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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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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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환검 李還儉 우왕 2년(1376) 8월 12일∼우왕 4년(1378) 1월. 상경
    이환검 李還儉 우왕 2년(1376) 8월 12일∼우왕 4년(1378) 1월. 상경이환검(?∼?)의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고려사』열전 1386년(우왕 12) 1월에 “우왕이 숙녕옹주(肅寧翁主)에게 주옥장을 주려고 보원고별감 황보(⿈補)를 불러 주옥의 숫자를 물었는데, 황보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우왕이 크게 화를 내면서 즉시 황보를 순군에 가두고, 또 제조 박천상·서균형·이환검의 가노(家奴)를 각 10인씩 옥에 가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병진년 1376년」에는 “목사 이환검이 8월 12일 나주에 왔다 무오(1378년) 1월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라는 내용이 있고, 『금성읍지』에는 “병 진(1376년) 8월 12일 도임, 무오(1378년) 정월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5
  • 장항 張沆 충숙왕 13년(1327, 정묘) 전후
    장항 張沆 충숙왕 13년(1327, 정묘) 전후장항(?∼1353) 1) 의 호는 눌재(訥齋)이며,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사헌규정과 좌사 의대부가 되었다. 1320년(충숙왕 7, 경신)에 충선왕이 원나라에 5년간 억류 중에 티베 트로 귀양을 가게 될 때 여비를 가져다 준 공적으로 1327년 11월 24일에 나주목사 벼슬로 이등공신에 오른다. 이어 군부판서, 밀직제학, 첨의참리 평양윤을 거친 후에 영산군(永⼭君)에 봉해졌다. 충혜왕 때에는 전민추쇄도감의 제조가 되고, 충목왕 때에는 참의, 참리, 정당문학에 오른 뒤에 경사도감의 제조와 서연관에 올랐다. 특히 예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 공민왕의 명을 받아 종묘의 예악과 기복을 수정하여 칭찬을 받았 다. 시호는 문현(⽂顯)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4
  • 정세운(鄭世雲)
    정세운(鄭世雲, ?~1362)은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출신지는 장흥이다.공민왕 때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면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국난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난세의 영웅이었으나 음모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정세운 장군의 본관은 광주이며 광산 출신으로 고려 공명왕 때의 충신이자 뛰어난 장군이다. 강릉대군(江陵大君,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공훈을 세우고 돌아와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 공적으로 이등공신에 책록되었고 공민왕 5년(1356년)에 역적 기철(奇轍)을 때려죽인 공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가 되었다.기철은 원나라 순종황후 기씨의 큰 오빠로 그 당시 기씨 형제들은 고려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공민왕이 이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궁중에서 술잔치를 열어 불러들인 뒤 기철과 그 추종자를 없애고 서울에 계엄령을 내려 그 일당들을 모두 제거했다. 정세운 장군은 이때의 공로로 일등공신의 서열에 끼게 되면서 김용(金鏞)과 왕의 총애를 다투게 되었다.1361년(공민왕 10년) 겨울, 홍건적이 쳐들어와 서울은 함락당하고 만다. 정세운 장군은 왕을 호송하면서 임금에게 민심을 위로 하도록 하고 자신은 여러 고을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치게 해줄 것을 주청하였다.1362년 1월 공민왕은 정세운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삼고 홍건적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왕명을 받고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나라 안에 침입한 정세운 장군은 홍건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하여 1363년(공민왕 12년) 호종 일등공신이 되었다.항상 사이가 좋지 않던 김용의 계략으로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비밀히 꾀어 살해하였다. 뒤에 그 무고함이 밝혀져 그 당시의 최고 통치 기관의 으뜸 벼슬인 첨의정승이 추증 되었다.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일세의 영웅이자 비운의 무장인 정세운 장군은 후세에 남겨진 개인적 기록이 거의 없다. 정세운 장군은 광주 정씨 가문의 시조로 무량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유집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없다고 한다.
