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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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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자와 절부에 대한 포상을 주청하다 - 세종 13년
    효자와 절부에 대한 포상을 주청하다 - 세종 13년 신해(1431) 10월 28일(기미)       예조에서 아뢰기를,“<중략> 전라도 전주의 기관 이정은 나이 12세에 어머니가 죽으매 시체를 안고 밤낮으로 슬피 울었으며, 빈소 곁에 있으면서 몸소 밥을 지어 조석으로 받들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으며, 무진군(茂珍郡=광주)의 기관(記官) 금라(金羅)는 나이 9세에 어머니가 죽으매, 무덤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3년의 상기를 마쳤으며, 남원부에 사는 강일우(姜一遇)는 나이 16세에 어머니가 죽으매, 3년 동안 무덤을 지켜 예절로써 상기를 마쳤으며, 용안현에 사는 고천계(高天桂)는 기해년에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에 아버지를 대신해 가서 사로잡혀 구류(拘留)되었다가 경자년에 이르러서야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므로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그 어머니를 봉양하여 효성을 다했으며, 무진군에 사는 선군 이실(李實)의 아내는 나이 14세에 온 집안이 역질(疫疾)에 걸리니, 이웃에서 서로 통래(通來)를 하지 않으므로, 어머니와 형이 다 죽자 그녀는 그 아버지와 함께 시체를 거적에 싸서 집 밖에 장사지냈으며, 아버지가 또 죽으니, 그녀는 하늘을 부르고 땅을 치면서 물통으로 아버지의 시체를 가리워 장사지내고는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역질 기운이 사라지자 읍리(邑里)에 청하여 먼저 부모를 장사지내고 후에 그 형을 장사지냈으며, 전주에 사는 참군(參軍) 정상주(鄭尙周)의 아내 김씨는 나이 26세에 남편이 죽으니, 시어머니를 따라 살면서 나이 80세가 넘도록 효성으로 봉양하여 도리를 어기지 않았으며, 강진현(康津縣)에 사는 생원(生員) 김괄(金适)의 아내 김씨는 나이 25세에 남편이 죽으매, 시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봉양하여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효성을 변하지 않았으며, <중략>. 위의 항목(項目)의 효자(孝子)ㆍ절부(節婦) 가운데서 포상(褒賞)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예에 의거하여 복호(復戶)하고, 효자로 재주가 벼슬할 만한 사람는 재주를 헤아려 서용(敍用)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3 집 351 면【분류】 윤리(倫理) / 재정-역(役) / 인사-임면(任免) / 풍속-예속(禮俗)
    2021-02-02 | NO.47
  • 김한의 아내에게 군주의 호를 내리다 - 세종 13년
    김한의 아내에게 군주의 호를 내리다 - 세종 13년 신해(1431) 10월 18일(기유)       이개(李言+豈)로 순성군(順成君)을, 박갱(朴賡)의 아내 이씨를 함양 군주(咸陽郡主)로, 변상복(邊尙服)의 아내 이씨를 덕천 군주(德川郡主)로, 이관식(李寬植)의 아내 이씨를 인천 군주(仁川郡主), 김한(金澣)의 아내 이씨를 고성 군주(高城郡主)로, 조효산(趙孝山)의 아내 이씨를 상원 군주(祥原郡主)로, 이희종(李希宗)의 아내 이씨를 안성 군주(安城郡主)로, 이항신(李恒信)의 아내 이씨를 함안 군주(咸安郡主)로, 이숙묘(李叔畝)의 아내 이씨를 한산 군주(韓山君主)로, 김한(金閑)의 아내 이씨를 무진 군주(茂珍君主)로, 이자(李孜)의 아내 이씨를 재령 군주(載寧君主)로 삼았다.【원전】 3 집 350 면【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비빈(妃嬪)
    2021-02-02 | NO.46
  • 무진군(茂珍郡) - 세종실록 지리지
    무진군(茂珍郡) - 세종시록 지리지 / 전라도 본래 백제의 무진주 도독(武珍州都督)이었는데, 【일명 노지(奴只)라고 한다.】 신라에서 백제를 차지하여 그대로 도독(都督)으로 하였고, 경덕왕(景德王) 16년 정유 【당나라 숙종(肅宗) 지덕(至德) 2년.】 에 무주 도독(武州都督)으로 고쳤다. 진성왕(眞聖王) 6년 임자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 에 견훤(甄萱)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빼앗아 웅거하고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일컫다가 드디어 전주(全州)로 옮겼다. 견훤 20년 신미 【양(梁)나라 태조(太祖) 건화(乾化) 원년.】 에 후고려왕(後高麗王) 궁예(弓裔)가 고려 태조(太祖)를 정기 태감(精騎太監)으로 삼아서 뱃군사[舟師]를 거느리고 무진 지경을 공략하여 차지하게 하였는데, 성주(城主) 지훤(池萱)은 바로 견훤의 사위였으므로 견훤과 서로 응(應)하여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고려 태조 23년 경자 【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5년.】 에 이르러 광주(光州)로 고쳤고, 성종(成宗) 15년 병신 【송나라 태조(太祖) 지도(至道) 2년.】 에 광주 자사(光州刺史)로 강등하였고, 그 뒤에 또 해양 현령(海陽縣令)으로 강등하였다가 고종(高宗) 45년 무오 【송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6년.】 에 공신(功臣) 김인준(金仁俊)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지익주사(知翼州事)로 고쳤고, 뒤에 광주목(光州牧)으로 승격하였고, 충선왕(忠宣王) 원년 경술 【원나라 세조(世祖) 지대(至大) 3년.】 에 화평부(化平府)로 고쳤고, 공민왕(恭愍王) 11년 임인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2년.】 에 무진부(茂珍府)로 고쳤고, 【혜묘(惠廟)의 휘자(諱字)를 피하여 ‘무(武)’를 ‘무(茂)’자로 고쳤다.】 23년 갑인 【명나라 홍무(洪武) 7년.】 에 광주목으로 승격하였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금상(今上) 12년 경술에 읍(邑)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본주(本州) 목사(牧使)를 구타하였으므로 노흥준을 곤장을 때려 변방(邊方) 지방으로 유형시키고 그 가족도 이주시키고서, 군(郡)으로 강등하였다. 별호를 광산(光山), 또는 익양(翼陽)이라고 한다. 고속부곡(古屬部曲)이 2이니, 양과(良瓜)ㆍ경지(慶指)다.진산(鎭山)은 무등(無等)이다. 【군의 동쪽에 있다.】 병로지 용당(幷老只龍堂) 【사전(祀典)에는 용진 연소(龍津衍所)라 하였는데, 봄ㆍ가을에 이 고을 관원이 제사를 지낸다.】 벽진도(碧津渡) 【군의 서쪽에 있다.】 거진도(巨津渡) 【군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창평(昌平)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나주(羅州)에 이르기 28리, 남쪽으로 화순(和順)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진원(珍原)에 이르기 24리이다.호수가 8백 60호요, 인구가 4천 1백 8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75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백 69명이요, 선군이 5백 71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8명이다.