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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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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목사 등이 상소하여 급재할 것을 청하다 - 현종(개수실록) 9년
    나주 목사ㆍ광주 목사ㆍ장성 부사 등이 상소하여 급재할 것을 청하다 - 현종(개수실록) 9년 무신(1668) 9월 21일(정사)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민서(李敏叙), 광주 목사(光州牧使) 윤변(尹抃), 장성 부사(長城府使) 소두산(蘇斗山)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농사가 결단난 것을 진달하고, 급재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에 내려 잘 헤아려 시행하게 하였다.【원전】 37 집 624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전세(田稅) / 농업(農業) / 구휼(救恤)
    2021-04-01 | NO.317
  •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다 - 현종(개수실록) 9년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다 - 현종(개수실록) 9년 무신(1668) 4월 13일(신사)        고 유신(儒臣) 교리 김인후(金麟厚)를 이조 판서에, 절사(節士)인 좌랑 강항(姜沆)과 의병장인 좌랑 김덕령(金德齡)을 제조(諸曹)의 참의(參議)에 추증하였다.김인후는 자가 후지(厚之)이고 호가 하서(河西)이다. 대대로 호남의 장성(長城)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문재(文才)가 숙성하여서 신동이라고 불리웠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경학에 밝고 행실이 뛰어났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오랫동안 강관으로 있었는데, 아주 깊이 인정을 받았다. 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옥당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매번 인종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혼자서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고서 돌아왔으므로 ‘해마다 7월이면 온 산중에 통곡소리’라는 시구가 있게 되었다. 논자들은“을사 사화(乙巳士禍) 이후 사류로서 출처(出處)가 바르기로는 김인후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졸함에 미쳐서는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었다. 그가 지은 시문집이 세상에 전한다.강항은 영광(靈光)에 살았으며 글재주가 있어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유년에 형조 좌랑으로서 재신(宰臣)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이 되어 바닷가 고을에서 군량미를 모으다가 온 집안이 왜적에게 잡혔는데, 여러 차례 죽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으로 잡혀가서는 몰래 납서(蠟書)로써 왜적의 동태를 알렸으며, 모습을 저들처럼 바꾸어 훼손시키거나 의관을 바꾸지 않은 채 지내었는데, 4년이 지난 경자년에 왜인들이 비로소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선조가 불러서 서울에 도착하자, 왜적의 정세에 대해 두루 물어보았으며, 이어서 술을 하사하고 말을 지급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하였는데, 심지어는 소무(蘇武)와 문천상(文天祥)에게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이를 듣고서 가상히 여겨 탄식하였으며, 당로자에게 글을 보내어 그를 거두어 서용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당론이 한창 성한 때라 끝내 폐기된 채로 생을 마쳤다. 그가 지은 《수은집(睡隱集)》ㆍ《간양록(看羊錄)》 등의 서책이 세상에 전한다.김덕령은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신력(神力)이 있고 비할 바 없이 날래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상복을 벗고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이 남쪽 지방에서 군사들을 위무할 때 불러보고 격려하면서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선조가 형조 좌랑에 제수하고 또 군호(軍號)를 고쳐 초승(超乘)이라고 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고무되어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왜인들도 듣고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적과 대치한 3년 동안에 끝내 적의 목을 벤 공이 없었으며, 성질 또한 술주정이 심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병신년에 일어난 호서의 적당(賊黨)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한현(韓絢)이 의병장으로서 동참하였다가 죽었는데, 여러 적도들이 김덕령 역시 함께 모의하여 서로 호응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름이 한현의 밀서(密書) 중에 들어 있었다. 이에 상이 크게 놀라 승지 서성(徐渻)을 보내어 체포하게 하였는데, 서성이 도착하기 전에 김덕령은 조정의 명이 있었음을 들었으므로 먼저 스스로 나아갔다. 치대(置對)함에 미쳐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柳成龍)은“이치상 반드시 살려둘 수 없다.”고 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감히 살리자는 의논으로 편들어주는 자가 없었으며, 판의금부사 최황(崔滉)이 또 속히 형신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이때에 이르러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포상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원전】 37 집 607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외교-왜(倭) / 군사(軍事)[주-D001] 정유년 : 1597 선조 30년.[주-D002] 병신년 : 1596 선조 29년.[주-D003] 이몽학(李夢鶴)의 난 : 선조 29년(1596)에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이 일으킨 반란임. 이몽학은 서얼 출신으로 임진 왜란 때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부하로 들어갔는데, 그와 함께 반란을 모의, 왜군의 재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장정을 끌어 모았으며, 동갑계회(同甲契會)란 비밀 결사를 조직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 때 홍산ㆍ임천(林川)ㆍ청양(靑陽) 등을 함락해 세력을 떨쳤으나 홍주(洪州)를 공격하다가 홍가신(洪可臣)에게 패하였으며 자신의 부하인 김경창(金慶昌) 등에게 살해되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선조 고사본말(宣祖故事本末) 제도토적지기(諸道土賊之起).
