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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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응하
- 신응하(申應河), 湖節1上-046-2,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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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일 ⾟馹 명종 20년(1565) 10월 2일∼명종 20년(1565) 10월 11일
- 신일 ⾟馹 명종 20년(1565) 10월 2일∼명종 20년(1565) 10월 11일신일(1508∼?)의 본관은 영산(靈⼭), 자는 치원(致遠), 호는 삼일당(三⼀堂)으로 아버지는 덕원교수를 지낸 신국균(⾟國鈞)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 병과에 급제한 뒤 벼슬에 올랐다. 1560년 대구부사로 있을 때에 마음을 다해 구황을 하였다 하여 향표리 (鄕表裏) 1습을 하사받았다. 1565년 10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바로 파직되었 다. 1574년 선산부사로 있을 때는 사욕을 탐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78년 선공감정으로 있을 때 국장도감 낭청을 겸했으면서도 발인할 때에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아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 당하였다. 또 1578년 제용감정에 제수되었으나 노쇠하다는 사간원의 주청에 따라 교체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삼일당시 집(三⼀堂詩集)』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을축(1565년) 10월 2일 도임하였으나 동월 11일에 파직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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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호 申浩 태종 13년(1413) 11월 16일∼태종 15년(1415) 4월 20일
- 신호 申浩 태종 13년(1413) 11월 16일∼태종 15년(1415) 4월 20일신호(?∼1432)의 본관은 평산, 자는 선오(善吾)다. 사간공파(思簡公派)의 파조(派祖)로 아버지는 집현전 한림 겸 직학사 신혼(申琿)이다. 1401년 형조전서를 지내고 1405년 풍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부자들의 곡식을 거두어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1406년 에는 병사의 갑옷을 실용적인 청색 방의(⾭⾊防⾐)로 바꾸자는 건의를 하여 받아들여졌 다. 이후 풍해도관찰사, 개성유후, 1412년 10월 10일 나주목사, 1415년 4월 20일 한성윤, 1419년 전라도관찰사, 1420년 우군총제, 1421년 형조·호조판서, 1422년 국장 도감을 지냈다. 1432년 졸하자 3일간 조회를 폐하였다. 『금성일기』 「기축년 1409년」 에는 “판목사 신호가 11월 16일 도임하였다가 을미(1415년) 4월 20일 한성윤으로 선환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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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환 申渙 ?∼성종 10년(1479) 3월 5일
- 신환 申渙 ?∼성종 10년(1479) 3월 5일신환(?∼?)의 본관은 고령(⾼靈)이다. 대제학 신장(申檣)이 할아버지, 신중주(申仲⾈)가 아버지이고, 신숙주(申叔⾈)가 큰아버지다. 1457년 알성시 병과에 2위로 급제하여 1458년 사간원 우정언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464년 사헌부 정랑, 충청도 경차관. 그리고 1471년부터 1473년까지 사복시정을 거쳐 나주목사에 부임했다. 『금성일기』 「기해년 1479년」 기록에 “구 목사 신환이 종부정으로 승진되어 상경하였다.”고 기록되 었고, 『금성읍지』에는 “도임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기해(1479년) 3월 5일에 종부 정(宗簿正)으로 승진하여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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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후명 申厚命 숙종 4년(1678) 1월 1일∼숙종 5년(1679) 6월
- 신후명 申厚命 숙종 4년(1678) 1월 1일∼숙종 5년(1679) 6월신후명(1638∼1701)의 본관은 평산(平⼭)이며, 자는 천휴(天休), 호는 임하당(林下堂) 이다. 아버지는 용양위 부호군 신형구(申衡耉)이며, 어머니는 참의 성시헌(成時憲)의 딸이다. 16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7년 승문원 부정자, 1676년 병조좌 랑, 1677년 지평을 지냈다. 1677년 12월 20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678년 1월 1 일 도임하고 1679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이임하였다. 1679년 부수찬·장령, 1680년 사간, 1689년 강춘관찰사, 1693년 사은사, 1697년 형조참판·충청도관찰사, 1698년 해운접반사, 1700년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오(1678 년) 1월 1일 도임하였고 기미(1679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이동 이임하였다.”라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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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명규 沈明奎 철종 6년(1855) 12월 22일∼철종 7년(1856) 7월 5일
