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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金千鎰)ㆍ양산숙(梁山璹) - 연려실기술 제16권

김천일(金千鎰)ㆍ양산숙(梁山璹) -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전라 우도의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 천일은, 자는 사중(士重)이요,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나주(羅州)로 이사하여 두 대[二代]째이다.이항(李恒)에게 배웠다. 은일로 천거를 받아 대간이 되었는데, 그는 곧은 말을 과감히 하나 용모는 초라하여 외모가 옷을 이기지 못할 듯이 보였다. 이때 나주에 있다가 임금이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더니 조금 후에 분연히 말하기를, “울기만 하면 무엇하리오.나라에 환난이 있어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나는 대대로 벼슬해 온 신하로서 새[鳥]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구할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글로서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 여러 사람에게 통하니, 의기(義氣)있는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모였다. 정예한 군사 수백 명을 얻어 군중(群衆)들과 함께 맹세하고 서쪽으로 떠났다. 《명신록》


○ 의사(義士) 송제민(宋濟民)ㆍ양산룡(梁山龍)ㆍ양산숙(梁山璹)ㆍ임환(林懽)ㆍ이광주(李光宙)ㆍ서정후(徐廷厚) 등과 더불어 피를 마시며 맹서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천일이 평소에 몸이 약하고 병들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기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칼을 차고 말을 타니 거뜬하여서 날고 싶다.”고 하였다. 《계곡집》


○ 처음에 천일이 이광이 적을 보고만 있으면서 근왕(勤王)의 일에 게으른 것을 통분하게 여겨 경명에게 글을 보내어 “먼저 이광을 쳐서 죄를 바로잡은 뒤에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가려 한다.”고 하였더니 경명이 말리었다.


○ 각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문을 듣고 온 군중이 두려워하여 위축하였다. 천일이 여럿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의를 위해서 나선 것이다. 전진이 있을 뿐이요, 후퇴는 없다. 가고자 하는 자는 가는 대로 내버려두겠다.” 하니 여러 군사들이 모두 감동하고 분발하여 몰래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호서(湖西)에 이르렀을 때 군사가 수천 명이 되었다. 병사(兵使) 최원(崔遠)과 더불어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였다. 천일이 독산(禿山)의 옛 성에 자리 잡고서 적에게 따라 붙은 간사한 백성을 찾아내어 목 베니 기내(畿內)의 선비와 백성 중에 와서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금령(金嶺)수원땅 의 적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 수원에서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 구원병을 청하니, 이광이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와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 등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였다.


○ 유생(儒生) 곽현(郭玄)‘玄’을 기재는 ‘賢’으로 썼다. ㆍ양산숙을 보내어 바닷길로 가서 평안도에 들어가 글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쪽의 소식을 물었다. 산숙 등이 천일이 최원등과 군사를 합쳐서 수원에 이르렀으며 고경명과 조헌도 또한 군사를 일으켰고, 영남에서도 또한 김면ㆍ정인홍ㆍ박성ㆍ곽재우가 있다는 것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변변치 못한 까닭으로 너희들이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적의 속으로 모험해 왔구나.” 하였다.산숙이 아뢰기를, “천일의 군사들 중에는 정예하고 용감한 자가 많기는 하나 태반은 유생들인데 다만 충성과 의리만을 의지하고 일어선 것이니 성공과 실패는 하늘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울며 이르기를, “충의가 격동하는 곳에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않겠느냐.” 하였다. 곽현이 아뢰기를, “신이 평소에 조헌과 교분이 두터운데, 신의 거사할 무렵에 헌이 말하기를, ‘요사이 천문(天文)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에 멸망할 운수가 없으니, 적도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조헌은 기축년 역적의 변이 있을 줄을 알았으며, 신묘년에는 나라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 일이 있으니 천문을 관찰한 것이 들어맞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잘 맞는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곽현과 양산숙 두 사람에게 상으로 벼슬을 주고 인하여 천일ㆍ경명ㆍ광옥등에게 교지(敎旨)를 전하여 등급을 따라 벼슬을 주고, 산숙 등에게는 공조 좌랑을 임명하였다.


