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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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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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신년에 종정한 209명에게 포장과 증직을 내리다 - 정조 12년
    무신년에 종정한 송창기ㆍ김차동ㆍ김진희 등 209명에게 포장과 증직을 내리다 - 정조 12년 무신(1788) 3월 23일(을유) 오부(五部)와 제도에 무신년에 종정(從征)한 장사(將士)로서 생존한 사람과, 의를 지켜 순국(殉國)하였으면서도 아직까지 공적이 포양(褒揚)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아뢰게 하였다.<중략>       전라도 관찰사 심이지(沈頤之)가 장계하기를,“광주(光州)의 민제장(閔濟章)ㆍ민제만(閔濟萬) 형제는 안죽(安竹) 전투에서 가장 기공(奇功)이 드러났는데, 그 대략이 감란록(戡亂錄)에 실려 있습니다. 전주 좌수(全州座首) 오진형(吳震亨)은 조정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고을 수령들을 힘껏 도와 적에게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적 효(孝)에게 잡혀 결박되었고, 적 현(顯)이 삼천(三川)에 당도하자 성문을 지켜 한 고을을 보존하였습니다.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한 이로는 첨정(僉正) 유일성(柳一星) 등 15인이 있습니다. 일성이 용맹을 떨쳐 적추(賊酋) 존서(存緖)를 함양(咸陽) 아루(衙樓)에서 잡았던 것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습니다.”하니, 대신과 의논해서 민제장ㆍ오진형은 그 자손을 녹용하고, 유일성은 충장위 장(忠壯衛將)에 차임(差任)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첩지를 주고, 타도의 예에 따라 음악을 베풀어 음식을 대접하라고 명하였다. 함경도 관찰사 이숭호(李崇祜)가 종군했던 사람으로 생존해 있는 무산(茂山) 사노(寺奴) 정갑(丁甲)의 종정(從征)을 녹훈(錄勳)할 것으로 아뢰니, 가자(加資)해 면천(免賤)시키라고 명하였다. 【원전】 45 집 699 면【분류】 왕실(王室) / 인사(人事)
    2021-04-23 | NO.362
  • 호남의 도신이 진구를 끝내고 장문하다 - 정조 6년
    호남의 도신이 진구를 끝내고 장문하다 - 정조 6년 임인(1782) 5월 24일(경신)        호남(湖南)에서 진구(賑救)를 설행했는데, 정월(正月)부터 설행하기 시작해서 이 때에 이르러 진구를 끝마쳤다.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영광(靈光)ㆍ진도(珍島)ㆍ임피(臨陂)ㆍ만경(萬頃)ㆍ금구(金溝)ㆍ부안(扶安)ㆍ강진(康津)ㆍ옥구(沃溝)ㆍ흥덕(興德)ㆍ무장(茂長)ㆍ무안(務安)ㆍ흥양(興陽)ㆍ해남(海南)ㆍ함평(咸平)ㆍ고부(古阜)ㆍ태인(泰仁) 등 고을, 병영(兵營)ㆍ우수영(右水營) 산하의 사도(蛇渡)ㆍ임치(臨淄)ㆍ군산(群山)ㆍ가리포(加里浦)ㆍ고금도(古今島)ㆍ고군산(古群山)ㆍ위도(蝟島)ㆍ임자도(荏子島)ㆍ여도(呂島)ㆍ마도(馬島)ㆍ발포(鉢浦)ㆍ녹도(鹿島)ㆍ금모포(黔毛浦)ㆍ다경포(多慶浦)ㆍ목포(木浦)ㆍ어란(於蘭)ㆍ남도(南桃)ㆍ금갑도(金甲島)ㆍ신지도(薪智島)ㆍ이진(梨津)ㆍ격포(格浦) 등 진(鎭), 나주(羅州)ㆍ흥양(興陽)ㆍ진도(珍島) 등 목장(牧場)의 기민(饑民)이 모두 6만 6천 8백 88구(口)이고, 진곡(賑穀)이 3만 6천 9백 79석(石) 영(零)이다.】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이 진구를 끝냈다는 것을 장문(狀聞)하니, 하교하기를,“전주 판관(全州判官) 조장진(趙長鎭)은 근로(勤勞)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으니, 다시 어렵고 복잡한 직임에 시험해도 불가할 것이 없다. 준직(準職)에 제수하라. 각 고을의 부민(富民)들이 영읍(營邑)의 권분(勸分)을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1천 포대의 곡식으로 사사로이 진구하였는데, 흉년의 진구는 조가(朝家)의 구획(區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부민들의 저장을 책출(責出)하는 것을 마치 권징(勸徵)하는 것처럼 할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재물을 희사하여 구제해 살렸으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주자(朱子)는 남강(南康)의 황정(荒政)으로 인하여 재상(宰相)에게 서한을 보내어 조정에서 상(賞)을 시행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해 성대하게 논하면서 ‘오늘날 실신(失信)하면 특별히 긴급한 일이 있을 경우 어떻게 백성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명기(名器)를 아끼는 것은 공이 없이 요행한 상을 바라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나는 매양 이 말을 깊이 음미하여 왔다. 더구나 지금은 더할 수 없는 재변이니, 반드시 용동(聳動)시키는 정사를 보여 공효를 이루도록 책임지워야 한다. 1천 석(石) 이상을 희사한 사람은 실직(實職)에 제수한다는 것이 법전(法典)에 환히 기재되어 있으니, 광주(光州)의 강덕휘(姜德輝), 창평(昌平)의 김화중(金和重), 남평(南平)의 황천일(黃千一) 이 세 사람들에게는 내외(內外)의 실직(實職)을 막론하고 즉시 수용(收用)토록 하라. 또한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가려야 하는 것이니 해도(該道)로 하여금 기송(起送)시키게 하여 병판(兵判)이 그들의 능부(能否)를 살펴본 다음, 긴요하거나 긴요하지 않은 과위(窠位)에 나누어 의망(擬望)토록 하라.”하였다.【원전】 45 집 306 면【분류】 구휼(救恤) / 인사-관리(管理)
    2021-04-23 | NO.361
  • 기대승의 후손인 기언정을 동부승지로 삼다 - 정조 6년
    기대승의 후손인 기언정을 동부승지로 삼다 - 정조 6년 임인(1782) 3월 28일(을축) 특별히 기언정(奇彦鼎)을 초자(超資)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 기언정은 문헌공(文憲公) 기대승(奇大升)의 후손으로 벼슬이 양사(兩司)의 아장(亞長)이고 대대로 호남(湖南)의 광주(光州)에 살았다. 임금이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먼 곳의 문신(文臣)은 자급(資級)을 올려 주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번에 특별히 올려 준 것은 대개 의도가 있는 것이다.”하였다.【원전】 45 집 301 면【분류】 인사-임면(任免)
    2021-04-23 | NO.360
  • 유생 유적과 대사성 이의철이 상소를 올리다 - 영조 45년
