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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은 기공(기의헌) 행장〔棄隱奇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기은 기공 행장〔棄隱奇公行狀〕 - 강재집 제12권 :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

공의 휘는 의헌(義獻), 자는 사직(士直), 성은 기씨(奇氏),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씨 뿌리는 기자(箕子)에서 나왔으며 평(平)이 시조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건(虔)이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지평(持平)에 발탁되었고 대사헌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었는데 광묘(光廟 세조)가 수선(受禪)하자 청맹과니라고 핑계를 대고 벼슬하지 않았다. 청백리로 기록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고조 휘 찬(禶)은 홍문관 부응교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증조 휘 진(進)은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는데, 덕성군(德成君) 복재(服齋) 선생 준(遵)이 그의 동생이다.
기묘사화 뒤에 광주(光州)로 은퇴하여 그대로 광주 사람이 되었다. 조부 휘 대림(大臨)은 고봉(高峯) 선승 대승(大升)의 형이며 동부 참봉(東部參奉)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버지 휘 효분(孝芬)은 부사과(副司果)로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유회(惟誨)의 따님이다.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 1월 9일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여 계부(季父)인 현감공 효전(孝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화평하였고 덕성이 심후하여 남을 대할 때는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마음가짐과 처신은 자연스러웠다. 여러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받아들여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하였으며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손님과 벗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여도 여유롭게 담소하여 가타부타하는 것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할 때는 강단(剛斷)이 남보다 뛰어났다. 집안에서의 행실은 매우 독실하여 계부와 백형이 사는 곳이 조금 멀었으나 명절과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물러나서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백형이 병이 들자 집으로 모셔와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하였다.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여러 조카들을 길러 혼인시킬 때까지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종통을 귀중하게 여기는 데에 뜻을 다하였고 제전(祭奠)을 돕는 데에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바쳤다. 평소 성격은 영리(榮利)에 담담하였다. 광해군 때에 8촌 형 자헌(自獻)이 나라의 권력을 쥐자 달라붙는 사람이 문에 가득하였으나 공 홀로 굳건히 지조를 지켰다. 내한(內翰 한림원 학사) 남성신(南省身)은 곧 공의 인척으로 당시 사람들의 추중을 받았다. 공을 끌어당기려고 누차 은근히 말하였으나 또한 듣지 않았으니 공의 선견지명과 지조의 탁월함이 이와 같다.


인조 정묘년(1627, 인조5)에 강로(姜虜 강홍립(姜弘立))가 청나라 군대를 끌고 국경으로 들어오자 위급 상황을 알리는 보고가 나날이 급하였으며 임금은 강화도로 피신 가고 세자는 전주(全州)로 내려갔다. 사계 김선생이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공을 도유사(都有司)로 임명하였다. 공은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아서 밤을 새워 달려갔으나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왕세자를 전송하여 여산(礪山)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숭정(崇禎) 병자호란(1636, 인조14)으로 청나라 군대가 도성으로 쳐들어왔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애통한 조서를 내리고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자 공이 또 거의도유사(擧義都有司)로서 한 도(道)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청주(淸州)에 이르자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고 돌아왔다. 공이 꿈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병자, 정축 연간의 큰 화란에 / 子丑年間時大亂
임금 수레는 어디로 향하는가 / 聖君車駕向何之
오늘날 이 몸이 쓸데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 莫言今日身無用
백발백중 오호궁을 가지고 있다오 / 百發烏號手自持


공이 나라를 깊이 생각하고 의리를 부지하는 정성이 본성에 근거한 것을 이 시에서 알 수 있다.


공은 고봉 선생의 종손(從孫)으로 가학에 이미 연원(淵源)이 있었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네 글자에 공부를 깊이 하였으며, 《주역》을 파고들어 《계몽전의(啓蒙傳疑)》를 가장 오래도록 읽었는데 다음의 짤막한 시가 있다.