○ 7월에 천일이 의병을 이끌고 먼저 경기에 이르니, 임금이 판결사(判決事)에 임명하고,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를 내려주고, 인하여 강화(江華)에 들어가 지키면서 남쪽과 북쪽의 아뢰는 소식이 통하게 하라고 하였다.


○ 처음에는 경기로 피난한 조정의 벼슬아치와 의병들이 많이 강화에 모여 있다가, 최원ㆍ김천일의 두 군사가 근왕하러 오는 것을 보고 기뻐 생기가 돌아서 드디어 함께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長湍)에서 적을 엿보는데 적의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형세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아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고, 천일 등은 배 한 척을 타고 달아나 면하였다. 《일월록》


○ 공은 양화(楊花) 나루에서 군사의 위세를 보이면서 평수길(平秀吉)의 죄상을 게시하여 성안의 적군에게 도전하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아니 하였다. 다음 해 이여송이 장차 서울에 있는 적을 치려 할 때 공은 선유봉(仙遊峰)에 진군하여 도독(都督 이여송)을 위하여 성원하였다. 적이 이미 물러간 뒤에 천일이 서울 성안에 들어가니 조정에서 적을 추격하라고 명하였다. 천일이 마침 병으로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며 말하기를,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였는데 그때, 천일의 부하는 여러 군사(軍師)에게 이리저리 빼앗기고 남아 있는 자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천일이, “호남은 우리나라의 밑뿌리요, 진주는 호남의 병풍이요, 울타리이다.” 하고 드디어 진주에 들어갔다. 성(城)과 병기가 믿을만한 것이 없었으나 천일이 최경회ㆍ황진 등과 더불어 죽음으로서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안되어 적의 대군이 달려드니 임기응변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수길이 여러 길의 왜적들이 모두 공 세운 것이 없음을 분하게 여겨, 모든 장수를 책망하고 반드시 한 이름난 성을 무찔러 벌충을 하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 싸움에서는 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아니하고 적병의 전사자도 정도를 넘었건만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였다.마침 그때 오래 비가 내려 성의 흙이 풀어져 잘 무너졌다. 적이 군사를 더하여 급히 공격해 오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이때 천일이 촉석루(矗石樓) 위에 있었는데 맏아들 상건(象乾)과 막하의 양산숙등이 옆에 있다가 울며 부르짖어 말하기를, “장차 어찌 하렵니까?” 하니 천일이 태연히 말하기를, “일을 일으키던 날, 나는 이미 나의 죽음을 결정하였다. 다만 너희들이 가엾구나.” 하고 드디어 일어나 북쪽 행재소를 향하여 절하고 나서 먼저 병기를 물속에 던지고 상건과 더불어 서로 안고 촉석루 아래의 깊은 물에 뛰어드니 장수들과 막료(幕僚) 중에 따라 죽은 자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적도 또한 힘이 다하여 감히 다시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듣고 크게 슬퍼하여 찬성(贊成)을 증직하고, 치제(致祭)를 내리었다. 호남 사람들이 나주(羅州)의 서쪽 옥정봉(玉井峰) 아래에 사당을 세우니 조정에서 정렬(旌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명신록(名臣錄)》 ○천계(天啓) 병인년에 비를 세우고 계곡(溪谷)의 비명을 지었다.