    박세채의 문묘 종향에 관한 일로 유생 유적과 대사성 이의철이 상소를 올리다 - 영조 45년 기축(1769) 8월 12일(신유)       전라도 광주(光州)의 유생 유적(柳迪) 등이 상소하여 박세채(朴世采)의 문묘 종향(文廟從享)을 출방(黜放)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그 소장을 가져오게 하고는 유적은 영구히 청금안(靑衿案)에서 지워버리고, 삼수부(三水府)의 백성들로 하여금 사흘 길을 하루에 걸어 압송(押送)하게 하였으며, 소하(疏下)의 사람들은 아울러 청금안에 부첨(付籤)하고 방축(放逐)하여 서민을 만들도록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호남(湖南)의 유생으로 무릇 관학(館學)과 경성(京城)에 있는 자들도 또한 모두 방축하게 하였다. 대사성 이의철(李宜哲)이 상소하기를,“금령(禁令)을 내렸는데도 향유(鄕儒)의 무리들이 지레 한 소장을 올려 엄중한 견벌(譴罰)을 자초(自招)하였지만 조가(朝家)의 처분도 너무 엄중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죄줄 만하지만 그 이름은 유생이고, 그 사람은 비록 미천하지만 관계되는 바가 있는데, 지금 수천 명의 유생들을 부첨(付籤)하여 병축(屛逐)하였으니, 서로 돌아보며 도모할 바를 잃은 채 반드시 말하기를 ‘말 때문에 죄를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사방에 유전(流傳)되어 혹시라도 성조(聖朝)에 누를 끼치게 될까 두려우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아!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열조(列朝) 이래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전고(前古)에 우뚝 뛰어났습니다. 우리 선묘(宣廟)께서는 일찍이 뭇 신하들에게 조유(詔諭)하시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여러 유생들이 상소한 바가 하나만이 아니었으니, 어찌 강직하게 들추어내어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일찍이 한번도 기뻐하지 않는 빛을 보이지 않고 반드시 온화한 말로 위유(慰諭)하였으니, 국가의 원기(元氣)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말이 위대하십니다. 어찌 만세(萬世)에 본받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셔서 성덕(聖德)을 빛내소서.”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유중(留中)하게 하였다.【원전】 44 집 330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주-D001] 유중(留中) : 상소(上疏)의 내용이 마음에 맞지 않을 때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기 위해 임금이 소장(疏章)을 승정원에 머물러 두고 관계 기관에 회부하지 않던 일.
    2021-04-14 | NO.359
  • 광주 목사 이종덕에게 옷감을 내려주다 - 영조 44년
    호남어사 서호수가 복명하니 장성 부사ㆍ순창 군수 등의 조용을 명하다 - 영조 44년 무자(1768) 9월 20일(을사)        호남 어사(湖南御史) 서호수(徐浩修)가 복명(復命)하니,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종덕(李宗德)에게는 옷감[表裏]을 내려 주고, 장성 부사(長城府使) 홍익필(洪益弼)과 순창 군수(淳昌郡守) 신경조(申景祖)는 우직(右職)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니, 어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표장한 것이다.【원전】 44 집 301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2021-04-14 | NO.358
  • 장성 부사 정견순의 광주 목사 잉임을 청하다 - 영조 41년
    영의정 홍봉한이 차자를 올려 장성 부사 정견순의 잉임을 청하다 - 영조 41년 을유(1765) 4월 15일(경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장성 부사(長城府使) 정경순(鄭景淳)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옮겨 제수(除授)하였는데, 쇠퇴한 국면을 책임지워 이룩함이 이치에 마땅하며, 과기(瓜期)를 마치고 이의(移擬)하기로 이미 허락하였으니, 그 직(職)에 잉임(仍任)함이 마땅합니다.”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원전】 44 집 197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2021-04-14 | NO.357
  • 호남의 저치미가 허류한 상태를 의논드리다 - 영조 41년
    영의정 홍봉한이 호남의 저치미가 허류한 상태를 의논드리다  - 영조 41년 을유(1765) 4월 14일(기미)       애초에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호남의 저치미(儲置米)는 허류(虛留)한 것이 많다고 하여 비국 낭청(備局郞廳)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기를 청하고 최익남(崔益男)을 문랑청(文郞廳)으로 삼아 아뢰어 보내었는데, 이에 이르러 복명(復命)하고 허류(虛留)한 상태를 의논드렸다. 또한 전미(田米)의 겉벼[租]가 서로 섞여서 환롱(幻弄)함이 많은데, 그 중에도 광주(光州)ㆍ남원(南原)ㆍ영암(靈巖)ㆍ담양(潭陽)ㆍ정읍(井邑) 다섯 고을이 더욱 심하다고 하니 임금이 다섯 고을의 수령을 해도(海島)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사신은 말한다. “저치미는 바로 국가에서 뜻밖의 변란(變亂)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고, 조정에서 죄인을 적발하여 안치(按治)하려고 하는 것은 의도가 징려(懲勵)하는 데 있다. 그러나 수령이 조금만 세력이 있는 자는 먼저 낭관(郞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미봉하며, 그가 친한 사람이면 비록 법을 범하였더라도 애당초 문죄하지도 않고, 필경에 가서 책임을 메꾸는 것은 불과 2, 3인의 음무(蔭武)에서 그칠 뿐이니, 한갓 주전(厨傳)의 폐단만 끼칠 뿐이다. 그러나 속속들이 파헤쳐야 하는 정사에 어긋남을 식자(識者)들이 한탄하였다.”홍봉한이 선혜청(宣惠廳)의 돈으로 호남(湖南)의 연변(沿邊)에서 모맥(牟麥)을 사들여 진자(賑資)로 준비하여 두자고 청하였다. 또 고(故) 상신(相臣) 허욱(許頊)ㆍ고 판서(判書) 윤돈(尹暾)ㆍ고 하남군(河南君) 정숭조(鄭崇祖)ㆍ고 판추(判樞) 정광적(鄭光績)에게 사시(賜諡)하는 은전에 대하여 청하니, 임금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대개 그 사람들은 백년(百年) 전에 있던 사람으로 비록 응당 사시(賜諡)할 자이나, 반드시 대신(大臣)의 연품(筵稟)을 기다려서 비로소 허락한 것은 곧 고사(故事)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위(位)가 비록 숭현(崇顯)에 있기는 하지마는 뚜렷이 드러난 것이 없었는데, 다만 후손들의 사사 인정에 의하여 절헤(節惠)의 특전을 경솔히 청하였으니, 이 어찌 잠재된 사실을 밝혀서 듣는 사람을 고무시키도록 하는 일이겠는가?【원전】 44 집 196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 재정-국용(國用) / 역사-사학(史學)[주-D001] 징려(懲勵) : 징계(懲戒).[주-D002] 주전(厨傳) : 주(厨)는 음식, 전(傳)은 거마의 뜻.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경유하는 역참(驛站)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는 것.
