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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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인백 閔仁伯 선조 23년(1590) 12월 18일∼선조 24년(1591) 2월 19일
- 민인백 閔仁伯 선조 23년(1590) 12월 18일∼선조 24년(1591) 2월 19일민인백(1552∼1626)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백춘(伯春), 호는 태천(苔泉)이다. 아버지는 면천군수 민사권(閔思權)이다. 1573년 생원시에서 을과 2등으로 합격하고 승의랑으로 근무하다, 1584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지냈다. 사헌부감찰 때 정철(鄭澈)의 일파라고 하여 안협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기근이 들었으나 백성들을 잘 무휼하고 진안현감으로 전임되었다. 재임 중 기축옥사 때 정여립(鄭汝⽴)이 현계(縣界)로 들어오자 군사를 동원하여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鄭⽟男)을 잡아들인 공으로 예조참의에 승진되고 평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장례원판결사·충주목사 등을 지내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황주목사로서 임진강을 지켰다. 1596년 청주목사, 1598년 여양군(驪陽君)에 봉하여졌다. 1604년 안변부사·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고, 1621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저서로 『태천집』이 있다. 『금성읍지』에는 “경인(1590년) 12월 18 일에 도임하였고, 신묘(1591년) 2월 19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경정 (景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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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제장
- 충장공 민제장閔濟章(1671∼1729)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회백(晦伯), 호는 삼금당(三錦堂),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문경공(文景公) 민영모(閔令謨)와 민회삼(閔懷參)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민담령(閔聃齡)이며, 아버지는 민준경(閔俊慶)이고, 어머니는 함안 박씨(咸安朴氏)이다.민제장은 민정중(閔鼎重)의 문인으로 신장이 9척이나 될만큼 체모가 훌륭하고 능히 5석의 활을 당길만큼 무예가 뛰어나서 1705년(숙종 31)에 무과에 급제했다. 1711년 통신사 조태억(趙泰億)‧임수간(任守諫) 등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들어가다가 대마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풍랑이 크게 일어나 해상에 있는 배들이 표류하는 것을 보고 직접 바다로 들어가 노를 저어 배를 끌고 왔다. 혼자 일행을 구출하여 무사히 일본을 다녀온 뒤, 무산 부사(茂山府使)가 되었다. 1718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제주 목사(濟州牧使), 충청 병사, 전라 병사를 역임하였다. 1726년 북병사(北兵使), 회령 부사가 되었으나 국고를 탕진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으나 영조의 신임으로 무사하여 1728년(영조 4) 안성 군수가 되었다. 이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곧 계문을 써서 방략을 올렸다. 도순무군(都巡撫軍)이 곧바로 직산으로 향하자, 사람을 모집하고 적세를 정탐하여 순무에게 알렸다. 또 보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아우 민제만(閔濟萬)과 함께 몸을 떨쳐 출진하여 적들을 거의 섬멸하였다. 안성과 죽산의 전투에서 민제장 형제의 공이 가장 컸다. 이어 그해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그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분무 원종일등훈(奮武原從一等勳)에 책록되었고, 고종 1869년에 특별히 자헌 대부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 훈련원사에 증직되었다. 섬촌(蟾村) 민우수(閔遇洙)가 행장을 찬술하고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묘갈명을 찬하였다.묘는 전라남도 영광군 구수에 있다.민제장(閔濟章), 湖節5中-136-1, 光州, 戊申, 樹勳 -《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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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종열 閔種烈 고종 30년(1893) 11월 20일∼고종 32년(1895) 7월 18일
