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31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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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철-서석산 원효사를 찾아서(訪瑞石山元曉寺)
- 元曉寺深稀客笻 원효사 깊은 곳에 있어 손의 지팡이 드문데朝鍾暮鼓爲誰撞 아침 쇳종과 저녁 북 누굴 위해 치는가.雲開列嶂靑環四 구름 열린 늘어선 봉우리 사방을 푸르게 두르고洞邃幽禽巧囀雙 깊은 동굴의 그윽한 새 쌍으로 교묘히 우네. 半日唫來松下榻 한나절을 소나무 아래 평상에서 읊조리고淸風醉臥竹間窓 맑은 바람 죽간 창가로 불어와 취하여 누워있네.嗟呼楓谷今何在 슬프다, 풍곡은 지금 어디메 있는가瞻彼諸天依舊邦 저 하늘 우러러보니 예전 그대로의 나라인데단산(丹山) 조원철(趙元喆, 1917~1977)이 무등산(瑞石山)과 증심사(澄心寺看楓), 무등산 중턱에 있는 산장(逭暑無等山庄)을 들리고 원효사에 들려 읊은 시(訪瑞石山元曉寺)다. 본관은 한양으로 무안군 몽탄에서 출생하여 5세 때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만성(晩醒) 정선생(丁先生)에게 수강(受講)하고 서예는 금정(錦亭) 정필사(丁筆師)에게 배웠다. 1934년 도일(渡日)하여 대판시통신대학(大板市通信大學)을 수료하고 1941년 귀국한 즉시 여수공민고등학교(麗水公民高等學校)에 교사로 취임하여 10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그 후 광주 서석동에서 자리를 잡고 시인과 묵객을 연합하여 정기시회를 구성하고 서예도전(書藝道展)도 발전시켰으며 김문옥(金文鈺), 고광열(高光烈), 김규태 등과 교류를 하고 시사(綠陰詩社原韻, 儒山詩社會, 光山諸友會吟, 光州詩社會)에도 참여하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단산정(丹山亭)을 짓고 시(次丹山亭原韻, 題丹山亭, 丹山亭記)를 남겼으며 그의 작품은 1978년 위계도(魏啓道)와 아우 조용원(趙龍元)이 발문을 쓰고 편간한 단산집(丹山集)이 있다.
- 2018-07-06 | NO.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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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만-柳林藪觀獵 次杜工部冬狩行韻 寄雪岳山人要和 戊子
- 조정만(趙正萬, 1656~1739) ‘유림숲에서 수렵을 구경하고 두공부의 ‘동수행(冬狩行)’시운을 차하여 설악산인에게 부쳐 화답을 요청하다(柳林藪觀獵 次杜工部冬狩行韻 寄雪岳山人要和 戊子)’海陽觀獵素稱雄 해양의 관렵은 본디 웅장하다 칭해지니 大將約束依軍功 대장의 약속은 군공을 따라서 행한다네 平明吹角出北門 이른 아침 호각을 불며 북문을 나서니 我車旣攻我馬同 나의 수레 견고하고 나의 말도 화동하네 千軍四圍柳林藪 천군이 유림의 숲을 사방으로 에워싸서 鉦皷合沓震高穹 징과 북을 두드리니 창공이 진동하네 荊楚劒客力扼虎 형초의 검객은 힘으로 호랑이를 잡으니 不數蒼兕與黃熊 푸른 물소와 노란 큰 곰은 세지도 않네 或覘飛走高樹上 혹은 높은 나무에서 새와 짐승을 살피고 或探巢穴荒原空 혹은 황량한 들판에서 둥지와 굴을 찾네 角角之雉濯濯鹿 깍깍 우는 꿩과 살찌고 윤택한 사슴들 一發何啻彼茁蓬 우거진 쑥대에 화살 쏘아 수없이 잡네 狐裘獸炭酌流霞 호구 입고 수탄 피워 유하주를 따르며 倚醉胡床山雪中 산설 가운데 취하여 호상에 기대었네驅兵更向紫微灘 군사를 몰아 다시 자미탄을 향해가니烏驪白馬間靑驄 검은 말과 백마와 청총마가 어우러졌네南來快意此一時 남쪽으로 와서 한 때 뜻을 통쾌히 하니樂事西關皆下風 서관의 즐거운 일도 이만 못하네三兒彩服隨皁盖 세 아이 색동옷 입고 조개를 따르니 絶勝金䮍駄嬌紅 좋은 말에 미인 싣는 것보다 낫구나緇髡數輩引筍輿 중들 몇이 대나무 가마를 인도하니 暮鍾初動梵王宮 저녁종이 막 범왕의 궁전에 울리네獰飊乍捲旗脚轉 세찬바람 문득 불어 깃발 흔들리고山日欲沈雲戎戎 산의 해는 지는데 구름은 뭉게뭉게恨無筆力繼工部 공부를 이을 필력 없어 한스러우니爲憶故人棲東蒙 동몽산에 은거한 친구를 그리워하네-오재집(寤齋集) 권1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자는 정이(定而)이며 호는 오재(寤齋)이다. 