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공간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4
게시물 검색 폼
  • 덕풍나루
    덕풍나루의 존재는 오횡묵의 『지도군총쇄록』에 등장한다. 덕풍진德豊津으로 일컫는 이곳은 1896년 전남관찰부에 업무 보고를 위해 광주를 방문하던 당시 지도군수 오횡묵이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과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을 지나 이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서창마을 쪽으로 향했다고 한다.『세종실록』에는 황룡강의 흐름을 전하면서 생압도가 영산강과 황룡강의 합류 지점 일대에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는 현재의 광주공항 남쪽인 극락교에 해당하는데 덕풍나루가 있었던 곳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덕풍나루라 불리기 전에는 생압도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덕풍나루 자리에 해당하는 곳, 즉 광산구 동곡동에서 서구 서창마을 쪽을 잇는 지점에는 특별한 도강시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영산강과 황룡강의 합류부 주변에 넓은 강변 저지대만을 만날 뿐이다. 다만 만귀정이 있는 곳이 동하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만약 덕풍나루가 이 근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덕풍나루를 이용해 동곡동과 서창동이 바로 이어졌다. 현재 덕풍나루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4대강 사업으로 이 구간의 원래 지형이 바뀌어 인근 주민들조차 옛 나루터 자리를 가리켜 주기 곤란할 정도가 됐다.
    2018-05-28 | NO.4
  • 덕흥나루
    덕흥나루는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에 있었다. 덕흥마을이 들어선 언덕은 전형적인 도상구릉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주변 지역의 암석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대부분 풍화침식으로 들이 되었음에도 이곳만은 그것을 견뎌내고 여전히 언덕 형태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락없이 산처럼 보이기에 사람들이 아예 ‘덕산’이라 불렀다.나루터는 덕산이 영산강과 접하는 벼랑 아래에 있었다. 지금의 덕호재와 덕흥대교가 있는 근방이다. 이곳 강변은 1970년대까지도 드넓은 백사장이 일품이라 광주지역 학생들이 소풍 장소로 애용됐다. 당시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던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소풍을 다녀온 장소로 이곳 나루터를 기억하고 있다. 이 나루터가 정확히 언제부터 운영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주민들이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루터의 모습은 대략 1960~1970년대이다. 그리고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덕흥나루는 좀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 운영됐다.나루는 덕흥마을에서 강 너머에 있는 농토에 일을 하러 오갈 때 주로 이용했다. 그 외에 틈틈이 건너편 극락강역을 오고갈 때도 이용했다. 주 이용자가 덕흥마을 주민들이었던 탓에 나루의 운영규모는 크지 않았다.당시 나룻배는 강 양안에 밧줄을 걸어 놓고 뱃사공이 이 줄을 잡아당겨 나룻배를 움직이게 하는 세칭 ‘줄나루’였다. 배는 목선이었으며 승선인원은 대략 10~20명 안팎이었다. 덕흥나루는 1970년대 중반까지 근근이 운영되다가 중단됐다.
