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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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제민
- 송제민(宋濟民), 湖節1上-057-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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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지묵(宋智默)
- 송지묵(1842~1886)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시묵(時黙), 자는 여오(汝吾)이고 호는 우재(愚齋)이다.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현감 宋駒의 후손으로 착한 성품으로 선대의 미덕을 실천하고 몸소 밭 갈아 양친하고 글 읽어 학식을 넓이니 경전의 깊은 뜻의 문답 수십 권을 남겼다. 부 : 宋來奎조 : 宋一賢증조 : 宋守浩외조 : 鄭杞燦처부1 : 李宗憲
- 2020-03-06 | NO.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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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천 양응정(1519~1581)
- 양응정은 1519(중종14)년 전라도 화순군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자는 공섭(公燮), 호 송천(松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담梁湛,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다. 어머니는 금산김씨로 김화金話의 딸이다. 형은 동래부사를 지낸 양응태이고 의병장을 지낸 양산숙이 셋째 아들이다.부친 양팽손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화순 중조산 아래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둔하였으므로 조양대에서 수학했다. 1540년 생원시에 장원했다.1552(명종7)년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 등을 지냈다. 1556년 병조좌랑으로 문과 중시에서 장원급제하여 특출한 실력을 내보였으며 호당湖堂(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에서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명종15)년에 복직되었다. 다시 외직으로 관서 관북 평사評事로 지내다가 능주에서 나주 박산으로 이주하여 조양대와 임류정을 짓고 시주와 강학을 일삼았다. 1563년 순창군수에 부임하였다가 1565년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영전하였다. 이후 1567년 광주 목사, 진주 목사를 거쳐 1571(선조4)년 경주부윤이 되어 1574년까지 재임하다가 진주목사 재직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76년에 의주부윤으로 기용되었고 이듬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전남 나주에서 경전연구와 생도, 자제 교수에 전념하다가 1581(선조14)년 세상을 떠났다. 김인후, 임억령, 이안눌 등과 교유하였고, 정철(鄭澈)·백광훈(白光勳)·최경창(崔慶昌) 등의 제자를 길렀다. 세 아들을 이이ㆍ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양응정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에 있으며,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1631(인조9)년 아들 양산숙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자 추은을 입어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진본 청구영언》에 “太平 天地間에 簞瓢 두러메고 / 두 매 느리혀고 우즑우즑 은 / 人世에 걸닌 일 업스니 그 죠하노라”와 “嚴冬에 뵈 옷 닙고 岩穴에 눈비 마자 / 구룸 볏 뉘 적이 업건마 / 西山에 지다니 눈물겨워 노라”의 시조 2편이 전한다. 저서로 《송천유집 松川遺集》, 《용성창수록 龍城唱酬錄》이 있다.
- 2020-04-28 | NO.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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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택휴 宋宅休 영조 46년(1770) 2월 4일∼영조 48년(1772) 6월 4일
- 송택휴 宋宅休 영조 46년(1770) 2월 4일∼영조 48년(1772) 6월 4일송택휴(1711∼?)의 본관은 진천(鎭川)이며, 자는 여규(汝揆)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송위 손(宋胃孫)이다. 1740년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하여 1746년 금부도사, 1749년 동몽교 관, 1755년 종부시 주부, 1756년 공조좌랑·영동현감, 1762년 우장사(右⾧史), 1763년 선혜청 낭청, 1764년 고양군수, 1767년 순흥부사를 지냈다. 1770년 2월 4일 나주목 사로 부임하여 재임 중 5월 7일 의금부에서 불러 조사를 받았고, 1772년 5월 29일 실록에 의하면 “김선(⾦煊)을 승진시켜 첨지를 삼게 하였다. 김선은 호남인인데, 헌납으 로서 입시하여 나주목사 송택휴의 탐학한 실상을 논했었다. …… 해부(該府)로 하여금 송택휴를 잡아오게 하였다.”라 된 것으로 보아 6월 4일에 파직을 당하고 이임을 하게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경인(1770년) 2월 4일 부임하였고 임진(1772년) 6월 4일에 대간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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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학묵(宋鶴黙)
- 전략가로서 광주와 담양에서 의병활동을 한 송학묵(1870∼1909)의 자는 자화(子化), 본관은 홍주이다. 해광 송제민의 10세손이며 송래영(宋來永)의 둘째아들로 북구 본촌동(용두동 거진마을) 출신이다.증조부는 송수대(宋守大)이고, 조부는 송삼현(宋三賢)이며, 부친은 송내영(宋來永)이다. 외조부는 광주노씨(光州盧氏) 노계주(盧啓胄)이고, 처부는 창녕조씨(昌寧曺氏) 조준(曺駿)이다.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킬 결심을 하고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극락강 상류 삼각산 요처에서 의병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왜병이 포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듣고 적과 10리쯤의 거리를 두고 백주에 강을 건너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이를 고지에서 관망한 왜군은 어둠을 타고 추격하니 적의 전략을 미리 알고 북으로부터 다시 회군하여 자기 진지로 돌아와서 훈련을 계속하므로 부하들이 그 전략에 감복하였다.그런데 어느 날 훈련 중에 적에게 포위되자 의병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자 그는 군사를 향하여 “만일 혼란을 일으키면 대사가 와해될 염려가 있으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내 계책을 따르라.”하고 “한 시간 후에 산 위에서 총소리가 나면 모두 동쪽으로 탈출하라.”고 하였다. 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이 태연히 남산(南山)으로 올라가 몇 방의 총성을 내어 적을 그쪽으로 유인하여 의병은 한 사람도 다친 사람 없이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1907년 10월에 의병을 일으켜 광주와 담양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 그 활약이 컸다.어느 날 적정을 탐색하기 위해 단총을 몸에 품고 단신으로 적의 경비망 안으로 들어갔다가 도중에 일본 기마병과 마주치게 되어 그의 등 뒤를 쏘아 사살하고 총검을 노획하여 돌아왔다.그런데 1909년 3월로 접어들면서 전국의 의병은 불리하게 되거나 살상당해 그 전력이 크게 쇠퇴하였는데 송학묵도 마침내 짙은 안개 속에서 적과 싸우다가 체포당하여 광주감옥에 구금됐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으면서 맨주먹으로 감옥을 부수다가 수족(手足)을 모조리 절단당하고 교수형을 받았다.적이 최후의 유언을 묻자, “내가 비록 너희들 칼 앞에 쓰러지나 조금도 유감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넋이 너희 나라에 들어가 너희 국민을 도륙할 것이니 너희 나라가 망하는 날 나의 혼이 길이 살아 있음을 알리라.”라고 꾸짖고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광주시사1(1992)》, 《광주북구지(1994)》
