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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에 추증된 고공(高公, 고종후)의 시호를 청한 행장 - 약천집 제23권

이조 판서에 추증된 고공(高公, 고종후)의 시호를 청한 행장, 무자년(1708, 숙종 34) - 약천집 제23권 :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


공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휘가 종후(從厚)이고 자가 도충(道沖)이고 호가 준봉(隼峰)이다. 그 선대는 탐라(耽羅)의 성주(星主)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에 이르러 장흥(長興)을 관향으로 하사받았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통례(左通禮)를 지낸 휘 자검(自儉)이 처음으로 광주(光州)에 살았다.


증조 휘 운(雲)은 예조 좌랑으로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조고 휘 맹영(孟英)은 대사간으로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선고 휘 경명(敬命)은 공조 참의로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호는 제봉(霽峰)이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였으니 이 사실이 국사(國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선비 정경부인(貞敬夫人) 울산 김씨(蔚山金氏)는 부제학 김백균(金百勻)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갑인년(1554, 명종 9)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후중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다.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이 계집종을 보내어 공을 안아 오게 해서 부인으로 하여금 직접 머리를 빗겨 주게 하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기백과 풍도가 편안하고 다소곳하니, 후일 반드시 독실한 군자가 될 것이다.” 하였다.
겨우 지학(志學)의 나이에 이르자 학업이 이미 크게 이루어졌다. 나이 17세에 성균관에 오르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 교서관(校書館)에 예속되었다가 성균관으로 바뀌어 순서에 따라 전적으로 승진하고 감찰(監察)로 옮겼으며 또다시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무자년(1588, 선조 21)에 임피 현령(臨陂縣令)에 제수되었는데 문아(文雅)로 다스리다가 당시의 의논과 맞지 않아 사헌부 관원에게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신묘년(1591)에 지제교로 뽑혔는데, 또다시 당시의 무리들에게 탄핵을 받고 조정을 떠났으나 공은 태연하여 조금도 얼굴에 서운한 기색을 나타냄이 없었으며, 충렬공(忠烈公)을 모시고 집에 있을 때에 한가로이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었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바다를 건너 곧바로 도성인 한양으로 달려왔는데, 우리 군대는 도처에서 궤멸되어 막아 내는 자가 없었다. 충렬공은 공과 공의 아우인 학유(學諭) 인후(因厚)와 함께 피눈물을 뿌리고 의병을 규합하여 국난(國難)에 달려갈 것을 맹세하였다.
이때 본도(本道 전라도 )의 순찰사로 있던 이광(李洸)이 온 도의 병력을 모두 징발하여 공주(公州)에 이르렀으나 대가가 서쪽으로 파천하고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고 기겁하여 군대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그러다가 다시 군대를 징집하자 사람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이에 충렬공은 전임 부사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효유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하고 공의 형제로 하여금 군대를 나누어 거느리게 한 다음 수원으로 쫓아가서 목사 권율(權慄)의 군대에 병력을 맡겼다. 이어 서쪽으로 행조(行朝)에 달려가고자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오니, 충렬공은 이미 의병의 깃발을 담양(潭陽)에 꽂고 있었다.


공은 충렬공을 태인(泰仁)에서 맞이하여 뵙고 다시 폐현(廢縣)인 금구(金溝)로 가서 사람들을 모집하였으며, 탐라에 격문을 보내어 전마(戰馬)를 보내 줄 것을 청하였다. 김제(金堤), 임피(臨陂) 등 여러 현에서 병력과 군량을 거두고 모집하여 충렬공과 여산(礪山)에서 만났으며, 여러 도에 격문을 돌려 행재소에 이르게 하였다.


