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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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 - 명재유고 제43권
서구문화원
날짜 2020-09-23 04:19
동몽교관 증 사헌부 지평 권공 행장(권필) - 명재유고 제43권 :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의 성은 권(權)씨이고 휘는 필(韠)이다.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이며 안동(安東) 사람이다. 문충공(文忠公) 근(近)의 6세손이다. 조부 승지 휘 기(祺)는 아들 둘을 두었으니, 장남 벽(擘)은 관직이 참의에 이르렀고 호는 습재(習齋)이며, 차남 경(擎)은 생원이다. 선생은 습재의 아들로서 생원의 후사가 되었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달리 영특하여 9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19세에 초시(初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복시(覆試)에 또 수석으로 합격하였는데 한 글자를 잘못 써서 탈락하였다. 이로부터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임진년(1592, 선조25) 4월에 친구 구용(具容)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항소(抗疏)를 올렸다. 상소에 이르기를,
“유성룡(柳成龍)과 이산해(李山海)가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쳤으니 실로 오늘날의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입니다. 그들을 참수하여 백성들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이 없었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명나라 사신 고천준(顧天埈)과 최정건(崔廷健)이 조서를 반포하는 일로 나왔다. 월사(月沙) 이공 정귀(李公廷龜)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떠나려 하면서 아뢰기를,
“전부터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문인을 널리 선발하여 제술관으로 삼았습니다. 유학(幼學) 권필이 시재(詩才)가 상당해서 비록 벼슬은 없지만 명성이 자자하니, 데리고 가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권필의 이름은 지금 처음 들었다. 그가 지은 시문을 구해 볼 수 있겠는가?”
하니, 정원에서 시고(詩藁) 수십 편을 베껴서 올렸다. 상이 크게 칭찬하고 이어 관직을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백의로 종사하였다. 당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 남창(南牕) 김현성(金玄成) 및 차천로(車天輅) 등이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났는데 일행이 되어 같이 일하게 되자 모두 선생에게 앞자리를 양보하였다. 그 뒤에 상서(尙書) 유근(柳根)이 원접사가 되어 또 선생에게 수행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선생이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인 월사가 선생의 가난함을 걱정하여 천거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다. 규례로 보면 의당 관디 차림으로 해조에 나아가 참알해야 한다. 그런데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두승(斗升)의 쌀을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은 평소의 뜻이 아니다.”
하고는 즉시 그만두고 떠났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강화부(江華府)에 들어가 오천(五川) 가에 초당을 짓고 우거하였는데, 배우는 자들이 존경하는 자세로 날마다 문에 나아왔다. 심지어는 식량을 싸 들고 미투리를 삼아 신고 천리 먼 곳에서 와서 따르는 자도 있었다. 선생의 집이 가난하여 음식을 제공할 수가 없었으므로 제자들이 직접 땔나무를 해다가 밥을 지어 먹었는데, 모두들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을 사람 양택(梁澤)이란 자가 그 아비를 죽였으므로 마을에서 연명(聯名)하여 관아에 고발하였다. 그런데 양택이 뇌물을 많이 써서 고발한 자들이 도리어 죄를 받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억울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이 상소를 올려 그 죄를 바로잡았다.
현석촌(玄石村) 강가로 돌아와 문을 닫고 교유를 끊었는데 오직 동악공과 체소(體素) 이춘영(李春英),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등 몇몇 공들과 서로 왕래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과 유희분(柳希奮) 등이 정사를 주도하였다. 이이첨이 선생의 이름을 사모하여 일찍이 교제를 청하고자 하였는데, 선생이 사절하고 만나 주지 않았다. 하루는 친구 집에서 우연히 마주치자 담을 넘어 피하였다. 이에 이이첨이 몹시 유감을 품게 되었다.
