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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242건)

양산숙(1561~1592)
양산숙梁山璹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기묘명현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손자이며, 대사성을 지낸 양응정梁應鼎의 셋째 아들이다. 광산구 어룡동 박메마을 출신으로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에 전심하였으며 천문ㆍ지리ㆍ병학에도 뛰어났다.양산숙이 다섯살 난 어느날 아버지
죽림 박경(1559~1616)
박경朴璟의 본관은 죽산, 호는 죽림竹林이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53대손이며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지낸 박응현(朴應鉉)의 아들로, 직장(直長)을 지냈다.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평하고 있는 스승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광산구 임곡 광곡마을의 칠송정 주인 기대승의 장
양산룡(1552~1597)
양산룡(梁山龍)의 본관은 제주. 자는 우상宇翔이다. 부친은 송천 양응정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로 판관 박중윤의 딸 사이에 차남으로 1552년 박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16세부터 문장이 뛰어났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41세에 임진왜란을 맞게 되
해광 송제민(1549~1602)
송제민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현감 송기손宋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청심헌淸心軒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 송정황이다. 1549년 광산구 극락면에서 출생하였다. 훗날 ‘백성을 구제하라’는 제민(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제민(齊
삼암 심광헌(1541~1593)
심광헌沈光憲의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언장彦章, 호는 삼암三岩. 묵헌 심풍沈豊의 아들로 조선 1541년(중종36) 본량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이 출중하고 학덕을 겸비하여 일에 임하면 충직하여 사림들이 추중하였다.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역임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은을 입은 가
금강 기효간(1530~1593)
기효간의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자는 백고(伯顧), 호는 금강錦江 또는 인재忍齋이다. 아버지는 호조판서로 추증된 고흥군(高興君) 기대유(奇大有), 어머니는 함양오씨이다. 기효근奇孝謹의 형이며 장성에 정착한 기원의 후손으로 아곡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외모는 엄격하였다. 이는 소학의 법도를 널리 익혔기
향사당(鄕射堂)
향사당(鄕射堂)은 광주읍성 내 객사 북쪽에 있었던 향청이다. 광주목지에 ' 鄕射堂在客舍北卽鄕廳肇自文正公金台鉉世修各賢巨卿籍名以鄕座目留藏而行鄕飮鄕射等禮故名之"라고 기술하고 있다.향사당은 조선시대 향촌자치기구로서 이용된 청사이다. 향사당(鄕社堂)·향서당(鄕序堂)·집헌당(執憲堂)·풍헌당(風憲堂)·향헌
금곡동-주검동
주검-동(鑄劍洞) 【골】 삼바실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다. 주검굴이 있다.-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산 214-1번지 충장공 김덕령이 임진왜란 이전에 병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만든 옛터이다. 광주 무등산 북쪽 기슭에 있는데 광활하고 험준하며 지금도 칼과 화살촉을 만든 주동의 흔
금곡동-주검굴
주검-굴(鑄劍窟) 【골】 주검동, 곧 무등산 중턱에 있는 바위 굴이다. 50명이 앉을 만한 크기의 방처럼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칼과 창 따위 무기를 만들었다 한다. 지금도 쇠를 불린 흔적인 쇠통이 흩어져 있다. 만력 계사는 선조 26년(1593)이다.- 한글학회(1982),
안방준- 제청원정 題淸遠亭
主人方寸中 정자주인의 마음 속에는分明見涇渭 세상이치 분명히 볼 것이라獨坐淸遠亭 청원정에 홀로 앉아 있으니幽興人知未 그윽한 흥취 어찌 느끼지 못하리오- 隱峯全書 卷一 우산(牛山) 안방준(1573∼1654 )은 보성 출신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진만곡
진만곡(陳萬穀), 湖節3下-173-2, 光州, 壬辰, 熊峙殉節 -《호남절의록》(1799)1592년 임진왜란 선무 원종공신록훈
정충신
정충신(鄭忠信, 1576~1636), 湖節4中-078-1, 光州, 甲子, 樹勳 -《호남절의록》(1799)정충신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말의 명장 정지(鄭地)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금천군(錦川君) 정윤(鄭綸)이다.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이인
정만기
정만기(鄭萬紀)는 《호남절의록》에 충무이공순신동순참좌제공(忠武李公舜臣同殉參佐諸公) 편에 소개되어 있다.湖節3上-098-2, 光州, 壬辰, 殉節深河 -《호남절의록》(1799)임진왜란 공신록 명단에 보면 선무원종공신 2등급에 정만기 주부主簿의 이름이 있다.
정민구
정민구(鄭敏求)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경달(景達), 호는 묵재(默齋).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여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서 선조가 피난간 의주(義州)로 갔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비안현감(比安縣監) 등을 역임하였다.湖節3下-142-1, 光州, 壬辰, 大駕扈從  -《호남절의
정귀세
정귀세(鄭貴世, ?~1592)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여화(汝華), 호는 금강(錦岡)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담양(潭陽)에서 거의한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갔다.그해 6월 고경명이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승장 영규(靈奎) 등과 합세하여
친친재 선거이(宣居怡, 1545~1598)
선거이(宣居怡), 湖節2下-154-1, 光州, 壬辰,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본관은 보성이며, 자는 사신(思愼), 이중(怡仲),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1545년(명종1) 8월 장흥에서 의금부도사(종5품) 선상(宣祥)의 아들로 태어나 광주 광산으로 이사하여, 1569년(선조2)에 공신(유성군 선 형)의 후손 자격으로 겸사복(兼司
노재 배승무裵承武(1559~1593)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노재이다. 조선 1559(명종14년)년 동곡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 장군과 함께 의거하여 영호남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1593년 광주지역에서 복수장 고종후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에
박언신
박언신(朴彦信)의 자는 호중好仲 벼슬은 선무랑宣務郞으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와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옥과玉果로부터 광주로 이사했다. 난계 박연의 후손으로 증조부 박맹우, 조부는 박곤, 부는 금흥이다. 임진왜란 어사공신御賜功臣으로 임진란 당시 여러 고을이 연쇄적으로 함락될 즈음 선조의 어가가 서쪽으로 몽진
류휘진(1556~1593)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초토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막취의병장兵糧幕聚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강화도에서의 전공으로 군기시주부 벼슬이 제수되었다. 1593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김천일과 같이 순절하니 호조판서에 증직되었
류사경
류사경(柳思敬, 1556~?), 湖節1上-070-1,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류사경은 문화류씨이며 자는 덕신德新, 호는 육유당이다. 우의정을 지낸 류량의 8대손, 유혜의 아들이며 광주 이장(光州 泥場), 현 남구 양과동에서 자랐다. 문장에 뛰어났고 절개(節槪)가 있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회재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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