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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평(李持平)의 묘갈명(墓碣銘) - 기언 별집 제22권 / 구묘문(丘墓文)

이 지평(李持平)의 묘갈명(墓碣銘) - 기언 별집 제22권 / 구묘문(丘墓文)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

공은 휘(諱)는 완(梡)이요, 자(字)는 자완(子完)이며, 성은 이씨이다. 그 선대는 연안(延安) 사람으로, 고려 때 태자 첨사(太子詹事) 이습홍(李襲洪)의 후예이다. 6대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이귀산(李貴山)이 있고, 또 4대에 병조 참의 이인문(李仁文)이 있었다. 참의가 삼척 부사(三陟府使) 이말(李????)을 낳았고, 부사가 여산 군수(礪山郡守) 이경종(李慶宗)을 낳았으며, 군수가 사간원 정언 이주(李澍)를 낳았고, 정언이 관찰사 이창정(李昌庭)을 낳았는데, 공의 아버지이다. 당시에 명망과 지조가 중하게 되었는데, 광해의 정란(政亂) 때가 되어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인조 때 함경도 관찰사로 발탁되었다가 졸하였다. 비(妣) 정부인(貞夫人)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부인의 아버지는 이응명(李應明)인데, 숨어 살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공은 점잖아 말이 적으며,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문학으로 한때 추중받았다. 22세에 관찰공이 졸했고, 8년 뒤에 정부인이 졸하여 부모를 일찍 여의었는데, 애통한 곡읍(哭泣)과 거상(居喪)하는 예절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바 많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인조 13년(1635) 증광시(增廣試)에 생원(生員)이 되었고, 이듬해 천거로 동궁 세마(東宮洗馬)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가, 4년 뒤 기묘년(1639, 인조17)에 별시(別試)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괴원(槐院)의 정자(正字)로 선발되었다. 병자호란을 당한 뒤에 또 가뭄이 크게 들자, 상이 자책하며 구언(求言)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변통(變通), 진작(振作)시키는 알맞은 것을 무릇 7조(條) 수백 마디로 아뢰었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박사로 승진하여 태상(太常)을 겸임했고, 이듬해 성균관 전적으로 예조와 병조의 좌랑으로 전직되었다가 옥구 현감(沃溝縣監)이 되어 나갔다. 그곳은 바닷가로 소금기가 많아 농사가 잘되지 않아 생선이나 소금을 팔아서 생계를 마련해야 했다.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매우 어려운데도 관리의 횡포는 그치지 않아 어민들이 흩어져 공사(公私)가 텅텅 비었다. 공이 관용과 절약에 힘쓰고 명목 없는 부세는 모두 없앴으며, 봉급을 덜어 백성을 돕고 자제를 선발하여 학문과 기술을 권장하자 수년 만에 유랑하고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정해년(1647, 인조25)에 다시 예조와 병조의 정랑이 되었다가 사간원 정언으로 옮겼는데, 홍무적(洪茂績), 이응시(李應蓍)가 강빈옥사(姜嬪獄事)를 당하여 직언(直言)으로 간하다가 북쪽 변방에 유배되자, 공이 상소하여 두 신하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일을 말하고, 이어 다스리는 도리가 한결같이 임금의 덕과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였다. 뒤에 직강으로 사헌부 지평이 되고, 사국(史局)을 겸임하여 간사와 부정을 다스리되 법을 지키고 사심이 없으므로 인심이 숙연하고 두려워하였으니, 옛날 법관의 기풍이 있었다. 그해에 크게 흉년이 들자 상은 대신에게 명하여 국(局)을 설치하고 기민을 구제하는 일을 관장할 적에 공을 뽑아 맡기었다. 공은 ‘법을 집행하면서 낭서(郞署)의 일을 겸임하는 것이 사체(事體)에 불가하다.’ 하여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들도 ‘인재 구하기가 어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사람이 없다.’ 하였다. 상이 특명을 내려 출입할 때에 읍만 하고 절하지 않게 하고 가부(可否)를 결정하기를 대신들과 서로 동등하게 하였으니, 고사(古事)에도 없는 일이다. 상이 본래부터 중하게 여겨 공이 상을 모시다가 물러나자 상이 그를 지목하여 ‘악의(惡衣)와 악식(惡食)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는 오직 이 사람이다.’ 하였다.
무자년(1648, 인조26)에 다시 지평이 되었는데, 이때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어 ‘재이(災異)란 우연한 일이다.’ 하고, 상을 권하여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신하들이 모두 못마땅해 하면서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고 이어 재이, 참소, 아첨, 사치, 방종, 뇌물,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 원성 등에 대하여 수백 언(言)을 올려 극력 논하였다. 가을에 다시 지평이 되었을 때, 병이 심하므로 상이 태의(太醫)와 약재를 내려 특별한 은총으로 대우하였으나, 마침내 졸하니 45세였다. 상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월등한 휼전(恤典)으로 그 집을 구휼하도록 했고, 모든 공경(公卿), 대부(大夫), 사(士)와 대여(臺輿), 하천(下賤)까지도 탄식하며 애석하게 여겨, 어진 법관이 죽었다 하여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았다.
아버지 관찰공은 집에 있을 때 말보다는 실행을 앞세웠는데, 공도 방정(方正)하고 검약하여 부모와 형제에게 잘했으며, 평소에 사사로이 재물을 갖지 않았다. 충애(忠愛)에 독실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경학에 더욱 힘썼다. 그의 학문은 가정에서 효도하고 우애하는 것으로부터 임금을 섬기고 풍속을 개선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자기 행실 닦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이미 세운 바가 정확했고 이행하는 바가 방정하여 남보다 높은 행실이 있었으므로, 세도(世道)가 크게 무너진 때를 당해서도 뜻을 세워 아첨하지 않았고, 세속에 구차하게 맞추려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아, 슬프다. 현명하면서도 명이 짧아 큰일을 할 만한 재주와 뜻을 가지고도 마침내 크게 펴지 못하고 죽었으니 천명(天命)이다. 용주(龍州) 조경(趙絅)이 애도문(哀悼文)을 짓기를,


