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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참판을 사직한 상소〔辭戶曹參判疏〕- 서형수

명고전집 제3권 / 소계(疏啓)

호조 참판을 사직한 상소〔辭戶曹參判疏〕


삼가 아룁니다. 신은 조정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며 분수를 지켜온 지 어느덧 8년이 되었습니다. 중간에 지방관을 지내고 사행(使行)을 다녀온 것은 감히 그 직임을 자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상께서 보살펴 주신 하늘 같은 은혜 때문이었으니, 보잘것없는 충정(衷情)이 생각마다 북받쳐 말을 하려니 목이 멥니다.

조정 밖에서 하는 일이라면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어디로든 가서 오직 명에 따르겠다는 것이 신이 밖으로 표방하고 가슴에 새겨 온 다짐입니다. 이 때문에 고을 수령이 되어 일산을 쓰고 인끈을 차는 영광을 많이도 받았고, 고관의 신분으로 부절(符節)을 들고 사행길에 오르는 등 점점 더 융숭한 총애를 받았지만, 신의 처지로 어찌 아무 탈 없는 사람들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신하로서의 도의(道義)가 큰 분한(分限)으로 이미 정해진 마당에 관례대로 으레 사양만 하는 것은 가식(假飾)에 가깝겠기에 직임이 제수될 때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응했던 것입니다. 신의 이러한 처신에 대해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빗발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천지요 부모이신 우리 성상께서만은 신의 고충을 이해해 주시고 위태로운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실 줄로 압니다.

신은 반년 동안 멀리 떠나 있다가 이제 다시 조정에 올라 성상의 옥음(玉音)을 직접 들었으니, 어린 자식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충만한 것은 천리와 인정상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신이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호조 참판에 제수하는 소패(召牌)가 내렸으니, 벼슬을 제수받으면 사은숙배하는 신하의 도리상 어찌 감히 황급히 받들어 숙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규례에 저촉되어 잠시 소명(召命)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내 “구애하지 말라”는 특교를 받아 그런대로 신하로서의 도리를 행할 수 있었으니, 신의 진심이 드러나고 신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관직에 나아가는 일로 말하면, 아, 신이 어찌 감히 다시 논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연전에 왕명을 받들어 《대학유의(大學類義)》를 교열(校閱)하였는데, 그때 구준(邱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읽고는 저도 모르게 수없이 읊조리며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임금은 신하를 자식처럼 대하는데 신하가 임금을 아비처럼 섬기지 않고 임금은 신하를 가족처럼 길러주는데 신하가 나랏일을 집안일처럼 보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

아, 이는 천고(千古)의 충신과 지사(志士)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신의 평소 맹세와 염원은 오직 이 마음을 보존하자는 것뿐이니, 어찌 굳이 조정에서 벼슬하여 영화와 녹봉을 거머쥔 뒤에야 망극한 성은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의복이 신분에 걸맞지 않으면 사람들의 시기가 집중되고, 인품에 비해 복이 지나치면 귀신의 노여움이 닥칩니다. 신은 환해(宦海)의 풍파 속에 거의 죽어가던 몸으로 성상의 망극한 은혜를 입었으니, 성상께서는 정적(政敵)들의 집중포화 속에서 신을 빼내어 살려주시어 여생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뱀이 야광주로 보답하고 참새가 흰 옥고리로 보답한 일을 본받지는 못할지언정, 무슨 마음으로 복이 지나치면 재앙이 닥침을 생각지 않고 세상에서 활개 치며 더 높은 벼슬에 올라 차마 목숨을 살려주신 우리 자애로운 성상의 지극한 은덕을 저버리겠습니까.