광주는 호환으로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있던 향교를 성안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종종 있었는데, 읍성에서 가까운 유림숲까지 호랑이가 출몰했었던 것 같다. 고을 수령의 입장에서는 호랑이로부터 민가를 보호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만 했을텐데 그것이 바로 사냥이었다. 1708년 목사 조정만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읍성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냥이 끝난 순간까지 매순간을 생생한 시로 남겼다
- 2018-07-12 | 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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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찬한-광주를 다녀가는 도중에(光山道中)
- 造化非無迹 神功本泰和 不緣連夜雨 寧得滿山花 白日乾坤麗 靑春草木奢 未嫌行路遠 猶喜眺望賖-현주집(玄洲集) 권5조찬한(趙纘韓, 1572~1631)의 자는 선술(善述)이며 호는 현주(玄洲)이다. 조찬한은 예조참판을 지낸 조위한의 아우이다. 선조 34년(1601)에 생원이 되고,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장원 급제하였다. 전적을 거쳐 호조 좌랑, 형조 좌랑을 지내고 인조 반정 이후 형조참의·선산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시에 능하였으며, 양경우(梁慶遇), 이안눌(李安訥), 권필(權韠,) 임숙영(任叔英) 등과 절친하였다.
- 2018-07-10 | NO.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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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팽년-喜慶樓別呂尙夫
- 別夕須酌滿滿巵 이별하는 저녁 넘실넘실 술잔이 차기를 기다릴 뿐離亭莫吟勞勞詩 헤어지는 정자 누구도 쉽게 시를 짓지 못하네明朝京洛揮鞭去 내일 아침 한양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떠나가면 樓外春楊只自垂 희경루 밖 봄버들은 절로 가지를 늘어뜨릴 뿐 -계음집(溪陰集) 권2조팽년(趙彭年, 1549-1612)의 자는 경로(景老)이며 호는 계음(溪陰)이다.
- 2018-07-17 | NO.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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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일-景陽堰上 押呼 示梁長城
- 조희일(趙希逸, 1575~1638) ‘경양방죽 위에서 양장성에게 보이다(景陽堰上 押呼 示梁長城)’抱霜殷葉墮危枝 서리맞은 무성한 잎은 높은 가지에서 떨어지고地暖江南節較遲 땅이 따뜻한 강남에선 계절도 느릿느릿 가네莫恨白頭成潦倒 늙은 몸이 힘없다고 한탄치 마시게나且開靑眼向親知 친지를 생각하면 반가움에 두 눈이 번쩍이네棲鴉古堞煙光薄 옛 성첩 해질녘엔 갈가마귀 깃들이고回雁遙峯日脚垂 먼 봉우리로 해지니 기러기 돌아오네任使女兒攔道笑 길가의 여자아이들 웃더라도 상관마소 接罹斜影月明時 모자 비껴 쓴 것은 달이 밝기 때문일세 -죽음집(竹陰集) 권7
- 2018-07-12 | NO.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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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일-次(風亭錦瑟差池約)
- 身如越鳥戀南枝 千里歸程恨太遲把酒詎能陶好興 論文猶足托心知風亭錦瑟差池約 月渚漁竿寂寞垂 從古有才要有用 不應虛老聖明時-죽음집(竹陰集) 권7조희일(趙希逸, 1575-1638)의 자는 이숙(怡叔)이며 호는 죽음(竹陰)이다.