    2020-03-02 | NO.13
  • 정원후 鄭元厚 우왕 14년(1388) 9월 4일∼창왕 1년(1389) 2월 2일
    정원후 鄭元厚 우왕 14년(1388) 9월 4일∼창왕 1년(1389) 2월 2일정원후(?∼?)의 본관은 연일(延⽇), 전공판서를 지낸 정인언(鄭仁彦)의 둘째 아들이며, 형은 공조판서 정광후(鄭光厚)다. 영해부사와 한성부윤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광주 자운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의 복장 유물 가운데 1388년에 쓴 「중수발원문」 끝에 나주목사 정원후(鄭元厚)의 이름이 있다. 또한, 양산 통도사의 청동은입사향완(보물) 의 구연전부(그릇 입구) 밑면에 새겨진 점각 명문[施主嘉善⼤夫呂敬仁彦 尹万晋 鄭元厚 僧房寺 施納 通度寺] 속에 시주자로 그와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 2) 『금성일기』 「무진년 1388년」 “목사 정원후가 9월 4일에 도임하였다가 기사(1389년) 2월 1일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 “무진(1388년) 9월 4일 도임, 기사(1389년) 2월 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2
  • 정지(鄭地)
    정지(1347∼1391)의 초명은 준제(准提), 호는 퇴암(退庵), 본관은 하동으로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전라도 나주목 거평부곡, 현 나주시 문평면 안곡리 죽곡마을에서 태어나 1365년(공민왕 14) 무과에 급제한 뒤 관직에 진출하였다.말년에 나주로 낙향하지 않고 광주목 편방면, 현 동구 동명동으로 낙향하였다. 그가 광주에 살다가 생애를 마치고, 묘소 또한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에 있어 광주 인물로 분류하고 있다.정지는 고려 말 광주와 전남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맞아 교전․격퇴시키는 데 가장 큰 활약을 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1374년(공민왕 23) 중랑장(中郞將)으로서 국왕을 가까이 모시고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을 올린 사람이 없다는 탄식을 듣고 왕에게 왜구토벌책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하여 전라도안무사에 발탁되어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를 겸하면서 양광도안무사 이희(李禧)와 여러 차례 방왜책(防倭策)을 건의, 백성들의 부담 완화와 전략의 효율화에 노력하였다.특히 수군 양성을 강조한 그는 수군의 강화와 함께 전선(戰船)도 건조하였다. 전선은 수병과 함께 수군 활동에 필수적 요소였다. 자질이 있는 수군도 중요하지만 왜구를 해전에서 격퇴하는 데 전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1382년 해도도원수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함으로써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제도(諸道)에 전선 건조를 건의하고, 수군사령관인 해도원수(海都元帥)겸 양광(楊廣)․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처치사(都指揮處置使)가 되어 수군을 지휘하였다. 1384년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시마(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1388년 최영(崔瑩) 등을 중심으로 요동정벌이 추진되자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휘하에 예속되어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시 함께 회군하였다.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주요 전과는 다음과 같다.⦁1377년(우왕 3) 여름,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순천․낙안의 왜구 격파, 18명 사살, 3명 생포⦁1377년(우왕 3) 겨울,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왜구 40여 명 사살, 2명 생포⦁1378년(우왕 4) 10월,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영광․광주․동복의 왜구 격토․말 100필 노획⦁1378년(우왕 4) 11월, 예의판서․순천도병마사 : 담양의 왜구 격퇴, 17명 사살⦁1383년(우왕 9)5월, 해도원수 : 남해의 왜선 120척 격파, 17척 불태움⦁1388년(우왕 14) 8월, 안주도원수 : 함양․운봉․남원의 왜구 격파, 58명 사살 말 60여 필 노획이듬해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김저(金佇) 변안열(邊安烈)의 사건에 연좌되어 경주(慶州) 횡천(橫川)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에 봉해졌다.1391년에는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 옥에 갇혔으나 홍수로 풀려났다. 그 뒤 광주에 물러나 있던 중 판개성 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1644년(인조 22)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현 동명동에 경렬사를 세워 모셨으나 대원군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1871년(고종 8) 훼철되고, 일제 때인 1921년 나주 노안 금안동에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셨으나, 1981년 북구 망월동에 경렬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광주시사1>>(1992), <<정지장군>>(2002)* 2023.6.22. 수정