    2021-04-01 | NO.316
  • 광주 등지에 우박이 내리다 - 현종(개수실록) 6년
    전라도 진산ㆍ장성ㆍ창평ㆍ흥양ㆍ광주ㆍ고산 등지에 우박이 내리다 - 현종(개수실록) 6년 을사(1665) 5월 6일(신묘)       전라도 진산(珍山)ㆍ장성(長成)ㆍ창평(昌平)ㆍ흥양(興陽)ㆍ광주(光州)ㆍ고산(高山)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원전】 37 집 445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4-01 | NO.315
  • 김덕령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다 - 현종(개수실록) 2년
    고 충용장 김덕령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다 - 현종(개수실록) 2년 신축(1661) 8월 30일(병자) 고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을 신원하고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명하였다.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의분에 북받치는 마음과 큰 절조를 지녔으며 용기와 힘이 매우 뛰어났다. 임진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쳐부수니, 왜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에 선조는 그를 가상하게 여겨 바로 형조 좌랑에 제수하고 충용 장군(忠勇將軍)이란 명호를 하사하였으며, 광해(光海)는 세자 분조(世子分朝)로써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란 명호를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위엄의 명성이 크게 떨쳐지니, 그를 시기하는 자가 이몽학(李夢鶴) 무리라는 유언 비어를 조작하여 퍼뜨린 뒤 조정에 보고하여 함께 모함하였다. 이리하여 결국 하옥되었다가 매를 맞고 죽으니, 호남 사람들이 원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이때에 이르러 한재 때문에 도신(道臣)들에게 명하여 원통하게 죽은 자 중 아직 신원되지 않은 자를 찾도록 하였다. 이에 도신이 덕령에 대해 보고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여, 그 원통함을 풀어 주었다.【원전】 37 집 246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2021-04-01 | NO.314
  • 무등산에 눈이 내리다 - 현종(개수실록) 2년
    호남의 광주 무등산에 눈이 내리다 - 현종(개수실록) 2년 신축(1661) 8월 26일(임신)        호남의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에 눈이 내렸다.【원전】 37 집 246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4-01 | NO.313
  • 전남 감사 김시진이 조복양의 진소 공박으로 소를 올리다 - 현종(개수실록) 1년
    전남 감사 김시진이 조복양의 진소 공박으로 소를 올리다  - 현종(개수실록) 1년 경자(1660) 11월 9일(경신)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복양(趙復陽)의 진소(陳疏) 공박으로 해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신이 호조 판서 허적(許積)과는 선후배가 같지 않아서 서울에 있을 적에도 서로 오가는 교분이 없었고, 남도로 내려온 뒤에도 서로 편지를 왕복한 적이 없는데, 허적이 어떻게 해서 신이 연분(年分)을 직접 복심(覆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 조복양은 또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맹랑한 말을 들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초봄에 광주(光州)에 순시를 나갔는데, 마침 5, 6명의 사람이 나와서 아무 죄도 없이 삭명(削名)을 당하였다고 호소하기에 신이 유안(儒案)을 가져다 보았더니 파버린 이름자가 52명이나 되어서 신이 이를 맨 먼저 제창한 재임(齋任)을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들으니 갇힌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고경명(高敬命)의 증손이라고 하므로 관문을 띄워서 모두 석방하기는 하였으나, 이 일로 해서 신이 많은 선비를 모욕하였다는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을 선비를 모욕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비방의 소리가 쌓여 가는가 하면, 공청의 모임이나 대중의 좌중에서 더러는 해괴한 사람으로 공척하고 더러는 간사한 사람으로 손가락질하며 온갖 욕설을 다 퍼부으니, 신이 비록 후안무치하더라도 어찌 감히 태연히 관직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너무 혐의쩍어 할 것 없이 마음을 편하게 먹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시진이 애당초 직접 복심을 하려 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자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도하에 그 소문이 흘러들어온 데다 그의 구차스럽고 편벽된 행적이 평소 공론에게 밉보이기는 하였으나, 편협한 마음으로 시기를 하여 서슴지 않고 모욕을 주는 조복양의 행위 역시 사대부를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시진의 상소 수백 언은 비록 비방을 받게 된 이유를 밝힌 것이기는 하나, 어투가 가라앉고 말이 많아서 모욕을 사기에 알맞다. 