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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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存齋) 계우(契右)에게 답하여 올림 - 양 선생 왕복서 제1권

황(滉)은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합니다.

내가 지난 무오년(1558, 명종13)에 서울로 갔을 때에는 매우 낭패스러웠으나, 그래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겼던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온 뒤로 종적을 숨기고 지내다 보니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약이 아득하여 그리운 마음 그지없던 차에 마침 자중(子中)이 전하는 공의 편지와 사단ㆍ칠정에 대한 설을 받고서야 기쁨을 느꼈습니다. 곧 이어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구구(區區)한 나의 정황(情況)을 대략 말하였고, 다시 사칠 문자(四七文字)에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구차하게 공의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으므로 나의 소견을 대략 진술하여 자중에게 부탁해서 그대에게 전하여 나를 대신해 시정받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곧고 진실한 벗의 도움을 구하여 어리석음을 깨치려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일은 매우 경솔하였습니다.

이윽고 생각해 보니 나의 설에 온당치 못한 곳이 한두 군데 있는 것을 깨닫고 고치려 하였으나 미처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가을에 자중이 서울서 시골로 내려와 정추만(鄭秋巒)에게 보낸 공의 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속에 나의 설을 논박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전에 내가 온당치 못하다고 깨달았던 것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 끝에 조목별로 변석(辯析)하여 회답하겠다고 하였으므로 공의 변석을 목마르게 기다린 지 오래였는데, 천 리 밖에 사람을 보내와서 가르쳐 주는 글을 받고 아울러 틀린 것을 바로잡은 글 한 책(冊)을 받아 보니, 논변(論辨)하고 증거를 댄 것이 지극히 자세하여 헤매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계려(計慮)가 더없이 지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더운 여름이 가고 서늘한 가을이 오는 이때 소리(素履)가 청복(淸福)하고 신상(神相)이 매우 편안하다는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재능이 졸렬하고 형편없는 나는 평생 병이 몸에서 떠나지 않아 벼슬에 나아가면 직책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녹만 탐한다는 비난이 있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지체하고 도망하여 부끄럽게도 성은을 저버린다는 책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는 노쇠함이 더욱 심하여 현기증이 자주 나고 몸은 마치 마른 등나무 같으니 다시 사람 축에 끼일 수가 없습니다. 지난 세월은 이미 뒤쫓아 가 바로잡을 수 없거니와 오늘에 이르러서 비록 조문석가(朝聞夕可)의 소망이 있으나, 날마다 면려해주는 스승과 벗들도 없이 단지 서책 나부랭이 속에 종사할 줄만 아니 관규여측(管窺蠡測)과 같아 얻은 바가 온전한 것이 아니어서 조금씩 쌓은 것마저 곧 흩어져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명의(名義)를 말하면 바람이나 그림자처럼 실상이 없고 심적(心迹)을 준거(準據)해 보면 엇나가고 모순되어, 이와 같이 지극한 우리 벗님의 충고(忠告)와 선도를 받고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가슴에 담아 공의 고마운 뜻의 만분의 일도 따를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조목별로 회답하여 끝까지 가르쳐 주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둔재인 내가 문자와 의리에 대하여 여러 날을 두고 정밀히 생각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가 없는데, 대략 공이 논한 바를 보건대 너무 광대하고 미묘하여 선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등의 조항에 대하여 스스로 어그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 이외에는 끝도 없이 아득하여 요령을 터득할 수 없는 데다가 연일 빈객이 찾아왔으므로 사리를 궁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또 공이 보낸 사람이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우선 대충 써서 회답하고, 변목(辨目)은 남겨 두었다가 후일 유태호(柳太浩)의 인편을 기다려 불민함을 사죄하려 하니, 그래도 될는지요?

우리 벗님은 이렇게 박학하고 조예가 깊어 쭉 뻗은 길에 준마를 풀어놓아 달리도록 한 격이니, 상정으로 말하면 나의 일이 이미 끝났다고 하여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고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기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공은 도리어 벼슬을 얻은 것에 대하여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뜻을 구하는 데에 분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과(考課)의 일이 마침 그때에 있었던 것은 하늘이 공을 완전한 사람으로 완성시켜 주려는 바였으니, 어쩌면 그리 다행스러운지요. 지난해 내 편지에 운운했던 것은 모두 공이 이미 홀로 터득한 바로서 나의 근심이나 생각으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공의 편지에는 부당하게 여기지 않고 매양 반복하여 말하였으니, 또 포용하지 않음이 없는 큰 도량과 비근(卑近)한 말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어 매우 다행입니다.