토성(土姓)이 13이니, 탁(卓)ㆍ이(李)ㆍ김(金)ㆍ채(蔡)ㆍ노(盧)ㆍ장(張)ㆍ정(鄭)ㆍ박(朴)ㆍ진(陳)ㆍ허(許)ㆍ반(潘)ㆍ성(成)ㆍ승(承)이요, 촌성(村姓)이 1이니, 유(庾)요, 속성(續姓)이 4이니, 김(金) 【개성(開城).】 ㆍ정(程) 【금산(錦山).】 ㆍ신(申) 【고흥(高興).】 ㆍ최(崔) 【당진(唐津).】 이요, 【모두 향리(鄕吏)이다.】 양과(良瓜)ㆍ경지(慶旨)의 성은 모두 김(金)이요, 벽진도(碧津渡)의 망성(亡姓)이 1이니, 김(金)이다. 인물은 지첨의부사 시 문숙공 김주정(知僉議府事諡文肅公金周鼎)이니,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이요, 첨의정승 치사 시 문정공 김태현(僉議政丞致仕諡文正公金台鉉)이니,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이다.땅이 메마르며, 【10분의 2이다.】 간전(墾田)이 1만 8백 80결이요, 【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가 오곡ㆍ뽕나무ㆍ삼[麻]ㆍ목화ㆍ닥나무ㆍ왕골이다. 토공(土貢)이 표범가죽ㆍ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잘ㆍ족제비털[黃毛]ㆍ칠(漆)ㆍ등나무상자ㆍ대추ㆍ감ㆍ배[梨]ㆍ석류ㆍ모과ㆍ차(茶)ㆍ표고ㆍ꿀ㆍ밀[黃蠟]ㆍ자리ㆍ왕대요, 약재가 호라비좆뿌리[天門冬]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연꽃술[蓮花蘂]ㆍ말린 새앙[乾薑]ㆍ패랭이꽃이삭[瞿麥穗]ㆍ흰매화열매[鹽梅實]ㆍ복령(茯苓)ㆍ모란뿌리껍질[牧丹皮]이다. 자기소가 1이요, 【군의 동쪽 이점(梨岾)에 있다.】 도기소가 1이다. 【군의 북쪽에 있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9백 72보(步)이다.】 옛 내상 석성[古內廂石城] 【군의 서쪽에 있는데, 둘레가 6백 25보이다.】 무진 도독(武珍都督) 때의 옛 토성(土城) 【둘레가 2천 5백 60보(步)이다.】 역(驛)이 2이니, 경양(景陽)ㆍ선암(仙巖)이다. 예전에 진원역(鎭原驛)이 있었는데, 본조 태종(太宗) 17년 정유에 내상(內廂)을 강진(康津)에 옮길 때 아울러 옮겼다.이상한 일[靈異]. 지정(至正) 원년 신사 【충혜왕(忠惠王) 복위 2년.】 에 동정 원수(東征元帥) 김주정(金周鼎)이 각 고을의 성황신(城隍神)에 제사지냈는데, 다니며 이름을 부르면 신령한 일이 나타났으니, 군(郡)의 성황(城隍) 가운데 둑(纛)의 방울[鈴]을 흔든 것이 셋이었으므로, 두루 조정에 함께 보고하여 작(爵)을 봉(封)하였다. 무등산(無等山) 꼭대기에 줄바위가 수십 개 있는데, 삐죽하게 선 것이 높이가 백여 자나 된다. 그 산이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하거나 장차 개려고 할 때에는 우뢰 소리 같이 우는 소리가 자주 나는데, 수십리에까지 들린다. 또 읍의 남쪽에 큰 나무가 있어서 이름을, ‘활나무[弓樹]’라고 하는데, 가지와 줄기가 오래되고 울창하여, 둘레가 19자쯤 되고, 높이가 70자쯤 된다. 해마다 봄철이 되어 여러 나무가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잎이 나면 그 해에 흉년이 들 징조이며, 여러 나무가 이미 활짝 피었는데도 이 나무가 잎이 나지 않거나 혹 느즈막하게 가지런히 나면 그 해에 풍년이 들 징조이며, 혹은 나무의 네면과ㆍ위ㆍ아래가 가지런하지 않게 잎이 나도 또한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 성중(城中) 사람들이 대개 이것으로써 한 해의 풍년ㆍ흉년을 점치는데, 그 일이 여러번 들어 맞았다.【원전】 5 집 665 면
    2021-02-02 | NO.45
  • 전라도(全羅道) -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全羅道) - 세종실록 지리지 / 전라도 본래 백제의 땅이다. 의자왕(義慈王) 19년 경신에 【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태종왕(太宗王)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멸하고 드디어 그 땅을 합쳤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전주(全州)ㆍ무주(武州) 두 도독부(都督府)로 나누었다. 진성왕(眞聖王) 5년 임자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 에 서면 도통(西面都統) 견훤(甄萱)이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여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 【후진(後晉) 고조(高祖) 원복(元福) 원년.】 에 친히 후백제를 쳐서 이기고, 성종(成宗) 14년 을미 【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 에 전주(全州)ㆍ영주(瀛州)ㆍ순주(淳州)ㆍ마주(馬州) 등 고을을 강남도(江南道)로 하고, 나주(羅州)ㆍ광주(光州)ㆍ정주(靜州)ㆍ승주(昇州)ㆍ패주(貝州)ㆍ담주(潭州)ㆍ낭주(朗州) 등 고을을 해양도(海陽道)로 하였다가, 현종(縣宗) 9년 무오 【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에 전라도로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관청을 두고 있다.동쪽은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에 이르고, 서ㆍ남쪽은 바다에 닿으며, 북쪽은 충청도(忠淸道) 은진현(恩津縣)에 이르는데, 동ㆍ서가 2백 33리요, 남ㆍ북이 4백 5리이었다.관할은 유수(留守)가 1이요, 목(牧)이 2이요, 도호부(都護府)가 4이요, 군(郡)이 12이요, 현(縣)이 39이며, 계수관(界首官)이 4이니,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남원(南原)ㆍ장흥(長興)이다.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 【일명 지리(地理), 또는 방장(方丈), 또는 두류(頭流)라 한다.】 인데 남원(南原)에 있으니, 그 동쪽은 진주(晉州)ㆍ곤남(昆南)이요, 북쪽은 함양(咸陽)ㆍ산음(山陰)이요, 서쪽은 구례(求禮)요, 남쪽은 광양(光陽)이다. 웅장하게 높이 하늘에 우뚝 치솟아, 산허리에 간혹 구름이 머물고,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그 위는 맑게 개어 평상시와 같으며, 가을철 서늘하면 매떼[鷹]가 모여들므로 잡아다가 나라에 바친다. 속설에 전하기를, “태을(太乙)이 그 위에 살고, 여러 신선(神仙)이 모이며, 여러 용(龍)이 살고 있다.” 고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소위 “방장은 삼한 밖이라.[方文三韓外]” 한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 이르기를,“방장(方丈)은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 한 것은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에서 남악(南嶽), 중사(中祀)로 하였고, 고려와 본조(本朝)에서도 모두 그대로 따라 중사(中祀)로 하여서, 봄ㆍ가을에 향ㆍ축(香祝)을 내리어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금성산(錦城山)은 나주(羅州)에 있는데, 제례(祭例)는 지리산과 같다. 무등산(無等山)은 【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 한다.】무진(武珍)에 있는데, 풍후하고 높고 커서, 신라에서는 소사(小祀)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나라 제사[國祭]를 지냈고, 본조(本朝)에서는 주(州)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천관산(天冠山)은 장흥(長興)에 있는데, 높고 험하고 풍후하여, 가끔 서기(瑞氣)가 흰 연기같이 하늘을 찔러서, 사람들이 자못 이상히 여기며, 제례는 무등산과 같다. 월출산(月出山)은 【일명 월내악(月柰岳)이라 한다.】 