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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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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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부립
    고부립(高傅立), 湖節4下-129-1, 光州, 丁卯, 高循厚 同倡《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12
  • 고부민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의 호는 탄음(灘陰)이다. 湖節4下-130-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 《호남절의록》(1799)강수은에게서 글을 배워서 일찍이 유학과 문예를 크게 성취했기 때문에 영광과의 인연이 깊다.그는 인조5년(1672),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제인 고부필(高傅弼)과 삼종 고부립(高傅立)과 함께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의하며 "금산의 순절과 진주성의 함몰은 비록 시변이라고는 하나, 그 국치를 아직 잊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북쪽 오랑캐가 다시 창궐하여 이 땅에 이르니, 이 나라 신하와 백성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몸을 살피지 않고 적개심에 불타고 있다. 나는 마땅히 진주성과 금산에서의 억울함을 잊지 못하는 병사들을 모아, 오랑캐를 무찌르다가 죽어 천하에 대의를 밝혀 나라의 부끄러움을 씻으리라" 하고 의병을 모으기에 앞장섰다.이때, 탄음 고부민의 재종숙인 정헌공 고순후가 김장생의 추천을 받아 호남의병장이 되었는데, 탄음은 동지 수십명과 그 막부에 이르러 의병과 군량을 모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기세를 얻어 북으로 행하던 중, 완산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고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한을 머금고 물러나 두문불출했다.또, 병자호란 때에도 탄음은 동지 오천여명을 규합하고 군량을 모아 서울로 향하던 중, 청주에 이르렀을 때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하늘의 강기가 해와 달을 떨어뜨리고, 시절의 뜻이 역사를 말살시키는가 (天綱墜日月 時義掃春秋)"라는 시를 짓고 자연에 묻혀서 일생을 마쳤다. 숨어지내는 감회를 읊은 시가 애절하다.(幽居述懷)탄음 고부민은 충절이나 덕망 학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될 만했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연구하고 펴서, 크게는 천인과 성명(性命)을 궁구하고, 작게는 아주 미세한 사물도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문장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체제를 갖추고 있어서,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진부한 말을 답습하지 아니 하였다. 방손인 고공진은 탄음의 행장에서 "고부민 선생은 호란이 강화를 하게 되어 공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의열은 충분히 기에 새기어 찬사할 만하다. 그 근원으로 말하면 사계의 학문을 바로 배워 정자와 주자를 쫓았고, 가정으로 말하면, 죽촌공의 문장과 행업을 백세에 떨칠 만하고 집안으로 말하면, 충열공의 충성심과 의정이 천고에 빛나니, 고부민 같은 사람은 그 충열을 이어 후통을 빛낸 사람이 아니겠는가?"탄음 고부민은 유평과도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다.
    2020-03-31 | NO.211
  • 고부민(高傅敏)
    고부민(高傅敏, 1577~1642)의 본관은 장흥이며 자는 무숙(務叔), 호는 탄음(灘陰) 이다.부 : 高成厚조 : 高敬祖증조 : 高仲英외조 : 咸陽 朴星精처부1 : 光山 金蘊德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
    2020-08-06 | NO.210
  • 고부천
    고부천(高傅川, 1578-1636)의 자는 군섭(君涉)이며 호는 월봉(月峯)이다. 湖節4中-039-2,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3-31 | NO.209
  • 고성후