- 2020-03-06 | NO.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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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형묵(宋亨默)
- 송형묵(1856~?)의 본관은 홍주이고 자는 군식(君寔)이다. 오늘날 북구 용두동 지역인 거진에 살았다. 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부 : 宋來璇조 : 宋璡源증조 : 宋命鉉외조 : 許晦
- 2020-03-06 | NO.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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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흠 宋欽 중종 19년(1524) 8월∼중종 20년(1525)
- 송흠 宋欽 중종 19년(1524) 8월∼중종 20년(1525)송흠(1459∼1547)의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영광 출신으로 1533년 전라감사를 역임 하였다. 1515년 여산군수 때 청백리로 선정되어 향표리(鄕表裏)를 하사받았고 1532년 장흥부사 때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중종실록』에 사관이 “도내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朴守良)을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한 기록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가정 갑신(1524년) 8월에 도임하였고, 을유 (1525년)에 부친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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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흠(宋欽, 1459~1547) 행장
- 송흠(宋欽, 1459~1547) 행장조선 전기 16세기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이며 문신이다. 송흠의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성종 대에 승문원(承文院)에서 일했으나, 연산군 때에 폭정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 본문의 글을 읽은 인공지능이 그린 송흠의 초상화중종 재위 이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 병조정랑(兵曹 正郞) · 전라도사(全羅都事) ·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 이조판서(吏曹判書) · 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1459년(세조 5) 출생하였다. 고조할아버지 송현덕(宋玄德)은 판사재 감사(判司宰監事), 증조할아버지 송귀(宋龜)는 증병조 참판(贈兵曹參判), 할아버지 송처은(宋處殷)은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지냈다가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송가원(宋可元)은 문소전 참봉(文昭殿參奉)을 지냈다가 우찬성(右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는 생원 정필주(鄭弼周)의 딸이다.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입격하고, 1492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연산군 대 폭정으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고 경전을 강론하는 일에 힘썼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따르면,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홍문관 정자(正字) · 박사(博士) · 수찬(修撰) ·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 헌납(獻納) · 병조정랑 · 전라도사 · 사헌부 지평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다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506년(중종 1) 지평에 임명되었던 기록부터 확인된다. 1528년 담양부사, 1531년에 장흥부사를 지내고 어머니의의 나이가 많아지게 되자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신청해 전주부윤으로 전임, 뒤에 광주목사·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보성군수(寶城郡守) · 옥천군수(沃川郡守) · 순천부사(順天府使) · 여산군수(礪山郡守)로 근무하였다.노모의 봉양 외에는 처자와 노복이 굶주림과 추위를 겨우 면할 뿐, 벼슬이 갈려 돌아오는 날에는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었다 한다.1534년 77세의 나이에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제수받았지만 어머니의 연세가 99세나 되어 봉양에 힘쓰고자 사직 상소를 올려 중종의 허락을 받았다. 이후 어머니에 대한 봉양에 힘썼다. 어머니가 101세의 나이로 돌아가시자 본인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상례와 관련된 모든 절차에 정성을 다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01세를 산 노모로 인해 전후 7회에 걸쳐 효렴(孝廉)으로서 상을 받았다.1538년 한성부좌윤,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이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나이를 이유로 사직하였다. 1543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지경연사에 이르렀다. 1547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기묘사화 뒤에는 한때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觀水亭’이라는 액자를 걸어서 자기의 뜻을 붙였다. 수학(數學)에 정통했다고 한다. 영광의 수강사(壽岡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묘소는 전라도 영광(靈光) 선방산(船舫山)의 언덕에 있는데, 그의 7세손 송명현(宋命賢)의 부탁으로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41) 부인 하음봉씨(河陰奉氏)는 감찰(監察)봉인(奉寅)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익침(宋益忱)은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둘째 송익경(宋益憬)은 낙안 현령(樂安縣令)을 지냈고, 셋째 송익순(宋益恂)은 참봉(參奉)이고, 막내는 송익성(宋益惺)이다. 송익경과 송익성은 후사가 없고 송익순은 2녀를 두었다.
