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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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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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충달(安忠達)
    안충달(安忠達, ?)의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는 효언(孝彦), 호는 하곡(荷谷)이다. 증조부는 안맹손(安孟孫), 조부는 안순정(安順貞), 부친은 장사랑(將仕郞) 안린(安鱗)이다. 부인은 노극창(盧克昌)의 딸 함평노씨(咸平盧氏)이다.《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의하면, 안충달은 1525년(중종20) 생원 3등 36위에 입격하였고, 1534년(중종29)에 식년시 을과에 2위로 급제하여 과거를 통과하였다[당시 을과 1위는 퇴계 이황이었다].그러나 과거 급제 이후 안충달의 행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령과 예조정랑을 지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1540년(중종 35) 기사에 ‘좌랑 안충달’이라는 짤막한 세주(細註)가 안충달에 관한 기록의 전부일 뿐이다.안충달이 속한 죽산안씨(竹山安氏)는 본래 광주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송계 (松溪) 노극창(盧克昌, 1482~1568)이 남원부사로 재임할 때 자신의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오던 중 광주 지역에서 안충달을 만났고, 문장이 특별히 뛰어난 것을 보고는 안충달을 사위로 맞아들였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안충달 가문은 지금의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대정(大正)마을, 동신(洞新)마을 일대에 정착하였다.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 대정마을에 있는  나산사(羅山祠)에 죽산안씨 8세 안충달(安忠達), 안여해(安汝諧, 1657~1691), 안여기(安汝器), 안치택(安致宅, 1702~1777) 등 4분을 향사해서 모시던 죽산안씨 문중 서원이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위 네 분에 대해서 기념할 만한 것을 안시용이 기거했던 곳을 사현각(四賢閣)이라 이름하여 1908년에 새롭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셋째 아들 안사활(安士姡)은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김상충(金尙忠) 등과 창의했고,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하는 충인이었다.“황금이 가득한 상자를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경서 한 권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훨씬 낫다.遺子黃金滿籯 不如一經 漢書 卷73 韋賢傳"
    2024-11-18 | NO.261
  • 양경매
    양경매(梁景梅), 湖節4中-114-4, 光州, 甲子, 扈從-《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260
  • 양산룡(1552~1597)
    양산룡(梁山龍)의 본관은 제주. 자는 우상宇翔이다. 부친은 송천 양응정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판관 박중윤의 딸 사이에 차남으로 1552년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16세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41세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자 송제민(宋濟民)ㆍ양산숙(梁山璹)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 휘하에 들어가서 아우인 양산숙을 부장으로 하고 자신의 아들인 양상건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였다. 1592년 5월16일 김천일(金千鎰), 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 등은 의병을 모아 6월3일 서울을 향해 북진하는 출병식을 열었다. 그 장소가 바로 나주의 금성관이다.얼마 후 아우인 양산숙梁山璹이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절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가 시신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초혼장招魂裝으로 아버지 양응정의 묘 아래에 장사하고 모친의 슬픔을 달래는데 온갖 효성을 다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의 횡포가 극심하자 피난을 위해 일가족을 배에 싣고 무안의 삼향포(지금의 몽탄강)에 다다랐을 때 적선이 들이닥쳐 화를 당하게 되자 적을 크게 꾸짖고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어머니 죽산박씨를 모시고 바다에 뛰어들어 절사하였다. 1635년 나라에서는 양산룡에 대하여 효자 정려를 내렸다.
