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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공(朴公, 상현尙玄) 묘갈명 병서 - 한수재선생문집 제28권

박상현(朴尙玄, 1629~1693) 묘갈명 병서 - 한수재선생문집 제28권 :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남쪽 지방에 명망이 유림(儒林)에 막중하고 학문이 정미(精微)한 경지에 도달한 자가 있으니, 우헌 처사(寓軒處士) 박공(朴公)으로 휘는 상현(尙玄)이요 자는 경초(景初)인데, 숭정 기사년(1629, 인조7) 5월 9일에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더럽고 상스러운 말을 들으면 마치 자신을 오염시킬 듯이 여겼으며, 지극한 성품이 있어 15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채소와 국도 먹지 않고, 제사를 올리고 상식(上食)할 때에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여러 삼촌들을 섬김에 공손하고 근신하여 비록 무더운 여름철이라도 나태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스승에게 취학하자,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부지런히 힘썼다. 경전(經傳)을 널리 통달하였는데, 특히 《대학(大學)》에 많은 공부를 하여 학문의 기초를 삼았으며,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를 반드시 스승 삼고 본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산림에서 고요히 있으면서 부귀와 화려함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병자년과 정축년에 국가의 치욕을 당한 이후의 일을 언급하게 되면 일찍이 슬퍼하고 크게 한숨짓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집에 보관되어 있는 책력은 반드시 위호(僞號)를 지워 은미한 뜻을 부쳤다. 정미년에 중국 복식을 하고 중국 말을 하는 자 백여 명이 표류하여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중국의 동남쪽 조그마한 땅에는 황통(皇統)이 아직도 남아 있는바, 우리들이 바로 그 백성이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이들을 붙잡아 북쪽의 청 나라 조정에 보내니, 공은 이를 통분히 여기고 서글퍼 하며 마침내 당세에 진출할 뜻을 단념하였다.
일찍이 승려의 시축(詩軸)에 시(詩)를 쓰기를 “이 몸 뒤따라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니, 나라를 떠나는 요양(遼陽)의 승려 대하기 부끄럽네.[將身未得追蹈海 羞對遼陽去國僧]” 하였다. 이에 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조를 우러러 흠모하였다.
공은 한 방에 고요히 앉아 있으며 고명(高明)한 경지에 마음을 두었는데,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ㆍ《정몽(正蒙)》ㆍ《황극경세(皇極經世)》ㆍ《계몽(啓蒙)》 등의 여러 책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편찬한 《음양소장도(陰陽消長圖)》는 크게는 일원(一元)의 수(數)와 작게는 1년의 운행으로부터 해의 주야와 달의 차고 기욺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안에 자세히 포함되어 있었다.
또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배우는 자들에게 밝게 보여 주었는데, 이것을 천상(天象)에 상고해 보면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승려인 운계(雲溪)라는 자는 역법(易法)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것을 보고 감탄하기를 “우헌(寓軒)의 가슴속에는 온 천지를 포함하고 있다.” 하였으며, 족자(族子)인 승지 광후(光後)도 또한 일찍이 탄복하기를 “우헌의 학식은 자득(自得)한 맛이 있어 사람들이 미치기 어렵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씀하기를 “궁리(窮理)의 공부는 반드시 붕우의 강습에 의뢰하여야 한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도의지교(道義之交) 중에는 유명한 선비와 대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전현(前賢) 중에는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을 정주(程朱)의 정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퇴계를 버리고 율곡을 취하였다.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사계(沙溪)가, 주자(朱子)께서 미처 이룩하지 못한 것을 마침내 이룩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거룩한 추로지향(鄒魯之鄕)이 되게 하였으니, 그 공로가 크다 하였고, 현재 호걸스러운 재주와 성현의 학문은 또 우암(尤菴)만한 분이 없다 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하기를 거의 30년 가까이하였다.
그리하여 성명 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말씀과 도기(道器)의 분별과 성기(誠幾)의 뜻을 많이 말씀하고 논란하여 밝게 통달하기를 구하였다.
《중용(中庸)》의 미발(未發)의 뜻은 바로 주자께서 추요(樞要)라고 하신 것인데, 공은 이에 대하여 강하게 질문하기를 매우 많이 하여 《옹계일록(翁季一錄)》을 완성하였다. 우암 선생은 공이 마음 쓰기를 부지런히 하고 애쓰는 것을 깊이 아시고는 일찍이 “환히 알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고 칭찬하셨고, 또 말씀하기를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니, 사문(斯文)이 의탁할 사람이 있다.” 하셨으며, 또 “모년(暮年)의 지기(知己)요, 천리의 신교(神交)이다.” 하셨으니, 공이 사종(師宗)에서 소중하게 여겨짐이 이와 같았다.
교리 김만길(金萬吉)이 암행어사로 있으면서 공의 뛰어난 행실을 들어 임금께 아뢰었는데, 공은 갑자기 계유년(1693, 숙종19) 정월 병진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5세였다. 3월 경신일에 광주(光州)의 북쪽 태산(台山)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산에 안장하였으며, 배위인 장택 고씨(長澤高氏)를 부묘하였다.
공은 기상과 모습이 장엄하고 후중하였으며, 신채(神采)가 안정되었다. 말씀이 적고 조용하였으며, 걸음걸이가 안정되고 얌전하였다. 부정한 소리와 어지러운 색을 멀리 피하여 화살을 피하듯이 하였으며, 규문 안이 엄숙하고 온화하였고, 친척을 대함에 각기 그 환심을 얻었다.
상대방이 횡포를 가해오면 공은 그와 더불어 따지지 않고 매양 옛사람의 “비방을 받으면 더불어 변론하지 말라.”는 말씀을 외었다. 이 때문에 시골과 이웃에서 교화되어 복종하고는 우헌 선생(寓軒先生)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평양 박씨(平陽朴氏)는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가흥(可興)이란 분이 계신데 우의정을 지냈으며, 휘 석명(錫命)을 낳았는데 집현전 대제학을 지냈는바 공의 9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언심(彦深)이요, 조고의 휘는 진정(震挺)이요, 선고의 휘는 수림(遂林)이며, 선비는 봉산 이씨(鳳山李氏)이다.
배위인 고씨(高氏)는 처사(處士) 부민(傅敏)의 따님이며, 군수인 성후(成厚)의 손녀인데 부덕이 있었는바, 공보다 12년 뒤에 별세하였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광일(光一)은 학행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며, 차남인 광원(光元)은 사마시에 급제하여 봉사이고, 다음은 광선(光善)이다. 장녀는 기진성(奇震省)에게 출가하였고, 그 밖의 딸들은 이석필(李碩弼)과 생원 홍운(洪橒)과 기정륜(奇挺倫)에게 출가하였다. 왕자사부는 중휘(重輝)ㆍ중거(重擧) 등 2남을 두었다. 봉사는 6남을 두었는데, 중린(重麟)ㆍ중귀(重龜)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광선은 1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외손은 남녀가 약간 명이다.
아, 상고 시대에는 지위가 반드시 덕에 걸맞았는데, 지금 세상에는 덕이 있으나 지위가 없는 자가 많으니, 공(公)에게 있어 어찌 가감될 것이 있겠는가마는 세도(世道)가 옛날만 같지 못함은 개탄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부공(師傅公)은 가학(家學)을 전하여 명성이 한 세상에 가득하니, 누가 영지(靈芝)에 씨가 없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없다 말하겠는가.
나는 기사년에 여러 번 장성(長城)에서 공의 훌륭한 모습을 가까이 뵈었으며, 근년에 선사(先師)의 유고(遺稿)를 편집하면서 또 공의 의론이 정밀하고 해박함에 감복하여 평소에 존경하고 우러러 왔다. 이제 사부가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묘문을 부탁하니,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마침내 가장(家狀)을 뽑아 위와 같이 서하고 명문을 붙인다.

