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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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사종 奉嗣宗 중종 26년(1531) 2월∼중종 31년(1536) 4월
- 봉사종 奉嗣宗 중종 26년(1531) 2월∼중종 31년(1536) 4월봉사종(?∼?)의 본관은 하음(河陰)이며, 자는 찬부(纘夫)이다. 고려의 좌정승 봉천우(奉天 祐)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봉지(奉祉)이다. 1507년 정묘 증광시 생원에 합격하고, 1508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1512년 예조좌랑을 제수 받았으나 사간원의 청원으로 체직 당하였다. 1524년 안악군수를 거쳐 1531년 나주목사에 부임하여 1536년 4월까지 재직하였는데, 『중종실록』 1536년 4월 4일 기록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전라도 나주의 백성이 전 목사의 첩을 빼앗아 통간하였다 하니, 풍속에 관계됨이 매우 심합니다.때문에 본도에 행이하여 잡아가두고 추고하게 했는데 나주목사 봉사종(奉嗣宗)이 중윤을 비호하여 처음에 잡아가두지 않았기 때문에 옥사가 늦어졌고 끝내는 도망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가 법사를 무시한 것이 매우 심합니다. 그를 파직시켜 법을 무시하는 사람을 징계시키소서.”하는 사헌부의 탄핵 기록이 있다. 또 『중종실록』 1537년 7월 7일 기록에 “헌부가 아뢰었다. ‘사도시 첨정 신한(申瀚)이 전에 광주목사로 있을 적에, 나주 목사 봉사종이 광주에 사는 백정 질어리(叱於⾥) 등 4명을 자기의 노비로 삼으려 하였 습니다. …… 사심을 행하고 양민을 억눌러 천인을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사종은 벌써 죽었으니 죄를 다스릴 수 없지만 신한은 유식한 조관(朝官)으로서 이 같은 일을 했으므로 조정의 반열에 끼워 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 것을 보아 봉사종은 1537년 7월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금성읍지』에는 신묘년(1531년) 2월에 도임하였고, 병신(1536년) 4월에 선공감정으로 이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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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암 박순(1523~1589)
- 박순은 1523(중종17년)년 서울에서 당시 홍문관 교리였던 아버지 박우와 어머니 당악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성균관 대사성 박우의 아들이며 눌재 박상의 조카이다. 8세 때 다니던 서당 훈장이 '내가 감히 너의 스승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동국삼박의 하나였던 아버지 육봉 역시 차남이 지은 글을 보고 '이 늙은이가 무릎을 꿇어야 하겠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1540(중종35년)년 18세가 되던 해에 소과에 응시했다. 진사 3등 51위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아울러 같은 화담 동무인 홍인우, 허엽, 남언경 등과 함께 성균관에서글을 읽으며 학문의 폭을 차츰 늘려갔다. 1547년 25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형 연파처사 박개와 더불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시묘를 너무 극진히 하다 건강을 해쳐 소상을 지낸 뒤에도 죽을 먹어야 했다. 1549년에는 그의 시조묘 있는 대전에 '사암'이란 서실을 짓고 글을 읽었는데 스승 서경덕의 방법론그대로 독자적인 학문연구를 시작하여 근처 유생들과 벼슬아치들이 그를 사암선생이라 높여 불렀다. 어려서는 호가 청하자였으나 이때부터 사암을 주로 썼다. 박순은 독자연구의 단점인 학문의 좁은 폭을 넓히기 위해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등을 찾아 다니며 배웠다.1553(명종8년)년 31세의 나이로 대과에 응시했다. 해당 시험은 명종이 특히 갑과를 직접 주관했는데 그의 답안을 보고 감탄한 왕의 몇 가지 직접 질문에 뛰어난 답을 제시하여장원으로 급제했다. 갑ㆍ을ㆍ병 세 등급의 과거에서 갑과 1등이었던 그는 이조좌랑, 홍문관수찬, 교리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당시 젊은 신진 관료들에게 주어졌던 안식년에 궁궐 도서관인 호당에서 글을 읽었다. 1556년(명종11년) 의정부 검상(정5품), 사인(정4품)으로 승진한 후 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돌았고 홍문관 응교(정4품)로 승진하여부마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기도 하는 등, 권력의 높이에 굴하지 않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려고 노력했다.1562(명종17년)년 부친 박우의 고향인 광주 송정리에서 1년간 독서 중 명종이 다시 그를 불러 한산 군수(정4품 외직)에 임명했다. 그는 사림운동의 연장선에서 그 지방의 사림 육성책으로, 공무가 끝난 후에도 정사로 가서 그날그날 계획을 정하여 강론하고 이웃 고을 선비들과 글을 읽었다. 