- 민종열 閔種烈 고종 30년(1893) 11월 20일∼고종 32년(1895) 7월 18일민종열(1831∼1899)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무경(懋卿), 호는 지담(芝潭)이다. 아버지는 민승세(閔承世)이다. 1865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69년 경릉참봉, 1871년 제용감 봉사·금부도사, 1873년 예빈시 직장, 1874년 형조좌랑, 1875년 형조 정랑·노성현감, 1880년 현풍현감, 1882년 양산군수, 1884년 밀양부사, 1885년 상주 목사가 되어 옥동서원을 보수하고 「중수기」를 남겼다. 1888년에는 민폐 개선 절목인 「상주사례(尙州事例)」를 작성하였다. 1888년 「목사민후종열송덕비」, 1890년 「목사민후 종렬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1890년 남원부사를 지내 「부사민종열영세불망비」가 세워 졌다. 1893년 10월 18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1월 20일 부임하였다. 1894년 2월 1일에는 천거단자를 올릴 때 능호를 평행으로 써 일을 매우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추고를 당했다. 7월 18일에는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체차되었다. 8월 17일에는 전라감사 김학진의 장본에 따라 의정부에서 “이 수령은 소요를 일으킨 이후부터 성첩을 수선하고 군정(軍丁)을 모집하여 4개월을 수성(守城)하여 우뚝하게 독자적으로 보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달아나 숨게 하였으니” 잉임해 줄 것을 계하여 윤허된다. 9월 29일에는 양호(兩湖)의 비류(匪類,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순무영(巡撫營)에서 병사를 조발하여 토벌하고 있는데, 원근의 사민(⼠民)들이 필시 소문을 듣고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많을 것이라 하여 나주목사 민종열과 여산부사 유제관(柳濟寬)을 호남소모사(湖南召募使)에 더 차임한다. 10월 28일에는 호남은 비도(동학농민혁명군)의 소요가 갈수록 더욱 창궐하는데 나주목사가 끝까지 굳게 지키면서 우뚝하게 지주(砥柱)를 지었으니 홍주목사의 예에 따라 나주목사 민종열을 호남초토사(招討使)로 차하하여 우도(右道) 연변의 각 고을을 절제(節制)하여 오로지 섬멸하는 데에 전념하게 하도록 한다. 이처럼 민종열은 나주목사 재임 때 호남소모사, 호남초토사를 겸임하면서 전봉준 동학농민혁명군의 나주읍성 공격을 막아냈다. 겸산(兼⼭) 이병수(李炳壽)의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금성토평비문」 등 유림 측 기록에 동학전투기록이 있다. 매천 황현의시 「민나주종열토평비(閔羅州種烈討平碑)」도 전해 온다. 한편 나주목사가 겸임한 호남초 토사가 보고한 3종의 문서가 있는데, 1894년 11월 문서는 나주지역 7개소 전투에서 최소 765명의 동학농민군이 포살 또는 압송되었다. 문서명칭은 『포살동도수효급소획즙 물병록성책(砲殺東徒數⽘及所獲汁物幷錄成冊)』(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1894년 12월 문서는 14개소 군·현을 포함한 17개관 486명이 포착되었다. 1895년 1월 문서에서는 16개관에서 188명이 포착되었다.(규장각 소장) 1895년 윤5월 1일에는 전국 8도제가 23부제로 개편되고 나주군은 나주부에 속하게 된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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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치성 閔致成 순조 20년(1820) 4월 2일∼순조 22년(1822) 9월 23일
- 민치성 閔致成 순조 20년(1820) 4월 2일∼순조 22년(1822) 9월 23일민치성(1773∼1858)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만여(晩汝)이다. 아버지는 민양현 (閔養顯)이며, 민유중(閔維重)의 5대 손이다. 1787년 유학·영우원 참봉, 1794년 돈녕주 부, 1802년 사포별제·금부도사, 1806년 감찰·종묘령, 1808년 임실현감, 1811년 전생 판관·군자판관, 1813년 덕천군수, 1816년 밀양부사, 1816년 장흥부사, 1818년 진주 목사를 지냈다. 1820년 4월 나주목사, 1823년 안주목사, 1826년 영릉령, 1827년 부호군, 1828년 승지·대사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경진(1820년) 4월 2일 부임 하였고 임오(1822년) 7월에 상경한 후 체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병으로 내려오지 않자 1822년 9월 23일 파직을 당한다. 저서로 민치성이 1818년 장흥부사로 재직하다 떠날 때 인근의 부로와 자제 등 300여 명을 모아놓고 강회를 한 후 시를 짓도록 하여 묶은 시집 『연곡서원강회기운(淵⾕書院講會記韻)』이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수동 입석마을에 1833년에 세운 「목사민후치성선정불망비」가 서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나주목 여황면에 속했는데 1906년에 함평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에 다시 나주로 편입되어 본량면 산수리라 하였고 1949년 8월 14일 광산군으로 이관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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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광옥
- 박광옥朴光玉(1526~1593)은 조선 중엽 명종과 선조 때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널리 실시해 이름을 세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의기로운 선비이다.박광옥의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광주시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기록이 국역된 《회재집》에 있다. 어릴 때부터 이미 동량이 커서 소꿉장난을 하지 않았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상을 당했는데 어른처럼 통곡하며 3년상을 치렀다고 한다.