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31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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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세양-次光州喜慶樓韻
- 急雨來從瑞石岑 소낙비 서석산 봉우리를 타고 내려오니試登高閣快開襟 높은 누각에 올라 시원스레 흉금을 열어 보네蓬蓬涼吹千林動 쏴쏴하게 부는 서늘바람 온 숲을 움직이고隱隱驚雷萬鼓音 우르릉 심한 천둥소리 온갖 북 소리를 내네拂檻貓頭分爽氣 난간을 스친 죽순 상쾌한 기운을 나누고緣簷鴨脚豁淸陰 처마를 이은 은행나무 맑은 그늘을 활짝 여네更將酪粉調氷椀 다시 타락(駝酪) 가루를 가져다가 얼음사발에 타서消得三庚病暍心 삼경의 소갈증을 삭혀보네 - 양곡선생집(陽谷先生集) 권2소세양(蘇世讓, 1486-1562)의 자는 언겸(彦謙)이며 호는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이다.
- 2018-07-26 | NO.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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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宋純)- 客舍訪梅有感 二首
- 一樹繁梅滿院香 故園歸思忽如狂年來應被東君笑 花下深杯久不嘗玉雪枝枝滿意開 輕風終日送香來簿書未暇酬佳節 空對春光恨莫裁-면앙집(俛仰集) 권3송순이 객사에 핀 매화를 보고 감흥을 읊었다
- 2018-07-26 | NO.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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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次光州喜慶樓韻
- 雲從瑞石散遙岑 구름은 서석산에서 먼 산으로 흐트러지고面面輕風慰客襟 얼굴에 부는 바람 객의 마음 달래준다照眼榴花經雨色 눈에 비친 석류꽃 비가 지난 뒤에 곱고喜晴鳩鳥隔簾音 날씨 좋아 비둘기는 주렴밖에서 운다高情直寄山嵐外 높은 정(情)은 산 풍기의 밖으로 가고淸想時隨砌竹陰 맑은 생각은 때로 섬돌가의 대나무를 따른다拍檻長歌詩思發 난간을 치며 노래 부르니 시(詩) 생각 절로 나는데更看涼月滿庭心 다시금 시원한 달빛 뜰 가운데 가득하다 -면앙집(俛仰集) 권2
- 2018-07-26 | NO.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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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次光州柳谷野亭韻
- 斷隴臨長路 何年起此亭 溪山詩已就 節序草新靑 日暮無歸客 情深有臥甁 相逢須極樂 霜鬢已衰形-면앙집(俛仰集) 권2송순(宋純, 1493-1582)의 자는 수초(遂初), 성지(誠之)이며 호는 기촌(企村), 면앙정(俛仰亭)이다.
- 2018-07-10 | NO.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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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次喜慶樓韻
- 當年奉養賜專城 당년에 봉양하라고 온 성(城)을 하사하시어罔極鴻恩荷聖明 망극한 큰 은총을 성주께 입었네地近鄕閭多故舊 고향 마을 가까우니 친구가 많고日開樽酒醉歌笙 날마다 열린 술자리 취하여 노래한다風流堪着登樓興 풍류는 등루(登樓)의 흥취가 날 만도 하고聲價初非蓋世英 성가(聲價)는 애당초 세상 덮을 영웅이 아니다膝下歡心兄及弟 슬하에서 즐겁게 해드리던 형과 아우人間何事更爲榮 인간에 무슨 일이 더 영화로우랴 - 면앙집(俛仰集) 권2
- 2018-07-26 | NO.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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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누문에서 김상사 우부를 작별하며(樓門 別金上舍愚夫)