이것이 점점 소문이 나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1563(명종18년)년에 성균관 사성(정3품)으로 불려 들어가 시강원(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 보덕(종3품), 사헌부 집의(종3품), 홍문관 직제학(정3품 당하관)을역임하면서 차자(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시사를 논하였고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 당상관)로 승진하였다. 승지로서 왕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그는그 후 이조참의(정3품 당상관)에서 사간원 대사간(정3품)으로 옮겼다. 그 뒤 대사간에서 한 번 교체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어 요승 보우의 죄를 논하여 치죄할 것을 요청하고 또 윤원형을 탄핵하여 축출하였다. 사휘 1591(선조24년)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는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박순은 40년 가까운 벼슬살이에 15년간 정승 생활을 하면서 모든 녹봉은 가난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기부해 가진 것 하나 없이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자신은 숨기고 조금이라도 잘하는 선비나 학자는 추천해 훌륭한 역할을 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두고 당대 사람들은 “그보다 더 선비를 좋아하고 재주를 아끼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청백리 박순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본인의 능력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겸손한 태도로 어려운 결단을 내린 박순의 청렴에 대한 일화이다.선조때, 박순이 대제학으로 재직할 당시 퇴계 이황이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었다. 이때 박순은 임금에게 청하기를 "대제학과 제학이 비록 같은 비슷한 일을 하나 제학의 임무가 대제학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나이 많고 학식 높은 선비는 아래의 임무에 있고 도리어 후진 초학이 중한 지위에 있으니, 저와 이황의 관직을 바꿔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었다. 임금은 대신을 불러 모아 의논했고, 박순과 이황의 관직을 서로 바꾸게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황이 늙고 병들어서 그 직을 감당할 수 없다며 사퇴했으나 이 일화는 박순의 어진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높은 자리에서 다른 이의 능력이 본인보다 낫다고 인정하며 직을 바꿔달라고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나 남보다 자신에게 관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박순은 그렇지 않았다. 박순의 청렴하고 대쪽 같은 성품으로 간사한 벼슬아치를 물리치고 어진 신하를 높은 지위에 오르는 등 밝은 정치를 위해서도 앞장섰다.박순이 대사간일 때 윤원형과 이량 등의 만행에 분개해 마음이 북받쳤다. 박순은 곧바로 대사헌 이탁을 찾아가 말했다. “내가 윤원형의 죄를 논하려고 하는데 그대가 찬성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이탁은 몸을 움츠리면서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대가 내 일족을 멸문시킬 작정인가.”하지만 박순은 끈질기게 이탁을 설득했고, 결국 둘은 함께 윤원형을 탄핵해 쫓아냈다. 이에 사림의 공론이 펼쳐지게 되어 조정이 맑고 깨끗해졌다. 이후 박순은 용기 있고 올바른 사람의 표본이 되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안위를 염려해 바른말과 곧은 마음으로 임금을 섬겼기에 그만큼 명쾌한 정승이 없었다고 전한다.송균절조 수월정신 (松筠節操 水月精神)박순은 소나무나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이나 밝은 달과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다.-박순에 대한 선조의 찬사
- 2020-03-02 | NO.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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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암 심광헌(1541~1593)
- 심광헌沈光憲의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언장彦章, 호는 삼암三岩. 묵헌 심풍沈豊의 아들로 조선 1541년(중종36) 본량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이 출중하고 학덕을 겸비하여 일에 임하면 충직하여 사림들이 추중하였다.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역임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은을 입은 가문의 후예로 적개충심이 강하여 나이 52세에 나라의 위급함을 중시하고 정예 수천명을 모병하여 충무공 이순신 막하로 훈련주부(訓練主簿)로 들어갔다. 