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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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곡 오희도(1583~1623)
- 오희도吳希道의 본관은 나주. 자는 득원得原이며 호는 명곡明谷이다. 오세훈(吳世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원(吳謜)이다.아버지 오언표吳彦彪는 지조가 있어 남을 허가함이 드물었고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는데 비로소 창평에 옮겨와 은둔하며 삶을 마쳤다. 어머니는 순천박씨(順天朴氏)로, 박명성(朴命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재기가 숙성하여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02(선조35년)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몹시 야위었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들 감동하였다. 묘곁에 여막을 지어놓고 지내면서 매양 조석으로 묘역을 살펴 청소하고 상식하였으며, 몸소 밥을 지어 먹으며 3년상을 마쳤다. 모부인을 섬김에 있어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일에 정성과 공경함을 다하였고 형제들과 함께 살며 독서로 서로 권면하면서 자질을 가르쳐 가정이 화목하였으므로 미천한 동복 역시 모두 감화되었다. 집안일을 계획함에 있어 모두 정돈하였고 혼인은 때에 맞게 행하였다.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으며 형제와 함께 살면서 독서하며 서로 권면하였다. 일찍이 본량 대명곡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명곡明谷'이라 자호 하였고 만년에는 뒷산 지록에 집을 지어놓고 '망재忘齋'라 하여 세속의 사물을 버리는 뜻을 담았다.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는 소장귀천(少長貴賤)을 막론하고 두루 환심을 얻었다.1623(인조원년)년초에 알성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마침내 추천에 의해 한원 예문관에 들어갔다. 일찍이 가주를 대행하여 탑전榻前에 입시入侍하였는데 일을 기록함에 있어 문장의 어휘가 넉넉하고 기록이 민첩하였다. 그만두고 난 뒤에 승정원의 여러 공들이 하리에게 명하여 초기草記를 취하여 올리라 하고 서로 돌아보며 칭찬들을 하였다. 얼마 후에 검열에 임명되어 조정에서 진용되기를 기대하였으나 불행히도 두창에 걸려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향년 41세였다. 공은 순천김씨에게 장가들어 5남을 낳았다. 장남 오이두는 생원이고 다음 오이규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냈는데 영사 원종공신에 참여하였으므로 예에 따라 공은 도승지에 추증되었다.한편 그의 넷째 아들인 오이정(1619~1655)이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 도장곡에 명옥헌원림은 창건하였다. 별뫼의 원림들보다 한세대 뒤인 1625년의 일이다.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로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의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명승 제58호이다.
- 2020-05-11 | NO.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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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종조의 유일(遺逸)- 임훈(林薰)
- 명종조의 유일(遺逸)- 연려실기술 제11권 / 명종조 고사본말(明宗朝故事本末)임훈(林薰)임훈은, 자는 중성(仲成)이며, 호는 자이당(自怡堂)이요, 뒤에 고사옹(枯査翁)이라 고치고 사람들은 갈천 선생(葛川先生)이라 부른다. 경신년에 출생하다. 경자년에 생원에 입격하고, 병인년에 언양 현감을 제수하고 벼슬이 판결사에 이르렀으며, 갑신년에 죽으니 나이 85세였다.○ 계축년에 홍문관의 천거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제수하니 도신(道臣 감사(監司))이 공 형제의 효행을 아뢰어 갑자년에 정문을 명하였다. 병인년에 유일로 천거되어 역마를 타고 올라와 궁궐에 나아갔다. 임금이 불러 보고 정치하는 도리를 물으니, 공이 아뢰기를, “인군의 정치와 교화는 수신이 제일이니, 오로지 수신의 도에 힘을 써서 마지 않으면 이른바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학문을 하는 방도는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선조 초년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하직하는 날에 임금의 편전으로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네가 학행이 있다함을 들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선왕조에 일찍이 한번 불리어 치도를 물으시기에 신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으소서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물음에도 감히 다른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제왕들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을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뚜렷한 효과는 적으니, 그 병통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그 하나는 으레 유자의 말을 보통으로 여겨 더 살피지 않음이요, 그 하나는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가 없어 마침내 해이하여지기 때문이오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자의 말을 상투적인 말로 알지 마시고 스스로 노력하여 쉬지 않는 공부를 더욱 하소서.”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을 때에 선조가, “수령으로 맑은 덕이 있는 이를 가리라.” 명하니, 감사가 공을 천거하고, “공이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이 그를 지목하기를 ‘얼음 병[氷壺]’이라 합니다.”는 말을 하였다.