형 박광현은 성격이 엄격하여 아우를 가르치는데 총력을 다했고 회재도 형을 아버치처럼 섬기며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면학에 힘썼다. 21세 때인 1546년 생원 진사에 합격했으나 형이 세상을 뜨자 가통을 이어받아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광주 선도면(지금의 매월동)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실시했다. 당대의 학자로 이름 난 기대승, 박순, 이이, 노사신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560년 목사 유경심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과 학규를 제정하였다.156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1574년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가 되었으며 1577년 운봉 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사, 충청도사,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영광군수.밀양부사가 되어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전주의 교수와 사예.사섬시정.봉상시정 등에 재직하였다.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나자, 전에 정여립의 전장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죄로 삭탈 관직되었다. 1581년 이경중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정여립이 당시 명망이 있음을 보고 극력 배척하며, 청현(淸顯)의 자리에 두지 말라고 논책하였다가 도리어 정인홍(鄭仁弘)·박광옥(朴光玉)·정탁(鄭琢) 등 동인의 언관들로부터 논핵(論劾)당하여 파직당한 것이다.박광옥은 광주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고경명,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왜병이 상주에 도착했다는 정보를 듣고 수레를 타고 달려가 정윤우 광주목사에게 근왕병을 일으켜 험악한 요새지를 차단하고 서울을 호위케 한 다음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정윤우(丁允祐)는 전라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에게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자제들을 가담시키고 군량을 많이 보냈다. 광주에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조달했다. 그런 와중에 복직하라는 어명이 내려오자 승문원 판교에 올랐다가 나주목사로 내려왔다. *承文院(승문원): 다른 나라와의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관청으로서 괴원(槐院)이라고도 하며 태종 十년에 창설되었는데 여기 관직으로서는 판교(判校), 참교(參校), 교감(校勘) 교리(校理), 교검(校檢), 박사(博士), 저작(著作), 정자(正字), 부정자(副正字)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이라 사양할 수 없어 어렵사리 부임했으나 겨우 껍질을 벗긴 곡식밥을 먹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울면서 “임금은 어디 계시며 이때가 어느 때냐”고 말했다고 전한다. 지방수령의 세력으로 재차 의병을 규합해 이전에 가졌던 뜻을 이루려고 했으나 병세가 위독해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가를 내가 집에 돌아와 1593년 생을 마감했다. 선조는 그에게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하였다. 박광옥은 시를 무척 잘 지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자리한 김언거의 풍영정에서 그의 시상을 펼쳤다. 그는 문학에도 재질이 뛰어나 호남에서는 박광옥, 기대승, 박상, 박순, 이도학 이어세라 하였다.1602년 광주 벽진촌(지금의 벽진동)에 세워진 의열사에 제향되었고 뒤에 벽진서원으로 바뀌었다. 전북 남원시 운봉면의 용암서원에도 제향되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그 공을 기려 남구 칠석동에서 시작되어 서구 농산물유통단지-풍암지구 신암마을을 지나 남구 백운동까지의 길을 회재로라고 명명하였다. 음성박씨 문중에서는 풍암동에 운리사雲裏祠를 세워 영정을 모셨고 2018년 7월 벽진서원으로 바꾸었다. 저서로는 <회재유고懷齋遺稿>가 있다.박광옥(朴光玉), 湖節1上-055-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수정 2023.11.12. '나주 벽진촌'을 '광주 벽진촌'으로, '나주 선도면'을 '광주 선도면'으로
- 2018-05-28 | NO.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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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광옥 朴光⽟ 선조 25년(1592) 9월 7일∼선조 25년(1592) 12월
- 박광옥 朴光⽟ 선조 25년(1592) 9월 7일∼선조 25년(1592) 12월 박광옥(1526∼1593)의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으로 광주 출신이다. 154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다. 광주 선도면(船道⾯)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며 기대승·박순·이이·노사신 등과 교유하였다. 1560년 목사 유경심 (柳景深)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학규(學規)를 제정하였다. 156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에 임명되었다. 