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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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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옥 묘비

광주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

서구 풍암동 벽진서원(운리사) 인근 음성박씨 풍암선산묘에 있는 회재 박광옥의 묘비 뒤에 새겨진 묘비문이 눈에 띈다. 자헌대부 우의정 허목許穆이 엮은 것이라 써있다. 묘비 글씨는 1952년 태인泰仁 박래호朴來鎬가 번역하고 영천永川 이돈흥李敦興이 썼다.

전체적인 내용은 회재의 출생과 성장과정, 효행, 임진왜란 참여, 학문 연마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허목이 박광옥을 평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영광과 밀양에 그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羅州牧使朴公墓表

先生姓朴氏諱光玉字景瑗其先本陰城人自四世祖太學生員繼陽始居光州子孫遂爲光州人先生有至性生七歲先府君歿其哭泣持喪旣以善行聞及長事母至孝居家奉先禮節甚修人愈益賢之二十一陞上庠嘉靖中修鄕學先生作學規出其財增學田立家塾敎授生徒弟子日進及先夫人歿旣葬啜粥哭幾滅性牧使崔應龍以禮勉之令返魂歸我 昭敬卽位召用才學之士有大臣薦之授內侍敎官三年陞宗簿主簿尋補雲峯縣監未赴登甲科因兼記事官旣到任修縣學出羨餘數百斛穀以供諸生選縣中子弟令日居而講學焉旣去縣父老刻石紀其治績後繼爲湖南湖西都事己卯入爲禮曹正郞兼記注官一年移司憲府持平俄改成均館直講差行臺賀聖節復拜持平累轉爲相禮兼編修官癸未出守靈光後年召爲成均館司藝知製 敎辭不就三年復出密陽先生每爲邑必禮接士大夫論政要專以興學爲務己丑復入爲司藝司贍寺正尋移太常以病還鄕里壬辰夏有倭寇郡縣皆潰及賊陷尙州先生見牧使丁允祐曰賊若逾嶺京師急矣公盍往說方伯急引兵直趨畿甸以捍衛京師乎允祐心然之卽從其計策官軍旣連敗陷沒而賊長驅五月車駕已西幸又湖南兵敗於公州人心大亂先生與金千鎰高敬命謀擧兵伐賊約束旣定高敬命起兵於潭陽而先生病不行召募子弟治軍食備器械以助兵勢金千鎰遺書先生曰大軍一出本根不固無所可恃也用兵利鈍其權專在足下時權慄爲光州自隋城不利常憤恨日傳檄郡縣召集義旅諸散軍稍稍有應者先生分遣父老曉諭傍邑致數千人權慄大悅每事必咨於先生七月拜判校俄改羅州牧使先生曰雖病力義不辭難至州能辛苦務合人心收散兵欲再張伐賊聲勢計畫已完病篤解印綬歸其十月丙午歿人皆惜之臨歿遺命薄葬閏月丁酉不用槨葬於雲洞雲洞者其先墓所在也先生德器甚厚和而能嚴使人愛而可畏對人未嘗言人之過而好揚人之善非其義也不以取人亦不以與人其學晩而尤用心於易禮亦博學多通如高峯玉溪思庵諸老德所推許云好節儉累典州不飾廚傳或言之先生曰吾不願爲飮食之人人愧服常建崇本堂於雲洞出臧獲以供墳墓之祭每以朔望率宗族子弟講信行禮與鄕人立約條一以厚風俗篤人倫爲本扁其所居室曰懷齋故學者稱之曰懷齋先生先生歿後九年南方學者立祠以享祀不絶也先生自三世居光州伯父鵬爲翰林父鯤爲司藝先生重於南州號爲名族母尹氏籍海平慶安道察訪仁孫女也先生 明世宗嘉靖五年我 恭僖二十一年正月己酉生神宗萬曆二十一年我昭敬二十六年歿年六十八先生無子有女婿四人禮曹正郞柳思敬士人盧士詹金隆址宣敎郞林悏今盧柳絶嗣而外孫前尙州牧使林㙐前翊衛司侍直林㙔士人金圻皆有子孫甚多

기언 별집 제25/ 구묘문(丘墓文)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공(朴公) 묘표

선생은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광옥(光玉)이며 자는 경원(景瑗)이다. 그 선조는 본래 음성인(陰城人)이다. 4세조 태학 생원 계양(繼陽)으로부터 비로소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자손들이 드디어 광주인이 되었다.

 선생은 천성이 지극하였다.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곡읍(哭泣)과 거상(居喪)을 잘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장성하여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집에 거처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에 예절을 매우 잘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가정 연간에 향학(鄕學)을 보수할 당시 선생이 학규(學規)를 지었고 재물을 출연하여 학전(學田)을 늘렸으며, 가숙(家塾)을 세워 생도(生徒)를 가르치니 제자가 날로 찾아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죽만 먹으며 곡을 하여 거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목사(牧使) 최응룡(崔應龍)이 예()를 따르도록 권면하여 반혼(返魂)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우리 선조가 즉위하여 재주와 학식이 있는 선비를 불러 쓸 적에, 대신(大臣)의 천거가 있어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다. 3년 만에 종부시 주부에 올랐다가 얼마 뒤 운봉 현감(雲峯縣監)에 보임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갑과(甲科)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임소에 도착해서는 고을의 학교를 증수(增修)하여 여분의 곡식 수백 곡()을 내어 제생(諸生)의 비용에 제공하고, 고을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날마다 학교에 거처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떠난 뒤에는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그 치적을 비()에 새겨 세워두고 기념하였다. 뒤에 잇달아 호남과 호서의 도사(都事)가 되었다.

