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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어록〔白蓮社語錄〕 - 손재집

백련사 어록〔白蓮社語錄〕 - 손재집 제9권 / 어록(語錄) : 박광일(朴光一, 1655~1723)

○ 기사년(1689, 숙종15) 2월에 선생께서 세자(世子) 세우는 일로 상소하였다. 사헌부(司憲府) 관원이 논계하여, 선생을 제주도에 안치(安置)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달 18일 선생께서 선암(仙巖)에 도착하였다. 광일이 미리 여기서 기다리다가 들어가 절하고 위로하며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오래전부터 이 걸음이 있을 줄 알았다.”라고 하고, 이어서 묻기를 “요새 무슨 책을 읽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여러 책을 대강 보느라 전일하게 힘쓰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또 말하기를 “부모님 모시기는 어떠한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가친께서 선생님께 인사드리려고 지금 바깥채에 와 있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바로 심부름하는 동자를 시켜 문안 인사를 전하게 했다.


또 일어나서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중도에 부치신 편지는 잘 받았으나 이곳에는 《주자어류》가 없어서 미처 말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자대전(朱子大全)》이 있기에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주자대전》은 이미 행장(行裝)에 가져왔으나 《주자어류》는 짐이 무거워서 멀리 가져오기 어려워 남중(南中 호남 지방)의 친구에게서 빌려 보려고 했네. 배우는 이는 하루도 《주자어류》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어쩌다 갖고 있지 못했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가난한 선비이다 보니 미처 장만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가난한 선비라 장만할 재력이 없으면 학궁(學宮 향교)에서 인쇄하여 보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선생님께서 오실 때 안청촌(安淸村)에 잠깐 들르셨다는데, 안청에서 맞이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중간에서 맞이하는 것은 혹시나 편하기 어려운 꼬투리가 될까 염려되어 곧장 여기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병든 몸이라 부득이 잠시 길옆의 집에서 쉬었는데, 그 집은 바로 죽은 친구 사술(士述)의 집이어서 슬픈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네. 그 집에 두 분 선생님의 왕복 편지가 있기에 빌려 왔네.”라고 했다.


박중회(朴重繪)가 들어와 절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기를 “오늘의 일을 무어라 말씀드리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옛정을 펴고 나서 말하기를 “옛날에 채서산(蔡西山)이 용릉(舂陵)으로 귀양 가게 되었을 때, 이는 죽으러 가는 걸음인데도 주자가 탄식하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무엇을 서로 위로한단 말인가.”라고 했다.


선생께서 묻기를 “서석산(瑞石山)은 여기서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30리입니다.”라고 했다.


○ 선생께서 광일에게 말하기를 “자네 어르신의 얼굴과 풍채를 살펴보니 병도 없고 강녕하신 듯하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겨울이 끝날 때까지 앓으시다가, 봄과 여름에는 연례로 조금 나아지십니다.”라고 했다.


또 묻기를 “오는 길에 동쪽으로 높고 큰 산이 바라다보이던데 전에 가 보지 못한 곳이었네. 그것이 서석산(瑞石山)인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 19일, 행차가 금성(錦城 나주(羅州))에 도착하였다. 20일, 이른 아침에 수여(受汝 박중회(朴重繪)의 자)와 함께 들어가 문안을 드리자 선생께서 시 한 수를 지어 수여에게 주시니, 대체로 옛정을 생각하는 뜻을 술회한 것이었다. 이어 판서(判書) 김만중(金萬重)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 사람이 평소에는 신부(新婦)와 같으나 입을 열면 곧 요긴한 말을 하였네. 지난해 윤휴(尹鑴)가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어전(御前)에서는 공자(孔子)도 굳이 휘(諱 이름을 부르지 않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김 판서가 면전에서 반박하기를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도 북쪽으로 향하여 무릎 꿇고 절하며 공경하는데 어찌 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굳이 휘할 것이 없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네. 임금께서 윤휴의 말이 옳다고 하였기 때문에 김 판서는 문외출송(門外黜送)이 되었네.”라고 했다.