    2021-04-14 | NO.356
  • 주인 아내가 겁탈 당해 죽은 것을 호소하다 - 영조 38년
    전라도 광주 사노 일만이 주인 아내가 겁탈 당해 죽은 것을 호소하다 - 영조 38년 임오(1762) 2월 19일(계미)       전라도 광주(光州)의 사노(私奴) 일만(一萬)이 상언(上言)하여 그 주인의 아내가 겁탈을 당해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호소하니, 임금이 명하기를,“협박해 욕을 보인 사람을 잡아내어 엄형하여 실정을 알아내라.”하였다.【원전】 44 집 92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2021-04-14 | NO.355
  • 김인후ㆍ유팽로 등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 - 영조 32년
    옥과 현감 송명흠이 올린 김인후ㆍ유팽로 등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 - 영조 32년 병자(1756) 4월 14일(신해)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명흠(宋明欽)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중략>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김 인후는 높은 자질과 바른 학문으로서 효릉(孝陵)을 만나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계합(契合)하였으니, 실로 우리 동방의 1천 년에 한 번 있을까 한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다스리고자 아니하여 갑자기 승하(昇遐)하시매, 김인후는 원통한 나머지 피를 머금고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휘신(諱辰)에 혼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종일 통곡하였고, 여러 번 징소(徵召)하였으나 명에 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묘비(墓碑)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한 마음으로 삼재(三才)를 조화하는 묘(妙)를 포함했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綱常)의 무거움을 맡았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밝고 통달한 지식은 어지러운 사물(事物)의 밖에 초월하였고, 깊이 도달하고 두터이 쌓은 것은 정밀하고 정대한 영역에 나아갔다. 그 맑은 풍채와 큰 절개(節介)는 기운을 용동(聳動)시키고 빛을 떨쳐 완만(頑慢)한 자는 청렴하게 하고 겁장이는 바로 서게 하였으니, 비록 백세의 스승이라 해도 가하다.’고 하였으니, 이 몇 구절만으로도 그 조예와 수립이 크게 이루어졌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묘(顯廟) 임인년에 장성(長城)의 필암 서원(筆巖書院)에 사액하고 이조 판서, 양관(兩館) 대제학의 추증과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릴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유팽로는 곧 본현(本縣)의 사람으로서 임진년 난리 때 성균 학유(成均學諭)로서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서행(西行)했는데, 집정 재신(執政宰臣)이 말을 빼앗아 달려가 버리자, 유팽로는 도보로 고향에 돌아와 이웃 고을의 의사(義士) 안영(安瑛)ㆍ양대박(梁大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전(前) 참의 신(臣) 고경명(高敬命)을 장수(將帥)로 추대해 문열공(文烈公) 신(臣) 조헌(趙憲)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죽었으니, 선묘(宣廟)께서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좌승지를 추증하고 정려(旌閭)하였으며, 광주(光州)의 포충사(褒忠祀)에 사액하였습니다. <중략>의논하는 자들은 혹 당연히 김인후와 유팽로는 이미 각각 사원(祠院)이 있으니, 첩설(疊設)할 것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토(南土)는 궁벽하고 멀어 문교(文敎)가 펴지 아니하여 서원이나 향사(鄕社)가 거의 없으며, 약간 있다 해도 내지(內地)의 여러 고을에서 넓게 설치하기를 서로 다투어 도리어 문폐(文弊)가 되는 것에 비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또 본 서원은 이미 금령이 있기 전에 세웠고 특히 사기(士氣)가 미약하여 감히 사액을 청하지 못했던 것이니, 지금 만약 옛집은 그대로 두고 은액(恩額)을 걸기만 한다면, 격례(格例)에도 방해되지 않고 공을 거둠이 클 것이니, 이는 또한 사문(斯文)을 흥기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삼가 예자(睿慈)에 바라건대, 특별히 이해하여 채납(採納)하시고 사람이 불초하다 하여 말을 버리지 않도록 하소서.”하니, 왕세자가 우악한 비지(批旨)를 내려 답하기를,“진달한 바 민사(民事)는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대조께 우러러 품할 일은 또한 등대(登對)하여 품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43 집 619 면【분류】 정론-정론(政論) / 구휼(救恤) / 보건(保健) / 인사(人事) / 인물(人物) / 역사-고사(故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사법(司法)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윤리-강상(綱常)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농업-농작(農作)[주-D001] 곽외(郭隗) : 춘추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현인(賢人). 연나라 소왕(昭王)이 현명한 이를 얻고자 하여 곽외에게, “훌륭한 사람을 얻어 같이 다스리면서 선왕(先王)이 제(齊)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하니, 선생이 그런 사람을 알려 주시오.” 하자, 곽외가 말하기를, “옛날 어떤 임금이 내시에게 천금을 주면서 천리마(千里馬)를 구해 오게 했더니, 그가 죽은 말의 뼈를 5백 금이나 주고 사서 돌아왔으므로, 임금이 화를 내자, 그가 말하기를, ‘죽은 말도 사들이는데, 더구나 산 것이겠습니까? 천리마가 곧 올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1년이 안되어 세 마리나 왔다고 합니다. 왕께서 꼭 현명한 사람을 구하고자 하시면 저부터 쓰실 경우 저보다 더 현명한 자가 어찌 천리를 멀다 하여 오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소왕이 곽외를 등용하여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후부터 훌륭한 사람들이 연나라를 찾아왔다는 고사.