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55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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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익훈 南益熏 숙종 10년(1684) 3월 10일∼숙종 11년(1685) 7월 9일
- 남익훈 南益熏 숙종 10년(1684) 3월 10일∼숙종 11년(1685) 7월 9일남익훈(1640∼1693)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자는 훈중(熏中), 호는 파은(坡隱)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남훤(南翧)이며, 어머니는 권현(權俔)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 남이신 (南以信), 할아버지 남두첨(南⽃瞻), 동생 남치훈(南致熏)과 남지훈(南⾄熏)도 모두 문과 급제자이다. 166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72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73 년 설서, 1674년 검열, 1675년 정언, 1675년 부수찬, 1677년 수찬, 1678년 교리, 1680년 이조좌랑, 1681년 동래부사, 1683년 우부승지, 1684년 2월 5일 나주목사에 제수되어 3월 10일 도임하였다. 이후 1686년 판결사, 1687년 형조참의, 1688년 장단부사, 1689년 부총관, 1689년 양주목사, 1692년 동의금부사·경상도관찰사·함경도관 찰사 재직 중 1693년 6월에 사망하였다. 『금성읍지』에는 “갑자(1684년) 3월 10일 도임하였고 을축(1685년) 7월 9일 사직하였다.”라 하였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22 | NO.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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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경린 盧慶麟 명종 8년(1553) 1월 21일∼명종 8년(1553) 6월
- 노경린 盧慶麟 명종 8년(1553) 1월 21일∼명종 8년(1553) 6월노경린(1516∼1568)의 본관은 곡산(⾕⼭)이며, 자는 인보(仁甫), 호는 사인당(四印堂)이 다. 아버지는 사과(司果)를 지낸 노적(盧績)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장인이다. 1539년 별시 병과에 1위로 합격하였다. 성균관 학유와 박사를 거쳐 공조·예조·호조·형조의 낭관(郞官)을 역임하였다. 이어 평안도, 황해도 도사를 역임하고 1550년 사헌부 지평, 장악원 첨정, 종부시 첨정을 지냈다. 1553년(명종 8) 1월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 5월 14일 양계(兩界)의 관비(官婢)를 솔축(率畜)하였다 하여 파직 추고하도록 사헌부에서 탄핵하였다. 이후 상주목사를 거쳐 종부시정과 숙천부사를 역임하였는데, 1566년에 삭탈 관직되어 고향 해주로 낙향하였다. 『금성읍지』에는 “춘추편수관을 겸하여 계축(1553 년) 1월 21일에 도임하였고, 양계의 관비를 첩으로 들이는 것이 적발되어 동년 6월에 파직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문정(⽂靖)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5 | NO.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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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영국 盧永國 태종 2년(1402) 9월 10일∼?
- 노영국 盧永國 태종 2년(1402) 9월 10일∼?노영국(1363∼1419)의 본관은 광산(光⼭)이며 호는 동정(東井)이다. 아버지는 절효공 노준공(盧俊恭)이다. 월성부원군 김천서(⾦天瑞)의 딸이자 정종의 비인 정안왕후(定安王后) 의 여동생과 결혼하였다. 나주목사 이후 전라병사,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금성일기』 「임오년 1402년」에 “판목사 노영국이 9월 10일 도임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금성읍 지』에는 “임오(1402년) 9월 10일 도임, 이임 일자 기록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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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재 배승무裵承武(1559~1593)
-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노재이다. 조선 1559(명종14년)년 동곡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 장군과 함께 의거하여 영호남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1593년 광주지역에서 복수장 고종후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에 들어가 김천일과 함께 7일간 혈전을 치르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사후에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57호로 지정된 나주 무열사에 배현경을 주벽으로 배정지裵廷芝ㆍ배극렴裵克濂이 제향되어 있었는데 1868(고종5년)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려 그 자리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1882(고종19년)년에 다시 복건하여 배운룡裵雲龍ㆍ배공서裵工瑞ㆍ배공보裵工甫ㆍ배승무裵承武ㆍ배세조裵世祚 등 5위를 추배하였다.배승무(裵承武), 湖節1下-173-4, 光州, 壬辰, 高從厚同殉-《호남절의록》(1799)