○ 선생께서 왕복 편지를 열람해 보고 말하기를 “두 분 선생의 논설이 거의 부합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었으니, 애석하도다!”라고 하기에, 광일이 대답하기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견해는 정말로 명백한데, 퇴계(退溪)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마음을 답답하게 합니다. 주자는 ‘음양(陰陽)이 뒤섞여 있어도 그 단서(端序)를 잃지 않으니 곧 이것이 천리(天理)의 발현이다.’라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에 이런 뜻은 살피지 않고 이기호발설을 강력히 주장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봉의 ‘사단(四端)도 절도(節度)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말도 주자의 말씀입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주자가 자네 말처럼 그런 말을 했으니, 이는 이기(理氣)를 겸하여 말한 것으로, 그 말을 제대로 갖추려고 한 것이지. 그러므로 공자가 성(性)을 말할 때 ‘이어 가는 것이 선이고, 이루어지는 것이 성이다.[繼之者善, 成之者性.]’라고 하였고, 또 ‘천도가 변화함에 각각 그 성명을 바르게 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라고 하였으니, 성(性)을 논할 때는 공자께서 성을 논한 것만 한 것이 없네.”라고 했다. - 기(氣)를 논하면서 성을 논하지 않으면 밝지 못하고, 성을 논하면서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이 말을 하였다. -



○ 이날 영산강(榮山江)을 건너 죽두촌(竹頭村)에서 묵었다. 밤에 선생을 모시고 이야기할 때, 광일이 묻기를 “사계 선생께서, 우계(牛溪 성혼(成渾))가 임진왜란 때 강화(講和)하자고 한 문제에 대해 의심하셨다고 합니다. 우계가 강화를 논의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당시 강화하자는 계책은 무척 부득이한 상황에서 나왔네. 그때 우리나라가 보전을 믿고 있던 것은 오직 천장(天將 명(明)나라 장수)뿐이었는데, 천장이 굳이 강화를 하려고 하니 우리나라가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천장은 장차 우리를 버리고 돌아갈 것이고, 천장이 돌아가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부득이하여 강화하자는 의논이 나온 것이네. 그런데 당시 옥대(玉帶)를 뽑아 가거나 의심스런 흔적을 만드는 등 능변(陵變)이 발생한 것 등은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니, 우리나라는 왜노(倭奴)와 하늘을 같이할 수 없는 원수였지. 그러므로 사계 선생의 뜻은, ‘그때 죽기로써 지키는 것은 경도(經道)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권도(權道)이니, 이 경우에 만일 성인(聖人)이 계셨다면 권도를 쓸지 안 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인(賢人) 이하는 경도를 지키는 것이 훨씬 나을 터인데, 우계는 무엇 때문에 가벼이 권도를 썼느냐.’라는 것이었네. 사계 선생의 의심은 여기에 지나지 않네. 그 의리가 어떻다는 것을 논했을 뿐,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상소하였는데, 임금께서 보류해 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초본은 남아 있네. 대체로 그때의 사세가 위급했으므로 유서애(柳西厓)가 강화하자는 의견을 가지고 우계를 찾아와 의논하자, 우계도 그렇다고 생각하여 함께 청대(請對)하였네. 선조(宣祖)께서 그들이 화의(和議)를 주장하기 위하여 청대하는 줄 짐작하고 범할 수 없는 기색이 있었으므로 서애는 두려워 감히 그 말을 꺼내지 못했고 우계께서 꺼내었네. 이에 선조께서 진노하시어 시를 지어 벽에다 써 붙이기까지 하셨는데, 그 시는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하겠네.”라고 했다.


중회(重繪)가 말하기를 “‘어찌 간사한 말을 지어내어 의리를 부수고 삼군을 미혹하는가.[如何倡邪說, 破義惑三軍?]’라는 시는 선조의 시인데, 이것이 그때의 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것이 그때의 시인 듯하네. 그 뒤에 결국 화의를 받아들였으면서도 선조는 끝내 우계를 배척하였으니, 이는 감히 알 수 없는 일이네. 그 당시에 강화하자는 의논은 실지 서애가 먼저 제의했으나 임금 앞에서는 감히 꺼내지 못했기 때문에 남인(南人)들은 유독 우계에게만 허물을 돌렸으니, 가소로운 일일세.”라고 했다.


○ 광일이 묻기를 “지난번 의논한 괘변(卦變)에 대해 망녕되이 저의 좁은 소견으로 도(圖)를 만들어 보내드렸는데, 살펴보셨는지요?”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다 보았네. 그 도(圖)가 아마 행장 가운데 있을 것이네. 다만 《주역》의 괘변은 《역학계몽(易學啓蒙)》의 괘변과 서로 같은 것도 있고 같지 않은 것도 있으니, 이것이 내가 답답한 점이네.”라고 했다.