[주-D002] 칠사(七事) : 수령이 고을을 다스리는 데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 즉 농상성(農桑盛)ㆍ호구증(戶口增)ㆍ학교흥(學校興)ㆍ군정수(軍政修)ㆍ부역균(賦役均)ㆍ간활식(姦猾息)ㆍ사송간(詞訟簡).[주-D003] 집예(執藝)의 간하는 것 : 이는 《서경(書經)》 윤정편(胤征篇)의 기예(技藝)를 가진 미천한 공인(工人)이라도 업에 종사하면서 간(諫)할 수 있다는 내용임. 누구나 일하는 사람이면 자기가 종사하는 일을 가지고서 간할 수 있음을 말함.[주-D004] 정협(鄭俠)이 …… 고사 : 정협(鄭俠)은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사람. 자는 개부(介夫).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상서(上書)하였으나 기각당하였음. 그 뒤 유민(流民)들의 비참함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자, 신종이 보고 탄식하며 조칙을 내려 신법을 혁파하였다고 함.[주-D005] 신해년 : 1731 영조 7년.[주-D006] 임자년 : 1732 영조 8년.[주-D007] 동작(東作) : 봄철에 농사를 지음.[주-D008] 장각(張角) : 후한 때 황건적의 우두머리.[주-D009] 갈영(葛榮) : 후위(後魏) 때 사람으로 자칭 천자라 함.[주-D010] 이특(李特) : 진(晉)나라 혜제(惠帝) 때 사람으로 대장군ㆍ대도독이라 자칭함.[주-D011] 이자성(李自成) : 명나라 말기의 사람으로 숭정 15년에 하남ㆍ하북을 통일함.[주-D012] 황정(荒政) …… 인 : 주대(周代)에 베풀었던 황정 십이사(荒政十二事)를 말함. 곧 산리(散利)ㆍ박정(薄征)ㆍ완형(緩刑)ㆍ이력(弛力)ㆍ사금(舍禁)ㆍ거기(去幾)ㆍ생례(省禮)ㆍ살애(殺哀)ㆍ번악(蕃樂)ㆍ다혼(多婚)ㆍ색귀신(索鬼神)ㆍ제도적(除盜賊)임.[주-D013] 임진년 : 1592 선조 25년.[주-D014] 무신년 : 1728 영조 4년.[주-D015] 효릉(孝陵) : 인종(仁宗).[주-D016] 삼재(三才) : 천(天)ㆍ지(地)ㆍ인(人).[주-D017] 임인년 : 1662 현종 3년.[주-D018]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주-D019] 병인년 : 1626 인조 4년.
    2021-04-14 | NO.354
  • 광주 목사 김시영에게 새서 표리를 내리다- 영조 30년
    호남 어사 홍자가 격포 행궁과 조적에 관한 서계 별단을 바치다 - 영조 30년 갑술(1754) 7월 23일(경자)        호남 어사 홍자(洪梓)가 복명(復命)하고 서계 별단(書啓別單)을 바쳤는데, 이르기를,“첫째, 격포 행궁(格浦行宮)을 설치한 것은 장차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행궁의 담 밖은 텅 빈 채 백성의 마을이나 창고의 저축이 하나도 없으니, 청컨대, 크고 작은 격포의 폐기된 둑을 보수하고, 이어서 행궁의 둔전(屯田)을 만들어 백성을 모아 경작하게 하고, 전례대로 세(稅)를 받고 창고를 설치하여 모아들이고 흩어 주어 변란에 대비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둘째, 장성(長城) 일대는 지리(地利)가 가장 좋으니, 청컨대 병영(兵營)을 이 고을에 옮겨 사방을 제어하고 한 방면을 호령하는 방편으로 삼으소서. 셋째, 완영(完營)과 수원(水原) 독성 산성(禿城山城)에 봉수(烽燧)를 설치하여 경보(警報)의 도구를 엄하게 하소서. 넷째, 좌수영과 우수영의 바다 어귀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제도를 수거(修擧)하여 바다의 험조(險阻)를 더욱 견고하게 하소서. 다섯째, 조적(糶糴)을 균일하게 해서 민폐를 제거하소서. 여섯째, 저치미(儲置米)를 한 해 걸러 개색(改色)하여 오래 쌓아 두어서 썩는 걱정을 없애소서. 일곱째, 역로(驛路)의 조폐(凋弊)가 근일처럼 심한 때가 없으니, 청컨대 병사ㆍ수사로서 다른 도에서 이직(移職)하는 자는 경성(京城)까지만 인마(人馬)를 정하여 보내고, 부임하는 자는 본도의 경계까지만 정하여 보내어 역로의 조폐를 소생시키게 하소서. 아홉째, 금오도(金鰲島)는 황장목(黃腸木)을 봉(封)한 곳으로, 영읍(營邑)ㆍ진읍(鎭邑)의 전선(戰船)ㆍ병선(兵船)과 통신사의 도해선(渡海船) 및 각 군문의 기계 등의 물건을 오로지 이 곳에 의지하고 있는데, 요즈음 영빈궁(寧嬪宮)에서 절수(折受)하였으니, 특별히 성명(成命)을 거두어 본도에 도로 붙이소서. 열째, 각 군문의 호궤(犒饋)에 쓰는 소는 장교ㆍ군졸을 보내어 김제(金堤)ㆍ태인(泰仁) 등의 저자에서 사는데, 그 폐단을 끼치는 것이 한없으니, 이제부터 일체 금단하게 하소서.”하였는데, 모두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임금이 홍자를 소견하여 해민(海民)의 편부(便否)를 묻자, 홍자가 말하기를,“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이전에는 배와 어살[漁箭]은 영읍에서 그 자재(資財)를 도와서 제때에 고쳤으나, 한 번 균청(均廳)에 속한 뒤로는 모두 그전대로 버려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해민은 고할 데가 없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도신ㆍ수령ㆍ변장인 자가 자기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하여 백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곧 나라를 저버리는 것이다. 균청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하였다. 홍자가 이번 행차에서 김상각(金相珏)을 장살(杖殺)하고 그 나머지 술사(術士) 40여 인을 다스렸는데, 임금이 옳게 여겼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김시영(金始煐)ㆍ나주 목사(羅州牧使) 민백남(閔百男)에게 새서 표리(璽書表裏)를 내려 주고, 강진 현감(康津縣監) 여선응(呂善應)ㆍ익산 군수(益山郡守) 어사적(魚史績)을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는데, 홍자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원전】 43 집 537 면【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軍事) / 수산업(水産業) / 인사(人事)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교통(交通) / 사법(司法)
    2021-04-14 | NO.353
  • 이진길의 상서에 대하여 변론하다 - 영조 27년