- 2023-08-09 | NO.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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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장흠 睦⾧欽 광해군 1년(1609) 4월∼광해군 2년(1610) 8월
- 목장흠 睦⾧欽 광해군 1년(1609) 4월∼광해군 2년(1610) 8월목장흠(1572∼1641)의 본관은 사천(泗川)이며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목첨(睦詹), 아들은 전라감사를 지낸 목성선(睦性善), 이조참의 목행 선(睦⾏善), 손자가 병조판서 목창명(睦昌明)으로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1599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00년 사관·예문관 봉교, 1601년 사헌부 감찰, 1602년 시강원 사서·정언·이조좌랑·홍문관 수찬, 1603년 전라도 암행어사·이조정랑, 1605년 전적, 1607년 성균관 직강, 1608년 홍문관 부응교·집의, 1609년 4월 나주목사, 1610년 8월 의정부 사인(舍⼈), 1611년 겸보덕, 1612년 도감 낭청·통정대부 우부승지, 1621 년 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승지에 임명되고, 1630년 남원부사, 1633년 함경도관찰사, 1641년 도승지가 되었다. 『금성읍지』에는 “기유(1609년) 4월에 도임하였고, 경술(1610년) 8월에 의정부 사인(舍⼈)으로 이동하였으며, 선정비가 있다.” 는 기록이 있다. 나주객관 금성관 안에 「목사목공장흠선정비」가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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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 ⽂敍 문종 원년(1450) 3월 29일∼문종 2년(1452) 10월 15일
- 문서 ⽂敍 문종 원년(1450) 3월 29일∼문종 2년(1452) 10월 15일문서(?∼1452)의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판중추원사 문효종(⽂孝宗)의 아들이다. 동생이 문종의 후궁 숙의문씨이다. 실록에 의하면 1429년 호조좌랑, 1431년 전라도 도사를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1450년 3월 나주목사로 부임하기 전까지의 관직 이동에 대해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금성일기』 「경오년 1450년」에 “신임 목사 문서가 3 월 29일 도임하고 벼슬은 중직대부까지 올랐는데 신미년 1451년 2월 9일 통훈대부로 가자되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금성읍지』에는 “경오(1450년) 3월 29일 도임하였고, 신미(1451) 2월 9일에 통훈대부에 가자되었으며, 임신(1452) 8월 3일부터 당학질을 앓아 수개월을 고생하다 10월 15일 해시에 별세하였다. 죽은 후 19일에 통정대부의 교지가 도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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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숙공 황거중(黃居中)-《양촌집(陽村集)》
- 문숙공 황거중(黃居中)황거중은 우주황씨(紆州黃氏)를 중흥시킨 인물로, 고려 말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 1335~1408)와 남원 운봉 전투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무찌를 때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정당문학에 발탁되었다. 황거중은 1380년 무렵 광주목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조선 초기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일으킨 공이 크다. 1395년(태조 4) 원종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사가유고(四佳遺稿)』가 있으며, 죽은 지 400여년 뒤인 1842년(헌종 8)에 김제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권근(權近 1352~1409)의 《양촌집(陽村集)》 권11 / 기류(記類) / 용안성 조전기(龍安城漕轉記, 홍무 23년(1390) 경오 가을 9월)에 "도관찰사(都觀察使) 노공 숭(盧公嵩)이 이곳을 맡아 내려온 이래로 민생의 이득과 병폐를 빠짐없이 따져서 계획을 세우되, 더욱 조전에 치의(致意)하였다. 장구한 계책을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려 하매 바다를 따라 그 지형을 관찰하여, 전주(全州)에서는 진포(鎭浦)의 용안(龍安)을 발견하고, 나주(羅州)에서는 목포(木浦)의 영산(榮山)을 발견했는데, 모두 바닷가에 언덕이 활처럼 구부정하게 둘러 있고 앞에는 바다가 활짝 트였다. *용안현은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노공은 이에 민중들과 상의하기를,”여기에 성을 쌓고 조세를 받는다면 수송하는 백성들이 단번에 끝낼 수 있고, 바다로 조전할 때에도 배를 성 밑에다 대고 져다가 실을 수 있으며, 왜적(倭賊)이 오면 굳게 지켜 병한(屛翰 담)이 될 수 있으니, 깊이 들어와서 노략질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에게 편리하고 국가에도 이로운 것이니, 어찌 여기다 성을 쌓지 않겠는가.”하니, 민중들이 즐겁게 명령을 들으므로 즉시 역문(驛聞)하였는데, 조정의 의논도 좋다고 여겨 이첩(移牒)하여 알리었다.가을 8월이 되어 농사일이 한가하여지자,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 정혼(鄭渾)ㆍ전 광주 목사(光州牧使) 황거중(黃居中)ㆍ전 판사(判事) 노원명(盧元明)ㆍ전 고부군사 정사운(鄭士雲)을 명하여 용안의 성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나주 판관(羅州判官) 윤의(尹義)ㆍ전 개성 윤(開城尹) 김중광(金仲光)과 정윤부(鄭允孚)ㆍ전 판사 나진(羅璡)을 명하여 영산의 성 쌓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니, 각각 관할하는 모든 고을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시작하자, 백성들은 모두 좋아하며 나서게 되어, 권장하는 북소리가 멈출 겨를이 없었다. 가래질하며 달구질하며 흙을 뭉치며 주워다 쌓으니, 이미 두텁고도 높으며 튼튼하고도 깎은 듯한데 여장(女墻)을 두르고 성문을 굳게 하니, 바라보매 엄숙하고 다가가매 우뚝하게 높다.영원히 전할 업적을 한 달 만에 끝내니, 마을 사람과 농부들이 병폐가 없어지게 된 것을 기뻐하여 서로들 집에서 경축하고 길에서 노래하였다. ---------- (중략)노공의 혜택이 마땅히 진포(鎭浦)ㆍ목포(木浦) 두 포구와 더불어 한없이 같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문(記文)을 쓴다.”
