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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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 행장 -정구(鄭逑)

황명 조선국 고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보양관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 행장- 정구(鄭逑, 1543~1621)


《여헌집(旅軒集)》 권13

장현광(張顯光, 1554~1637).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인동(仁同). 시호는 문강(文康).


선생은 성(姓)이 정씨(鄭氏)이고 휘(諱)가 구(逑)이며 자(字)가 도가보(道可父)이고 한강(寒岡)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강(岡)은 곧 선생의 선영 아래의 바깥 산등성이이니, 이 곳에 재실(齋室)을 설치하고 호하였다.
증조(曾祖)는 윤증(胤曾)이니 고(故)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철산 군수(行鐵山郡守)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청성군(淸城君)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니 숙부인(淑夫人)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조고(祖考)는 응상(應祥)이니 고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서흥 김씨(瑞興金氏)이니 숙인(淑人)으로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사중(思中)이니 고(故) 정략장군(定略將軍) 행 충좌위 부사맹(行忠佐衛副司猛)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니 영인(令人)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정씨(鄭氏)의 본관은 충청도(忠淸道) 청주(淸州)이니,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서원(西原)의 대성(大姓)이라고 말하였다.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 감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추증된 휘 의(顗)는 바로 선생의 12대조이다. 공은 큰 공을 세우고 훌륭한 절개를 세웠는바, 이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 보인다. 현재 평양(平壤)에 사당을 세우고 포충표절(褒忠表節)이라는 칭호의 현판(懸板)을 걸어 놓았는데, 이후로 계속하여 위대한 인물이 있어 문헌(文獻)의 명문가가 되었다. 상장군이 휘 현(儇)을 낳았으니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복야(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복야가 휘 개(瑎)를 낳았으니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장경공(章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경공이 휘 책(㥽)을 낳았으니 중대광(重大匡)으로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졌는바,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당하여 원(元) 나라에 억류되자, 마음속으로 군주를 받들 것을 맹세하여 시종 한결같이 절개를 지켰다. 청하군이 휘 보(誧)를 낳았으니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벽상공신(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추증되고 청하부원군(淸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호가 설곡(雪谷)인데, 시문(詩文)이 간결하고 예스러우며 필적(筆跡)이 절묘하였는바 문집이 세상에 유행한다. 청하부원군이 휘 추(樞)를 낳았으니 중대광(重大匡)으로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지고 좌정승(左政丞)에 추증되었으며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받고 호가 원재(圓齋)이다. 상소를 올려 신돈(辛旽)의 죄를 극론하다가 좌천되었는데, 신돈이 죽임을 당하자 부름을 받고 돌아와 지위가 재보(宰輔)에 이르렀으며 문집이 세상에 유행한다. 청원군이 휘 총(摠)을 낳았으니 본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민공(文愍公)이며 호가 복재(復齋)인바 문집이 세상에 유행한다. 문민공이 휘 효충(孝忠)을 낳았으니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행 상호군(行上護軍)이며, 호군이 휘 옥경(沃卿)을 낳았으니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언론이 정직하여 간관(諫官)의 기풍이 있었으니, 선생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조고(祖考)인 승지공(承旨公)이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니, 김 선생은 공의 뜻과 행실을 사랑하여 공에게 딸을 시집보내었다. 공은 마침내 훈습(薰習)한 바가 있어 더욱 가정의 가르침을 확립하였다.
선고(先考)인 판서공(判書公)은 천품이 너그러워 사람들에게 간격을 두지 않으니, 사람들이 적자(赤子)의 천진난만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고 칭찬하였으며, 효도하고 우애하는 지극한 행실은 실로 사람들이 따르기 어려운 바가 있었다.
한훤(寒暄)의 부인인 박씨(朴氏)가 현풍(玄風)의 솔례촌(率禮村)에 있었는데, 공은 아버지를 여읜 다음 모부인(母夫人)을 받들고 서울에서 문안을 왔다가 인하여 그 곁에 머물러 살았으며, 공이 성주(星州)에 장가드니 성주 역시 문헌(文獻)의 지방이었으므로 마침내 거주하였는바, 바로 성주의 남쪽 남산리(南山里) 사월촌(沙月村)이다.
판서공은 3남을 낳았으니, 장자는 괄(适)인데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고 다음은 곤수(崑壽)인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이며 막내가 바로 선생이다.
선생은 가정(嘉靖) 22년(1543) 계묘(癸卯) 7월 9일 자시(子時)에 사월촌의 집에서 탄생하였다. 판서공은 천문(天文)을 잘 보았는데 서천군(西川君)을 낳고는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우리집이 반드시 1품의 재상 집안이 될 것이다.” 하였으며, 선생을 낳고는 또 크게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명현(名賢)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씀이 과연 부합하였다.
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영특하고 총명하여 크게 빼어났다. 어려서 장난할 때에도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앉고 일어남이 절도가 있었으니, 같이 노는 아이들이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나가고 들어오고 달리고 걸어감을 한결같이 그의 명령에 따르며 신동(神童)이라고 칭하였다.
선생은 처음 글을 배우면서부터 곧바로 글의 뜻을 깨달았으며, 글자를 엮어 글을 지었는데 글의 뜻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7, 8세에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배워 이미 대의(大義)에 통달하였다.
신해년(1551,명종6) 봄에 판서공이 별세하였다. 선생은 이 때 나이가 아홉 살이었는데 상례(喪禮)를 집행하여 곡하고 우는 것을 어른과 다름없이 하니, 마을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백씨(伯氏)인 참찬공(參贊公)이 울면서 공에게 말씀하기를, “옛날 우리 선친께서는 네가 학업을 잘 하지 못할까 우려하셨으니, 남은 가르침이 아직도 나의 귀에 쟁쟁하다.” 하였다. 이에 선생은 척연(惕然)히 두려워하고 마침내 분발하여 책을 읽었으며, 손수 공자(孔子)의 화상(畵像)을 모사(摸寫)하여 벽 위에 걸어 놓고 날마다 재배하였으며 나가고 들어올 때에 반드시 받들어 모시고 다녔다.