    조선 중기의 문신 죽촌(竹村) 고성후(高成厚 1549∼1602)의 자는 여관(汝寬), 본관은 장흥(長興). 목사 경조(敬祖)의 아들로 남구 압촌동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54년(명종 9) 6세 때부터 조부 고중영(高仲英)에게 수학하여 글을 빨리 깨우쳐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1497-1579) 문하에서 수업하였다.1592년(선조 25) 금마군수로 있을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당숙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아들 인후(因厚)를 도와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군량을 운송하던 중에 당숙인 고경명이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고 흩어진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광주목사 권율(權慄)의 막하에 들어가 이치(梨峙)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고성후(高成厚), 湖節1上-063-2, 光州, 高敬命 同倡1593년(선조 26)에 권율이 도원수가 되어 행주싸움에서, 그는 익산군수로서 해상과 육로로 군량미 운송 업무를 맡아 행주대첩을 이루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그리고 영남에 주둔한 명나라 군영지 군량을 운송하여 명군(明軍) 제숙(提叔) 이여송(李如松), 참군(參軍) 여응종(呂應鍾) 등에게 크게 존경을 받았고 함께 많은 시를 화창(話唱)하기도 하였다.1594년(선조 27)에 익산군수에서 내직으로 훈련원봉사를 거쳐 그해에 종부시첨정이 되었다.1601년(선조 34) 선산현감을 거쳐 안성군수로 재임 중 이듬해 세상을 등졌다.그가 죽은 후 1605년(선조38)에 선무공신 2등에 녹선 되고, 1609년(광해 1)에는 예조참의겸지제교(禮曹參議兼知製敎)에 추증되었다.저서로는 죽촌집(竹村集)이 전하며, 1902년에는 금산 금곡사, 광주 남구 황산사(黃山祠)에 제향 되었다. 그의 문집 《죽촌집(竹村集)》이 있다.
    2020-03-31 | NO.208
  • 고순후
    고순후(高循厚),는 고경명 장군의 넷째아들이다.  湖節4下-125-1, 光州,丁卯, 靜軒《호남절의록》(1799)1627년(인조5) 2월 7일에 고순후가 찰방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묘호란의 급박한 사정을 언급하고 호소사(號召使)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또한 호남의병장에 같이 천거된 안방준에게 의병전략과 출병 날짜를 묻고 있다. 이는 안방준의 교유관계와 정묘호란의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2020-03-31 | NO.207
  • 고순후(高循厚)
    고순후(高循厚, 1569~16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도상(道常), 호는 정헌(靜軒)이다. 부 : 高敬命조 : 高孟英증조 : 高雲외조 : 金百鈞처부1 : 洪鵬처부2 : 晋州 姜1591년(선조 24)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형조좌랑刑曹正郞을 지냈다.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06
  • 고용후(高用厚)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선행(善行) 이고 호는 청사(晴沙) 이다.부 : 高敬命조 : 高孟英증조 : 高雲외조 : 金百鈞처부1 : 李麟奇처부2 : 奇弘獻과거 : 1605년(선조 38)에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였다.1605년(선조 38)에 증광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06년(선조 39)에 증광 문과에 합격하였다. 佐郞 을 지냈다.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청사집晴沙集』이 있다.
    2020-08-08 | NO.205
  • 고용후(高用厚)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 본관은 장흥(제주)이다. 제봉 충렬공 고경명( 高敬命)의 여섯째 아들이다. 고조는 현감을 지낸 고자검, 증조는 기묘명현인 하천 고운(高雲), 조부는 하헌 고맹영(高孟英)이다. 어머니는 울산 김씨 부제학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1577년 선조 10년 (정축) 광주 압보촌 옛 집에서 태어났다. 이 때 큰형 효열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1579년 선조 12년 (기묘) 3세 가운데 형 의열공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1589년 선조 22년 (기축) 13세 의열공이 과거에 급제하였다.1590년 선조 23년 (경인) 14세 가운데 형 정자공(의열공)을 모시고 서울에 올라갔다.1591년 선조 24년 (신묘) 15세 숙부 정헌공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1592년 선조 25년 (임진) 16세 왜란이 일어났다. 충렬공이 의병을 일으켜 왕사(王事)를 도울때 선생은 겨우 15세를 지났는데, 울면서 아버지를 따라가니 충렬공이 길에서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너는 울지 말라. 