    2020-05-08 | NO.259
  • 양산숙(1561~1592)
    양산숙梁山璹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기묘명현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손자이며, 대사성을 지낸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이다. 광산구 어룡동 박메마을 출신으로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 전심하였으며 천문ㆍ지리ㆍ병학에도 뛰어났다.양산숙이 다섯살 난 어느날 아버지 송천공이 그 손목을 잡고 들에 나가 논밭을 살피다가 문득 아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질문했다.밭을 갈고 있는 소와 말을 가리키며 산숙아 너는 저 소와 말 가운데 하나를 가지라면 어느 것을 갖겠느냐? 이 물음에 어린 산숙의 입에서 거침없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말은 남자의 보배입니다. 천하를 마음대로 돌아 다닐 라면 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말을 갖겠습니다. 음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다. 그 마음 잊지 않도록 하여라. 산숙은 나이 열 살이 되기 전에 벌써 학문이 깊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여섯 살 때 산숙은 아버지가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함에 따라 그곳으로 갔다. 만원(萬院)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그 당시의 대학지인 미암 유희춘(眉岩 柳希春)을 만나게 되었다. 유희춘은 산숙의 기상이 늠름하고 행동이 진중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선(善)과 정의(正義)를 좋아하겠다고. 16세 때 형 산룡(山龍)과 병법(兵法)을 논의 하다가 아버지로 부터 진도(陣圖:진터의 그림)를 받아들고 연구한 끝에 합변의 원리(合變의 原理:합하면 변화하는 법칙)등을 익히기도 하였다. 그 뒤에 우계 성혼(牛溪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스승 성혼은 양산숙의 영득함에 탄복하여 항상 나이 어린 그에게 유지지사(有志之士)라 존칭을 했다고 한다 .큰 뜻을 품은 선비라는 뜻이다. 그는 성혼문하에서 공부를 마친 뒤 반계(蟠溪)라는 곳에 정사(精舍:학문을 닦기 위해 지은 집)를 짓고 수양에 힘썼다. 그는 1555년 왜구(倭寇:일본해적)가 고흥 손죽도(損竹島)를 침범하자 만호(萬戶) 이대원이 이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는 애기를 듣고 슬픔에 잠겨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가 26세 되던 해 가을 대마도주(對馬島主) 다찌바나 야스히로(橋康廣)라는 자가 왜의 사신으로 건너와 강화조약(講和條約)을 맺기를 청해왔다. 양산숙은 남원에 사는 양대박(梁大樸, 義兵장으로 고경명과 같이 금산에서 순절)을 찾아가서 같이 일본사신(日本使臣)의 거동을 살필 것을 약속하고 두 사람은 국왕의 사신(使臣)처럼 가장하고 영남(嶺南)으로 향하였다. 실은 다찌바나란 자는 강화조약을 맺으로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방위태세(防衛態勢)를 살피러온 첩자였다. 그자는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가 술대접하는 자리에서 일부러 술잔을 떨어뜨려 깨버리는 무례를 저질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양산숙과 양대박은 다찌바나가 일본첩자 라는 확신을 가졌다. 얼마 후 양산숙과 다찌바나는 동래부사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 석상에서 다찌바나가 대뜸 시비를 걸어왔다. 물론 통역을 통해서였다. 당신이 찬 칼을 왜 그리 짧으냐? 즉 우리나라의 무방비를 비웃은 것이다. 그대가 가진 창은 너무 길어서 그대의 운신을 그릇칠 것이다. 그러자 다찌바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나부시 절을 하고 상주(尙州)까지 동행해주기를 간청했다. 다찌바나는 상주에 도착하자 목사 송응동(宋應洞)이 잔치를 베풀고 기생들의 춤이 시작되었는데 다찌바나는 송목사의 늙은 모습을 보고 통역을 시켜 나는 여러 해 동안 싸움터에서 살아서 이렇게 수염과 머리털이 희게 되었소이다만 사또께서는 늘 기생속에 파묻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지내셨을 것인데 왜 그렇게 허-였습니까? 하고 비꼬았다. 