아, 만나기 어려운 밝은 시대에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주시니, 목숨이 다하도록 노력해도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안일을 탐하여 옹송그리고 있기를 즐거워하겠습니까. 혹여 밝으신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천지조화 같은 은혜를 곡진히 베푸시어 신의 벼슬을 체차하고 산직(散職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에 있게 해 주신다면, 신은 성상을 영영 떠나 나랏일을 외면하지 않고 때때로 벼슬에서 물러난 비정규 인원으로서 서책을 편집하고 교정하는 등의 일에 끝까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다보니 글자마다 어조가 너무 무거워지고 말았습니다.

신이 상소문을 작성하여 올리려던 참에 승정원의 직임으로 옮겨 제수하신 명을 또 받았으니, 더욱더 황공합니다. 그러나 신의 구구한 처지가 위에 말씀드린 바와 같아 달려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왕명을 어기게 되었으니, 성상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메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피눈물로 간절히 기원하며 두 손 모아 명을 기다립니다.

[주-D001] 호조 참판을 사직한 상소 : 

【작품해제】 명고가 51세 때인 1799년(정조23) 11월 20일에 올린 상소이다. 이 상소가 《승정원일기》 1799년(정조23) 11월 20일 조에는 ‘행 좌승지 서형수(行左承旨徐瀅修)’가 올린 상소로 실려 있으며, 뒤의 〈한성부 좌윤을 사직한 상소[辭左尹疏]〉에서 이 상소의 언급 “조정 밖에서 하는 일이라면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어디로든 가서 오직 명에 따르겠다는 것이 신이 밖으로 표방하고 안으로 가슴에 새겨 온 다짐입니다.”를 인용하면서 “작년 겨울 승지에 제수하셨을 때”의 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상소를 올린 시점의 직임을 기준으로 하는 사직 상소 제목의 상례(常例)에 따르면 이 작품의 제목은 ‘좌승지를 사직한 상소[辭左承旨疏]’가 되어야 한다.

명고는 1799년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11월 17일에 귀국 보고를 하였는데, 이날 바로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이틀 뒤인 19일에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좌승지에 제수된 시점이 호조 참판에 대한 사직소를 작성하고 미처 올리기 전이었다. 이 때문에 기왕에 작성해 둔 호조 참판 사직 상소 말미에 좌승지에 대한 사직 의사를 간단히 덧붙여 올린 것인데, 이로 인해 이 상소는 호조 참판을 사직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좌승지를 사직하는 내용은 말미의 한 문장에 불과하게 되었다. 문집을 편차할 때 내용의 비중을 고려하여 제목을 정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상례에는 맞지 않다.

명고는 이해 사행을 떠나기 직전에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재직 중이었는데, 아직 해유장(解由狀 벼슬아치가 물러날 때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수인계한 내용을 적은 문건. 실제 근무 일수, 재정 관계 문건과 그 정확성 따위를 적음)을 제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호조 참판과 좌승지에 새로 제수하는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았지만 정조는 “구애하지 말라[勿拘]”는 특교(特敎)를 내려 그대로 제수하게 하였다. 《承政院日記 해당 날짜》

이 상소에서 명고는 1791년(정조15) 우승지(右承旨)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8년 동안 조정의 벼슬에는 나가지 않고 지방관과 임시 벼슬에만 응해온 자신의 정상(情狀)을 들어 호조 참판과 좌승지를 차례로 사직하였다. 정조가 이에 대해 “사직하지 말라”는 비답을 내리지만 명고는 끝내 응하지 않는다.

[주-D002] 신은 …… 되었습니다 : 

명고는 우승지로 재직 중이던 1791년(43세) 6월 지방에서 올라온 전최(殿最 근무 성적 평가) 문서를 임금의 주관 하에 개봉하여 결재하는 자리에 규정을 어기고 불참했다는 이유로 추고(推考) 당한 이후, 같은 해 성천 부사(成川府使), 1796년(48세) 광주 목사(光州牧使), 1799년(51세) 영변 부사(寧邊府使) 등 외직(外職)으로만 돌고 중앙의 관직은 맡지 않았다. 《承政院日記 正祖 15年 6月 15日ㆍ24日, 20年 7月 17日, 23年 6月 19日》

이는 임자년(1792, 정조16)에 정동준(鄭東浚) 등이 명고의 집안을 무고(誣告)했기 때문으로(《明皐全集 卷3 辭左尹䟽, 卷4 辭刑曹參判䟽 》), 1792년부터 이해까지가 햇수로 8년이 된다.