나라를 위해서 한 번 죽는 것이 나의 직분이니 너는 돌아가서 네 어머니와 잘 지내거라. 내가 저술한 시문 몇 편을 모두 너에게 줄터이니 너는 이것을 받아서 잘 간수해 두어라. 늙은 아비는 이번에 죽기를 기약하고 가니 부자가 서로 만날 것을 다시 바랄 수 없다. 오늘의 내 말을 너는 마땅히 뼈에 새기도록 하라"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 가버렸다. 7월 10일에 충렬공과 의열공이 금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593년 선조 26년 (계사) 17세 효열공이 상복을 입고 종군하였다. 효열공이 의병을 일으켜 출병하던 날 울면서 모부인에 작별하고 문을 나서다가, 다시 말을 세우고 내려 앉아서 선생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오늘 어머님 얼굴을 영결하느라고 너에게 일과(日課)의 학문을 가르쳐 주는 것을 잊었구나"하고, 조용히 일러주기를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너는 반드시 힘써서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6월 29일에 효열공과 증 주부 경형(贈 主簿 敬兄:선생의 庶叔)이 남강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594년 선조 27년 (갑오) 18세 흉년이 들자 선조가 전라감사에게 하유(下諭)하기를 "고경명의 처자가 광주에 있다고 하니, 경은 그 곳 관원으로 하여금 월봉(月俸)을 지급하도록 하라. 이것은 우리나라 공사례(公事例)에 시행치 않았던 일이나 이번만은 반드시 착실히 시행토록 하라"고 했다.1597년 선조 30년 (정유) 21세 어머니를 모시고 안동으로 가서 난을 피했다. 겨울에 누님 노씨(盧氏)부인과 종매 안씨(安氏)부인이 칼로 자결했다는 흉음을 들었다.1598년 선조 31년 (무술) 22세 봄에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왔다.1600년 선조 33년 (경자) 24세 10월에 조카 월봉공(月峰公) 부천(傅川)과 함께 금강을 지나면서 시를 지어 감회를 읊었다.1603년 선조 36년 (계묘) 27세 원배(元配) 이씨(李氏)의 상을 당했다.1605년 선조 38년 (을사) 29세 사마시의 진사, 생원 두 시험에 합격했는데 진사는 장원이었다.1606년 선조 39년 (병오) 30세 문과의 병과 제3인으로 급제하였다.1607년 선조 40년 (정미) 31세 여름에 권지정자(權知正字)에서 특별히 차례를 뛰어넘어 6품에 승진했고 공조좌랑을 제수 받았다. 이 해 겨울에 태인의 수령이 되기를 청해 얻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1608년 선조 41년 (무신) 32세 여름에 「정기록」을 간행했다. 이 해 12월 12일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1609년 광해 원년 (기유) 33세 3월 경인에 충렬공의 묘를 장성 오동리 오좌원으로 이장하고 어머니를 왼편에 부장하였다.1610년 광해 2년 (경술) 섣달 12일에 어머니의 대상을 지냈다.1611년 광해 3년 (신해) 35세 조부 대간공에게 우의정이 증직되었다.1612년 광해 4년 (임자) 36세 생진회시(生進會試)에 장시관(掌試官)이 되었다.1613년 광해 5년 (계축) 37세 하절사(賀節使) 서장관으로 중국에 입조하였다.1614년 광해 6년 (갑인) 38세 이 해 봄에 서장관으로서 복명하였다.1616년 광해 7년 (병진) 40세 생진회시에 장시관이 되었다. 이 해 겨울에 병부랑(兵部郞)에서 외직으로 나가 남원의 수령이 되었다.1617년 광해 8년 (정사) 41세「제봉집」과 「서석록」그리고 「격초서(檄草書)」를 발간했다.1618년 광해 9년 (무오) 42세 겨울에 남원의 수령을 그만두고 돌아왔다.1620년 광해 10년 (무오) 43세 가을에 월봉공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입조하였다.1624년 인조 2년 (갑자) 48세 영해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체임되었다.1630년 인조 8년 (경오) 54세 판결사(判決事)로서 중국에 입조하였다. 서교(西郊)의 전별자리에서 술잔으로 김자점(金自點)의 뺨을 쳤다.1632년 인조 10년 (임신) 56세 11월에 안우산(安牛山) 방준(邦俊)이 이연평(李延平) 귀(貴)에게 글을 보내어 선생을 구제하였다.1633년 인조 11년 (계유) 57세 계배(繼配) 기씨(奇氏)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 해 여름에 특명으로 진주에 유배되었다.1635년 인조 13년 (올해) 59세 또 특명으로 서울에서 가까운 임천(林川)고을로 옮겼다. 출발에 임하여 제문을 지어가지고 백씨를 촉석강가에서 제사지냈다. 제문은 효열공 유적 아래에 나온다. 이 해 11월에 안우산이 또 윤해창(尹海昌)에게 글을 보내어 선생을 구제하였다.1636년 인조 14년 (병자) 60세 6월에 조카 월봉공의 죽음을 곡하였다.1637년 인조 15년 (정축) 61세 봄에 석방되었다. 이 해에 조카 참봉공(효열공의 큰아들 傅立)의 상을 당했다.1640년 인조 18년 (경진) 64세 이 해 가을에 숙부 정헌공의 상을 당하였다. 겨울에 김숙도(淸陰金叔度)를 심양(瀋陽)으로 보내면서 시를 주었다.1648년 인조 26년 (무자) 72세 모월 모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 해 모월 모일에 장성 오동리 충렬공의 묘 계하(階下) 오른쪽 오좌원에 장사지냈다.『청사집晴沙集』이 있다.
