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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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 황현 <매천집> 권6- 동계초당기 東溪草堂記
曾子固序劉向《新序》,推論一道德同風俗,爲王者之極功。其說蓋美矣。然此以三代之盛,漸摩薰漬之極,自無異言異行者而言耳,非所與論於秦、漢以後也。嗚呼!大樸旣散,虛僞日滋,微窺國家之所尙,則群下靡然趨之,遂成一代之俗。自宋儒創明理學,人人知卑功利,人人知排異端,可謂道德一而風俗同矣。然治天下則蔑其效,且在當時號爲是學者,尙往往有可議,况其愈下者乎?
我朝立國,與趙宋同,眞儒輩出,庶幾洛、建之盛。而積勢所趨,浮慕成痼,及其久也,未嘗無虛僞之混焉。夫前史所傳隱逸獨行之倫,不必皆說心說性,而奇偉卓絶輝映千古者何限?乃近世之士則生前稍自修飾,身後必有幾卷文字,劈理抽氣,張皇飣餖,又推所謂立言者而成其誌狀,則又未甞非儼然道學先生。
然上焉而無梁鴻、徐穉之苦節,下之求其有林逋、魏野性情之詩而亦不可得,依假剿襲,惟理學是云,不幾於自欺而欺世乎?故余嘗謂“後之撰本朝史者傳儒學,將不勝其夥,而傳隱逸,將不勝其寥寥也”。豈士之懷奇蘊寶者盡出爲當世之用,而無枯黃之歎歟?抑道德一風俗同,庶幾古昔之盛,而小子狂簡未能有以測識歟?
元陵之世有申光宅先生者,世居瑞石山中,自號東溪處士,就所謂東溪者,構草堂其上,漁樵畊讀而終其身。子孫至今遵其遺矱,斤斤其勿替。而至於草堂之旣仆而復新,鄕邦之士從而詠歌之不衰,則是其卓行隱德必有所以遯世无悶之實。而所少者,幾篇性理文字耳,叔世澆漓之時,其回淳返樸如處士者,曷可少哉?
往年余過瑞石東麓,見其溪潭澄泓,竹木葱蒨,雞鳴犬吠,杳然嵐雲之際,意其有隱君子,而路忙未之入焉。今而聞之,蓋草堂之所在也。噫!余雖不獲登斯堂,把酒賦詩以悅處士之風,而庶幾異日錄處士之跡,以備湖南耆舊隱逸之遺,則斯堂者未必非藥囊畵師之徵爾。
증자고(曾子固)는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에 대한 서(序)에서, 도덕이 일치되게 하고 풍속을 동일하게 하는 것이 왕자(王者)의 최고 공적이라 추론(推論)하였는데, 그 논리가 대체로 훌륭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는 삼대(三代)의 태평성대에 정치 교화가 최고조에 달하여 전혀 말이나 행동을 달리하는 자가 없던 시절을 두고 말한 것이지, 진한(秦漢) 이후까지 함께 논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아아, 삼대 이후로는 극도의 질박함이 사라지고 허위가 날로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국가가 무엇을 숭상하는지 눈치를 살피고는 다들 그쪽으로 휩쓸리고, 결국에는 그것이 당대의 풍속이 되곤 하였다. 그 뒤 송유(宋儒)들이 성리학을 천명하면서 사람들이 공리(功利)를 경시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다. 이른바 도덕이 일치되고 풍속이 동일하게 되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때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실제적인 공효가 없었던 데다, 당시에 이 학문을 한다고 일컫던 자들조차 종종 논란이 될 만한 점이 없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보다 낮은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 조선이 나라를 세운 것이 송(宋)나라와 같고 진유(眞儒)가 배출된 것도 정주(程朱)의 융성기에 버금간다. 하지만 그러한 추세가 누적되면서 표면상의 존모(尊慕)가 고질이 되었고,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서 허위가 혼재하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대체로 지난 역사책에 전해지는 남다른 행실의 은일지사(隱逸之士)들이 모두 마음과 본성에 대해 논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에 위대하고 우뚝한 절행(節行)으로 천고에 빛날 자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에 비해 근세(近世)의 선비들을 보자. 하나같이 생전에는 선비입네 치장하고, 죽은 뒤에는 반드시 몇 권의 문집을 남기며, 이(理)와 기(氣)를 분석하여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소위 그 입언(立言)들을 추숭(推崇)하여 묘지(墓誌)와 행장(行狀)을 만든다. 그렇게 보면 모두 의젓한 도학선생(道學先生) 아닌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위로 양홍(梁鴻)이나 서치(徐穉) 같은 굳은 절개도 없고, 아래로 임포(林逋)나 위야(魏野) 같은 성정(性情)이 담긴 시(詩)를 쓸 능력도 없다. 