- 2025-09-16 | NO.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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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지 증(贈)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이동표(李東標)
- 승지 증(贈)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이동표(李東標, 1644~1700)-사신(詞臣)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연암집 제9권 별집 /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금상(今上) 8년 갑진년(1784)에 영남 유생 아무개 등 몇 사람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 )께서 특별히 고(故) 승지 신(臣) 이동표(李東標)에게 이조 판서의 관직을 추증하시고, 그 고신(告身)에 ‘청의(淸議)를 힘써 주장하여 수립한 공로가 남보다 뛰어났다.〔力主淸議 樹立卓然〕’라는 여덟 자를 쓰도록 명하여 포창(褒彰)하였으니, 조정에서 이룩한 대절(大節)이 이에 밝게 빛을 발하고 위대하게 드러나, 공이 기사년(1689)에 구원하려고 했던 박태보(朴泰輔), 오두인(吳斗寅) 등 여러 충신들과 아울러 백세(百世)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적의 본말에 있어서는 임금이 임종하시기 직전이라 상세히 아뢰지 못한 바가 있어,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밝게 다스려진 이 시대에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으니, 지사(志士)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유감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옛날 송(宋) 나라 신하 공도보(孔道輔)는 벼슬이 중승(中丞)이요, 추호(鄒浩)는 벼슬이 우정언(右正言)이었습니다. 법으로 따지자면 마땅히 시호를 얻지 못할 처지인데도 단지 곧은 절개로써 둘 다 당대에 훌륭한 시호를 얻었습니다. 지금 동표(東標)가 행한 의리는 이들 옛 성현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순수하고 심오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음(兪音 허락하는 조서 )을 내리시어 특별히 동표에게 증시(贈諡)의 은전을 거행케 하여 주소서. 신 등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이 소(疏)가 아침에 올라가자 저녁에 회보를 내리기를,“그가 행한 의리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소청(疏請)한 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윤허한다.”하였다. 이에 그 일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 )에 내리자 백관들은 경외하며 우러러보고 사림(士林)들은 면목이 섰다.모(某 서유린(徐有隣) )는 일찍이 관각(館閣)의 직책을 맡았고 사관(史官)을 맡은 적이 있으니, 어진 사대부의 덕업(德業 덕행과 사업 )과 명행(名行 명성과 품행 )에 대하여 기꺼이 드러내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이 시장(諡狀)을 짓는 데 있어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으랴.삼가 살피건대, 공(公)의 자는 군칙(君則)이요, 호는 나은(懶隱)이요, 그 선세(先世)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고려 말엽에 활동한 휘(諱) 자수(子修)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건적(紅巾賊) 토벌을 도와 공신이 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6세조 휘 우(堣)는 경학과 문장으로써 정릉조(靖陵朝 중종(中宗) )에 이름을 드날려 세상 사람들이 송재(松齋)라 불렀는데, 이분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의 숙부(叔父)가 된다. 증조(曾祖)인 휘 일도(逸道)는 봉사(奉事)를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조(祖)인 휘 지형(之馨)은 참봉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광해조(光海朝)에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고(考)인 휘 운익(雲翼)은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종조숙부(從祖叔父) 휘 지온(之馧)에게 출계(出系 양자로 나감 )하였다. 비(妣)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생원(生員) 기후(基厚)의 따님이다.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4월 5일에 공(公)을 낳으니, 용모가 뛰어나고 인품을 타고났다. 지학(志學 15세 )의 나이 때부터 분발하여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한 가지 기예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처사공(處士公 부친 이운익 )의 임종 시 부탁을 받고 난 뒤로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아우와 더불어 날마다 반드시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자리를 맞대고 학문을 강론하여 침식을 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그 아우가 죽게 되자 공은 비로소 과거(科擧) 공부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모부인(母夫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을묘년(1675)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니 선비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일찍이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고관(考官)들이 사석에서 서로 말하기를,“재주와 학식이 이모(李某)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마땅히 장원을 차지할 것이다.”하였는데, 공은 어렴풋이 이 말을 듣고서 시험 당일이 되자 일부러 머리를 천 번이나 빗고 또 빗으며 늑장을 부려 마침내 과장(科場)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 나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천소(李千梳)라 부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정사년(1677)의 증광시(增廣試)에 회시(會試) 장원(壯元)이 되었으나 얼마 뒤 곧 파방(罷榜 급제자 발표 취소 )이 되었고, 계해년(1683)의 증광시에 또다시 회시 장원이 되어 삼관(三館)에 분관(分館)하게 되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영남 선비들의 여론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한다.”하고서, 마침내 성균관에 눌러두어 4년 동안 등용되지 못했다.정묘년(1687)에 외직으로 쫓겨나 창락 찰방(昌樂察訪)에 제수되었다.기사년(1689)에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 )에 천거되고 다시 남상(南床 홍문관 정자 )에 의선(議選 선발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전적(典籍)으로 품계를 뛰어 넘어 승진되고 그 이튿날에 홍문관 부수찬에 특별히 제수되니, 공이 너무 빠른 승진이라 하여 사양하고 소명(召命)에 나가지 않았다.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가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언하였다.