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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농사가 재이를 초래하다 - 영조 3년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정택하 등이 입시하여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진강하고, 재해로 세량(稅糧)을 감면해 주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 영조 3년 정미(1727) 4월 12일(무술) 맑음    


사시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召對)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정택하(鄭宅河), 검토관 홍성보(洪聖輔), 가주서 유최기(兪㝡基), 기사관 권해(權賅)ㆍ정익하(鄭益河)가 입시하였다. 홍성보가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선종(宣宗) 경술(庚戌) 선덕(宣德)의 ‘산운평경운만(山雲平慶雲蠻)’부터 읽었다. 정택하가 ‘선덕 육년 이월(宣德六年二月)’부터 ‘시문정(諡文靖)’까지 읽었다. 유최기가 ‘선덕 칠년(宣德七年)’부터 ‘각견사래조공(各遣使來朝貢)’까지 읽었다. 권해가 ‘선덕 팔년 정월(宣德八年正月)’부터 ‘지명주지(至命周之)’까지 읽었다. 정익하가 ‘선덕 십년(宣德十年)’부터 ‘진수선부(鎭守宣府)’까지 읽었다. 홍성보가 34판(板)의 ‘득원조맹부소회빈풍지도(得元趙孟頫所繪豳風之圖)’까지 읽었다. 홍성보가 농사의 일과 섭이중(聶夷中)의 시(詩)를 가지고 권면하여 아뢰기를,
“임금은 모름지기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야합니다. 예로부터 친히 세 번 미는 일을 하였던 것도 농사가 중하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선조(先朝) 때에도 〈빈풍(豳風) 칠월(七月)〉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궁중에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농사가 어렵다는 시를 지은 적도 있으니 ‘동짓달에 발꿈치를 들고 밭 갈러 가며 정월에 쟁기를 든다.[一之日擧趾 三之日擧耜]’라는 뜻을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연초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또 별도로 윤음을 내리면서 매양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다.’라고까지 하셨으니, 선조께서 백성의 일을 진념하신 뜻이 이처럼 지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성상께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의 일을 들으니 마음이 슬프다. 각별히 깊이 생각하겠다. 선조 때에 과연 농상도(農桑圖)를 그린 일이 있다. 춘방(春坊)에서 바친 일이 있기에 그 아래에 발문을 지었다. 영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진언한 일이 있어서 개조하여 들였더니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더했다. 동궁에게 주어야 하겠다.”
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
“민간의 병폐와 고통을 모름지기 어린 나이부터 일찍 알아야 합니다. 세자는 지금 어린 나이니, 붉고 푸른 고운 빛깔만으로 그저 즐기며 좋아하는 물건으로 여기게 된다면 전하께서 그려서 준 본뜻이 아닙니다. 그림을 보고 농사의 어려움을 알도록 세자에게 삼가 권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
“신이 글 뜻 중에 재상(災傷)으로 세량(稅糧)을 감면해 주는 일로 인하여 우러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호남의 바닷가 7읍에 거듭하여 기근이 들었는데 올해 보리농사의 흉작이 또 매우 참혹합니다.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 유랑하니 장차 모두 죽게 될 지경이라, 말하자니 참으로 매우 애통합니다. 진휼(賑恤)하는 일은 바로 지금 급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전 감사 이유(李瑜)가 하직 인사를 할 때 진휼을 설행하는 것이 도리어 폐단이 된다는 뜻으로 진달한 바가 있기 때문에, 수령이 감영에서 진휼할 재원을 얻지 못하여 달리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일찍이 곡식을 옮기라는 뜻으로 경상 감영에 분부한 일이 있는데, 영남곡(嶺南穀)이 이전되지 않았고 광주(光州)와 나주(羅州)의 곡식도 이송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니, 호남의 일이 참으로 매우 시급합니다. 신이 듣건대 지금 이 7읍이 작년에 우심재읍(尤甚災邑)에 포함되어 응당 납부해야 하는 각종 물건을 절반만 거두어들이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이 모두 몹시 가난하여 또한 정해진 수량대로 거두지 못하여 못 거둔 양이 많다고 합니다. 경아문(京衙門)의 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금 이 호남 바닷가 7읍의 거두지 못한 각종 조세를 우선 특별히 정봉(停捧)하고 이미 거둔 것은 그 읍에 그대로 머물러 두도록 하여, 각각 그 읍으로 하여금 보리를 수확하기 전까지 진휼곡을 나누어 주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지난번에 연신(筵臣)이 아뢴 바에 따라 처분한 적이 있는데, 접때 경상 감사 유척기(兪拓基)의 장계를 보니 북곡(北穀)을 이미 모두 민간에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으므로 다시 영남곡을 2만 섬(石)에 한하여 호남으로 이송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 핑계를 대며 보내지 않을 폐단이 염려되어 따로 하유하여 재촉하였는데, 어제 경상 감사의 장본(狀本)을 보니 별유가 내려가기 전에 이미 어떤 명색의 곡물을 변통하여 수량을 맞추어 보냈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당초에 북곡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탈이 났다고 핑계를 대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실상이니, 함께 협력하는 의리에 있어서 참으로 가상하다. 영남곡 2만 섬을 이미 이송했으니 비록 때에 맞추지 못할 걱정이 없지는 않지만, 또한 한때의 시급함을 구제할 수는 있을 것이니 진휼의 재원이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나을 듯하다. 바닷가의 재읍(災邑)이 이렇게 7읍인가? 호남에 여러 해 계속하여 흉년이 들었는데 올해 또다시 이러하니 백성의 일이 참으로 걱정스럽다. 한편으로 곡식을 옮겨 진휼하면서 한편으로 포흠(逋欠)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본뜻이 아니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稟議)하지 말고 특별히 도신에게 분부하여 일체 정봉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
