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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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량(奇子亮) 정익(挺翼) 에게 답함 - 명재유고 제17권

기자량(奇子亮) 정익(挺翼) 에게 답함 갑인년(1674, 현종15) 5월 16일 명재유고 제17권 윤증(尹拯)

어깨를 나란히 한 것처럼 서로 바라보면서도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서로 막혀서 살아왔으니, 어찌 그대의 편지가 멀리서 날아와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나를 크게 위로해 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이 일었습니다.
슬하의 세 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하니 듣는 사람도 차마 듣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직접 당한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치에 맞게 세상을 달관하고 평소 건강을 유지하여 아무리 어렵고 우환이 있는 가운데에서도 학문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대에게 감복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화란 속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질기고도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며 한결같이 칩거해 살아가고 있으니, 그다지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박군(朴君)과 주고받은 여러 설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으니, 나를 따돌리지 않은 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세상에 이러한 이야기로 서로 강설을 하는 경우가 실로 드물고 오로지 과거 공부에 휩쓸려서 이록(利祿)만을 추구할 뿐이니, 어찌 눈을 비비고 보지 않겠습니까.
다만, 식견이 고루하고 몽매하여 여기에 참여하기에 부족한데도 과분하게 이런 배려를 받고 보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그대의 말씀이 정중하기에 끝내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이를 통하여 따끔한 가르침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다면 나로서도 다행이겠습니다. 그래서 감히 나의 견해를 일일이 피력하여 별지(別紙)에다 기록하였으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길이 멀어서 함께 모이지 못하는 것을 그대가 한탄하였는데, 이는 실로 나의 한탄이기도 합니다. 헛된 명성과 실제의 병폐가 안팎으로 나를 병들게 하고 사방의 외우(畏友)들과 교유하여 가르침을 받을 길도 없으며, 나이가 50이 되어 더 이상 진보할 가망도 없으니, 나 자신에 대한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노형(老兄)이 덕음(德音)을 아끼지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면 노형이 두터운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될 것이요, 나에게는 더욱 큰 다행이 되겠습니다. 간절하게 기다리겠습니다. 마침 감기로 거의 죽었다 겨우 살아나서 병상에 누워 있은 지가 지금 40여 일이 되었습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혼몽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별지]

박군(朴君)에 대해서는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노형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니, 고루한 내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설을 본다면 아무리 노형이 그를 두둔한다 하더라도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단에도 크기가 있어서 주장하는 인물이 크면 그 폐단이 깊고 인물이 작으면 그 폐단이 얕습니다. 노형이 이미 그와 벗을 하였다 하니 불가불 그 학설의 오류를 힘껏 파헤치고 공격하여 끝까지 회개를 시켜야 할 것입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선비의 자득(自得)이라는 것은 반드시 성현이 말씀하지 않은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현의 말씀 가운데에서 지극히 당연하여 바꿀 수 없는 이치를 진정으로 알아내는 것이 바로 자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성리설(性理說)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 이르러 크게 체계화되어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정자와 주자의 학설 밖에서 이치를 찾으려고 한다면 이는 착견(鑿見)이요, 사설(邪說)이 될 뿐입니다.

박군이 이 말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마음을 쓰는 데가 없는 사람은 그럭저럭 범범하게 일생을 보내고,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또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바른길을 내버려 두고 굽은 길을 찾으며 경솔하게 자신을 너무 크게 여겨 끝내는 아무것도 터득하지 못하니 매우 한탄스러운 노릇입니다. 보여 주신 책자는 의당 돌려 드려야 하겠지만 한 번 더 보기 위해 그대로 가지고 있겠습니다.

말씀하신 사우(士佑)는 어떤 사람입니다. 남쪽 지방에 함께 학문을 할 만한 사람으로 지금 누구누구가 있습니까? 나에게 알려 주어 고루함을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설(理說) 운운


변론한 것이 맞는 듯합니다. 다만, 그의 주장에서 이른 바 “사물은 이(理)에 의지한다.[物依於理]”라고 한 것 또한 폐단이 있으니, “사물이 그 이(理)를 가지고 있다.[物有其理]”라고 고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체용변화(體用變化)” 이하는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변화귀신(變化鬼神)과 진퇴존망(進退存亡)은 모두 기(氣)이니, 이(理)를 논할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 가운데 “진퇴존망지간(進退存亡之間)”이라 한 것과 “유무동정지간(有無動靜之間)”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理)를 별개의 사물로 보아서 그 사이에 매달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한 것인 듯합니다. 인용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한 것 역시 그 뜻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도기설(道器說) 운운