대답하기를 “《역학계몽》의 괘변은 괘(卦)마다 모두 64변(變)이 있다는 뜻이고, 《주역》의 괘변은 다만 강유(剛柔) 2효(爻)가 아래위로 왕래하는 뜻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순음(純陰 곤괘(坤卦))과 순양(純陽 건괘(乾卦))의 괘에는 모두 어디로부터 왔다는 뜻을 말하지 않았으니, 《주역》과 《역학계몽》이 각각 다른 까닭입니다. 《본의》에서 ‘어떤 괘는 어떤 괘로부터 왔다’라고 말한 것은 각각 저절로 그러한 형세이지, 사람의 힘으로 안배하여 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 마음이 후련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송 수찬(宋修撰)이 말하기를 “예전에 탑전에서 괘변을 강론할 때, 권 아무개가 - 그 이름을 잊었다. - 소견을 진달했는데, 그 말이 무척 지리했고 또한 《본의》와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곁에서 진달하기를, ‘주자의 《본의》는 이러이러한데, 지금 권 아무개의 말은 《본의》와 전혀 서로 부합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권 아무개는 이에 두리번거리며 ‘소신이 과연 망발을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권은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는데, 그 소견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했다.


○ 21일, 불수원(不愁院)에 도착하였다. 선생께서 광일에게 말하기를 “어제 강론한 괘변(卦變)을 지금 도(圖)로 만들어 다시 강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 도(圖) 하나가 소매 속에 있습니다.”라고 하고, 바로 선생께 드렸더니 선생께서 펴 보셨다. 광일이 강유(剛柔)의 괘(卦)가 서로 왕래하는 뜻을 설명해 드렸다.


송서구(宋敍九)가 말하기를 “지금 ‘강유가 서로 왕래한다’고 하였지만, 〈송괘(訟卦)〉 아랫부분의 중효(中爻 제2효(爻))는 〈천화동인괘(天火同人卦)〉에서 왔다고 하여도 될 터인데, 하필 〈돈괘(遯卦)〉에서 왔다고 해야 하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동인괘〉의 제2효(爻)와 제3효가 왕래하면 〈천택리괘(天澤履卦)〉가 되는데, 어찌 〈송괘〉가 〈동인괘〉에서 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서구가 한동안 생각하더니, 말하기를 “정말 그렇다.”라고 하고, 이어 선생께 아뢰기를 “이 도(圖)는 참으로 옳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흔연히 권이진(權以鎭) - 선생의 외손 - 을 돌아보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알겠느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평소 생각할 때에는 그런 까닭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 그림을 보니 정말 의심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 다음에 너는 이 그림을 보지 않고도 그려낼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권생(權生)이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거의 그려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가슴속에 있는 견해를 분명하게 그려낸 다음에야 비로소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광일이 아뢰기를 “이 그림은 제가 창조해 낸 견해가 아니고, 사실 주자의 일기(一奇)와 일우(一耦)가 왕래한다는 설에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지.”라고 했다.


○ 이날 정오에 어떤 사람이 술과 안주를 내어왔다. 선생께서 어육(魚肉) 등의 음식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사람과 물건은 모두 천지(天地) 사이에서 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음식을 먹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나중기(羅重器)가 경솔하게 대답하기를 “사람이 먹는 물건은 모두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입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 정자(程子)의 문인이 그런 말을 했는데, 정자가 ‘그러면 너의 몸은 이[蝨]를 위하여 생겼느냐’라고 하셨다. 정자의 이 말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대저 오행(五行)은 상극(相克)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만물(萬物)에도 서로 잡아먹는 이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 22일, 석주원(石柱院) 하촌(下村)에 당도하여 묵었다. 23일, 이른 아침에 들어가 문안을 드리니, 선생께서 박 참봉(朴參奉) - 박태초(朴泰初) -의 집에서 빌려 온 《주자어류》를 보시면서 좌우에 있는 사람을 시켜 분류(分類)를 정리하고 계셨다. 선생이 광일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하루라도 《주자어류》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옷을 팔더라도 사야 할 것이네. 판본(板本)이 금산(金山)에 있고 또 그 지방에는 이름난 절이 있으니, 책을 가지고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머물러 읽으면서 그 참에 인쇄하여 오면 좋을 것이네.”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선생님께서도 그 절에 다니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내가 이 절에서 글을 읽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좌중의 여러 사람에게 《주자어류》 가운데서 괘변(卦變)의 예(例)를 가려내게 하셨는데, 선생께서 주자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한 조목을 가리키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렇기 때문에 나도 평소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라고 했다.


○ 광일이 주자가 논의한 ‘하나의 기와 하나의 구가 변환한다[一奇一耦變換]’라는 곳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이 시생이 오늘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헤아려 보면 《본의》와 서로 들어맞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런가?”라고 했다.


묻기를 “《대학》 혈구장(絜矩章)에서 ‘백성이 배반하지 않는다.[民不背]’라고 말한 것은 ‘효를 일으키고 제를 일으킨다.[興孝興弟]’는 뜻이고, 백성도 자애를 일으킨다는 뜻입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바로 그렇지.”라고 했다.