자리를 같이한 양산숙은 그 말을 듣고 울화통이 터졌지만 상대가 한나라의 사신이니 만큼 꾹 참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우리의 방비가 없어서 당하는 수모라 생각하니 절분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는 고향 광산으로 돌아와서 더욱 무예를 닦고 학문에도 힘을 썼다.1592(선조25년)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숙은 고향인 박메마을로 와서 형 산룡(山龍) 동생 산축(山軸)과 더불어 목이 메이도록 통곡을 하며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앞에 자기의 소신을 아뢰었다. 어머님 저희들 삼형제는 나라가 위태로운 이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뜻을 모았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 여느 어머니 같으면 그 무슨 당찮은 소리냐-. 나라를 지키는 군사들이 있는데. 하고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박씨부인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 집안은 세록(世祿)이 있는 가문으로 나라의 은덕을 많이 입은 가문의 자제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느니라-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도 늘 남쪽에 왜침의 징후가 있으니 그때가 오면 나라를 지키는데 신명을 바쳐야 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머님 저희들의 뜻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이렇게 3형제는 거의(擧義)하기로 결심을 했다. 나주에서 창의하여, 김천일을 맹주로 삼고 양산숙은 부장이 되었다. 그 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하여 수원에 출진하여 활약했다. 강화도로 이진할 무렵, 곽현과 함께 주장의 밀서를 가지고 해로를 통해 의주 행궁行宮(임시 궁궐)에 도착하여 선조에게 호남ㆍ영남의 정세와 창의활동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 돌아올 때 호남ㆍ영남에 보내는 교서를 받아 남도에 조명을 하달하였다. 적이 남도로 퇴각하자 김천일과 함께 남하하여 진주성에 들어갔으나 침공하려는 왜의 대군 앞에 군사가 부족하자 명나라 장군 유정의 군진에 가서 군원을 강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할 수 없이 단신으로 입성하여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동서분당 때 서인으로 조헌(趙憲)과 함께 이이(李珥)·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사후에는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2020-05-08 | NO.258
  • 양산축(1571~1597)
    양산축梁山軸의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자는 유석維石이다. 1571년 박뫼마을에서 송천 양응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예의범절이 어른들과 다름없었으며 두 형 양산룡梁山龍과 양산숙梁山璹을 본받아 차분한 마음으로 글을 외우고 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어 아버지 유언에 따라 일찍이 율곡 이이를 찾아가 대학을 배우고 1년 후 돌아왔다. 성인이 되어 제봉 고경명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산룡, 산숙 두 형과 창의하였고 정유재란 당시 가족들과 함께 무안 삼향포로 피난 중 적병을 만나 함께 투신하여 순절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27세였다.양산축의 부인 장흥고씨는 고경명 의병장의 손녀이다. 전 가족이 순절하던 날 고씨는 양산축의 뒤를 따라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두 여종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뱃 속의 아이 만용을 낳아 후손을 잇게 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양씨삼강문은 충민공 양산숙 일가 7명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정려문(旌閭門)이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 동네에 세워주는 문을 뜻한다. 양씨삼강문은 정면 5칸·측면 1칸짜리 맞배지붕의 평범한 건물이다.