- ‘누문에서 김상사 우부를 작별하며(樓門 別金上舍愚夫)’라는 시를 남기며, ‘광주의 북성 절양루 아래에 문이 있다(光州北城 折楊樓下 有門)’고 설명했다.四面淸風一首詩 사면에 맑은 바람 일수의 시樓頭歌管送君時 누각 위 노래와 피리 그대를 보낸다 秋生應有相求意 가을되면 아마도 서로 생각날 터이니驅馬重來願勿遲 더디지 말고 말을 몰아 다시 오게나-면앙집(俛仰集) :권2
- 2018-07-12 | NO.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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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면앙정에서 무등산을 보며
- 寒沙月照秦淮夜 한사정에 달 비치니 진회의 밤인가 瑞石雲迷蓬島煙 서석산에 구름 자욱하니 봉도의 안개인 듯俛仰乾坤吟得意 면앙정에서 득의한 시구 읊조렸으니 風流不必倩人傳 풍류야 남들에게 전할 필요 없었으리-금계집 외집
- 2018-08-02 | NO.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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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순-희경루
- 구름은 서석산에서 먼 산으로 흐트러지고/얼굴에 부는 바람 객의 마음 달래준다눈에 비친 석류꽃 비가 지난 뒤에 곱고/날씨 좋아 비둘기는 주렴밖에서 운다雲從瑞石散遙岑 面面輕風慰客襟 照眼榴花經雨色 喜晴鳩鳥隔簾音 높은 정(情)은 산 풍기의 밖으로 가고/맑은 생각은 때로 섬돌가의 대나무를 따른다난간을 치며 노래 부르니 시(詩) 생각 절로 나는데/다시금 시원한 달빛 뜰 가운데 가득하다 高情直寄山嵐外 淸想時隨砌竹陰 拍檻長歌詩思發 更看涼月滿庭心 次光州喜慶樓韻 /俛仰集卷之二 면앙정 주인 기촌(企村) 송순(宋純, 1493~1582)도 희경루에 올라 감정을 보탠다. 그가 희경루에 오른 것은 전라도감찰사 자격으로 올랐다.
- 2020-03-17 | NO.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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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열, 박광후와 이민서에 화운함
- 송자대전 제1권 / 시(詩)○오언 고시(五言古詩) 부 사언(附四言) 박 상사 사술 광후 이 익양 사군의 시에 차운한 시에 화운하여 언실의 담대가 보인 정중한 뜻에 사례하다〔和朴上舍士述 光後 所次翼陽使君韻 以謝偃室澹臺鄭重之意〕 옛날 우리 자양옹께서 / 昔我紫陽翁대은병 봉우리에 거처할 적에 / 身居大隱屛도가 완전하여 집대성하니 / 道全集大成온 천하를 다 포괄하였네 / 乾坤涵八溟경원 연간에 낭패를 당해 / 顚躓慶元間적막하게 순녕으로 돌아가시니 / 寂寞歸順寧이천 문도들이 눈물을 흘렸건만 / 二千徒弟泣하늘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네 / 天不傾耳聽허나 우리는 남겨진 책을 품고 / 而我抱遺編묻고 생각하길 멈추지 않으니 / 問思兩無停표범 반점 하나도 아직 못 봤으나 / 雖未一斑窺배고픔에 초평이 생각나는 듯하네 / 如飢憶楚萍진중한 광산백이여 / 珍重光山伯일찍 스스로 학문의 방도를 세우고 / 早自立門庭더하여 우뚝이 높은 뜻 지녔으니 / 還將壁立志죽을 때까지 시들지 않으리라 / 抵死未凋零백록동 학규를 다시금 천명하여 / 更闡白鹿規선비들이 엄숙히 경서 끼고 공부하니 / 章甫儼橫經세대는 달라도 즐거움은 실로 같은데 / 異世諒同符어느덧 이미 천년이 흘렀어라 / 不覺已千齡생도들 모두가 걸출한 인재인지라 / 生徒皆俊彥애초에 회초리 가르침 필요가 없지 / 初不煩敎刑그대 만나 터득한 바 시험해 보니 / 逢君徵所得넓게 트인 것이 청천을 오른 듯 / 豁若陞靑冥돌아가서 함께 멀리 찾아보세나 / 歸哉共遐尋성인의 문은 본디 빗장이 없다네 / 聖門元不扃[주-D001] 박 상사 사술(朴上舍士述) : 박광후(朴光後, 1637~1678)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 호는 안촌(安村)이다. 우암의 문인이다. 1666년(현종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갑인년(1674) 이후 벼슬할 뜻을 버렸다. 