오로지 남의 학설을 표절하여 성리학은 이런 것이라는 말들만 늘어놓으니, 어찌 자신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후세에 조선의 역사를 찬술하는 자가 유학자의 열전(列傳)을 낼 때에는 너무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고, 은일지사의 열전을 쓸 때에는 기록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라고 말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선비 중에 특출한 재덕을 지닌 선비가 모두 나와서 당세에 등용되고 영락(零落)된 채 탄식하는 이가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도덕이 일치하고 풍속이 동일해진 것이 옛날의 태평성대와 같아진 결과, 광간(狂簡)한 사람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영조(英祖) 때에 신광택(申光宅) 선생이란 분이 있었다. 대대로 서석산(瑞石山) 산중에 살면서 동계처사(東溪處士)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는 이른바 동계(東溪)라는 곳에 나아가 그 시냇가에 초당(草堂)을 짓고는, 고기 잡고 나무 하고 밭 갈고 책 읽으면서 한평생을 보냈다.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그분이 남긴 법도를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준수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 초당이 무너져서 다시 짓게 되자, 이 고장의 선비들이 모두들 변함없이 그 덕을 기리고 송축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그분의 뛰어난 행실과 은일의 덕은, 세상을 피해 숨어 살되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은 실제가 분명 있다 하겠다.
다만 그에게 부족한 것은 몇 편의 성리학에 대한 글뿐이니, 이런 말세의 경박한 시대에 순박(淳朴)의 원형으로 돌아간 처사와 같은 사람을 어찌 하찮게 볼 수 있겠는가.
왕년에 나는 서석산 동쪽 산기슭을 지나다가, 시내가 맑고 대나무가 푸르며 닭이 울고 개가 짖는 아득히 푸른 운기(雲氣)가 도는 곳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저곳에는 아마도 은거하는 군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는데, 당시에는 노정이 바빠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그곳이 바로 동계초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아, 내 비록 그 초당에 올라가 술 마시고 시 읊으며 처사의 풍모에 열복(悅服)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행여 훗날 처사의 자취를 기록하여 호남(湖南)의 중망 있는 노인과 은일지사의 유전(遺傳)에 대비한다면, 이 초당이 바로 약초 캐는 은일지사가 살았던 증거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리라.
[주-D001] 증자고(曾子固) : 자고는 송나라 때의 문장가 증공(曾鞏)의 자이다.
[주-D002] 유향(劉向) : 전한(前漢)의 학자로, 자는 자정(子政)이다. 《열녀전(列女傳)》, 《설원(說苑)》 등의 저서가 있다.
[주-D003] 신서(新序) : 유향이 편찬한 책으로 10권이다. 춘추 시대부터 한대(漢代)까지의 일사(逸事)를 기록하였다.
[주-D004] 양홍(梁鴻) : 후한(後漢) 때의 현사(賢士)로, 평릉(平陵) 사람이다. 부인 맹광(孟光)과 서로 공경했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의 고사가 있는데, 이 부부는 패릉(覇陵)의 산속으로 들어가 평생 은거하며 살았다.
[주-D005] 서치(徐穉) : 후한 예장(豫章) 사람이고 자는 유자(孺子)이다. 그 역시 평생 벼슬에 응하지 않은 채 은거하고 살았으므로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일컬어졌다
.[주-D006] 임포(林逋) : 967~1028. 북송 때의 시인으로, 평생 은거하며 매화와 학을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의 고사가 있다
.[주-D007] 위야(魏野) : 960~1019. 북송 때의 시인으로, 자는 중선(仲先)이다. 저서로 《초당집(草堂集)》이 있다
.[주-D008] 선비 …… 것일까 : 김소영은 이 구절을 예시하며 반어적 수법을 통해 당대의 유학자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반어적 수법을 매천 산문의 한 특징으로 제시하였다. 《김소영, 매천 산문의 표현형식 연구, 한문학보 제18집, 2008》
[주-D009] 서석산(瑞石山) : 광주 무등산(無等山)의 옛 이름이다.
[주-D010] 그에게 …… 글뿐이니 : 실제로 동계처사에게 성리학에 관한 글이 없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다. 이 구절 또한 성리학에 관한 글을 남겨야 학자로 대접받는 당시 세속의 기준을 비판하려는 반어적 표현법이다.
[주-D011] 약초 …… 증거 : 대본에는 ‘藥囊畫師之徵’으로 되어 있다. 의미상 ‘은일지사가 살았던 증거’라는 뜻으로 쓰인 듯하나 이에 대한 전거는 찾지 못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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