영암(靈岩)에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층층이 치솟아 섰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두 길이 넘으며, 곁에 한 구멍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하며, 그 구멍을 따라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만하고,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패어서 물이 담기기를 동이같이 된 것이 아홉이므로, 구정봉(九井峯)이라 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속설에 전하기를,“아홉 용[九龍]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움직이는 돌이 있는데, 홀로 층바위 위에 서서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며, 서쪽으로는 산골에 연하고, 동쪽으로는 밑없는 구렁에 임하였는데, 한 사람이 흔들면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이 같은 바위가 또 둘이 있었다. 상산(裳山)은 무주(茂朱)에 있는데, 사면(四面)이 벽처럼 서서 층층히 끊어져 사람의 치마처럼 되었으므로, 상산이라 한다. 옛사람이 험한 것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는데, 겨우 두 길이 있어서 올라 다니며, 그 가운데는 평탄하고 넓으며, 샘물이 사방에서 나와 합하여 큰 내가 되어 동쪽 구렁으로 흘러 들어간다. 변산(邊山)은 【일명 영주산(瀛洲山)이라 한다.】 부안(扶安)에 있는데, 여러 겹으로 높고 크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고 으늑하며, 전함(戰艦)의 재목이 많이 이곳에서 난다. 마이산(馬耳山)은 진안(鎭安)에 있는데,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동서로 마주 서서 모양이 깎아 세운 듯하며,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꼭대기에 나무가 울창하며, 속설에 전하기를, “동쪽산 꼭대기에 작은 못이 있다.” 하나, 바라만 보일 뿐이요, 올라갈 수는 없다. 우리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임금이 산 아래에 행차(行次)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대천(大川)은 남포진(南浦津)이 나주(羅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담양(潭陽) 추월산(秋月山)의 물이 창평현(昌平縣)을 지나 무진(茂珍=광주)의 북쪽으로 들어가 창평현(昌平縣)의 남쪽 물과 합하고, 또 무진성(茂珍城) 서쪽 물과 어울려 서쪽으로 흐르고, 그 하나는 장성(長城) 위령(葦嶺)의 물이 진원현(珍原縣) 서쪽과 나주 북쪽 경계를 지나 옛 내상성(內廂城) 남쪽을 거쳐서 생압진(生鴨津)에 이르러 무진 북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나주의 동쪽을 지나고, 그 하나는 능성(綾城) 쌍봉(雙峯)의 물이 남평현(南平縣) 북쪽을 지나 또 나주의 동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남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흘러서 남포진(南浦津)이 되어 나룻배로 사람을 건너게 되고, 무안현(務安縣) 동쪽에 이르러 대굴포(大堀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흘러서 영암군(靈岩郡) 운적산(雲積山)의 기슭을 지나 목포(木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하도(下道)의 조운(漕運)이 이곳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른다. 잔수진(潺水津)은 구례(求禮)에 있는데, 그 수원이 2가 있으니, 그 하나는 진안(鎭安) 중대산(中臺山)의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임실(任實)ㆍ순창(淳昌)을 지나 돌아서 동쪽으로 흘러 남원 남쪽 경계에 이르러 순자진(鶉子津)이 되며, 그 하나는 지리산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남원을 지나 순자진으로 들어가서, 그 하류가 압록진(鴨綠津)이 되며, 또 보성 정자천(寶城亭子川)의 물이 복성(福城) 옛 현(縣)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낙수진(洛水津)이 되고, 동북쪽으로 흘러 옛 곡성(谷城)을 지나 압록진으로 들어가서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 남쪽과 순천(順天) 북쪽 경계에 이르러 잔수진이 되고, 지리산 남쪽 기슭을 지나서 경상도 진주(晉州)의 옛 임내(任內) 화개현(花開縣) 서쪽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현(光陽縣)의 남쪽을 지나 섬진(蟾津)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신창진(新倉津)은 전주(全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부(府)의 남쪽 여현(礪峴)의 물이 성(城) 남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흘러 부(府)의 서남쪽 모산(母山) 여러 골짜기의 물을 합하고, 삼례역(蔘禮驛) 남쪽에 이르러 또 고산(高山)과 운제(雲梯)의 물과 어울려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回浦)가 되고, 비간장진(飛艮藏津)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이성(利城)의 옛 성(城) 북쪽에 이르러 신창진(新倉津)이 되는데, 나룻배가 있으며, 서쪽으로 흘러 만경(萬頃)과 임피(臨陂)를 지나 옥구(沃溝)에 이르러 고사포(古沙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진(東津)은 부안현(扶安縣)에 있는데, 태인(泰仁)과 정읍(井邑) 두 현(縣)의 물이 김제(金堤) 벽골(碧骨)의 물과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흥덕(興德) 동쪽에 이르러 고부(古阜) 눌제(訥堤)의 물과 어울려 동진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므로 다리를 놓아 행인을 다니게 하고, 만경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호수[戶]는 2만 4천 73호요, 인구[口]는 9만 4천 2백 48명이다.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천 1백 67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천 4백 24명이요, 기선군(騎船軍)이 1만 1천 7백 93명이다.간전(墾田)이 27만 7천 5백 88결(結)이다. 【논이 10분의 4이다.】 그 부세(賦稅)는 볍쌀 【찹쌀ㆍ멥쌀.】 ㆍ콩 【누렁콩ㆍ팥ㆍ녹두.】 ㆍ밀[小麥]ㆍ참깨[芝麻]ㆍ차조기씨[蘇子]ㆍ모시[苧布]요, 그 공물(貢物)은 꿀ㆍ밀[黃蠟]ㆍ범가죽[虎皮]ㆍ표범가죽[豹皮]ㆍ곰가죽ㆍ쇠가죽ㆍ말가죽ㆍ이긴 사슴가죽[熟鹿皮]ㆍ이긴 노루가죽[熟獐皮]ㆍ여우가죽ㆍ삵괭이가죽ㆍ잘[山獺皮]ㆍ수달가죽[水獺皮]ㆍ활줄[弓絃]ㆍ표범꼬리[豹尾]ㆍ여우꼬리[狐尾]ㆍ족제비털[黃毛]ㆍ사슴ㆍ돼지ㆍ토끼ㆍ산돼지ㆍ말린 사슴ㆍ말린 노루ㆍ말린 돼지ㆍ정향(丁香)ㆍ포(脯)ㆍ사슴꼬리[鹿尾]ㆍ돼지털ㆍ쇠뿔ㆍ녹각(鹿角)ㆍ갖풀[阿膠]ㆍ힘줄[筋]ㆍ잡깃[雜羽]ㆍ가뢰[斑猫]ㆍ대모(玳瑁)ㆍ고니[天鵝]ㆍ상어ㆍ말린 숭어ㆍ전복ㆍ생복[生鮑]ㆍ말린 홍합ㆍ낙지ㆍ굴ㆍ감합(甘蛤)ㆍ대합조개ㆍ은어ㆍ붉은 큰새우ㆍ인포(引鮑)ㆍ조포(條鮑)ㆍ오징어ㆍ옥둥어[玉頭魚]ㆍ다시마ㆍ부레ㆍ칠(漆)ㆍ겨자ㆍ황밤[黃栗]ㆍ대추ㆍ곶감ㆍ연감[紅柿子]ㆍ모과ㆍ석류ㆍ배[梨]ㆍ개암ㆍ가시연밥[芡仁]ㆍ유자(柚子)ㆍ감자나무열매ㆍ비자[榧子]ㆍ유감(乳柑)ㆍ동정귤(洞庭橘)ㆍ금귤(金橘)ㆍ푸른귤[靑橘]ㆍ산귤(山橘)ㆍ마름[菱仁]ㆍ분곽(粉藿)ㆍ상곽(常藿)ㆍ올멱[早藿]ㆍ해모(海毛)ㆍ우무ㆍ해각(海角)ㆍ황각(黃角)ㆍ매산이(莓山伊)ㆍ김[海衣]ㆍ감태(甘笞)ㆍ오해자(烏海子)ㆍ송이ㆍ석이ㆍ느타리ㆍ표고ㆍ새앙ㆍ고사리ㆍ지초ㆍ회화나무꽃ㆍ치자ㆍ작설차[雀舌茶]ㆍ송화(松花)ㆍ소나무그을음[松煙]ㆍ송진[松脂]ㆍ목화ㆍ모시ㆍ삼[麻]ㆍ삼노ㆍ각색 종이 【표전지(表箋紙)ㆍ자문지(咨文紙)ㆍ부본단자지(副本單子紙)ㆍ주본지(奏本紙)ㆍ피봉지(皮封紙)ㆍ서계지(書契紙)ㆍ축문지(祝文紙)ㆍ표지(表紙)ㆍ도련지(擣鍊紙)ㆍ중폭지(中幅紙)ㆍ상표지(常表紙)ㆍ갑의지(甲衣紙)ㆍ안지(眼紙)ㆍ세화지(歲畫紙)ㆍ백주지(白奏紙)ㆍ화약지(火藥紙)ㆍ장지(狀紙)ㆍ상주지(常奏紙)ㆍ유둔지(油芚紙)ㆍ유둔(油芚).】 