그리고 전일 주상의 하교 중에 이른바 ‘해괴하기가 말이 아니고 조정의 체례(體例)를 모르는 자이다.’에 대해서는 일언의 변백도 못한 채, 다소곳이 참으며 오히려 비위를 거스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것 또한 어찌 사대부가 행신을 하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라 하겠는가. 그것 역시 너무 수치스런 노릇이다.【원전】 37 집 205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2021-04-01 | NO.312
  • 전라도의 지진 피해를 보고하다 - 현종 11년
    전라도의 지진 피해를 보고하다 - 현종 11년 경술(1670) 9월 17일(신미)        전라도 고산(高山) 등 30여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광주(光州)ㆍ강진(康津)ㆍ운봉(雲峯)ㆍ순창(淳昌) 등 네 고을이 더욱 심하였는데, 집이 흔들려 무너질 듯했고 담장이 무너졌으며 지붕의 기와가 떨어졌다. 말과 소가 제대로 서 있지 못했으며 길가는 사람이 다리를 가누지 못하여 놀라고 겨를이 없는 가운데 엎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런 참혹한 지진은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다.【원전】 36 집 676 면【분류】 과학-지학(地學)
    2021-03-25 | NO.311
  • 광주목사 윤변 등이 연명 상소하여 급재를 청하다 - 현종 9년
    나주 목사 이민서 등이 연명 상소하여 급재를 청하다 - 현종 9년 무신(1668) 9월 21일(정사)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민서(李敏叙), 광주 목사(光州牧使) 윤변(尹抃), 장성 부사(長城府使) 소두산(蘇斗山)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농사가 결단난 것을 진달하고, 급재할 것을 청하였는데, 호조에 내려 잘 헤아려 시행하게 하였다.【원전】 36 집 591 면【분류】 농업-농작(農作)
    2021-03-25 | NO.310
  • 광주에 우박이 내리다 - 현종 6년
    진산ㆍ장성ㆍ창평 등지에 우박이 내리다 - 현종 6년 을사(1665) 5월 6일(신묘)        진산(珍山)ㆍ장성(長城)ㆍ창평(昌平)ㆍ흥양(興陽)ㆍ광주(光州)ㆍ고산(高山) 등의 땅에 우박이 내렸다.【원전】 36 집 464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3-25 | NO.309
  • 이조 판서 이상진이 김소의 일로 파직을 청하다 - 현종 6년
    이조 판서 이상진이 김소의 일로 논박받았다 하여 파직을 청하다 - 현종 6년 을사(1665) 2월 8일(을축)        이조 판서 이상진이 상소하기를,“삼가 장관(長官)의 상소와 낭관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일을 그르친 잘못을 모두 신에게 돌렸으니, 신은 참으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소(金素)는 인조조에 재주가 있다고 발탁되어 크고 번잡한 고을의 방백과 곤수(閫帥)를 두루 거쳤으며, 승지가 된 것도 30년 가까이 됩니다. 을미년 여름에 신이 처음으로 정원의 직에 있으면서 그와 함께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보니 질박하고 꾸밈이 없어 마음속으로 그의 장점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서필원(徐必遠)이 전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수령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그 후에 김소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고 서필원이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는 그의 치적을 칭찬하여 전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이 그의 집이 몹시 가난하다고 듣고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겼으며, 그가 판결사(判決事)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잘 처리한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신은 생각하기를 ‘예전의 비방은 이미 밝히기 어렵게 되었고 직책에 알맞은다는 명망이 새롭게 드러난 셈이다. 