    이조 판서 이천보가 상서하여 이진길의 상서에 대하여 변론하다 - 영조 27년 신미(1751) 2월 11일(기묘)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천보(李天輔)가 상서(上書)하기를,“삼가 대신(臺臣) 이진길(李晉吉)이 상서한 것을 보니, 그 가운데 신에게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대개 광주 목사(光州牧使) 유봉(兪崶)과 위원 군수(渭原郡守) 김범로(金範魯)가 바로 대신의 인친(姻親)으로 먼 일가입니다. 두 사람의 성적(聲績)과 이력(履歷)은 모두 주목(州牧)이나 변지(邊地)에 합당하기 때문에 신이 이에 의차(擬差)하였습니다. 대저 사람을 논함은 마땅히 그 사람이 어떠한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대신(臺臣)이 만일 말하기를, ‘아무개는 주목(州牧)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고 아무개는 변지를 맡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면 그래도 혹시 말이 될 수 있지만, 진실로 그의 말과 같이한다면 무릇 대신의 인친과 족당(族黨)이 된 자들은 비록 등용할 만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정관(政官)이 감히 검의(檢擬)할 수 없고 일체 폐기(廢棄)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공도(公道)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거(提擧)의 의망(擬望)에 있어서는 더욱 한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중신(重臣)이 비록 유신(儒臣)의 논핵(論劾)을 당했지만 정관(政官)은 스스로 정관의 정례(政例)가 있는데 대신(臺臣)이 이것으로써 신의 죄를 삼는 것은 어찌 그다지도 너무 심한 것입니까?”하니, 동궁(東宮)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원전】 43 집 395 면【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2021-04-14 | NO.352
  • 좌의정 조현명이 올린 일곱 가지 조항의 차자문 - 영조 24년
    좌의정 조현명이 올린 일곱 가지 조항의 차자문 - 영조 24년 무진(1748) 10월 22일(계묘)        좌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올려 일곱 가지 조항을 진달하기를,“<중략>1. 작상(爵賞)을 신중히 해야 하는 데 관계된 일입니다. 상을 더하는 것과 특별히 발탁하는 것은 금년이 제일 많았습니다.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더욱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여 무신(武臣)을 승진 발탁하는 조짐이 없게 하소서. 변방의 방어(防禦)를 맡고 있는 사람 가운데 기한을 채우는 사람이 없어 영송(迎送)이 분분한 탓으로 폐단이 되는 단서가 많습니다. 출신(出身)한 지 얼마 안되어 곤수(閫帥)의 직임을 맡아 나가기 때문에 생소하고 혼란스러워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음직(蔭職)의 사로(仕路) 가운데 광주(光州)ㆍ나주(羅州)ㆍ충주(忠州)ㆍ상주(尙州) 등 큰 주목(州牧)은 반드시 여러 번 군읍(郡邑)을 역임하여 성대한 성적(聲績)이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제수하는 것인데, 지금은 신음(新蔭)으로서 자력(資歷)이 없는 자들도 극력 도모하여 멋대로 부당하게 점유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관리가 잘 다스리지 못하면 백성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니, 의당 양전(兩銓)을 엄히 신칙하여 전처럼 외람되게 갑자기 승진시키는 일이 없게 하소서.한림 소시(翰林召試)에서 떨어진 사람은 곧 춘방(春坊)의 설서(說書) 두 자리로 귀착되어 드디어 승륙(陞六)될 수 있는 지름길인 참하(參下)의 극선(極選)에 오르게 되는 반면 한림은 곧 용관(冗官)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떨어진 사람이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영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겸설서(兼說書)는 본래 한림의 겸함(兼銜)이니, 이 뒤로는 한림이 아니면 외람되게 주의(注擬)하지 말게 해야 합니다. 설서는 구애 없이 통의(通擬)하되 소시(召試)에서 떨어진 자는 새로 권점(圈點)을 받아 소시를 거친 뒤에 비로소 의망(擬望)하도록 허락하소서. 전랑(銓郞)을 변통시킨 뒤에 3품으로 승의(陞擬)하는 등 절한(節限)이 없어서 도리어 명관(名官)에도 조급히 나아가려는 계제(階梯)가 되고 있으니, 이 뒤로는 경악(經幄)의 신진(新進)들일지라도 신록(新錄)하기 전에는 승의를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묘천(廟薦)의 경우는 중서(中庶) 6품에 구애함이 없게 해야 합니다만, 사만(仕滿)이 된 사람은 약간의 우역(郵驛) 빈자리에 조용(調用)하여 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입사(入仕)하는 길은 많고 소통시키는 길은 좁기 때문에 각사(各司)의 관원 가운데 이런 부류가 반이나 되어 관방(官方)의 난잡스러움이 진실로 이미 극심합니다. 따라서 여러 해 동안 사진(仕進)하다가 아무 까닭 없이 작산(作散)된 자도 왕왕 있으니, 이 또한 딱한 일입니다. 각도(各道)의 감목관(監牧官)에 대해서는 자벽(自辟)하는 법규를 파기시키고 중서(中庶) 가운데 사만된 사람을 차견(差遣)하게 하소서. 만일 자벽하는 법규를 다 폐기시킬 수 없다면 한산(閑散)인 사람은 쓰지 말고 현재 사진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벽을 허락하게 하는 것이 양쪽 다 온편하게 될 것 같습니다.<중략>.”하니, 임금이 깊이 받아들여서 채용(採用)한 것이 많았다.【원전】 43 집 311 면【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주-D001] 수의(繡衣) : 암행 어사.[주-D002] 한림 소시(翰林召試) : 예문관 검열의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 적임자를 선정하여 상주(上奏)하면 왕명(王命)으로 불러 시(詩)ㆍ부(賦)ㆍ논(論)ㆍ책문(策問) 등을 시험보여 합격한 자를 임용함.[주-D003] 왕수인(王守仁) : 명(明)나라 무종(武宗) 때의 명신.[주-D004] 정미년 : 1727 영조 3년.[주-D00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주-D006] 임인년 : 1722 경종 2년.[주-D007] 무신년 : 1728 영조 4년.[주-D008] 천진(天津)의 두견새 : 송(宋)나라 영종(英宗) 때 소옹(邵雍)이 낙양(洛陽)에 있으면서 천진교(天津橋) 위에서 우는 두견새 소리를 듣고 천하가 크게 혼란할 조짐을 알게 되었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임.[주-D009] 척촉(躑躅)하는 돼지 : 《주역》 구괘(姤卦) 초륙(初六)의 효사(爻辭)로, 여윈 돼지가 뛰려는 생각을 품고 있다는 말임. 이는 소인이 군자를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을 비유하여 한 말임.