옥포해전에서 적선 30척을 격파한 후 고성 다월포로 가서 전라도사 최철견과 힘을 합쳐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패주 적병들을 사천까지 추격하여 적선 10여척을 격파하고 이어서 점포한산도 안골포해전에서도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후 분진을 이끌고 강릉에 당도하니 명나라 장수 송대빈이 적에게 포위되어 고전함을 보고 즉시 공격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명나라 장수를 사지에서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이에 명장 송대빈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만일 심장군의 구원이 없었다면 적봉에 명군이 전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하니 선조가 삼암장군의 전공을 가상하여 김해부사와 선무원중공신 2등으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록》과 《나주읍지》에 기록되어 있으며 송사 기우만의 찬으로 된 묘갈비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암의 충지를 추모하고자 향천으로 동호사에 배향되었다.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쳐졌다.광산구 동호사는 1946년 이 고장 유림들의 발의로 고려말 공신인 장안공 심덕부를 비롯하여 사부 심징, 망세정 심선, 묵헌 심례, 삼암 심광헌, 심용 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 2020-05-06 | NO.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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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봉 김세근金世斤(1550~1592)
- 김세근金世斤(1550~1592)은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김해인으로서 절효공 극일의 후손으로 1550(명종5년)년 4월 16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스승 중봉 조헌선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군한 의병부장이다. 광주에 오게 된 것은 1498년의 무오사화 연좌를 피해서이다. 그의 방조傍祖였던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으면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김일손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으로 사림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에 밀려 무오사화 때 참살을 당했다.그는 1576년 진사가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를 지내다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율곡 이이를 따라 양병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88년께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던중 그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무오사화의 연좌에 화를 피하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전남의 흥양(지금의 고흥)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광주시 서구 세하동으로 터전을 옮겼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그는 인근의 장정들을 모아 세하동 뒷자락에 있는 해발 134m의 나지막한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수련 연마를 한다. 이 소문이 장성, 나주, 화순 일대에 퍼져 그 수가 수백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동안 세하동 백마산 수련골에서 함께 한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전국 최초로 6천여명의 연합의병이 모인 담양회맹군에 합류했다. 김덕령의 큰형인 김덕홍, 유팽로, 얀영 등과 더불어 고경명을 따라 의병 대열에 합세하여 충북의 영동군 황간까지 진출해 적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하여 요병 중에 스승인 호서의병장 조헌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했다. 그는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진군해 부장으로서 전투에 참가했으나 충북 충주 인근의 눈벌이라 부르는 와평臥坪 전투에서 제봉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 김세근(金世斤), 湖節1上-054-3,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호남절의록》(1799)이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지아비는 충에 죽고 지어미는 열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 된 당연한 도리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그를 따랐다. 13년 뒤인 1605년 선조는 김세근 의병장에게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하며 병조참판을, 부인 한씨에게는 정부인을 내렸다. 그의 묘가 광주시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남아 있다.1952년 7월 10일 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1958년에는 학산사鶴山祠를 건립하여 매년 음력 3월 22일에 제향하고 있다.