ㆍ자리[席] 【별무늬돗자리[別紋踏席]ㆍ보통무늬돗자리[常紋踏席]ㆍ흰무늬돗자리[白紋席]ㆍ왕골 자리[草席].】 ㆍ대껍질방석[竹皮方席]ㆍ가는 대[篠]ㆍ오죽(烏竹)ㆍ화살대[箭竹]ㆍ바닷대[海竹]ㆍ등상자[土藤箱子]ㆍ대껍질[竹皮]ㆍ말린 죽순[乾筍]ㆍ자기(磁器)ㆍ나무그릇[木器]ㆍ버들고리[柳器]이다.약재(藥材)는 우황(牛黃)ㆍ쇠쓸개[牛膽]ㆍ범의 뼈[虎骨]ㆍ고슴도치가죽[蝟皮]ㆍ곰쓸개[熊膽]ㆍ녹용ㆍ녹각상(鹿角霜)ㆍ토끼머리[兎頭]ㆍ녹각(鹿角)ㆍ담비쓸개[獺膽]ㆍ산양이뿔[羚羊角]ㆍ도아조기름[島阿鳥油]ㆍ두꺼비[蟾蛛]ㆍ뽕나무벌레[桑螵蛸]ㆍ자라껍데기[鼈甲]ㆍ오징어뼈[烏魚骨]ㆍ말린 잉어[乾鯉]ㆍ잉어쓸개[鯉膽]ㆍ지네[蜈蚣]ㆍ등에[蝱蟲]ㆍ매미허물[蟬脫皮]ㆍ거북껍데기[龜甲]ㆍ결명초[石決明]ㆍ인삼(人蔘)ㆍ영릉향(零陵香)ㆍ곽향(藿香)ㆍ박상(舶上)ㆍ회향(茴香)ㆍ가시연밥[鷄頭實]ㆍ연꽃[蓮花蘂]ㆍ겨우살이꽃[金銀花]ㆍ궁궁이[芎藭]ㆍ나팔꽃씨ㆍ으름덩굴[木通]ㆍ호라비좆뿌리[天門冬]ㆍ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ㆍ패랭이꽃이삭[瞿麥穗]ㆍ수자해좆뿌리[天麻]ㆍ택사(澤瀉)ㆍ새삼씨[免綠子]ㆍ탱알[紫莞]ㆍ탱알뿌리ㆍ연밥[蓮子]ㆍ회초미뿌리[貫衆]ㆍ파고지(破古紙)ㆍ삽주뿌리[蒼朮]ㆍ쪽[藍]ㆍ칠[漆]ㆍ감제뿌리[虎杖根]ㆍ당귀(當歸)ㆍ하국[旋覆花]ㆍ하눌타리[括婁]ㆍ작약(芍藥)ㆍ끼무릇뿌리[半夏]ㆍ부들꽃[蒲黃]ㆍ끼절가리뿌리[升麻]ㆍ도라지[桔梗]ㆍ꽃창포[馬藺花]ㆍ족두리풀뿌리[細辛]ㆍ칡꽃[葛花]ㆍ버들옷[大戟]ㆍ검화뿌리껍질[白蘇皮]ㆍ두여머조자기[天南星]ㆍ쇠무릎지기[牛膝]ㆍ범부채[射干]ㆍ쓴너삼뿌리[苦蔘]ㆍ구리때뿌리[白芷]ㆍ사양채뿌리[前胡]ㆍ바곳[草烏頭]ㆍ계소(鷄蘇)ㆍ병풍나물뿌리[防風]ㆍ숭나물[蒿本]ㆍ자리공뿌리[商陸]ㆍ다시마[昆布]ㆍ흰띠[芧香]ㆍ겨우살이덩굴[忍冬草]ㆍ아기풀[遠志]ㆍ갈뿌리[蘆根]ㆍ박새[莒蘆]ㆍ암눈바앗씨[蔚子]ㆍ진득찰[稀簽]ㆍ꽈리[酸醬]ㆍ검산풀뿌리[續斷]ㆍ할미씨깨비[白頭翁]ㆍ향부자(香附子)ㆍ심황[鬱金]ㆍ수자해좆씨[赤前子]ㆍ난향[蘭香]ㆍ지치[紫草]ㆍ현삼(玄蔘)ㆍ멧미나리[柴胡]ㆍ매자기뿌리[京三稜]ㆍ흰바곳[白附子]ㆍ등대풀싹[澤漆]ㆍ가위톱[白歛]ㆍ대왕풀[白芨]ㆍ오미자(五味子)ㆍ창이(蒼耳)ㆍ외나물뿌리[地楡]ㆍ창포(菖蒲)ㆍ자주연꽃[紫荷蕖]ㆍ개구리밥[水萍]ㆍ감국화(甘菊花)ㆍ더위지기[茵陳]ㆍ절국대[漏蘆]ㆍ수뤼나물[葳靈仙]ㆍ영생이[薄荷]ㆍ속수자[續隨子]ㆍ꼭두서니뿌리[茜草根]ㆍ두루미냉이씨[葶子]ㆍ단너삼[黃耆]ㆍ순비기나무열매[蔓荊子]ㆍ쥐방울[馬兜苓]ㆍ게로기뿌리[薺苨]ㆍ항가새[大薊草]ㆍ조방가새[小薊草]ㆍ사하(蓑荷)ㆍ파초ㆍ산해박[徐長卿]ㆍ익관초(益貫草)ㆍ초결명씨[決明子]ㆍ백작약(白芍藥)ㆍ모시잎[苧葉]ㆍ석골풀[石]ㆍ골풀[草]ㆍ말오줌나무[蒴藋]ㆍ마뿌리[山藥]ㆍ두룹뿌리[獨活]ㆍ속수자[蜀有子]ㆍ소태나무열매[川練子]ㆍ석류껍질[石榴皮]ㆍ흰매화[白梅]ㆍ매화열매[烏梅]ㆍ탱자껍데기[枳殼]ㆍ괴좆나무열매[枸杞子]ㆍ흰매화열매[鹽梅實]ㆍ복령(茯苓)ㆍ모란껍데기[牧丹皮]ㆍ닥나무열매[楮實]ㆍ솜대속껍질[竹茹]ㆍ괴좆나무뿌리껍질[地骨皮]ㆍ죽력(竹瀝)ㆍ황경나무껍데기[黃蘗皮]ㆍ조피나무열매[川椒]ㆍ백복령(白茯苓)ㆍ호도(胡桃)ㆍ오갈피[五加皮]ㆍ솜대잎[淡竹葉]ㆍ철쭉꽃[躑躅花]ㆍ쥐엄나무열매[皀莢]ㆍ쥐엄나무가시[皀角刺]ㆍ산이스랏씨[郁李仁]ㆍ말린 모과[乾木瓜]ㆍ살구씨[杏仁]ㆍ오배자(五倍子)ㆍ복숭아씨[桃仁]ㆍ삿갓나물[蚤休]ㆍ측백나무잎[側栢葉]ㆍ아가위[棠]ㆍ배[梨]ㆍ잣[松子仁]ㆍ묵은 귤껍질[陳皮]ㆍ엄나무껍질[海桐皮]ㆍ푸른 귤껍질[靑皮]ㆍ후박(厚朴)ㆍ두충(杜沖)ㆍ솔씨[松實]ㆍ팔각(八角)ㆍ복신(茯神)이다.심는 약[種藥]은 생지황(生地黃)ㆍ장군풀[大黃]ㆍ건강(乾薑)ㆍ백변두(白萹豆)ㆍ검은 변두[黑萹豆]ㆍ우엉[惡實]ㆍ심황(深黃)ㆍ소야기[香薷]이었다.조운창[漕倉]이 2이니, 영산창(榮山倉)이 나주(羅州) 목포(木浦)에 있고, 【나주ㆍ순천(順天)ㆍ장흥(長興)ㆍ담양(潭陽)ㆍ낙안(樂安)ㆍ보성(寶城)ㆍ해진(海珍)ㆍ영암(靈岩)ㆍ영광(靈光)ㆍ무진(茂珍)ㆍ강진(康津)ㆍ고흥(高興)ㆍ광양(光陽)ㆍ능성(綾城)ㆍ남평(南平)ㆍ화순(和順)ㆍ동복(同福)ㆍ곡성(谷城)ㆍ옥과(玉果)ㆍ창평(昌平)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ㆍ흥덕(興德)ㆍ무장(茂長)ㆍ함평(咸平)ㆍ무안(務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덕성창(德成倉)이 함열현(咸悅縣) 서피포(西皮浦)에 있다. 【함열ㆍ전주(全州)ㆍ남원(南原)ㆍ익산(益山)ㆍ고부(古阜)ㆍ김제(金堤)ㆍ금산(錦山)ㆍ진산(珍山)ㆍ순창(淳昌)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ㆍ만경(萬頃)ㆍ부안(扶安)ㆍ정읍(井邑)ㆍ금구(金溝)ㆍ태인(泰仁)ㆍ임실(任實)ㆍ구례(求禮)ㆍ운봉(雲峯)ㆍ장수(長水)ㆍ진안(鎭安)ㆍ용담(龍潭)ㆍ무주(茂朱)ㆍ고산(高山)ㆍ여산(礪山)ㆍ용안(龍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병마 도절제사 영(兵馬都節制使營)이 강진현(康津縣)에 있고, 【정군(正軍)이 4백 98명, 수성군(守城軍)이 51명, 조역군(助役軍)이 1백 63명, 장인(匠人)이 1백 41명이다.】 진(鎭)이 4이니, 옥구(沃溝)ㆍ부안(扶安)ㆍ무장(茂長)ㆍ조양(兆陽)이요, 【정군이 각각 3백명이다.】 수군 처치사 영(水軍處置使營)이 무안현(務安縣) 대굴포(大堀浦)에 있고, 【대선(大船) 8척, 중선(中船) 16척, 군사 1천 8백 95명, 뱃사공[梢工] 21명을 거느린다.】 좌도 도만호 선박처(左道都萬戶船泊處)가 보성군(寶城郡) 동쪽 여도량(呂島梁)에 있는데, 【중선 6척, 맹선(孟船) 12척과 군사 1천 12명과 뱃사공 19명을 거느린다.】 관내의 만호(萬戶)가 8이니, 내례(內禮)가 순천부(順天府) 남쪽 며포(旀浦)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別船) 6척과 군사 7백 66명과 뱃사공 6명을 거느린다.】 돌산(突山)이 순천부 남쪽 용문포(龍門浦)에 있으며, 【중선 8척과 군사 5백 1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축두(築頭)가 고흥현(高興縣) 남쪽 고흥포(高興浦)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5백 1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녹도(鹿島)가 장흥부(長興府) 북쪽 녹도량(鹿島梁)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8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회령포(會寧浦)가 장흥부 남쪽 주포(周浦)에 있으며,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7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마도(馬島)가 강진현(康津縣) 남쪽 원포(垣浦)에 있으며, 【중선 8척과 군사 5백 1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달량(達梁)이 영암군(靈岩郡) 남쪽에 있으며, 【중선 7척, 맹선(孟船) 2척과 군사 5백 1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어란(於蘭)이 해진군(海珍郡) 남쪽 삼촌포(三寸浦)에 있다. 【중선 4척과 군사 4백 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우도 도만호 선박처(右道都萬戶船泊處)는 함평현(咸平縣) 서쪽 원관(垣串)에 있는데, 【중선 8척, 별선 10척과 군사 1천 55명과 뱃사공 9명을 거느린다.】 