    2021-04-12 | NO.351
  • 금상문에 나아가 이지서 등을 친국하다 - 영조 24년
    금상문에 나아가 이지서 등을 친국하다 - 영조 24년 무진(1748) 5월 25일(무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죄인을 친국하였다. 이지서를 신문하니, 이지서가 공초하기를,“당초에 진고(進告)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지난 봄 신의 육촌인 이지목과 길에서 만났는데, 이지목이 말하기를, ‘천변이 이러한데 옛날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가?’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지목이 말하기를, ‘비기에 왜인 같으면서도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온다.[似倭非倭自南而來]고 한 여덟 글자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단오에 이지양과 묘하에서 만났는데, 이지양이 말하기를, ‘무신년의 일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무리에 불과한 것이다. 서울에서 투서한 것은 그것을 한 사람이 있다. 이 근처에도 오래지 않아 또 의당 알 수 있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만일 금년을 편안히 넘긴다면 또 3백 년이 지나게 될 것이다. 임금과 가까이에 있는 신하 가운데 반신(叛臣)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전라 감사가 죽은 것이 매우 애석하다. 만일 살아 있었다면 한쪽을 담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의 아비인 이중경(李重庚)이 무주 부사(茂朱府使)로 있을 적에 짐바리로 싣고 온 것이 거의 1천 바리에 이르는데, 선자봉(扇子封) 같았지만 어떤 이는 조총(鳥銃)인가 의심하였다.’ 했는데, 어제 진달하지 못했던 것은 곧 이 말입니다. 소요스러운 일이 크게 일 적에 영장(營將)이 마침 이형곤(李衡坤)의 집에 가 있었는데, 병사(兵使)가 급히 불러서 들어갔다가 갑자기 나아왔으므로 마치 군사를 모으는 상황과 같았습니자. 이지양이 또 봉계(鳳溪)의 일을 말하였고, 이지억이 궐문에 투서한 일, 문의(文義)의 괘서에 대한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지양은 글에 능한 선비이어서 역모를 하려 했다면 지려(智慮)가 있습니다. 무신년의 적도들이 모두 그를 제갈 양(諸葛亮)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중경 부자는 얼굴을 모르고 또 세수(世讎)도 아닙니다. 이 일은 박민추ㆍ오명후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만, 신은 일가에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죽게 된 가운데서 살기를 도모하여 만든 계교가 아니고 장(杖)을 참지 못하여 직초(直招)한 것에 불과합니다.정월 이후 가벼운 갖옷을 입고 살진 말을 타고서 양남(兩南)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하루에도 1백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는데, 관인 같기도 하고 무사 같기도 하여 하나도 유생 같은 자는 없었습니다. 또 어떤 거사(居士)들이 무수히 왕래했는데, 신의 집이 길가에 있었기 때문에 눈으로 보았습니다. 옷은 소매가 좁은 것 같았는데, 면(綿)으로 만든 것도 있고 포(布)로 만든 것도 있었습니다. 이른바 거사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에는 나이가 모두 5, 60이었는데, 지금 왕래하는 자들은 인물이 준수하여 병사나 수사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그 복색을 보면 화사스러웠으며 미녀를 데리고 있었고 각기 하나의 학동(學僮)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은 역모에 가담한 사람들 같았습니다. 이지양이 말하기를, ‘너는 남을 통하여 일을 이룰 수 있는 자이다. 내가 병조 판서를 잃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신이 역모의 당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일가붙이와 친구들이 모두들 버렸기 때문에 당(堂)의 이름을 기재(棄齋)라고 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일가붙이로는 단지 이지억이 있을 뿐인데, 글도 능하고 힘도 있어서 그는 이지양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이지양은 위인이 조금 치밀하여 허망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 감사에 대해 애석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바로 충청 병사입니다. 지난번 이인좌(李麟佐)의 무리가 어찌 남태징(南泰徵)ㆍ이사성(李思晟)과 일가붙이였겠습니까? 역적을 모의하는 자들은 으레 통지(通知)하는 방법이 있는데, ‘애석하다.’는 말을 어찌 공연히 했겠습니까? 신의 육촌이 전라 감사와 평소 서로 친하게 지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신이 알 수 없습니다. 박민추의 소위뿐만 아니라 오명후도 반드시 괘서의 일에 동참한 것이 틀림없는데, 이는 신이 이지양과 초사흗날 함께 유숙할 때 이런 수작이 있었던 것입니다.”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지억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신의 형 이지양은 문의(文義)에 살고, 이지목은 정산(定山)에 삽니다. 신의 양가(養家)에는 편모(偏母)가 있는데,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이지서와는 육촌이었는데, 이지서가 출계(出系)했기 때문에 팔촌이 되었습니다. 이지서는 별로 좋지 않은 짓을 한 것이 없으나, 글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를 보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부의 사망일이 10월에 있기 때문에 해마다 왕래했습니다만, 이지서가 너무 가난하여 매양 도망간 노비를 추쇄하러 갔기 때문에 만날 때도 있고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한 지가 3, 4년이 되었습니다. 무신년 겨울에 신이 생부의 상을 당하여 문의에 갔다가 3년이 지난 다음 돌아왔는데, 이지서와 친근하게 왕래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서로 만났었습니다. 이른바 오가(吳哥)는 천동(泉洞)에 살고 있었는데, 상세히 생각하여 보니 이름이 수만(遂萬)이었으며, 오래도록 좌수(座首)를 지냈습니다. 신의 형이 매우 가난하여 조곡(糶穀)을 얻기 위해 간혹 통정(通情)을 했었기 때문에 신도 또한 만났었는데, 오가의 아들 가운데 연소한 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신이 군부의 앞에서 어떻게 감히 속이겠습니까? 