- 2018-05-28 | NO.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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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교수 徐敎修 정조 24년(1800) 8월 11일∼순조 1년(1801) 7월 22일
- 서교수 徐敎修 정조 24년(1800) 8월 11일∼순조 1년(1801) 7월 22일서교수(1754∼1812)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숙도(叔度)이다. 아버지는 봉렬대부 삼등현령을 지낸 서명전(徐命全)이다. 형 서재수의 아들 서유민도 헌종대 나주목사를 지냈다. 1783년 식년시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여 1786년 장령전 참봉, 1787 년 종묘 부봉사, 1788년 상서 부직장, 1789년 공조좌랑, 1790년 평강현령, 1794년 백천군수, 1798년 중화부사, 1800년 2월에 청주목사를 지냈다. 1800년 7월 26일 나주목사, 1805년 호조정랑, 1807년 돈녕판관, 1808년 고양군수, 1810년 고성군수를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신(1800년) 8월 11일에 도임하였고 신유(1801년) 7월 22일에 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하고 서울로 돌아갔는데 9월 29일에 부친상을 당하였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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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형 徐命珩 영조 22년(1746) 8월 15일∼영조 24년(1748) 10월 3일
- 서명형 徐命珩 영조 22년(1746) 8월 15일∼영조 24년(1748) 10월 3일서명형(1687∼1750)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행옥(⾏⽟)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을 지낸 서종적(徐宗積)이다. 172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 를 시작으로 1724년 주서, 1727년 사정·실록 겸 춘추, 1730년 정언, 1734년 장령, 1735년 헌납, 1737년 사간, 1739년 부평부사·의주부윤, 1741년 동부승지, 1741년 대사간, 1742년 광주부윤, 1745년 승지를 지냈다. 1746년 5월 20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8월 2일 하직하고, 8월 15일 부임하였다. 1747년 3월 13일 장항포(獐項浦)의 착굴(穿掘)에 따르는 폐단을 거론하였으며, 스스로 진휼할 곡식을 갖추고 군기(軍器)를 보수(補修)함은 나주가 잘 하였다 하여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특별히 하사받았다. 1748년(영조 24) 1월 10일에는 신포(新浦)에 허다한 제방을 쌓고 언덕을 쌓는 일을 해야 하는데 민력(民⼒)을 소비하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보장하기 어려우니, 나주의 선창을 장항(獐項)으로 옮겨 설치하지 말고 죽포(⽵浦)의 구창(舊倉)을 예전처럼 수리하여 그대로 장선(藏船)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하여 윤허를 받았다. 1749년에 선치(善治)를 하였다 하여 가선대부를 받고 동의금(同義禁)이 되고, 이어 병조참판이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병인(1746년) 5월 20일 제수 되어 8월 15일에 도임하였고 무진(1748년) 6월에 휴가를 얻어 상경하였는데, 10월 3일에 사직하였다. 선치를 하였 다하여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동의금으로 옮겨 갔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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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민 徐有民 헌종 9년(1843) 12월 29일∼헌종 10년(1844) 6월 14일
- 서유민 徐有民 헌종 9년(1843) 12월 29일∼헌종 10년(1844) 6월 14일서유민(1779∼1844)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원경(元耕)이다. 아버지는 정랑(正 郎) 서재수(徐在修)이다. 1818년 목릉참봉을 시작으로 1820년 장원서 봉사, 1821년 활인별제·감찰, 1822년 경모궁령·삼등현령, 1826년 청도군수, 1828년 3월 가산군수, 1832년 장성부사, 1834년 안주목사, 1838년 안산군수, 1839년 청주목사를 지냈다. 1843년 10월 22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11월 24일 사조(辭朝)하고 12월 29일 부임 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묘(1843년) 12월 29일에 부임하였고 갑진(1844년) 6월 24일에 상경하였다가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청주 중앙공원에 1842년에 세워진 「목사서후유민청간선정비」가 있으며, 청도군에는 서유민 군수의 영세불망비가 4개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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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상 徐有常 영조 48년(1772) 6월 20일∼영조 48년(1772) 10월 28일