관내 만호(萬戶)가 5이니, 목포(木浦)가 무안현(務安縣) 남쪽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다경포(多慶浦)가 무안현 서쪽 와포(瓦浦)에 있으며,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7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법성포(法聖浦)가 영광군(靈光郡) 북쪽에 있으며, 【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금모포(黔毛浦)가 부안현(扶安縣) 남쪽 웅연(熊淵)에 있으며,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55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군산(群山)이 옥구현(沃溝縣) 북쪽 진포(鎭浦)에 있다. 【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61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감목관(監牧官)이 3인이요, 【도(道)안에 1인이요, 제주(濟州)에 2인이다.】 역승(驛丞)이 7인이니, 창활도(昌活道)의 관할 역(驛)이 11이요, 【잔수(潺水)ㆍ갈담(葛潭)ㆍ오수(獒樹)ㆍ은령(銀嶺)ㆍ통도(通道)ㆍ인월(引月)ㆍ익신(益申)ㆍ섬거(蟾居)ㆍ양률(良栗)ㆍ낙수(洛水)ㆍ지신(知申).】 앵곡도(鶯谷道)의 관할 역이 5이요, 【거산(居山)ㆍ천원(川原)ㆍ부흥(扶興)ㆍ내재(內才)ㆍ영원(瀛原).】 제원도(濟原道)의 관할 역이 2이요, 【달계(達溪)ㆍ소천(所川).】 벽사도(碧沙道)의 관할역이 9이요, 【파청(波淸)ㆍ진원(鎭原)ㆍ통로(通路)ㆍ낙신(樂新)ㆍ영보(永保)ㆍ별진(別珍)ㆍ녹산(祿山)ㆍ양강(陽江)ㆍ가신(可申).】 삼례도(參禮道)의 관할 역이 6이요, 【반석(半石)ㆍ양재(良才)ㆍ오원(烏原)ㆍ재곡(才谷)ㆍ소안(蘇安)ㆍ옥포(玉包).】 청엄도(靑嚴道)의 관할 역이 9이요, 【단엄(丹嚴)ㆍ선엄(仙嚴)ㆍ신안(新安)ㆍ녹사(祿沙)ㆍ청송(靑松)ㆍ영신(永申)ㆍ청연(淸淵)ㆍ경신(慶新)ㆍ가리(街里).】 경양도(景陽道)의 관할 역이 8이다. 【덕기(德基)ㆍ가림(加林)ㆍ인물(人物)ㆍ창신(昌新)ㆍ대부(大富)ㆍ금부(黔富)ㆍ오림(烏林)ㆍ광리(廣里).】 【원전】 5 집 654 면[주-D001] 영주(瀛州) : 고부.[주-D002] 순주(淳州) : 순창.[주-D003] 마주(馬州) : 옥구.[주-D004] 정주(靜州) : 영광.[주-D005] 승주(昇州) : 순천.[주-D006] 패주(貝州) : 보성.[주-D007] 담주(潭州) : 담양.[주-D008] 낭주(朗州) : 영암.[주-D009] 곤남(昆南) : 곤양.[주-D010] 산음(山陰) : 산청.[주-D011] 태을(太乙) : 옥황상제.[주-D012] 무진(武珍) : 광주.[주-D013] 남포진(南浦津) : 영산강.[주-D014] 무진(茂珍) : 광주.[주-D015] 진원현(珍原縣) : 장성.[주-D016] 능성(綾城) : 능주.[주-D017] 잔수진(潺水津) : 섬진강.[주-D018] 보성 정자천(寶城亭子川) : 보성강.[주-D019] 복성(福城) : 보성 복내면.[주-D020] 신창진(新倉津) : 만경강.[주-D021] 이성(利城) : 전주 땅.[주-D022] 동진(東津) : 동진강.[주-D023] 조양(兆陽) : 고창.[주-D024] 해진군(海珍郡) : 해남.
    2021-02-02 | NO.44
  • 형조에서 살인한 조의의 교형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형조에서 살인한 조의의 교형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경술(1430) 12월 6일(임신)형조에서 아뢰기를,“무진(茂珍=광주) 사람 조의(曹義)가 싸우다가 백성 김실을 죽였사오니, 율(律)이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하니, 명하여 1등을 감하였다.【원전】 3 집 276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2021-02-02 | NO.43
  • 형조에서 김가개를 찔러 죽인 장연수의 교형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형조에서 김가개를 찔러 죽인 장연수의 교형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경술(1430) 8월 29일(정유)    형조에서 아뢰기를,“광주(光州) 사람 장연수(張延壽)가 창평(昌平) 사람 김가개(金加介)를 찔러 죽였사온데, 율에 의하면 교형(絞刑)에 해당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3 집 257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2021-02-02 | NO.42
  • 병조에서 순천부에 군정을 더 붙여서 방어할 것 등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병조에서 순천부에 군정을 더 붙여서 방어할 것 등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경술(1430) 6월 23일(임진)       병조에서 아뢰기를,“전라도 고흥진(高興鎭)에서 경상도 사천진(泗川鎭)까지의 거리가 8식(息)이나, 두진의 중간에 섬진강이 있고, 그 강 어구의 좌우에는 경상도 평산포(平山浦)와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내례량(內禮梁) 등의 곳에, 병선(兵船)이 서로 바라볼 만한 땅에 정박하고 있으므로, 왜선(倭船) 한두 척 쯤으로는 진실로 들어와서 도적질하기가 어려우나, 만일 혹시 대거(大擧)하여 들어와서 병선을 막아 끊으면, 고흥진의 군사가 반드시 때에 다달아 응변(應變)하지 못할 것인즉, 순천부에 새로 진(鎭)을 설치할 필요가 없고, 충청도 비인현(庇仁縣)의 예에 따라 그전대로 본부(本府) 수성군(守城軍)을 33명으로 하여 군관(軍官)을 적당히 늘이고, 각 고을에 거주하는 신백정(新白丁)과 한산인(閑散人) 등을 뽑아서 번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소서. 만일 적변(賊變)이 있더라도 고흥진의 군사가 도달하지 못하는 동안은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경차관(敬差官) 송인산(宋仁山)이 가진 바 문적을 상고하건대, 삼도(三道) 각 고을의 선군을 이리저리 옮겨서 소속을 정하는 데 길의 수[息數]는, 순천에서 평산포(平山浦)까지 5식(息) 9리(里), 광양(光陽)에서 평산포까지 4식 15리, 구례(求禮)에서 평산포까지 4식 8리인데, 각도의 깊고 먼 산골[山郡]에 선군이 나아가서 번들고 지키는 곳은 4, 5식의 노정이 될 뿐 아니라, 혹 6, 7식, 혹 12, 3식에 이르어, 만일 순천ㆍ광양ㆍ구례 등의 선군으로서 평산포에 나아가게 한다면, 그 길의 거리가 다른 예(例)에 비하여 그리 멀지 않지마는, 그러나 각 포(浦)의 병선의 다소나, 방어의 긴급하고 아니한 것을 분별하여, 옮겨 평산포에 정속(定屬)시키는 것의 편부(便否)를 그 도의 감사와 도절제사 및 처치사(處置使)로 하여금 방문하여 아뢰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여 시행할 것입니다. 또 장흥(長興)ㆍ강진(康津)ㆍ해진(海進)ㆍ영암(靈巖) 등 바닷가에서 깊숙이 들어간 지방은 북쪽으로 무진 고내상(茂珍古內廂)과의 거리가 4, 5식이고, 동쪽으로 고흥진(高興鎭)과의 거리가 5, 6식인데, 그 사이 바다에 연접한 곳은 거주민이 심히 많은즉, 만일 왜적의 변이 있게 되면 아침 저녁이 염려되므로, 이미 내상(內廂)을 강진으로 옮겼으니 진실로 방어에 있어 긴요한 곳인데,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강진은 바닷가 한 모퉁이에 있어서 드나들기가 어렵다.’고 하여, 무장(茂長) 및 수원동(燧院洞) 등지에 백성들을 수고롭게 옮기고자 함은 실로 합당치 못하오니 예전대로 두는 것이 어떠하오리까.”하니, 명하여 아뢴 대로 하되, 다만 순천부의 군정(軍丁)을 더 붙여서 방어하는 것은 의정부와 제조(諸曹)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순천부의 군정(軍丁)을 더 붙여서 방어함은 마땅히 병조에서 아뢴 대로 할 것이며, 군정은 한산인(閑散人) 및 각 관(官)의 일수(日守)나 서원(書員)ㆍ인리(人吏)ㆍ봉족(奉足) 등을 불러 모아서 더 붙이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3 집 242 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과학-지학(地學)[주-D001] 식(息) : 1식은 30리.
