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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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제31권 / 선조조 8 - 고경명

25년(임진, 1592)  - 고경명

○ 6월.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여 이광 등이 본도로 돌아갔다.

(중략)

○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은 광주(光州)에 살다가 적이 도성에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하고 글을 지어 도내(道內)의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


“지난번 본도의 근왕병(勤王兵)이 금강(錦江)에서 돌아오던 날에 첫 번째로 패배했고 여러 군에서 군사를 초유(招諭)하던 때에 두 번째로 패하였다. 이는 대체로 수비 방법이 어긋나고 기율이 전혀 없으며 유언비어가 비등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금 흩어지고 도망한 나머지를 수습한다 하더라도 사기는 꺾였고 정예는 없어졌으니 어떻게 응급책을 세워 늦게나마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항상 생각건대 승여(乘輿)가 피난을 떠났는데도 관수(官守)는 오래도록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을 폐하였고, 종사(宗社)가 모두 타버렸는데도 왕사(王師)로서 평정시킬 시기는 아직도 지체되고 있다. 이에 대해 말을 하자니 통분함이 가슴속에 사무친다.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군사와 말이 날래고 굳세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가르킴)께서 황산(黃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삼한(三韓)을 다시 일으킨 공로가 있으며, 선조(先朝 고려를 가리킴)의 낭주(朗州) 전투에서는 한 척의 배도 되돌아가지 못했다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까지도 빛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춰지고 있으니 그때에 용맹을 뽐내며 적의 성벽에 먼저 오른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근년 이래로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가다듬었으니 임금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가 강독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 의로운 소문이 사라져버리고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무너져버린 채 기력(氣力)을 내어 적과 교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이 서로들 제 몸만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만 하면서 혹시 뒤질세라 머리를 움켜쥐고 쥐처럼 도망하고 있다. 이는 본도의 사람으로서 국가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적의 형세가 크게 꺾이고 왕의 영위(靈威)가 날로 확장되니 이야말로 대장부가 공명을 세울 기회이고 군부(君父)의 은혜에 보답할 때이다. 경명은 장구(章句)나 외는 오활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인데 이렇게 단(壇)에 올라 망령되이 대장으로 추대되니 이미 흩어진 사졸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여 여러 동지에게 수치거리가 될까 두렵다.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 같기에 금월 11일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우리 도내의 모든 사람들은 아비는 그 자식을 깨우치고 형은 그 동생을 도와 의병을 규합하여 함께 일어나자. 원컨대 속히 결정하여 착한 일을 따르고 미혹된 나머지 스스로를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경명은 연로(年老)한 문관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맹주(盟主)로 추대하자 개연히 사양하지 않았다. 이에 선비와 서민이 많이 응모하여 군사 6천여 명을 얻었다. 그리고 또 격문을 여러 도에 전하였는데 문사(文辭)가 격렬하고 절실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외며 전하였다.
(중략)

○ 호남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경기 안이 완전히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빌붙어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상이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천일의 군사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산고성(禿山古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빌붙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 7월.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 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