- 2020-04-02 | NO.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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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준공(盧俊恭)
- 노준공(1340∼1397)은 광주 출신으로 그의 후손들이 일곡동 일곡마을에 자작일촌하고 있다. 호는 심계(心溪), 시호는 절효(節孝), 본관은 광주이다. 고려 말 밀직사를 지낸 사청(士淸)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기개가 높아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광주에서 최초로 효자 인물로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다.어머니 병환에는 옆을 지키며 손수 약을 달여 드리고, 변(똥) 맛을 보아 병세를 가늠하여 병세가 위태로울때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일시 소생하게 하는 등 극진한 효도에 주위 사람들의 감탄과 함께 그 누구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특히 고려 우왕 때 상례 제도가 폐지되고 없어져 모두 백일 동안 복을 입고 벗는데, 그는 묘의 여막(廬幕)에서 3년을 지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시묘 때 호랑이도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호위하며 따랐다고 전해지고 있다.조선을 창업한 이 태조가 그의 학문과 명성을 듣고 벼슬을 내리고 몇 차례 불렸으나 거절하고 무등산 계곡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광주읍지(1879)》, 《효행열지(1985)》, 《노씨위적사(1988)》
- 2020-04-01 | NO.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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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포 류희달(1571~1631)
- 류희달柳希達의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호는 농포弄圃이다.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규합하여 활약하였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으로 재직하였으며 1599년(선조32)에 죽산부사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600년(선조33) 의인왕후懿仁王后 국상 때 산릉을 만드는 역군役軍을 늦게 보낸 일로 파직된 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낙향하여 살았다. 1605년(선조38) 선무원종공신의 녹권을 받고 가선대부에 증직되었다. 덕림사德林祠에 제향되었다. 1947년에 농포선생을 기리기 위한 농포류선생신도비가 세워진 바 있다.
- 2020-05-11 | NO.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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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눌재 박상朴祥(1474~1530)
- 박상朴祥(1474~1530)은 진사 박지흥의 차남이며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던 조선 중종 때의 관료로 사림 운동에 전력한 학자이자 정치가였으며 호남 사림의 대부이다.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다. 눌재는 1474(성종5년)년에 광주 방하동 본가에서 성균관 진사였던 부친 지흥과 모친 계성서씨 사이에서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박씨 집안은 대대로 송경에서 살아왔는데 조고판서공 때 호서의 회덕현으로 이주하였으며 부친인 찬성공이 다시 부인서씨의 고향인 서창 방하동 봉황산 아래로 옮겨 터를 잡았다. 눌재의 아버지가 호남으로 내려오게 된 이유는 부인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과 관련하여 벼슬길을 포기한 것으로 눌재의 집안이 절의파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눌재는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가 단정하고 얼굴빛이 영명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학문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눌재의 첫번 째 스승은 아버지인 찬성공이었는데 부친은 그가 1488년 15세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후 눌재의 백형인 하촌 박정이 눌재의 학문을 담당했다. 학업에 정진하는 동안 눌재의 기억력은 비상하였으며 부친과 백형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명예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통감하여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경술에 널리 통하였고 문사에도 큰 진보가 있었다. 1496년 진사시를 지냈고 1501년 28세에 정시 을과에 2등 5위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는데, 첫 관직으로 교서관 정자를 제수받았고 이듬해 승문원 교검과 시강원 사서를 제수 받았으며 1년 뒤에 병조좌랑을 제수 받았다. 눌재는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학문으로 닦아왔던 의리정신을 실제 정치현장에서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의리 정신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은 전라도사로 부임하였을 때에 일으킨 김소부리(우부리) 장살 사건이다.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권신들의 미움을 사 관직 대부분을 외직으로 나가있었으며, 가는 곳마다 사림 후배들을 챙겼다. 