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여 이들을 모두 대궐 뜰에서 국문하니, 오두인과 박태보 두 분 모두 국문의 여독으로 귀양 도중 길에서 죽었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이 일로써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죄로써 다스리겠다.”하였다. 공이 이때 시골집에 있다가 변을 듣고 상소를 지어 극언을 올리려 하다가 나이 많은 태부인(太夫人 어머니 )에게 큰 슬픔을 끼칠까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태부인이 그 말을 기껍게 듣고는 공을 재촉해서 길에 오르게 하였다.공이 서울에 당도하자, 상소 내용 가운데, “옥산의 새 무덤엔 양마석(羊馬石)이 우뚝 서고, 여양의 옛집은 기상이 참담하다.〔玉山新阡 羊馬嵯峨 驪陽舊宅 氣像愁慘〕”라는 말이 있어 보는 자마다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그 상소에 또 이르기를,“전하께서 이세화(李世華)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다 풀어 주셨으나 이상진(李尙眞)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다 풀어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하고 똑같이 사랑하는 도(道)이겠습니까. 아! 일을 만나면 논쟁하는 것이 신하된 직분이거늘 전하의 오늘날 처사에 대하여 모두가 분부에 순종하여 한 사람도 과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사람들이 전하의 조정에 서서 전하의 녹을 먹고 있는 자를 충신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라 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 중에는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언하기를 갑자기 중지한 것을 가지고 지금도 한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 마음이 어찌 다 전하께 불충하거나 국가의 계책을 근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후회한다는 한 마디 말씀을 아끼시고 사방 백성의 소망을 가볍게 저버리려 하십니까.”하였고, 또 이르기를,“조사기(趙嗣基)의 말이 궁위(宮闈)를 범하여 보고 듣기에 놀라운 점이 있는데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갑자기 정지시키셨으니 신은 이를 애석히 여깁니다.”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일이 장차 어찌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임금의 마음이 풀려 그 죄가 파출(罷黜)에 그쳤다.곧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여론을 쥐고 있는 자들이 노봉(老峯) 민공(閔公)을 논계(論啓)하여 기어코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삼사(三司)가 일제히 모여 공에게 논계에 참여하기를 청하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곤성(坤聖 인현왕후 )께서 폐위되던 날에 여러분이 머리가 부서지도록 힘껏 간(諫)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죽는 의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또다시 이 사람마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성모(聖母 인현왕후 )에 대해 어찌 하려는 것인가?”하였다. 이담명(李聃命)이 이 주장을 특히 강력하게 지지하여 붓과 벼루를 앞에다 내놓으며 말하기를,“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계사를 기초하라.”하니, 공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그대가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하면서 어찌 남의 붓을 빌리려 하는가.”하고서, 마침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그 뒤 사간원 헌납, - 원문 빠짐 - 수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나랏일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나갈 뜻을 끊어 버리고 영천암(靈泉巖)을 사랑하여 그곳에다 집을 지어 놓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삼아 평생토록 지낼 듯이 하였다.경오년(1690)에 또 헌납과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그 이듬해 봄에 공의 경학(經學)으로 보아 외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고 이어 수찬으로 옮겼다. 임금이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묘 )에 행행(幸行)할 때 호종하였는데, 임금이 육신묘(六臣墓)를 지나면서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불가함을 고집하면서 그 이유로써 《춘추(春秋)》의 “어버이를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긴다.〔爲親者諱〕”는 대문을 들고 나오자, 공이 홀로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광묘(光廟 세조(世祖) )께서 이미 육신을 죽였으니 만약 그 충절을 포장(褒獎)해 준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교리에 제수되자 휴가를 청하여 근친(覲親)하였고, 가을에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교리로 옮겨 제수되었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광대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명하자, 공이 아뢰기를,“광대의 잡희(雜戱)는 성인(聖人)이 싫어하신 바이니 아마도 정색(正色)을 함으로써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하였다.일찍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이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논했는데 절실한 말들이 많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지조가 꿋꿋했으며 풍도가 준엄하였고, 경연(經筵)에서 경서(經書)를 펼쳐 놓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뜻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속에 따라 적당히 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자주 근친을 위한 휴가를 청하고 이로 인해 아주 떠나 버리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매번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공에게 따뜻한 봄이 되면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라 명한 다음, 모친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내려 특별히 은총을 베풀었다.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이조좌랑 겸 시강원사서(吏曹佐郞兼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이수인(李壽仁)과 유재(柳栽)를 청환직(淸宦職)에 통망(通望 후보 추천 )하자고 하자, 공이 유재는 문학(文學)이 없고 이수인은 일찍이 기사년의 대론(大論)을 피해 갔다는 이유를 들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민장도(閔章道)를 통망하자고 하였는데, 그 아비 민암(閔黯)이 당시에 국권을 잡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장도는 평소 훌륭한 행실이 없다.”하고, 매우 준엄하게 막아 버렸다. 