    2020-03-18 | NO.204
  • 고의후
    고의후(高依厚, 1569~?), 湖節4中-041-1, 光州, 甲子, 林檜倡義-《호남절의록》(1799)고의후의 자는 여식(汝植)이고 본관은 장흥이다. 생원(生員) 고중영(高仲英)의 손자이고, 유학(幼學) 고경선(高敬先)의 아들이나 광주목사(廣州牧使) 고경조(高敬祖)가 그의 생부이다.1606년(선조 39)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고, 문장과 행의가 높아 당대에 유명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발발하자 거의유사(擧義有司)가 되어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아들 고부필(高傅弼)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의병을 모집하였다.
    2020-04-01 | NO.203
  • 고의후(高依厚)
    고의후(高依厚, 1569~1640)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여식(汝植) 이고 호는 호은(湖隱) 이다.부 : 高敬先생부 : 高敬祖조 : 高仲英증조 : 高雲외조 : 靈光 金之達처부1 : 全州 李禧覃1606년(선조 39)에 식년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07년 9월 8일 義巖書院을 세울 때 광주유사로 참여하였다.
    2020-08-08 | NO.202
  • 고인후
    고인후(高因厚, 1561~1592), 湖節1上-041-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고인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며,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1577년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권지 학유(權知學諭)로 보임되었다. 이어 승문원정자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이끌고 북상, 공주에 이르러 선조가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 귀향시켰다.이때 광주의 향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이들을 다시 모아 형 고종후와 함께 광주 일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거느리고 수원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목사(牧使)권율(權慄)에게 이들을 넘겨주고  행재소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귀향중에 북상중인 아버지의 의병 본진과 태인(泰仁)에서 합류하였다.의병이 여산(礪山)에 이르러 황간(黃澗)·영동(永同)의 왜적이 장차 전라도로 침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금산으로 향하였다. 금산에서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방어하기로 하였으나, 왜적이 침입하자 관군이 먼저 붕괴되고, 이에 따라 의병마저 무너져 아버지 고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1592년 7월 전사할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예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열(毅烈)이다.고인후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지조가 강개하여, 세속의 영욕과 이해득실에는 항시 초연하고 조금도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대단해서 한번 글을 읽으면 종신토록 잊지 않았다. 문장을 잘 지어서 임진왜란 때에 지은 격문(檄文)은 고경명의 수초(手草)가 아니면, 고인후 형제의 손에서 많이 나왔었다. 의병을 일으킬 적에 고경명은 스스로 자기 옷 위에다 이름을 썼는데, 고인후 형제도 또한 그렇게 하였다. 대개 이것은 뒷날 시체를 찾는 데 증표가 되게 하려는 것으로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이 이미 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020-04-01 | NO.201
  • 고일립
    고일립(高日立), 湖節5上-088-3, 光州, 丙子, 安邦俊倡義 -《호남절의록》(1799)정묘·병자호란 때는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고일립은 병자호란 때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소식을 듣고 모은 곡식을 영에 납입하고 돌아왔다 한다.