○ 또 묻기를 “시생의 생각은, 자애[慈]는 사람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일로 밝히기를 ‘자식 기르기를 배운 뒤에 시집가는 사람은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애를 일으킨다[興慈]’고 하지 않고 단지 ‘배반하지 않는다[不背]’라고 했습니다. 시생의 견해는 이렇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혹여 견강부회는 하지 말게.”라고 했다.



○ 이날 저녁때 강진(康津)에 당도하였다. 성(城)안이 시끄러우므로 포구 마을에 가서 묵었더니, 새로 지은 집으로 깨끗하고 벽 위에 《천자문(千字文)》을 걸어 놓았는데 필법(筆法)이 매우 특이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것은 취금(醉琴 박팽년(朴彭年))의 글씨로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정말 취금의 글씨입니까?”라고 했다.


아, 취금 박 선생은 회덕(懷德) 사람이고 1백 년이 지난 뒤에 그 글씨가 바닷가 백성의 집에 걸려 있는 것이 대단히 이상한 일인데, 지금 회덕 노선생(老先生)께서도 이곳에 머물게 되셨으니 이것도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그 사이에 하늘이 정한 운수가 있는 듯하다.


○ 24일, 기해의례(己亥議禮)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 앞에 문답한 것이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 강론을 마치고 나서 선생께서 말하기를 “허목(許穆)은 예가(禮家)의 죄인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 송주석(宋疇錫)이 선생께서 수여(受汝 박중회(朴重繪)의 자)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 바쳤다. 선생께서 여러 차례 읊은 다음 좌중에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자네들도 모두 차운하게.”라고 했다. 물러나 차운하여 올렸다.



○ 선생께서 바야흐로 물과 토양을 염려하셨다. 송 서산(宋瑞山)- 선생의 아우인 송시걸이다. - 말하기를 “고을 사또가 ‘이 마을은 낮고 가라앉았으며 물맛도 지극히 좋지 않으니, 결코 오래 머물 땅이 아니다. 물맛은 오직 만덕사(晩德寺)가 좋으니, 배를 구하여 수리하는 동안 그 절에서 머무는 것이 옳을 듯하다’고 하는데, 그 말대로 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렇다.”라고 했다.


오후에 만덕사로 향했는데, 당시 바다와 산이 적막하여 전혀 봄기운이 없었는데, 절 아래 장춘동(長春洞)에 이르니 분위기가 물씬 늦봄 기상이 있었다. 대개 한 골짜기에 두루 사철나무이지만, 동백나무가 난만하게 붉은 꽃을 피우고 있으니, 장춘이란 이름이 진실로 허언이 아니었다. 누각에 오르니, 누상에 ‘만덕사백련사(晩德寺白蓮社)’라는 큰 글씨 여섯 글자가 한 현판에 같이 써 있었다. 노승이 말하기를 “이것은 김생(金生)의 글씨인데, 난세에 물속에서 화를 면했다.”라고 했다. 또 ‘만경루(萬景樓)’라는 큰 글씨 세 자가 있었는데 역시 감상할 만하였다.


이때 함평(咸平) 안중화(安仲和)가 와서 뵙고 말하기를 “소생은 안여해(安汝諧)입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제명(題名)하는 곳에 적힌 “안여해” 석 자를 가리키며, “내가 이것을 보고 이미 도착했음을 알고 있었네.”라고 했다.


누상에 서역(西域) 글자로 된 현판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대략 번역하여 뜻을 설명해 주셨지만 속된 소견으로는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겠다.


○ 25일, 일찍 일어나 문안 인사를 올렸다. 이어 아뢰기를 “선생님께서 장성(長城)에 도착하여 참봉 기정익(奇挺翼) 어른을 만나셨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만났네.”라고 했다.


말하기를 “이 어른이 ‘사람은 모두 미발(未發)의 중(中)이 있다’고 했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사람이 일 없이 고요히 앉아 있을 때는 외면으로 보면 비록 고요한 듯하지만, 그 속은 염려와 움직임의 싹이 없지 않으니 어찌 미말의 중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 식사 후에 선생께서 법당(法堂)에 나와 앉으시어, 바다 위에서 권(權 권이진(權以鎭))ㆍ윤(尹 윤주교(尹周敎)) 두 외손자를 보내는 서(序)를 지으셨는데, 선생께서 입으로 부르고 송주석(宋疇錫)은 받아 적었다. 내가 그 대의(大義)를 보니, 맨 첫머리에는 두 사람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으므로 멀리 보낸다는 뜻을 말하였고, 중간에는 두 사람의 세덕(世德)을 진술했고, 끝에는 학문하는 일을 권면하였다. 두 사람이 받들어 읽고는 서글퍼 하는 모습이었다.