이 단락은 전체가 선유(先儒)의 학설과 다르므로 굳이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변론한 내용 가운데 “상면지상(上面之上)과 하면지하(下面之下)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적절치 않은 듯합니다. 상하(上下) 두 자를 상면(上面)과 하면(下面)으로 보지 않고 무엇으로 보겠습니까.
또 “무형이상(無形而上)”과 “유형이하(有形而下)”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적절치 않습니다. 대체로 형(形)은 사물이므로 그 상면에 비어 있는 것을 도(道)라 하고 하면에 꽉 차 있는 것을 기(器)라고 한 것뿐이니, 그렇다고 어찌 이(理)가 위에 있고 기(氣)가 아래에 있어 그의 견해처럼 확연히 두 가지로 나뉜다고 말하겠습니까?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운운


이 단락 역시 모두 주자(朱子)와 다른 견해를 내세웠으니, 굳이 변론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두 선생의 말에 각자 치우침이 있어 경문(經文)의 본뜻과는 합치되지 않는다.” 하고 또 “두 선생의 뜻은 모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두 개의 마음으로 나누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투를 보건대 오만하게도 자신을 정자(程子)와 주자의 위에다 놓고 더 이상 후학(後學)으로서 선사(先師)를 존경하는 뜻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심하게 도리에 어긋난 사람은 곧장 북을 쳐서 성토하여야 마땅하고, 그와 사사로이 어울려 성현을 모독하는 죄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변론 가운데 남헌(南軒)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그의 생각과는 다른 듯합니다. 그가 말한 유위무위(有爲無爲)는 곧 동정(動靜)을 말한 것이고 남헌이 말한 유위무위는 의리(義利)를 말한 것입니다. 다만, 하문(下文)의 보설(補說)로 보건대 그대도 이미 그 오류를 깨닫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설(性說) 운운


근래에 정랑(正郞) 김극형(金克亨)이 성(性)을 체(體)로 삼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용(用)으로 삼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이 주장이 또한 그와 같습니다. 대체로 그의 의도는 필시 성을 높여서 제일층(第一層)으로 삼으려 한 나머지 다음의 네 가지로 불리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일리(一理)라는 것이 바로 인의예지요, 인의예지 밖에 별도로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님을 모른 것입니다.
명도(明道)는 “성(性)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성(性)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는데, 위의 ‘성’ 자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성이요 아래 ‘성’ 자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의 성입니다. 만약 위의 말을 바꿔 “본연지성이라 말하는 순간 이미 본연지성이 아니다.”라고 하게 되면 정말 말이 되지 않습니다. 논의의 대강은 맞는 말입니다.
다만 “성을 논한 것이 매우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말하였으니, 그가 인의예지가 성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있는데도 매우 어긋났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매우 어긋났다고 하겠습니까. 또 “중선(衆善)은 인의예지의 기(紀)이다.”라고 하였는데, ‘기’ 자는 아마도 ‘목(目)’ 자만큼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논수설(論數說) 운운


무릇 이(理)가 있은 뒤에 기(氣)가 있고 기가 있은 뒤에 상(象)이 있고 상이 있은 뒤에 수(數)가 있으니, 기에서 상까지에는 청탁(淸濁), 수박(粹駁), 장단(長短), 대소(大小)에 모두 일정한 수(數)가 있습니다. 그가 말한 “한 가지 일도 수가 아닌 것이 없고 한 가지 물건도 수가 없는 것이 없으며 사람의 일에는 수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은 진실로 본 바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요(壽夭)와 궁달(窮達)은 모두 수(數)로써 말할 수 있지만, 유독 선악(善惡)만은 수로 돌리지 못합니다. 이는 이(理)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性)이 들어 있으므로 명(命)이라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니, 어찌 박군이 이에 대해서는 따져 보지 않은 것입니까? 지금 자포(自暴)하여 악을 행하는 것과 자강(自强)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똑같이 수(數)로 돌리고 만다면 배우는 이들이 어디에다 힘을 쓰겠습니까.
이 설을 주장하는 것은 실로 유자(儒者)의 주장이 아니어서 혹 사람을 자포하여 악을 행하는 지경으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마음의 씀씀이가 어긋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대의 변론은 가히 노력을 다하였다고 할 만하지만, 기(氣)와 수(數)를 둘로 나누려고 한 것에 대해서는 내 생각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대체로 기와 수는 똑같은 것[一般]입니다. 예를 들어 인용한 내용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처음에는 재물을 불리는 일에 종사하다가 말년에는 학문의 조예가 고원(高遠)한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는 기품(氣稟)에 맑은 분수(分數)가 많고 탁한 분수가 적었기 때문이니, 이 또한 수(數)로 말할 수 없겠습니까.
안연(顔淵)은 아성(亞聖)이 되었으면서도 끝내 가난하게 살다가 요절하였으니, 이는 청수(淸粹)한 기를 받았으면서도 단명(短命)한 것입니다. 이 또한 기가 아니겠습니까. 봄이 변하여 여름이 되고 가을이 변하여 겨울이 되며, 오행(五行)이 서로 교대함에 각각 정해진 수(數)가 있어 바꿀 수가 없으니, 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일육(一六), 이칠(二七), 삼팔(三八), 사구(四九)의 수는 모두 생성(生成)의 기(氣)이니, 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의 견해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태극무극해(太極無極解) 운운


퇴계(退溪)가 남장보(南張甫)에게 답한 편지에서 “어떤 사람이 말한 궁극(窮極)이 없다는 주장은 주자가 이미 잘못된 것으로 여겼으니, 주자의 설을 살펴보게나.”라고 하였습니다.