“근래 외방의 진정(賑政)은 본래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아 그 효과가 백성에게 쉽게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 따로 관인 하나를 가려 뽑아 보내어 진휼을 전담하도록 한다면 필시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대신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하문하여 처리하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고, 참찬관 정택하가 아뢰기를,
“소신도 호남의 농사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으며, 수령이 혹시 곡물을 구하더라도 진휼곡을 잘 나누어 주지 못하는 폐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도신이 또 어떻게 모두 살피겠습니까. 따로 어사를 보낸다면 각별히 두려워하는 방도가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남의 바닷가 6, 7읍의 농사가 연달아 이와 같으니, 그 재이(災異)를 초래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그리 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백성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매우 가엾고 불쌍하니 조정에서 어찌 별도로 진념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선왕 때부터 호남 백성들의 일을 염려하여 여러 차례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보냈지만, 그 실효는 어사에 마땅한 사람을 얻었는지 여부에 달렸다. 수령 또한 명목을 헛되이 부풀리며 과장하는 것만 일삼으므로 얻기를 청하는 바는 오직 공명첩(空名帖)처럼 긴요하지 않은 사안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나라에게는 관직을 파는 데로 귀결됨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한 도(道)에는 헛되이 접대하는 폐단을 끼치게 한 것이니, 감진 어사를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굳이 실효가 있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모두 수령을 가려 뽑는 것만 못하다. 지금 이 호남 6, 7읍의 수령은 더욱 각별히 가려 차임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가운데 불법한 부류가 있으면 일반적인 격식에 구애받지 말고 각별히 장계로 보고하여 처치할 수 있도록 도신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
“25판의 우리나라 해동청(海東靑)의 일은 연조(年條)를 살펴보니 이는 바로 우리 세종조(世宗朝) 때입니다. 세종은 바로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인데, 특이한 물건을 바치지 않고 진귀한 날짐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뜻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필시 전례가 있어서 해동청을 바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선종(宣宗)이 하교한 바 또한 성대한 덕을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중에 세종조 때에 해동청을 구해서 길렀던 일이 있는데, 하루에 꿩 한 마리를 소비하다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으니 쓸모없음이 이와 같습니다. 지금 《명사(明史)》를 강독하는 즈음에 이렇게 해동청을 풀어 준 일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국사(國史)에 보이지 않는다면 필시 개탄스럽게 여길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까닭은 모르겠지만 이는 필시 바친 전례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 유신(儒臣)의 말을 들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
“26판 8월 그믐날 일식을 해야 하는 날 선종이 이르기를 ‘사방에 반드시 본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교한 것은 참으로 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하는 요체이니 하늘의 뜻에 진심으로 응하는 도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합니다. 호영(胡濙)이 명신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일식해야 하는데 일식하지 않았다고 진하(陳賀)를 청하였으니, 선종이 깨달아 알지 않았다면 진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마땅히 교훈 삼아 경계해야 할 곳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
“진조(陳祚)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기를 청한 일에 대해 선종은 불평한 기색을 드러내었고 끝내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가산(家産)을 몰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임금이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는 데에 대한 경계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경연에서 강독하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은 바로 제왕이 차례로 배우는 것인데, 진조의 한 마디 말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성왕(聖王)이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곳은 바로 장차 교훈 삼아 경계해야 합니다. 선종황제의 처분에 온당치 못한 점이 있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조의 말은 별달리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바가 없는데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러한 일을 후세에 살펴보자면 유감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정택하가 아뢰기를,
“옛일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순(舜) 임금으로 말하자면 단주(丹朱)와 같은 오만함이 없었으니, 작은 행실을 삼가지 않는 일로 우(禹) 임금에게 권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직언을 하더라도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진조가 《대학연의》를 강독하기를 청한 것으로 죄를 입었으니 끝내 성인(聖人)이 되기에는 덕을 잃은 듯합니다.”