    2020-05-11 | NO.257
  • 엄덕록
    엄덕록(嚴德祿), 湖節3下-178-1,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256
  • 엄순
    엄순(嚴純), 湖節5中-135-3, 光州, 戊申, 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2 | NO.255
  • 여의손 呂義孫 태조 6년(1397) 3월 26일∼태조 7년(1398) 3월 20일
    여의손 呂義孫 태조 6년(1397) 3월 26일∼태조 7년(1398) 3월 20일여의손(?∼?)의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393년 제주 첫 목사가 되어 1395년까지 제주 만호를 겸임하고 제주향교를 설립하였다. 1396년 제주목사 재임 시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을 조성할 때 당대의 석공을 동원하여 석물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표창을 받은 뒤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404년 10월 25일 보빙사 (報聘使)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업무를 소홀히 한 죄로 진도로 유배되었다. 『금성일 기』 「정축년 1397년」에 “목사 여의손이 3월 26일 도임하였다가 6월 2일 임금의 명에 의해 목포진첨절제사 겸임하였다가 1398년 3월 20일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 “정축(1397년) 3월 26일 도임, 무인(1398년) 10월 20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54
  • 오달선 吳達善 고종 15년(1878) 4월 22일∼고종 18년(1881) 6월 20일
    오달선 吳達善 고종 15년(1878) 4월 22일∼고종 18년(1881) 6월 20일오달선(1811∼1892)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여행(汝⾏), 오최선(吳最善)으로 개명하 였다.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오치수(吳致壽)로 오치준(吳致俊)에게 입양되었다. 아들 오익 영(吳益泳)은 문과 급제 후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850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856년 동부도사, 1857년 사옹봉사, 1860년 상의별제·공조좌랑, 1861년 공조정 랑·종묘서령, 1863년 낭청, 1864년 안의현감, 1866년 천안군수, 1868년 보성군수, 1871년 장흥부사, 1874년 충주목사, 1875년 남원부사, 1877년 홍주목사를 지냈다. 1878년 2월 28월 전임 나주목사 김선근과 바꿔 제수되어 4월 2일 부임하였다. 5월 3일에는 청주에서의 일로 죄진 채 나무목사 일을 본다. 1879년 6월 11일에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나주목의 유망(流亡) 세미(稅⽶) 6182석에 대하여 전라감사 심이택이 보고 자하자 세미는 절반에 한하여 상정(詳定) 하여 돈으로 대납하도록 하고, 반드시 당년 안에 수량대로 납부하도록 한다. 1882년 6월 공조참판, 호군, 동의금, 1883년 동지중 추부사, 1890년 행호군, 1892년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금성읍지』에는 “무인(1878년) 2월 28일에 홍주목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4월 22일 부임하였고 신사(1881년) 6월 20일에 경주부윤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서는 1880년 8월 임기 만료가 가까워지자 전라감사 심이택(沈履澤)이 장계를 올려 오 목사의 임기를 연장시켜 달라고 이조에 청한 결과 “오달선을 한 임기 동안 연장하라”는 인사가 있어서 결국 1년 더 재직하여 1881년 6월 20일까지 2년 4개월 동안 나주목사 직을 수행하였다. 1881년 6월 경주부윤에 부임하자 10월에 자기 이름이 역적의 이름과 같다 하여 ‘最 善’으로 바꾸었다. ‘㝡善’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11 | NO.253
  • 오빈(吳賓)
    오빈(吳賓)의 본관은 낙안이며 자는 관국(觀國)이다.1543년(중종38) 식년시 생원 3등 66위로 입격하였다.권지성균관을 지냈다.
    2024-11-18 | NO.252
  • 오상 吳祥 명종 3년(1548) 7월 25일∼명종 7년(1552) 11월 상경
    오상 吳祥 명종 3년(1548) 7월 25일∼명종 7년(1552) 11월 상경오상(1512∼1573)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상지(祥之), 호는 부훤당(負暄堂)이다. 아버지는 예조좌랑 오예손(吳禮孫)이다. 1531년 진사시 합격, 153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가독서를 하였다. 1540년 사간원 정언, 1541년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1542년 홍문관 수찬, 1543년 홍문관 부교리, 1544년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강원도 재상어사, 1547년 사간원 사간, 1548년 7월 25일 나주목사가 되어 8월 16일 배사할 때 “근래에 백성들이 곤궁한 것을 깊이 유념하여 환자[糴]를 받아들일 때 가혹 하게 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 구휼하는 마음으로 하여 민폐를 모두 없애도록 하라.”