특히 기묘사화 이후 살아남은 조광조의 문하생들을 거둬 사림 운동의 맥을 이어줬다. 단경왕후 복위에 관한 상소로도 유명한데 이에 대해 생전의 조광조가 '강상의 법도를 세웠다'라고 칭찬한 바 있다. 평소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후배였던 퇴계 이황이 ‘하늘이 내린 완인完人(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는 사람)이라 평하기도 했다. 성정은 참으로 곧았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정의를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가난한 백성을 위해 아낌없는 선정을 행했다. 전라도사 시절 나주의 우부리가 연산군의 후궁으로 있는 딸의 권세를 믿고 횡포를 자행하자 그의 죄상을 물어 곤장으로 때려죽였다. 그 성품이 얼마나 곧고 굳센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세른 세 살 때인 1506년 사간원 헌납이 되어 사헌부와 더불어 임금의 내척과 외척 등의 성급한 발탁을 간언하는 등 간관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였다. 당시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과 재신들의 간곡한 상소로 풀려나왔다.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와 병조 등의 전관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사헌부가 대간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하여 곧 종묘서령, 소격서령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고향이 가까운 전북 군산의 임피현령으로 나아갔다. 임피현령으로 3년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가 독서로 소일했다.서른여덟 살 되던 1511년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고 담양부사가 되었다. 마흔 두 살인 1515년 봄 또 다시 필화에 얽혔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상빈上賓 문제로 바른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순창군수 충암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전 왕후 신씨愼氏를 복위시키려 바른말을 하였다.조광조와 교유했던 박상은 신비복위상소를 올린 후 남평 오림역烏林譯으로 유배를 가자 조광조가 박상을 옹호하며 유배를 풀어줄 것을 주장한다. 조광조는 1519년에 능성(현재 화순 능주)으로 유배를 가며 광주를 거치자 박상은 광주 읍성 남문 밖 10리에 있는 분수원에서 그를 만나 면회하였다.박상은 모재 김안국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고, 광산 출신의 하서 김인후와는 교분이 깊었다. 임억령, 송순, 정만종 등이 박상의 문하에서는 직접 사사했다. 임억령과 깊은 교유를 한 사람이 고경명이고, 송순의 문하에서 정철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호남지방에 성리학을 보급하고 호남사림을 형성.발전한 대표적 인물이다. 박상은 호남사림의 원조인 셈이다.1516년에 대한발로 인해 석방되어 향리에 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의빈부도사,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곧 사직했다. 1519년 기묘사화 후 중앙부처에 염증을 느껴 상주목사, 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526년 일종의 승진시험인 중시에 장원급제했지만 훈구파에 밀려 승진하지 못하고 나주목사로 선정을 베풀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었다. 1530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간공으로 하였으며 광주의 월봉, 순창의 화산, 담양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여러 차례의 혹독한 변고를 당하였어도 위엄이 사그러들지 않았으니 퇴계 이황은 그의 고상한 기품과 탁월한 식견을 칭찬하여 행동과 인품에 흠이 없다며 ‘하늘이 내린 완인’이라 하였다. 청백리로 추천받았고 문장가로 이름이 높아 성신 신광한, 황정욱과 더불어 서거정 이래로 사가로 높이 칭송되었다. 정조의 시문과 논음, 교지 등을 모아 만든 홍재전서에서 조선 5백년의 으뜸가는 시인이라 일컫는 읍취헌 박은과 비교하면서 눌재 시의 우월함을 찬양하기도 했다.당대의 명현인 사암 박순과 숙질간이다. 저서는 <눌재집訥齋集> 8권이 있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다.눌재가 호남문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그가 생존했던 16세기부터 17세기를 거치는 사이 호남에서는 훌륭한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수준에 있어서도 절정기에 이르렀는데 이 호남 시단의 첫머리에 눌재가 자리하고 있다. 눌재는 주로 호남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이는 자신이 광주 출신이므로 교유의 범위가 호남 위주가 되었을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이들이 대부분 호남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혁혁한 문사들이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눌재의 교유 시인 중에서 또 하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리는 기묘사화에 관련되었던 기묘 제현들이다. 눌재는 기묘사화의 한 원인을 제공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눌재와 기묘 제현들과의 관계는 밀접하다. 신잠, 김세필, 윤구, 고운, 김정, 소세양, 임억령, 조신, 정사룡, 정만종 등이 눌재의 교유 시인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들인데 그 가운데 신잠부터 김정까지가 눌재와 함께 기묘명현으로 일컬어지는 시인들이다. 또한 눌재에게 사사하였거나 교유 이외에도 기묘사림과 뜻을 같이 하였던 복재 기준의 조카 고봉 기대승과 기묘명현의 한 분인 하천 고운의 손자 제봉 고경명 등도 눌재의 문하라고 할 수 있다.*2024.11.19 수정
