아난 것을 서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격포를 떠나 칠산으로 향하면, 비록 장년 삼로(長年三老)라도 그 죽음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도ㆍ군산(群山)ㆍ금모포(黔毛浦) 등 4진이 수영(水營)에 이속(移屬)된 이후로 해마다 수군을 조련할 때 전함(戰艦)이 패몰(敗沒)하거나 방졸(防卒)이 익사하는 일을 더러 요행히 면하지 못합니다. 금년 가을에는 군산에서 조련하러 갔던 병졸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 40명이나 되어 과처(寡妻)ㆍ고아(孤兒)가 물가에서 슬피 울부짖었습니다.신은 비로소 4진은 평소 검영에 소속시켜야지 수영에 소속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심도(沁都)의 응원이 될 뿐만 아니라 또 4진에서 수영에 가려면 바람을 기다렸다가 험지를 건너야 하므로 자칫 열흘이나 보름을 넘기게 되니, 설령 뜻밖의 경보(警報)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기간 내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까? 미처 적을 방어하기도 전에 먼저 풍이(馮夷)ㆍ해약(海若)의 노여움을 만나게 될 것이니, 이 때문에 도신ㆍ어사가 전후의 소장에서 구제(舊制)를 회복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지금 4진을 검영에 다시 소속시키고, 경진년(庚辰年)의 유제(遺制)를 본받아 검영의 중군(中軍)에게 첨사를 겸임시켜 격포에 유진(留鎭)하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봄ㆍ가을에 순력(巡歷)하여 4진의 전함ㆍ방졸(防卒)을 기회(期會)하여 항구의 앞 바다에서 조련하게 하면, 칠산에서 패선되고 익사하는 위험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격포로 다시 해산(海山)의 관방(關防)을 삼으면, 훗날 국가가 위급할 때 반드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신이 개량(改量) 때문에 나주(羅州)ㆍ영암(靈巖) 간을 왕래할 때 작설(綽楔)이 정리(井里)에서 훤히 서로 바라보이므로, 말을 멈추고 물어 보았더니, 충신의 집이 아니면 효자의 집이었습니다. 그 후손을 방문했는데 지금은 모두 쇠퇴하여 서민(庶民)으로 변하였으며, 고가(故家)의 유풍(流風)ㆍ유운(遺韻)은 다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호남은 예로부터 화려한 지방으로 일컬어졌는데, 수십 년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으므로, 고기잡고 농사짓는 즐거움에 편안하지 못하고 헤어져 유랑하여 흩어졌으며, 옛날의 높고 큰 정자는 무너져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옛 사람들이, ‘원유(園囿)의 흥폐(興廢)로써 낙양(洛陽)의 성쇠(盛衰)를 안다.’고 하였는데, 신 역시 정자가 무너진 것을 보고 호남의 쓸쓸함을 슬퍼합니다.아! 기대승(奇大升)ㆍ김인후(金麟厚)의 깊은 학문과 고상한 식견, 김천일(金千鎰)ㆍ고경명(高敬命)의 순충(純忠)ㆍ대절(大節), 이후백(李後白)ㆍ박상(朴祥)의 문장과 아망(雅望) 정충신(鄭忠信)의 공적, 김덕령(金德齡)의 용기, 임형수(林亨秀)ㆍ임제(林悌)의 호기(豪氣)는 모두 호남 사람들이었는데, 인물의 성쇠가 고금(古今)이 같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배회하며 감개(感慨)하는 까닭이며, 성조(聖朝)를 위해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십실(十室)의 고을에는 반드시 충신(忠臣) 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일개 도(道)를 수방(搜訪)한다면 ‘인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간혹 문학(文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고, 간혹 행의(行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감히 그 사람의 성명을 우러러 아뢰겠습니다.