문집으로 《안촌집(安村集)》이 전한다.[주-D002] 익양 사군(翼陽使君) : 당시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던 이민서(李敏敍)를 가리킨다. 익양은 광주(光州)의 별호이다.[주-D003] 언실(偃室)의 담대(澹臺) : 언실은 공자 제자인 언언(言偃), 즉 자유(子游)의 방이라는 뜻으로, 후대에는 지방 수령의 거처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담대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다. 공자가 무성(武城)의 수령인 자유에게 제대로 된 인재가 있느냐고 묻자, 자유가 담대멸명을 거론하면서 “길을 다닐 때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언의 방에 찾아온 적이 없습니다.[行不由徑, 非公事, 未嘗至於偃之室也.]”라고 한 고사가 《논어》 〈옹야(雍也)〉에 보인다. 여기에서는 광주 목사 이민서와 관련하여 박광후를 지칭한 말이다.[주-D004] 옛날 …… 적에 : 자양(紫陽)은 주희의 별호이다. 주희가 무함(誣陷)을 입고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1183년 무이산(武夷山) 제5곡의 봉우리인 대은병(大隱屛) 아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하였다.[주-D005] 경원(慶元) …… 돌아가시니 : 경원은 남송 영종(南宋寧宗)의 연호(1195~1200)이다. 남송 영종 연간에 한탁주(韓侂胄)와 조여우(趙汝愚)가 권력 쟁탈전을 벌였는데, 주희는 조여우의 편이었다. 1195년 한탁주가 조여우를 몰아낸 뒤에, 주희를 중심으로 한 이학가(理學家) 59명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한 ‘위학역당(僞學逆黨)’이라는 당적(黨籍)을 반포하고 주희의 학문을 금지하였다. 이 사건을 ‘경원당금(慶元黨禁)’이라고 부르는데, 주희는 당금 중인 1200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순녕(順寧)은 송나라 장재(張載)가 지은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순리를 따를 것이요, 죽어서는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주희가 부인 유씨(劉氏)를 장사 지내고, 그 무덤가에 순녕암(順寧菴)이라는 건물을 지었는데, 나중에 주희도 부인과 합장(合葬)되었다.[주-D006] 표범 …… 봤으나 : 주희의 학문이 깊고 넓어 자신의 좁은 식견으로는 일부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소년 시절에 도박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훈수를 두자, 도박하던 이가 “대롱으로 표범을 보면 반점 하나만 보인다.[管中窺豹, 時見一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方正》[주-D007] 배고픔에 …… 듯하네 : 주희의 학문이 배고플 때 생각나는 평실(萍實)같이 배우는 자들에게 절실하다는 의미이다. 초평(楚萍)은 초나라 평실이다. 춘추 시대 초왕(楚王)이 강을 건너다가 둥글고 붉은 말(斗)만 한 물체를 보고, 그것을 주워 사람을 시켜 공자(孔子)에게 물어보게 하니, 공자가 “이것이 이른바 평실이라는 것으로 쪼개서 먹을 수가 있는데, 이것을 얻은 것은 길한 조짐이다.”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致思》 두보(杜甫)의 〈독좌(獨坐)〉 시에 “노인을 다습게 하자니 연옥이 생각나고, 주린 배를 채우려니 초나라 평실이 생각나네.[煖老思燕玉, 充饑憶楚萍.]”라고 한 구절을 차용하였다. 《杜少陵詩集 卷20》[주-D008] 광산백(光山伯) : 광주 목사 이민서를 가리킨다. 광산은 광주의 별칭이다.[주-D009] 백록동(白鹿洞) 학규(學規) :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말한다. 주희가 지남강군(知南康軍)에 부임하였을 때 백록동서원을 중건하고 직접 강학하면서 학규를 제정하였다. 그 내용은 오교(五敎)의 조목, 학문을 하는 차례, 수신(修身)의 요체, 처사(處事)의 요체, 접물(接物)의 요체로 이루어져 있다.