- 심명규 沈明奎 철종 6년(1855) 12월 22일∼철종 7년(1856) 7월 5일심명규(1799∼1878)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문보(⽂甫)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심영조(沈榮祖)이다. 183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6년 강릉참봉, 1838년 선공 부봉사, 1839년 상서원 직장, 1842년 금부도사, 1845년 예빈주부·호조좌랑, 1846년 노성현감, 1849년 양근군수, 1851년 음성현감, 1852년 울산부사, 1853년 황주목사, 1855년 4월 평양서윤을 지냈다. 1855년 10월 1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2월 2일 도임하였다. 1856년 충주목사, 1860년 선혜청 낭청, 1861년 첨지, 1862년 동부승지· 경주부윤, 1868년 부호군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을묘(1855년) 10월 16일에 평양서윤에서 옮길 것을 제수 받고, 12월 2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12월 22일에 부임 하였으며 병진(1856년) 7월 5일에 충주목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묘표는 최익현이 작성하여 『면암집(勉菴集)』에 수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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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의복 沈宜復 헌종 6년(1840) 5월 10일∼헌종 8년(1842) 8월 9일
- 심의복 沈宜復 헌종 6년(1840) 5월 10일∼헌종 8년(1842) 8월 9일심의복(1788∼?)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경심(景⼼), 호는 창북(滄北)이다. 아버 지는 정자(正字) 심능적(沈能迪), 아들은 철종대 전라감사를 지낸 예조판서 심경택(沈敬 澤)이다. 1813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1820년 현릉참봉, 1821년 천릉도감 감조관, 1823년 부사과, 1824년 공조좌랑, 1825년 충훈도사, 1826년 창녕현감, 1830년 해주 판관, 1832년 순창군수, 1834년 장성부사, 1836년 호조정랑, 1836년 낭청, 1838년 밀양부사를 지냈다. 1840년 3월 18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5월 10일 부임하였다.1840년 9월 10일과 1841년 8월 1일, 1842년 5월 20일 상경 기록이 있다. 1842년 8월 9일 신병으로 내려갈 수 없다하여 파출되었다. 1845년 장악첨정, 1847년 강릉부 사, 1853년 통정대부에 가자되었으며 동부승지·여주목사를 지내고 1857년 70세가 되어 가선대부 가자, 1858년 동의금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자(1840년) 5월 10일에 부임하였고 임인(1842년) 8월 8일에 상경하여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문집 『창북유고』가 일본 오사카[⼤阪] 부립 나카노시마[中之島]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나주객사 금성관 안에 「목사심의복거사비」가 서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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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이지 沈頤之 정조 10년(1786) 3월 15일∼정조 10년(1786) 6월 29일
- 심이지 沈頤之 정조 10년(1786) 3월 15일∼정조 10년(1786) 6월 29일심이지(1735∼1796)는 1786년(정조 10)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1786년 3월 7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3월 15일 도임하였고 6월 29일 전라도 관찰사로 옮겼다. 『금성읍 지』에는 “병오(1786년) 3월 15일 도임하였으며 6월 29일에 전라도관찰사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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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명 沈之溟 효종 8년(1657) 7월 2일∼*효종 10년(1659) 상반기
- 심지명 沈之溟 효종 8년(1657) 7월 2일∼*효종 10년(1659) 상반기현감 심지명(1599∼1685)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자우(⼦⽻), 호는 농암(聾巖) 이다. 아버지는 참봉 심준(沈僔)이다. 161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8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등제하여 1627년 연서찰방, 1630년 진위사 서장관, 1633년 어모장군, 1635년 오위장, 1638년 태안군수, 1640년 의주부윤, 1641년 통정대부·남병사, 1643 년 충청수사, 1644년 동래부사, 1645년 판결사, 1648년 평안병사, 1650년 광주부윤, 1651년 가선대부, 1657년 7월에 금성현감을 제수받아 7월 2일 도임하였다. 1661년 부호군, 1662년 도총관, 1664년 연안현감, 1665년 양주목사, 1668년 도총관, 1669 년 광주부윤, 1673년 좌윤, 1675년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정유 (1662년) 7월 2일 도임하였는데 체직일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1659년 상반기까지 재임한 것으로 추정한다. 시호는 호안(胡安)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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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후지 沈厚之 순조 1년(1801) 9월 21일∼순조 6년(1806) 6월 7일
- 심후지 沈厚之 순조 1년(1801) 9월 21일∼순조 6년(1806) 6월 7일심후지(1744∼?)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자순(⼦順)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문화현령을 지낸 심전(沈鋑)이다. 1774년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여 1785년 참봉, 1787 년 내섬시 봉사·금부도사, 1789년 감찰, 1790년 문화현령, 1792년 수안군수, 1794년 함안군수, 1797년 연안부사를 지냈다. 1801년 9월 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9월 21 일 부임하고 1806년 6월 7일 임기가 만료되어 이임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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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길환(安吉煥)
- 안길환(安吉煥, 1851~1908)의 본관은 竹山 , 자는 성운(成運)이다.부 : 安秀權조 : 安志默증조 : 安起魯외조 : 全幸魯처부1 : 羅相翊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喪次司書로 참석하였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제자들의 위패를 정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보냈다.