이에 강요를 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심지어 화복(禍福)으로써 유혹하기까지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내 이따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하며, 그날로 정고(呈告 사직서를 올림 )하고 비를 무릅쓰고 남으로 돌아갔다. 도롱이를 입고 배에 오르니 공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서로 말하기를,“오늘 ‘작은 퇴계〔小退溪〕’를 다시 보게 되었도다.”하였다.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학문을 강론하려는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그들과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헌납, 부교리, 교리, 겸교수에 제수되고 얼마 후 헌납으로 옮겨 제수되고 다시 이조 좌랑, 겸문학, 교리, 겸필선(兼弼善)에 제수되고 또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천암(靈泉巖)의 별장에 거처하여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으면서 지냈는데, 이때 문인(門人)에게 답한 태극(太極)에 대한 변설(辨說)과, ‘천리와 인욕이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天理人欲同行異情〕’는 설에 대한 해석은 그 연구가 극히 정미(精微)하였다.계유년(1693)에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시강원 보덕에 오르고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다.이렇게 전후로 역마(驛馬)를 보내 부른 것이 13차례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명에 응하였다. 이때 장희재(張希載)가 장부(將符)를 차고 있으면서 권세를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그의 노비 가운데 심하게 우쭐대는 놈을 호되게 처벌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통쾌히 여겼다.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겨 제수되자 또 휴가를 빌어 귀성하였다. 사간 겸 중학교수(司諫兼中學敎授)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이와 함께 시정(時政)을 논하기를,“주자(朱子)는 ‘사대부의 출처거취(出處去就)가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한 번이라도 소명(召命)을 어기면 곧바로 이조의 논의를 따라 하옥하고 갈아 치우니, 이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臺官)이 자기 직책을 소홀히 한 지 실로 이미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간신(諫臣)을 대우하는 것 또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열 사람의 대간(臺諫)이 강하게 간쟁을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던 일을 대신(大臣) 한 사람의 한 마디 말에 거뜬히 해결이 되며, 뻣뻣하게 남의 말을 거부하는 기색이 있을 뿐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미덕은 없으시니, 오늘날 언로(言路)가 막혀 버린 것이 어찌 모두가 어물쩡 넘어가는 신하들만의 죄이겠습니까. 군신간에 존재하는 정의(情義)가 신뢰감을 잃고 질책만 뒤따르니, 신하들이 무서워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오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惶恐待罪〕’만 나불대는 승정원(承政院)과 ‘성교가 지당하십니다.〔聖敎至當〕’만 나불대는 비변사(備邊司)를 불행히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더구나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조정의 신하를 들어 쓰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셨습니다. 한창 중용할 때에는 마치 무릎 위에라도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밀어내어 배척할 때에는 못에다 떨어뜨릴 듯이 하였으며, 정권을 바꿔 치울 때에는 대대적으로 주살(誅殺)을 행하였으니, 국운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인심이 어떻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대하여 은혜와 원수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장차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내언(內言)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고 외언(外言)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와 정도(正道)를 거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소인들이 사악한 농간을 부리는 매개가 되는 것이니, 임금이 그 술책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들의 술책대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러한 은밀한 샛길을 호되게 막으소서.”하였다.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고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조정에 돌아오자 곧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왕명에 사은하는 날 임금이 초모(貂帽)를 내리고 탑전(榻前)에서 써 보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광주목사(光州牧使, 1694)로 나가 요역(繇役)을 줄이고 민폐(民弊)를 혁파하니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나, 관찰사와 일의 가부(可否)를 다투다가 마침내 수령의 인(印)을 던지고 돌아왔다.을해년(1695)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병자년(1696)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누차 부제학, 대사성, 이조 참의의 물망에 올랐는데, 급기야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모두들 공이 나가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공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지조만은 시종 한결같이 지키면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을이 한가하고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기도 해서, 한 고을을 힘껏 잘 다스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유랑하여 고을이 거의 다 비게 되었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휼하였고, 아울러 삼(蔘), 꿀, 생선, 미역 등을 세금으로 걷던 것을 모두 다 없애주고는 스스로 살길을 찾게 하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흉년 구제에 대한 편의를 요청하자 임금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정승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그 당시 암행어사가 되어 수계(繡啓)에서 공의 업적을 칭찬하였고, 해직하고 돌아온 뒤에는 그 고을 사민(士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동비(銅碑)를 만들어 그 덕을 칭송하였다.