- 2021-10-14 | NO.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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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익필-歸光山途中(辛卯春 有紛擾之禍 又適湖南)
- 梅花消息阻秦關 매화꽃 핀 소식이 진관에 막혀 있네 雨濕行裝旅夢寒 今日餘生歸白首 昔年爲客記靑山 一天之下皆安宅 萬事無心是最閑 人或勝時時或勝 先師虛老路岐間-구봉선생집(龜峯先生集)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자는 운장(雲長)이며 호는 구봉(龜峯), 현승(玄繩)이다.
- 2018-07-10 | NO.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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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인수-次光州喜慶樓韻
- 湖南形勝說光城 호남의 명승지로 광주를 말하나高棟層軒眼忽明 높은 들보 층진 마루 눈이 번쩍 뜨이네涼灑衣裳圍粉黛 말쑥한 의상 입은 기녀들 둘러있고風飄律呂沸簫笙 바람에 나부끼는 노랫가락 피리에서 들리네罩汕西澗供鮮鯽 서쪽 시냇가에 그물쳐서 신선한 붕어회 만들고採掇東籬泛落英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 따다가 떨어진 꽃잎 띄워보네大醉賦詩多喜慶 크게 취하여 시 지으니 큰 경사가 많음은夸張聖世荷君榮 태평성세 임금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네半天華構壓高城 반공의 화려한 누대 높은 성 눌렀는데客子憑欄白髮明 난간에 기댄 길손 백발이 선명하구나樓上杯樽多興味 누대에서 술잔 나누니 흥미로움이 많아지고人間毀譽謾簧笙 인간세상의 비난과 명예 생황소리에 업신여기네舊聯班馬遊鼇島 오래전에 반고 사마천과 함께 오도에서 노닐고曾接夔龍入邇英 일찍이 기룡을 접하여 이영각으로 들어가네按節承流無寸補 관찰사는 임금의 풍화를 조금도 보탤 것 없으니傍人莫道繡衣榮 옆 사람은 암행어사의 영광을 말하지 말라盡邀州老宴朱樓 광주의 늙은이들 다 맞이하여 붉은 누각에서 잔치 여니瑞石風煙接素秋 서석산의 바람과 안개 가을과 접해있네酒力借紅生滿面 술의 힘 빌어 붉어 얼굴 가득 생기가 돌고花枝映日揷盈頭 햇살 받은 꽃가지 머리 가득 꽂았네使君酳酌歡情洽 술 따르는 사신은 기쁜 정 흡족하고方伯乞言喜氣浮 좋은 말 청하는 관찰사 기쁜 기운이 넘치누나閭里自知鳩杖避 동네방네 구장 짚은 늙은이 피하는 것 절로 아니聖王遺訓豈無由 성왕이 남긴 가르침 어찌 이유가 없겠는가 - 규암선생문집(圭菴先生文集) 권1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자는 미수(眉叟)이며 호는 규암(圭菴)이다.
- 2018-07-26 | NO.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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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인수-題光州柳谷亭
- 柳谷多奇勝 유곡에 수려한 경치 많은데,眼明孤草亭 외로운 정자에 눈이 번쩍 뜨이네溪流沙舊白 시냇물 흐르니 모래 본시 하얗고,雨霽峀新淸 비 개이니 산봉우리 새로 푸르네夜酌邀銀闕 밤에 앉아 둥근 달 맞이하고春遊臥玉甁 봄놀이에 옥병이 거꾸러지누나.年年同社會 해마다 사일의 모임을 함께 하니,淳朴筆難形 순박한 풍속을 글로 형용키 어렵네.-규암선생문집(圭菴先生文集) 권1송인수(宋麟壽, 1499-1547)의 자는 미수(眉叟) 이며 호는 규암(圭菴) 이다.