12세 때에 《통감(通鑑)》을 읽었는데 스승이 가르쳐 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덕계(德溪) 오공 건(吳公健)이 주(州)의 향교에서 가르침을 맡고 있었는데 선생은 찾아가 수학하였다. 덕계는 엄하고 굳세어 스승의 도가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찾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다. 제생들은 혹 여럿이 있으면서 놀고 장난하였으나 선생은 홀로 단정히 앉아 함부로 웃거나 말하지 않았으며,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그 뜻을 연구하였고, 문장이 영특하여 진부(陳腐)한 말을 하지 않으니, 무리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친구인 한 학생과 함께 《주역(周易)》을 배웠는데, 선생은 건(乾), 곤(坤) 두 괘(卦)를 배우자, 나머지 다른 괘는 유추(類推)하여 다 통달하였다. 덕계는 함께 배우는 그 학생에게 이르기를, “정생(鄭生)이 이미 정(精)하게 아니, 너는 마땅히 정생을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젊은 시절에 한번 향시(鄕試)를 보아 합격하였는데, 서울로 가서는 회시장(會試場)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 후로부터 과거 공부를 폐지하고 더욱 성인(聖人)의 학문에 힘써 비록 한가로이 거처할 때라도 일찍이 의관을 벗고 나태한 용모를 한 적이 없었다. 밤이 깊어야 잠을 자고 닭이 울면 곧바로 일어났으며 종일토록 무릎을 꿇고 앉아 강(講)하고 읽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 때 예교(禮敎)가 폐지되고 무너져 집안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모두 속례(俗禮)로 사용하였으므로 비루하고 촌스러워 볼 수가 없었다. 선생은 홀로 《가례(家禮)》를 따라 마침내 경전(經傳)의 크고 작은 예문(禮文)들을 널리 연구하고 절목(節目)을 참작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네 가지 의식을 초(抄)하여 만들고 몸소 실천하여 독실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심의(深衣), 난삼(襴衫), 야복(野服) 등의 옛 제도를 상고하여 옷을 만들어 입고 또 변두(籩豆)와 광주리[篚]와 자루[杓] 등의 그릇을 만들어 관례와 혼례에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이것을 보고 듣는 자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비웃었으나 선생이 오랫동안 행하자 사우(師友)들 사이에 차츰 따라 본받았으며, 마침내는 원근의 지방과 마을에 이르기까지 고례(古禮)를 따르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계해년(1563,명종18) 봄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을 찾아 뵙고 인하여 《심경(心經)》을 질문하니, 이 선생은 칭찬하기를, “자질이 영민(英敏)하며 학문에 뜻하고 선을 좋아하니, 한훤당(寒暄堂)의 남은 경사가 어찌 여운이 없겠는가.” 하였다. 퇴계는 인하여 오덕계(吳德溪)에게 편지를 보내어 지극히 칭찬하고 영재를 얻은 것을 축하하며 후일 대유(大儒)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였다. 이 뒤로는 몸소 퇴계의 문하에 왕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편지를 올려 질문하는 것이 이어졌다.
병인년(1566,명종21)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찾아뵈니, 조 선생은 선생에게 이르기를, “네가 출처(出處)에 대하여 대략 소견이 있으니, 내 진심으로 허여(許與)한다. 선비와 군자의 대절(大節)은 오직 출처에 있을 뿐이다.” 하였으며, 선생 또한 조 선생을 칭찬하여 “천 길 높이 솟아 있는 기상이 있다.” 하였다. 또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찾아가 배알(拜謁)하였다.
무진년(1568,선조1) 겨울에 자친상(慈親喪)을 당하였는데 상례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문밖에 여막(廬幕)을 지었으나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다.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벽에 흙을 바를 것을 청하였으나 선생은 “죄인이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히 있겠는가.” 하고 거절하였다. 이 때는 추운 겨울이어서 얼음이 얼어 옷에 가득하였으나 선생은 빈소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여 위태로운 병이 생기게 되었다.
선고(先考)의 택조(宅兆 묘소)가 마땅한 자리가 아니라 하여 마침내 다른 곳을 가려 합장(合葬)하였는데, 소방상(小方牀)의 제도를 참고하고 도식(圖式)을 보고 목수에게 지시하여 지극히 견고하고 치밀하게 하였다.
발인(發引)하는 날에 길이 큰 고개를 경유하게 되었다. 상여꾼들이 피곤하여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선생은 손수 작은 부채를 취하여 쓰러진 자들에게 부채질을 하면서 슬피 부르짖고 애통해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고 분발하여 일제히 힘을 내어 단번에 준령(峻嶺)을 넘어갔다. 또한 장례하는 모든 일을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니, 장례에 모인 자들이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재기(再朞) 중에 몸이 파리하고 병들어 거의 위태롭게 되었다. 남명 선생은 편지를 보내어 위문하였으며, 사람을 대하여 선생의 일을 언급하게 되면 오열하고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황사문 준량(黃斯文俊良)이 본주(本州)의 목사(牧使)가 되었을 때에 본방(本坊)의 시냇가에 정사(精舍)를 짓고 계숙(溪塾)이라 이름하니, 바로 선생의 집 앞이었다. 선생은 항상 이 곳에 거처하여 장수(藏修 머물며 학문을 닦음)하는 장소로 삼았다.
주(州)에 서원(書院)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와룡사(臥龍祠)의 고사(故事)를 가지고 퇴계 선생에게 여쭙고 마침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받들어 제사하는 의(義)를 정하였다. 그리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이라 칭호한 다음 퇴계 선생에게 손수 현판(懸板)을 써 줄 것을 청하여 현판을 게시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선생을 서원의 원장(院長)으로 추대하자, 선생은 백록동(白鹿洞)의 옛 규칙을 취하여 엄격히 과조(課條)를 세웠으며, 또 퇴계 선생이 편집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가지고 그 나눈 권수(卷數)에 따라 목록(目錄)을 옮겨 달았으며, 또 《가례》에 보주(補註)를 첨가하여 모두 서원에서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날마다 원근의 유생(儒生)들과 강독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하니, 자못 흥기하는 자가 있었다.
만력(萬曆) 원년 계유(1573,선조6)에 선조(宣祖)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들을 발탁하도록 명하니, 조정의 신하 중에 선생을 천거하는 자가 있었다. 동강(東岡) 김공 우옹(金公宇顒)은 수찬(修撰)으로 들어가 모시고 있다가 아뢰기를, “정구(鄭逑)는 학문이 통명(通明)하여 일찍이 이황(李滉)에게 수학하였으며, 또 일찍이 조식(曺植)의 문하에 왕래하였습니다. 이미 재주와 기국(器局)이 있고 또 특이한 행동이 있사오니, 마땅히 포의(布衣)로 들어와 대답하게 하여 정치의 도리를 묻고 그 인품을 관찰하신 뒤에 관작을 명하시는 것이 가(可)할 것입니다.” 하였다.
겨울에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을해년(1575,선조8) 여름에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인년(1578,선조11) 여름에 전조(銓曹 이조)에서 6품으로 서용(敍用)할 것을 아뢰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제수하였으나 선생은 상소를 올려 사양하여 체직(遞職)되었다. 가을에 의흥 현감(義興縣監)을 제수하고 겨울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제수하였으며, 또 삼가 현감(三嘉縣監)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기묘년(1579,선조12) 봄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제수하였으나 또다시 상소를 올려 체직되었으며, 경진년(1580,선조13) 봄에 창녕 현감(昌寧縣監)을 제수하자 처음으로 사은(謝恩)하고 사직소(辭職疏)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선조(宣祖)는 마침내 선생을 인견(引見)하고 묻기를, “너는 이황과 조식을 스승으로 섬겼는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신(臣)은 두 사람의 문하에 출입하여 묻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한 것은 있사오나 경전을 잡고 수업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두 사람의 기상과 학문이 어떠한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이황은 덕기(德器)가 혼후(渾厚)하고 실천이 독실하여 공부가 순수하고 익숙하며 학문의 단계가 분명한 반면, 조식은 기국(器局)이 준엄하고 정제(整齊)하며 재기가 호매(豪邁)하여 초연히 스스로 즐기면서 우뚝이 서서 독특하게 행합니다.” 하였다.
선조가 또다시 “네가 힘쓰는 것은 무슨 책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대학(大學)》에 종사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조가 “ 《대학》의 공부 중에 어느 것이 가장 긴요한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이 모두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오나,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그 요점이 오직 근독(謹獨)에 있다.’ 하였사오니, 신은 근독이 가장 긴요하다고 여겨지옵니다. 제왕(帝王)의 학문과 정치하는 근본이 어느 한 가지도 근독에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는 인하여 의(義)와 이(利), 공(公)과 사(私)의 구분을 아뢰었다.
선조가 다시 “네가 고을에 부임해 가면 장차 무엇을 먼저 시행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학문이 얕고 재주가 용렬하여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을까 두렵사오나 원하는 것은 먼저 학교를 일으키고자 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네가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았다.” 하고 칭찬하였다.