무인년(1698) 겨울에 모친상을 만나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살피며 호곡(號哭)하였는데, 아무리 모진 바람과 심한 비가 내려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2년 뒤인 경진년(1700) 7월 17일, 마침내 그 슬픔으로 수척해진 끝에 졸하니 향년 57세였다. 수의(襚衣)가 만들어지는 대로 염(斂)을 마치고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공이 낳은 아들과 손자들은 지갈(誌碣 묘지와 묘갈 )에 실려 있으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아아! 사대부 간의 명론(名論)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나라의 불행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는 단지 그들이 어질다고 여기는 분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이에 따라 호오(好惡)가 편파적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평피의 기회〔平陂之會〕에 이르러 번갈아 국시(國是)를 정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천정(天定)이면 세운(世運)이 융성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인승(人勝)이면 명의(名義 명분과 도의 )가 어긋나고 어지러워질 것이니, 이는 호오가 공정하냐 아니냐에 달렸을 뿐이다.나은(懶隱) 이공(李公)을 삼가 살펴본 적이 있는데, 공은 국시가 무너지던 날에 초연히 우뚝 서서 권세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화(禍)를 당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윤리를 힘껏 지켜 나갔으니, 스스로 충정(忠正)을 견지하고 평소 의리에 밝아서 공정한 천정(天定)을 확실하게 자득한 자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아마도 공에게 가까운 말이 될 것이다.영남(嶺南)이란 곳은 본래 우리나라의 추로(鄒魯)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그 호오에 있어 공과 차이가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무니, 이 또한 나은(懶隱)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사년 이후로 한결같이 명의(名義)로 인해 질책을 받았으니, 이는 국시를 통일시키고 호오를 함께하려는 조정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선조(先朝 영조(英祖) )께서 관직을 추증하는 은전을 내리고 금상(今上)께서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린 것이 어찌 다만 공의 이름과 덕이 온 나라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공이 모범을 보인 것이 저렇듯이 우뚝하니, 이 때문에 권장하고 격려하는 임금의 뜻도 전후에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러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이 일에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삼가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경위를 수집하여 집사(執事)에게 고하노라.[주-C001] 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을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주-D001] 사신(詞臣) : 왕을 측근에서 수행하면서 각종의 글을 기초하는 문학시종(文學侍從)의 신하를 말한다. 시장(諡狀)은 봉상시와 홍문관에서 작성하므로, 여기서는 홍문관 관원을 가리킨다.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권8에 수록된 시장(諡狀)은 연암이 지은 시장을 바탕으로 한 글인데 지은이가 서유린(徐有隣)으로 되어 있다. 서유린은 연암의 절친한 벗으로, 시장을 찬진할 당시 이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겸하고 있었다.[주-D002] 영남 …… 사람 : 안동(安東) 유생 권이도(權履度) 등을 가리킨다. 《正祖實錄 8年 11月 5日》[주-D003] 공도보(孔道輔) : 공자의 45대손으로, 송 나라 인종(仁宗)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자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곽 황후(郭皇后)의 폐위에 극력 반대하여 직신(直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후인 인종 황우(皇祐) 3년(1051)에 공부시랑(工部侍郞)에 특별히 증직(贈職)되었다고 하나,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宋史 卷297 孔道輔傳》[주-D004] 추호(鄒浩) : 송 나라 철종(哲宗) 때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되자 맹후(孟后)의 폐위를 반대했으며 그 일로 인해 두 번이나 귀양을 갔다가 복직되었다. 사후인 고종(高宗) 즉위 초에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증직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宋史 卷345 鄒浩傳》[주-D005] 민정중(閔鼎重) :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송시열의 문인이자 서인의 지도자로서 좌의정까지 지냈으나 기사환국 이후 귀양 가서 죽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은 그의 동생이다.[주-D006] 옥산(玉山)의 …… 참담하다 : 옥산은 장희빈의 본관인 인동(仁同)의 별칭으로 그 선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여양은 인현왕후의 본관인 여흥(驪興)의 별칭으로 그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 말은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된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주-D007] 이세화(李世華) : 1630~1701. 경상 감사를 지낸 뒤 향리에 있다가,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에 참여하여 숙종의 친국(親鞫)을 받은 후 유배가던 중 풀려났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서용되어 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주-D008] 이상진(李尙眞) : 1614~1690.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여 간언(諫言)하다가 종성(鍾城) 등지로 귀양을 갔다. 그 뒤 용서되어 향리에서 은둔하던 중 죽었다.[주-D009] 조사기(趙嗣基)의 …… 범하여 : 궁위(宮闈)는 현종(顯宗)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호군(護軍)으로 있던 조사기가 상소를 올려 명성왕후의 지문(誌文)을 지은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명성왕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3월 27일 조에 조사기의 상소가 실려 있다. 조사기는 이 상소로 인해 숙종 20년에 참형을 당하였다.[주-D010] 이 상소 :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5월 27일 조에 이 상소가 실려 있다.[주-D011] 나라를 …… 의리 : 원문은 ‘循國之義’로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殉國之義’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12] 이담명(李聃命) : 1646~1701. 남인(南人)으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홍주 목사에서 파직되었으나, 숙종 9년(1683) 복관되어 감사, 참판 등을 지냈다.