는 전교를 받았다. 1552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1555년 시독관,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 1557년 강원도관찰사, 1558년 첨지중추부사, 호조참의, 1559년 승정원 좌부승지, 가선대부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도승지, 사헌부 대사헌, 1560년 병조참판, 1562년 예문관 제학, 1563년 병조참판, 경상도관찰사, 1564년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1567년 예조참판, 1571년 호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문집으로 『부훤 당유고』 1책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무신(1548년) 9월에 도임하였고, 임자(1552년) 1월에 홍문관 수찬으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대사헌에 제수되었을 때 사관이 『명종실록』에 기록하길, “오상이 재주가 있었는데, 왕이 그의 사조(詞藻)를 좋아하여 더욱 두텁게 사랑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선조실록』 그의 졸기에는, “유희춘(柳希 春)의 일기(⽇記)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사람은 안정(安靜)하고 자상하며 사장(詞章)에도 능한 선량한 사람이다. 조정(朝廷)이 좋은 선비를 잇달아 잃으니 누가 한탄하지 않겠는가.’”라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251
  • 오자치 (吳自治)
    본관은 나주이며 금성군 오신중(錦城君 吳愼中)의 아들로 태어났다.조선 전기의 무신 오자치 장군은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무예를 닦으며 자라면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고 병서를 두루 읽으며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이후 무과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오자치는 주부벼슬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부장 조석문과 더불어 3개월에 걸친 토벌전 끝에 이시애, 이시합의 형제를 평정하여 왕이 훈장을 내렸다. 1476년(성종 7) 9월 부친의 봉양을 이유로 낙향하였다.현재 그의 영정인 ‘오자치 영정(吳自治影幀)’이 남아 있는데 조선 초기 화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초상화로 보물 1190호로 지정되었다. 또 광산구 지평리에는 오자치가 자신의 애마를 기념하기 위해 자연석을 깨뜨려 만들었다는 ‘오자치 용마’가 있다. 오자치의 용마바위에 관한 전설은 오자치의 강인함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 전기의 무신인 오자치 장군은 민가에 피해를 주던 야생마를 단숨에 잡아 길들이고 말과 함께 무예를 닦던 중 하루는 ‘말이 화살보다 느릴 경우 목을 베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복룡산을 향해 화살을 쏜 오자치는 말을 타고 달려 산위에 도착해 화살을 찾아보았지만 화살이 보이지 않자 말의 목을 벴다. 그 순간 화살이 뒤에 날아와 꽂혔고 오자치 장군은 자신의 성급함을 뉘우치며 그곳에 놓인 자연석을 이용해 비석을 세운 뒤 죽은 말을 달랬다는 이야기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 바위를 부숴 도로공사에 사용하려고 했다가 돌을 떨어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일이 있었다는 등 이 용마바위에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신령함이 깃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그의 묘와 영당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용진산 아래 원당마을 원당영각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자치 장군의 재실인 시기재와 근처엔 재현된 용마바위가 놓여있다.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 일이 생기면 꽃을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2020-03-02 | NO.250
  • 오재문 吳在⽂ 정조 9년(1785) 1월 22일∼정조 10년(1786) 2월 13일