신은 대략 문자를 알고 이지서는 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길이 같지 않게 되었는데, 신은 누차 발해(發解)했었기 때문에 이지서가 교만한 기운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만나면 신이 그때마다 아들을 놓아 보내어 걸식하게 하는 일을 질책하였으므로, 이지서가 유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신은 평생 글을 읽어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선업(先業)을 계승하려고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지서가 반드시 생존해 있을 것이니, 면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형이 이지서와 쌓인 유감이 있는데, 그것은 신의 형이 전래(傳來)해 오던 여종 하나를 양인(良人)이 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지서가 그것을 나누어 쓰자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항상 노여움을 품고 있었고 많은 욕설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신이 해명하기가 어렵겠습니다만, 동생이 언근(言根)이니, 이는 신의 다행인 것입니다. 쉽게 분변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지난해 9월 이후 신은 고향에 있는 형제들과 원래 서로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의 형이 어디에서 들었단 말입니까?신의 둘째 숙부가 자식이 없기 때문에 이지서의 아들을 취하여 양자를 삼으려 했는데, 신이 저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원망을 맺게 된 단서인 것입니다. 만일 폐족(廢族)으로서 혹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투서하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신이야 무슨 마음으로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신이 궐문에 투서한 일이 있고 신의 형이 괘서한 일이 있다면, 이지서의 표독한 마음에 이미 반드시 고변(告變)했을 것입니다. 이지서가 남과 산송(山訟)을 하면서 묘도(墓道)에 흉측한 물건을 묻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와 절교했습니다. 이른바 병조 판서라는 말은 거의 아동(兒童)의 말에 가까운 것입니다. 궐문에 투서하는 것이 무슨 이로움이 있겠으며, 병조 판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팔다리가 매우 가는데 무슨 여력(膂力)이 있겠습니까?”하자, 막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다시 이지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양자(養子)에 대한 일은 이지양이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려 했었습니다만, 후취(後娶)에서 아들을 낳았으므로 3년 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교만한 기운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과연 그런 말을 했습니다. 아들을 놓아 보내어 걸식하게 했다는 일은 본래 듣지 못했던 일이고, 여종을 속량(贖良)시킨 일에 대해서는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이지억의 숙부가 후사가 없자 이종연(李宗延)의 아들을 후사로 삼았으나 또 아들이 없었으므로, 이종연이 신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려 했는데, 이지억이 임시로 그 제사를 주관하면서 그 물건을 다 팔아버리고는 후사를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흉한 물건을 묻었다는 일은 권가(權哥)가 선산(先山)과 마주 보는 곳에 묘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신의 노가(奴家)에서 버드나무를 깎아서 신(神)의 이름을 쓴 일이 있습니다.”하였다. 이지서와 이지억을 면질시키게 하였다. 이지억이 이지서에게 말하기를,“네가 나를 궐문에 투서한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네가 누구의 말을 듣고 고했는가?”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너의 형이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종당에는 알게 된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의심한 것이다.”하였다. 이지억이 말하기를,“이것이 어떠한 일인데 나의 형이 말하지 않은 것을 네가 장전(帳殿)에서 질언(質言)했단 말인가?”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나도 모르게 너라고 대답했다. 무신년 초봄에 네가 속리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왕래할 때 문의의 수재(守宰)가 논하여 보고하려 하자 애걸하여 겨우 면하였었다. 너의 형 이지양은 적보(賊報)를 듣고서 기뻐하면서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어찌 광주(光州)나 나주(羅州)의 목사(牧使)가 될 수 없겠는가?’ 하였다.”하자, 이지억이 말하기를,“네가 지금 죽을 지경에 빠져 살아나려고 이런 말을 하는데, 내가 무신년 2월에 회시(會試)의 강(講) 때문에 보은(報恩)의 절에 가 있으면서 보름 동안 글을 읽었었다. 3월 초6일에는 절이 텅 비고 사자(士子)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었다.”하였다. 죄인을 잡아 오는 사이에 우선 친국을 정지한다고 명하였다. 지평 이중조(李重祚)가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다시 친국하였다. 이지양을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신은 이지서와 팔촌 형제가 됩니다만, 본생(本生)으로는 육촌입니다. 그러나 원래 찾아다닌 일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사(人事)가 평인(平人)과 같지 않았고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했기 때문에 신과는 서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신이 안엽(安熀)과 한두 번 만났었는데, 외가(外家)의 원족(遠族)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정(安????)은 안엽의 아우인데 갑진년에 신과 함께 속리산에 갔었습니다. 