- 서유상 徐有常 영조 48년(1772) 6월 20일∼영조 48년(1772) 10월 28일서유상(?∼?)의 본관은 대구, 아버지는 서행수(徐⾏修), 장인은 진사 정한경(鄭漢京), 아들 서정보(徐貞輔)는 생원이다. 1738년 돈녕참봉을 시작으로 1739년 전옥봉사, 1741 년 순릉직장, 1742년 금부도사, 1743년 안협현감, 1745년 돈녕주부·임실현감, 1750 년 금부도사, 1751년 신천군수, 1753년 청송부사, 1756년 남원부사, 1760년 해주판 관, 1763년 진주목사, 1767년 이천부사 때 포흠(逋⽋)의 숫자가 많아서 대언(臺⾔)이 준엄하게 일어나 관찰사가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다. 1772년 사재감 첨정을 지냈다. 1772년 6월 20일에 나주목사로 현지 부임하였다. 1809년 8월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 다. 『금성읍지』에는 “임진(1772년) 6월 20일 부임하였는데 앞서 이천부사로 있을 때의 일로 의금부에 적발되어 동년 10월 28일 이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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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상 徐有象 철종 8년(1857) 11월 30일∼철종 10년(1859) 5월 1일
- 서유상 徐有象 철종 8년(1857) 11월 30일∼철종 10년(1859) 5월 1일서유상(1797∼1881)의 본관은 대구(⼤丘)이며, 자는 치평(致平)이다. 아버지는 예조참판 서기수(徐淇修)이고 증이조참판 서영수(徐英修)에게 입양되었다. 동생 서유훈(徐有薰) 은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37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9년 현륭원 참봉, 1842년 전옥참봉, 1843년 사옹봉사, 1843년 선공봉사, 1844년 활인별제· 금부도사·의령현감, 1848년 김천군수, 1852년 무안현감, 1856년 이천부사를 지냈다.1857년 10월 1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고 11월 30일 부임하였다. 1859년 5월 1일 상경해 있었는데 신병이 중하여 내려가지 못할 지경이 되자 파출되었다. 1866년 형조참 의, 1867년 공조참의, 1880년 부총관·공조참판, 1902년 자헌대부 내부대신을 역임하 였다. 『금성읍지』에는 “정사(1857년) 10월 15일에 이천부사에서 옮길 것을 제수받고, 11월 13일에 임금을 사조하고, 11월 30일에 부임하였으며 기미(1859년) 5월 1일에 상경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8 | NO.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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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탁수 徐琢修 정조 13년(1789) 4월 24일∼정조 13년(1789) 8월 6일
- 서탁수 徐琢修 정조 13년(1789) 4월 24일∼정조 13년(1789) 8월 6일서탁수(1735∼1794)의 본관 대구(⼤丘)이며, 자는 옥여(⽟汝)이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호조정랑 서명유(徐命儒)이다. 1759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여 1766년 영릉참봉, 1768년 사옹봉사, 1769년 병조참의, 1771년 한성주부, 1776년 호조좌랑, 1777년 호조정랑, 1778년 의성현령, 1780년 호조정랑·재령군수, 1783년 원주판관, 1785년 삼척부사를 거쳤다. 1789년 4월 23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었다. 1790년 호조정랑, 1791 년 남원부사를 마지막으로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 “기유(1789년) 4월 24일 삼척부 사에서 옮겨 왔다. 동년 8월 6일에 대동미를 실은 배 1척이 치패된 일로 서울에서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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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두산 蘇⽃⼭ 현종 10년(1669) 7월 16일∼현종 13년(1672) 7월
- 소두산 蘇⽃⼭ 현종 10년(1669) 7월 16일∼현종 13년(1672) 7월소두산(1627∼1693)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洲), 익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소동명(蘇東鳴)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52년 사마시 진사에 합격하고, 1660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감찰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661년 병조정랑, 1663년 사헌부 지평, 1666년 장령, 1667년 부호군, 1669년 6월 25일 나주목사를 제수받았으나 6월 30일 이조에서 개차할 것을 건의, 승낙하였으나, 비변사에서 이조의 계를 시행하지 말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임명하였다. 7월 16일 부임하여 선정을 펼쳐 1672년 1월에는 자급을 올려 받았다고 한다. 1672년 344년 7월에 병을 핑계로 사직을 하였다. 이후 1675년 제주목사, 1681년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1683년 동래부사, 1684년 공홍도 관찰사·공홍도 수군절도사, 1685년 북병 사, 1688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월주집』이 전한다. 『금성읍지』에는 “기유(1669년) 7월 16일 도임하였고 임자(1672년) 7월에 어버이 병으로 사직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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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만웅 孫萬雄 숙종 15년(1689) 4월 10일∼숙종 15년(1689) 5월 20일