선생께서 제주를 유람한 적이 있는 노승(老僧)을 불러 제주도의 물정ㆍ풍토와 경치를 물으셨는데, 그중에서도 한라산(漢挐山)을 더욱 자세히 물으셨다. 또 이어 묻기를 “만일 절 뒤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면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는가?”라고 하니, 노승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개고 일기가 맑은 날에는 볼 수 있는데, 마치 바다 구름 한 조각이 아득한 곳에 보일 듯 말 듯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했다.


선생께서 자리 귀퉁이에 《주자대전(朱子大全)》ㆍ《주자어류(朱子語類)》 및 《격양집(擊壤集)》, 두 선생의 왕복 편지 등의 책을 쌓아 놓고 그지없이 사색에 잠기셨는데, 항상 《격양집》을 주로 보셨다. 그 나머지는 마음 내키는 대로 보셨으며, 길을 가실 적에도 《격양집》 1권은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았다.


○ 선생께서 광일에게 말하기를 “‘초나라가 연나라로 문서를 보낸 이야기[郢書燕說]’에 대해 아는가?”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 뜻이 대개 ‘동을 물었는데 서를 답한다[問東答西]’는 뜻입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지 않네. 옛날에 초(楚)나라 재상이 연(燕)나라에 보낼 문서를 지으면서, 한 사람에게 촛불을 들게 하고 한 사람에게는 적도록 했다네. 초나라 재상이 ‘들라[擧]’고 했는데, 그 뜻은 불을 들라는 것이었네. 그런데 적는 사람이 살피지 못하고 바로 ‘거(擧)’ 자를 썼네. 초나라 재상 또한 살피지 못하고 연나라로 보냈다네. 연나라 사람이 ‘거’ 자의 뜻을 깊이 연구하고서, 이윽고 ‘이는 현자를 등용하라는 뜻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현자를 등용했더니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고 하네. 이것이 ‘영서연설’의 이야기일세. 한 글자의 착오가 남의 나라를 크게 다스려지게 했으니, 재미있는 일일세.”라고 했다.



○ 광일이 말하기를 “주자의 《태극도해(太極圖解)》 중에서 논의한 오행(五行) 한 대목은 바로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수음(水陰)은 양에 뿌리를 두고 화양(火陽)은 음에 뿌리를 둔다’고 한 설에 근거하여 곧장 도체(圖體)를 풀이한 것입니다. 황면재(黃勉齋)가 의심스럽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도리어 ‘수가 양의 어린 것이 되고, 화가 음의 어린 것이 된다.[水爲陽稚, 火爲陰稚.]’고 말한 것은 전혀 염계의 본의가 아니고, 나아가 주자가 《태극도(太極圖)》를 풀이한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시생이 망녕되이 좁은 소견으로 논변한 바가 있으나, 초본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면재의 설은 진실로 알 수 없는 데가 있네.”라고 했다.



○ 26일, 박수여(朴受汝)가 묻기를 “《대학장구(大學章句)》에 ‘의성(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곳을 얻은 차례이다[意誠以下, 則皆得所止之序]’라고 한 말은, 삼강령(三綱領)의 차례로 보면 의성에서부터 신수(身修)까지 이른 다음에야 ‘명명덕(明明德)의 지지선(止至善)’이라 말할 수 있고, 가제(家齊)로부터 천하평(天下平)까지 이른 다음에야 ‘신민(新民)의 지지선’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럼 ‘그칠 곳을 얻는 차례다[得所止之序]’라고 한 ‘서(序)’ 자로 보면 이와 같을 듯한데,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그렇지 않네. 나누어서 말하면 성의(誠意)에도 지지선이 있고 정심(正心)에도 지지선이 있고 수신(修身)에도 지지선이 있어서, 제가(齊家) 이하가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네. 그러므로 ‘의성 이하는 모두 그칠 곳을 얻는 차례다’라고 한 것이네.”라고 했다.


어떤 승려 한 사람이 종이 두 장을 올리면서 글씨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선생께서 한 장에는 ‘서암의 승려가 또렷하도다[瑞巖僧惺惺]’라 쓰고, 한 장에는 ‘그대는 큰 스님이 되지 말고, 큰 도둑이 되라[汝不爲大僧, 爲大盜]’는 여덟 자를 쓰신 다음 붓을 놓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주자어류》의 말이다.”라고 했다.


수여(受汝)가 또 장지(壯紙) 몇 장을 올리니, 선생께서 승려의 붓을 자기의 붓에다 합쳐 묶어서 시원스럽게 큰 글씨로 ‘고금의 역사 속에 한가롭고, 하늘과 땅 사이에 취했노라[閒中今古, 醉裏乾坤]’ 여덟 자를 쓰셨다.