1574년 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해 종부시 주부가 되었으며, 운봉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 충청도의 도사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지평, 성균관직강, 영광군수, 밀양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5월에는 고경명, 김천일 등과 의병을 논의해 김천일은 나주에 서, 고경명은 담양에서 거의한다. 박광옥은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맹주(盟主)로 활동하였 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 재유집(懷齋遺集)』에 전한다. 회재유집목판은 호남 사림의 교유관계 및 인쇄술의 발달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써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광주 벽진서원(碧津書 院)과 남원 용암서원(⿓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금성읍지』에는 “임진(1592년) 9월 7일에 도임하였고, 동년 12월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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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광조
- 박광조朴光祖(?~1592)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말굽 아래 쓰러져가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큰 뜻을 세우고 의병활동에 참가하였으며 고경명장군이 참가했던 금산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던 의인이다. 본관이 음성이며 시영市榮, 호는 지봉砥峯이다. 정랑正郞을 지낸 박번朴蕃(1469~1542)의 아들이다. 158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고경명, 김천일 막하에서 군량수송부부장으로 나라를 지키는데 혼신을 다하였다.월파 유팽로 장군 의병일기 임진 6월 초6일편에 양공이 내일 행군을 하겠다고 편지로 담양의 창의소로 알려왔고 광주의 전 첨사 신건申健과 첨정 하정河丁, 선비 김세근金世斤과 무안의 전 주부 박광조朴光祖 박광종朴光宗의 형제와 해남의 전 부장 고몽룡高夢龍과 장성의 전 첨정 강염姜恬이 전후하여 잇따라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초토사 고경명의 막하로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부인이 가솔을 이끌고 전장을 찾아가 그의 시신을 찾았는데, 상투에 자신의 성명을 써넣은 종이를 넣어놨다고 전한다. 죽음을 불사하고 왜군에 맞서 싸웠음을 알 수 있었던 대목이다. 사후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박광조(朴光祖), 湖節1上-082-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
- 2018-05-28 | NO.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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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광후 朴光後
-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1637(인조 15)∼1678년숙종 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이다.조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광산구 비아 도천동(光州 鵝山里)에서 출생했고 가까운 안청동에 머물렀다. 1666년(현종 7) 병오식년사마시(丙午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나 병약으로 벼슬할 뜻을 접고 42세의 젊은 나이로 죽어 기질을 세상에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다.안청마을은 조선 효종 때 박광후가 정착 개촌하면서 그 아호를 따 안청安淸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당시의 혼탁한 정국을 비판하고 벼슬길에 나갈 뜻을 접고 안청마을 외성당에서 학문에 열중했다.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은산(銀山)과 철벽(鐵壁)'에 비유하였고, 또한 "큰불이 동연(洞然)에 타지 않은 구슬이다'라고 평한 인물이다. 그의 확고부동한 절개와 의리를 기리며 “슬프다 이 험악한 시운)에 사술(士述 안촌의 자)같은 순결한 성품의 그가 어찌 안 죽을 수 있으랴?”라 하고 묘비문에, “아아 사술이여, 이렇게 죽고 말다니 이 세상 어디에 이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으랴?”하며 애통해 했다. 그가 죽은 후 송시열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은 우암에게 보낸 글에서 “사술(士述)이 죽으니 남쪽지방(南州)에 다시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안촌의 유고인 <안촌세고(安村世稿>)에는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의 외성당기(畏省堂記) 등의 기문이 실려 있고 우암 송시열의 외성당 시 1수와 봉곡 송주석, 손재 박광일, 노사 기정진, 최승현, 최익현, 관어헌 박양동, 기우만, 난와 오계수 등의 외성당 차운시가 실려 있다. 시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전해진다. 광주(光州) 진곡리(晉谷里)에 장사지냈다. 부인 홍씨와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박중회(朴重繪)이다.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1 3월 3일, 光州 鵝山里에서 태어나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2 부친상을 당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14 南陽洪氏와 혼인하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18 조부상을 당하다. 