    2020-04-01 | NO.200
  • 고종후
    고종후(高從厚, 1554~1593), 湖節1下-163-2, 光州, 壬辰, 孝烈公-《호남절의록》(1799)고종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부봉(阜峯)이다. 광주 출신.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1570년(선조 3) 진사가 되고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관정자가 되었다.이어서 전적·감찰·예조좌랑을 거쳐 1588년 임피현령(臨陂縣令)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지제교(知製敎)로 기용되었으나 다시 탄핵을 받고 향리인 광주로 내려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전라도 관군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다가 공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했다.아버지 고경명의 뜻에 따라 아우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각지에 흩어진 군졸들을 설득해 다시 모아 수원에 있는 권율에게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에 태인에서 고경명의 의병군과 합류하였다. 다시 아버지의 명에 따라 금구·김제·임피 등지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 여산의 본진에 돌아왔다.이 때 왜적이 황간·영동에 머무르며 장차 금산을 공략하고 전주를 경유,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금산으로 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왜적의 침략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왜적이 침입하자 싸우기도 전에 관군은 붕괴되고 의병군마저 흩어져 아버지와 아우가 전사하자 시체를 거두어 유체(遺體)를 수습하여 몰래 금산 산중에 묻어두었다가, 40여 일만에 다시 찾아서 고향 광주(光州) 창평(昌平)에 장사지냈다.이듬해 400여 명의 의병을 규합,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해 하동에 이르러 왜적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왜적은 대군으로 진주를 공략한 뒤 호남지방으로 침입하려 하므로 진주를 지키기 위해 휘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가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진주성을 사수하기로 했다.진주성이 적에게 포위되어 격전이 계속된 지 9일째인 6월 29일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적의 대공세 앞에 겁을 먹고 도망치자 진중은 혼란을 일으켜 무너지게 되었다. 왜적이 성안으로 물밀듯이 몰려와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고종후는 북향해 재배한 뒤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이들 세 사람을 ‘삼장사(三壯士)’라고 불렀다.그때 고종후의 나이가 40세였다. 6~7만 명의 진주성 사람들이 거의 왜적에게 죽음을 당하였고, 그 일부는 강물에 투신자살하였다.고종후의 유체(遺體)를 진주 남강에서 찾지 못하여 묘소를 만들지 못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그를 도승지(都承旨)에 추증하였으며, 왕세자(王世子) 광해군(光海君)도 별도로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그 뒤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고경명의 ‘포충사(褒忠祠)’에 함께 배향하였다. 숙종(肅宗) 때 시호를 ‘효열(孝烈)’이라 내려주었다.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있다.(『약천집(藥泉集)』 권23 「증이조판서고공청시행장(贈吏曹判書高公請諡行狀)」)고종후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정직하였다. 그의 문장은 준일(俊逸)하고 경발(警發)하며, 지필(紙筆)을 잡으면 지체 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의병을 일으킬 때 그가 쓴 격문이 사방에 전달되자 그 글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광주의 포충사(褒忠祠)와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2020-04-01 | NO.199
  • 고한빙
    고한빙(高漢聘), 湖節5中-120-3, 光州, 戊申, 倡義-《호남절의록》(1799)
    2020-04-01 | NO.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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