박민추는 금년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3월에 이지서가 한 번 신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왜변(倭變)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였으므로, 신이 책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하니, 이지서가 말하기를, ‘집이 길가에 있어서 매우 두렵다.’ 하였습니다. 그의 여섯 아들은 모두 개ㆍ돼지 같은데, 장자는 이승연(李升延)이고, 차자는 이항연(李恒延)입니다. 금산(金山)의 정가(鄭哥)에 관한 일은 이지서가 말하기를, ‘금산에 봉황이 있어 알을 낳았는데 하루는 그것이 저절로 터졌으니, 이는 실로 재변이다.’ 하였습니다.”하자, 형추(刑推)를 시행하여 위엄을 보이라고 명하였는데, 공초하기를,“전라 감사 이중경(李重庚)과 병판(兵判)에 대한 이야기는 허망한 말입니다.”하였다. 또 이지양과 이지서를 면질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서로 쟁변(爭辨)하면서 굴하지 않았으므로, 막(幕)에 내리게 하였다. 이지목을 신문하고 다시 이지서와 면질시키니, 또 서로 힐난하는 것이 이지양과 하는 것과 같았다. 이지목을 막에 내리게 한 뒤에 이지서를 신문하니, 공초하기를,“이지억의 일은 신이 과연 면질할 때 꿀렸었습니다만, 금산(金山) 정가(鄭哥)의 이야기는 이지양에게서 들었습니다. 충청 병사ㆍ전라 감사는 모두 국가에 이로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이 과연 무고하였습니다.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니라는 말은 신이 했습니다. 황진기(黃鎭紀)에 대한 이야기도 신이 그가 생존해 있을 것으로 여겨 한 말이고, 울릉도 곁의 섬이라는 이야기는 신이 과연 인심을 광혹(誑惑)시킬 계책에서 한 말입니다. 이는 속으로 역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倭)가 온다느니 호(胡)가 온다느니 금산의 봉계라느니 한 등등의 이야기는 모두 신이 지어낸 말입니다. 이지양ㆍ이지억은 신이 과연 무인(誣引)한 것이고, 문의(文義)의 괘서는 신이 과연 한 것이므로, 이는 모두 지만(遲晩)합니다만 궐문에 투서했다고 한 일절(一節)은 과연 허망한 것이었습니다.”하였다. 네 번 형문하고 난 다음 형장을 정지하였다. 이지양ㆍ이지억ㆍ이지목은 방송(放送)하고 친국은 정지하되, 추국(推鞫)을 당일 거행하라고 명하고 나서 말하기를,“이지서가 나라를 원망하여 부도한 짓을 하고 말을 만들어 사람들을 미혹시킨 것은 이미 지만(遲晩)했으나, 가슴속의 역심을 다 실토하지는 않았다. 우규장(禹圭章)은 첩의 아우의 혼사를 위하여 소요스런 말을 전파한 것을 이미 자복하였다. 그러나 국체(鞫體)에 있어 곧바로 먼저 처단할 수는 없으니, 다시 엄형을 가하여 기어이 취복(取服)하도록 하라.”하였다.【원전】 43 집 295 면【분류】 사법(司法) / 변란(變亂)[주-D001] 발해(發解) : 주현(州縣)의 고시(考試)에 급제한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초시(初試)에 합격한 것을 말함.[주-D002] 갑진년 : 1724 경종 4년.
    2021-04-12 | NO.350
  • 인정전에 나아가 죄수를 국문하다 - 영조 16년
    인정전에 나아가 죄수를 국문하다 - 영조 16년 경신(1740) 2월 17일(무자)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이때 양찬규(梁纘揆)의 일을 아직 다 밝혀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으므로,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잇달아 염탐하였는데, 광주(光州)에 사는 백성 최태원(崔太元)과 이덕방(李德芳)이라는 자가 평소에 양찬규와 서로 친하다는 말을 듣고 그가 정상을 알았으리라고 의심하여 잡아서 물으니, 최태원이 말하기를, ‘이덕방이 양찬규와 서로 친한데 일찍이 주머니 속을 보니 어떤 글이 있는데 원국사(怨國詞)라고 제목한 것이었다.’ 하였다. 드디어 두 사람을 잡고 그 말을 감사(臨司)에게 고하니, 감사가 장문(狀聞)하고 잡아보냈다. 임금이 친히 물으니, 최태원ㆍ이덕방이 서로 미루며 변명하고 또 다른 사람을 끌어댔다. 이튿날 임금이 또 친히 물었으나, 전과 같이 공초(供招)하고 승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태원ㆍ이덕방을 가두고 관련된 사람들은 정배(定配)하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하였다. 대개 무신년의 여얼(餘孼)로서 나라를 원망하는 자인데 다 상한(常漢)이나 미천한 무리이었다.【원전】 42 집 654 면【분류】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변란(變亂)[주-D00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2021-04-12 | NO.349
  • 광주 목사 이병상의 출보된 일을 아뢰다 - 영조 10년
    우의정 김흥경이 비로소 출사하고, 광주 목사 이병상의 출보된 일을 아뢰다 - 영조 10년 갑인(1734) 6월 18일(임술)        우의정 김흥경(金興慶)이 무릇 네 번에 걸쳐 사직하는 소를 올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출사(出仕)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引見)하니, 김흥경이 임금에게 아뢰기를,“광주 목사(光州牧使) 이병상(李秉常)은 애초에 좌죄(坐罪)된 바가 단지 관직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은 것일 뿐인데, 먼 고을에 출보(黜補)하여 한 해가 이미 지났습니다. 일찍이 총재(冢宰)를 역임한 사람을 오랫동안 출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내직(內職)에 비의(備擬)할 것을 명하였다.【원전】 42 집 442 면【분류】 인사(人事) / 사법(司法)[주-D001] 총재(冢宰) : 이조 판서.* 이병상(李秉常) : 1676~1748.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여오(汝五), 호는 삼산(三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검열을 거쳐, 정언ㆍ수찬을 역임하고 경상좌도 암행 어사로 나갔다가 이조 좌랑ㆍ교리ㆍ대사간ㆍ대사성ㆍ이조 참의ㆍ대사헌ㆍ이조 참판 등을 지냈고, 노론으로 소론에 맞서다가 신임사화 때 파직되기도 하였다. 1725년(영조1) 대제학을 역임하고, 1727년 지의금부사로 있을 적에 정미환국으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한성부 판윤으로 기용되었고, 탕평책 반대의 소를 올려 파직되었다가 형조 판서ㆍ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고, 공조 판서ㆍ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기로소에 들어가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를 받았다.
    2021-04-12 | NO.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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