이이정(李頤正)은 고 수찬 이상형(李尙馨)의 후손이고, 민사하(閔師夏)는 고 사인(舍人) 민덕봉(閔德鳳)의 후손이고, 임대(林薱)는 고 유수 임영(林泳)의 족자(族子)이고, 김회(金烠)는 고 참판 김상옥(金相玉)의 족자이고, 신사철(愼師喆)은 고 부학 신천익(愼天翊)의 후손이고, 최필흥(崔弼興)은 고 평사 최경창(崔慶昌)의 후손이고, 고석(高晳)은 고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고, 안황(安煌)은 고 참의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이고, 정민하(鄭敏河)는 고 상신 정철(鄭澈)의 후손입니다. 강진(康津)의 이의경(李毅敬), 영광(靈光)의 이중익(李重益), 무장(茂長)의 이만석(李萬錫), 장성(長城)의 유광현(柳光顯), 영암(靈巖)의 조석침(曹錫琛), 무안(務安)의 김경삼(金景森), 보성(寶城)의 김연년(金延年), 전주(全州)의 이익렬(李益烈)ㆍ정사협(鄭斯鋏)은 모두 글이나 읽고 뜻을 강논하며 곤궁한 것을 견디고 안정을 지키면서 혹은 백수(白首)에 이르도록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는 자도 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견발(甄拔)하여 그를 등용하면 혹 격려하고 권장하여 홍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신이 일신(一新)을 지나다가 그 이른바 충렬사(忠烈祠)라는 곳을 두루 방문했습니다. 이복남(李福男) 등 7인의 충신(忠臣)을 여기에서 제사하는 데 의사(義士) 임박(林樸)을 배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신을 향하여 크게 한숨쉬며 말하기를, ‘여러 공(公)들이 순국(殉國)한 절개는 진실로 모두 뛰어나지만, 의사의 죽음은 더욱 기이합니다. 정유년(丁酉年) 섬나라 오랑캐 적들이 쳐들어 와서 외딴 성(城)이 포위를 당하였습니다. 병사(兵使) 이공(李公)이 병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는데 의사가 개연(慨然)히 그를 따르며 말하기를, 「죽으면 같이 죽을 뿐이다.」라고 하고 적진으로 이격(移檄)하며 포위된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적의 무리들이 의롭게 여기고 진(陳)을 열었습니다. 병사와 의사가 갑옷을 입고 취라(吹囉)하며 말고삐를 끌어당겨 천천히 가니, 죽음을 마치 집으로 돌아 가는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성이 격파되니 양원(楊元)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성안의 사민(士民)은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으며, 병사와 의사는 함께 뜨거운 불길로 들어가 죽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신이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머리칼이 곤두섰습니다. 그 성취한 바가 그 같이 뛰어났는데도 조가(朝家)에서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이 유독 임박에게만 미치지 않았으니, 그로 하여금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침울함을 억누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성세(聖世)의 궐전(闕典)이며 충절(忠節)한 사람을 표양(表揚)하는 바가 아닙니다. 임박은 지위가 낮아서 여러 신하들과 견장(甄奬)의 은전(恩典)을 함께 입지 못하였으니, 신은 더욱 슬퍼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 빨리 높이 포상하라 명하시어 교훈(敎訓)을 수립하시고 퇴락한 풍속을 치켜 세우소서.”하니, 비답하기를,“부진(附陳)한 것에서 경의 소장을 머물러 두고서 경을 보고 하교할 것을 기다리고 있으니, 즉시 올라와서 복명(復命)하라.”하였다.【원전】 43 집 263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교통-수운(水運) / 인사-관리(管理) / 호구-이동(移動)[주-D001] 장년 삼로(長年三老) : 뱃사공.[주-D002] 풍이(馮夷) : 수신(水神).[주-D003] 해약(海若) : 해신(海神).[주-D004] 경진년(庚辰年) : 1700 숙종 26년.[주-D005] 견발(甄拔) : 인재를 구별함.[주-D006] 정유년(丁酉年) : 1597년 선조 30년.
    2024-11-26 | NO.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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