    오재문 吳在⽂ 정조 9년(1785) 1월 22일∼정조 10년(1786) 2월 13일오재문(1743∼1800)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성장(聖章)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 중에 한 명인 오달제(吳達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 형조판서 오언유(吳彦儒)이다. 1762년(영조 38)에 도목정사(都⽬政事)에서 오달제의 후손이라 하여 음직으로 명릉랑(明陵郞)에 제수된 후에 1764년 전설별검, 1766년 금부도사, 1768년 한성판관, 1768년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여 개령현감으로 자리를 옮긴다. 1773년 한성서윤, 1776년 의성현령, 1779년 해주판관, 1782년 옥천군수, 1783년에 울산부사를 역임한다. 1784년 12월 19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나주는 호남의 큰고을으로서 물산이 많고 땅이 커서 평소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어지므로 가려 차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의를 하여 제수된다. 1786년(정조 10) 2월 13일 의금부의 계에 따라 잡혀 가는데, “표류해 온 사람을 접대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매우 중요한데, 해당 고을에서 쫓아 보내는 일” 때문이었다. 1787년 풍기군수, 1789년 부사과, 1792년 예빈주부를 거쳐 1800년에 사망하였다. 1854년 증직으로 이조참의에 올랐다. 『금성읍 지』에는 “갑진(1784년) 12월 18일 울산부사에서 나주로 제수되어 을사(1785년) 1월 22일에 도임하였고, 병오(1786년) 2월 13일에 표류인을 문정하는 일을 지체하였기 수영(⽔營)의 장계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249
  • 오준 吳竣 인조 14년(1636) 5월 4일∼*인조 15년(1637) 8월
    오준 吳竣 인조 14년(1636) 5월 4일∼*인조 15년(1637) 8월오준(1587∼1666)의 본관은 동복(同福)이며,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南)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오백령(吳百齡)이다. 동생 오단(吳端)은 1636년(인조 14)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8년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1624년 지평, 장령, 수찬 등을 지냈다. 1636년 3월 9일 가의대부 행 나주 목사에 임명되어 5월 도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체부 종사관 김광혁을 인견할 때 동부승지 한형길 등이 입시하여 변란 때의 전라도 정황에 대해 논의한 내용 가운데 “나주 고을은 지역도 크고 사람들도 거칠지만, 목사 오준이 상당히 잘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놀란 뒤부터 성 안이 모두 비고 태수만 남았는데, 밤마다 관아 안에 화살을 비 오듯이 쏘면서 옥문(獄⾨)을 부수고 중죄수(重罪囚)를 모두 빼냈습니다.”란 부분이 있다. 이로 보아 목사로써 선정을 베풀었음과 변란 때의 행적을 알 수 있다. 1639년 한성부 판윤,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 예조 판서, 형조판서·대사헌, 1660년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삼전도비,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 구례 화엄사의 벽암대사비, 칠장사의 벽응대사비 등의 비문이 전해 온다. 저서로 『죽남당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병자(1636년) 5월 4일 도임하였고 체직 일자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 목사의 도임시기로 보아 1637년 8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248
  • 오한원 吳翰源 순조 10년(1810) 8월 29일∼순조 12년(1812) 5월 25일
    오한원 吳翰源 순조 10년(1810) 8월 29일∼순조 12년(1812) 5월 25일오한원(1750∼?)의 본관은 나주(羅州)로 담양 출신이다. 자는 공예(公藝)로 아버지는 사간원 헌납을 지낸 오현주(吳鉉冑)이고, 사간원 대사간 오정원(吳⿍源)이 형이 된다. 177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였고, 1775년에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등용되었는데, 1775년 가주서, 1793년 사헌부 장령, 1796년 장악정, 1799년 정언·봉상시정, 1800년 헌납·부수찬, 1801년 부교리 겸 중학교수, 1805년 병조참지·승지, 1806년 동래부사, 1809년 부호군, 1809년 대사간, 1810년 우부승지를 지냈다. 1810년 8월 17일 나주목 사로 제수되었다. 12월 29일 『승정원일기』에 “나주목사의 상소에 정식(定式)에 어긋나고 오자(誤字)가 었으므로 도로 내려보내 다시 수정하여 올려보내야 하는데, 원래의 상소가 민사(民事)에 관계되므로 부득이 봉입(捧⼊)하더라도 해당 목사를 경책하지 않을 수 없어 추고”하는 내용이 있다. 상소 내용은 기근에 대한 것과 섬 지방의 결총에 대한 것이다. 1812년 6월에 의주부윤, 1815년 대사간·우윤, 1818년 동지사 부사, 1821년 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오(1810년) 8월 17일 승지에서 본직을 제수받고 당일 사조한 후 동월 29일에 도임하였고 임신(1812년) 5월 25일에 대동미를 실은 배가 파손 침몰된 일로 서울로 나포되어 체직되어 돌아갔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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