- 손만웅 孫萬雄 숙종 15년(1689) 4월 10일∼숙종 15년(1689) 5월 20일손만웅(1643∼1712)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적만(敵萬), 호는 야촌(野村)이다. 아버지는 손신의(孫愼儀)이며, 어머니는 이심근(李深根)의 딸이다. 1669년 식년시 생원과 문과 을과에 모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등용되었다. 1669년 사포별제, 1670년 학유·장원별제, 1671년 오수찰방, 1674년 예조좌랑, 1675년 병조좌랑·영광군수, 1677년 정언, 1678년 장령, 1687년 사천현감, 1689년 충청도사, 1689년 윤3월 9일 충홍도 사에서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4월 10일 도임하고 5월 21일 파면당했다. 『숙종실록』에 “국전(國典)에 수령이 갈 때에 승지가 별유를 베풀고, 인하여 칠사(七事)를 강하게 하였 으나, 조사(朝辭)를 제한 경우는 원래 이 예(禮)가 없는데, 이조의 하리가 손만웅을 업신여겨 속였다. 손만웅이 깨닫지 못하고 머리를 굽혀 듣고 받았으니”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 하여 파면하고 추고하자는 사간원의 논의를 윤허앴다는 기록이 있다. 『금 성읍지』는 5월 27일 파직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689년 12월 괴산군수, 1690년 정언, 1691년 청주목사, 1692년 동래부사, 1693년 경주부윤, 1701년 온성부사, 1706년 풍기군수, 1709년 부호군, 1711년 부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충홍도사에서 이동하여 기사(1689년) 4월 10일 도임하였고 동년 5월 27일(실록은 5 월 20일)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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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래룡(宋來龍)
- 송래룡(1823~1888)의 본관은 홍주, 초휘는 현규(現奎), 자는 운보(雲甫), 호는 서암(瑞菴)이다. 현감 宋駒의 후손이다.存心養性이고 安貧樂義이며 文學篤行이라 孝友慈仁이고 無不飮服이며 有墓碣畏이라 堂高漢住로 묘갈명에는 "繼述先美이고 孝友根天이며 永言孺慕하고 心潛經學이라" 하였다.부 : 宋邦賢조 : 宋守範증조 : 宋益恒외조 : 李仁坤처부1 : 曺箕承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 2020-03-06 | NO.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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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래홍(宋來洪)
- 송래홍(1836~1916)의 본관은 홍주, 초위는 宗奎, 자는 경범(敬範) 또는 성범(聖範), 광주 거진(오늘날 북구 용두동)에 살았다. 천성이 강직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물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후손의 장래를 보호하는 등 굳은 지조를 가졌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宋駒의 후손이다.부 : 宋三賢조 : 宋守大증조 : 宋益佐외조 : 洪基祥처부1 : 金道原
- 2020-03-06 | NO.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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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석경 宋錫慶 광해군 3년(1611) 2월 14일∼광해군 3년(1611) 8월
- 송석경 宋錫慶 광해군 3년(1611) 2월 14일∼광해군 3년(1611) 8월송석경(1570∼1637)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경수(景受), 호는 졸암(拙庵) 또는 춘호(春湖), 송석범(宋錫範)으로 개명하였다. 할아버지는 황주목사 송응형(宋應泂)이고, 아버지는 직장 송흥조(宋興祚)이다. 159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 직장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 설서를 시작으로 1598년 세자시강원 사서·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1599년 사간원 헌납, 1600년 병조정랑, 1601년 신천군수, 1602년 병조정랑·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03년 사간원 헌납·시강원 필선, 1604년 예조좌랑, 1605년 원손 강학관, 1606년 홍문관 교리, 1607년 광흥창수, 1608년 동부승지, 1610년 12월 25일에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령 가운데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로 거론되어 1611년 8월에 파직을 당했다. 그 뒤로도 승지, 대사간, 대사성, 개성유수, 접반사, 동지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금성읍지』에는 “신해(1611년) 2월 14일 도임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체직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