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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증 형조 판서 이공 행장〔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수사 증 형조 판서 이공 행장水使贈刑曹判書李公行狀〕 : 강재집 제12/ 행장(行狀) - 송치규(宋穉圭, 1759~1838)

공의 휘는 지효(止孝), 자는 중순(仲純)이다. 이씨는 선계가 함평(咸平)에서 나왔으며 고려의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휘 언()이 시조이다. 대대로 벼슬아치가 이어졌으며 절의로 저명하였다. 고조 휘 종수(從遂)는 부사정(副司正)으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휘 종인(宗仁)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조부 휘 시()는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를 지냈다.

아버지 휘 유근(惟謹)은 대구 부사와 지제고(知製誥)를 지냈고 호는 죽담(竹潭)이며 초동(草洞) 보산사(寶山祠)에 배향되었다. 어머니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부사 한()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32년 계축년(1553, 명종8)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영리하여 여느 아이와 달랐다. 외모가 헌칠하고 재주도 뛰어났으며 절의(節義)를 좋아하였다. 한서(漢書)를 읽다가 충신과 열사의 전()에 이르면 그때마다 무릎을 치고 감정이 고조되었다.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에 증광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경인년 3월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고 가을에 도총부 도사로 옮겼다. 계사년(1593, 선조26) 봄에 경력(經歷)에 승진하였으며, 여름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결백하여 인사 고과에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박천 군수(博川郡守)로 옮겼는데 1년이 안 되어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 백성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임기가 아직 차지 않았는데 창성 부사(昌城府使)에 발탁되었다. 행정이 청렴하고 은혜가 두루 미치자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이웃 고을의 가난한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서 아이들을 들쳐 업고 왔는데 거의 수백여 가구나 되었다.

관찰사가 치적을 높이 평가해서 보고하여 통정대부로 특별히 승진시켰다. 얼마 있다가 봉화 전달에 실수해서 파직되어 귀향하게 되었을 때 고을 주민이 대궐로 가 상소를 올려 1년을 더 머물러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덕비를 새기고 또 생고치 수백 말을 거두어 본가로 실어 보냈는데, 토산품으로써 떠난 후에도 잊지 않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공이 물리치면서 싣고 온 사람들로 하여금 가지고 되돌아가도록 하고 고을 백성이 세금 낼 때 보태 쓰라고 하였다. 싣고 온 사람이 밤중에 공의 대문 바깥에 몰래 두고 가버리자 공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 가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여 마침내 가난한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구성 부사(龜城府使)에 제수되어 청렴하게 지내면서 잘 돌보아 주기를 창성 부사에 있을 때와 같이 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받들기를 부모처럼 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조정에서 변방에 우환이 있다고 여겨 만포 첨사(滿浦僉使)로 옮기게 하였다. 군사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휼하는 데 모두 적절하게 하였으며 위급상황에 대비하는 데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2월에 모친 곽부인 상을 당하였다. 슬퍼하면서 울부짖다 기절하여 주위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거상(居喪), 장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삼년상을 마치고 4년이 지나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부임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무기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충분히 확보하였으며 성벽의 깃발도 활기찬 모습을 띠면서 확 바뀌었다.