    2018-05-28 | NO.3
  • 벽진나루
    『세종실록』에는 광주의 나루터로 북구 용두동의 거진巨津과 함께 서구의 벽진碧津을 이야기한다. 벽진나루가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편에 광주 옛 무진군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무등산은 진산이며 벽진도와 거진도가 있다고 했다.군의 서쪽에 있는 벽진나루는 영산강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 위치한 광주 관아와 그 서쪽의 전라병영을 연결하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됐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현재의 극락교 아래에 벽진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벽진나루는 생압도生鴨渡 또는 생압진生鴨津으로도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광주읍지』를 보면 벽진과 생압도는 거의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됐고 하나의 나루터를 다르게 불렀을 가능성마저 있다. 벽진과 다리 생압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이견은 크게 두 가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황룡강의 유로를 설명하면서 옛 내상성 남쪽을 거쳐 생압도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장성에서 흘러든 황룡강이 광주에 이르러 생압진으로 유입한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생압진은 황룡강가, 광주와 장성 경계선의 어느 지점으로 해석된다. 19세기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생압도가 지금의 장성군과 광주광역시 경계를 지난 어느 지점에 있는 나루터로 묘사했다. 대동여지도가 묘사한 생압도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을 따른 결과로 보인다. 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동여지도와 달리 대다수의 기록들은 오히려 벽진과 생압진이 거의 같은 지점에 있었고 그 위치를 광주 관아로부터 서쪽 20리 혹은 30리에 있다고 했다. 황룡강가의 나루로 보기에는 거리상 큰 차이가 있다. 이 나루와 똑같은 이름의 동네가 지금까지 사월산 주변에 있다.이런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생압도는 영산강 본류 구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6세기 서구 매월동 전평제를 만든 만든 회재 박광옥의 시를 근거로 들 수 있다. 박광옥은 풍영정의 건립자인 김언거와 교분이 두터웠다. 둘의 관계를 언급하며 “생압진과 칠수가 잘 통했으며 좋겠다.”는 시 구절을 남기기도 했다. “다정했던 옛 친구들을 풍영정에서 만난다는 기쁨이 커서일까 / 생압진에서 칠계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지네.” 이 시에서 생압진은 박광옥 자신을, 칠계는 풍영정 일대에서 영산강을 부르던 이름인데 이는 동시에 김언거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어떻든 이 시는 벽진의 또 다른 이름이 생압진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생압진은 생압도와 같은 말이고 칠수는 칠계의 별칭이다. 이 시는 평소 나룻배를 통해 생압도와 풍영정 나루를 오가던 박광옥이 부득이 한 사정으로 풍영정에서 열리던 모임에 불참한 일을 두고 애석해 하며 쓴 것이었다. 어떻든 생압도가 영산강변, 특히 벽진동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생압진이 벽진동에 있던 나루터였을 가능성은 다른 기록에서도 보인다. 『광주읍지』(1879)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생압교生鴨橋는 광주 관아로부터 20리, 당부면當夫面에 있다.” 여기서 생압진을 생압교라 한 것은 조선시대에 나룻목의 수심이 낮아지면 다리를 놓는 관행에 맞춰 나룻목이 다릿목으로 바뀐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 당부면은 지금의 벽진동을 비롯한 마륵 금호 풍암 매월동을 포함한 옛 지명이었다. 생압진이 벽진동에 있었을 가능성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생압진은 조선시대에도 왕왕 장압진이나 장애비, 혹은 장암으로 발음되곤 했다. 또한 이 일대를 ‘장애비’ 또는 ‘장암’ 등으로 부르는 관행이 있고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극락교를 ‘장압교’ 또는 ‘장애비다리’라고 부른다. 