- 2023-08-09 | NO.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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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성 ⽂益誠 선조 13년(1580) 7월∼선조 13년(1580) 7월 28일
- 문익성 ⽂益誠 선조 13년(1580) 7월∼선조 13년(1580) 7월 28일문익성(1526∼1584)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는 숙재(叔裁)·분중(賁仲), 호는 옥동 (⽟洞)이다. 합천 출신으로 아버지는 생원 문옹(⽂滃)이다. 족보나 문집 등 일부 기록에 문익성(⽂益成)으로 쓴 경우도 있다. 아들 문할(⽂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전사하여 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증직되었다. 1549년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한 뒤, 1561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어서 1566년 홍원현감으로 있을 때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3년 10월에 승문원 부정자를 시작으로 1566년에 홍원현 감으로 나갔다. 여기서 고을의 자제에게 독서를 장려하고 또 향교에 이들을 모아 강회 (講會)를 열기도 하여 풍속을 교화하였다. 이후 승문원저작을 지내고 1573년 평양서윤 으로 나갔다. 1575년에는 헌납, 양양도호부사로 나아갔다. 1580년에 나주목사로 부임 하였으나 바로 체직을 당했는데, 이는 양양부사로 있을 때 환곡 5700여 석을 횡령하 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이 있었기 때문이다. 1581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와룡정(臥⿓亭) 을 짓고 여기서 만년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1584년에는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를 지냈다. 뒤에 도승지 겸 직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옥동집(⽟洞集)』이 있다. 도연 서원(道淵書院)에 배향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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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재 기진
- 물재物齋 기진奇進(1487~1555)은 동생인 복재 기준奇遵(1492~1521)의 기묘사화로 인한 죽음에 서울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남쪽인 광주 광산구 신룡동 용동마을로 내려와 살았다. 기진은 조선 전기 문인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물재勿齋이다. 오남재吾南齋는 덕성군 기진을 기리는 재각이다.용동마을은 광주 광산구 신룡동, 광산군 소고룡면召古龍面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리新村里·천동리·용동리·구룡리九龍里 등의 일부를 합하여 임곡면林谷面 신용리가 되었다가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용동이 되었다. 행주幸州 기씨奇氏 집성촌으로 형성됐다.기진의 부친은 1487년 응교를 지낸 기찬奇襸으로 김수형金壽亨의 딸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기형奇逈, 기원奇遠, 기괄奇适, 기진奇進, 기준奇遵 등 아들 다섯을 두었다. 기진은 넷째 아들로 동생 기준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했다. 기준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1년에 죽자, 둘째 형 기원과 함께 낙향하여 광주에서 여생을 보냈다. 1522년 진사가 되었고 1527에 경기전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 시골에 은거하다 죽었다. 기진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기대승奇大升이 종계변무宗系辨誣(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고쳐달라고 주청하던 일)의 주문奏文을 훌륭하게 쓴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오르자, 그도 사후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추증받고 덕성군德成君에 봉해졌다. 기대승 문집인 고봉집을 보면 기진은 기대승이 8살일 때 부인을 잃는다. 혼자 아들 셋을 길렀는데 기대승은 “어려서부터 오직 아버지만을 의지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고생하시면서 나를 길러 주셨는데, 어려서부터 질병이 많아 죽다가 살아나곤 하였다. 이제 와서 아련히 그때 일을 생각하니, 비통함이 하늘에 사무친다. 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 중에 나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하고 회상했다.