이해 12월에 상의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하였으며 교서를 내려 유시하기를 그대를 의지하여 만 리에 성을 쌓고 절도사 임무를 맡긴다. 그대가 나라에 한마음으로 봉사한 것을 가상히 여겨 포상하는 은전을 특별히 내린다.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쓰일 때가 있으니 하급 병졸 사이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신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임금이니 참으로 장수에서도 걸출한 사람이다. 군량을 비축하고 말꼴을 쌓아 두어 군수물자를 풍부하게 하고, 창을 만들고 갑옷을 수선하여 너의 군사를 다스리라. 칭찬이 날로 이르는 것은 나의 좌우가 사사로이 하는 말이 아니며 공적인 논의가 오는 것은 실로 그대의 명성과 공적이 드러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누차 변경 지방으로 나가 벼슬하였으므로 풍토병을 심하게 앓았다. 마침 질병이 심해져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귀향하는 여장은 텅 비어 단지 수중(手中)에 채찍 하나 뿐이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극력 감탄하였고 공의 현명함을 자주 칭찬하였으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아저씨의 청렴결백함은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하고 국사가 나날이 잘못되자 공이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하기를 이러한 시국에 벼슬하니 마음이 부끄럽다.”라고 하면서 끝내 가족을 데리고 풍덕(豊德)의 시골 별장에 이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국구(國舅)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감옥에 갇히자 인목대비를 별궁(別宮)에 두자는 논의가 계속 일어나서 인륜이 무너지려 하자 여론이 통분하였고 소인배들의 기세가 물길처럼 치솟았는데 어누 누구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분통을 견디지 못하고 앞장서서 상소문을 지어서 대궐로 달려가 올렸으나 흉악한 일당이 물리치고 왕에게 올리지 않았다.

공이 더욱 울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의 집에 곧장 달려가서 책망하기를 대감이 어찌 차마 하늘 아래에서 이이첨(李爾瞻) 패거리와 함께 인륜을 무너뜨리고 의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대비를 폐위하고 국구를 죽이려 하니 이것은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다. 대감이 그들과 함께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간악한 무리의 기세는 반드시 중단될 것이니 대감이 헤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감은 이이첨 패거리와 함께 나의 손에 있는 한 자루 칼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시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단지 나라를 위하여 한 목숨 버리기로 작정해서 의분에 찬 의견을 올렸으며 눈치 보는 것이 없었다. 흉도들이 벌벌 떨면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으며 공이 역적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엮어서 감옥에 가두었다. 공은 감옥 속에서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서쪽을 향하여 대비가 계시는 곳에 절하고 7일간 먹지 않고 말하기를 국모가 없는 나라에 살아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피를 토하고 사망하였다.

이이첨 패거리가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를 통쾌하게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대비가 공이 의로운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들었지만 공이 감옥에서 굶어 죽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공의 생사를 묻자 의금부에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대비가 매우 슬퍼하였다.

내탕금(內帑金)에서 조복(朝服) 한 벌과 고운 무명 50()을 추후에 부의하고 해당 관아에 교서를 내려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추증하고 아울러 공의 자손을 등용하라고 하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나주(羅州) 서쪽 죽포면(竹浦面) 분토동(粉土洞) 임좌(壬坐) 언덕 선영에 안장하였다. 부인인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부사 여랑(汝良)의 따님으로 어질고 자애로웠으며 부녀자의 법도가 모두 격식에 맞았다. 공보다 몇 년 뒤에 작고하였으며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2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선철(先哲)은 군수이며, 차남 선계(先繼)는 양자로 나갔고, 딸은 사인 장륜(張綸)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정()이고, 손녀는 교리 조중려(趙重呂)에게 시집갔다. 증손은 만영(萬英)이고, 증손녀는 심각(沈殼), 이광화(李光華)에게 시집갔다. 현손은 천삼(天三)이고, 현손녀는 홍서징(洪瑞徵), 김태광(金泰光)에게 시집갔다. 5대손은 경휘(景輝)이며, 둘째는 현감인 경악(景岳)이며, 셋째는 경항(景恒)이고, 5대손녀는 정시창(鄭始昌)에게 시집갔다.