- 2018-08-19 | NO.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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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지 제1권; 권율 광주 목사(光州牧使)
-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뜻을 독실하게 지니고 학문에 힘썼다. 소경왕 15년(1582)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다. 25년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권율은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어 남원(南原) 이현(梨峴)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얼마 뒤 본도 관찰사로 승진하여 병사를 이끌고 왕을 근위하기 위해 고양(高陽)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이르렀다. 당시 왜의 장수들이 모두 경성에 모여서 왜적의 형세가 매우 성대하였으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 왔는데, 권율이 힘써 싸워서 그들을 대파하자 도원수에 임명되었다. 졸한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권율은 중후하고 기량(氣量)이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을 성의로 거느리고 위엄과 굳건함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력을 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회복할 수 있었고 명장(名將)으로 명성이 천하에 알려졌다. 행주대첩 때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개성(開城)에 있으면서 유격 사대수(査大受)를 보내어 함께 만나 보기를 청하고 감탄하기를 “권가군(權家軍)은 다른 부대에 비할 바가 아니니 외국에 참된 장수가 있었구나.” 하였다. 왜의 우두머리가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권 원수(權元帥)의 안부를 물었다.
- 2022-05-06 | NO.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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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여지지 제2권; 박순(朴淳)
- 박순(朴淳) 광주(光州) 사람이다. 본조 선조(宣祖) 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공의 청렴한 지조를 존경하였다. 만년에 당시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아 영평현의 백운계 가로 물러났는데, 거처하던 곳에 배견와, 이양정이 있었다. 입을 닫고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약초를 심고 고기 잡으며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촌사람과 야로(野老)가 술을 가지고 찾아오면 기쁘게 마주하여 술을 마셨고, 학자들이 와서 강론할 때는 매번 추위나 더위를 잊었다. 끝내 이곳에서 졸하였는데, 공이 죽자 성혼(成渾)이 만시(挽詩)를 지어 애도하였다. 그 만시에,세상 밖 백운산 깊고도 깊은데 / 世外雲山深復深시냇가 초가집 이미 찾기 어렵네 / 溪邊草屋已難尋배견와 위에 삼경의 달 / 拜鵑窩上三更月응당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하였다.
- 2022-05-06 | NO.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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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박
- 류박(柳璞), 湖節5上-091-1, 光州, 丙子, 扈從-《호남절의록》(1799)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때는 이 고장 출신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 2020-04-02 | NO.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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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사(柳泗, 1503~1571)
-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자는 중락(仲洛), 본관은 서산이고 호는 설강이다. 교수였던 서희송과 어머니 청송심씨 아들로 유득공현(남구 대촌면 이장동)에서 태어났다.1522년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27세에는 문과 별시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외임을 많이 맡아 무장현감, 전라도사, 낙안군수, 삭주부사, 종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1558년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이 왕의 총애를 계기로 전권을 휘두르며 당파를 만들어 윤근수, 심의겸 등을 제거하려 하자 승지에 있으면서 그를 위시한 권신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했다가 무고로 몰려 권신 이량과도 사이가 벌어져 고향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욕심없이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자신이 제례를 제정하여 자손들을 가르치고 유자후의 글을 베껴서 간행하고자 자손에 훈계하는 글을 써서 심광언에게 부탁하여 간행하였다.