선생은 고을에 부임하자마자, 25가(家)에 글방이 있는 제도를 따라 사방의 경내에 모두 서재(書齋)를 설치하고 훈장(訓長)을 선임하여 일과(日課)로 책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망궐례(望闕禮 대궐을 바라보고 절하는 예)를 행한 다음 향교(鄕校)에 나아가 알성(謁聖 문묘에 모신 성인을 뵈옴)하고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여러 생도들을 데리고 강론하여 하루를 마쳤으며, 학사(學舍)가 무너지고 훼손된 것을 보면 즉시 다시 중수(重修)하고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을 일시에 새로 장만하였다.
봄가을의 석전(釋奠)에는 엄숙함과 경건함을 갖추어 다하였으며, 사직(社稷), 성황(城隍), 여제(厲祭)의 일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친히 행하고 단(壇)과 담이 무너지면 땅을 가려 개축하였으며, 옆에 재사(齋舍)를 설치하여 제사를 받들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또 제생들과 향음주(鄕飮酒), 향사(鄕射) 등의 예를 강습하였으며, 경내의 노인들을 모아 양로연(養老宴)을 행하되 좌석을 안과 밖으로 나누어 남녀를 구별하고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간사한 아전들을 엄하게 제재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구휼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제거하며, 선(善)을 권장하고 악(惡)을 징계하며, 자신을 봉양하는 것을 검소하게 하고 아랫사람들을 보태주는 것을 후하게 하며, ‘시민여상(視民如傷 백성을 보기를 다칠듯이 함)’ 네 글자에 항상 생각을 다하였다. 이 때 방백(方伯)은 온 경내가 편안하다고 칭찬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신사년(1581,선조14) 가을 지평(持平)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달려와 사은한 뒤에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현감으로 있을 때의 추고(推考)로 피혐(避嫌)하여 체직되었다. 창녕(昌寧) 사람들은 선생을 추모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봄가을로 참배하였다. 10월에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11월에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또다시 사양하였다.
12월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에 제수되자 사은하고 사직서(社稷署)에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사직소를 올렸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탑전(榻前)에서 아뢰기를, “비록 해유(解由)하지 않았으나 파격적으로 녹봉을 주소서.” 하였으나, 선생은 “요행을 바라는 문을 열어 놓게 된다.”고 말씀하고 두 번 상소를 올려 강력히 사양하였다.
임오년(1582,선조15) 봄에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제수되었다가 정순(呈旬)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계미년(1583,선조16) 회연(檜淵)에 옮겨 터를 닦고 초당(草堂)을 건축한 다음 대나무와 매화나무를 심고 호를 백매원(百梅園)이라 하였다.
그 후 시골의 친구들과 문도(門徒)들과 약속하여 매월 초하루에 강회(講會)하는 계(契)를 만들었는데 규약과 의식을 제정하고 각각 첩자(帖子)를 만들어 조목을 나열하니, 모두 선생이 손수 정한 것이었다. 이 규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규약에 들어온 사람은 각자 독실히 삼가 책을 읽고 행실을 닦아야 할 것이니, 비록 학문에 깊고 얕음이 있고 재주에 높고 낮음이 있으나 그 지취(志趣)를 요약하면 반드시 옛날의 훌륭한 사람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드시 의(義)를 바르게 하고 이(利)를 도모하지 않으며 반드시 도(道)를 밝히고 공(功)을 따지지 않으며, 부귀에 급급하지 않고 빈천에 서글퍼하지 아니하여 거의 유자(儒者)의 기미(氣味)와 절박(節拍 리듬)이 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미 우리 무리의 사람이 아니다. 비록 규약 안에 벌칙(罰則)은 없으나 또한 어찌 이러한 것을 모르고 따라 참여하여 우리 규약의 수치가 되게 하겠는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함께 약속한 사람들은 더욱 모름지기 자로(子路)의 의롭고 용감한 기상에 격앙하여 깨끗이 세력과 이익을 초탈하여 가난함과 부유함으로써 마음을 동요하지 않은 뒤에야 인욕(人慾)을 없애고 천리(天理)에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주자(朱子)는 말씀하기를 ‘높은 관직을 하찮게 보고 부귀를 진흙처럼 보라.’ 하였으니, 배우는 자가 모름지기 이 뜻을 알아야 비로소 녹록(碌碌)하지 않게 된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는 자가 평상시 편안히 앉아 말할 때에는 볼 만한 것이 있으나 조그마한 이해를 당하면 곧 뜻을 빼앗겨 정신이 모두 상실되고 수족(手足)이 다 탄로되니, 이는 예와 지금의 공통된 병통이다.
책을 읽어 선비가 되려 할 적에 누구인들 옛날의 훌륭한 사람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마는 후인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시종 부끄러움이 없어 완전한 사람이 될 만한 자가 실로 적다. 그 이유를 구명해 보면 이해의 처음에 발을 잘못 들여놓음으로 말미암아 끝내 넘어지고 자빠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자가 없으니, 비록 정(情)에 경중(輕重)이 있고 실패에 대소(大小)가 있으나 본심을 잃어 우리 유자(儒者)의 수치가 됨은 똑같다.
내가 일찍이 생각해 보니 한 털끝만한 것을 잃는 것과 천금을 얻는 것이 어찌 나의 가슴속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굳게 서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하여 이 지경에 이르면서 끝내 깨닫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말하면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 나는 미리 우리 계원(契員)인 제군들에게 당부하노니, 모름지기 항상 경계하여 양가죽을 보고 나의 좋은 보배를 잊지 말도록 하라.
또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천금은 버릴 수 있으나 가마솥을 깨뜨림에는 실성 통곡한다.’ 하였으니, 진정(眞情)이 발로되는 것은 또한 큰 데 있지 않다. 군자가 사람을 관찰하는 법은 실로 조차(造次)와 기미(幾微)의 즈음에 있으니, 이 또한 어찌 조심하고 또 두려워할 만하지 않겠는가. 제군들은 항상 마음을 도의(道義)의 가운데에 두어 정직함으로 기르고 해치지 말아 본심으로 하여금 호연(浩然)하여 발로되는 마음이 모두 깨끗하게 한다면 거의 스스로 본심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군들은 이미 고인처럼 되기를 기약하였으니, 어찌 스스로 힘쓰지 않겠는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인(聖人)의 성스러움과 현인(賢人)의 어짊이 고원(高遠)하고 이상하여 하늘에 올라가고 공중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실로 사람의 도리에 당연하여 마치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길쌈하는 것과 같아 직분에 떳떳한 일인데, 다만 사람들이 제 스스로 살피지 못하고 스스로 닦지 못하여 아는 자가 이미 드물고 행하는 자가 더욱 드문 것이다.
온 세상이 모두 어둡고, 흐린 물결이 도도히 흐른다. 그 중에 간혹 분발하여 배우려고 하는 자가 있어 여럿이 똑같은 가운데에 홀로 다르게 하면 서로 다투어 지목하고 괴이하게 여기며 방해하여 마치 처음 촉(蜀) 지방에서 해를 보고 월(越) 지방에서 눈[雪]을 만난 듯이 여긴다. 그러하니 저 사람은 참으로 우리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는 것이요 나는 실로 잘못하여 낭패함으로 들어가, 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의 소행이 참으로 수치스럽고 불쌍할 만하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만약 이것을 하고자 한다면 진실로 할 수 있으니, 만일 그치지 않고 계속한다면 끝내 이르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새로 난 나무가 그 자람을 해치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 높이 솟음에 이르고, 새로 심은 벼가 기름을 해치지 않으면 성숙함에 이름과 같으니, 오직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치지 않는 공력이 귀할 뿐이다.