- 2020-07-09 | NO.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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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재 기진(1487~1555)
- 기진의 본관은 행주, 휘는 진, 자는 자순, 호는 물재이다. 정무공 기건의 증손으로 1487년(성종18) 응교를 지낸 기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6살에 부모를 여의고 동생 기준奇遵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기준이 1519(중종13년)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1년(중종15)에 사약을 받고 죽자, 둘째 형 기원과 함께 낙향하여 광주광역시 광산구 고룡동에서 여생을 보냈다. 1522년(중종16) 진사가 되었고 1527(중종21년)년에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1555년(명종10)에 죽었다. 둘째 아들 기대승奇大升이 종계변무(宗系辯巫: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고쳐달라고 주청하던 일)의 주문을 훌륭하게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오르자 사후에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를 추증받고 덕성군에 봉해졌다.
- 2020-04-28 | NO.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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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호
- 민경호민경호閔京鎬(1863~1930)는 조선말기의 문신으로 민유중閔維重의 6세손이자 민치순閔致純의 아들이다. 호는 청우당聽雨堂 이다.1880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85년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에 임명되었으며, 188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1891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고 1899년 일시 면직되어 고군산古群山으로 유배되었으나 1900년 사면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1903년에는 중추원의관이 되었다. 1906년에는 시강원첨사가 되었으며 1907년에는 궁내부특진관이 되었다.
- 2020-03-12 | NO.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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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호 閔璟鎬 고종 18년(1881) 7월 12일∼고종 19년(1882) 10월 25일
- 민경호 閔璟鎬 고종 18년(1881) 7월 12일∼고종 19년(1882) 10월 25일민경호(1823∼1924)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초명이 민철호(閔喆鎬)였으나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1881년 10월 29일 죄인 ‘哲鎬’와 음이 비슷하다 하여 ‘경호(璟鎬)’로 바꾸었다. 1861년 절충장군, 부호군, 오위장, 1866년 가감역(假監役), 1867년 인릉참봉, 빙고별제, 1868년 옥과현감, 1872년 고부군수, 1874년 평양서윤, 1875년 사옹주부, 감찰, 1876년 우익찬, 1877년 옥과현감, 1880년 평양서윤, 1881년 4월 능주목사를 지냈다. 1881년 6월 20일 나주목사로 제수되었다. 이후 1886년 동지중추부사를 역임 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신사(1881년) 6월 20일에 능주목사에서 옮겨와 제수되어 7월 12일 부임하였고 임오(1882년) 10월 25일 구세미(舊稅⽶)를 제 때에 납부하지 못한 일로 순영(巡營)의 장계에 의해 파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86년 6월에는 아버지 학생 민방무(閔坊懋)가 호조참의에, 할아버지 동몽교관 민심(閔深)이 좌승지에, 증조부 동몽교관 민옥(閔鈺)을이사복시 정에 증직되었다. 9)확인 불능이며, 아버지는 치대(致⼤)이고 조부는 단현(端顯)이다. 치대의 동생이 치구(致久)인데 흥선대원군의 장인이자 고종의 외조부가 된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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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백남 閔百男 영조 29년(1753) 5월 29일∼영조 31년(1755) 2월 4일
- 민백남 閔百男 영조 29년(1753) 5월 29일∼영조 31년(1755) 2월 4일민백남(1689∼1755)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민재수(閔在洙)이다. 1726년 목릉참봉, 1728년 예장도감 감조관, 1730년 금부도사, 1731년 태인현감, 1734년 전설별제, 1735년 서빙고별제, 1737년 재령군수, 1741년 선산부사, 1745년 파주목사, 1746년 원주목사, 1747년 성주목사를 지냈다. 1753년 4월 28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5월 18일 하직하고 5월 29일 부임하여 1755년 2월 4일에 파직되었다. 『영조실 록』 82권(1754년 7월 23일) 기록에 호남어사 홍자(洪梓)의 서계 별단(書啓別單)에 따라 나주목사 민백남이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하사받았다. 『금성읍지』에는 “계유(1753 년) 5월 29일에 도임하였고 을해(1755년) 2월 4일에 파직 되었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9 | NO.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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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백분 閔百奮 영조 44년(1768) 12월 11일∼영조 45년(1769) 4월