이때 고향의 건너편인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본덕동 남쪽 구강인 노평산 기슭에 터를 잡아 정자를 처음 세우고 소강절의 호가지의를 취해 '호가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퇴계 이황, 국재 오겸, 회재 이언적 등 여러 명현들과 더불어 도의를 강마하였다.1563년에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보령에 유배되어 이량이 세력을 잃게 되자 선생을 다시 기용하려고 영해부사를 제수하였으나 나이도 많고 병이 있어서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전남지역 내의 유림들이 그의 문장기절을 추중하여 편방사(지금의 경렬사)에 배향되었고 《해동명현록》에 실려 있다. 저서로 《설강집》2권과 <위친필봉제축유서>가 전하고 있다. 호가정 내에는 호가정 현판과 설강의 호가정기,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후손 유보한의 호가정 중수기, 호가정 원운과 당대에 교분이 두터웠던 이황,이언적, 오겸 등과 사위로 맞이한 김성원과 후대의 이안눌, 노사 기정진, 유보한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한 편액들이 걸려 있다.사위로 맞이한 김성원과 후대의 이안눌 등이 그의 시를 즐겨 차운 하였다.설강 선생이 호가정을 짓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원한 돌베개에 솔그늘 더욱 짙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빛이 뚜렷하네 차가운 강물 위의 밝은 달빛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한가로이 돌아온다 아래는 구강(九江)이요 위에는 하늘인데 은이 할 일 없어 세속에 내맡겼네 바빴던 지난일을 뭣하러 생각할꼬 늦사귄 물새가 한가로이 졸고 있네
- 2020-03-19 | NO.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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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사경
- 류사경(柳思敬, 1556~?), 湖節1上-070-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류사경은 문화류씨이며 자는 덕신德新, 호는 육유당이다. 우의정을 지낸 류량의 8대손, 유혜의 아들이며 광주 이장(光州 泥場), 현 남구 양과동에서 자랐다. 문장에 뛰어났고 절개(節槪)가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회재 박광옥의 사위이다. 임진왜란 때 늘 박광옥의 곁에 머물러 의병도청을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 노력했고, 박광옥의 행장을 지었다.‘양과동적입의서(良苽洞籍入議序)’나 ‘양과동정향약서(良苽洞亭鄕約序)’ 등에 따르면 ‘옛 부곡(部曲) 일대의 동약이 잘 지켜지지 않아 성종 때 다시 동적을 만들었으나 이 또한 세월이 흐르며 준수가 안 되어 새로이 1604년 류사경(柳思敬)이 동약을 재정했다’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1605년(선조 38)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진사 박종정(朴宗挺) 등과 함께 상소를 올려 도신(道臣) 이황(李滉)의 두류(逗流)의 죄(罪)를 논척(論斥)하였고 별제학(別提學)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시배(時輩)들을 미워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참고문헌] 광주읍지, 광주시사 『육유당일기(六有堂日記)』는 장성 필암서원의 1975년 『필암서원지』권 12. 장서목록 - 206종 777책에 들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의 정유재란 때의 일기가 실려있다. 광주에서 올라와서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 기록한 서행일기도 나온다. 월파집3권의 의병기인 월파 류팽로장군 의병일기 임진(壬辰) 6월 초4일 임진에 보면 "광주의 수령 정윤우(丁允祐)가 군량 50석과 소 두 마리를 보내왔고 전 진사 류사경(柳思敬)도 양식과 기계를 모아서 도와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 2020-04-02 | NO.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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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술
- 류술(柳述, 1582~1652)의 자는 효숙(孝叔). 호는 애죽헌(愛竹軒)이다. 종부시소윤 한생(宗簿寺少尹 漢生)의 8대손, 예조좌랑 육유당 사경(禮馴佐郞 六有堂 恩敬)의 둘째로 선조(宣祖) 15년 壬午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외조(外祖) 회재 박광옥(懷齋 朴光玉)에게 학문을 익혀 문장과 행의로 그 명성이 드러났었다. 인조(仁祖) 5년 丁卯(1627) 정묘호란에 호소사 김장생(號召使 金長生) 소모유사(召幕有司)가 되어 의병(義兵)과 군량(軍糧)을 모아 전주에 이르렀는데 의병을 해산하라는 엄지(嚴旨)가 있어 의병을 해산했다. 김장생의 거의록(擧義錄)에 柳述。字孝叔 號愛竹軒 文化人 朴懷齋光玉外孫也 丁卯亂 先生辟公以軍器有司 公到全州 聞媾成罷歸(居光州) 동궁(東宮)을 호종(扈從)하고 여산(礪山)에 이르러 화전(和戰) 성립의 소식을 듣고 시골로 돌아왔다. 湖節4下-128-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 -《호남절의록》(1799)광산군 대촌면 유등곡 건덕산 선영 북록(光山郡 大村面 柳等谷 建德山 先瑩 北麓)에 안장되었다. 배위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온침(蘊沈)의 女, 함양박씨(咸陽朴氏)는 생원 엄(生員 儼)의 女인데 모두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동생 선(季弟 選)의 장자 종기(宗起)를 맞아 계자하였다.