하나의 이치가 천지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으니 / 一理已具兩儀前
흩어져 천 가지가 됨을 속유들이 어찌 알리오 / 俗儒寧識散爲千


손수 성현의 격언을 써서 좌우에 걸어 두고 좌우명을 지었으며 또 한 편의 글을 지어 자질(子姪)의 학업을 권면하였다. 《근사록》, 설문청(薛文淸)의 《독서록(讀書錄)》 등의 저서를 더욱 좋아하여서 깊이 빠져 연구하느라 침식을 잊었으며 노년이 다가오는 것조차도 잊었다.


집이 본래 곤궁하였으나 태연히 대처하였으며 ‘육오(六吾)’라고 서재 이름을 지었는데 시명(詩銘)이 있으며, 자호를 기은(棄隱)이라 하고 설(說)을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의약과 천문 또한 그 개요를 대략 이해하였으며 만년에는 조예가 더욱 정심하고 덕행과 도량이 순수하여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 서로 송사를 일으킨 사람이 판정을 구하면 공이 옳고 그름을 깨우쳐 주었는데 듣는 사람이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처신을 비난하여 망대부(莽大夫)라고 비유하자 공이 글을 지어 변호하였는데 상론자(尙論者)가 공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숭정 계사년(1653, 효종4) 4월 9일에 작고하였으니 향년 67세였다.


부인 광주 조씨(廣州趙氏)는 지기(之麒)의 따님이다. 자녀 넷을 두었는데 장녀는 충의위 이원혁(李元赫)에게 시집갔고, 장남은 전(瑑)이고, 차남은 문과에 급제한 정자(正字) 침(琛)이고, 막내딸은 요절하였다. 내외 손자와 증손은 다 기록하지 않지만 학문과 행실로 집안을 계승한 사람이 많은데 증손 정룡(挺龍)은 학술과 덕망으로 더욱 알려졌고 교관(敎官)으로 증직되었으며, 현손 처훈(處勳) 또한 집안의 아름다움을 잘 이어갔다.


아, 공은 복재와 고봉 두 분 집안의 후예로서 덕성(德性)이 아름답고 지조가 견고하여 행실은 가정에서 드러났고 신뢰는 고을에서 인정받았다. 광해군 때의 재상이 공과 가까운 인척이었지만 끝내 오염됨이 없이 초탈하게 자신을 지켰다.
두 차례나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어려움에 달려갔을 때는 충성과 울분이 솟구쳐 세운 공적이 매우 대단하였다. 또 선현의 출처를 변론한 글과 자질(子姪)에게 학문을 권면한 글은 공명정대하고 진실하여 공의 학문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공의 5대손 종락(宗洛)이 아들 상협(商協)을 보내어 나에게 행장을 부탁하였다. 나는 후대에 태어나서 듣고 본 것이 직접 미치지 못하였지만 삼가 공의 아들 정자군(正字君)이 지은 가장과 종락이 기술한 것을 근거로 수정한 것이 이와 같다. 덕을 아는 자가 살펴 주기를 바란다.


[주-D001] 기공 : 
기의헌(奇義獻, 1587~1653)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사직(士直), 호는 기은(棄隱)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을 하였다. 저서로 《기은유고(棄隱遺稿)》가 있다.
[주-D002] 고룡리(古龍里) : 
현재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이다.
[주-D003] 오호궁(烏號弓) : 
뽕나무 가지로 만들었다는 질 좋은 활의 이름이다.
[주-D004] 동심인성(動心忍性) :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을 발동(發動)하고 성색취미(聲色臭味)의 성품을 참는다는 뜻으로,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히 자신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孟子 告子下》
[주-D005] 설문청(薛文淸) : 
명(明)나라의 학자 설선(薛瑄, 1389~1464)을 말한다. 자는 덕온(德溫), 호는 경헌(敬軒), 문청은 그의 시호이다. 성리학에 밝으며 저서로 《독서록(讀書錄)》, 《설문청집(薛文淸集)》이 있다.
[주-D006] 망대부(莽大夫) : 
후한(後漢)의 양웅(揚雄)을 폄하하는 말이다.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여 국호를 신(新)으로 고치고 칭제(稱帝)하였을 때 양웅이 절개를 잃고 왕망 밑에서 대부(大夫)를 지냈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7] 상론자(尙論者) : 
옛 사람의 일을 평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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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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