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 무등로 1550(청풍동, 신촌마을) 균산정은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초입에 있는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균산筠山이란 대나무의 살갗처럼 추운 겨울의 눈보라에도 그의 절개가 변치 않음을 뜻한다.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남평 문씨 균산筠山 문용현文龍鉉의 유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화암마을)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찰방 이영선의 아들인 묵은 이정신李鼎新(1593~1674)이 만년을 위해 갈미봉 남쪽에 서옥리西玉里 신촌마을에 지었던 정자이다. 1645년엔 대치면 장안동 선산 아래에 짓고 관수재觀水齋라 하였다. 이어 1695년에 지은 것을 관수정이라 했다. 1918
북구 독립로237번길 (광주일고 부근) 공북루는 주州의 북쪽을 향한 누각을 말한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5리에 있고, 옛날에는 절양루折楊樓라 칭하였는데 1670년 목사 오두인 때 공북루로 고쳤다. 목사 신석유가 중수하였다는 기문이 있다’고 기록했다. 조선 태조 1392년 무렵 건립으로 추정
남구 구만산길 34 조선 선조 때 남강정의 주인 양심당 이시원(1428~1488)과 동생 청심당 이조원(1433~1510)이 함께 그의 아버지 필문 이선제(1390~1453)를 위해 지었다. 문인들과 예를 익히고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한 곳이다. 1610년(만력38년 경술 2. 20) 포충사제위답여납명문에는 유등곡리(柳等谷里)
동구 계림1동 (옛 경양방죽 인근)동구 계림동과 중흥동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경양방죽, 이 호수에 있었던 경호정景湖亭, 경호대景湖臺, 경호루景湖樓 등 세 정자를 가리켜 경양모정이라 한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광주목사 김선(金銑, 1750~1837)이 경양호 풍치를 관망하기 위해 1804년 전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거병한 후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경상도 상주 가은현 출신인지, 광주 북촌 출신인지 궁금하다. 다소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삼국유사 권2', '후백제와 견훤조'에 실려 전하는 견훤의 출생 설화 때문이다."옛날 한 부자가 광주 북촌 마을에 살고 있었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1038-4담양의 척서정은 2004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됐다. 척서정은 영천이씨대치문중종회에서 관리하는 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마을 한가운데 넓은 대지에 있다. 정자나무와 함께 마을 광장 역할을 하는 장소에 세워져 있는 특이한 형태의 정자이다. 주민들의 휴식처뿐만 아니라 마을
남구 주월동광주읍지와 조선환여승람에 이 정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남구 주월동에 가헌稼軒 김판석金判錫이 창건했고 후석 오준선의 찬기가 있다[在州西 珠月里 金判錫所搆 有原韻 後石 吳駿善 撰記]고 하였다.김판석은 참봉, 도정 등의 벼슬에 재임했다고 하나 실직이 아닌 수직(추천)을 받은 명예직으로 보인다. 가헌은
심의종沈宜鍾은 천성이 효순孝純하고 경학을 탐구하여 문행文行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였던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의 문인으로 『광주읍지』에 전하고 있다. 지응현池應鉉(1869~1959)의 붕남실기鵬南實記에 실린 29명 가운데 석하石下 심의종沈宜鍾의 글(정미, 1907)이 있다.이재홍과 함께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순절한 이백춘(1537∼1592)은 병사 이종우(李從愚)의 증손이다. 자는 영경(榮卿), 본관은 함평이다.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에서 태어나 1558년 용봉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된 중봉마을(저불)로 이사했다.천성이 강직하고 문학절행(文學節行)이 뛰어난 그는 용봉동으로 옮긴 그해 사마시에 급제
후금(청)과 싸우다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전상의(1575∼1627)는 자는 희원(希元) 또는 환중(桓仲), 본관은 천안으로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그는 광주목 도촌면, 현 남구 사구동에서 아버지 용(蓉)과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에서 태어나 정묘호란 때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하여 북구 화암동 239번지 묻혀 있다.그는 어려서부터
임란 최후 의병장이자 조선의병 총수인 김덕령(1568∼1596)의 자는 경수(景樹)로 광산이다. 양녕대군의 장인인 한로(漢老)의 12세손이며 1470년 무렵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충효마을(당시, 석저촌)로 터를 옮긴 문손(文孫)은 그의 고조부이다. 1568년 12월 29일 붕변(鵬變)과 남평 반씨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석저촌(石底村)
김덕홍(1558∼159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증조부는 김후(金珝), 조부는 김극효(金克孝)이다. 부친은 습독(習讀) 김붕변(金鵬變)이다. 동생은 김덕령(金德齡), 김덕보(金德普)이다.김덕홍의 호는 성암(省菴)으로 아우 김덕령과 매형 김응회와 함께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김덕령과
북구 소해로 11 (일곡동)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은 조선 시대 광주목 석제면에 속했고, 호구총수에 일곡촌(一谷村)이 기록되어 있어 지명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전통적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일신재나 그중에 구한말 일대의 선비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머물렀던 유서 갚은 곳이다. 원풍정(願豊亭)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남쪽 30리에 있는 데 집의 청심당 이조원(李調元, 1433~1510)이 건립했다. 현재의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 광산이씨 상서공파의 여재각 옆에 있었다고 한다. 필문 이선제의 셋째아들이다. 아버지의 시묘를 마친 후 그 옆에 다시 이 당을 지어 그의 생활공간으로 활용한 건물이다. 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