이 때문에 옛 사람은 ‘반드시 뜻을 세워 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군자가 군자가 되고 보통 사람이 보통 사람이 되는 이유는 모두가 뜻이 있는가 또는 뜻이 없는가에서 판별되는 것이다. 이윤(伊尹)이 애당초 천하를 자임(自任)하는 뜻이 없었다면 신야(莘野)의 한 농부가 됨에 불과하였을 것이요, 안연(顔淵)이 애당초 중니(仲尼)를 사모하는 뜻이 없었다면 어찌 3개월 동안 누추한 골목에서 인(仁)을 행하였겠는가.
더구나 함께 약속한 우리들은 모두 맹자(孟子)의 이른바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는 사람이니, 모름지기 각자 분발하여 뜻을 세워 스스로 힘쓰고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들 가운데에 또한 이윤처럼 스스로 즐거워하고 안연처럼 변치 않는 지조가 있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나이는 진실로 많고 적음이 각기 다르고 자질은 둔하고 민첩함이 똑같지 않으나 또 무공(武公)의 나이가 90인 것과 증자(曾子)의 자질이 노둔함을 보지 않았는가. 걱정되는 것은 다만 억계(抑戒)의 스스로 경계함과 삼성(三省)의 독실함이 부족할 뿐이다.
제군들은 각자 지금부터 시작하여 이미 지나간 것을 너무 후회하지 말고 자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오직 마땅히 마음속에 새기고 스스로 힘써 공부를 백 배로 하여 옛날 습관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기질을 변화시킨다면 지금 사람이 어찌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높으면 성현(聖賢)이 되고 낮아도 길인(吉人)과 선사(善士)가 됨을 잃지 않을 것이니, 오직 나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렇게 하면 중(中)을 받아 태어난 책임에 보답하여 천지 사이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가문과 부형(父兄)의 소망을 위로하고 밖으로는 붕우들과 약속한 본의에 부응할 것이니, 상쾌하지 않으며 즐겁지 않겠는가.
원컨대 우리 당(黨)의 제현(諸賢)들은 이와 같이 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하되,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워 ‘순(舜) 임금은 어떠한 사람인가. 공부하는 자는 또한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는 각오를 갖는다면 서로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해 봄에 강원도 도사에 제수되고 여름에 충청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병조(兵曹), 호조(戶曹), 공조(工曹) 3조(曹)의 정랑(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갑신년(1584,선조17) 여름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니, 특별한 명령이었다. 사은하자, 임금께서 다시 인견(引見)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물었다. 선생이 매우 간절하게 대답하니, 임금께서는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고 간곡히 타일러 보내었다. 선생은 동복에 부임한 다음 시설을 한결같이 창산(昌山 창녕을 가리킴)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으므로 아문(衙門) 안이 쓸쓸하여 채소와 거친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였다.
을유년(1585,선조18) 봄에 교정청 낭청(校正廳郞廳)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달려가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2월에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에 제수되고 5월에 다시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두 번 상소를 올려 체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교정(校正)을 보아 다시 올려보낼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고 장차 길에 오르려 하였으나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어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8월에 말미를 받아 시골로 내려가 병으로 집에 있었다. 10월에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2월에 고부 군수(古阜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병술년(1586,선조19) 봄에 경상도 도사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았다. 가을에 함안 군수(咸安郡守)에 제수되었는데 사은한 뒤에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마침내 군으로 부임하였다. 선생은 더욱 학교를 일으키고 백성을 구휼하는 일에 유념하였으며, 수재(水災)와 한해(旱害)를 만나면 몸소 목욕 재계하고 기도하였는데 그 때마다 반드시 효험이 있으니, 백성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 박사문 한주(朴斯文漢柱)의 묘소를 정리하고 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효자와 열녀의 정려문(旌閭門)을 모두 새롭게 단장하였다.
이때 창녕(昌寧) 사람의 의심스러운 옥사(獄事)가 있었으니, 바로 부자간의 변괴였다. 적형(嫡兄)이 서제(庶弟)의 아들을 몰래 데려다가 자기가 낳았다고 칭하고 적자(嫡子)로 삼았다. 추관(推官)은 뇌물을 받고 증인들은 화를 두려워하여 옥사를 지체하고 결단하지 못하니, 공론이 모두 분하게 여겼다. 감사(監司)가 함안(咸安)으로 송사를 이첩(移牒)하자, 선생은 반복 신문하여 끝내 단서가 모두 드러났다. 그 아비가 선생의 엄하고 밝음을 두려워하여 숨김없이 자복함으로써 부자가 정해지니, 공론이 쾌하게 여겼다.
무자년(1588,선조21) 가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공덕을 사모하였다. 기축년(1589,선조22)과 경인년(1590,선조23) 사이에는 백매원(百梅園)에 있으면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신묘년(1591,선조24) 겨울 통천 군수(通川郡守)에 제수되자 사은하고 부임하니, 고을은 지역이 궁벽하고 누추하며 백성들은 풍속이 완악하고 어리석었는데, 선생이 자못 어루만지고 개도(開導)하였다.
임진년(1592,선조25) 여름 왜란(倭亂)이 심해지니,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이 모두 도망하여 산골짝에 숨었다. 선생은 창의(倡義)하여 왜적을 토벌하기로 결심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렸는바, 혈성(血誠)으로 개유(開諭)하고 정예한 장병들을 불러모아 적의 소굴을 출입하며 어려움과 험함을 피하지 않았다.
이 때 관북(關北)의 토병(土兵)들이 왜적에 붙어 난리를 일으켜 왕자(王子)와 재신(宰臣)과 수령들이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다. 선생이 외로운 군대로 성토하니, 사람들은 매우 위험스럽게 여겼으나 관리와 백성들이 정성을 다해 호위하여 끝내 보전하였다.
하릉군(河陵君)이 난리를 피하여 금강산(金剛山) 골짝에 있었는데, 토적(土賊)들이 왜적을 인도하여 산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깊은 골짝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나, 사람들은 아는 자가 없었다. 가을에 이르러 선생이 처음으로 이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토적을 체포하고 그의 시신을 찾아 내어 친히 가서 염습(殮襲)을 하고 관곽(棺槨)을 갖추어 임시로 장례하고 임금께 아뢰었다.
이에 선조(宣祖)는 깊이 서글퍼하고 감동한 나머지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이 은혜를 내 어떻게 갚겠는가. 우선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시켜 나의 뜻을 보이겠다.” 하고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켰다. 선생은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계사년(1593,선조26) 겨울 강릉 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부임한 다음 제반 사무를 경리하여 빠뜨림이 없었으며, 병기(兵器)를 정교하게 만들고 훈련을 엄격히 시켰으며 양식을 널리 모집하여 군량을 보충하고 둔전(屯田)을 많이 개척하여 경비를 보태었다. 이에 친구들이 사방에서 모이고 굶주린 백성들이 폭주해 왔다. 선생은 봉급을 털어 이들을 구휼하니 살아난 자가 매우 많았다.