○ 광일이 이별시 두 수를 써 올렸더니, 선생께서 차운(次韻)하여 주셨다. 이어 말하기를 “괴안국(槐安國)에 관한 고사를 아는가? 옛사람이 꿈에 개미를 따라 괴화나무 속으로 들어가서 40년 간 부귀를 누렸다는 것이 괴안국에 관한 이야기일세. 이것은 대체로 인간 만사가 모두 허사라는 말이네.”라고 했다.



○ 광일이 평소 지었던 《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을 올리며 말하기를 “이는 시생이 《맹자》를 읽을 때의 차기(箚記)입니다.”라고 하고, 이어 “고자가 말하기를, 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든 …… 기운에서 구하지 말라[告子曰不得於言, …… 勿求於氣]” 이하 몇 대목을 뽑아내어 내가 읽자 선생께서 들으셨다. 읽기를 마치자 선생께서 말하기를 “논의한 바가 옳다.”라고 했다.



○ 또 묻기를 “이과재(李果齋 이방자(李方子))의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에 모두 정(靜)과 동(動)이 있다’고 한 말은 혹 말에 병통이 있는 듯합니다. 오성이 제각기 움직이고 고요하여 혼연한 한 덩어리가 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주자께서 말한 괴루(塊壘 응어리)라는 병통에 가깝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께서 대답하시기를 “과재의 말은 병통이 되지 않네. 오성(五性)이 마음속에 혼연히 한 덩어리가 되어 있으면서 각각 조리가 있기 때문에 인(仁)이 움직이면 측은(惻隱)한 마음이 되고 의(義)가 움직이면 수오(羞惡)하는 마음이 되고 예(禮)가 움직이면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되고 지(智)가 움직이면 시비(是非)를 가리는 마음이 되는 것이니, 측은한 마음이 감동할 적에 의ㆍ예ㆍ지가 다 같이 움직인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네. 네 가지가 다 그러하네. 그러므로 주자의 ‘조리(條理)와 간가(間架)가 있다’는 설, ‘성(性)과 정(情)이 체(體)와 용(用)이 되며 각기 저절로 분별이 있다’는 설, ‘하나의 이치[理] 속에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이 서로 체(體)와 용(用)이 된다’는 설이 있는 것일세.”라고 하고, 이어 주자의 〈옥산강의(玉山講議)〉를 내어 보이셨다.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이 배[船] 구하기를 재촉하여 어렵게 배 1척을 얻었다고 하니, 선생께서 말하기를 “내일 작은 배라도 타고 내려가야겠다.”라고 했다.


○ 28일 오후, 박수여(朴受汝)와 집에 돌아가겠다고 아뢰었다. 선생께서 말하기를 “《호연장문답》은 내가 장차 가지고 가려고 이미 가동(家僮)에게 맡겼네.”라고 했다. 마침내 절하고 하직한 뒤 돌아왔다. - 위는 기사년(1689, 숙종15) 백련사(白蓮社)의 어록이다. -