[주-D013] 원문 빠짐 : 이동표의 문집인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부록 권8에 실린 홍중효(洪重孝) 찬(撰) 묘지명에는 ‘겸지제교(兼知製敎)’ 4자가 들어 있다.[주-D014] 《춘추(春秋)》의 …… 숨긴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온다.[주-D015] 과거 …… 명하자 : 유가(遊街)라 하여, 과거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행진하고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지들을 방문하던 풍속이 있었다.[주-D016] 광대의 …… 바이니 : 노(魯) 나라 정공(定公)이 제(齊) 나라 경공(景公)과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때 당시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攝行)하던 공자는 제 나라가 노 나라 정공 앞에서 광대와 난쟁이를 시켜 잡희를 벌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금을 웃긴 죄를 물어 처형하도록 하였다. 《春秋穀梁傳 定公10年》 《史記 卷47 孔子世家》 《孔子家語 卷1 相魯》[주-D017] 정색(正色)을 …… 도리 : 《서경(書經)》 필명(畢命)에서 강왕(康王)은 필공(畢公)에게 훈계하면서 “정색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라.〔正色率下〕”고 하였다. 즉, 안색(顔色)을 엄하게 가짐으로써 아랫사람들이 경외(敬畏)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주-D018] 전형(銓衡)을 맡은 자 : 당시 이조 판서 오시복(吳始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8 行狀》[주-D019] 기사년의 대론(大論) : 숙종 15년(1689)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한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남인(南人)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주-D020] 민장도(閔章道) : 1655~1694.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 민암(閔黯 : 1636~1694)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던 서인들을 체포하여 일대 옥사를 일으키려다가, 도리어 갑술환국을 당해 민장도는 국문 도중 장살(杖殺)되고, 민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주-D021] 심지어 …… 하니 : 이세택(李世澤)이 쓴 행장에 의하면, 이조 판서 오시복은 심지어 사람을 시켜 넌지시 귀띔하기를 “만약 민장도의 추천을 허락한다면, 나도 역시 영남 사람을 통용(通用)하겠다”고 했다 한다. 《懶隱先生文集 卷8》[주-D022] 천리(天理)와 …… 설 : 호굉(胡宏)은 《지언(知言)》에서 천리와 인욕이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며〔同體異用〕,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고 주장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호굉의 주장 중에서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다〔同體異用〕’는 설은 비판하고 물리쳤으나,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는 설은 긍정하여 받아들였다. 즉 시청언동(視聽言動)이나 식색(食色)과 같은 행동은 성인도 범인과 마찬가지이지만, 성인은 그것이 예(禮)와 합치되게 함으로써 천리(天理)를 따른다는 점에서 정(情)이 다르다고 보았다. 《朱子語類 卷101 程子門人 胡康侯》[주-D023] 문인(門人)에게 …… 정미(精微)하였다 : 그의 문인 김이갑(金爾甲 : 자는 원중〈元中〉)에게 준 편지 답김원중문목(答金元中問目)의 내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4》[주-D024] 장희재(張希載)가 …… 있으면서 :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 18년(1692) 총융청(摠戎廳)의 우두머리인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주-D025] 사대부의 …… 관계된다 : 주자는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비단 그 자신만의 일이 아니다. 그 처신의 득실은 바로 풍속의 성쇠에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특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性理大全書 卷50 學8 力行》[주-D026] 예로써 …… 도리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공자는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한다.〔君使臣以禮〕”고 하였다. 신하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주-D027] 내언(內言)이 …… 들어와 : 내언은 여자가 규방에서 하는 말을 가리키고, 외언(外言)은 남자가 공무에 관해 하는 말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외언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하며, 내언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고 하였다.[주-D028] 정호(鄭澔) : 1648~1736.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기사환국 때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풀려나 판서까지 지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파란을 많이 겪었다.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영의정까지 지냈다.[주-D029] 그 당시 …… 칭찬하였고 : 원문은 ‘褒公績’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啓褒公績’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주-D030] 평피의 기회〔平陂之會〕 : 시운에 따라 세력이 크게 변하는 기회를 이른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종 때의 환국(換局)을 가리킨다.[주-D031] 옳다고 …… 것이니 : 천정(天定)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을 뜻하고, 인승(人勝)은 다수 대중의 힘으로 천명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사기》 권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서 신포서(申包胥)는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지만, 천명도 정해지면 사람들을 능히 격파한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는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 평왕(平王)의 시신을 매질하여 복수한 벗 오자서의 난폭한 행동을 나무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한때의 난폭한 행동으로 천명을 어길 수 있을지라도, 천명 역시 화를 내려 난폭한 자들을 징계한다는 뜻이다.[주-D032] 홀로 …… 않는다 :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단사(彖辭)에 “군자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君子以獨立不懼 遯世无悶〕”고 하였다.[주-D033] 추로(鄒魯) : 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곧 유교의 발상지를 뜻한다.[주-D034] 공이 …… 고하노라 : 정조 8년(1784) 11월 이동표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어명이 내렸으며, 12년(1788) 4월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렸다.