    2020-03-06 | NO.11
  • 조천보 趙天輔 공민왕 11년(1362)∼공민왕 12년(1363)
    조천보 趙天輔 공민왕 11년(1362)∼공민왕 12년(1363)조천보(?∼?)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1372년(공민왕 21, 임자) 9월 16일에 양광도 순문사 조천보(趙天輔)가 왜적과 용성 (⿓城)에서 싸워서 패전하고 죽었다. 왕이 추증하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금성 일기』와『금성읍지』에는 “1362년(공민왕 11)에 부임하고 1363년(공민왕 12)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0
  • 진원서 陳元瑞 공양왕 1년(1389) 12월 8일∼공양왕 2년(1390) 4월 12일
    진원서 陳元瑞 공양왕 1년(1389) 12월 8일∼공양왕 2년(1390) 4월 12일진원서(?∼?)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그의 행적은 1385년 8월 “전라도해도원수(全羅道海道元帥)로서 왜구 20여 인을 사로잡았다.”는 『고려사』 기록과 1388년 8월 “왜구 토벌을 위한 정지 장군의 남원전투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여하여 전과를 세웠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기사년 1389년」에 “병마도절제사 겸 목사 진원서 12월 9일 도임하였다가 경오(1390년) 4월 13일에 떠났다.”는 기록이 있고, 『금성읍지』에는 “기사(1389년) 12월 8일 도임, 경오(1390년) 4 월 12일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9
  • 최여해 崔汝諧 ?(의종 24년(1170) 이전)
    최여해 崔汝諧 ?(의종 24년(1170) 이전)최여해(1101∼1186)의 본관은 경주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울주통판으로 벼슬을 시작 하였다. 그 후 익양부의 전첨으로 있을 때 익양공(翼陽公: 명종)이 왕위에 오르는 꿈을 꾸고 익양공을 잘 모셨는데, 특히 나주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이름난 과실과 말린 해산 물을  구하여  지속적으로  보냈다고  한다.  뒤에  명종이 1170년 즉위하자  그  인연으로 나주수령에서  좌정언지제고(左正⾔知制誥)에  제수되었다.  이어  보문각대제를  역임하였 다. 77세에 추밀원사 좌산기상시가 되고 특별히 정당문학으로 벼슬을 마치었다. 86세 로 죽자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할 정도로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성품은 너그럽 고 후덕하였다. 시호는 문정(⽂貞)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8
  • 최운 崔雲 충선왕 1년(1309) 이후
    최운 崔雲 충선왕 1년(1309) 이후최운(1275∼1325)의 본관은 동주(東州), 자는 몽수(蒙叟), 아버지는 봉익대부(奉翊⼤夫)최문립(崔⽂⽴)이다. 1289년(충렬왕 15) 15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1296년에 도재고 판관(都齋庫判官)에 보직되어 내시(內侍)에 속하였고, 1299년에 신호위별장(神虎衛別將) 으로 견룡행수(牽⿓⾏⾸)에 임명되었다. 1300년에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임명되고, 1302년에 문관으로 회복되어 조현대부 군부총랑(朝顯⼤夫軍簿摠郎)이 되었다가 전리총랑 판사영서사(典理摠郎判司盈署事)로 옮기게 되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좌우위 대호군(左右衛⼤護軍)이 되었으며, 1309년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1312년에 철원부사를 거쳐 1314년에 공주목사로 옮겼다가 철원부사를 지냈다. 1316년(충숙왕 3) 정윤(正尹) 에 임명되고 원윤(元尹)에 승직되었다. 1325년 통헌대부 지밀직사사 우상시 상호군(通 憲⼤夫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천성이 정직하고 진실하였으며, 평생 불교를 독실히 믿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7
  • 최자운 崔⼦雲 공양왕 4년(1392) 4월 10일∼공양왕 4년(1392) 7월