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 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ㆍ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 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 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총포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복남 등이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한바탕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는데 붉은 기 아래 백마(白馬)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니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나주(羅州)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이 고군(孤軍)으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고 말지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혔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이 퇴각하여 재 아래 안진원(安鎭院)에 진을 쳤는데,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담은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눈물을 흘리고 분격해 하며 반드시 죽음으로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잡아 사사(社詞)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를 고한 뒤 떠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였다. 뒷날 조정에 아뢰어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웠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君)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부장(副將)) 위대기(魏大奇)ㆍ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ㆍ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 가에 묻어 몇 개의 큰 무덤을 만들고서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위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경명이 모집한 병사 6~7천 명을 단속해서 북상하여 여산(礪山)에 주둔하였는데 왜적이 호남 지역을 침입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휘하 장사들이 본도를 염려하여 먼저 도내의 적을 토벌한 뒤에 북쪽으로 정벌할 것을 다투어 청하자 경명이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라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겼는데 당시 왜적은 금산으로 퇴각하여 진을 두터이 치고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경명이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재를 넘어 험한 곳으로 들어가 곧장 금산성 밖에 육박하였는데 곽영이 먼저 날랜 장사 수백 명을 보내어 적을 시험하다가 적에게 패하여 물러나자 경명이 북을 울리며 전투를 독려하여 도로 적병을 성 밖에서 위축시키고 성 안에서는 화포를 쏘아 적이 주둔하던 관사(館舍)를 불태우니 적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동틀녘에 다시 방어사와 같이 성 밖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관군은 북문을 공격하고 경명은 서문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군사를 총동원하여 나와 급히 공격하니, 관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경명은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일제히 활을 당기고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의병이 급히 부르짖기를 “방어사의 군사가 패하였다.”고 하자 대오가 무너져 흩어졌다. 경명이 말에서 떨어졌는데 말이 달아나 버리니 종사관 안영(安瑛)이 자기가 타고 있던 말을 주어 타게 하고 도보로 따라갔다.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의 종에게 묻기를 “대장은 모면하였는가?” 하니, 아직 못 나왔다고 하자, 팽로가 급히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이에 경명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말을 달려 빠져나가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어떻게 차마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안영과 함께 경명을 보호하다가 적진에서 함께 전사하고 경명의 차자(次子) 인후(因厚)도 달려가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경명은 문학(文學)에 종사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으며 나이 또한 노쇠하였다. 이때에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는데 충의심만으로 많은 군사들을 격려하여 위험한 곳으로 깊이 들어가 솔선하여 적과 맞서다가 전사한 것이다. 공은 성취하지 못했어도 의로운 소문이 사람을 감동시켜 계속 의병을 일으킨 자가 많았으며, 나라 사람들이 그의 충렬(忠烈)을 칭송하면서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처음에 상이, 경명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제수하도록 명하고, 글을 내려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공조 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에서 남쪽으로 돌아올 적에 상이 직접 유시하기를 “돌아가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조만간 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라.” 하였다. 그러니 관작 제수의 명이 이르지도 않아서 경명이 패하여 전사하였는데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다. 그 뒤에 광주(光州)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포충사(褒忠祠)라고 편액을 하사하였다.

○ 고경명 휘하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 명을 불러모아 화순(和順) 사람인 전 부사 최경회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고 골(鶻) 자로 표신(標信)을 삼았다. 절의를 지키다 죽은 유팽로(柳彭老)등을 높이고 본보기로 삼아 많은 사람들을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士民)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불러서 위로하고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배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나의 괴로운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후회스럽다마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


하고, 또 이르기를,


“용만(龍灣)의 한 모퉁이에서 천운이 어렵게 되었고 지운(地運)이 이미 다 되었으니 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인정이 극도로 곤궁해지면 회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조금 움직이는데 변방은 벌써 추워진다. 저 장강(長江)을 보니 역시 동쪽으로 흐르는데, 돌아가려는 한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왕성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 당 덕종(唐德宗) 때의 인물)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 송 고종(宋高宗) 때의 인물)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나의 어려운 고생살이를 면하게 하라.”


하였다. 하나는 영남의 사민(士民)에게 유시하는 것이었는데 호남에 보내는 것과 같았다. 끝 부분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듣건대, 우감사(右監司) 김수(金睟)는 용인에서 패하여 퇴각하였고 좌감사 김성일(金誠一)은 진주(晉州)에서 용사를 모집한다 하였다. 좌병사 이각(李珏)이 참수(斬首)당했으므로 박진(朴晉)이 충용하다 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였으며,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늙고 쇠약하므로 양사준(梁士俊)으로 대신하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을 좌도 수사로 삼았는데, 모두 각기 본도로 돌아가 힘써 주선하여 경영하는지 모르겠다. 좌도의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의 진주 등 약간의 고을이 아직 보존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래도 1성(成 사방 10리의 땅)이나 1려(旅 5백 명의 단위)보다는 나은 것이 아니겠는가. 본도의 백성들은 성실하고 후덕하여 본래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사가 많았다. 그대들이 진정 서로 분발하고 면려한다면 틀림없이 회복시키는 근본이 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이다.


듣건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율(郭????)ㆍ조종도(趙宗道)ㆍ곽재우(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어떤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도성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


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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