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동(忠孝洞)(성안, 성내, 성촌) 【동】 본래 광주군 석저면의 지역으로서 산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지형이 성 안처럼 되었다 하여 성안 또는 성내, 성촌이라 하였다. 조선 제22대 정조가 선조 때의 충신·효자 충장공 김덕령(金德齡)장군이 생장한 곳이라 하여 충효리로 사명(賜名)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쪽으로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1리,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나주(羅州) 경계까지 47리, 북쪽으로 진원현(珍原縣)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최신(崔愼)의 기록 - 하, 송자대전 부록 제18권 / 어록(語錄) 5 :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신] 세속(世俗)에 전하기로는, 김덕령(金德齡)은 용력(勇力)이 있는 외에도 신이(神異)한 일화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는 말과 수감(收監)되었을 적에 고문을 무수히 당했으나 살갗이
광주광역시는 <도은선생집>과 운암서원 소장 <해광집목판>을 시 지정 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광주광역시 문화재위원회는 관계학자·전문가 조사, 30일 이상 문화재 지정예고 등의 결과를 검토해 도은선생집을 제30호, 광주 운암서원 해광집목판을 제31호 시지정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기로 최근 결정했다.도은선생
풍암정 楓巖亭 : 광주 석저면(石底面)의 신촌리(莘村里)에 소재하고 김덕령(金德齡)이 은거한 곳이다. 현 북구 금곡동 718(풍암제길 117) 풍암정이다. 김덕보(金德譜, 1571∼1627)가 김덕홍(金德弘, 1558∼1592), 김덕령(金德齡, 1567∼1596) 두 형을 위해 건립했다.- 朝鮮地誌資料(1910)
경렬공-산소(景烈公山所) 【묘】 정치메에 있는 장군묘다. 고려말엽에 침입한 왜적을 여러번 무찔러 전공을 세운 정지(鄭地)장군의 산소이며 "경렬"은 그의 시호이다. 조선선조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무쇠 갑옷과 투구 차림으로 이 묘에 제사지낼 때, 갑자기 찬 칼이 풀어지니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출전하지 말
민속테마 박물관에 광주 근대역사전시 보강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이 광주의 근대역사 전시를 보강한 ‘광주역사민속박물관’으로 27일 새롭게 선보인다.시립민속박물관은 지난 1987년부터 남도의 다채롭고 풍부한 문화와 생활상을 소개하며 지역의 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계승하는데 앞장서왔다. 지난 3년간 ‘박물관
덕의-동(德義洞)(덕의) 【동】
본래 광주군 석저면의 지역으로서, 덕봉 밑이 되고,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태어난 곳이 되므로 덕의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촌리를 병합하여 덕의리라 해서 석곡면에 편입되었다. 1955년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어 충효동회의 관할이
송제민의 본관은 홍주, 초명은 제민濟民, 자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현감 송기손宋麒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청심헌淸心軒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 송정황이다. 1549년 광산구 극락면에서 출생하였다. 훗날 ‘백성을 구제하라’는 제민(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제민(齊
주검-동(鑄劍洞) 【골】 삼바실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다. 주검굴이 있다.-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산 214-1번지 충장공 김덕령이 임진왜란 이전에 병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만든 옛터이다. 광주 무등산 북쪽 기슭에 있는데 광활하고 험준하며 지금도 칼과 화살촉을 만든 주동의 흔
주검-굴(鑄劍窟) 【골】 주검동, 곧 무등산 중턱에 있는 바위 굴이다. 50명이 앉을 만한 크기의 방처럼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칼과 창 따위 무기를 만들었다 한다. 지금도 쇠를 불린 흔적인 쇠통이 흩어져 있다. 만력 계사는 선조 26년(1593)이다.- 한글학회(1982),
시검-바우(시검암) 【바위】 서름 서쪽에 있는 바위이다. 선조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 바위를 목표로 정하고, 날마다 칼 쓰는 법을 연습하였다 한다.-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무술을 연마한 곳이었다고 하며, 금곡마을에서는 8·15광복 이전까지 당산제와 기우제를 지냈다.광주시 북구
뛰엄-바우(머리바우) 【바위】 무등산의 인왕봉과 천왕봉 사이에 있는 바위이다. ① 조선 선조 때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뜀질을 하며 무술과 담력을 길렀다 한다. ② 머리 얹은 것같이 생겼다. -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광주시 북구 금곡동 뛰엄바우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무술을 연마한 곳이었다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노재이다. 조선 1559(명종14년)년 동곡 수성동에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승문원 정자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 장군과 함께 의거하여 영호남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으며 1593년 광주지역에서 복수장 고종후와 함께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에
김성원(金成遠, 1525~1597), 湖節2下-162-1, 光州, 壬辰,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김성원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광주 출생. 본관 광산(光山), 자 강숙(剛叔). 호 서하당(棲霞堂)ㆍ인재(忍齋). 아버지는 교위(校尉) 홍익(弘翼)이며,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 장사랑(將仕郞) 한종(漢宗)의 딸이다. 김인후(金麟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