하고, 홍성보가 아뢰기를,
“그 아래 ‘나라를 다스리는데 재정이 없을 수는 없지만, 「생산하는 사람이 많다.[生之者衆]」라는 네 글자의 말을 행하면 굳이 조세를 마구 거둘 필요가 없이 나라의 재정에 여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생산하는 사람이 많다.’라는 것은 절약해 쓰는 것으로 재물을 늘리는 방도로 삼는 것만 못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
“선종 8년 양사기(楊士奇)가 학사(學士)가 되었을 때 그 문치(文治)의 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선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가 매우 많은데, 임금과 신하가 모두 문장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무릇 제왕의 학문은 《대학》에서 이른 바 성의정심(誠意正心)과 격물치지(格物致知)가 귀중한 것인데, 시가(詩歌)를 짓고 오로지 칭송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니 어찌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태조(太祖) 때 유기(劉基)의 서맥송(瑞麥頌)은 후세에 폐단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러한 시가와 문장은 후세의 군주가 숭상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서맥송과 평서촉송(平西蜀頌)은 좋지만, 전해지는 폐해는 다시 아첨하는 행태가 된다. 한(漢)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하자면 적복부(赤伏符)와 같은 부류가 그러하다. 우리나라도 명(明)나라에서 전해지는 풍속을 이어받아 화려한 문장을 숭상하는 일이 있다. 신하가 잠(箴)과 송(頌)을 바치는 것이 굳이 해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것이 좋지는 않다.”
하자, 정택하가 아뢰기를,
“이 때문에 이 글의 아래 소주(小註)에서도 제왕이 문장을 숭상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홍성보가 또 아뢰기를,
“40판에서 양진(兩晉)의 풍속을 논한 곳은 어찌 부박(浮薄)하고 청허(淸虛)한 것을 폐단으로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도(王導)와 주의(周顗) 같은 부류가 청담(淸談)을 숭상하여 세상만사를 내버려 두었으니 결국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날마다 부지런히 힘쓰시는데, 인심과 세도를 가지고 살펴보면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정에 위로는 삼공(三公)으로부터 아래로 백관(百官)에 이르기까지 현인이 포진해 있다면 무너진 기강을 조금이나마 떠받칠 수 있습니다. 지금 등용한 선비가 조정에 포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산림과 초야의 선비를 모두 초치하여 등용한다면 어디에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초치하시는 별유(別諭)가 매양 빈번히 내렸고, 당시 상소에 대한 비답으로 살피자면 현인을 높이는 마음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더욱 유념하시어 정성스런 마음으로 조정에 초치하신다면 세도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경연에 입대(入對)했을 때 의리를 진달하면 어찌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홍성보가 아뢰기를,
“그 아래 조단(曹端)의 일은, 그가 노자(老子)와 석가(釋迦)를 구분해 말한 곳이 매우 정밀하니 학술이 올바름을 볼 수 있는데,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벼슬이 곽주 학정(霍州學正)에 그쳤습니다. 지금 조단과 같은 부류처럼 재주를 지니고 경서를 읽는 선비가 있더라도 어떻게 그 재주를 알아보고 등용하겠습니까. 조단 또한 연달아 만주(滿州)와 곽주의 학정이 되니 고을 사람들이 비로소 교화되었습니다. 지금 경술(經術)을 지닌 선비 또한 의당 점차 작은 곳에 써 보고 큰 곳에 써 본다면, 사람을 쓰는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신하들이 마침내 파하고 나갔다.


[주-D001] 선종(宣宗) 경술(庚戌) 선덕(宣德)의 산운평경운만(山雲平慶雲蠻)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集要)》 권8의 선종 경술 선덕 5년의 마지막 기사에는 ‘山雲平慶遠蠻’으로 되어 있다.
[주-D002] 섭이중(聶夷中)의 시(詩) : 
섭이중은 당(唐)나라 하동(河東) 사람으로, 자는 탄지(坦之)이다. 함통(咸通) 연간의 진사(進士)로서 벼슬은 화음위(華陰尉)를 지냈다. 농가의 가난한 살림을 묘사한 그의 〈상전가(傷田家)〉에서 “2월에 새 실을 팔고, 5월에 새 곡식을 팔았네. 눈앞의 급한 불은 껐으나, 심장의 살점을 도려낸 듯하네. 바라노니 임금의 마음 밝은 촛불이 되어 화려한 잔치 자리 비추지 말고, 유랑하는 백성들 집 두루 비추었으면.[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 我願君王心 化作光明燭 不照綺羅筵 徧照逃亡屋]”이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前集 卷1》 《資治通鑑 卷276 後唐紀》
[주-D003] 친히 …… 일 : 
천자가 친경(親耕)을 하면서 쟁기를 잡고 세 번 민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천자가 친히 쟁기와 보습을 수레에 싣고 들로 행차하는데 보개(保介)와 어자(御者) 사이에 둔다. 삼공(三公)과 구경(九卿)과 제후(諸侯)와 대부(大夫)를 거느리고 몸소 황제의 적전(籍田)에서 밭갈이를 한다. 천자는 세 번 밀고, 삼공은 다섯 번 밀고, 경과 제후는 아홉 번 민다.”라고 하였다.