    2021-02-02 | NO.41
  • 전라도 감사가 노홍준ㆍ김전 등의 집을 헌 풍관과 아전 등의 처벌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전라도 감사가 노홍준ㆍ김전 등의 집을 헌 풍관과 아전 등의 처벌을 건의하다 - 세종 12년 경술(1430) 5월 21일(경신) 전라도 감사가 아뢰기를,“이젠 무진(茂珍=광주) 고을의 품관(品官)과 아전들이 노흥준(盧興俊)ㆍ김전(金專) 등의 집을 마음대로 헐고 강제로 그 고을에서 내쫓으며, 향교 생도들이 김전의 아들 숙장(淑章)과 중장(仲章)을 향교에서 내쫓은 사유(事由)를 국문하니, 품관과 아전들이 말하기를, ‘부민(部民)으로서 다만 그 수령(守令)을 고소한 자라 할지라도 오히려 고을에서 내쫓을 것이온데, 지금 노흥준과 김전 등은 모두 기부(妓夫)로서 악한 일을 서로 도와서 먼저 목사(牧使)가 기생을 간통했다고 고발한 것은 실로 난(亂)을 선동한 원인이 되었으니, 한갓 고을 풍속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또 심문할 즈음에 공초(供招)를 바르게 하니 아니하였으므로, 주(州)를 낮추어 군(郡)으로 만드는데 이르렀고, 감사ㆍ수령관(首領官)ㆍ행대(行臺)도 함께 죄를 입었기 때문에, 대소 인민(大小人民)들이 분하고, 미워해서, 회의(會議)를 하여 집을 헐고 고을에서 내쫓았으니, 진실로 공의(公議)에서 나왔다.’고 하며, 생도들은 말하기를, ‘김전은 오랫동안 그 지방에서 사는 부민으로서 흥준의 편이 되어 어지럽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학교는 풍속 교화의 근원인데 이 같은 사람의 아들과 더불어 안심하고 공학(共學)하여 더러움을 같이 할 수 없으므로, 의논하여 학교에서 내치자고 문서까지 꾸몄으나, 마침 숙장 등이 나주(羅州) 도회(都會)에 나갔으므로 즉시 내치지 못하였다.’고 하옵는데, 이제 자세히 조사하온즉, 본군의 품관과 아전들이 추국(推鞫)할 당초에는 흥준의 범한 일을 같은 말로 가리고 숨기다가, 사실이 드러나고 죄가 결정된 뒤에는 도리어 원수가 되어, 패를 지어 위엄을 부리고 제 마음대로 법 밖의 일을 행하여 집을 헐고 고을에서 내치며, 그 죄를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였으니, 국법을 두려워하니 않을 뿐 아니라, 마음이 간휼하여 그 버릇을 기르게 할 수 없사온즉, 청하건대, 위의 사람들은 법대로 죄를 다스리고, 헐은 집은 모두 도로 지어 주게 하옵소서.”하매, 의정부와 여러 조(曹)가 함께 의논하라고 명하였다.모두 아뢰기를,“김전과 그 아들을 고을에서 내쫓지 말도록 하옵소서.”하므로, 그대로 따르고, 인하여 품관과 아전들의 죄는 다스리지 말도록 하며, 헌 집도 도로 짓지 말라고 하였다.【원전】 3 집 238 면【분류】 사법-치안(治安) / 풍속-풍속(風俗)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2021-02-02 | NO.40
  •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지진이 발생하다 - 세종 12년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지진이 발생하다 - 세종 12년 경술(1430) 4월 17일(정해)   경상도 <중략> 전라도 남원(南原)ㆍ익산(益山)ㆍ남평(南平)ㆍ담양(潭陽)ㆍ보성(寶城)ㆍ동복(同福)ㆍ능성(綾城)ㆍ흥덕(興德)ㆍ고흥(高興)ㆍ강진(康津)ㆍ순천(順天)ㆍ장성(長城)ㆍ영암(靈巖)ㆍ고창(高敞)ㆍ무장(茂長)ㆍ나주(羅州)ㆍ정읍(井邑)ㆍ고산(高山)ㆍ태인(泰仁)ㆍ화순(和順)ㆍ낙안(樂安)ㆍ진원(珍原)ㆍ무주(茂朱)ㆍ창평(昌平)ㆍ금구(金溝)ㆍ전주(全州)ㆍ임실(任實)ㆍ용안(龍安)ㆍ고부(古阜)ㆍ순창(淳昌)ㆍ구례(求禮)ㆍ곡성(谷城)ㆍ옥과(玉果)ㆍ용담(龍潭)ㆍ무진(茂珍=광주)ㆍ광양(光陽)ㆍ운봉(雲峯)ㆍ부안(扶安)ㆍ장수(長水)ㆍ함열(咸悅)ㆍ진안(鎭安)ㆍ여산(礪山)ㆍ해진(海珍) 등 고을에 지진(地震)이 일었다.【원전】 3 집 232 면【분류】 과학-지학(地學)
    2021-02-02 | NO.39
  • 정길흥ㆍ이인손 등이 노흥준을 탄핵하여 이르다 - 세종 12년
    정길흥ㆍ이인손 등이 노흥준을 탄핵하여 이르다 - 세종 12년 경술(1430) 3월 26일(병인) 형조 정랑 정길흥(鄭吉興)과 감찰(監察) 이인손(李仁孫) 등이 광주(光州) 사람인 전 만호(萬戶)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시기하여 구타한 죄를 탄핵하여 아뢰기를,“보안(保安)이 무신년 봄에 반인(伴人) 오한(吳漢)을 시켜 흥준(興俊)의 기첩(妓妾) 소매(小梅)를 중매하여 간통했는데, 그 후 4월에 이르러 고을 사람인 전 사정(司正) 김전(金專)이 흥준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밤에 보안이 소매와 함께 방 안에 있더라.’고 하므로, 흥준이 뒤를 밟아 쫓아가 이르르니, 소매는 창을 넘어서 달아나는지라, 흥준이 뛰어 들어가서 보안의 옆구리와 볼기와 무릎을 두서너 번이나 걷어차고 나갔는데, 오한과 반인(伴人) 김유진(金有進)이 보안을 보니, 보안이 챈 곳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악인(惡人) 노흥준이 나를 욕보인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예 이 말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흥준이 소매를 결박하여 끌고 청사(廳事)에 나아가서 먼저 기생 영백주(詠栢舟)를 보고 말하기를, ‘어제 목사(牧使)가 소매와 함께 관방(官房)에 있기에, 내가 목사를 한 번 걷어찼노라. 목사가 이미 내첩을 간통하였으니 마땅히 이를 목사에게 주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다시 들어가서 때리려고 하니, 영백주(詠栢舟)가 억지로 말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부(士夫)의 의향(意向)이 아니며, 또 고을 풍속이 나쁘니 이와 같이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여, 흥준은 그제야 돌아갔습니다. 보안이 근무(勤務)를 마치고 관사(官舍)로 돌아오는 길에 소매의 집을 지나가니, 흥준이 거센 목소리로 꾸짖기를, ‘저것도 관원이냐. 얼굴이 도적과 같으니 내가 뼈를 꺾어 상하게[折傷]하리라.’ 하면서, 드디어 소매의 머리털을 자르고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그 출입을 금지하여, 저의 구실[供役]을 치르지 못하게 한 것이 4개월이 되었으므로, 보안은 어찌할 수 없이 그 이름을 기적(妓籍)에서 지워버렸던 것입니다. 이제 살피옵건대, 보안이 직소(職所)의 기생을 간통한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일이오나, 흥준은 부민(部民)으로서 저의 고을 원을 발로 차고 또 온갖 못할 말로 꾸짖었고, 또 다시 그가 앉은 곳까지 바로 들어가서 때리려고 하다가 기생의 말림으로 그쳤으며, 또 관기(官妓)를 제 마음대로 빼앗아 가서 여러 달 동안 구실[役]을 못하게 하였사오니, 그처럼 흉포(凶暴)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풍속을 더럽힌 것이 여기에 이르렀사온데, 오히려 사실을 묻는 관리를 모해(謀害)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감사(監司)와 전의 행대(行臺)에서 두 차례나 신문(訊問)하여 장 70대까지 때렸다.’고 하였으니 더욱 간악합니다. 다만 흥준이 4월부터 소매의 구실[役]을 그만두게 하고 제 집에 두었다가 8월에 이르러서 그 구실에 돌아오게 하였고, 보안은 7월 22일에 죽었사오니, 그 사이에 날짜의 상거가 먼데 흥준이 어찌하여 다시 시기하는 마음을 내어서 보안을 때려 죽게 하였겠습니까. 또 보안의 병구완하던 기생과 의원(醫員)들은 모두 말하기를, ‘이질(痢疾)로 죽었다.’고 하오니, 그것이 매맞아 죽게 된 것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보안의 아들 사봉(斯鳳)은 흥준이 저의 아버지를 때려서 상처를 입은 것을 모르지 않지마는 전혀 보복할 뜻이 없사오니,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청컨대, 이를 유사(攸司)에 내리어 죄를 다스려서 강상(綱常)을 바로잡게 하소서. 그리고 본도(本道)의 감사(監司) 한혜(韓惠)ㆍ도사(都事) 오치선(吳致善)ㆍ감찰(監察) 이안상(李安商) 등이 흥준이 보안을 걷어차고 때린 죄를 잘 조사하여 밝히지 못한 죄는 성상께서 재량(裁量)하셔서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명하여 형조에 내려 형률에 의거하게 하되, 다만 사봉(斯鳳)은 논죄(論罪)하지 말라고 하였다. 