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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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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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삽봉 김세근金世斤(1550~1592)
    김세근金世斤(1550~1592)은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김해인으로서 절효공 극일의 후손으로 1550(명종5년)년 4월 16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스승 중봉 조헌선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군한 의병부장이다. 광주에 오게 된 것은 1498년의 무오사화 연좌를 피해서이다. 그의 방조傍祖였던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으면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김일손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으로 사림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에 밀려 무오사화 때 참살을 당했다.그는 1576년 진사가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를 지내다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율곡 이이를 따라 양병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88년께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던중 그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무오사화의 연좌에 화를 피하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전남의 흥양(지금의 고흥)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광주시 서구 세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그는 인근의 장정들을 모아 세하동 뒷자락에 있는 해발 134m의 나지막한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수련 연마를 한다. 이 소문이 장성, 나주, 화순 일대에 퍼져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동안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함께 한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전국 최초로 6천여명의 연합의병이 모인 담양회맹군에 합류했다. 김덕령의 큰형인 김덕홍, 유팽로, 얀영 등과 더불어 고경명을 따라 의병 대열에 합세하여 충북의 영동군 황간까지 진출해 적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하여 요병 중에 스승인 호서의병장 조헌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했다. 그는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진군해 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으나 충북 충주 인근의 눈벌이라 부르는 와평臥坪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 김세근(金世斤), 湖節1上-054-3,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이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지아비는 충에 죽고 지어미는 열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 된 당연한 도리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그를 따랐다. 13년 뒤인 1605년 선조는 김세근 의병장에게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하며 병조참판을, 부인 한씨에게는 정부인을 내렸다. 그의 묘가 광주시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남아 있다.1952년 7월 10일 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1958년에는 학산사鶴山祠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3월 22일에 제향하고 있다.
    2018-05-28 | NO.315
  • 서교수 徐敎修 정조 24년(1800) 8월 11일∼순조 1년(1801) 7월 22일
    서교수 徐敎修 정조 24년(1800) 8월 11일∼순조 1년(1801) 7월 22일서교수(1754∼1812)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숙도(叔度)이다. 아버지는 봉렬대부 삼등현령을 지낸 서명전(徐命全)이다. 형 서재수의 아들 서유민도 헌종대 나주목사를 지냈다. 1783년 식년시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여 1786년 장령전 참봉, 1787 년 종묘 부봉사, 1788년 상서 부직장, 1789년 공조좌랑, 1790년 평강현령, 1794년 백천군수, 1798년 중화부사, 1800년 2월에 청주목사를 지냈다. 1800년 7월 26일 나주목사, 1805년 호조정랑, 1807년 돈녕판관, 1808년 고양군수, 1810년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800년) 8월 11일에 도임하였고 신유(1801년) 7월 22일에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하고 서울로 돌아갔는데 9월 29일에 부친상을 당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314
  • 서명형 徐命珩 영조 22년(1746) 8월 15일∼영조 24년(1748) 10월 3일