- 2020-08-05 | NO.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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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용환
- 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송사집松沙集》 48권에 죽산안씨 20세 안용환(安龍煥,1857~1911)의 행장(行狀)이 기록으로 남아있다.淸深堂安君行狀 君諱龍煥字慶雲。淸深其堂顔也。安氏本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其上祖。有闢異衛正之功。從祀夫子廟。文惠公諱元衡門下侍中。勳封竹城君。子孫分貫竹山。雙淸堂諱勉官判典。封興寧君。竹溪諱魯生。始仕國朝。集賢殿大提學。生員諱孟孫。始居光州。荷谷諱忠達。文章行義。爲世宗仰。官正郞。士林建祠俎豆之。高祖諱斗胤。曾祖諱宅魯。祖諱思孝。考諱載五。下鄕數世後。顯榮雖少替。而世篤文行。爲鄕邦矜式。衣冠古家。妣光山金氏父修儀。德配君子。君生哲宗丁巳(1857)五月戊寅。才晬而孤。不記父顔。爲畢生痛。誠敬事母。出外遄反曰吾母待我。得異味。必以獻。與儕兒遊。口無戲言曰。悖出必悖入。羞辱及於父母。甫上學。自知劬書。不煩提敎。每日授課。歸讀於母側曰。母氏孤踽。須臾不可離也。少長。乃閣書曰。親老不養。徒事文墨。子職有闕。樵山漁水。庋閣常餘。慈夫人常多疾。迎醫合藥。舍置他事。疾革。晝宵涕淚。遭故。擗踊頓絶。水穀不入於口三日。雖甚貧困。而附身附棺。誠信無憾。旣殯。曰吾據禮守廬。則奠獻莫需。行傭樵採。饋食無闕。及葬。展晨昏不廢。當膝成坎。至行所感。有欲妻之者。君卻之曰。雖甚竆厄。禮限不可違越。服闋娶婦。勤儉立家。先置祭田。以永香火。周恤族戚。不計有無。收養族子女。嫁娶資生者亦數人。凡民有喪。貧不能經紀。則出力相助。使無遺憾。族黨墳墓無主頹圮。改築之。使不犯五患。蓋其天性仁厚。見人之急。若癏在己。嘗靑馬邪熾。勒人爲黨。君乃與里人立約曰。凡我同約之人。勿染於邪。否者不可與同閈。有潛誘里子弟者。君招致諭之曰。惑亂黔首。鄕有八刑。人雖可欺。不畏于天。人之異乎禽獸。爲不失其良心。耕田鑿井。庶民常職。左道惑衆。爲獸爲禽。辭氣懇至。其人愧謝。是以一里賴而潔淨。每爲彼輩眼釘。數被侵擾。亂平後皆來請罪。君笑曰。往日之事。否運所使。革心爲貴。何至相謝。聞者皆服其寬弘。平居不見邑宰。或致書願見。輒辭以愚劣。歲丙申。余妄意討復。駐陣在光山館。君仗劒而至。誓以同死。僨事之後。痛哭杜門。敎子課孫。爲日間事業。于後五賊賣國。憤不自勝。卽欲叫閤請斬。沮格莫遂。仰天痛歎。或至廢食。晩構一堂將落。夢有老人大書壁上曰淸深。覺而自解曰。擧世皆濁。反之則淸。擧世皆淺。反之則深。所以爲戒者大矣。因受以爲扁。蓋其平日所守者正。故發於宵寐者如此。所謂老人者。豈靈臺主人歟。辛亥(1911)冬。偶得難醫之祟。臨命。顧謂子圭冕曰。世衰道微。魍魎晝行。世間萬事。無足置胷中。須立心制行。從師取友。謹守世風。則入地之目。庶可瞑矣。以翌年正月二日乙丑(1925)終。得年僅五十五。嗚呼短矣。見今滔滔胥淪。不與俱。所謂千萬人中常知有己。如君者不數數有焉。使久於世。庶可以激濁揚淸。而何天奪之速也。葬再遷於白蓮洞後佳藏洞戌坐之原。夫人河東鄭氏仁默女。有婦德。一男卽圭冕。副室一女適高濟崑。圭冕以父命從余遊。淳謹好學。庶不負君之遺訓矣。草事行爲家狀。以余知君深。請刪潤以示久遠。吾何忍辭。
- 2020-04-08 | NO.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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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종수 安宗洙 고종 32년(1895) 12월∼건양 1년(1896) 2월 9일
- 안종수 安宗洙 고종 32년(1895) 12월∼건양 1년(1896) 2월 9일안종수(1849∼1896)의 광주(廣州)이며, 자는 경존(敬尊), 호는 기정(起亭)이다. 아버지는 통사랑 선공감가감역을 지낸 안석우(安錫瑀)이다. 1882년 증광시 진사에 합격하여 우정총국 사사를 시작으로 1885년 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1886년 외아문 주사로 있다가 개혁파인 김옥균(⾦⽟均)의 여당으로 성토되어 마도(⾺島)에 정배, 1894년 7월에 풀려난다. 1895년 1월에 탁지아문 주사로 복귀하여 2월에 내무아문 황해도시찰위원을 지냈다. 1895년 6월 24일 나주부 참서관으로 임명된다. 1896년 3월 4일 단발령의 강력한 시행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주의병들에게 피살을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나주는 일시 의병이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15일 