이런 지명은 옛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19세기에 작성된 비변사인 방안지도에는 생압진을 장압도莊鴨渡로 표기하고 있다. 생압진, 장압도, 장애비는 같은 곳을 지칭했고 이는 지금의 벽진동 일대에 포함되는 곳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장압진은 술방(북서쪽) 20리에 있는 당부면에 있다.” 당부면은 지금의 벽진동, 마륵동, 금호동, 풍암동을 아우르던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 생압도를 벽진동에 있는 나루로 여겼다는 또 다른 근거이다.마지막으로 벽진과 생압진이 거의 동일한 나루였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있다. 사월산 근처 상촌마을은 옛날 역촌이었단 말이 구전으로 남아 있다. 상촌마을은 사월산의 동쪽, 즉 공군화약고와 인접한 마을이다. *위성지도로 본 사월산『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전라병영이 광주에 있었던 “예전에 진원역鎭原驛이 있었다. 태종 17년에 내상을 강진에 옮길 때 아울러 옮겼다.” 또 같은 책의 강진군 내용을 보면 “진원역은 본래 광주의 내상 북쪽에 있었는데 태종 17년에 내상을 도강현, 즉 강진으로 옮기면서 따라 이설했다.”고 적고 있다. 전라병영이 강진으로 이설되면서 역촌도 덩달아 따라 갔다는 얘기다. 한때 벽진이란 나루, 통신과 연락을 위한 기관인 역촌, 그리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였던 전라병영이 한 세트를 이루며 이 일대에 있었다는 뜻이다. 생압도의 역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지금처럼 오직 다리가 놓인 곳으로만 기억된 것은 20세기가 되면서부터였다. 1910년대 철도역을 근간으로 송정리가 광주의 관문으로 부상하면서 송정리와 광주 시내를 잇는 신작로가 놓였는데 이 때 어지간한 홍수에는 쉽게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가 가설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루터의 오랜 전통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나루터가 아니라 그 기억을 딛고 선 다리인 극락교 뿐이다. 처음 이곳에 극락교의 전신이라 할 다리, 즉 차량이 통과할 만큼 큰 다리가 생긴 시기는 정확히 짚어 말하기 어렵다. 송정역이 영업을 시작한 1913년에 맞춰 광주~송정리 간 영업용 승용차가 처음 통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대략 그 무렵부터 차량통행이 시작된 듯하다.
    2018-05-28 | NO.2
  • 서창나루
    서구 서창동 603-2 일대서창나루는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었다. 현재 서창교라는 교량이 있었던 일대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극락진이라 했던 나루가 바로 서창나루를 말한다.극락진은 현재 광주~송정리를 잇는 도로인 광송도로가 지나는‘극락교’라는 다리 때문에 극락교 자리에 극락진이 있었을 것이란 혼동을 일으킨다. 극락교에 있던 나루는 옛 문헌에서 벽진 또는 생압도로 소개된 나루를 의미하며 정작 극락진은 현재 서창교 일대에 있었던 나루였던 것이 명백하다. 극락진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일대에 극락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락원은 그 명칭에서 불교와의 관련성을 짙게 풍긴다. 이는 초기 원의 기능이 불교도들의 순례와 관련이 깊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낳게 한다.극락원은 이후에도 이 일대의 지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선 이 일대 사람들은 영산강을 극락강이라고 불러왔다. 극락강 위를 가로지르는 교량 중 하나를 지금도 극락교라고 부르며 강변에 있는 철도정거장 역시 극락강역이라 한다. 이곳에는 광주 관아에서 운영하는 세곡보관창고인 서창西倉도 있었다. 조선 초 광주는 세곡의 중간집하장인 나주의 영산창까지 세곡을 운송했다. 그 출항지가 바로 지금의 서창동 산4번지 서창이었다. 말 그대로 광주의 서쪽에 있는 창고, 그 창고를 끼고 번창하던 포구 마을이었다. 창고가 있던 언덕을 주민들은‘창등’이라 부른다. 세 뜸으로 이루어진 서창마을 중 이곳만을 지칭할때‘창촌’이라 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본래 극락진이라 했던 이곳이 점차 서창나루로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서창이 이곳에 설치된 것은 조운에 유리한 조건, 즉 영산강과 이웃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창고가 강변에 있는 점, 나주와 서창나루 사이에 배가 왕래했을 것을 암시하는 기록 등이 있다. 