    서명형 徐命珩 영조 22년(1746) 8월 15일∼영조 24년(1748) 10월 3일서명형(1687∼1750)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행옥(⾏⽟)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을 지낸 서종적(徐宗積)이다. 172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 를 시작으로 1724년 주서, 1727년 사정·실록 겸 춘추, 1730년 정언, 1734년 장령, 1735년 헌납, 1737년 사간, 1739년 부평부사·의주부윤, 1741년 동부승지, 1741년 대사간, 1742년 광주부윤, 1745년 승지를 지냈다. 1746년 5월 2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8월 2일 하직하고, 8월 15일 부임하였다. 1747년 3월 13일 장항포(獐項浦)의 착굴(穿掘)에 따르는 폐단을 거론하였으며, 스스로 진휼할 곡식을 갖추고 군기(軍器)를 보수(補修)함은 나주가 잘 하였다 하여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1748년(영조 24) 1월 10일에는 신포(新浦)에 허다한 제방을 쌓고 언덕을 쌓는 일을 해야 하는데 민력(民⼒)을 소비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보장하기 어려우니, 나주의 선창을 장항(獐項)으로 옮겨 설치하지 말고 죽포(⽵浦)의 구창(舊倉)을 예전처럼 수리하여 그대로 장선(藏船)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하여 윤허를 받았다. 1749년에 선치(善治)를 하였다 하여 가선대부를 받고 동의금(同義禁)이 되고,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인(1746년) 5월 20일 제수 되어 8월 15일에 도임하였고 무진(1748년) 6월에 휴가를 얻어 상경하였는데, 10월 3일에 사직하였다. 선치를 하였 다하여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동의금으로 옮겨 갔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9 | NO.313
  • 서유민 徐有民 헌종 9년(1843) 12월 29일∼헌종 10년(1844) 6월 14일
    서유민 徐有民 헌종 9년(1843) 12월 29일∼헌종 10년(1844) 6월 14일서유민(1779∼1844)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원경(元耕)이다. 아버지는 정랑(正 郎) 서재수(徐在修)이다. 1818년 목릉참봉을 시작으로 1820년 장원서 봉사, 1821년 활인별제·감찰, 1822년 경모궁령·삼등현령, 1826년 청도군수, 1828년 3월 가산군수, 1832년 장성부사, 1834년 안주목사, 1838년 안산군수, 1839년 청주목사를 지냈다. 1843년 10월 2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1월 24일 사조(辭朝)하고 12월 29일 부임 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묘(1843년) 12월 29일에 부임하였고 갑진(1844년) 6월 24일에 상경하였다가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청주 중앙공원에 1842년에 세워진 「목사서후유민청간선정비」가 있으며, 청도군에는 서유민 군수의 영세불망비가 4개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8 | NO.312
  • 서유상 徐有常 영조 48년(1772) 6월 20일∼영조 48년(1772) 10월 28일
    서유상 徐有常 영조 48년(1772) 6월 20일∼영조 48년(1772) 10월 28일서유상(?∼?)의 본관은 대구, 아버지는 서행수(徐⾏修), 장인은 진사 정한경(鄭漢京), 아들 서정보(徐貞輔)는 생원이다. 1738년 돈녕참봉을 시작으로 1739년 전옥봉사, 1741 년 순릉직장, 1742년 금부도사, 1743년 안협현감, 1745년 돈녕주부·임실현감, 1750 년 금부도사, 1751년 신천군수, 1753년 청송부사, 1756년 남원부사, 1760년 해주판 관, 1763년 진주목사, 1767년 이천부사 때 포흠(逋⽋)의 숫자가 많아서 대언(臺⾔)이 준엄하게 일어나 관찰사가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다. 1772년 사재감 첨정을 지냈다. 1772년 6월 20일에 나주목사로 현지 부임하였다. 1809년 8월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 다. 『금성읍지』에는 “임진(1772년) 6월 20일 부임하였는데 앞서 이천부사로 있을 때의 일로 의금부에 적발되어 동년 10월 28일 이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5 | NO.311
  • 서유상 徐有象 철종 8년(1857) 11월 30일∼철종 10년(1859) 5월 1일
    서유상 徐有象 철종 8년(1857) 11월 30일∼철종 10년(1859) 5월 1일서유상(1797∼1881)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치평(致平)이다. 아버지는 예조참판 서기수(徐淇修)이고 증이조참판 서영수(徐英修)에게 입양되었다. 동생 서유훈(徐有薰) 은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37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9년 현륭원 참봉, 1842년 전옥참봉, 1843년 사옹봉사, 1843년 선공봉사, 1844년 활인별제· 금부도사·의령현감, 1848년 김천군수, 1852년 무안현감, 1856년 이천부사를 지냈다.1857년 10월 1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고 11월 30일 부임하였다. 1859년 5월 1일 상경해 있었는데 신병이 중하여 내려가지 못할 지경이 되자 파출되었다. 1866년 형조참 의, 1867년 공조참의, 1880년 부총관·공조참판, 1902년 자헌대부 내부대신을 역임하 였다. 『금성읍지』에는 “정사(1857년) 10월 15일에 이천부사에서 옮길 것을 제수받고, 11월 13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11월 30일에 부임하였으며 기미(1859년) 5월 1일에 상경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8 | NO.310
  • 서탁수 徐琢修 정조 13년(1789) 4월 24일∼정조 13년(1789) 8월 6일