- 2018-07-12 | NO.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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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조 학사가 광주로 부임하자 내가 가서 방문하였다- 제호집
- 죽음 조 학사가 광주로 부임하자 내가 가서 방문하였다. 동각에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는데 곁에 문자를 아는 이가 있어서 문득 운을 부르게 하였다. 각자 지필을 잡고 바람같이 단율을 지었다 20운 〔竹陰趙學士出守光州 余往訪 翦燭東閣 旁有識字者 輒令呼韻 各操紙筆 走成短律 二十韻〕 - 제호집 제6권 / 시(詩)○오언배율(五言排律) : 양경우(梁慶遇, 1568~1638)노년을 궁벽한 곳 누우니 / 殘年臥荒僻점차 속연도 작아지는 듯 / 漸覺俗緣微달빛 물가에 시와 낚시요 / 月渚吟垂釣운림에 병든 몸 채미하네 / 雲林疾采薇간록을 싫어함이 아니요 / 誰言厭干世잠시 빛을 감추려 할 뿐 / 暫擬學藏輝검갑은 빈 벽에 걸렸고 / 釰匣懸空壁서등은 밤의 휘장 비치네 / 書燈照夜幃성군이 자극에 임하시니 / 聖明臨紫極현준이 궁궐에서 모시네 / 賢俊侍彤闈옥백으로 유일을 부르고 / 玉帛徵遺逸경륜 지닌 선비 방문하네 / 經綸訪布韋그대가 받은 은혜 작으랴 / 恩榮君豈後관면이 줄지어 둘렀어라 / 冠冕列相圍봉소에서 자주 문채 펼쳤고 / 鳳沼頻摛藻이계에선 그릇됨 규찰했네 / 螭階亘糾違시편은 비단무늬 아롱지고 / 詩篇錦生纈담소하면 옥설이 나부끼네 / 談屑玉成霏묵수로 문득 좌천됐으니 / 墨綬俄淪落청운 길에 시비가 있었도다 / 靑雲有是非영재에 가을이 저물어가니 / 鈴齋秋政晩관아 나뭇잎이 처음 날리네 / 官樹葉初飛공무 마치면 발을 드리우고 / 務屛簾垂地거문고 그치면 달이 찾누나 / 琴休月入扉나라의 병폐 인해 근심하고 / 憂應緣國病백성 살찌우고자 수척해졌네 / 瘦亦爲民肥교분 맺어 지우가 되었으나 / 托契蒙知遇재주가 적으니 부끄러워라 / 憐才愧薄菲매번 좋은 시구 읊어주며 / 每將佳句誦뭇사람의 비난 덮으려 했네 / 要壓衆人誹걸상 내려 예우가 깊었고 / 下榻深叨禮단에 오르매 위엄이 두려웠네 / 登壇更怯威세 번 잘려 옥을 안고 울었고 / 玉因三刖泣사지라 하여 황금 물리쳤네 / 金爲四知揮선정을 백성이 모두 칭송하니 / 美政民咸頌사랑하는 정 세상에 드물도다 / 情親世亦稀집을 옮겨 함께 하고자 하나 / 移家欲相就이곳을 두고 어디로 가리요 / 捨此復安歸한잔 술의 이별이 안타까워 / 且惜尊前別헤어질 제 눈물이 옷을 적시네 / 臨分涕滿衣[주-D001] 봉소(鳳沼) : 원래는 당(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있는 연못 봉황지(鳳凰池)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궁궐 안에 있는 연못을 가리킨다.[주-D002] 이계(螭階) : 궁전의 섬돌로서 입구에 뿔 없는 용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다.[주-D003] 묵수(墨綬) : 5품관이 차는 검은 인끈인데 지방관을 주로 가리킨다.[주-D004] 걸상 내려 : 후한(後漢)의 남창 태수(南昌太守) 진번(陳蕃)이 그 고을의 높은 선비 서치(徐穉)를 특별히 우대하여 따로 걸상 하나를 걸어 두었다가 서치가 오면 혼자 앉게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徐穉列傳》[주-D005] 옥을 안고 울었고 : 춘추 시대 초(楚)나라 변화(卞和)가 형산(荊山)에서 박옥(璞玉)을 얻어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옥공(玉工)이 쓸모없는 돌이라 하여 두 발이 잘리고 말았다. 그 후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형산 아래서 박옥을 안고 사흘을 울었다. 문왕이 묻자, “나는 발이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옥을 돌이라 하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박옥을 다듬게 하니 티 한 점 없는 큰 옥이 나왔다 한다. 