선생은 혼탁한 세상에 살면서도 기탄없이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혹 술자리에서 시를 지으며 시정(時政)을 기롱하고 풍자하였다.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이 전시(殿試) 대책(對策)에서 정사의 잘못된 점을 극력 말하니 광해군이 삭과(削科)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는 개탄하여 시를 짓기를,
궁궐 버들 푸르고 꽃은 어지러이 나는데 / 宮柳靑靑花亂飛
성안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떤다 / 滿城冠蓋媚春暉
조정에서는 다 같이 태평성대 축하하거늘 / 朝家共賀昇平樂
그 누가 위태한 말 포의 입에서 나오게 했나 / 誰遣危言出布衣
성안 가득 벼슬아치들 봄볕에 아양 떤다 / 滿城冠蓋媚春暉
조정에서는 다 같이 태평성대 축하하거늘 / 朝家共賀昇平樂
그 누가 위태한 말 포의 입에서 나오게 했나 / 誰遣危言出布衣
하였다. 시가 세상에 나와 전송되어 궐 안에 유입되자 광해군이 보고는 매우 노하였다. 마침 승지 황혁(黃赫)이 무고를 입어 형을 받아 죽고 그 사위 조공 수륜(趙公守倫)이 연좌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광해군이 조공의 집 문서를 수색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르러 보니 궁류시(宮柳詩) 절구 한 수가 우연히 어떤 책 겉장에 끼워져 있었다. 드디어 선생을 체포하라고 명하여 선생이 옥에 갇히게 되었다. 조공이 고문을 받고 벽을 사이에 둔 곳에 있었는데 선생의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여장(汝章)이 나로 말미암아 죽는구나.”
하였다. 선생이 대답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죽었다. 선생이 소리 죽여 통곡하였다. 다음 날 국문할 때 광해군이 직접 힐문하기를,
“네가 말한 궁류(宮柳)는 누구를 지적하는 것인가?”
하였으니, 이는 외척을 지척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한 것으로, 마침내 형장을 치며 고신(拷訊)하도록 명하였다. 백사(白沙)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당시 국문에 참여하였다가 자리를 피하며 아뢰기를,
“권필은 일개 방외의 선비인데 시안(詩案)으로 죄를 얻는다면 성세(盛世)의 일이 절대 아닙니다. 저러한 구유(癯儒)에게 혹 중형을 가한다면 선비를 죽였다는 오명을 면하기 어려우니, 형장을 가하여 고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광해군이 듣지 않았다. 이 상공은 차마 보지 못하고 마침내 총총히 나갔다.
다음 날 또 진계하여 힘써 간쟁함으로써 사형을 면하고 경원(慶源)에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 숭인문(崇仁門) 밖에 나가 길가의 민가에서 죽으니 임자년(1612, 광해군4) 4월 7일이다.
선생은 기사년(1569, 선조2)에 태어나 이때 이르러 향년 겨우 44세였다. 원근에서 듣고 애통하고 억울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문인 심척(沈惕) 등이 그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슬퍼하여 대부분 과거 공부를 포기한 채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고양(高陽) 위양리(渭陽里) 선영 곁에 안장하였다. 12년 뒤인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즉위하여 제일 먼저 선생에게 사헌부 지평을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부인 송씨(宋氏)는 호남의 고사(高士) 제민(濟民)의 딸로서 선생이 졸한 뒤 24년이 지난 숭정 병자년(1636)의 난리에 적을 만나 목을 매서 자결하였다. 선생의 묘에 부장하였다. 아들 항(伉) 또한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일찍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관직은 청하 현감(淸河縣監)에 이르렀다. 딸은 사인 최계창(崔繼昌)에게 시집갔다.
청하 현감은 두 번 아내를 맞았는데 모두 이씨이다. 전처에게 1녀를 두었으니 감찰 정휴(鄭庥)의 처가 되었다. 후처에게 1남을 두었으니 속(謖)이다. 측실에게 2남을 두었으니 밀(謐)과 조(調)이다. 1녀의 사위는 조윤한(趙胤漢)이다. 속은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현종조에 선생은 절행(節行)이 있으므로 제사를 끊기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선생의 형의 증손 수(㥞)를 속의 후사로 삼도록 명하였으니 대개 특별한 은전이었다. 최계창은 2남을 두었으니, 장남 최선(崔宣)은 참봉이고 차남은 최헌(崔憲)이다.
수가 선생의 제사를 모시게 되자 즉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찾아뵙고 발문을 받아 묘갈명으로 삼고 또 나에게 행장을 짓도록 하였다. 내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사양하였으나 수가 더욱 굳게 청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선배들이 선생을 논한 것이 이미 있다. 상촌(象村) 신 문정공(申文貞公)은 말하기를,
“공은 소탈하고 무슨 일이든 거침없이 추진하는 성격이었다. 사소한 의절(儀節)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세상을 도외시하고 떠돌아다니면서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하였고, 월사(月沙) 이 문충공(李文忠公)은 말하기를,
“공은 풍류가 있고 재기가 뛰어났으며 오묘한 언어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기운은 우주를 좁게 여기고 안목은 천고 시대를 넘나들었다. 그의 포부는 속인들이 엿보고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미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르려 하지 않고 기이한 재주와 의리를 품은 채 혼탁한 세상에 항거하며 개탄하였다.”