서창나루가 나주와 물길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보다 명확한 기록도 있다. 1555년 노수신盧守愼이 극락진에 당도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노수신이 을묘왜변을 피해 광주 땅을 밟은 자리인 극락진은 곧 서창나루였다. 16세기에 중간 집하장이 영산창에서 영광의 법성포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서창은 세곡을 갈무리하는 포구로서 여전히 중요했다. 당연히 이곳의 창고지기인 서창색西倉色도 가욋돈을 벌 수 있는 `목 좋은 자리’로 통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목민심서』(1818)의 일표이서에 보면 경오년에 김종인金宗仁이 서창색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의 색은 지금 행정 관청의 과 또는 계와 같은 것이다. 서창색의 채용 때는 늘 뒷거래가 많았는데, 고종 11년(1874) 광주를 다녀간 암행어사 여규익呂奎益이 낸 서계書啓를 보면 당시 서창색西倉色의 자릿값이 200냥이나 됐다고 한다. 이만한 거금을 내고서라도 서로 욕심을 내던, 꽤 쏠쏠한 직책이었던 셈이다. 그만큼 서창이 번창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서창나루가 영산강 하류지역과 뱃길을 연결하는 포구였다는 적극적인 증거는 많지 않다. 대체로 현존하는 기록이나 구전은 서창이 나루터였음을 더 보여준다. 서창엔 세곡이나 물건들만 모여드는 곳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길도 붐볐다. 이곳에 광주와 나주를 오가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나루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 나루는 나주 북문거리(현재의 나주시 노안면과 광산구 평동 일대)와 광주 서문거리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나루를 이용했던 탓에 배로는 그들을 다 실어 나르기 어려웠다. 또 강물이 줄어드는 가을이나 겨울철에는 아예 배 젓는 일 자체가 여의치 않았다. 그 때문에 이곳엔 다리가 놓였다. 물론 지금의 서창교처럼 시멘트를 부어 만든 짱짱한 다리는 아니었다. 다리는 강물이 줄어든 시기에 섶나무와 흙으로 얼기설기 이어 만들어 마치 제비집 같았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뜯고 다시 짓기를 되풀이했다. 물과 뭍이 만나고 사람들이 뒤엉키는 포구라면 어김없이 시장이 서는 법일까. 이곳에도 예전엔 꽤 큰 장이 섰다. 『동국문헌비고』(1770년)에는 서창장의 장날이 5일과 10일이라고 했다. 그 때만 해도 광주 읍내 사람들이 소금이나 어물을 사려면 대개 이곳에 와서 장을 봤다. 영산강은 수심 등으로 인해 배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최종적으로 접안할 수 있는 종점, 즉 가항종점은 차이가 있었다. 20세기 초엽을 기준으로 소형 증기선이나 석유발동선은 대체로 영산포까지 소강했다. 대개 선체의 중량만 20~30톤에 달하는 이들 동력선은 빈 배인 경우라도 홀수(배가 물에 잠기는 깊이)가 깊어 일정한 수심 이하로는 항해와 접안이 곤란했다. 반면에 먼 바다를 오갈 정도의 비교적 큰 범선(외양범선)이나 전래의 우리 배(한선)는 영산포에서 1.5km 북쪽인 노향포까지는 그럭저럭 올라왔다. 특히 전래의 한선은 뱃바닥이 평평해 수십이 얕은 곳도 무난히 출입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선체 구조가 수심이 얕은 지형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배 자체의 중량 때문에 수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우리가 큰 배라고 부를 만한 기준 아래의 거룻배나 뗏목만이 좀 더 내륙까지 출입이 가능했는데 그 최종 지점이 이곳 광주의 서창나루였다.서창은 20세기에 들면서 급격히 쇠락했다. 철도나 도로교통이 발달하고, 강물이 줄고 장마철이 아니면 강바닥이 거의 훤히 드러나 보이는 건천화乾川化 현상 등 자연환경의 변화가 그 몰락을 재촉했다.
    2018-05-28 | NO.1
  • 광주광역시
  • 한국학호남진흥원
  • 사이버광주읍성
  • 광주서구청
  • 광주동구청
  • 광주남구청
  • 광주북구청
  • 광주광산구청
  • 전남대학교
  • 조선대학교
  • 호남대학교
  • 광주대학교
  • 광주여자대학교
  • 남부대학교
  • 송원대학교
  • 동신대학교
  • 문화체육관광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광주문화예술회관
  • 광주비엔날레
  • 광주시립미술관
  • 광주문화재단
  • 광주국립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국민권익위원회
  • 국세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