“태극(太極)의 이(理)는 낳고 낳아서 끝이 없으므로 무극(無極)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유(有)는 무(無)에서 난다는 주장과 같으니, 그 오류가 대단히 심합니다. 이에 대한 그대의 변론은 대체로 타당합니다. 다만, “물(物)의 극고처(極高處)를 극(極)이라 한다.”라고 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듯합니다. 주자는 극지처(極至處)로 극(極) 자를 풀이하였지 극고(極高)를 말한 적이 없습니다.


또 “태(太)는 심대(甚大)의 뜻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리되면 또 “심대한 극”이 되므로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太)가 바로 심(甚)이요 지(至)입니다. 그 의미는 “극지지(極之至)”일 뿐이니, 심대(甚大)로 극(極)을 꾸며 준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무극(無極)이라는 것은 무형(無形)의 극(極)이다.”라고 한 것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극은 실로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도 냄새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극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무극이라는 것은 “그 극이 없는 것[無其極]”입니다. 만약 “무형의 극”이라 한다면 마땅히 “무의 극[無之極]”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物)이 태허(太虛)에서 변화하는 것은 얼음이 물에서 얼었다 녹았다 하는 것과 같다.”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정자(程子)가 그 잘못을 지적한 바 있는, 형태가 없어지면 근원으로 돌아간다[形潰反原]는 횡거(橫渠)의 주장과 같은 말입니다. 대체로 만물이 세상에 태어나는 원리를 말하자면, 가는 것은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새로이 오는 것이 그 뒤를 이어서 끝없이 낳고 또 낳습니다.
그동안 굽혀 있던 기[旣屈之氣]를 가지고 다시 현재 펴 있는 기[方伸之氣]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물이 되는 것으로 비유를 한다면, 이는 전혀 천지조화의 낳고 낳는 뜻이 없고 부처의 윤회설(輪回說)과 가깝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가 이를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기(氣)를 논하는 것도 옳지 않거늘 하물며 이것으로 태극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역해(易解) 운운


무슨 자는 마땅히 무슨 자가 되어야 하고 또 무슨 자는 마땅히 무슨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감히 독창적인 견해와 새로운 주장을 함부로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가 이에 대해 남다른 것을 좋아하는 병폐가 있다고 지적한 것은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남다른 것을 좋아하는 병폐뿐만 아니라 큰 소리를 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병폐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그에게 무실위기(務實爲己)와 하학손지(下學遜志)의 방도를 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주-D001] 박군(朴君) : 
박상현(朴尙玄, 1629~1693)을 가리킨다. 자는 경초(景初), 호는 우헌(寓軒),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전라도 광주(光州)의 진곡(眞谷)에서 학문에만 전념한 학자이다. 아들 박광일(朴光一)을 송시열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였고, 그의 문집인 《우헌집(寓軒集)》에 송시열과 주고받은 편지가 여러 편 있으며, 송시열은 그를 모년지기(暮年知己)로 허여하였다고 한다. 《우헌집》에는 기정익(奇挺翼)에게 보낸 11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성리학의 격물, 이기, 태극에 관한 내용들이다. 《韓國文集叢刊解題 4輯 寓軒集, 遜齋集》
[주-D002] 사우(士佑) : 
유세익(柳世翊)의 자이다. 본관은 서산(瑞山)으로 광주 동곡(東谷)에 살았다. 호는 회와(悔窩)이다. 서산 유씨 유익서(柳益瑞)가 기정익의 매부였던 까닭에 일가가 모두 기정익의 문인이 되었다. 기정익의 사후 문인들과 함께 그를 모신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의 건립을 주도하였다. 박상현의 문집 《우헌집》에 유세익과 주고받은 학술적인 내용의 시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문집으로 《회와유고(悔窩遺稿)》가 있다. 《寓軒集 卷1 次柳士佑詠陰陽韻ㆍ卷4 與柳士佑, 韓國文集叢刊 134輯》
[주-D003] 자포(自暴)하여 악을 행하는 : 
대본에는 ‘自暴□惡’로 한 자가 결락되어 있다.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도서번호:b13648-61-10)에 의거하여 ‘爲’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4] 자포하여 악을 행하는 : 
대본에는 ‘自暴□惡’로 한 자가 결락되어 있다. 동일본인 국립중앙도서관장본(도서번호:b13648-61-10)에 의거하여 ‘爲’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5] 남장보(南張甫) : 
남언기(南彦紀)로 장보는 자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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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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