- 2018-07-10 | NO.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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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철헌- 죽취정에서
- 정정한 푸른대가 그 지조 견고하여찬 겨울 눈 서리응 가소롭게 여겼도다. 이처럼 곧은 절개 그 누가 따를손가사람마다 앙시(仰視)하여 그지없이 사랑하네 누정앞에 옮겨 심어 그의 경관 미화하고너의 이름 불러다가 그의 호를 지었도다. 좋은 명당 가리어서 이곳 땅에 보양하고춘추 양철 참배하여 주위사방 쓸었도다. 자손들이 함께 모여 이곳에서 공부하며삼가하고 조심하여 수신조행하였도다. 옥석처럼 갈고 닦아 그의 광채 이뤄지니언덕위의 녹죽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네. 추원하는 그대 마음 간절하고 독실하여선대 유업 이르려고 굳게 명세 하였도다. 모든 만물 초췌하고 강과 산이 소조하니 효사하는 그 마음이 평시보다 간절하네. 지재(止霽) 송철헌(宋哲憲 1870~1925) 이 죽취정에 대한 명(銘)에서 "범군 형식이 광주의 죽취산 아래에 있는 선영을 추모하여 그 옆에 조그.마한 띠집을 지었다"라고 전하며 시를 읊었다.
- 2020-04-25 | NO.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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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최옥과서(送崔玉果序) - 김일손이 옥과현감으로 가는 최형한에 대한 글
- 송최옥과서(送崔玉果序) 탁영 김일손1)은 「송최옥과서(送崔玉果序)」에서 최형한을 가리켜 “문장이 뛰어나고 인품이 곧은 호남의 선비”라 칭송하였다. 이 글은 조선 후기 또는 근세 시기의 인물인 최탁경(崔倬卿)에 대한 인물평이자, 그가 지방 관직인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발령받은 일을 중심으로 쓴 시평(時評) 형식의 글이다. 전반적으로는 인재의 등용과 배치, 관직의 존비(尊卑), 인생의 영욕(榮辱), 그리고 사대부의 처신과 자세에 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근세의 인재들은 옛사람을 본받으려 했으며, 조정에서 인재를 등용할 때는 주로 호남과 영남, 즉 ‘호령 양남’ 지역에서 인물을 뽑는 일이 많았다. 이 두 지역은 나라의 인재를 길러내는 보고(寶庫)라 할 만했다.내 벗 최탁경은 호남 출신이다. 계묘년, 그는 고향에서 유생 자격으로 상경하며, ‘녹명가2)’를 벗들과 함께 부르며 과거시험을 보러 길을 나섰다. 그는 문장과 학문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수려한 문체와 날카로운 표현력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그는 한 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려 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을 차례로 여의었고, 6년상을 마친 뒤에는 관원의 추천으로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사(正使)를 따라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의 품격과 인품을 두고 많은 이들이 장차 정승이나 주요 요직에 오를 인물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귀국 후 내려진 관직은 뜻밖에도 옥과현감이었다.이 소식에 친구들은 서로 안타까워하며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위로를 주고받았다. 일반적으로 청요직(淸要職)에 있던 인물이 지방 수령으로 나가는 일은 특별한 어명이 있거나,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본인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 한정되는데, 최탁경은 이미 부모를 여의었고, 조정의 별다른 명령도 없었기에 그에 대한 안타까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로부터 훌륭한 인재는 지방 수령으로 먼저 역량을 시험받은 뒤 중앙으로 발탁되는 것이 관례였다. 