이것이 화씨의 벽이다. 《韓非子》[주-D006] 황금 물리쳤네 : 후한(後漢) 때의 현인인 양진(楊震)은 학문이 높고 청렴하였다. 자기가 천거했던 창읍(昌邑) 수령 왕밀(王密)이 밤중에 금(金) 10근을 바치자, 말하기를, “나는 그대를 알아주었는데, 그대가 나를 몰라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왕밀이 말하기를, “저문 밤이라, 아는 이가 없습니다.〔暮夜無知者〕” 하자, 양진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가.〔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 2020-12-31 | N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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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척 어제시에 화답하여 〔春仲朔日 蒙賜御製詩及中和尺 承命賡韻〕- 서형수
- 명고전집 제2권 / 시(詩)중화척 어제시에 화답하여 〔春仲朔日 蒙賜御製詩及中和尺 承命賡韻〕
- 2023-12-04 | NO.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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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판 신여만 익전 에 대한 만시〔申參判汝萬 翊全 挽〕- 동명집 제7권
- 참판 신여만 익전 에 대한 만시〔申參判汝萬 翊全 挽〕- 동명집 제7권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서석산의 앞머리서 호부 나눠 받았으며 / 瑞石山前剖虎符다시 송악 머무르며 송도 땅을 지켰다네 / 更留松嶽守松都예부에선 아경 맡아 관직 낮지 않았으며 / 禮部亞卿官不賤은대에선 지사 맡아 총애 항상 특별했네 / 銀臺知事寵常殊집안 명성 선승상의 뒤를 이미 잘 이었고 / 家聲已繼先丞相예전의 업 이에 다섯 아들에게 전하였네 / 舊業仍傳五丈夫한마을서 친분 나눠 동생같이 여겼기에 / 同里故人曾弟畜백발인 나 눈물 속에 황천길을 전송하네 / 白頭垂淚送黃壚[주-D001] 익전(翊全) : 신익전(申翊全, 1605~1660)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만(汝萬), 호는 동강(東江)이다. 영의정을 지낸 신흠(申欽)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으로 미묘한 처지에 놓여 한때 위태로운 경우도 있었으나, 충신(忠信)을 생활신조로 삼은 탓에 큰 위난을 당하는 일 없이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주역》을 애독하여 깊이 연찬하였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유집(東江遺集)》이 있다.[주-D002] 서석산(瑞石山)의 …… 받았으며 : 신익전이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서석산은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호부(虎符)는 한(漢)나라 때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 썼다. 《한서》 권4 〈문제기(文帝紀)〉에 이르기를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를 주었다.”라고 하였다.[주-D003] 다시 …… 지켰다네 : 신익전이 효종 때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주-D004] 예부(禮部)에선 …… 특별했네 : 신익전이 효종 때 예조 참판과 도승지를 지냈으므로 한 말이다. 은대(銀臺)는 승정원의 별칭이다.