지금같이 인재가 부족한 때 사람을 쓰는 도리에 있어서 지나치게 국한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대정(大政) 때 신이 다시 통망(通望)하자는 논의를 먼저 꺼냈는데, 물의가 준엄하게 일어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낭관이 쟁집한 것은 원래 통망하느냐 막느냐 하는 중대한 일에 관계되고 신이 고집한 것은 사체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조용히 의논해 처리하되 언제 처리해도 무방합니다.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낭관이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고 당상이 고개를 숙이고 명에 따라 주어서는 안될 듯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반복해서 말하다 보니 자연 날이 저물었는데도 개정(開政)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무단히 파하고 나갈 수가 없고 또한 바깥에 나가있는 낭관을 사사로이 부를 수도 없었으니 계사를 올리는 일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의 망령된 잘못으로 인하여 예전 규례를 보전해 공의를 따르지 못하여 정사의 체모를 무너뜨리고 뒤폐단을 열어놓았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아주 큽니다. 속히 신의 직을 파직하여 물의에 답하소서.”하니, 상이 답하기를,“경은 잘못한 바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하였다. 참의 이경휘(李慶徽)도 상소하여 파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직무를 보라.”하였다.【원전】 36 집 451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3-25 | NO.308
  • 광주에 지진이 일어나다 - 현종 5년
    전라도 광주에 지진이 일어나다 - 현종 5년 갑진(1664) 윤 6월 17일(정축)         전라도 광주(光州)에 지진이 있었는데 우뢰 같은 소리가 났다.【원전】 36 집 421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3-25 | NO.307
  • 김덕령을 신원시키고 복관해 주도록 명하다 - 현종 2년
    김덕령을 신원시키고 복관해 주도록 명하다 - 현종 2년 신축(1661) 8월 30일(병자)        김덕령(金德齡)을 신원시키고 복관(復官)해 주도록 명하였다.덕령은 광주(光州) 사람이다. 그는 강개지사(慷慨之士)로서 대절(大節)이 있었으며 용력이 빼어났다. 임진 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격파하였으므로 왜노(倭奴)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피하였다. 선묘(宣廟)가 이를 가상하게 여겨 곧장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는 호를 하사하니, 이때부터 위명(威名)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런데 시기하는 자가 이몽학(李夢鶴)의 패거리라고 그를 지목하면서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위에 보고한 뒤 공동으로 모함한 결과, 마침내 하옥(下獄)된 뒤 장사(杖死)하고 말았으므로, 이를 원통하게 생각하지 않는 호남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한재(旱災) 때문에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아직 원한을 품은 채 신설(伸雪)되지 않은 자들을 알아내 계문하도록 하였는데, 김시진(金始振)이 덕령을 계문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이 모두 그의 원통함을 극구 이야기하며 신설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원전】 36 집 308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과학-천기(天氣) / 인물(人物)
    2021-03-25 | NO.306
  • 광주 무등산에 눈이 내리다 - 현종 2년
    광주 무등산에 눈이 내리다 - 현종 2년 신축(1661) 8월 26일(임신)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에 눈이 내렸다.【원전】 36 집 308 면【분류】 과학-천기(天氣)
    2021-03-25 | NO.305
  • 전남 감사 김시진의 상소문 - 현종 1년
    조복양이 소를 올려 지신을 욕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한 전남 감사 김시진의 상소문 - 현종 1년 경자(1660) 11월 9일(경신)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복양(趙復陽)이 소를 올려 욕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신과 호조 판서 허적의 무리와는 연배가 서로 달라 서울에 있을 때는 평소 한번도 왕래한 교분이 없었고, 남쪽으로 오고 나서는 세향(歲餉)ㆍ절선(節扇) 및 으레 하는 편지 외에는 한번도 편지를 보내 문안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허적이 어떻게 신이 연분(年分)을 직접 살피러 가려고 하는지를 들었으며, 조복양은 또 어떻게 이런 맹랑한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신이 비방을 듣는 이유는 금년 초봄 광주(光州)로 순찰을 나갔을 때, 마침 15, 16명의 유생들이 역참(驛站)에 몰려 와 죄없이 이름이 삭제되었다고 호소하기에 신이 광주에 들어가 유생안(儒生案)을 가져다 보니 이름자를 도려낸 사람이 52인이었습니다. 