    서탁수 徐琢修 정조 13년(1789) 4월 24일∼정조 13년(1789) 8월 6일서탁수(1735∼1794)의 본관 대구(⼤丘)이며, 자는 옥여(⽟汝)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호조정랑 서명유(徐命儒)이다. 175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66년 영릉참봉, 1768년 사옹봉사, 1769년 병조참의, 1771년 한성주부, 1776년 호조좌랑, 1777년 호조정랑, 1778년 의성현령, 1780년 호조정랑·재령군수, 1783년 원주판관, 1785년 삼척부사를 거쳤다. 1789년 4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790년 호조정랑, 1791 년 남원부사를 마지막으로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 “기유(1789년) 4월 24일 삼척부 사에서 옮겨 왔다. 동년 8월 6일에 대동미를 실은 배 1척이 치패된 일로 서울에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1-07 | NO.309
  • 소두산 蘇⽃⼭ 현종 10년(1669) 7월 16일∼현종 13년(1672) 7월
    소두산 蘇⽃⼭ 현종 10년(1669) 7월 16일∼현종 13년(1672) 7월소두산(1627∼1693)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洲), 익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소동명(蘇東鳴)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 사마시 진사에 합격하고, 1660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감찰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661년 병조정랑, 1663년 사헌부 지평, 1666년 장령, 1667년 부호군, 1669년 6월 2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았으나 6월 30일 이조에서 개차할 것을 건의, 승낙하였으나, 비변사에서 이조의 계를 시행하지 말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임명하였다. 7월 16일 부임하여 선정을 펼쳐 1672년 1월에는 자급을 올려 받았다고 한다. 1672년 344년 7월에 병을 핑계로 사직을 하였다. 이후 1675년 제주목사, 1681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1683년 동래부사, 1684년 공홍도 관찰사·공홍도 수군절도사, 1685년 북병 사, 1688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월주집』이 전한다. 『금성읍지』에는 “기유(1669년) 7월 16일 도임하였고 임자(1672년) 7월에 어버이 병으로 사직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308
  • 손만웅 孫萬雄 숙종 15년(1689) 4월 10일∼숙종 15년(1689) 5월 20일
    손만웅 孫萬雄 숙종 15년(1689) 4월 10일∼숙종 15년(1689) 5월 20일손만웅(1643∼1712)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이다. 아버지는 손신의(孫愼儀)이며, 어머니는 이심근(李深根)의 딸이다. 1669년 식년시 생원과 문과 을과에 모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등용되었다. 1669년 사포별제, 1670년 학유·장원별제, 1671년 오수찰방, 1674년 예조좌랑, 1675년 병조좌랑·영광군수, 1677년 정언, 1678년 장령, 1687년 사천현감, 1689년 충청도사, 1689년 윤3월 9일 충홍도 사에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10일 도임하고 5월 21일 파면당했다. 『숙종실록』에 “국전(國典)에 수령이 갈 때에 승지가 별유를 베풀고, 인하여 칠사(七事)를 강하게 하였 으나, 조사(朝辭)를 제한 경우는 원래 이 예(禮)가 없는데, 이조의 하리가 손만웅을 업신여겨 속였다. 손만웅이 깨닫지 못하고 머리를 굽혀 듣고 받았으니”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 하여 파면하고 추고하자는 사간원의 논의를 윤허앴다는 기록이 있다. 『금 성읍지』는 5월 27일 파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689년 12월 괴산군수, 1690년 정언, 1691년 청주목사, 1692년 동래부사, 1693년 경주부윤, 1701년 온성부사, 1706년 풍기군수, 1709년 부호군, 1711년 부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충홍도사에서 이동하여 기사(1689년) 4월 10일 도임하였고 동년 5월 27일(실록은 5 월 20일)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22 | NO.307
  • 송래룡(宋來龍)
    송래룡(1823~1888)의 본관은 홍주, 초휘는 현규(現奎), 자는 운보(雲甫), 호는 서암(瑞菴)이다. 현감 宋駒의 후손이다.存心養性이고 安貧樂義이며 文學篤行이라 孝友慈仁이고 無不飮服이며 有墓碣畏이라 堂高漢住로 묘갈명에는 "繼述先美이고 孝友根天이며 永言孺慕하고 心潛經學이라" 하였다.부 : 宋邦賢조 : 宋守範증조 : 宋益恒외조 : 李仁坤처부1 : 曺箕承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2020-03-06 | NO.306
  • 송래홍(宋來洪)
    송래홍(1836~1916)의 본관은 홍주, 초위는 宗奎, 자는 경범(敬範) 또는 성범(聖範), 광주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천성이 강직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물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후손의 장래를 보호하는 등 굳은 지조를 가졌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부 : 宋三賢조 : 宋守大증조 : 宋益佐외조 : 洪基祥처부1 : 金道原
    2020-03-06 | NO.305
  • 송석경 宋錫慶 광해군 3년(1611) 2월 14일∼광해군 3년(1611) 8월