충렬공이 장차 은진(恩津)에서 군대를 정돈하여 북상하려 하였는데, 마침 황간(黃澗)과 영동(永同)에 있던 왜적들이 금산(錦山)을 넘어 쳐들어오니, 완산부(完山府 전주(全州) )의 형세가 더욱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휘하의 장병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며, 충렬공 또한 그 계책을 옳게 여겨서 마침내 군대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진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방어사 곽영(郭嶸)과 함께 군대를 나누어 좌익과 우익을 만들었는데, 의병들이 토성(土城)에서 왜적을 짓밟으니, 왜적들은 죽고 부상한 자가 많아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나 관군(官軍)이 전투를 도우려 하지 않고 해가 또 저물어서 마침내 군대를 후퇴하여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 방어사가 충렬공에게 사람을 보내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공은 나와서 아뢰기를, “오늘 아군이 승리하였으니, 이 승세를 유지하여 군대를 온전히 보존하고 돌아갔다가 기회를 보아 다시 나와 싸워서 승리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왜적과 보루를 마주하고 들에서 노숙한다면 밤에 적이 쳐들어와 군사들이 놀랄 우려가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충렬공은 말하기를, “너는 부자간의 정 때문에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느냐? 내가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은 나의 직분이다.” 하니, 공은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였다.


다음 날 아침 왜적이 성벽을 비우고 모조리 나와 먼저 관군을 범하니, 방어사의 여러 군대가 모두 소문만 듣고 놀라서 와해되었다. 의병은 그래도 홀로 대항하여 싸울 계책으로 군사들이 모두 활을 가득히 당기고 대기하였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뒤에서 급히 ‘방어사의 군대가 무너졌다.’라고 고함치니, 의병들도 따라서 무너져 마치 미친 물결이 멋대로 터지는 것과 같아서 다시는 저지할 수가 없었다.


공이 타고 있던 말이 마침 발을 헛디뎌 가시덤불에 넘어졌으므로 막 일어나 말에 멍에를 메우려고 하는데, 따르던 종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이 뒤에서 말을 채찍질하여 급히 달려와 아뢰기를, “영공(令公)께서는 이미 멀리 떠나가셨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침내 급히 말을 달려 거의 30리가량 쫓아가서야 비로소 충렬공이 학유(學諭 고인후(高因厚) )와 함께 진중(陣中)에서 순절했음을 알고는 말에서 떨어져 혼절하였다가 얼마 후 깨어나 맨몸으로 적에게 달려들어 죽으려 하였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공을 안고 만류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합니다.
또 선영공(先令公)의 체백(體魄)이 현재 쌓여 있는 시신 가운데 계신데, 지금 공이 또다시 죽는다면 누가 시신을 거두어 염하겠습니까?” 하니, 공은 마침내 적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도보로 전쟁터에 들어가서 충렬공의 유체(遺體)를 찾아내어 몰래 금산(錦山)의 산속에 묻었다.


공은 8월에 사람들을 모집하여 다시 금산에 가서 충렬공과 학유의 시신을 받들고 와서 비로소 관에 넣어 빈소하고 밤낮으로 통곡하며 말하기를, “부자 형제가 위태로울 때에 서로 잃고 나만 홀로 구차하게 살았으니, 이는 천지간의 죄인이다. 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서서 살겠는가.” 하였다.
공은 장례가 끝나자 곧바로 의병에 종사하려 하였는데, 대부인이 소리 내어 곡하며 만류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아우가 모두 죽었는데 네가 만약 또 죽는다면 나는 미망인으로 남은 목숨을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여 살겠느냐. 내 먼저 자결할 것이니, 차마 또다시 네가 죽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 하였다.


공은 이때 의병을 따르자니 대부인의 뜻을 상하게 할까 두렵고, 대부인의 명령을 따르자니 또 창을 베고 자는 의리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을 닫고 깊숙한 곳에 거처하여 낮에는 해를 보지 않고 밤에는 등불을 밝히지 않으며 미음도 입에 넣지 않아 숨이 끊어지려 하였다. 대부인이 울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의병에 달려가려는 너를 만류한 까닭은 본래 네가 살기를 바라서였는데, 이제 네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똑같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너의 뜻을 따르겠다.” 하였다.


공은 즉시 일어나 죽과 미음을 들고 원수(元帥)를 찾아가 요청하여 본도의 사찰에 소속된 노비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공은 마침내 멀고 가까운 지역에 격문을 돌려 병력을 수합하고 군량을 모은 다음 정자(正字) 조수준(趙守準)을 계원장(繼援將)으로 삼고, 또 체찰사부(體察使府)에 보고하여 본주(本州)의 승려인 해정(解政)을 유격장으로 삼고, 김인혼(金麟渾)과 고경신(高敬身) 등을 군관으로 삼았다.