- 2023-08-09 | NO.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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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건
- 신건(申楗), 湖節1上-053-2,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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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계영 ⾟啓榮 인조 5년(1627) 5월 9일∼인조 7년(1629) 8월 10일
- 신계영 ⾟啓榮 인조 5년(1627) 5월 9일∼인조 7년(1629) 8월 10일신계영(1577∼1669)의 본관은 영산(靈⼭)이며, 자는 영길(英吉), 호는 선석(仙⽯)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신종원(⾟宗遠), 어머니는 홍담(洪曇)의 딸이다. 160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예산으로 낙향하였다가 1619년 알성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병조좌랑,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 통신사 정립(鄭笠)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146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1626년 장령, 1627년 경상좌도 순안어사를 거쳐 나주목사가 되고, 1629년 통훈대부, 1631년 부수찬, 1634년 동부승지, 1637년에는 속환사(贖 還使)가 되어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600여 인을 데리고 왔다. 『금성읍지』 에는 “정묘(1627년) 5월 9일 도임하였고 기사(1629년) 8월 10일에 홍문관수찬이 되어 역말을 타고 상경하였다. 고을에서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629년에 세운 「목사신공계영선정비」가 나주목 객관 금성관에 안에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 『선석유고 (仙⽯遺稿)』가 있으며, 시호는 정헌(靖憲)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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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덕균(申德均)
-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친 신덕균(1878∼1908)은 광주 우산동(또는 각화동 277) 출신이다. 초명(初名)은 덕순(德淳),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夢菴), 본관은 평산으로 신태수(申泰洙)의 아들이다.일찍이 기우만(奇宇萬)과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광주북구지(1994)에는 우산동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호적부 제적등본에는 각화동 277번지로 등재되어 있다. 출신지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의 손자 후복(厚福)이 현재 각화동에 거주하고 있다.1906년 6월 최익현, 임병찬이 태인에서 호남의병을 일으킬 때 달려가서 참여하려 했으나 의병이 쉽게 패하자 중단하였다. 그는 1907년 4월에 창평에서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일으켜 화순을 점령하고 동복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고광순 의병대가 도마치전투에서 패하여 해산해 버리자 광주로 돌아와 재기의 날을 기다렸다.그는 1907년 9월 1일을 기하여 고광순 의병대가 재기하자 가담하여 참모의 중책을 맡았으나 병력과 무기가 부족하여 신덕균은 윤영기(尹永淇)와 함께 광주에 가서 해산군인들을 소모하여 그 수가 40여 명이 되었다. 그런데 병력을 거느리고 구례로 가는데 도중에서 고광순 의병대의 패배 소식과 고광순 등의 전사 소식을 듣고 독자적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벌였다.신덕균은 1908년 초에 의병대를 정비하여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화개(花開)로 진군하다가 왜적 30여 명을 무찌르고 지리산을 종횡하면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차츰 병력과 장비가 부족해지자 부장에게 맡기고 광주로 돌아와 전답을 팔아 군기를 마련한 후 부대로 돌아와 전남․북의 경계를 누비면서 활동하다가 11월 초순에 의병을 해산하고 도피 은신하던 중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7일 정읍 고부의 두승산(斗升山)에서 적에게 피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2020-03-06 | NO.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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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련
- 신련(辛璉)의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자는 기지(器之)이다. 조부는 신무승(辛武昇),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신수견(辛壽堅)이고, 부인은 정언징(鄭彦澄)의 딸이다.《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따르면, 신련은 1540년(중종35) 진사에 입격하였고, 1549년(명종 4) 병과 20위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련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서 과거 급제 이후의 자세한 활동 사항을 알기 어렵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1573년(선조 6)에 신련을 나주목사에 제수하였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신련이 간헐적으로 언급되고는 있으나, 음주하거나 점치는 대목 등 소소한 일상생활 모습에 등장할 뿐이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영산신씨로, 명종 기유[154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가 되었다”라고 간략하게 적고 있다.
- 2024-11-18 | NO.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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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면 申冕 인조 25년(1647) 1월 4일∼인조 25년(1647) 11월 21일
- 신면 申冕 인조 25년(1647) 1월 4일∼인조 25년(1647) 11월 21일현감 신면(1607∼1652)의 본관은 평산(平⼭)이며, 자는 시주(時周), 호는 하관(遐觀)이 다.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고, 아버지는 신익성(申翊聖)이며, 어머니는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이다. 1624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163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 1638년 가주서, 검열, 1639년 사과, 1640년 예조좌랑, 1641년 이조좌랑, 1642년 한학 교수·성균관 직강·지제교, 1643년 이조정랑, 1644년 승문원 부제조·병조참의를 지냈다. 1646년 11월 26일 금성현감에 임명되어 12월 10일 하직 인사를 하고 1647년 1월에 부임하여 11월 21일 이임하였다. 1649년 예조참의를 지내고 효종 즉위 직후 송준길(宋浚吉)의 탄핵을 받고 아산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 나와 동부승지에 등용되었다. 1651년 대제학·대사간을 역임하다가 김자점(⾦⾃點)의 옥사에 연루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자결하였다. 『금성읍지』에 “정해(1647년) 1월 4일 도임하였는데 동년 11월 21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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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홍 申永洪 중종 16년(1521) 10월∼?
- 신영홍 申永洪 중종 16년(1521) 10월∼?신영홍(1469∼?)의 본관은 고령(⾼靈)이며, 자는 홍지(洪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장 (申檣)이고, 할아버지는 신숙주(申叔⾈)이며, 아버지는 고천군(⾼川君) 신정(申瀞)으로 그의 5대조부터 자신까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1507년(중종 2) 증광시 문과에서 갑과 2등으로 급제하여 문사랑 내자시 첨정, 추성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어 전시고관(殿 試考官)에 임명되었는데, 대신들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또 1511 년, 1513년 가자 때에도 전례가 없던 일이라고 반대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는 정주 목사, 해주목사, 진주목사를 역임하였는데, 진주목사 때에는 죄인을 탈옥시킨 일로 교체되기도 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사(1521년) 10월에 도임하였으나 이임한 날은 기록이 없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27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