承重하여 상을 치르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20 향교를 출입하며 공부하다. 현종 1 1660 경자 順治 17 24 서울과 호서를 왕래하며 宋時烈을 비롯한 명사들과 교유하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30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32 겨울, 成渾과 李珥를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閔黯의 謁聖을 저지하다. ○ 12월, 朴祥, 奇大升, 朴淳의 合享을 宋浚吉, 宋時烈에게 상의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34 月峯書院에 박상, 기대승, 박순을 합향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39 5월, 송시열의 신원을 위해 도내에 통문을 돌리다. ○ 민암의 알성을 저지한 일이 문제되어 朴光五, 柳益瑞, 金震羽, 柳應壽 등과 함께 형을 받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41 송시열의 長鬐 謫所를 방문하여 5일간 머무르고 돌아오다. ○ 귀로에 慶州와 智異山을 유람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42 楊夢擧 등이 鄭澈을 무함하자 상소하여 변론하다. ○ 9월, 金壽恒이 鐵原으로 移配 도중 방문하다. ○ 11월 15일, 安淸里 자택에서 졸하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 2월, 晉谷里에 장사 지내다. 순종 2 1908 무신 隆熙 2 - 嗣孫 朴元圭가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등을 참고함*2023.3.2. 최종 수정
- 2020-08-11 | NO.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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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규동 朴奎東 고종 21년(1884) 9월 20일∼고종 23년(1886) 6월 19일
- 박규동 朴奎東 고종 21년(1884) 9월 20일∼고종 23년(1886) 6월 19일박규동(?∼1886)의 본관은 순천, 자는 명경(明卿)이다. 1863년 산릉참봉, 예릉참봉, 1864년 항성주부, 1865년 홍릉령, 1867년 수릉령, 영춘현감, 1869년 고부군수, 1872년 의성현령, 1876년 서산군수, 1879년 이천군수, 1882년 3월 청주목사, 1882 년 6월 거창부사를 지냈다. 1884년 8월 16일 나주목사 조석영과 맞교대하여 나주목 사로 제수되어 9월 20일 부임하여 재직하다 1886년 6월 19일 모친상을 당하여 체직 되었는데 그대로 학교리 사제에 머물다 10월 8일 별세하였다. 고부군수 재임 때 홍수 피해가 심하던 눌제(訥堤)를 없애 군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873년 「군수박 규동영세불망비」를 세웠으며, 서산군수 재임 시 자신의 녹봉을 털어 기근민들을 구제 하여 1878년 백성들이 「군수박공규동청덕휼민비(郡守朴公奎東淸德恤民碑)」를 세웠고, 1883년 거창부사 때 세운 철비 「부사박규동청덕선정비」가 있다. 나주 금성관을 중수 하기도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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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술(朴魯述)
- 박노술(1851~1917)의 본관은 순천이다. 자는 공선(公善)이며 호는 석음(石陰)이다. 光州 安淸里에서 觀魚軒 朴陽東과 長興高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6세 때 그의 伯兄과 더불어 부친에게 학문을 배우고, 蘆沙 奇正鎭에게서 四書五經과 濂洛群書를 두루 섭렵하여 文學節義로 추앙받았다. 특히 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노사의 후손인 松沙와 더불어 자주 논변이 있었다. 淵齋 宋秉璿이 考巖書院에서 향음주례를 행할 적에 執禮가 되었는데, 이것을 보고 연재는 학문이 宏博하고 操守가 엄정하다고 크게 칭찬하였다.1889년에 眉巖 柳希春을 기리는 모임에 참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奇宇萬이 일으킨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당시의 檄書가 문집 등에 전한다. 1911년 11월 5일에 奇雲度에게 혼서편지를 보냈다. 을사조약에 淵齋와 勉菴이 차례로 殉節함에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서 자신이 지은 栗里田舍에 숨어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1916년 송사 기우만 선생 襄禮 때 참석하였다.이후 일제가 보내온 소위 恩賜金勅帖을 거절하였고, 고종의 회갑 때에 북망통곡을 하였는데, 자손과 문인들이 그곳에 風泉臺를 짓고 해마다 제향하고 있다. 1917년 6월 23일에 향년 6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부 : 朴陽東조 : 朴濟邦증조 : 朴懿鉉외조 : 高濟儒처부1 : 竹山 安命和『石陰遺稿』가 있다.
- 2020-02-27 | NO.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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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춘(朴魯春)
- 박노춘(1856~?)의 본관은 순천이다. 자는 원중(元仲)이며 호는 호음(湖陰)이다.부 : 朴陽東조 : 朴濟邦증조 : 朴懿鉉외조 : 高濟儒처부1 : 水原 白鎬洙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였다.