혹시 이번 발령도 그런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나라 시절의 순리(循吏)들 또한 지방 정사를 잘 다스려 공을 세운 뒤 차례로 중앙에 기용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번 임명이 오히려 장차 큰 임무를 맡기기 위한 준비일지도 모른다.무엇보다도 최탁경과 같은 인물은 외형적인 승진이나 좌천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공자의 고향 무성(武城)에서는 예악을 가르치던 사람들이 당대의 칭송을 바라지 않았고, 고대 중국 노나라의 단보(單父)에 살던 악사(樂士)3) 역시 훗날의 명성을 바라고 거문고를 탄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고, 진심을 다해 백성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바른 도리이다.옥과는 호남 소속의 고을이므로, 그가 그곳에 부임하면 고향과도 가까워 계절 과일이나 별미를 맛볼 기회가 많겠지만,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릴 때마다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움과 아픔이 담긴 그 마음으로 백성을 대한다면, 그의 정치에서 원망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그가 떠나는 날, 우리는 성 동문 밖에 자리를 마련하고 송별주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벼슬에는 크고 작음이 있지만, 마음에는 크고 작음이 없어야 하오. 직책이 중앙이냐 지방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그 마음만은 한결같아야 하오. 세상에는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영예를 느끼고, 좌천이라 여겨 굴욕을 느끼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도를 아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오.벼슬을 내리는 이는 만물을 창조하는 자연의 이치와 같소.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으니, 그 뜻을 알게 된다면 영광이든 좌절이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외부의 일로 인해 내 마음이 흐려지지 않아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고, 어떤 운명이 주어지더라도 그 속에서 나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법이오.”그때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말을 받았다.“하지만 조물주는 본래 변덕스럽지요. 그 뜻을 알 수 없는데, 어찌 그 뜻을 따라 내 마음을 다스리고 정치를 할 수 있겠소?”나는 그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고, 조용히 최탁경과 이별하였다. 近世人才。視古爲盛。國家取才。得於湖嶺二南爲多。湖嶺。實國家人才之府庫也。吾友崔倬卿氏。湖南人也。歲癸卯。計偕於其鄕。歌鹿鳴而來京師。文學優贍。詞藻警發。一擧通籍。歸爲親榮也。而連喪二親。痛毒六朞之餘。由館薦拜殿中。裹行隨正使朝燕。人多想望其風標。謂其還也。必踐歷臺閣。供奉侍從。爲淸朝之彥也。旣還。一夕。除目出則監玉果縣矣。崔之朋友。相唁且惜。莫知其故。故事。淸望之士出外者。非有旨特受。則親老自乞便養也。倬卿。親俱喪則非自乞也。又無中旨。宜朋友之唁且惜也。抑古之用士者。必先試於州縣。以觀其能而進之。吾烏知其宰物者。欲先試倬卿於此耶。漢循吏。以治行第一。入爲公卿者相望。又烏知倬卿此行。乃他日大授之資耶。然倬卿。豈宜以此增損其本分哉。武城絃誦者。不求當時之譽。單父鳴琴者。豈要他日之名。素其位。盡吾心焉。以臨其民可也。玉果。湖南屬邑。倬卿莅焉。其桑梓近。時得異味節物。思親之不得。將有不堪者矣。以不堪之心。臨一邑之孤獨。其政必不怨矣。其行也。設席於郭東門外。酌倬卿而告之曰。官有大小而心無大小。職有內外而心無內外。世有以大小內外。而置榮辱屈伸於其心者。非知道者也。夫宰物者之用人。如造物之賦物。流布品類。各有命焉。知造物之情。則於榮辱屈伸之來。吾有以待之。外物擧不足累吾方寸。然後能安。若命無往而不自得矣。座有人起而言曰。造物從前是多猜。小兒其情不可知。又烏用知其情而後。理吾心出治哉。余不應。遂與倬卿別。