갑오년(1594,선조27) 겨울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는데,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을미년(1595,선조28) 정월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고, 3월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하루는 경연(經筵)에서 임금을 모시고 《역전(易傳)》을 진강(進講)하였는데 점치는 일을 언급하게 되었다. 선조가 묻기를, “옛날 한탁주(韓侂胄)가 권력을 독단하여 조여우(趙如愚)가 견책을 받자, 주자(朱子)는 차마 스스로 묵묵히 있을 수 없다 하여 마침내 한탁주의 간사한 내용을 지극히 논박하는 봉사소(封事疏)를 지었었다. 이 봉사소가 만약 들어갔더라면 송(宋) 나라가 거의 다스려질 수 있었을 터인데, 주자는 주역점을 쳐 둔괘(遯卦)를 얻고는 봉사소를 올리지 않았으니, 이로써 본다면 점치는 도는 천하에 지극히 신묘하다고 이를 수 없다. 그런데도 주자가 반드시 점서(占筮)에 결단한 것은 이 또한 미진한 듯하다. 어떠한가?” 하였다.
이에 선생은 즉시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송 나라 영종(寧宗)이 과연 성상(聖上)의 말씀처럼 한번 봉사소를 보고 곧바로 한탁주를 축출하였더라면 그 점은 반드시 둔괘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점서가 지극히 신묘한 까닭입니다.” 하였다. 선조는 이 말씀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선조는 또다시 “ 《정전(程傳)》과 《본의(本義)》는 무엇이 먼저인가?” 하고 물었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 《주역》의 도는 오직 소식 영허(消息盈虛)의 이치와 진퇴 어묵(進退語默)의 기미를 밝게 알아 시중(時中)을 잃지 않는 것이니, 한갓 점치는 것을 일삼는다면 이는 《주역》의 지엽에 불과합니다. 신의 뜻에는 마땅히 《정전》을 먼저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4월에 사직하여 체직되고 의흥위 호군(義興衛護軍)에 제수되었으며 6월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다. 7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고, 8월에 호분위 호군(虎賁衛護軍)으로 제수되었다. 9월에 다시 우부승지에 제수되고 10월에 좌부승지로 옮겼으며 12월에 체직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있다가 얼마 후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병신년(1596,선조29) 봄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제수되니, 선조는 선생을 인견(引見)하고는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군량을 준비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선생은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하오나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 때 왜적이 바닷가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천병(天兵 명군(明軍)을 가리킴)이 주둔하고 있어 군량이 고갈되었다. 선생은 다방면으로 계책을 세워 군량을 널리 모집하고 여러 고을에 명령을 내려 적기에 군량을 마련하여 책응(策應)하는 자료로 삼게 하였다.
또 영원(鴒原)은 지형상 관동(關東)의 보장(保障)이 될 만하다 하여 마침내 장수를 가려 뽑고 승려(僧侶)들을 모집한 다음 성을 쌓고 식수를 저축하며 양식과 갑옷을 많이 비축하여 위급할 때에 쓰도록 하였다. 또 원충갑(元沖甲)의 사당을 세우고 원천석(元天錫)의 묘소에 제사하여,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절의(節義)를 숭상하여야 함을 알아 본받고 사모할 곳이 있게 하였다.
5월에 체직될 것을 원하는 글을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10월에 다시 사직하는 글을 올려 마침내 체직되고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글을 올려 체직되고 용양위 대호군(龍驤衛大護軍)에 제수되었다. 12월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정유년(1597,선조30) 정월 또다시 글을 올려 체직되고 의흥위호군 겸 오위장(義興衛護軍兼五衛將)에 제수되었으며, 3월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었다. 6월에 성천 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어 7월에 부임하니, 이 때 왜구가 다시 준동(蠢動)하여 경성(京城)을 향해 몰려왔다. 이 때문에 여러 궁(宮)의 왕자(王子)가 부(府)의 관사로 와서 머물고 있었으며 시위하는 대신들이 두루 이어져 있었는데, 선생은 공경과 예를 다하여 정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을 공양하고 접대함에 모두 법도에 맞고 계획하고 조처함이 골고루 갖추어져 남김이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어기고 잘못됨이 없었다.
무술년(1598,선조31) 겨울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되었는데, 사양하는 글을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 때 조정에서는 여러 고을에 명하여 무학(武學)을 설치하게 하였다. 선생은 무학을 세운 다음 인하여 사당을 세워 상장군(上將軍) 정의(鄭顗)와 부사(副使) 최춘명(崔椿命)을 제사하였는데, 몸소 제향을 올리고 서문과 시(詩)를 지어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쳤다.
경자년(1600,선조33) 정월 임기가 차 체직되고 충좌위 부호군(忠佐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이 때 안질(眼疾)이 있어 임시로 양덕현(陽德縣)의 마을집에 우거하였는데 상소하여 직명(職名)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7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달려가 곡하였다.
9월에 충무위 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제수되어 소(疏)를 올려 산릉(山陵)의 일을 논하였으며 인하여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와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신축년(1601,선조34) 3월 의흥위 사직(義興衛司直)에 제수되고 9월에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용양위호군 겸 교정청당상(龍驤衛護軍兼校正廳堂上)에 제수되었는데 사직소를 올려 체직되었다.
임인년(1602,선조35) 정월 용양위 호군(龍驤衛護軍)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충주 목사(忠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부임한 다음 제문(祭文)을 지어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전몰한 장병들을 위로하였으며, 오래지 아니하여 또다시 교정청 당상으로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와 용양위 호군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용양위 사직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호분위 호군에 제수되고 또다시 용양위 부사직에 제수되었으며, 겨울에 호분위 사직에 제수되었다가 용양위 부호군으로 전직하고 다시 의흥위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이 해 가을로부터 서천군(西川君 서천부원군)의 병환이 위중해지니, 선생은 곁을 떠나지 않고 모시면서 약을 올렸다. 별세하자 정(情)과 예(禮)를 극진히 하여 초상(初喪)으로부터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반드시 몸소 하여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였다.
계묘년(1603,선조36) 봄 마침내 글을 올려 물러갈 것을 아뢰고 목천(木川) 땅에 거주하였는데, 가을이 끝날 무렵 목천으로부터 성주(星州)로 돌아와 한강(寒岡)의 옛터 북쪽에다가 작은 서재를 짓고 이름을 숙야재(夙夜齋)라 하였다. 갑진년(1604,선조37)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제수되고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성주(星州)의 서쪽에 수도산(修道山)이 있었는바, 산의 동쪽에는 샘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며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선생은 궁벽하고 조용함을 좋아하여 다시 작은 서재를 지어 책을 보관하고 놀며 휴식하는 장소로 삼고는 이름을 무흘(武屹)이라 하였다. 손님을 사절한 시(詩)에 “친한 벗들에게 말하노니 부디 신을 신고 오려고 하지 마소. 어지러운 구름과 쌓인 눈에 길이 완전히 혼미하다오.[寄語親朋休理屐 亂雲層雪逕全迷]”라고 하였으니, 바로 그 한 구(句)이다.
을사년(1605,선조38) 홍주 목사(洪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선생은 지방의 자제들이 난리로 인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마침내 약속하여 초하루와 보름으로 통독(通讀)하는 모임을 만드니, 이 약속에 가입한 자가 모두 70여 명이었다. 약속한 법과 모이는 의식은 대체로 평상시 정한 강계(講契)의 의식과 같았으나 약간 가감하여 행하였다.
다시 모재(茅齋)를 회연(檜淵)의 옛터에 지었는데, 방과 당(堂)과 창호(牕戶)를 한결같이 옛 제도와 같이 하였으며 방을 이름하여 불괴침(不愧寢)이라 하고 창문을 매창(梅牕)이라 하고 헌(軒)을 정관(靜觀)이라 하였다. 또 죽유(竹牖)와 송령(松欞) 등의 명칭을 붙여 문미(門楣)에 걸었으며 별도로 한 암자를 서재의 동쪽에 짓고 이름을 망운(望雲)이라 하였으니, 선영(先塋)이 바라보이는 땅에 있으므로 길이 사모하는 생각을 부친 것이었다.