형조에서 아뢰기를,“흥준은 부민(部民)으로서 제 고을의 수령(守令)을 때리고 욕보였사오니, 무릇 수령을 고소(告訴)한 자도 오히려 곤장 1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내거늘, 이제 흥준이야 어찌 고소한 예(例)와 같이 논죄할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장 1백 대를 치고 먼 변방(邊方)의 군정으로 충원(充員)할 것이옵고, 선덕(宣德) 4년 5월의 수교(受敎)에는 ‘품관(品官)과 인민이 만약 은근히 부추겨서 고소하든지, 혹은 제가 스스로 고소하는 자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다면, 지관(知官) 이상이거든 칭호를 내리고, 현관(縣官)이거든 속현(屬縣)으로 강등(降等)시킨다.’고 하였는데, 흥준이 수령을 구타하고 모욕한 죄는 잇달아 고소한 죄보다 심하오니, 청컨대 광주(光州)의 관호(官號)를 강등시키소서. 김전(金專)은 수령의 과실을 폭로하였사오니 장 1백 대를 치고, 한혜(韓惠)ㆍ오치선(吳致善)ㆍ이안상(李安商) 등은 흥준의 범한 죄를 조사하여 밝히지 못하였사온바, 오치선은 수령관(首領官)이므로 장 80대를 치고, 한혜와 이안상은 장 70대를 치게 하소서.”하니 명하여 아뢴 바에 의하되 한혜ㆍ오치선ㆍ이안상은 다만 관직만 파면시키게 하고, 광주목(光州牧)을 강등하여 무진군(茂珍郡)으로 고치고, 계수관(界首官)을 장흥부(長興府)로 옮기라고 하니, 이후로는 품(品)과 관(官)이 같게 되었다. 흥준과 김전의 처자(妻子)를 본읍(本邑)에서 내쫓고 그 집을 헐고 그의 밭을 몰수(沒收)하게 하니, 임금이 명하여 김전의 처자는 내쫓지 말고 집과 전지(田地)도 몰수하지 말게 하였다.【원전】 3 집 226 면【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윤리(倫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2021-02-02 | NO.38
  • 광주 목사 신보안의 사인 심문 도중 용의자 오한이 옥중에서 자결하다 - 세종 12년
    광주 목사 신보안의 사인 심문 도중 용의자 오한이 옥중에서 자결하니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 세종 12년 경술(1430) 2월 10일(신사)       상참을 받고, 정사를 보았다.임금이 근시한 신하에게 이르기를,“감찰 이안상(李安商)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보안(辛保安)의 사인(死因)을 신문(訊問)하니, 보안(保安)의 반인(伴人) 오한(吳漢)이 말하기를, ‘아중(衙中)에 있다가 사람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가 보니, 고을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보안(保安)을 때려서 상처를 입혔는데 결국 죽었습니다.’ 하였다. 또 그 자세한 사연을 물으니, 오한(吳漢)이 숨기고 대답하기 않기에, 세 번이나 형장을 치며 신문(訊問)하여도 역시 고백하지 않았다. 다시 장은 치지 않고 물으니, 말하기를, ‘흥준(興俊)이 때려서 죽었습니다.’고만 하므로, 드디어 하옥시켜 두었는데, 오한이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 것이다. 고을 원이 피살당한 것은 고을 사람 다 같이 증오할 일이지만, 오한이 갑자기 목 매어 죽었으니 의심스러운 일이다. 헌사(憲司)에서는 벌써 공문(公文)을 보내어 다시 추문(推問)하도록 하였지만, 또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국문(鞫問)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모두들 말하기를,“반드시 형조의 낭관(郞官)을 보내야 될 일입니다.”하므로, 그대로 따랐다.【원전】 3 집 215 면【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사법-재판(裁判)
    2021-02-02 | NO.37
  • 김종서가 광주 목사 신보안과 기생 소매의 간통 사건의 조사를 건의하다 - 세종 11년
    김종서가 광주 목사 신보안과 기생 소매의 간통 사건의 조사를 건의하다 - 세종 11년 기유(1429) 11월 13일(을묘) 우부 대언 김종서(金宗瑞)가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신보안(辛保安)이 고을 기생 소매(小梅)와 간통하여, 그의 서방 전 호군 노흥준(盧興俊)이 그 기생을 결박하고, 보안을 능욕하였다고 지금 암행 찰방(暗行察訪) 윤형(尹炯)이 그 정유(情由)를 갖추어 보고해 왔습니다.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오라, 듣사온즉, 흥준이 질투 끝에 보안을 때려서 그 때문에 죽게 되었다 하는데, 그 처자도 역시 그 정상을 알고 있어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아마 보안이 장오죄(贓汚罪)를 범한 바 없지 않기 때문에 그 사실이 탄로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보복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사림(士林)들이 이를 듣고 개탄한 지가 이미 오래였는데, 이제 흥준을 국문하여 이미 그 단서를 잡았사오니, 마땅히 추구(推究)해 다스려서 중정(衆情)에 맞도록 하소서.”하니, 명하기를,“헌부에서 감찰(監察)을 파견하여 추국(推鞫)해서 보고하게 하라.”하여, 드디어 감찰 이안상(李安尙)을 보내었다.【원전】 3 집 205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윤리(倫理)[주-D001] 정유(情由) : 사유.
    2021-02-02 | NO.36
  •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서 제사드리는 것을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에 따를 것을 건의하다 - 세종 11년
    예조에서 전국의 영험한 곳에서 제사드리는 것을 국가에서 행하는 치제의 예에 따를 것을 건의하다 - 세종 11년 기유(1429) 11월 11일(계축) 예조에서 아뢰기를,“건의하는 자가 아뢰기를, ‘이 앞서 경외(京外)의 제향(祭享)에 영험(靈驗)한 곳을 혁파하여 제사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사오니, 원컨대, 이제부터 산천의 기암(奇巖)과 용혈(龍穴)과 사사(寺社) 등 영험한 곳에 제실(祭室)과 위판(位版)을 설치하고, 매양 4중월(仲月)의 길일(吉日)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예를 행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시어 ‘이를 논의하라.’ 하셨다.변계량(卞季良)이 아뢰기를, ‘이는 대개 주공(周公)이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곳에도 모두 질서 있게 제사한 뜻을 본받은 것이니, 진실로 이치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폐할 수 없는 곳만을 가려서 제사를 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명하시어 헌의(獻議)한 대로 따르도록 하셨으므로, 공경히 이에 좇아 각도에 이문(移文)하여 상고하오니, 지난 기축년에 다시 상정(詳定)할 때에, 사전(祀典)에 없앴던 것을 뒤에 수교(受敎)에 따라 소재관으로 하여금 아울러 춘추(春秋)로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그 제향의 물자(物資)로는 혹은 위전(位田)을 주기도 하고, 혹은 국고의 미곡을 쓰기도 하며, 혹은 그 고을에서 자비(自備)하기도 하고, 제품(祭品)에 있어서는 혹은 중사(中祀)의 예(例)에 따라 변(籩)ㆍ두(豆) 각각 10개를, 혹은 소사(小祀)의 예에 따라 변(籩)ㆍ두(豆) 각각 8개를, 혹은 각각 2개를 쓰기도 하니, 매우 고르지 않습니다. 청하옵건대, 그 영험 여부를 분별하지 말고, 영구히 혁파하였거나 제사드리는 장소를 모르는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가에서 행하는 악(岳)ㆍ독(瀆)ㆍ산(山)ㆍ천(川)의 제품(祭品)의 예(例)에 따라 국고의 미곡으로 치제하게 하고, 제사 뒤에 감사가 본조에 이문(移文)하는 것으로 항식(恆式)을 삼게 하소서. 유후사(留後司)의 개성 대정(開城大井)을 비롯하여 <중략> 전라 관내인 나주(羅州)의 앙암(仰巖)ㆍ용진(龍津), 담양(潭陽) 경내 원율(原栗)의 용진분소(龍津噴所), 장흥(長興)의 천관산(天冠山), 무안(務安)의 용진명소(龍津溟所), 강진(康津)의 완도(莞島), 영암(靈巖)의 월출산(月出山),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ㆍ병로지 용당(幷老只龍堂), 용담(龍潭)의 웅진분소(熊津噴所), 제주(濟州)의 한라산(漢拏山) <중략> 등이 그것입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3 집 204 면【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재정-국용(國用)[주-D001] 4중월(仲月) : 2월, 5월, 8월, 11월.