하였다. 계곡(谿谷) 장 문충공(張文忠公)은 말하기를,
“공은 이마가 넓고 입이 크며 미간이 넓었으며 체구가 크고 기상이 호방하였다. 언론은 우뚝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이따금 농담을 섞어 말하였다. 성격이 술을 몹시 좋아하였고 술을 마신 뒤에는 말하는 것이 더욱 호탕해졌는데, 오만한 자세로 시를 음영할 때면 풍채가 한가롭고 명랑하였다.”
하였다.
아, 이 세 군자는 모두 문장이 훌륭한 거공(鉅公)으로서 인물평을 할 만한 분들인데, 월사는 선생과 막역한 교분이 있었으니, 그 말이 모두 믿을 만하고 징험할 만하다. 이 세 분의 말로 미루어 보면 선생의 인품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후모(後母) 김씨를 지성껏 모시어 질병이 있으면 약시중을 들면서 의대를 풀지 않고 새벽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친구 가운데 재신이 된 자가 혹 음식과 옷감을 보내면 모두 김씨에게 보내고 한 가지 물건도 자기 것으로 남겨 두지 않아서 자신은 항상 거친 밥에 나물국을 들었다. 처자가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지만 여유가 있는 듯이 생활하고 조금도 가슴속에 불평하는 뜻이 없었다.
다섯 형제가 모두 시를 잘하여 그들과 함께 놀며 글 짓는 것을 참된 낙으로 여겼다. 평소 허여하는 사람이 적었으니, 이를테면 명리(名利)를 따르는 자나 부유한 집의 자제들과는 더욱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다. 부귀와 영달에 대해서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중국 사람과 우리나라 선비 한 사람이 만나 말하는데, 모두 나라를 위해 악한 것을 숨기는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선생이 질타하니 모두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 여기서 선생의 떳떳한 행실을 볼 수 있다. 종손인 모관(某官) 집(諿)과 모관 열(說)이 기록한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벗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장차 물러나 산야에 은거하여 마음을 거두고 본성을 길러서 옛사람이 말한 도를 구하려고 생각하여 송나라 제현들의 서책을 구해다가 읽고 사유하였다. 비록 감히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문의(文義) 사이에 분명하게 마음에 닿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흔쾌히 학문에 정진한 지 이제 6, 7년이 되었네.”
하였으니, 당시 선생의 나이가 31세였다. 만년에는 박잠야(朴潛冶) 선생과 만나 경외하며 심복하여 단 몇 마디를 나누고서 사표(師表)로 인정하였다. 잠야 또한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겨 선생이 졸하자 애도하여 마지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여장은 증점(曾點)의 뜻이 있어서 종전의 자기가 추구하던 것을 버리고 정주(程朱)의 학문을 좇아 장차 파죽지세(破竹之勢)를 이룰 참이었는데, 반년도 못 되어 하늘이 참혹한 화를 내렸으니, 우리 유도(儒道)의 불행이다.”
하였다. 묘갈명에서 말한, 관심을 돌려 성리학에 종사한 뒤 사문(斯文)에 앞서 도달하여 기수(沂水)에 목욕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의 시는 천부적인 재주에서 나왔으므로 후일 시 짓는 자들은 제일로 추대하였다. 계곡은 말하기를,
“공이 호걸의 자질로서 전일한 뜻으로 학문하여 오로지 시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하고, 마침내 탄식하기를,
“그런데 세상에서 지우(知遇)를 입은 것은 단지 한 번 중국 사신을 접반하게 된 것뿐이었고,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도 결국 시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니, 하늘이 공에게 재주를 준 것이 영광스럽게 한 것인가, 아니면 재앙을 준 것인가.”
하였다. 그리고 묘갈명에서는 시종 선생을 시만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참으로 선생의 시를 선생의 여사로 본 것이다.