- 민백분 閔百奮 영조 44년(1768) 12월 11일∼영조 45년(1769) 4월민백분(1723∼1793)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흥지(興之)이다. 증조할아버지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이 전라감사를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는 병조판서 민진후(閔鎭 厚), 아버지는 생원 민익수(閔翼洙)이다. 아들 민기현(閔耆顯)은 문과 급제 후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음직으로 나아가 1745년 목릉참봉, 1746년 동부봉사, 1748년 영릉참 봉, 1750년 영춘현감, 1754년 제용판관, 1755년 순창군수, 1758년 회덕현감을 지냈 다. 1768년 11월 21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1768년 12월 11일에 부임하였다. 1770 년 정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에 오른다. 1771년 우부승지·충청도관찰사, 1772년 동부승지, 1773년 안동부사, 1774년 대사간, 1775년 충청도관찰사, 1776년 대사성·병조참판, 1793년 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금성읍지』에는 “무자(1768년) 12월 11일 부임하였고 기축(1769년) 4월에 대동미를 실은 배가 침몰한 일이 있어 파직되었 다.”고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05 | NO.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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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여임 閔汝任 인조 2년(1624) 2월 4일∼인조 3년(1625) 1월 16일
- 민여임 閔汝任 인조 2년(1624) 2월 4일∼인조 3년(1625) 1월 16일민여임(1559∼1627)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성지(聖之), 호는 취옹(醉翁) 또는 진의(振⾐)이다. 아버지는 군수 민사용(閔思容)이며, 군수 민여신(閔汝信)의 동생이자 부사 민여검(閔汝儉)의 형이다. 1591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1594년 별시 문과에서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1596년 승문원 권지, 1599년 형조정랑·합종현령, 1604년 예조정랑·병조정랑, 1605년 전라도 안문어사·사헌부 지평·사헌부장령, 1608년 사간, 1611년 흥해군수, 1614년 남원부사, 1623년 좌부승지·우부승지를 지내다, 1624년 2 월에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25년 7월에 동중추, 1626년 공조참판을 지냈다. 좌찬 성에 추증되었다. 『금성읍지』에는 “갑자(1624년) 2월 4일 도임하였고, 을축(1625년) 1 월 16일에 체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7 | NO.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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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채 閔泳采 광무 7년(1903) 8월 21일∼광무 10년(1906) 6월 13일
- 민영채 閔泳采 광무 7년(1903) 8월 21일∼광무 10년(1906) 6월 13일민영채(?∼?)의 본관은 여흥(驪興), 고창 출신이다. 아버지는 생원 민기호(閔琦鎬)로 민석호(閔碩鎬)의 양자가 되었다. 동생으로 참서관 민영득(閔泳得), 중추원 칙임의관 민영 직(閔泳直)이 있다. 1890년 금부도사, 1899년 작세위종정원(爵洗位宗正院) 6품, 중추원 의관, 1901년 무안감리 겸 무안부윤을 지냈다. 1903년 6월 29일 나주군수로 임명되 었다. 1905년 음 8월 5일에는 금성산 추제(秋祭)를 지낼 때 헌관이 되었으며 1906년 나주향교 사마재를 중수했다. 1906년 6월 13일 청도군수로 이임하였다. 1908년 규장각 부제학, 1919년 종척집사를 역임하였다. 무안군 해제면 관란재(觀瀾齋)에 시 편액이 걸려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1-11 | NO.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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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이 閔頤 연산군 8년(1502) 1월 28일∼연산군 9년(1503) 1월 21일
- 민이 閔頤 연산군 8년(1502) 1월 28일∼연산군 9년(1503) 1월 21일민이(1455∼1505)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정숙(正叔)이다. 1397년 6월부터 1398년 1월까지 전라감사를 지낸 민여익(閔汝翼)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의정부 사인 민순손(閔順孫)이다. 147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86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 으며, 1489년 봉훈랑(奉訓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492년 예조정랑, 사옹원 첨정, 통선랑을 거쳐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1497년 사간원 사간을 거쳐 1502년 1월에 나주목사로 부임, 1503년 1월에 사헌부 집의로 이동을 하고, 홍문관 직제학, 대사간 등 언관(⾔官)으로서 삼사(三司)를 두루 거쳤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