    2021-02-02 | NO.35
  • 예조에서 지방의 고려 태조의 진영 등을 개성 유후사로 옮길 것을 건의하다 - 세종 10년
    예조에서 지방의 고려 태조와 공신들의 진영 등을 개성 유후사로 옮길 것을 건의하다 - 세종 10년 무신(1428) 8월 1일(경진) 예조에서 계하기를,“충청도 천안군(天安郡)에 소장(所藏)한 고려 태조(太祖)의 진영(眞影), 문의현(文義縣)에 소장한 태조의 진영 및 쇠붙이를 부어 만든 상[鑄像], 공신(功臣)들의 영정(影幀), 전라도 나주(羅州)에 소장한 혜종(惠宗)의 진영 및 소상(塑像), 광주(光州)에 소장한 태조의 진영을 모두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옮겨서 각능(各陵) 곁에 묻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원전】 3 집 139 면【분류】 왕실-의식(儀式) / 예술-미술(美術) / 역사-전사(前史)
    2021-02-01 | NO.34
  • 대호군 이진이 상소한 전라도 신 관영의 지리적ㆍ군사적 단점에 대한 개선 방안 - 세종 9년
    대호군 이진이 상소한 전라도 신 관영의 지리적ㆍ군사적 단점에 대한 개선 방안 - 세종 9년 정미(1427) 5월 11일(무술) 대호군(大護軍) 이진(李蓁)이 상서하기를,“신 진(蓁)이 근일에 명령을 받잡고 강진(康津) 땅에 가서 읍성(邑城)을 쌓을 만한 곳을 보다가, 그 길에 전라도의 원수부(元帥府)가 전날의 도강현(道康縣)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조정에서 연해변을 위하여 불시의 걱정을 방비함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마는, 장흥(長興)ㆍ강진(康津)ㆍ해진(海珍) 세 고을은 바닷가이면서 내상(內廂)에 인접해 있어서 그 지세로는 믿음직하다 하겠으나, 그 지형으로 따져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 내상은 사방으로 통로가 좁고 험하여, 말을 타고도 짝지어 갈 수가 없고, 걸어서도 대오를 지어 갈 수가 없어서 출입하기가 곤란합니다. 혹시 왜구가 틈을 타서 갑자기 들어와 세 고을을 노략질한다면, 신이 걱정하기는 아군의 병력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나란히 대열을 지어 일제히 나갈 수가 없으니 어찌 임기응변으로 적군을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인접한 지역에서도 그러하온대, 더구나 서로 떨어져 있는 고을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성은이 널리 퍼져 있으매, 해구(海寇)들도 숨이 죽어 감히 침노하지 못하므로 변방이 걱정이 없게 되고, 백성들도 싸움을 모르게 되고 농업에 안정되어 노소가 모두 태평하게 지내니, 실로 우리 나라의 옛날에도 일찍이 없었던 태평 성대이옵니다. 그러하오나 태평할 때에는 난리를 생각하여야 되고 편안할 때는 위태함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오니, 변방을 수비하는 방책을 어찌 하루라도 강구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일 없는 때를 당하여 미리 성상께서 유념하셔야 하겠기로, 삼가 좁은 소견을 가지고 신구 관영(新舊官營)에 대한 편불편을 조목으로 나누어 아뢰오니, 거룩하신 재량으로 굽어살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신이 광주(光州)의 구영(舊營)을 보니, 형세의 훌륭함과 냇물의 유리함과 토지의 기름짐과 초목의 풍부함이 대장의 군영이 되기에 적당하고, 또한 남쪽 지방의 중앙으로서 통로들이 모두 평탄하여 실로 방어의 요충이 될 만하니, 이는 구영(舊營)의 편의한 첫째 조건이요, 군정(軍政)은 전마(戰馬)를 가꾸는 일이 선결 문제인데, 구영의 성밖은 사방이 편편하게 너르고, 큰 내가 둘러 흐르며, 호표(虎豹)의 작해나 도적의 걱정도 없어서 말을 기르기에 편리하기는 구영 같은 데가 없으니, 이는 그 편의한 둘째 조건이요, 구영은 성의 주변에 평원이 질펀한데 토양이 기름지고 지질이 비옥하여 비록 심한 가뭄을 만날지라도 물대기가 편리하여 흉년들 염려가 없으므로, 힘을 써서 경작하면 군량의 공급에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는 구영의 편의한 세째 조건이오니, 이 세 가지는 특히 그 대강만 든 것이옵고, 그밖의 편리는 이루 다 들 수 없사온대, 이제 도강(道康)의 내상(內廂)은 그렇지 아니하와, 궁벽한 산골에 붙어서 높은 산들에 눌려 있어 산에 올라 내려다 보면 성안의 형편을 환하게 알게 되고 화살로 내리 쏠 수가 있으니, 이는 그 편의하지 못한 첫째 조건이요, 지금 내상의 서편이 해진(海珍)과 영암(靈巖)에 인접된 산길이 험하고 좁아서 겨우 말 한마리를 돌릴 수 있을 정도이고, 동으로는 장흥(長興)에 이르기까지 벼랑길이 되어서 말을 쌍으로 몰고 갈 수 없는 곳이 20여 리나 되옵고, 북에는 높은 산이 있어서 사람이나 말이 감히 올라갈 수가 없게 되어 있고, 남으로는 강진(康津)에 연했는데 길이 몹시 꼬불꼬불해서 만일 급한 경보가 있어서 군사를 일으키거나 군중을 동원하려면 창졸간에 적군에게 달려가기가 어려우니 그 편의 하지 못한 둘째 조건이요, 산언덕과 골짜기 사이에 사방으로 말을 먹여 기를 만한 평원이 없어 그로 인하여 전쟁에 쓸 말들이 마굿간에만 들어박히어 나날이 여위어 가게 되니, 이는 그 편의하지 못한 세째 조건이요, 원수(元帥)의 관아가 멀리 남쪽 변방에 치우쳐 있어서 강진(康津)이 제일 가깝고, 장흥(長興)이 다음이며, 해진(海珍)ㆍ영암(靈巖)이 그 다음이온대, 장흥을 거쳐서 동으로 광양(光陽)을 가든지 순천(順天)을 가든지 하려면 두어 밤 자야만 도착하게 되고, 영암을 거쳐서 서쪽으로 큰 강을 건너고 높은 재를 넘어서 고창(高敞)과 부안(扶安)에 이르려면 3, 4일 길이 되며, 북으로 진포(鎭浦)의 변방인 용안(龍安)ㆍ옥구(沃溝)에 이르려면 꼬박 5일이 걸려야만 도착하게 되오니, 만일 급한 일이 있으면 제대로 시일을 대어 방어할 수가 없을 것이 뻔합니다. 이는 그 편의하지 못한 네째 조건이요, 내상은 군무(軍務)가 번잡하고 분주한 곳인데, 서쪽 북쪽 먼 고을의 아전들이 양식을 싸들고 공문서를 가지고서 달음질로 4, 5일을 쫓아와야 하니 아전들의 노고뿐 아니라 군사 일이 이 때문에 완만하게 되고, 수령들이 이 때문에 문책을 당하게 되니, 이는 그 편의하지 못한 다섯째 조건이요, 지금 원수부의 영역 내에서 종군(從軍)하는 사람들이 많이는 구영(舊營) 근처의 사람들로서 당번으로 교대하는데 추위와 더위를 불구하고 비와 바람을 무릅쓰면서 험한 길처에 뒹굴고 진흙 바닥에 시달리어 사람과 말들의 고생이 진실로 말할 수 없으며, 또 신영(新營) 부근은 파발과 우편이 엉성하여 수륙 양면의 처치사와 절제사들이 변방 경계와 통신 연락이며, 군대 지휘와 마필 징발에 그 노고를 이기지 못함이 또한 딱하고 가엾습니다. 이것이 그 편의하지 못한 여섯째 조건이요, 바다로 온 왜구가 만일 속임 술책으로 진포(鎭浦) 등지에 형체를 나타내어 천천히 침범하기를 꾀하면서 머뭇머뭇하고 나오지 않다가, 우리 원수[摠戎]의 군대가 겨우 그들의 있는 곳에 이르게 될 무렵을 기다려서, 적병이 기마대로써 밤중에 빠른 배를 타고 갑자기 도강(道康)으로 들어오면, 신이 두려워하건대 원수[摠戎]는 미처 돌아올 새가 없고, 성을 지키던 고단(孤單)한 병졸들이 형세가 약하고 힘이 떨어져서 마침내 화를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니, 만일 그렇게 되면 성중에 있는 병기나 군량은 도적들의 차지가 되어버리어 후회 막급일 것이니, 이는 그 편의하지 못한 일곱째 조건입니다. 신구영(新舊營)의 편불편이 대개 이러하옵고, 또한 신이 근일에 명을 받잡고 역마(驛馬)로 달려서 겨우 여산(礪山) 길처에 접어들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경차관(敬差官)이 일부러 내려오는 것은 필시 원수부 군영에 관한 일인가 보다.’ 하고, 강진(康津)에 이르러서는 어리석은 병졸들도 모두 말하기를, ‘이 행차는 필시 군영 옮기는 일일 것이라,’ 하니, 그들이 구영(舊營)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오랠수록 더욱 간절함이 이러합니다. 다만 구영이 광주(光州) 지경에 있어서 광주에서는 군영을 제일 싫어한 끝에, 일찍이 감사에게 아뢰어 그 청사를 헐어서 그 재목과 기와를 이웃 고을과 나누어 쓰고, 오직 석성(石城)과 누각만은 온전하게 전날과 같이 있습니다. 만일 영강(永康)의 성 쌓는 공력을 옮겨서 청사[廨舍]를 옛날 터에다 짓는다면 힘이 덜 들고 성공하기가 빠를 것이옵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말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몰라서 말하지 못함은 지혜의 부족으로 돌릴 뿐이지마는,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충성치 못하온 것이옵기로 이에 변변치 못한 소견을 베풀어서 감히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특히 허락하시는 분부를 내리시어 원수부를 구영(舊營)에 복귀시킴으로써 군사의 기운을 돋우어 주고, 지방의 민정에 순응하여 도강(道康)에 있는 성으로는 강진(康津)의 진(鎭)을 만들고, 강진(康津)에 성 쌓는 힘으로 청사를 구영에다 지으면, 옛 고을의 좋은 점을 이용하고 성 쌓는 노역도 절약될 것이오며, 고쳐 지키는 방비를 엄중히 하면 미래의 걱정도 없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신의 졸렬한 계책을 굽어 살피시어 신의 변방 수비하는 좁은 소견을 채택하신다면 군과 민에 다행이요, 국가에 다행이 되겠나이다.”하였다.【원전】 3 집 72 면【분류】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관방(關防) / 정론(政論) / 외교(外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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