신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향교 유안(鄕校儒案)은 본디 사사로운 장부가 아니다. 만약 내부에서 벌을 논할 일이 있다면 죄명을 써서 벽에 게시하는 것이 서울과 지방에서 통행하는 규정이다. 관가의 문서를 이렇게 함부로 도려내는 일은 보지 못하였다.’ 하고, 드디어 주창한 재임(齋任) 5, 6인을 가두고, 처음에는 형추한 뒤에 정배하여 뒤폐단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장성(長城)에 와서 들어보니 수금된 자들 중 1인은 바로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의 증손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 고경명의 자손은 마땅히 대대로 사유(赦宥)의 은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었는데, 같은 죄를 지은 자를 혼자만 석방할 수 없어 본읍에 관문(關文)을 보내 모두 석방하게 하였습니다.신의 본의는 국가를 위하여 명예를 보존해 주기 위한 것이긴 하나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지 못했으니 신이 실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것을 가지고 신이 많은 선비들을 욕보였다고 하면서 드디어 남의 지탄을 받게 하고 비방하는 논의가 더욱 쌓이게 하였습니다. 공청(公廳)의 모임이나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괴상 망측하다고 배척하고 간사하다고도 지목하여 갖은 욕을 다하였으니, 신이 아무리 염치가 없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태연히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답하기를,“어찌 깊이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안심하고 직무를 보라.”하였다. 시진이 재임을 가둔 것은 애당초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론 때문이 아니었는데, 복양은 일생 동안 당론에 고질이 되었기 때문에 분을 틈타 소를 올리니 말이 전혀 조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위에서는 살피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이것을 허물하는 사람이 없으니, 당시의 조정 논의가 실로 한탄스러울 뿐, 복양이야 무슨 책할 것이 있겠는가.【원전】 36 집 284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 농업-농작(農作) / 신분-천인(賤人)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주-D001] 세향(歲餉) : 신년을 하례하여 보내는 선물.[주-D002] 절선(節扇) : 단오절에 선사하는 부채.
    2021-03-19 | NO.304
  • 광주 유생 배위 등을 정거하게 하다 - 효종 6년
    제물을 더럽힌 영장 백홍성의 치죄를 상소한 광주 유생 배위 등을 정거하게 하다 - 효종 6년 을미(1655) 6월 5일(무오)        이에 앞서 순천(順天)의 영장(營將) 백홍성(白弘性)이 선묘(宣廟)의 기일(忌日)에 흥양현(興陽縣)에서 풍악을 벌이고 군사에게 호궤하였다. 이 날 유생이 석전(釋奠)에 쓸 제물을 받들고 향교에 가는데 백홍성이 문루(門樓)에 앉아 제물을 굽어보았다. 유생이 정로(正路)를 거쳐 가려 하니 백홍성이 바야흐로 진을 쳤다 하여 허가하지 않았다. 유생이 제물은 우로(迂路)를 거쳐 갈 수 없다고 굳이 다투니, 백홍성이 크게 노하여 제물을 가지고 따라가는 자를 잡아 매를 때렸다. 제물을 가지고 따라가던 자가 이 때문에 흩어지면서 제물을 길가에 버려두었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통탄하였다. 백홍성이 죄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스스로 계문하여 유생의 죄를 꾸며서 무고하였다. 이 때에 광주(光州)의 유생 배위(裵緯) 등 1백여 인이 궐하에 와서 상소하여 아뢰고 백홍성을 죄주기를 청하니, 상이 정원을 시켜 그 시비를 의논하게 하였다. 승지 이상진(李尙眞)ㆍ정지화(鄭知和) 등이 상의 노여움을 건드릴세라 염려하여, 백홍성과 유생에게 다 잘못한 것이 있는데 다만 가볍고 무거운 구별이 있다고 말하니, 그 소를 물리치고 배위는 해조(該曹)를 시켜 정거(停擧)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정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엄하게 비답하고 듣지 않았다.【원전】 36 집 16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2021-03-19 | NO.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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