[주-D001] 기사년 …… 상소하였다 :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元子)로 세우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이 위호(位號)가 너무 이르다며 “대개 철종(哲宗)은 열 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습니다.”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숙종은 송시열이 산림이므로 귀양은 보내지 않고 삭탈관작하였고, 송시열을 구원하는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1월 11일, 2월 1일》
[주-D002] 사헌부(司憲府) …… 내렸다 : 
송시열의 상소에 대해,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ㆍ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를 필두로 비판이 이어졌고, 곧 제주로 유배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5년 2월 7일, 3월 19일》
[주-D003] 선암(仙巖) : 
전라도 광산현(光山縣)에 있는 역참이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
[주-D004] 안청촌(安淸村) : 
전라도 광주목(光州牧)에 있던 마을이다.
[주-D005] 사술(士述) : 
박광후(朴光後, 1637~1678)의 자이다. 호는 살던 마을 이름 안청촌(安淸村)을 따서 안촌(安村)이라 하였다. 1677년(숙종3), 박광일이 박광후와 장기(長鬐)로 귀양 가 있던 송시열을 찾아갔다가 강론하고 돌아간 일이 있는데, 다녀온 이듬해 세상을 떴다. 제주로 귀양 가는 송시열을 배웅할 때 박광일과 같이 간 박중회(朴重繪, 1664~1691)가 박광후의 외아들이다. 《安村集 卷4 行錄》 《性潭集 卷30 安村朴公行狀》
[주-D006] 두 분 …… 편지 : 
이어지는 대화로 미루어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주고받은 편지를 말한다.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는 주장을 폈고, 기대승은 “사단 역시 정(情)이고, 따라서 기(氣)가 배제될 수 없다. 칠정 역시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발하는 것이다.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도식적으로 대거(對擧)하면 마치 두 가지의 대별되는 정이 있는 것 같고, 정에 또 두 가지의 선이 있어 하나는 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기에서 근원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며 8년에 걸친 논쟁을 벌였다. 《이황ㆍ기대승, 김영두 옮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2003》
[주-D007] 옛날에 …… 않았는데 : 
서산은 송나라 채원정(蔡元定)의 호이다. 자는 계통(季通)이다. 한탁주(韓侂冑)에 의해 위학(僞學)으로 몰려 주희와 관계된 인물들이 화를 당할 때 호남(湖南) 도주(道州)로 귀양 가 용릉(舂陵)에서 죽었다. 주희와 함께 《서경》을 주석한 채침(蔡沈)의 아버지이다. 《宋史 卷434 蔡元定列傳》
[주-D008] 서석산(瑞石山) : 
전라도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의 별칭이다.
[주-D009] 지난해 …… 되었네 : 
김만중(1637~1692)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중숙(重淑)이고, 호는 서포(西浦)이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다. 1675년(숙종1) 승지로 있을 때 경연에 입시하여, “윤휴(尹鑴)가 성상께 ‘《논어(論語)》의 주(註)를 읽을 것이 없으며 대문(大文)도 또한 많이 읽을 것이 못되고 다만 수십 번만 읽으면 된다.’고 청하였다 하니, 그 말은 마땅하지 못합니다.……‘글에 임하여 공자의 이름을 휘(諱)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진달했다 합니다. 만일 글에 임하여는 휘하지 않는 규칙을 쓴다면 어휘(御諱) 또한 군부(君父) 앞에서 휘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또 성인의 휘를 〈곧바로〉 읽는다 해서 나랏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년 윤5월 26일》
[주-D010] 사계 …… 합니다 : 
우계는 성혼(成渾, 1535~1598)의 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호원(浩源)이며, 호는 우계 또는 묵암(默庵)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27),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왜와의 화친에 관한 논의에서, 황신(黃愼)은 성혼이 왜와 화친을 도모한다고 생각하여 이를 잘못이라고 지적하였고, 이에 대해 성혼은 화친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시세에 따라 중국과 협력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牛溪集 卷5 答黃思叔論奏本事第二書》
[주-D011] 옥대(玉帶)를 …… 것 : 
임진왜란 때 왜적이 성종(成宗)과 중종(中宗)의 능을 파헤치고 왕의 시신을 꺼내어 불태운 흔적이 있었는데, 중종의 능 속에는 의심쩍은 시체 하나가 들어 있어서 그 진위(眞僞)를 알 수 없으므로 의논이 분분하다가 그 시체를 별도로 후장(厚葬)하고 능 옆의 불태운 흔적이 있는 재를 거두어 능 안에 환봉(還奉)한 일을 말한다. 《燃藜室記術 卷16 宣祖朝 二陵之變》
[주-D012] 유서애(柳西厓) :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호이다.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이현(而見)이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냈고 평양과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1598년(선조31) 북인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당했다가 복관되었으나 은거하며 세상을 마쳤다. 임진왜란의 교훈을 정리한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주-D013] 선조께서 …… 했다 : 
《손재집》 저본에는 별도의 어록인 듯 편집되어 있으나, 문맥으로 보아 송시열의 말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주-D014] 어찌 …… 미혹하는가 : 
선조의 시에 “한번 죽음은 내가 참을지언정, 강화란 말은 듣기 싫도다. 어찌 간사한 말을 지어내어 의리를 부수고 삼군을 미혹하는가.[一死吾寧忍, 求和願不聞. 如何倡邪說, 敗義惑三軍.]” 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병신년에 왜병이 철환하다》
[주-D015] 송 수찬(宋修撰) : 