아, 우리 조선에서 인재가 성대하기로는 명종ㆍ선조(宣祖) 연간이 제일이다. 선생은 늦게 나와서 비록 한 가지 기예로 이름을 날렸지만 또한 우뚝하게 서서 미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 세상에 매우 드문 특이한 인물이라 하겠다. 한 번 변하여 도에 이르기를 거의 횡거(橫渠)의 용기에 근접하였으니, 고명하게 뻗어 나가 조만간 높은 경지에 나아갈 수 있었는데, 이루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그 시를 읊으며 그 풍도를 들으면 모두 쇄신하여 명리를 천시하게 되고 완악하고 나약한 뜻을 분발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선생이 세상의 교화에 보탬을 준 것이 또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내가 늦게 태어나 학문이 비루하여 선생을 알기에 부족하다. 또 글재주가 없어서 제대로 다 드러낼 수가 없다. 삼가 전해지는 말을 위와 같이 정리한 다음 수에게 돌려보내어 훌륭한 논객이 함께 정정해 주기를 기다린다. 수가 나이는 어리지만 재주가 있는데 또 이 일을 서둘러 잘해내고 있으니, 역시 선생의 덕을 이을 만하다고 하겠다.
- [주-D001]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 :
- 진회는 송 고종(宋高宗) 때 재상으로, 금(金)나라와 화친(和親)을 적극 주장하였다. 《宋史 卷473 秦檜列傳》 양국충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권신(權臣)으로 양 귀비(楊貴妃)의 오빠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현종을 충동하여 촉(蜀)으로 피란하게 하였다. 《舊唐書 卷106 楊國忠列傳》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한 간신인데, 1592년(선조25) 당시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은 강화를 주장하였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임금을 파천하게 하였으므로 이 두 사람에 비유한 것이다.
- [주-D002] 마침 …… 되었다 :
- 1612년(광해군4) 2월에 일어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말한다. 김직재가 황혁(黃赫)과 더불어 역모하여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세우려고 하였다는 고변이 들어와 100여 명이 연루되어 처벌을 받은 옥사로, 대북파가 소북파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옥으로 밝혀졌다. 조수륜(趙守倫)은 편지를 왕래했다는 죄목으로 연루되었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 [주-D003] 외척 :
- 유희분(柳希奮) 등 광해군의 처가인 유씨(柳氏)들을 말한다.
- [주-D004] 구유(癯儒) :
- 산택 사이에 은거하는 수척하고 청렴한 학사(學士)를 뜻한다.
- [주-D005] 상촌(象村) :
- 신흠(申欽, 1566~1628)의 호이다.
- [주-D006] 월사(月沙) :
-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호이다.
- [주-D007] 계곡(谿谷) :
- 장유(張維, 1587~1638)의 호이다.
- [주-D008] 박잠야(朴潛冶) :
- 잠야는 박지계(朴知誡, 1573~1635)의 호이다. 저서로는 《잠야집(潛冶集)》이 있다.
- [주-D009] 여장은 …… 불행이다 :
- 한국문집총간 80집에 수록된 《잠야집》 권6 〈제이방숙문(祭李方叔文)〉에 나온다.
- [주-D010] 기수(沂水)에 목욕하게 되었다 :
- 기수는 노(魯)나라 도성 남쪽에 있는 물 이름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각기 포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봄에 여러 친구들과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자는 자연을 즐기려는 그의 높은 뜻을 칭찬하였다. 《論語 先進》 이 때문에 한가로이 자연을 즐기는 말로 흔히 쓰이게 되었다. 여기서는 유학에 입문하여 성리학을 이루게 된 것을 말하였다.
- [주-D011] 횡거(橫渠)의 용기 :
- 횡거는 송(宋)나라 학자 장재(張載)이다. 《심경(心經)》 〈군자반정(君子反情)〉에 주자(朱子)가 “횡거는 학문한 공력이 일반인들보다 뛰어나서 허물을 고치는 데에 더욱 용감하였고……” 하였다. 장재가 젊어서 지기(志氣)가 뛰어나 병사(兵事)를 좋아하였는데 범중엄(范仲淹)에게 가르침을 듣고는 번연히 뜻을 바꿔 도학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권필(權韠)이 처음에는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후반에 성리학에 관심을 두고 매진하게 된 것을 장재가 용감하게 진로를 바꾼 데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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