[주-D004] 빈풍(豳風) 칠월(七月) : 
《시경(詩經)》 〈칠월〉을 가리키는데, 주공(周公)이 빈(豳)나라 농민의 세시 생활의 모습과 농가의 정경을 노래하였다.
[주-D005] 선조 …… 지었다 : 
숙종 때 동궁이던 경종에게 농상도(農桑圖)가 있었는데, 그림 속에 숙종의 어제(御製)인 칠언절구가 있었다. 뒤에 이를 보고 영조도 글을 지어 넣었다. 1725년(영조1)에 민진원(閔鎭遠)의 요청에 따라 장정을 다시 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承政院日記 英祖 1年 6月 14日》
[주-D006] 이유(李瑜)가 …… 바 : 
1726년(영조2) 이유가 전라 감사로 내려가며 입시한 자리에서 수령들이 진휼을 계기로 그 재원을 많이 받아 사적으로 농락하는 폐단을 진달하여, 영조로부터 철저히 관리하라는 명을 받은 적이 있다. 《承政院日記 英祖 2年 8月 27日》
[주-D007] 우리나라 해동청(海東靑)의 일 : 
《황명통기집요(皇明通紀集要)》 권8, 경술년(1430, 세종12) 선덕(宣德) 5년 4월 조에 “조선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해동응(海東鷹)을 바치니 왕에게 자기(磁器)를 회사(回賜)하면서 유시하기를 ‘나라에 진기한 짐승이 많지만, 짐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니 이후로는 바치지 말라.’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주-D008] 일식을 …… 것이다 : 
1430년 8월 그믐은 일식에 해당하는 날인데 날이 흐리고 비가 와서 일식을 하지 않자 예부 상서(禮部尙書) 호영(胡濙) 등이 진하(陳賀)를 청하였는데, 선종(宣宗)은 “옛날의 군자들은 그 과실이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다 보았고, 과실을 고침에 미쳐서는 백성들이 다 우러러보았다.”라는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의 말을 인용하고 “경사(京師)에서 보지 못했다고 해도 사방에 반드시 본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진하를 하지 말도록 하였다. 《皇明通紀集要 卷8》
[주-D009] 임금이 …… 경계 :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서 이윤(伊尹)이 치사(致仕)하고 떠나면서 태갑(太甲)에게 진계하기를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부릴 사람이 없으며,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섬길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크다 하여 남을 좁게 여기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주-D010] 순(舜) 임금으로 …… 때문입니다 : 
《서경》 〈익직(益稷)〉에서 우(禹) 임금은 순 임금에게 요(堯) 임금의 아들인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고, 《서경》 〈여오(旅獒)〉에서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에게 경계하기를 “작은 행실을 삼가지 않으면 끝내 큰 덕에 누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D011] 서맥송(瑞麥頌) : 
태평성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서맥(瑞麥)은 보리 한 대에 여러 이삭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송나라 진종(眞宗) 때 수주(壽州)에서 서맥을 올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增修附註資治通鑑節要續編 卷30》
[주-D012] 적복부(赤伏符) : 
예언이 쓰인 붉은 색깔의 부적을 말한다. 뒤에 광무제(光武帝)가 된 유수(劉秀)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강화(彊華)가 적복부를 바치며 “유수가 군사를 일으키니 사이(四夷)가 운집하고 사칠(四七) 즈음에 화(火)가 임금이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라고 하자, 이것은 광무제가 천자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신하들이 말하였다. 그러자 광무제는 유사(有司)에게 단장(壇場)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
[주-D013] 왕도(王導)와 주의(周顗) : 
모두 동진(東晉) 때의 명신이다. 왕도의 사촌인 왕돈(王敦)이 난을 일으켰을 때 주의는 왕도를 구하려고 크게 노력하였지만, 왕도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뒤에 왕돈이 왕도에게 주의에 대해서 묻자 왕도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왕도가 중서(中書)의 서류를 조사하다가 주의가 자기를 위해 올린 글을 발견하고는 “내가 백인(伯仁)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백인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이다.”라고 하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卷69 周顗列傳》 백인은 주의의 자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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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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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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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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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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