출처거취(出處去就)의 설에 대해 강후(康侯 호안국(胡安國) ) 스스로 마음속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설에 의심을 품고서 회암(晦庵 주자(朱子) )의 벗에게 묻는다는 것으로 질정한 것은 과연 공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평소 회암의 정견(定見)은 만 길의 절벽처럼 우뚝하여 남들의 말로 인하여 진퇴하는 바가 조금도 없었으니, 또 이것을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편지에서 “세환(世患)을 겪었기 때문에 처지(處地)와 처시(處時)에 부득이한 경우가 있었다.”라고 한 나의 말은 기세가 꺾이고 위축되어 약해진 데서 나온 늙은이의 말에 가까우니, 기운이 강성하고 한창때인 공은 비루하게 여겨 배척할 것 같은데도 도리어 그 말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의리(義理)를 익히 강구하고 세상에 대처하는 것을 깊이 살피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병이 생긴 근원은 진실로 용렬한 의원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더구나 약을 지어 달라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일찍이 주자의 말을 보건대 “자기의 병을 알고서 제거하고자 한다면 다만 제거하고자 하는 그 마음만이 바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공은 다른 사람에게 약을 묻지 말고 곧 이 주자의 말씀 속에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힘써 치료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입에 쓴 약으로는 미칠 수 없는 신묘한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학문이 지극하면 처세(處世)에 어려움이 없다.”는 한 조항에 대해서는 당시 나의 소견에는 실로 고명하신 공이 이렇게 자처하는 것에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지금 공의 편지를 받고는 바야흐로 남의 말을 극진히 살펴보지 않은 나의 실수를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출(出)과 처(處) 양단(兩端)을 가졌다.”라고 한 이하는 공의 처한 바와 말한 바가 매우 훌륭했습니다. 공의 편지에 이른 바 “마치 촛불로 비추고 수(數)를 계산하며 거북으로 점을 친 것 같다.”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고 공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공의 편지에 ‘무골충(無骨蟲)’이란 한마디 말은 참으로 한바탕 크게 웃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미 이 벌레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앞사람들의 전철(前轍)을 답습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정(庖丁)이 칼을 댈 곳이니, 가벼이 처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건대 정 숙자(程叔子 정이(程頤) )와 주 부자(朱夫子)는 지극히 강대(剛大)한 명망으로 처세함에 있어 매사를 저토록 방심하여 지나치지 않아서 세상의 환란에 걸리지 않은 것은 다만 조금이라도 미안한 곳이 있으면 강력히 사퇴하여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신하가 사면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영원히 폐해졌으므로 혹시라도 사면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사람들이 노하고 시기하여 갖은 핍박으로 다시는 사피(辭避)하지 못하게 하여 자기들과 파란(波瀾)을 함께하도록 하고야 맙니다. 이와 같으므로 선비가 한번 조정에 서게 되면 모두 낚시에 걸린 고기 꼴이 되어, 마음이 강직하고 악을 미워하는 자는 대부분 화를 면하지 못하고, 아부하여 따르기만 하고 나약한 자들은 서로 이끌고서 시비는 가리지 않고 아첨하는 태도만 지을 뿐이니, 이 두 가지가 모두 안타까운 일입니다. 더구나 관(棺) 뚜껑을 덮기 전에는 중도에 아무리 이 일을 후회해도 소용없고, 발인(發軔)하자마자 이 소문이 사방에 전파되는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덕이 높아지지 않았는데 서둘러 경륜을 맡는 것이 복속(覆餗)의 계제(階梯)이고, 성의가 미덥게 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주장을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것은 몸을 욕되게 하는 길입니다. 전인(前人)들의 실패를 보건대 대부분이 이에서 연유하였으니, 이 학문을 전공하고자 한다면 숨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나의 소견이 우연히 이에 미쳤기 때문에 지난번 편지에 발설하였으니, 이는 대개 불로 뛰어드는 나방을 사람이 본받아서는 안 되고, 담장 밑에 서서 압사(壓死)하는 화를 취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을 뿐입니다.

질병이 나처럼 심하지 않고 부득이 세상에 나아간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직분(職分)과 책무(責務)를 다하는 데 각각 당연한 바가 있고 웅장(熊掌)과 어(魚)를 취하고 버리는 데 분명한 정칙(定則)이 있으니, 그렇다면 이른바 “요사(夭死)와 장수(長壽)에 의심을 하지 않고 몸을 닦아 죽음을 기다린다.”는 면에 있어서 세상에 나아가고 나아가지 않음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공의 편지에 “정성을 다하여 천명(天命)을 따르겠다.”는 말이 매우 좋으니, 요컨대 종래 버림받기를 바라던 마음으로 이 한마디 말을 굳게 지켜 시종 변하지 않는다면 거의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공이 부디 노력하여 우리 무리의 기대하는 마음을 위로해 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김하서(金河西)는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 )과 옥당(玉堂)에서 나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몸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세상 밖을 표류했습니다.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이 대체로 노장(老莊)에 있었기 때문에 중년에 자못 시와 술로 몸가짐을 무너뜨린 것을 애석히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그가 만년에 이 학에 뜻을 두었다 하고, 근래 바야흐로 그의 학을 논한 문자(文字)를 보건대 그의 식견이 매우 정밀했습니다. 그가 한거하는 가운데 터득한 것이 이와 같음을 생각하고 매우 가상하게 여겼는데 갑자기 고인(故人)이 되었다는 소식이 오니 비통함이 보통 정도가 아닙니다. 이제 그 아들에게 위로하는 글을 보내니 전달해 주기 바랍니다.