병오년(1606,선조39) 가을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1606.8.25.)되었으나 병으로 사양하는 글을 올리고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선생은 문하생 약간 명과 길을 떠나 향천서원(香川書院)으로 향하여 사당을 배알하고 인하여 회계(會稽)로 가서 오덕계(吳德溪)의 묘에 제사하였다. 선생은 다시 진산(晉山)으로 가서 남명(南冥)의 묘소에 제사하고 마침내 덕산서원(德山書院)과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용유담(龍遊潭)을 지나 천령(天嶺)으로 향하여 남계서원(藍溪書院)과 사당에 참배하고, 다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호)의 묘소에 제사한 다음 돌아왔다.
12월에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니, 선생은 여러 번 벼슬을 제수받았는데 연달아 사양하는 것이 미안하다 하여 모름지기 사은하고 돌아오려 하였다. 선생은 사은한 다음 상소를 올려 병들어 진작할 수 없는 상황을 아뢰고 다시 국전(國典)에 나이가 65세 이상인 자는 수령(守令)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규정을 인용하여 사양하였다.
이에 선조(宣祖)는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경(卿)은 옛날에 시종(侍從)하던 신하인데 오랫동안 시골의 집에 물러가 있으니,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여 항상 서운하게 생각하였다. 마땅히 조정에 와서 벼슬하여야 할 것이니, 어찌 물러갈 수 있겠는가. 연세에 관한 문제는 사람의 기력이 똑같지 않으니, 하필 이에 구애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선생은 다시 글을 올려 반드시 체직될 것을 기약하였는데, 다른 뜻을 품고 만류하기를 청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부임하여 곧바로 죽령(竹嶺)을 넘어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안동에 부임한 뒤에는 첫번째로 학교를 일으키고 폐단을 개혁하는 데에 힘썼다.
이때 부(府)의 한 사찰에 있는 노예가 권력가의 위엄과 세력에 의탁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침탈하고 사족(士族)들을 능멸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고 미워하였으나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선생은 즉시 노예를 체포하여 가두고 그 정상(情狀)을 밝혀 끝까지 다스리니, 이 때 요로(要路)에 있는 대관(大官)이 글을 보내어 구원하였으며, 또 옆에서 좋은 말로 풀어 놓아줄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끝내 흔들리지 않고 마침내 그를 죽게 하였다. 이에 온 경내가 기뻐하고 축하하였다.
가을에 질병이 있었으나 선조께서 편찮은 관계로 그대로 오지 못하다가 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무신년(1608,선조41) 봄에 선조가 승하하였으므로 즉시 달려가 곡하였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제수하자, 사직하는 글을 올려 교체되기를 청원하였다.
이에 폐주(廢主 광해군을 가리킴)는 말하기를, “정모(鄭某)는 산림(山林)의 훌륭한 선비로 선왕께서 일찍이 예우한 자이니, 이제 마땅히 상규(常規)에 구애하지 말고 우선 발탁하여 등용해서 한편으로는 과매(寡昧)한 나의 자문에 대비하고 한편으로는 원자(元子)를 보양(輔養)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3월에 특별히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보양관(司憲府大司憲兼世子輔養官)에 제수되니, 즉시 글을 올려 사직하였는바,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방금 성상께서 처음 등극하여 재궁(梓宮)이 침전(寢殿)에 있사온데 역변(逆變)이 지친(至親)에서 일어났으니, 조사하여 처리하는 즈음에 반드시 은혜와 의(義)가 모두 극진한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흉(元兇)이 선왕(先王)의 신하에게서 나왔으니, 국법을 시행할 때에 완급(緩急)을 적절히 참작하는 마땅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모름지기 강직하고 평정(平正)하여 은미(隱微)함을 살피고 이치를 밝게 아는 선비를 얻어 한때의 공론을 주장하게 하여, 성상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효성이 극진하여 유감이 없게 해서 사책(史冊)에 빛나고 백세(百世)가 우러러보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찌 신(臣)처럼 어둡고 용렬하며 편벽되게 아는 자가 감히 금함을 범하면서 무릅쓰고 차지하여 다만 한때의 사기(事機)를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이에 폐주는 답하기를, “사양하지 말고 안색을 바루고 조정에 서서 무너진 기강을 떨치라.” 하였다.
선생은 다시 면직(免職)되기를 바라는 글을 올려 세 번에 이르렀으나 급유(給由 말미)를 다시 내리자, 선생은 또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폐주는 답하기를, “현자(賢者)를 등용함을 어찌 상규(常規)에 구애되겠는가.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선생은 마침내 사은하고 인하여 해유(解由)를 받지 못했다 하여 사양하고 피하였다. 이에 폐주는 답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은 기강을 바로잡는 것보다 급함이 없다. 이는 실로 헌부(憲府)의 임무이니, 경은 모름지기 맡은 임무를 힘써 다하라.” 하였다. 선생은 또다시 피혐하여 네 번에 이르렀으나 폐주는 모두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선생은 다시 차자를 올려 체직되기를 원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오직 구구(區區)하게 군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끝내 개와 말이 주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정성을 억제할 수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만 가지 선(善)을 모두 구비하고 한 가지 하자(瑕疵)도 남겨 두지 마시기를 바라오니, 이는 실로 열화(烈火)와 같은 충심에서 나와 감히 속일 수 없사옵니다. 전하께서 신을 총애함은 신을 사사로이 사랑해서가 아니요, 반드시 초야에 있어 우직해서 일을 따라 아뢰고 회피하는 바가 없을 것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어찌 감히 숨기고 참는 바가 있어 전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외로이 상중(喪中)에 계시온데 또 전고(前古)에 드문 변고를 만나시니, 비록 일이 종묘 사직에 관계되어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사오나 신은 엎드려 전하의 사사로운 정을 생각하오면 선왕께서 권권(眷眷)히 당부하시던 마지막 명령이 아직도 귀에 쟁쟁히 남아 있으므로 민망하고 경황이 없어 밤낮으로 편안치 못하시리라 여겨지옵니다.
신은 연일 추국(推鞫)하는 말석(末席)에 참여하와 옥사의 실정을 엎드려 보오니, 연루됨이 너무 많고 시일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잘 살펴 중도(中道)에 맞게 처리하여 성조(聖朝)의 분명하고 진실한 다스림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또 연루된 자들이 종척(宗戚)의 신하가 많사온데 조사하여 힐문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곧바로 곤장 아래에서 운명(殞命)하는 자가 서로 이어지고 있사오니, 만일 과연 역모(逆謀)에 참여한 실제가 있어 죄가 드러나 죽임에 합당하다면 자복을 받지 못함은 진실로 형벌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미처 실정을 알지 못하여 간혹 억울함을 머금고 죽음에 나아가는 자가 있다면 저들은 비록 친소(親疎)의 간격이 있으나 실로 조종(祖宗)의 혈기(血氣)를 나눈 한 핏줄입니다. 혹시라도 풍문에 연유하고 적(賊)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체결(締結)하여 비밀스러운 자취가 또한 모두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 또한 어찌 심히 서글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춘궁(春宮 동궁을 가리킴)에서 덕을 기르실 적에 지극히 인자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사방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등극하신 초기에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 목을 늘이고 기뻐하여, 장차 굶주리면서 배부르기를 기다리고 추우면서 따뜻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감옥에 갇혀 있는 여러 죄수들도 또한 모두 그 무리이온데 혹시라도 지극한 은택을 입지 못하고 억울한 마음이 먼저 맺혀 있다면 새로운 교화의 아래에 또한 한 불행일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도(聖度)께서는 여기에 유념하소서.