공은 군대를 일으키는 날에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스스로 이름하고는 정자 오빈(吳玭)을 종사관으로 삼고 부장(部將) 오유(吳宥)를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이때 봉이와 귀인 등도 함께 따랐으며, 고경형(高敬兄)이란 자는 충렬공의 서제(庶弟)였는데 또한 편비(偏裨)로 수행하기를 원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 병든 어머니와 어린 아우가 있는데 구원하고 보호할 사람이 없으니, 원컨대 숙부께서는 수행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였으나 고경형은 말하기를, “내 들으니 형제간의 원수는 병기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는다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수행하니, 공도 다시 저지하지 못하였다.


출병하는 날에 공은 재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대부인에게 하직하였다. 이미 문을 나왔다가 다시 말을 멈추고 내려와 앉아서 막내아우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오늘 자친(慈親)의 얼굴을 영결하느라 마침내 너에게 일과로 가르치던 공부를 잊었다.” 하고, 조용히 글을 일러 주며 말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가 없다. 너는 부디 노력하여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니, 듣는 자들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배위인 이 부인(李夫人)이 두 아들을 거느리고 안동(安東)의 친정에서 피난하고 있었다. 부인은 공이 장차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와 겨우 황계(黃溪)의 농막에 이르렀는데, 공은 이미 본주의 절양루(折楊樓) 아래에서 군대를 정돈하고 있었다.
부인이 계집종을 시켜 말을 전달해서 서로 만나 작별할 것을 청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 이미 군영에 있으니 떠날 수가 없다.” 하였다. 부인이 또다시 계집종을 시켜 두 아들을 보내어 가서 작별하게 하니, 큰아들은 나이가 일곱 살이고 작은아들은 다섯 살이었다. 공은 각각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살아 있었는가?” 하고는 속옷을 벗어 두 아들로 하여금 부인에게 전하게 하여 작별하니, 좌우에 있던 자들이 모두 울고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


공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전투하여 영남(嶺南)에 이르니, 의병이 다소 모여서 군대의 위용을 점차 떨치게 되었으나 군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여 군사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었다. 그러나 공이 비분강개하고 격려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끝내 해산하려는 뜻이 없었다.
이때 관군이 모두 함안(咸安) 등의 여러 고을에 모이니, 공 또한 하동(河東)에 군대를 주둔하여 적의 형세를 정탐하려 하였다. 왜적의 괴수인 청정(淸正)이 일찍이 진주(晉州)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몹시 성을 내고 수십만의 병력을 규합해서 부산(釜山)으로부터 곧장 진주로 향하여 기어이 전일의 패전에 대한 분풀이를 한 다음 호남 지방을 유린하려 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등이 모두 피해 떠나가고, 다만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충청 병사 황진(黃進),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 사천 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분의병장(奮義兵將) 강희열(姜希悅), 적개의병부장(敵愾義兵副將) 이잠(李潛) 등 수십 명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였다.


공은 진주성의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는 군대를 재촉하여 성안으로 들어갈 적에 군중(軍中)을 떠나고자 하는 자들을 작별하여 보냈는데, 남은 자가 그래도 400여 명이었다. 순변사는 공에게 전령을 보내어 나가서 선거이, 홍계남 등과 함께 세력을 규합하여 외부에서 지원하게 하였으며, 성안의 장병들은 공이 애통한 마음을 품고 군대에 나와 몸이 지극히 훼손된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겨서 또한 공에게 성을 나갈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으려는 뜻이 있어서였다.


창의사가 공과 상의하고 좌랑 양산숙(梁山璹)으로 하여금 편지를 받들고 가서 명나라 장수인 총병(摠兵) 유정(劉綎)에게 군대를 청하게 하였는데 이 글은 바로 공이 지은 것이었다. 유정은 편지의 내용이 격렬한 것을 보고 이 때문에 옷매무새를 고치고 용모를 바꿔 경의를 표시하였으나 또한 출병할 뜻이 없었다. 진주성이 포위된 9일 동안 밖에서는 하루살이나 개미 새끼만 한 지원도 없으니, 황진, 김준민, 장윤이 서로 잇달아 전사하였다. 목사 서예원(徐禮元)이 두려워하고 겁먹어 먼저 도망하자 여러 군대가 크게 혼란하여 모두 촉석루(矗石樓)로 달아났다.