○ 명 나라의 지휘(指揮) 오종도(吳宗道)는 평소에 천일을 존경하여 심복하더니, 제문을 지어서 사람을 시켜 보내고 공의 영전에 잔을 드리게 하였다. 제문에, “연월일 병부참모군사 무거지휘사(兵部參謀軍事武擧指揮使) 오종도는 삼가 양과 돼지의 제물로서 조선 창의사(朝鮮倡義使) 김장군의 영위(靈位)에 제사드립니다. 무릇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 죽어도 오히려 산 자가 있고 살아도 오히려 죽은 자가 있는데, 살았으면서 죽은 자는 지금 천하에 그득합니다. 죽었어도 살아 있는 이로서 나는 창의사 김장군에게서 느낌이 많습니다.왜적들이 미쳐 날뛰는 때를 당하여, 임금이 초야에 파천하고 전국 8도가 거의 온전한 고을이 없는데 오직 장군은 낚시대[竿]를 세워 깃발을 달고, 나무를 베어 칼을 만들어 팔뚝을 걷어붙이고 한 번 부르짖으니, 호걸들이 호응하였습니다. 창의(倡義)하는 선비 천여 명을 얻어 한강(漢江) 가에 주둔하여 지키면서 왜적과 더불어 살고 싶지 않음을 맹세하였습니다. 장군의 명성은 안과 밖에 높았습니다. 불민한 나는 군무(軍務)의 바쁜 틈에 처음 만나 알게 되었는데 곧 다정하게 옛 친구처럼 대해주셨습니다.그때 왜놈들이 바야흐로 강화를 요청하니 장군은 문득 팔을 걷고 꾸짖으며, 항상 이놈들을 멸망시키고야 밥을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과 그 공이 비록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장군의 이름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떨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왜놈들은 항상 저희끼리의 생각으로 옛 송(宋) 나라의 일을 오늘 일에 비교하여, 악무목(岳武穆)이 죽지 않고는 금(金)과 송(宋)과의 화의(和議)가 성립될 수 없었음과 같이 장군이 죽지 않고는 오늘의 강화가 결정될 수 없겠다고 생각하여, 왜놈들이 밤낮으로 작전계획한 것은 오직 기어코 장군을 죽이는 것으로 일을 삼았던 것입니다.그때에 흩어지고 없어진 나머지의 군사를 가지고 진주를 지키게 됨에 이르러, 때마침 최군(崔君) 경회(慶會)도 거기에 있었는데, 최군은 더욱 왜놈들이 이전부터 꺼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왜놈들은 대병(大兵)으로 수십 겹을 포위하여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여 가지고 기어코 두 분을 잡고야 말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때에 나는 명령을 받고 와서 전라도를 지키게 되었는데, 장마비로 인하여 죽산(竹山)에 머물러 있던 중에 별안간 큰 비바람이 불고 천둥벼락이 일어나 모래가 날고 나무가 뽑히어서 마치 나의 행군을 재촉하는 듯하였습니다.나는 비를 무릅쓰고 전진하여 수일을 지나서 남원(南原)에 박도하였고 그때에 기별이 날아왔는데, 진주는 화살이 다하고 식량이 끊어져서 성이 함락된 지가 며칠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군 부자와 최군이 모두 왜적을 꾸짖고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비로소 죽산의 장마비는 곧 장군 부자의 눈물이요, 큰 바람과 천둥벼락은 장군의 불평의 기운이었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아아, 장군은 이름이 천추에 빛나서 오래도록 결코 죽지 않을것이니 내 어찌 울 것입니까.나랏일을 잘못하여 임금을 피난 나가게 만들고, 군사를 가지고도 구원하지 못하여 성과 고을을 잿더미로 되게 하고도 부끄러움 없는 얼굴로 여전히 높은 지위의 의관(衣冠)을 하고 있는 자들은 비록 살아 있기는 하지만 어찌 장군의 죽음만 하리오. 슬프다, 하늘이 돕지 아니함이여, 부자가 함께 죽었도다. 절개와 의리가 겸하여 온전함이여, 우리의 강상(綱常)을 세웠도다. 저승과 이승이 달라졌음이여, 몽매(夢寐)에 보는 듯하도다. 어진 친구와 영원히 이별함이여, 나의 한잔 술을 올리나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제독(提督) 형개(邢玠)도 또한 공(公)을, “충성스러운 혼과 씩씩한 넋이 늠름하여 살아 있음과 같다.”고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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