- 2020-04-02 | NO.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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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휘진(1556~1593)
-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초토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막취의병장兵糧幕聚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강화도에서의 전공으로 군기시주부 벼슬이 제수되었다. 1593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김천일과 같이 순절하니 호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충의 시호가 내려졌다.류휘진(柳彙進)의 자는 언우(彦遇)이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湖節1下-096-1, 光州, 壬辰, 金千鎰同殉 -《호남절의록》(1799)성해응(成海應, 1760~1839) 의 『硏經齋全集』 卷之五十九 蘭室史科二의 <晉陽殉難諸臣傳>에는 柳彙進字彦遇。文化人。素倜儻好奇節。壬辰從金千鎰起兵。常爲軍鋒。及晉州陷。與千鎰俱死。年三十八。甞以軍功拜軍器主簿。後贈戶曹參判。子瓘,璜亦死丁酉之難조선 후기 문신 원경하(元景夏, 1698~1761)의 『창하집(蒼霞集)』 권8의 묘갈명 중에 <軍器寺主簿。贈戶曹參判柳公墓碣>에 …節光州。閱輿地誌。有曰。柳彙進佐倡義使金千鎰幕。同死于晉州。公雖不幸而失白沙之筆。幸而載斯誌。使後人徵焉。庶有以慰公於九原也歟。余銘湖南義烈之墓多矣。表高霽峰。誌鄭運金浚。而今又書公事于碣。公未與數公振顯于世。則其書也宜可以詳과 같은 기록이 있다.
- 2020-04-02 | NO.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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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천목 ⾺天牧 태종 12년(1412) 5월 22일∼태종 13년(1413) 7월 19일
- 마천목 ⾺天牧 태종 12년(1412) 5월 22일∼태종 13년(1413) 7월 19일마천목(1358∼1431)의 본관은 장흥(⾧興)이며, 자는 군련(君戀), 호는 오천(梧川)이다. ‘제1·2차 왕자의 난’ 때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 3등에 녹훈되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하였다. 공신 녹권이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좌명공신 정공신녹권으로는 유일하다. 1409년 전리(典吏) 고을귀(⾼⼄貴) 치사 사건으로 곡성 (⾕城)에 유배되었다가 전라도 도절제사로 복직한다. 1411년 용기시위사절제사, 1412 년 5월 전라도병마도절제사 판나주목사, 1414년 장흥군(⾧興君)으로 군호가 바뀌었다. 이후 도총제, 전라도병마도절제사, 내시위절제사, 우금위절제사, 판우군도총제부사를 지냈다. 1424년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곡성으로 갔으며, 1429년 장흥부원군이 되었다. 1417년 광산현(현재 광주광역시 송정시)에 있던 전라병영이 도강군(현재 강진군 병영면 일원)으로 옮겨지자 병영성을 축조하였다. 『금성일기』 「기축년 1409년」에 “병 마도절제사 가정대부 마천목이 5월 22일 도임하였다가 계사(1413년) 7월 19일에 자헌대부로 가자되면서 떠났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임진(1412년) 5월 22일 도임, 계사(1413년) 7월 19일 자헌대부(資憲⼤夫)가 되면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세종실록』 그의 졸기에 세종이, “흉금(胸襟)과 도량이 크고 깊으며, 천성이 순수하고 행검(⾏檢)이 독실한데다가, 외적을 막는 재능이 뛰어나고 계략 (計略)의 지혜 또한 구비하였으니, 실로 군왕의 우익(⽻翼)이요, 국가의 주석(柱⽯)이라 이를 만하도다.”고 치제하며 슬퍼하였음이 기록되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 2024-10-14 | NO.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