    최자운 崔⼦雲 공양왕 4년(1392) 4월 10일∼공양왕 4년(1392) 7월최자운(?∼?)의 본관은 경주(慶州), 판봉상시사를 지냈다. 고려말 충신 최청(崔淸, 1344 ∼1414)의 아버지이다. 『태조실록』 1395년 5월 11일조에 “전 전농정(典農正) 최자운을 보내서 말 1000필을 명나라에 바쳤는데, 요동에 가서 교부하고 돌아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금성일기』 「임신년 1392년」에 “목사 최자운이 4월 10일 도임하였다가 7 월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었으며, 『금성읍지』에는 “임신(1392년) 4월 10일 도임, 동년 7월에 교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6
  • 최지장 崔知藏 공민왕 10년(1361) 11월∼공민왕 11년(1362)
    최지장 崔知藏 공민왕 10년(1361) 11월∼공민왕 11년(1362)최지장(?∼?)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금성일기』에는 “1362년(공민왕 11)에 임기를 마치고 상경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금성읍지』에는 “신축(1361년) 11월에 부임하여 1362년에 상경하였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5
  • 하을지 河⼄祉 ?∼공민왕 19년(1370) 12월
    하을지 河⼄祉 ?∼공민왕 19년(1370) 12월하을지(1318∼?)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아버지 전객시령(典客寺令) 하거원(河巨源)의 장남이다. 1344년(충혜왕 복위 5)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1363년 전공정랑으로 홍건 적의 침입 때 개경을 수복한 공로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76년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 사가 되었다. 후임 원수 유영(柳濚)이 부임하기도 전에 전사(⽥舍)로 돌아가 버리자 이틈을 이용하여 왜구 20여 척이 나주에 들어와 병선과 병영 및 민호를 태우고 노략질을 하는데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 죄로 순위부(巡衛府)에 체포되어 장형 100대에 하동현에 유배되었다. 곧 석방되어 계림원수(鷄林元帥)로 기용되었으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고 대패하였다. 『진양지』권3 「임관조」에 이름이 올라 있다. 『금성일기』 「경술년 1370년」에는 “목사 하을지가 정무기간을 마치고 상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금성읍지』에는 “임기를 마치고 상경하였으나 도임과 이임 일자를 알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4
  • 하즙 河楫 공민왕 7년(1358, 무술) 1월 이임
    하즙(1303∼1380)의 본관은 진양(晉陽, 진주), 자는 득제(得⿑), 호는 송헌(松軒)이다.1347년(충목왕 3) 2월에 정치도감의 정치관으로 활동 중에 기황후의 친족인 기삼만의 불법적인 토지겸병을 적발하고 다스리는 과정에서 기삼만이 옥사하게 되자, 그해 10월 원나라로부터 온 사신에 의하여 백문보·신군평 등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뒤에 문하 찬성사로 치사하고 진주군(晉州君)으로 책봉되었다. 나주목 관아일기인 『금성일기』에는 1358년 정월에 정무를 마치고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879년 『금성읍지』 에는 “1358년 정월에 임명을 받으러 상경하였는데 부임일은 기록치 못하였다.”라 기록 되어 있다. 증손자 하연(河演)이 1421년 2월부터 1422년 윤12월까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시호는 원정(元正)이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3
  • 한광한 韓光漢 충정왕 원년(1349. 기축) 전후
    한광한 韓光漢 충정왕 원년(1349. 기축) 전후한광한(?∼?)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나주목사 한광한로써의 기록이 유일하다. 『고려사』 권37, 세가편 충정왕 원년(1349) 3월 29일 기록에 “나주목사 한광한(韓光漢)과 지고부군사 박현(朴顯)을 감찰사에 하옥하여 뇌물죄를 조사하여 다스렸다. 한광한은 백성에게서 베 100필과 쌀 20여 석, 생선과 소금 등의 물품을 수도 없이 받았으며, 박현은 도둑들로부터 베 1500단(端)과 말 1필(匹)의 뇌물을 받았다.”고 되어 있음을 볼 때 나주목사로 재임하다 파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2
  • 황유룡 ⿈有⿓ 우왕 8년(1382) 5월 27일∼우왕 8년(1382) 11월 10일
    황유룡 ⿈有⿓ 우왕 8년(1382) 5월 27일∼우왕 8년(1382) 11월 10일황유룡(?∼?)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1382년에 품계가 봉익대부였다. 봉익대부는 종2품 문관의 품계이다. 『금성일기』에 “나주목사로 봉익대부 황유룡이 5월 27일에 부임하였다가 동년 11월 3일에 돌아갔다.”고 기록되었고, 『금성 읍지』에는 “임술(1382년) 5월 27일에 부임하여 동년 11월 10일 상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자료: 나주문화원(2023), 《국역 금성읍지》.
    2024-10-14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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