신이 여항(閭巷)에 전하는 말을 엎드려 듣자오니, 이르기를 ‘임해군(臨海君)이 역모를 도모한 것이 이미 모두 탄로나 옮겨 유배된 뒤에 대내(大內)에서 때로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옷과 음식을 하사하시니 우애의 지극한 은혜를 베푸심이 천만 번 크게 뛰어나다.’ 하였습니다. 임해군은 이미 스스로 하늘을 끊었는데 성상께서 그를 대우하심이 마침내 이와 같사오니, 전하는 소문이 미치는 바에 흥기하고 격려되어 인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을 어찌 다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중종(中宗) 때에 왕자(王子)의 변(變)으로 인하여 옥사가 일어나 화를 측량할 수 없었사온데 인종대왕(仁宗大王)이 당시 저궁(儲宮 동궁)에 있으면서 근심스럽고 두렵고 민망하고 절박한 나머지 글을 올려 풀어줄 것을 청하였사온바, 그 상소에 이르기를 ‘형제의 친함은 한 기운에서 나누어져 천식(喘息)하고 호흡함에 기맥이 서로 유통되니, 우애하는 정이 스스로 그칠 수 없사옵니다. 비록 비상(非常)한 변고가 생각 밖에 나왔다 하더라도 옛 사람은 오히려 은혜로써 가리운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였고, 또 맹자(孟子)의 말씀에 ‘형제간에는 노여움을 마음속에 감춰 두지 않고 원한을 묵혀 두지 않아야 하니, 형은 천자가 되고 아우는 필부(匹夫)가 되면 되겠는가.’ 한 글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 사이에 지금까지도 전해져 외우고 있사오니, 오늘날 성상께서 대처함은 은연중 이와 부합됩니다. 어찌 앞 성인(聖人)과 뒷 성인이 똑같은 법이 아니겠습니까.
한(漢) 나라 문제(文帝)의 아우인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사면(赦免)을 받고 촉(蜀) 땅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에 원앙(袁盎)은 문제에게 간(諫)하기를, ‘유장이 끝내 안개와 이슬을 만나 병들어 죽게 되면 폐하께서는 아우를 죽였다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문제는 말하기를 ‘나는 다만 그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 유장이 과연 죽으니, 문제는 매우 슬피 통곡하였습니다. 신은 항상 문제가 일찍 원앙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한하고 있습니다.
성상의 동기간 중에 모친의 태(胎)를 함께한 분은 오직 임해군(臨海君)이 있을 뿐입니다. 선빈(先嬪)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오직 형제 두 분이 외롭게 함께 자라 침식(寢食)을 함께하고 서로 떨어져 계시지 않았사오니, 신은 전하의 지극한 회포가 더욱 차마 못하는 마음이 계실 것을 아옵니다. 그런데 임해군이 스스로 큰 죄를 지어 죄가 천지에 가득해서 성상에게 근심 걱정과 절박한 애통을 끼쳤사오니, 신은 이 때문에 마음이 더욱 아프고 창자가 찢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오늘날 은혜와 의(義)를 참작하여 변통해서 잘 대처함에 어찌 그 방도가 없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심사숙고하여 공(公)으로써 법의 뜻을 다하지 마시고, 공정하게 듣고 총명을 넓히시어 중정(中正)의 덕을 더욱 밝히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하오니 추국(推鞫)하는 대신(大臣)에게 명하시어 되도록 분명하고 신중함을 지극히 하여 옥사를 굳이 다 구명하지 말고 사람들을 굳이 다 묻지 말고 죄를 굳이 다 조사하지 말고 법을 굳이 다시 행하지 말아서, 차라리 그 사이에 형벌이 너무 가벼워 떳떳하지 못한 실수가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임해군이 또한 용서를 받아 죽지 않고 큰 은혜에 무젖어 그의 삶을 마칠 수 있게 된다면 광무제(光武帝)가 반측(反側)하여 편안하지 못한 자들을 스스로 편안하게 한 것이 되어, 문제(文帝)의 한 자의 베, 한 말의 곡식[尺布斗粟]이라는 동요(童謠)가 오늘날 다시 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대성인(大聖人)이 변고에 대처함에 유감이 없음을 우러러보아, 성상의 우애(友愛)가 이와 같고 성상의 지극한 인(仁)이 이와 같고 성상의 어려운 일에 대처함이 이와 같고 성상의 살려 주기를 좋아하는 덕(德)이 심상(尋常)한 데서 뛰어남이 이와 같다 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쏠리고 사방이 모두 기뻐하며 사관(史官)이 이를 기록하고 후세에 법받을 것입니다. 어찌 다만 처음 등극하여 인심을 수습하는 지극한 요점이 될 뿐이겠습니까. 또한 위로는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을 위로하고 또한 근래에 천심(天心)이 군주를 사랑하여 내린 경계에 우러러 보답하게 될 것이니, 어찌 심히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한(漢) 나라 명제(明帝)는 초왕(楚王) 영(英)의 옥사를 다스리다가 시어사(侍御史)인 한랑(寒朗)의 상소를 보고는 측연(惻然)히 생각하여 노여워하는 마음을 풀었는데, 이로써 하늘이 가물다가 비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신은 세상에 드문 은혜에 감격하와 한 마디 말이 없이 떠날까 염려되므로 감히 물러가기를 청원하는 글에 심장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모두 피력하와 망녕되이 아뢰고 숨김이 없사옵니다. 이에 거적자리에 엎드려 두려워하면서 부월(鈇鉞)이 내리기를 우러러 기다리옵니다.”
폐주는 “굳이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고는 인하여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는데, “사체(事體)로써 말하면 유사(有司)는 법을 집행하자는 의논을 하여야 하고, 법을 굽혀 은혜를 펴자는 주장은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서 나와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의논은 도치(倒置)되어 혼란한 듯하니, 나는 후일에 폐단이 될까 두렵다.” 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선생은 피혐(避嫌)하기를, “신은 본래 치밀하지 못하고 어리석어 사체를 알지 못하옵고 오직 군주를 사랑하는 한 마음이 본성(本性)에서 나왔습니다. 엎드려 특별한 대우를 받자오니, 감격하여 몸을 잊고 군주를 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할 것을 깊이 생각하와 감히 정성스러운 마음을 받들어 숨김없이 다 아뢰었습니다. 비망기에 전교(傳敎)하신 말씀을 엎드려 보오니, 신은 그대로 법을 집행하는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신의 직책을 파면하여 배척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소견을 우연히 언급하였을 뿐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선생이 다시 병으로 면직될 것을 청원하는 글을 네 차례나 올렸다. 이에 폐주는 답하기를 “경이 굳이 사양하고 그치지 않음은 반드시 나와 함께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여겨서 그러할 것이니, 내 심히 부끄럽다. 부디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여 나오라.” 하였다. 선생이 다시 차자(箚子)를 올려 체직되기를 원하니, 폐주는 답하기를 “병을 조리하고 일에 따라 나의 잘못을 바로잡으라.” 하였다. 선생이 다시 피혐하자, 폐주는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 때 예관(禮官)이 편지를 보내어 국상(國喪)의 상례(喪禮)를 물었으므로 선생이 계목(啓目)을 초(草)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살펴보옵건대 예경(禮經)에 아버지를 위하여 참최(斬衰) 3년을 입는 것은 은혜로써 만든 것이며, 군주를 위하여 참최 3년을 입는 것은 의리로써 만든 것입니다. 삼년상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니, 감히 신분의 귀천에 따라 더하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니온데, 한(漢) 나라 문제(文帝)가 옛 법을 변경하고 예를 파괴하여 처음으로 역월(易月)의 제도를 세우자, 역대(歷代)가 인습하여 바로잡지 못하였습니다.
