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규 沈明奎 철종 6년(1855) 12월 22일∼철종 7년(1856) 7월 5일심명규(1799∼1878)의 본관은 청송(⾭松)이며, 자는 문보(⽂甫)이다. 아버지는 통덕랑 심영조(沈榮祖)이다. 1834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36년 강릉참봉, 1838년 선공 부봉사, 1839년 상서원 직장, 1842년 금부도사, 1845년 예빈주부·호조좌랑, 1846년 노
김용희(金容希, 1860~1927)가 처소로 지은 만취정에서 후석 오준선은 위험한 가지에서 학몽을 꾸는 처사를 걱정하는 시를 읊는다. 이는 자신이 면암 최익현의 항일의진에 직접 몸으로 차여하지 못한 죄책감이 베어있다.亭前種得澗松遲 뜰앞에 솔을 심어 그 빛이 더디(지지遲遲 )니爲愛貞姿善護待 그 모습 사랑하여 정성
박해량(朴海量) 행장 -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2권 병자년(1876, 고종13) 선생 44세, 거유 최익현(崔益鉉)윤5월 문인 박해량(朴海量)이 정심사(淨心寺) 중 인찰(寅札)ㆍ춘담(春潭)을 데려 와서 뵙고 선생의 초상을 그려 포천 본댁으로 모시고 갔다.박해량의 자는 도겸(道謙),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집이 광주(光州) 하남(河
후석 오준선의 <후석유고>『후석유고』는 한말의 유학자인 오준선의 목활자본 시문집으로, 25권 12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권1, 2는 오준선의 詩와 賦 451수가 수록되어 있다. 사우들과의 차운시 및 輓詩를 비롯해서 述懷 및 景物詩 등 다양한 내용의 시를 시기별로 편집하였다. 스승인 奇正鎭을 비롯해서 宋近洙,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1637(인조 15)∼1678년숙종 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이다.조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광산
유인석(柳寅奭)의 자는 춘백(春伯), 호는 수당(睡堂)으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아버지는 유하영(柳河永, 號 農山), 어머니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재묵(在黙)의 딸이다. 1859년(철종 10) 5월 9일 태어나 광산구 삼도면에서 살다가 1931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
金錫龜의 자는 景範, 호는 大谷, 본관은 金海이다. 1835(헌종 1) 2월 남원 松洞面細田에서 金國賢의 아들로 출생했다. 김국현은 아들 김석구가 학문에 힘쓰자 그를 위하여 곡성으로 옮겨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는 隣里書塾에서 『小學』을 배우고 이어 맹자를 배우자 스스로 맹자를 자처하였다. 이후 그는 17․8세에
『大谷遺稿』는 김석구의 시문집으로 6권 3책의 목활자본이다. 序는 1901년 崔益鉉이 지었다. 최익현은 奇正鎭의 수제자로서 김석구의 학술상의 위치를 중국의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 비유하였다. 권1은 시이다. 모두 102수를 수록하였는데, 궁핍한 생활에 자족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자연이나 천리에 대한 이치를 노
이희용의 문집 《쌍석유고(雙石遺稿)》(1984)는 3권 1책의 석판본이다. 권1에는 20首의 詩와 松沙 奇宇萬, 勉菴 崔益鉉, 植齋 奇宰, 弦窩 高光善 등에게 보낸 70여 편의 편지글이 실려 있다. 권2에는 雜著, 序, 記, 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이희용의 「雙石亭原韻」에 차운했던 20여 인의 서문과 작품이 차례대
정의림鄭義林의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며 본관은 광산으로, 綾州 大德에서 鄭濟玄과 珍原朴氏 致聖의 딸 사이에서 1845년(憲宗 11) 11월 출생했다. 그의 선조들은 조선시대 때 纘 이후 나주에 줄곧 거주하였으나, 그의 증조 埰가 영암으로 이주하고 조부 加錫이 다시 능주에 이주하였으며, 정의림의 조부
쌍석(雙石)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의 자는 國瑞, 본관은 全義로, 1853년 1월 27일 광주 흑석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독실하게 배웠다. 1874년 약관에 장성의 노사 기정진 문하에 들어가, 1875년 莘塢 金祿休와 사귐을 맺고 노사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1879년면암 최익현을 만났다
이지호(李贄鎬, 1836~1892)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아들 이승우(李承愚, 1855~1919)는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서양 오랑캐에 대응하여 자주적인 사상
광주 지남정사(芝南精舍)는 조선 후기의 학자 이지호(李贄鎬, 1836~1892)가 지어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며 지냈던 곳이다. 이지호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중국을 존중하고 서양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의 최익현(崔益鉉), 이항로(李恒老),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 근대 한학자 남구 양과동 지산마을의 죽파(竹坡)
최기룡(崔基龍, 1843~1913)이 지냈던 정자다. 자는
찬서(贊瑞).
본관은 경주(慶州). 최유환(崔有煥)의 아들로 광주 지산리(芝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선천적으로
성실하고 친절하며 인정이 두텁고 의지와 취향이 훌륭하였다
광산구 안청동 495번지 외성당은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1637~1678)가 거처한 서실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박광후의 스승 우암 송시열이 쓴 ‘외성당’이라는 글씨가 현액되었으나 지금은 없다. 1930년대에 철거된 후 텃 자리에는 새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후에 아들 소은素隱
광산구 본량동 서로 180-68 해발349m의 용진산 남쪽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한 용진정사는 한말의 대학자이며 우국지사이기도 한 후석 오준선(1851∼1931)이 국난과 세상의 티끌을 피해 숨어살면서 후진을 가르친 곳이다. 1985년 광주시 문화재 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원래 용진사(湧珍寺 상원사)가 자리 잡았던 절
북구 서하로 243 (오치동) 한말에 좌승지를 지낸 오산 이용헌이 오치의 산수를 사랑하여 오치동의 산 정상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송천 이계익이 1911년 부친의 뜻을 이어 이 정자를 오치의 안산案山에 완성하고 아버지의 호를 따 오산정이라 이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