공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줄을 알고,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북향하여 재배한 다음 오빈, 김인혼, 고경형과 함께 남강(南江)에 뛰어들어 죽으니, 이때가 바로 계사년(1593) 6월 29일이었다. 종 봉이와 귀인도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며, 오유(吳宥)는 이종인, 강희열, 이잠과 함께 분연히 검을 들고 적을 공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죽었다.


공이 생명을 버리고 의(義)를 이룰 적에 한 무사가 옆에 있다가 공이 물속으로 뛰어들려는 것을 보고는 울면서 청하기를, “저는 물에 익숙하여 헤엄을 잘 치니, 공을 업고 건널 수 있습니다.”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가 금산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는데, 지금 살기를 구한단 말인가. 네가 만약 살아서 돌아가거든 오늘의 이 일을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말하라.” 하니, 무사는 바로 공의 이웃 사람이었다.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도 그는 매번 이 말을 할 때면 오열을 그치지 못하였다.


공의 시신을 진주의 남강에서 잃어버리니, 예(禮)에 초혼장(招魂葬)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묘를 만들지 않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도승지를 추증하였고, 왕세자도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그 후 이조 참판을 더 추증하고 규례대로 겸직을 내렸으며, 을미년(1595)에 정려문을 내리고 신축년(1601)에 충렬공을 모신 포충사(褒忠祠)에 배향하였다.


금상 무진년(1688, 숙종 14)에 호남의 유생 백광호(白光瑚) 등이 상소하여 공과 공의 아우 학유공에게 모두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였고, 또다시 공에게 자헌대부 이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더 추증하였으니, 이는 먼저 정 2 품의 관직을 추증한 뒤에야 시호를 내리는 것이 조정의 법이기 때문이었다.


공의 초취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2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양산축(梁山軸)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진사 유적(柳適)에게 출가하였다. 후취 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참봉 부립(傅立)이고 차남은 부언(傅言)이며, 딸은 대사간 홍호(洪鎬)에게 출가하였다. 양산축은 1남을 두었으니 양만용(梁曼容)으로 벼슬이 응교이다.
부립은 4남을 두었으니 두일(斗一), 현감 두기(斗紀), 참봉 두평(斗平), 두응(斗應)이고, 부언은 두기를 양자로 삼았다. 홍호는 2남을 두었으니 홍여렴(洪汝濂)과 사간 홍여하(洪汝河)이다. 두일은 2남을 두었으니 가원(可遠)과 참봉 가관(可觀)이다. 두기는 4남을 두었으니 가익(可翼), 진사로 현감인 가인(可寅), 가빈(可賓), 가겸(可謙)이다. 두평은 2남을 두었으니 가적(可廸)과 가영(可永)이다. 두응은 3남을 두었으니 가신(可臣), 가구(可久), 가대(可大)이다. 가원은 가인의 아들 한경(漢慶)을 양자로 삼아서 공의 제사를 주관한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은 천품이 순수하고 바르며, 말과 행동거지가 각각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평소 장난하는 말과 나태한 용모를 안색과 말에 나타내지 않으니, 보는 자들이 모두 숙연해하였다. 급제한 지 15년에 겨우 한 작은 현을 얻었으므로 사람들이 혹 불우하다고 말하면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인생의 곤궁함과 영달은 천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도리를 힘쓸 뿐이다.” 하였다.