송시열이 1689년(숙종15) 3월 제주(濟州) 북포(北浦)에 도착하여 위리안치되었을 때 수행한 손자 송주석(宋疇錫, 1650~1692)으로 보인다. 《국역 송자대전 부록 권11 연보10》 송주석은 1685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고, 1687년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국역 숙종실록 11년 8월 22일, 13년 9월 9일》
[주-D016] 대학 …… 뜻입니까 : 
《대학장구》 전문 10장에 “천하를 평안히 하는 것은 그 나라를 다스림에 달려 있다는 말은,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우함에 백성들이 효를 일으키고,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함에 백성들이 제(弟)를 일으키며, 윗사람이 고아(孤兒)를 구휼함에 백성들이 저버리지 않는다. 이러므로 군자는 구(矩)로 재는 도(道)가 있는 것이다.[所謂平天下在治其國者, 上老老而民興孝, 上長長而民興弟, 上恤孤而民不倍, 是以君子有矩之道也.]”라고 했다. ‘배(倍)’ 자는 ‘배(背)’ 자와 같다.
[주-D017] 어린아이를 …… 했습니다 : 
《대학》 전 9장에 “〈강고(康誥)〉에 ‘적자(赤子)를 보호하듯이 한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에 진실로 구하면 비록 정확히 맞지는 않으나 멀지 않을 것이다. 자식 기르기를 배운 뒤에 시집가는 사람은 없었다.[《康誥》 曰: ‘如保赤子.’ 心誠求之, 雖不中, 不遠矣, 未有學養子而后嫁者也.]”라고 했다.
[주-D018] 기해의례(己亥議禮)에 …… 했다 :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뜬 뒤, 인조 왕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가 효종에 대해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전례논쟁인 기해예송을 말한다. 정태화, 송시열의 기년복설(期年服說)에 대해, 허목은 효종이 차자로서 장자가 되었다는 차장자설(次長子說)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고, 윤휴(尹鑴)는 신모설(臣母說)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다. 《宋子大全 卷26 大王大妃服制議》 《국역 현종실록 7년 3월 25일》
[주-D019] 송 서산(宋瑞山) : 
송시걸은 송시열의 막내아우인데, 형 송시수(宋時壽)와 함께 송시열의 귀양길에 동행하였다. 《국역 송자대전 부록 권11 연보10》
[주-D020] 만덕사(晩德寺) : 
강진(康津)에 있는 절이다. 송시열이 1689년(숙종15) 2월 24일에 강진에 도착하고 26일에 백련사(白蓮寺)로 처소를 옮겨 있으면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3월 1일에 비로소 제주로 가는 배가 출발했다. 아래 기록을 보면 만덕사는 백련사와 같은 곳에 있었다. 《국역 송자대전 부록 제11권 연보》
[주-D021] 안중화(安仲和) : 
중화는 안여해(安汝諧)의 자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호는 이병재(理病齋)이다. 26세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1689년에 송시열을 만나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이때 ‘이병재’라는 호를 받았고, ‘조심주일(操心主一)’이라는 글을 받았다. 《손재집(遜齋集)》 권8 〈이병재 안공 묘지명(理病齋安公墓誌銘)〉이 실려 있다.
[주-D022] 기정익(奇挺翼) : 
1627~1690. 자는 자량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고, 호는 송암(松巖)이다. 기대승(奇大升)의 방5대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제릉 참봉(齊陵參奉), 효릉 참봉(孝陵參奉)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호남의 장성(長城), 영광(靈光)에서 평생을 보냈다.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遜齋集 卷8 松巖奇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71輯》
[주-D023] 격양집(擊壤集) : 
송나라 소옹(邵雍, 1011~1077)의 시집인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을 말한다. 소옹의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주-D024] 초나라가 …… 이야기 : 
초나라 수도가 영(郢)이다. 이 이야기는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에 나온다.
[주-D025] 황면재(黃勉齋)가 …… 것 : 
면재는 주희의 사위이자 제자인 황간(黃榦, 1152~1221)이다. 그는 《태극도해》에서 “양이 처음 생(生)해서는 수(水)가 아직 약하다가 목(木)을 생함에 이르러서는 이미 강성해진 것이요, 음이 처음 생해서는 화(火)가 아직 약하다가 금(金)을 생함에 이르러서는 이미 질(質)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가 양의 어린 것이 되고 목이 양의 성한 것이 되며, 화가 음의 어린 것이 되고 금이 음의 성한 것이 되는데, 《태극도해》에서 가리킨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했다.
[주-D026] 괴안국(槐安國)에 관한 고사 : 
순우분(淳于棼)이 술을 마시고 홰나무[槐樹]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가, 괴안국에 가서 그곳 왕의 부마가 되어 남가 태수(南柯太守)를 30년 동안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 보니 홰나무 아래에 커다란 개미집이 하나 있었고, 남쪽 가지에는 또 작은 개미집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꿈에서 보았던 괴안국과 남가군(南柯郡)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괴안몽(槐安夢)’,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는 말이 나왔다. 당(唐)나라 이공좌(李公佐)의 전기소설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에 나온다.
[주-D027] 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 : 
이 차기는 《손재집(遜齋集)》 권7 〈호연장문답병서(浩然章問答幷序)〉이다. 송시열은 세상을 뜨기 전 박광일에게 〈호연장문답〉을 읽고 난 뒤 몇 가지 의견을 적어 편지로 보냈다. 《국역 송자대전 제113권 박사원(朴士元)에게 답함 - 기사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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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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