공이 작고한 지 1백여 년 뒤에 광주(光州)의 진사 박광세(朴光世) 등이 상소를 올려서 정증(旌贈)하고 사당을 세울 것을 청원하자 조정에서는 사체(事體)가 중대하다고 판단하여 단지 정려문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 공은 기이한 자질을 타고났으며 덕행이 뛰어났다. 무관으로 출신(出身)하였으나 문장 또한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검소하여 여러 고을의 수령을 두루 역임하였지만 재산 증식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빙벽(氷蘗)에도 한결같은 절조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으며 가정에서는 화목하게 지내고 인척과는 친근히 지내고 친구와 신뢰로 사귀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으며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

공이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있을 적에 첨사(僉使) 원유남(元裕男)과 평소 사이좋게 지냈는데 원유남이 마침 사건에 연좌되어 잡혀가면서 공에게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하자 공이 자기 집사람처럼 보살펴주었다. 원유남이 남에게 공의 풍모와 의리를 말할 때마다 옛사람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당대의 명사 모두가 인정하였으며 감히 무인(武人)으로 보지 않았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금용(金墉)의 변이 일어났을 적에 위로는 조정의 관료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흉당(凶黨)에 달라붙어서 다투어 흉악한 상소를 올렸다. 흉악한 패거리들이 함정을 크게 설치하여 말하는 사람은 무거운 죄를 주겠다고 하자 사람들 모두 겁을 먹었다.

하지만 공은 직책도 없는 무신(武臣)으로서 백사 이항복, 성옹(醒翁) 김덕함(金德諴)보다 먼저 상소를 올려 대의(大義)를 말하여 단지 국모가 있음을 알고 내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올린 소가 승정원에서 막히자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국정을 책임지는 영의정을 꾸짖고 기세등등한 흉도를 멸시하였다.

7일간 감옥에 있으면서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하였는데 순수하고 강직한 정기를 타고나지 않았다면 굳세고 결연한 태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 위대하다. 계축년에 올린 소가 임금에게 올라가지 못한 채 산일(散逸)되어 후대에 의를 숭상하는 선비가 고증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초동팔현행록(草洞八賢行錄)에 서문을 쓴 적이 있는데 죽담공(竹潭公)의 행적과 관련된 부분에서 공이 수립한 탁월한 업적도 대개 거론하였다. 지금 공의 후손 돈풍(敦豐)이 공의 외손(外孫) 부솔(副率) 이의경(李毅敬)이 지은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서 오랫동안 붓을 잡지 않았지만 공의 탁월한 절개와 위대한 행적이 후대에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쓴 것이 이와 같다.


[-D001] 이공 : 이지효(李止孝, 1553~1613),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중순(仲純)이다. 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역임하였으며 형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계축옥사 때 바른 말을 하다가 옥에 갇혀 죽었다.

[-D002] 보산사(寶山祠) : 나주시(羅州市) 다시면(多時面) 영동리(永同里) 초동(草洞)에 있다. 이곳에는 가정(嘉靖)과 만력(萬曆) 연간에 활동한 여덟 사람을 모시고 있는데 죽담(竹潭) 이유근(李惟謹)야우(野憂) 장이길(張以吉)창주(滄洲) 정상(鄭詳)한천(寒泉) 유주(柳澍)삼주(三洲) 최희열(崔希說)금애(錦崖) 이언상(李彥詳)남호(南湖) 유은(柳溵)사촌(莎村) 최사물(崔四勿)이다. 강재집5초동팔현행록서(草洞八賢行錄序)가 있다.

[-D003] 정증(旌贈) : 사후에 정려문을 세워 포창하는 일을 말한다.

[-D004] 빙벽(氷蘗) :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 쓴 소태나무를 씹는다는 뜻으로, 굳게 절조를 지키면서 청백하게 사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나라 백거이(白居易)“3년 동안 자사로 있으면서, 맑은 얼음물을 마시고 쓰디쓴 소태를 씹었노라.[三年爲刺史 飮氷復食蘗]”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白樂天詩集 卷1 三年爲刺史

[-D005] 금용(金墉)의 변 :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가 서궁(西宮)에 유폐된 것을 말한다. 중국 삼국 시대의 위주(魏主) 조방(曹芳)과 진()나라의 혜제(惠帝) 등이 각각 폐위된 뒤 금용성(金墉城)에 옮겨진 것에서 유래한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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