    송석경 宋錫慶 광해군 3년(1611) 2월 14일∼광해군 3년(1611) 8월송석경(1570∼1637)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경수(景受), 호는 졸암(拙庵) 또는 춘호(春湖), 송석범(宋錫範)으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는 황주목사 송응형(宋應泂)이고, 아버지는 직장 송흥조(宋興祚)이다. 159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 직장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를 시작으로 1598년 세자시강원 사서·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1599년 사간원 헌납, 1600년 병조정랑, 1601년 신천군수, 1602년 병조정랑·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 사간원 헌납·시강원 필선, 1604년 예조좌랑, 1605년 원손 강학관, 1606년 홍문관 교리, 1607년 광흥창수, 1608년 동부승지, 1610년 12월 25일에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령 가운데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로 거론되어 1611년 8월에 파직을 당했다. 그 뒤로도 승지, 대사간, 대사성, 개성유수, 접반사, 동지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신해(1611년) 2월 14일 도임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체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304
  • 송순 宋純 명종 16년(1561) 9월 12일∼명종 17년(1562) 12월 15일
    송순 宋純 명종 16년(1561) 9월 12일∼명종 17년(1562) 12월 15일송순(1493∼1582)의 본관은 신평(新平), 담양 출신으로 1542년(중종 37) 전라감사를 지냈다. 1561년 8월 2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9월 12일 부임하여 1562년 12월 15 일까지 재임하였다. 1568년 한성부 좌윤이 되어 1569년에 한성판윤으로 특별 승진하고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낙향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俛仰集)』이 있고, 『미암일 기(眉巖⽇記)』를 남겼다. 『금성읍지』에는 “신유(1561년) 9월 12일 도임하였고, 임술 (1562년) 12월 15일에 사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세이력은 전라감사편 참조.*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5 | NO.303
  • 송시길 宋時吉 인조 23년(1645) 12월 12일∼인조 24년(1646) 12월 2일
    송시길 宋時吉 인조 23년(1645) 12월 12일∼인조 24년(1646) 12월 2일현감(縣監) 송시길(1597∼1656)의 본관은 여산(礪⼭)이며, 자는 중립(仲⽴)이다. 아버지는 1617년 4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했던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송일(宋馹)이다. 1615 년에 진사가 되고, 1623년 알성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1626 년 사간원 정언, 1627년 지평, 1633년 장령, 1637년 상의원 정, 1639년 우부승지, 1642년 동부승지, 1643년 경주부윤, 1653년 도승지, 1645년 11월 12일에 금성현감이 되고 12월에 도임하여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였다. 1648년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 부부총관 등을 거쳐 1652년 한성부우윤·도승지·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금성읍지』 에는 “을유(1645년) 12월 12일 도임하였는데 토포사를 겸하였다. 병술(1646년) 봄에 여황면 토적을 잡아 괴수 김방헌 등 20여 인을 체포하여 이 공으로 가선대부가 되었 다. 병술(1646년) 12월 2일에 이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7 | NO.302
  • 송암 조언수(1575~1592)
    조언수曺彥壽의 본관은 창녕, 자는 일여, 호는 송암松庵이다. 시조는 신라 창성부원군 조계룡을 시조로 증조는  조대진으로 조선왕조 변융 문과 중시에 합격하여 예조 참의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조경덕은 예조좌랑을 지냈다. 아버지 조세랑은 상주영장을 지냈으며 외할아버지는 전주 이학림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어려서 완력이 뛰어나고 재주가 빼어나 8세에 사략을 읽고, 10세에 소학에 들어 자경시를 짓기도 하였다. 조언수는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량을 모아 광주군고에 바치고 무기 쓰는 법을 익히고 용사들에게 권장하는 시를 지었다. "내 돌아보니 부끄러운 여덟 살 어린이 삼년동안 헛되이 글만 배웠도다. 전국의 흥망사를 논하지 말고 쇄소응대하는 예의와 같이 하리라"이로부터 문장이 성취되었다. 행군이 순창 적성강에 이르러 진을 쳤을 때 적세가 몰아쳐옴에 사졸들이  많이 흩어지려 하니 송암이 충용의가忠勇義歌 삼장을 지어 깊이 깨우치게 하여 사졸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금산전투에 임하여서는 적과 함께 혈전하여 많은 참획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제봉 고경명이 패하여 순절하고 송암도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제봉의 아들 학봉 인후와 월파 유팽로, 은재 안영과 같은 날 전사하였다. 이로써 송암은 임진왜란 떄 17세로 전사한 최연소 의병이라고 할 수 있다. 송암 조언수의 사적은 '호남절의록'과 '금산순의비'에 실려 있다. 후일 나라에서는 송암을 선무원종훈에 훈록하고 병조참판에 증직하였다.송암을 기리는 조도현의 시가 한 편 있다.북성예원조도현왼쪽에 장등너뫼오른쪽에 모세추리앞쪽으로 동기미테가작은 구릉으로 길게 누워 있는 그곳적량산 자락에 터를 닦으신 향조송암조언수님의 얼이 서린 자리조상에 대한 책임감불의에 항거한 애정이녹아내린 세월만큼숭조상문의 장으로 삼아 정엄한 뜻을 가슴에 새겨 일상에 가두련다.감상>광산구 본량면 북산리 북성부락 북성예원은 좌청룡 우백호로 앞으로는 바람을 모으고 배산 임수까지 갖춘 명당이다.
    2020-05-11 | NO.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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