종사의 한마디 말씀은 / 宗師片言
구정과 대려처럼 소중한데
/ 九鼎大呂
공의 학문 훌륭하게 여겨 / 多公之學
칭찬하고 표창하였네 / 以揚以詡
이름이 남쪽 지방에 전하고 / 名流南服
유풍이 학자들에게 입혀졌네 / 功被學者
이 족히 후세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 斯足不朽
나머지는 생략해도 괜찮으리 / 餘可略也


[주-D001] 위호(僞號) : 
청 나라의 연호(年號)를 낮추어 부르던 말. 당시 청 나라를 괴뢰(傀儡) 정권으로 보아, 위조(僞朝)의 연호란 뜻으로 말한 것이다.
[주-D002] 일원(一元)의 수(數) : 
옛날 역법(曆法)에서는 4617년을 일원이라 하였으며,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지은 《황극경세(皇極經世)》에는 12만 9600년을 일원이라 하였는데, 이는 천지(天地)가 생성되어 없어질 때까지의 기간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이외에도 술수가(術數家)에서는 ‘태을일원(太乙一元)’이라 하여 72년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D003] 추로지향(鄒魯之鄕) : 
교화(敎化)가 잘 베풀어지고 문화가 찬란한 지방을 가리키는 말. 주(周) 나라 말기 공자(孔子)는 노(魯) 나라에서 출생하였고, 맹자(孟子)는 추(鄒) 땅에서 출생하여, 이들 지방에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이를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주-D004] 도기(道器)의 …… 뜻 :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형이상(形而上)을 도(道)라 이르고, 형이하(形而下)를 기(器)라 이른다.” 하였는데, 도는 태극(太極)으로 이(理)를 가르키며, 기는 음양(陰陽)으로 기(氣)를 가리킨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통서(通書)》에 “성(誠)은 무위(無爲)이고 기(幾)에는 선악(善惡)이 있다.” 하였는데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본성을 잘 보존한 상태를 성(誠)이라 하며, 정이 이미 나오면 선ㆍ악 기미(幾微)로 나누어진다 하여 기(幾)라고 이름한 것이다.
[주-D005] 종사(宗師)의 …… 소중한데 : 
종사는 훌륭한 스승을 일컫는 말로 우암을 가리킨다. 구정은 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주조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의 보정(寶鼎)으로, 역대 왕조에서는 수도(首都)를 새로 정할 때마다 반드시 이 구정을 옮겨 가곤 하였다. 대려(大呂)는 주(周) 나라 종묘(宗廟)에 있던 종(鐘)인데, 역시 보물로 알려져 구정과 함께 가장 소중한 것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 담양 창평의 동쪽에 있는 산이 월봉산이고 월봉산에서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줄기가 태산(台山)이다. 이곳에서 김천일 장군이 태어났으며 그가 나주로 이주해 살았던 마을의 이름도 그래서 태산리다. 유천리는 신라시대 태산으로 불렀으며 고려 때 동촌으로 바뀌었다. 조선조에 들어와 유촌(柳村)으로 부르다가 유천(柳川)으로 바뀌었다. 태산이 유촌으로 바뀐 것은 능양군이 인조 임금이 되기 전 고경명-고인후-고부천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충신고을을 세 번이나 찾아왔다가면서 이 마을이 버들의 형국이라 말한 데서 비롯되었고 전한다. 이후 고부천(高傅川)은 자신의 호를 월봉산에서 따와 월봉으로 지었고 고씨 후손들이 자작일촌으로 살면서 고부천의 이름에서 ()’를 따와 유천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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