[주-D003] 사행(使行)을 다녀온 것 : 

명고는 1799년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11월 17일에 귀국 보고를 하였다.

[주-D004] 반년 …… 들었으니 : 

명고는 1799년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進賀兼謝恩副使)로 차출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11월 17일에 귀국 보고를 하였다.

[주-D005] 비록 …… 있었으니 : 

명고가 미처 해유장(解由狀)을 제출하지 않은 관계로 잠시 제수가 보류되는 바람에 사은숙배를 하지 못하다가, “구애하지 말라”는 특교로 인해 그대로 제수되어 사은숙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명고는 1799년(51세) 6월부터 영변 부사(寧邊府使)의 직임을 수행하다가 7월 8일에 진하 겸 사은부사로 차출되어 연경에 갔으며 귀국 보고를 한 11월 17일 당일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니, 영변 부사의 직임을 정리하여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할 겨를이 없었다. 이는 새로운 벼슬을 제수하는 데 있어 하자(瑕疵) 사항이므로 이조(吏曹)에서 이의 제기가 있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해유장 제출 여부에 구애하지 말라”는 특교를 내렸다. 《承政院日記 正祖 23年 7月 8日, 11月 17日ㆍ19日》

[주-D006] 신은 …… 교열(校閱)하였는데 : 

《대학유의(大學類義)》는 정조가 송(宋)나라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명(明)나라 구준(丘濬, 1421~1495)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서 초록할 부분에 직접 비점을 찍고 규장각 신하들 및 신구(新舊) 초계문신(抄啓文臣)들에게 명하여 초록과 교정을 시킨 다음 《대학장구》의 각 장(章) 밑에 주석 형태로 덧붙여 1799년 간행한 책으로, 모두 21권 10책(규장각 소장 청구번호 : 奎291-v.1-10)이다. 《홍재전서(弘齋全書)》 〈군서표기(羣書標記)〉에는 20권으로 기재되어 있어 현전본보다 1권이 적으나, 권차별 항목을 비교해 보면 내용상의 변화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명고는 이때 광주 목사(光州牧使)였는데, 전(前) 초계문신의 자격으로 초록 내용의 1차 교정을 수행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22年 9月 6日》

[주-D007] 임금은 신하를 자식처럼 …… 아니다 : 

송 태조(宋太祖)가 장수(將帥)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핀 일에 대해 명(明)나라 구준(丘濬)이 한 말이다. 《大學衍義補 卷130 將帥之任 中》

[주-D008] 뱀이 야광주로 보답하고 : 

수(隋)나라 임금이 대궐 밖에 나갔다가 큰 뱀이 토막 난 것을 보고 약을 써서 잘 봉합해 주었는데, 1년여 뒤에 뱀이 야광주를 물어와 보답했다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

[주-D009] 참새가 …… 일 : 

한(漢)나라 양보(楊寶)가 9세 때 올빼미의 공격으로 나무 밑에 떨어져 개미에게 뜯기는 노란 참새를 구해다가 100여 일 동안 간호해 살려 보냈다. 참새가 밤에 노란 옷을 입은 동자로 나타나 자신은 서왕모(西王母)의 사자라면서 흰 옥고리 4개를 주며 양보의 자손이 옥고리처럼 깨끗이 지조를 지켜 삼공(三公)에 오르기를 축원하였다. 뒤에 과연 그의 후손이 4대에 걸쳐 모두 대신(大臣)이 되었다고 한다. 《搜神記 卷20》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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