“확고한 지조는 만 마리 소의 힘으로도 그 무게를 돌릴 수 없고, 곧게 나아가는 용맹은 삼군(三軍)의 힘으로도 그 기개를 빼앗을 수 없다. 이는 그대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인데, 하늘은 어찌하여 그대의 수명을 짧게 하고 그대의 도가 이 세상에 펴짐을 막았는가.”


하였다. 공은 암천(巖川)에서 즐겨 살았으며, 호남 무성현(武城縣 광주(光州)의 옛 이름)의 경암천(鏡巖川) 위에 집이 하나 있었는데, 공이 졸한 뒤에 지나는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이 백부(李栢府 백부는 사헌부의 별칭. 이완이 사헌부 지평이었기 때문이다)의 별장이라고 말했다.
숙인(淑人) 철성 이씨(鐵城李氏)는 고려 상서(尙書) 이교(李嶠)의 후손인 정랑(正郞) 이원량(李元樑)의 딸인데, 아담하고 조심스러워 부녀자의 일을 부지런히 했으며, 시어머니를 섬기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어 시어머니가 칭찬하기를, ‘우리 어진 며느리는 꼭 복받을 것이다.’ 하였다. 숙인은 공보다 한 살 아래로 20년을 과부로 살다가 64세에 죽었다. 여러 아들이 어려서부터 독서하고 행실을 잘 닦아 가훈(家訓)을 떨어뜨리지 않은 것은 숙인의 가르침이다.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아들은 이귀징(李龜徵), 이문징(李文徵), 이휴징(李休徵), 이봉징(李鳳徵), 이인징(李麟徵)이고, 사위는 이창주(李昌胄), 송세규(宋世奎), 홍만옥(洪萬玉)이요, 또 서자에 이유징(李悠徵)이 있다. 자손이 3대에 20여 명인데, 성장하여 장가들고 시집갔다. 이문징은 아들 이선(李渲), 이연(李演), 이굉(李浤)과 사위 이기하(李基夏)가 있고, 이휴징의 아들은 이서(李澨)이고, 이창주의 사위는 홍기(洪基), 윤종경(尹宗慶)이다.
처음 공이 죽었을 때에 당진(唐津)에 장사했다가 묏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숙인이 죽은 뒤에 면천(沔川) 숭학산(崇學山) 아래 동남쪽 언덕에 합장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정도를 잡아 과장하지 않았고 / 秉正無夸
청렴과 의리로 자신을 극복하며 / 廉義自克
지조가 결백하여 사특하지 않았으니 / 貞白不回
옛날 정직의 유풍일세 / 古之遺直


[주-D001] 강빈옥사(姜嬪獄事) : 
인조(仁祖) 25년(1647)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 강씨가 반역하였다 하여 죽인 일을 말하는데, 이 옥사에 그의 아들 이석철(李石鐵), 이석린(李石麟) 등을 제주로 귀양 보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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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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