문장을 지을 적에 준걸스럽고 빼어나며 기발함이 있어서 붓과 종이를 잡으면 즉시 짓곤 하였다. 의병을 일으킨 뒤에 공이 모든 격문을 지었는데, 멀고 가까운 곳에 격문이 이르면 보는 자들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주도에서 말을 모집하는 격문에 “소매를 떨치고 일어남은 바다 밖에 그럴 사람이 있음을 내 아노니, 채찍을 잡고 임하면서 천하에 좋은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投袂而起者 吾知海外有人 執策而臨之 毋曰天下無馬〕”라고 하니, 말뜻이 뛰어나고 대구(對句)가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당시에 사람들이 전해 가며 외웠다.
상촌(象村) 상공 신흠(申欽)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이와 같은 훌륭한 재주가 있는데도 끝내 실의하여 그 문장과 함께 버려져서 윤음(綸音)을 맡는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인물을 올리고 물리치며 벼슬을 주고 빼앗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왜적의 침범을 부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세상의 말하는 자들은 공의 부자와 형제가 모두 의리에 죽은 것을 변 성양(卞成陽)에게 견주는데, 노씨(盧氏)에게 시집간 공의 누님과 안씨(安氏)에게 시집간 종매(從妹) 역시 왜적을 꾸짖다가 칼에 찔려 죽었으며, 서숙(庶叔)과 따르던 종도 또한 공과 함께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변씨(卞氏)에게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 슬프다. 공은 집안과 나라의 원수에 대하여 차마 함께 한 하늘 아래에 살 수가 없었으니, 한 번 죽는 것이 진실로 공의 뜻이었다. 그러나 일에 보탬이 없이 한갓 목숨을 버리는 것은 또한 공이 평소 생각한 바가 아니었다. 진주가 한 작은 외로운 성으로 천만 명의 큰 왜적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패할 형세임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공은 밖에 있는 여러 장수들과 똑같이 관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성에 들어간 여러 현자들과 함께 죽음을 달게 여겼으니, 적의 예봉(銳鋒)이 이미 진주성에서 무뎌지면 남은 해독이 반드시 호남 지방에서는 줄어들 것이므로 진주성이 함락됨은 바로 적의 흉악한 위세를 꺾는 것이고, 호남 지방을 보존함은 바로 국가를 중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의 한 죽음은 의리를 살핌이 또한 지극해서이니, 어찌 다시 딴 계책을 낼 수가 없어 비분강개해서 함부로 죽음을 택하는 자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 충렬공에게 충절을 기리고 시호를 내린 것은 그를 애도하고 영화롭게 하기에 유감이 없다. 그러나 공과 학유공은 오랫동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받지 못하니, 사림들이 답답해하고 서운해한 지가 오래였다.
이제 선비들이 대궐에 호소하여 함께 은혜로운 명령을 얻었으므로 공의 사적을 엮어서 조정에 올려 태상씨의 채택에 대비하고자 한다. 그러나 공이 수립한 것이 이와 같이 드높아서 굳이 문장으로 드날릴 필요가 없으므로 다만 가장(家狀) 가운데 사람마다 함께 전하고 말하는 것을 거론하여 그 시종을 차례로 엮는 바이다.


[주-D001] 탐라(耽羅)의 성주(星主) : 
탐라는 제주(濟州)로 옛날에 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ㆍ고을나(高乙那) 세 신인(神人)이 바위 구멍에서 나왔는데 고을나의 15대손 고후(高厚)ㆍ고청(高淸) 등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도착했을 때 객성(客星)이 남쪽에 보였으므로 신라 왕은 내조(來朝)한 고후를 별한〔星主〕이라 일컬었다 한다. 《高麗史 地理志》
[주-D002] 지학(志學)의 나이 :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라는 뜻으로 15세를 가리킨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하였는데, 이는 《대학장구》의 수신(修身)ㆍ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의 도(道)에 뜻을 둔 것이라 한다. 《論語 爲政》
[주-D003] 창을 베고 자는 의리 : 
부모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신고(辛苦)함을 이른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부모의 원수에 대처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자며 벼슬하지 않고 더불어 천하를 함께하지 않으며, 시장과 조정에서 만나면 병기(兵器)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고 싸운다.〔寢苫枕干 不仕 弗與共天下也 遇諸市朝 不反兵而鬪〕” 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D004] 형제간의 …… 하였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아버지의 원수는 더불어 한 하늘 아래 살지 않고, 형제간의 원수는 병기를 가지러 되돌아가지 않으며, 친구의 원수는 같은 나라에 살지 않는다.〔父之讎 弗與共戴天 兄弟之讎 不反兵 交遊之讎 不同國〕” 하였다.
[주-D005] 변 성양(卞成陽) : 
진(晉)나라 성양(成陽) 사람으로 소준(蘇峻)의 반란 때에 적과 싸우다 전사한 변호(卞壺)를 가리킨다. 진나라의 육군(六軍)이 패한 상태에서 변호는 수백 명을 이끌고 고전하다가 마침내 죽었는데, 두 아들 진(眕)과 우(盱)가 아비의 죽음을 목격하고 서로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해를 당한 까닭에 변문 충효(卞門忠孝)의 고사로 전해져 온다. 《晉書 卷70 卞壺傳》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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