별지(別紙 고봉이 보낸 소첩자(小貼子) )에서 부탁한 전일의 편지 세 통을 아이들에게 등사시켜 보냅니다. 그리고 대자(大字)로 ‘존재(存齋)’ 두 글자를 써 달라는 것과 백지(白紙)와 당전(唐牋)에 글을 써서 보내 달라는 요청을 감히 경솔히 거절할 수가 없어 우선 받아 두지마는 다만 정력이 너무도 모자라서 평상시에 글씨 몇 폭을 쓰고 나면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날로 더해 가니, 어찌 이런 일을 억지로 한다고 해서 뜻대로 되겠습니까. 비록 억지로 쓴다 하더라도 공이 감상할 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명기(銘記)를 짓는 일이겠습니까. 이 일들은 모두 겨울쯤에 유태호 집안의 인편이 왕래할 때를 탐문하여서 그 편에 보낼까 하는데 말대로 될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유태호의 집이 이곳에서 그리 가깝지 않으니, 태호가 천 리 길을 온다 하더라도 천 리의 걸음에 어찌 쉽사리 나를 방문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만날 것을 기필하지 못하므로 그 집안 인편에 부치는 것이 서울에서 내려오는 벗에게 부탁하여 그대에게 전하게 하는 것보다 낫겠습니다. 벗에게 전하게 하면 소문이 널리 퍼질 혐의가 있지만 태호의 인편에 부치는 것은 그런 혐의가 없습니다. 끝으로 사문(斯文)을 위하여 천만 보중(保重)하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삼가 절하고 이 글을 존재(存齋) 현계(賢契) 좌하(座下)에게 올립니다.

가정(嘉靖) 39년 경신년(1560) 9월 1일에 병인(病人) 진성(眞城) 이황은 눈이 어두워 함부로 초했으니 송구합니다.


이일재(李一齋)에 대하여 이름을 들은 지는 오래되었으나 그의 학문이 어떠한지는 몰랐는데, 이번에 태극(太極)을 논하면서 서로 더불어 왕복한 설을 보내 준 것을 받았습니다. 미처 겨를이 없어 자세히 참고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대략은 알 수 있었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그의 학설의 잘잘못은 내가 미칠 바가 아니나, 후일을 기다려 내가 의심되는 바를 진헌(進獻)할까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옛사람이 이른 바 “자기가 있는 줄만 알고 다른 사람이 있는 줄은 모른다.”는 병통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작은 병통이 아닐 듯한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가 한두 군데의 글뜻을 잘못 본 것은 논할 것도 없고, 오직 이 병통을 먼저 제거한 뒤에야 더불어 이 학문을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참람하고 경솔합니다만 공이 일재의 병통이 있는 곳을 찌르는 데는 언뜻 보고도 하나하나 정확하면서, 자신에게도 이러한 병통이 약간 있음을 면하지 못한 듯하니 어째서입니까? 나 역시 그러한 속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의 설을 오인(誤認)함이 이와 같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깊이 생각하여 뉘우칠 것입니다.

왕원택(王元澤)은 어떤 사람이고, 그 말이 어느 책에 나오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뒤에 분명히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담암(澹庵)이 실절(失節)한 일은 전배(前輩)들의 탄식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주자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른 바 ‘탐생좌두(貪生莝豆)’는 이 몸 역시 그 출처를 알 수 없어 매양 마음이 매우 심란하였습니다. 그러나 “뻔뻔스레 다시 와서 준걸 따라 노니네.〔靦面重來躡俊遊〕”의 ‘섭(躡)’ 자로 보건대 다른 사람의 일로서 담암이 그 일을 따라감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후일을 기다립니다.

황은 또 복계(覆啓)합니다.

[주-D001] 소리(素履) : 

안분수기(安分修己)하는 선비의 생활을 가리킨다.

[주-D002] 신상(神相) : 

다른 사람의 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주-D003] 조문석가(朝聞夕可)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 夕死可矣〕”를 줄인 말이다.

[주-D004] 관규여측(管窺蠡測) : 

대통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전복껍질로 바닷물의 양을 헤아린다는 말로, 식견이 좁음을 의미한다.

[주-D005] 유태호(柳太浩) : 

유경심(柳景深 : 1516~1571)을 말한다. 태호는 자이고, 호는 구촌(龜村)이다. 1544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정자(正字), 수찬(修撰)을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뒤에 대사헌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주-D006] 포정(庖丁)이……곳 : 

포정은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인물로, 능수능란하게 소를 잘 잡는 백정이다. 여기서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곳이라는 뜻이다.

[주-D007] 복속(覆餗) : 

《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에 “구사는 솥의 발이 부러져서 공(公)에게 바칠 음식을 엎었으니 그 얼굴이 무안하여 붉어진 것이라 흉(凶)하다.” 한 것에서 온 말로, 재능 없이 분수에 넘치는 자리에 앉아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8] 웅장(熊掌)과……데 : 

생선을 생(生)에, 웅장을 의(義)에 비유한 말로, 생과 의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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