만에 소탕되었고 이 과정에서 해남군수 정석 진(鄭錫珍)을 비롯한 많은 관련자들이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안종수는 1910년에 종 2품 규장각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특별한 점은 관직에 들어오기 전 1881년에 조사시 찰단(朝⼠視察團) 조병직(趙秉稷)을 수행하여 함께 일본을 가게 되는데, 일본에 머물렀을 때 근대화된 농법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津⽥仙]을 통해 많은 농서를 구입하였다는 것이다. 귀국 뒤에는 서양식 근대농법을 소개한 『농정신편(農政新 編)』을 편찬, 1885년 광인사(廣印社)에서 간행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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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 安俊 태조 2년(1393) 10월 20일∼태조 3년(1394) 10월 2일
- 안준 安俊 태조 2년(1393) 10월 20일∼태조 3년(1394) 10월 2일안준(?∼?)의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노포(蘆浦)이며, 아버지는 중랑장 안손주(安孫拄) 이다. 정몽주의 제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남양부사, 연안부사를 지내고 전라 충청 경상 삼도체찰사, 봉상시 판사를 지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로 몰려 의령으로 유배되었다. 조선건국 뒤 태조 이성계가 함께 일하자 했으나 완강히 거절했다. 『금성일기』 「계유년 1393년」에 “목사 안준이 10월 20일 도임하였다가 갑술 (1394년) 10월 2일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계유(1393년) 10월 20일 도임, 갑술(1394년) 10월 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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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축 安舳 명종 8년(1553) 8월∼명종 9년(1554) 4월
- 안축 安舳 명종 8년(1553) 8월∼명종 9년(1554) 4월안축(1500∼1572)의 본관은 죽산(⽵⼭)이며, 자는 해빈(海賓), 호는 둔암(鈍庵)으로 보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의정부사록 안수륜(安秀崙)으로 문과 급제자이다. 1531년 식년 시에서 생원ˑ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42년 정시(庭試)에서 을과에 1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승문원 정자를 시작으로 병조좌랑, 호조좌랑을 거쳐 1547년 사간원 정언, 1548년 사헌부 지평, 영광군수를 거쳐 1553년 실록 편수관을 겸한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554년 3월 27일 실록에 명종이 “‘나주목사 안축은 마음을 써 구황을 하지 않았으니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는데, 이는 구황어사 김홍도(⾦ 弘度)의 장계에 의한 것이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1554년 4월에 파직되었다. 이후 1557년에 춘추관 편수관 겸 남원도호부사를 맡았다. 낙향한 후 하서 김인후(⾦麟厚), 석천 임억령(林億齡)과 함께 어울려 ‘호남의 세 높은 선비’라는 뜻의 호남 삼고(湖南三 ⾼)로 불렸다. 『금성읍지』에는 “춘추편수관을 겸하여 계축(1553년) 7월에 도임하였고, 동년 대한해 때 광양에서 본주까지 주변 11개 지역이 우심하여 구황하여야 하는데 성실히 하지 않는다는 어사 이조좌랑 김홍도의 장계에 따라 갑인(1554년) 4월에 파직 당하여 고향 보성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6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