- 2020-09-15 | N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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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기모-광주를 지나며(過光山府)
- 百雉雄城十里濱 翻令野客眼眶新朱旗翠幕家家市 暖酒高歌日日春山水湖南名勝邑 衣冠海左鮮明人半千休運無疆業 胡乃淪爲醜虜塵-산곡유고(山谷遺稿)최기모(崔基模, 1869-1925)의 자는 진우(進愚)이며 호는 산곡(山谷)이다.
- 2018-07-10 | N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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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휴-신시야화(新市夜火)
- 新市夜火(신시야화) 신시가의 밤 불빛如星如月復如神 별빛인 듯 달빛인 듯 신령스러워夜雨蕭蕭色正新 소소한 밤비에도 빛은 새롭구나天上人間通用電 천상과 인간에 전기가 통용되니見之非假想非眞 보고는 있으나 꿈인지 생시인지<신시야화>는 1930년대 최석휴(崔錫休)가 지은 팔경시(八景詩) 중에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다. 이 팔경시는 한시로 되어 있으며, 당시 교유한 인물들과 함께 해양음사라는 시사(詩社)에서 창작된 시를 모아 엮은 《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이 지은 운림당(雲林堂)에서 당시 시내의 밤풍경을 묘사했다.최석휴가 말하는 8경인 <신시야화(新市夜火)>를 비롯하여, <선원벽화(仙源碧花)>, <경수홍우(鏡水紅藕)>, <창아모연(蒼鴉暮烟)>, <황계효월(黃鷄曉月)>, <남정장적(南亭長笛)>, <소사한종(蕭寺寒鐘)>, <고단설림(古壇雪林)> 등이 명시되어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지금은 비록 새월의 변화로 인해 찾아 볼 수 없다.최석휴는 당시 일제강점기에 광주의 병천사를 지은 지응현, 광주극장을 지은 최선진, 정낙교 등과 같이 지역을 대표하는 부호 중 한 명이다. 그는 운림당에서 늘 시내를 바라다보곤 하였을 것이다. 불이 켜진 밤에 시가를 내려다 본 풍경을 읊고 있다.그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촛불이 아닌 전기불을 접하니 왜 신기해하지 않았겠는가. 별빛달빛처럼 찬란한 밤의 야경은 여러 번 보아도 믿기지 않은 황홀한 풍경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치 지금의 각 지역에서 축제 때 행하는 불꽃축제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던 운림당은 어디쯤에 있었을까? 아쉽게도 운림당은 현재 전하지 않아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운림당시문집》에 수록된 <운림당기(雲林堂記)>에 의존해 보면 대략적인 위치는 짐작할 수 있다. 즉 기문에는 “광주의 동남쪽에 위치한 선원동(仙源洞)에 운림당이 있고, 가운거사(可雲居士) 최석휴(崔錫休)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운곡(雲谷)과 홍림(洪林)이 서로 비치고 어울려 있어 운림당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 2018-07-06 | NO.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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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휴-쟁반같은 경수위에 푸른 연기 둘렀는데
- 쟁반같은 경수위에 푸른 연기 둘렀는데한가롭게 기대앉아 북창바람 맞는다네.바람따라 오고 가는 맑은 향기 들려오니부용꽃이 모두 피어 그의 빛이 붉는구나.-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조선대학교 뒷산 언저리에 자리했던 운림당(雲林堂) 정자주인 최석휴(崔錫休)가 8경 중 2수의 경수에 비친 붉은 연꽃을 보고 읖은 시다. 하운(河雲) 최석휴(崔錫休)는 광주의 부호로 한말 참서(參書)를 지냈으며 정자는 1871년(고종8년)에 지어졌고 이곳에서 시문에도 뛰어나 유유상종한 많은 인물들과 시주를 즐기며 살다 떠났다.최석휴가 1933년 펴낸 운림당시문집(雲林堂詩文集)이 남아 있다. 이 책에는 광주의 전경을 묘사한 남농 허건(南農 許楗)의 그림이 권두화(卷頭畵)로 실려 있어 그의 인맥을 대변하고 있다.