- 2020-02-27 | NO.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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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수
- 박대수朴大壽(1533~1612)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참모관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훌륭한 전략을 내놓았고 광주 의병소 시절엔 고경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던 애국지인이다.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송계松溪이다. 진사 박지흥의 증손이며, 하촌 박정의 장남인 박호손朴虎孫의 아들이다. 1533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행이 돈독하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무략을 겸비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금곡사지』에 임진왜란을 만나자 권율의 막하에 들어가 참모관이 되어 충북의 금산 이치梨峙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고 했다. 박광옥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도원수 권율의 참모가 되어 좋은 전략을 내놓았다. 적량만호梁萬戶가 되었다.광주 의병소에 참모로 있으면서 고경명과 더불어 협력성원하고 있을 때 감사 이광이 금강에서 왜적을 제대로 공격하지 못하고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육촌동생인 박희수朴希壽와 더불어 달려가 장검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뜨며 이광의 두려움을 힐책했다. 이광은 이 때 한편으로 부끄럽고 한편으로 두려워서 눈물을 흘리며 “내가 죽음은 두렵지 아니하나 박대수 형제가 두렵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광산김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지효之孝, 지충之忠, 지신之信 3형제를 두었다. 부인 광산김씨는 숙인이 되었다. 묘소는 화순군 도암면 동막동에 위치한다.박대수(朴大壽), 湖節1上-074-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
- 2018-05-28 | NO.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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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하 朴⼤夏 광해군 5년(1613) 8월 21일∼*광해군 7년(1615) 상반기
- 박대하 朴⼤夏 광해군 5년(1613) 8월 21일∼*광해군 7년(1615) 상반기박대하(1577∼1623)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초명은 박대겸(朴⼤謙), 자는 무업(茂業), 호는 송곡(松⾕)이다. 아버지는 생원 박여(朴瓈)다. 1603년 정시 문과 을과로 급제한뒤 예조좌랑·병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감찰·평안도도사, 1608년 훈련도감 종사관, 1609년 형조정랑·사복시 첨정·선천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형조정랑, 예조정랑, 통례원 상례를 거쳐, 1613년 군자감정이 되었으나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피하여 1613년 8월 나주목사로 내려와 봉직한 뒤 1615년 상반기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병사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계축(1613년) 8 월 21일 도임하였고, 체직된 날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다음 목사의 부임일 등을 감안하면 1615년 상반기에 이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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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동열 朴東說 광해군 3년(1611) 9월 13일∼광해군 5년(1613) 6월
- 박동열 朴東說 광해군 3년(1611) 9월 13일∼광해군 5년(1613) 6월박동열(1564∼1622)의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南郭)·봉촌 (鳳村)이다. 대사헌 박응복(朴應福)의 아들이며, 유교 7신의 한 명인 박동량(朴東亮)의 형이다. 1585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하고, 1594년 정시 문과 갑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이어 정언·병조좌랑·사서 등을 지냈다. 1601년 홍문관의 수찬·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1603년 황주목사를 역임하면서 부역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06년 동부승지, 1607년 우부승지·예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 충주목사, 1611년 대사성·예조참의를 거쳐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으나 폐모론(廢母論) 을 적극 반대하다 파직되어 동생(박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병환으로 석방 되었다. 문집으로 『봉촌집((鳳村集)』이 있다.『금성읍지』에는 “신해(1611년) 9월 13일 도임하였고, 체직된 날은 기록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으나 실록에 따르면 1613년 6월에 이임한 것임을 알 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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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래겸 朴來謙 순조 31년(1831) 1월∼순조 33년(1833) 5월
- 박래겸 朴來謙 순조 31년(1831) 1월∼순조 33년(1833) 5월박래겸(1780∼1842)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공익(公益), 호는 만오(晩悟)이다. 아버지는 박선호(朴善浩)로 지금의 경북 구미 출신이다. 1809년 증광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812년 주서, 1816년 정언, 1819년 부사과, 1824년 은산현감, 1826년 교리, 1827년 장령, 1829년 헌납, 1830년 병조참지·승지를 지냈다. 1831년 1월 26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어 2월 5일 하직하고 도임하였다. 1833년 우승지, 1834년 좌승지, 1835년 의주부윤, 1838년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묘(1831년) 1월에 부임하였고 계사(1833년) 5월 8일에 우승지로 자리를 옮겼다.”고 기록되었다. 1837년에 세운 「행목사박후래겸선정비」가 나주목 객관 금성관 안에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7 | NO.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