기묘년(1579, 선조12)에 들어와 예조 정랑이 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1년 만에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고, 조금 있다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여름에 종사관에 차임되어 중국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다시 지평에 제배되었다. 여러 번 승진되어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가 되었고 편수관을 겸하였다.

계미년(1583)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다음 해에 불러서 성균관사예 지제교를 삼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3년 만에 다시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선생은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사대부를 예우하였고, 정사의 요체를 논하여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다시 들어와 사예(司藝)와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고, 조금 있다가 태상시로 옮겨졌는데 병환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침략해 와 군현(郡縣)들이 모두 무너졌다. 왜적이 상주(尙州)를 함락하자, 선생이 목사 정윤우(丁允祐)를 만나 말하기를,

적이 만약 새재를 넘으면 서울이 위급하게 될 것입니다. 공은 어찌 방백(方伯)을 설득하여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기전(畿田)으로 달려가 서울을 호위하지 않습니까.”

하니, 정윤우가 옳게 여겨 즉시 선생의 계책을 따랐다. 관군(官軍)이 잇달아 패배하여 함몰되고 왜적이 승승장구하였다. 5월에 임금이 이미 서쪽으로 피난한 데다 또 호남의 군사가 공주(公州)에서 패배하니, 인심이 크게 혼란하였다. 선생이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등과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칠 계획을 세우고 약속(約束)을 이미 정했는데, 고경명이 담양(潭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선생은 병환 때문에 시행하지 못하고 자제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마련하고 무기를 갖추어 병세(兵勢)를 도왔다. 김천일이 선생에게 글을 보내기를,

대군(大軍)이 일단 출병했으나 바탕이 튼튼하지 않으면 믿을 데가 없습니다. 용병(用兵)의 승패는 오로지 족하(足下)에게 달렸습니다.”

하였다. 당시에 권율(權慄)이 광주(光州)를 맡고 있었는데, 수성(隋城 수원(水原))에서 패전한 뒤로 항상 분한(憤恨)을 품고 날마다 군현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흩어졌던 군사들이 차츰 호응해 왔다. 선생이 부로들을 나누어 보내 이웃 고을들을 깨우쳐 설득하여 수천 명을 모으니, 권율이 매우 기뻐하였고 일마다 반드시 선생에게 자문하였다. 7월에 판교(判校)에 제배되었고, 조금 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옮겨졌다. 선생이 말하기를,

비록 신병이 위중하나 의리로 보아 사직할 수는 없다.”

하였다. 나주에 이르러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인심을 단합시키는 데에 힘썼다.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 다시 왜적을 공략하려고 계획을 다 세웠는데, 신병이 위독해져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해 10월 병오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유언하였다. 윤달 정유일에 곽()을 쓰지 않고 운동(雲洞)에 장사 지냈다. 운동은 선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선생은 덕성과 기량이 매우 두텁고 컸다.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친애하게 하면서도 경외하게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일찍이 남의 허물을 말한 적이 없으며 남의 선행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다. 옳지 아니하면 남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남에게 주지도 않았다. 그 학문이 늦게 이루어졌는데, 주역(周易)과 예경(禮經)에 더욱 마음을 썼고 또한 널리 배워 두루 달통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옥계(玉溪) 노진(盧禛), 사암(思庵) 박순(朴淳)같이 학덕(學德)을 갖춘 여러 원로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검소함을 좋아하여 누차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음식을 잘 차려 먹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말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일찍이 운동에 숭본당(崇本堂)을 건립하고 노복을 그곳에 붙여 분묘의 제사를 돕게 하였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종족의 자제들을 인솔하고 신의(信義)를 강론하고 예()를 행하였다. 고을 사람들과 약조를 세울 때에는 한결같이 풍속을 두텁게 하고 인륜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 거처하는 방의 편액(扁額)을 회재(懷齋)라 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회재 선생이라 불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남방(南方)의 학도들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계속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선생은 위로 3세 때부터 광주(光州)에 살았다. 큰아버지 붕()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아버지 곤()은 사예(司藝)를 지냈다. 선생이 남주(南州)에서 중망(重望)을 얻어 명족(名族)으로 이름이 났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본관이 해평(海平)이며,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 윤인(尹仁)의 손녀이다.

선생은 명나라 세종 가정 5년인 우리 중종 21(1526) 1월 기유일에 태어나 명나라 신종 만력 21년인 우리 선조 26(1593)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68세였다. 선생은 아들이 없고 사위 네 사람이 있는데, 예조 정랑 유사경(柳思敬), 사인(士人) 노사첨(盧士詹), 김융지(金隆址), 선교랑(宣敎郞) 임협(林悏)이다. 지금 노사첨과 유사경은 후손이 끊어졌고, 외손인 전() 상주 목사(尙州牧使) 임타(林㙐), 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임위(林㙔), 사인 김기(金圻)는 모두 많은 자손을 두었다.

[-D001]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 상상은 국가 설치 대학을 가리키며, 상상에 올랐음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음을 뜻한다. 박광옥(朴光玉)1546(명종1) 식년시에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司馬榜目

[-D002]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 : 맹자》 〈고자 상(告子上)음식을 밝히는 자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여긴다. 작은 것口腹을 기르느라 큰 것心志을 잃기 때문이다.” 하였다.

[-D003] 3: 이 묘표의 앞부분에 “4세조부터 광주에 살았다.”라고 하였으니, 오류이거나 아니면 ‘4세조를 제외한 대수(代數)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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