------------------------- 1)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조선 성종·연산군 대의 사림파(士林派) 학자이자 관료로, 조선 초기 사화(士禍) 중 하나인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억울하게 희생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은 조선 정치사에서 의리와 절조의 상징, 그리고 사초(史草)를 둘러싼 사관의 숙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의 정치적 사상과 행동은 스승인 김종직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였다. 무오사화의 직접적 계기는 김일손이 김종직의 글인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일이다. 이 글은 중국 명나라를 부정하고 조선을 높이려는 은유로 해석되었고,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를 역모를 꿈꾼 반역문서로 간주하였다. 결국 김일손은 이 사초의 책임자로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능지처참당했다.2) 鹿鳴歌(녹명가)"는 『시경(詩經)』의 첫 번째 편인 『국풍(國風)·소아(小雅)·녹명(鹿鳴)』에서 유래한 시구로, 예로부터 손님을 예우하며 학문과 덕을 지닌 인재를 초청할 때 부르던 대표적인 고대 시가이다.3) 단보(單父)는 고대 중국 노나라(魯國)의 지명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다.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의 활동 무대와 가까운 곳이다. 악사는 속세를 떠나 음악을 벗 삼아 도를 즐기며 사는 은자로 묘사된다. “단보(單父)의 악사(樂士)”는 고대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유가(儒家)의 이상적인 처세와 정신을 상징하는 은자(隱者) 또는 고결한 군자의 이미지를 갖는다. 해당 표현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며 영달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도(道)를 지키는 삶의 비유로 사용했다.
- 2025-05-26 | NO.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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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광수-登光州折楊樓
- 早春雲物古光州 이른 봄날 옛 빛고을의 풍광 물씬한데尙憶詞臣此共遊 아직도 사신과 함께 놀던 일 추억하네萬事長沙餘舊宅 수많은 일 중 장사의 옛집만 남았고十年王粲再高樓 10년 만에 왕찬의 고루에 다시 오르네.黃溪樹入斜陽盡 황계의 나무는 석양빛에 들어 사라지고瑞石天兼霽雪浮 서석의 하늘은 맑은 눈과 함께 떠있다城下往來無古老 성 아래엔 왕래하는 옛 늙은이 없으니行人怊悵不堪留 나그네는 추창하여 머물 수가 없구나靑橙石堞帶寒流 푸른 등자나무 석첩엔 한류가 흐르니滿目依俙物色稠 눈에 가득 어렴풋이 물색이 빽빽하다存沒古今惟有淚 고금의 흥망에 눈물만 흘릴 뿐이요朅來南北自然愁 남북으로 오고가니 자연히 시름겹네.春潭送客王孫草 객을 보낸 봄 못엔 왕손의 풀 무성하고明月無人燕子樓 사람없는 연자루엔 밝은 달만 비치네向晩長城騎馬去 저물 무렵 말을 타고 장성으로 향하며兩行官樹一回頭 두 줄로 늘어선 관수를 한번 돌아보네又南遊迢遞廾年間 남녘으로 아득히 노닌지 20년學士風流不可攀 학사의 풍류 잡을 길이 없어라下榻少年今白髮 걸상 내리던 소년도 이젠 백발 登樓落日舊靑山 누각 오르니 낙일은 옛 청산에錦城春早花無意 금성의 이른 봄에 꽃은 뜻 없고蘆嶺天長鳥自還 노령의 먼 하늘 새만 돌아오네更憶柳生詩寂寞 유생의 시 추억하니 적막하기만畫欄西望淚雙潸 화란 서쪽을 보며 눈물 흘리네-석북집(石北集) :권1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이며 호는 석북(石北), 오악산인(五嶽山人)이다. 윤두서(尹斗緖)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영릉참봉(寧陵參奉 능을 맡아 일보던 종9품 벼슬)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 금부도사)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여, 제주에 40여일 머무르는 동안 탐라록(耽羅錄)을 지었으며, 우승지. 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 2018-07-12 | NO.1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