- 2018-07-09 | NO.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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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우-제무진객사(題茂珍客舍)
- 脩竹家家翡翠啼 대수풀 집집마다 비취가 우는데雨催寒食水生溪 비는 한식을 재촉해 시내에 물이 나네 蒼苔小草官橋路 푸른 이끼와 잔 풀이 돋은 관교의 길에 怕見殘紅入馬蹄 쇠잔한 꽃이 말발굽에 들어가는 것을 볼까 두려워한다고려 문신이요 1326년(충숙왕 13)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던 최원우(崔元祐 1546 ~?))가 무진객사(題(茂珍客舍)에 들려 읊은 시다. 최원우는 충목왕 때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가 되고, 공민왕) 때 감찰집의(監察執義)ㆍ정해감무(貞海監務)를 지냈던 인물로 광주를 다녀가며 이런 걱정을 하며 떠났다.여기서 무진군(茂珍郡)은 광주광역시로 광주(光州) 사람인 전 만호(萬戶) 노흥준(盧興俊)이 목사(牧使) 신보안(辛保安)을 시기하여 구타한 죄를 물어 광주목(光州牧)이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降等)되어 계수관(界首官)을 장흥부(長興府)로 옮긴 시기에 들렸다.광주를 두고 옛 지명으로 무진(武珍)ㆍ무주(武州)ㆍ광주(光州)ㆍ해양(海陽)ㆍ익주(翼州)ㆍ화평(化平)ㆍ무진(茂珍)ㆍ익양(翼陽)ㆍ서석(瑞石)으로 불렀다.
- 2018-07-06 | NO.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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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태진-光州拱北樓
- 秣馬樓前逈放眺 누각 앞 말을 먹이며 멀리 바라보니庚炎初退午天晴 삼복더위 물러가 정오의 하늘 맑네山川壯麗千年鎭 산천은 장려하니 천년의 진이요文物繁華萬戶城 문물은 번화하니 만호의 성이라曲路亭臺臨北望 굽은 길 정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니平郊秔稻占西成 평야엔 가을날의 벼 수확이 한창風煙括盡奚囊裏 풍연을 시 주머니에 가득 담으니無限騷人此日情 오늘 시인들의 정은 한이 없어라 -오산선생문집(吾山先生文集) :권1
- 2018-07-12 | NO.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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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봉사 누 뒤에서 절 한 수를 지어 탁선생에게 봉기하다- 삼봉집 제2권
- 취봉사 누 뒤에서 절 한 수를 지어 탁선생에게 봉기하다[鷲峯寺樓上賦得一絶奉寄卓先生] - 삼봉집 제2권 : 정도전【안】 탁선생의 이름은 광무(光茂), 호(號)는 경렴정(景濂亭)인데 이때에 광주(光州)에 있었음. 일엽(一葉)의 가을이라 나그네 꿈이 설레어 / 客夢初驚一葉秋우연히 비를 타고 높은 누에 올랐다오 / 偶乘微雨上高樓중이 멀리 선생의 댁을 가리키는데 / 居僧遙指先生宅하얀 돌 맑은 샘 깊숙한 골이었소 / 白石淸泉谷口幽[주-D001] 일엽(一葉) : 가을을 표현한 말임. 당인(唐人)의 시에 “산 중은 갑자 셀 줄 모르고, 나뭇잎 떨어지면 가을 왔다 생각하네[山僧不解數甲子 一葉落知天下秋].” 하였음.
- 2020-09-21 | NO.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