진(晉) 나라 무제(武帝)와 위(魏) 나라 문제(文帝)는 이것을 바로잡아 삼년상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당시에 신하들이 용렬하고 누추하여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송(宋) 나라 효종(孝宗)이 홀로 결단하여 이를 행하여 장례한 다음 최복(衰服 상복), 수질(首絰), 요질(腰絰)을 처음과 같이 하고 조회 볼 때의 의관을 모두 굵은 삼베를 사용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이것을 심히 성대한 덕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문인(門人)들이 통상(通喪 삼년상을 가리킴)을 묻자, 이에 답하여 말씀하기를 ‘마땅히 효종이 만든 예와 같이 하여 군신(君臣)이 똑같이 복을 입되 대략 구별하여 상하(上下)를 차별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13개월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치르고, 25개월에 난삼(襴衫)과 복두(幞頭) 차림으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에 조복(朝服)을 입어 상복(喪服)을 벗어야 하니, 조정과 주현(州縣)이 모두 이 제도를 따라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기를, ‘옛날의 상복을 만들어 사당에 임하고, 별도로 삼베로 만든 복두(幞頭)와 삼베로 만든 공복(公服)과 삼베로 만든 혁대(革帶)를 만들어 차리고 조회하는 것이 바로 예에 합당하다.’ 하였으며, 영종(寧宗) 때에는 차자(箚子)를 올려 수황(壽皇)이 이미 행한 법을 따라 몸소 삼년상을 집행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당시 유사(有司)들이 칠사(漆紗)와 천황색(淺黃色)의 의복을 잘못 사용하자, 주자는 계빈(啓殯)하여 발인(發引)할 때에 제도를 변경하는 절차를 따라 다시 초상 시의 의복을 사용하여 기왕의 잘못을 고칠 것을 청한 결과, 마침내 조서(詔書)를 내려 삼년상의 제도를 따르도록 명하였습니다. 이 어찌 백왕(百王)이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오례의(五禮儀)》는 또한 한 왕조의 완성된 책으로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한 것이 우연치 않은 듯하오나 졸곡(卒哭) 후에 상복을 바꿔 입는 한 절차는 가장 근거가 없사옵니다. 이는 역월(易月)의 제도에 비교하면 비록 다소 날짜와 달의 오래고 가까움이 있으나 상기(喪期)를 단축함은 똑같으니, 어찌 주자의 이른바 백 보(步)와 오십 보의 사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종조(仁宗朝)에 명유(名儒)인 서경덕(徐敬德)이 상소하여 상제(喪制)의 잘못을 지극히 논하고 통상의 제도를 변경할 것을 청하였으니, 군주를 사랑하는 그의 정성은 실로 주자의 남은 뜻입니다. 인순왕후(仁純王后)의 상에 장령(掌令)인 민순(閔純)의 상소로 인하여 졸곡을 지낸 뒤에 흰 두건과 흰 의복을 입게 하였으니, 이 또한 어찌 옛날의 예를 회복하는 거룩한 뜻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신 등의 소견은 마땅히 한결같이 주자의 정론(定論)을 따라 상하가 통행하는 삼년상의 제도를 정하고 초상 때에 미처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주자가 계빈(啓殯)을 인하여 추후에 고치게 한 뜻을 따라 다시 초상 시의 상복을 입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13개월에 연제(練祭)를 지내고 2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에 상복을 벗으며, 조회에 참여하고 공식 석상에 모일 때에는 지금에 사용하는 삼베 두건과 삼베 단령(團領)과 삼 띠와 흰 신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니, 이 또한 주자의 삼베 복두(幞頭)와 삼베 공복(公服)을 입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진실로 주자의 이른바 수천백 년의 누추한 풍습을 한번 정돈하여 수천백 년에 완성된 법을 드리운다는 것이며, 흰 두건을 쓰고 수척한 상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오늘날에 보게될 것이니, 어찌 좋은 때의 성대한 덕으로 지극히 다행함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상은 예관(禮官)의 질문에 따라 만들어 올린 것이었다.
또다시 병으로 사면(辭免)을 청원하는 글을 올린 것이 네 번에 이르러 체직되자, 당일로 길을 떠나 목천(木川)에 이르러 머물며 국장(國葬)의 시기를 기다렸다.
선생은 헌장(憲長 사헌부 대사헌을 가리킴)으로 있을 때에 또 차자를 두 번 올린 것이 있으니, 하나는 산릉(山陵)의 일을 논한 것이고 하나는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논한 것이었는바, 기강을 바로잡는 근본을 임금이 마음을 바로잡음에 돌려 반드시 대중지정(大中至正)의 체(體)를 세우고 대중지정의 용(用)을 행하여, 환관(宦官)과 궁녀들의 아첨하는 사사로움과 간사하고 용렬한 자들의 미혹함으로 하여금 이목(耳目)이 미치는 바에 범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군주의 초상 때의 상복은 반드시 부모의 상에 견주어 참최(斬衰)의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등의 일을 말씀하였는데, 이미 초안(草案)을 하였으나 올리지 않았다.
6월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니, 사은한 뒤에 국장에 모여 곡하였다. 그 후 곧바로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은혜를 온전히 하여야 한다는 차자를 올린 일로 여러 번 사직하여 파직되기를 청원하고 7월에 고향으로 내려왔다. 9월에 상소하여 참판에서 체직되고 충좌위 대호군(忠佐衛大護軍)에 제수되었다.
경술년(1610,광해군2) 여름에 동향 사람인 박이립(朴而立)이 선생을 헐뜯고 욕하였는데 못 하는 짓이 없었으며 망칙한 말을 지어 만들어 선생과 문도(門徒)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문생 중에 이 계책을 아는 자가 있어 관청에 나아가 송사하니,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선생이 주(州)에 들어가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으나 조정에서는 불문에 부쳤다. 선생이 마침내 상소하여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아뢰자, 폐주는 답하기를 “남이 스스로 괴이한 짓을 하니, 경에게 무슨 감손(減損)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박이립(朴而立)은 본래 흉악하고 패역한 자로서 사류(士類)들에게 버림받는 것에 분개하여 마침내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에 가서 의탁하고 선생을 훼방하여 저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마침내 저들의 흉악한 형세를 믿고 또 저들 중에 흉악한 자들의 은근한 사주를 받아 감히 이러한 악행을 부린 것이었다.
임자년 봄에 주(州)의 동쪽 강좌(江左)의 노곡촌(蘆谷村)으로 옮겨 집터를 정하였다. 가천(伽川)에 있는 선생의 집이 정인홍의 거주지인 합천(陜川)과 거리가 멀지 않았으므로 정인홍의 사는 집과 서로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여 옮긴 것이었다.
계축년(1613,광해군5) 여름에 국가에서 역옥(逆獄)을 날조하여 대군(大君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가리킴)을 연루한 일이 있었다. 조정의 의논이 국법으로 처단할 것을 청하자, 선생은 변고를 듣고 감히 물러나 편안히 있을 수 없으므로 병든 몸을 부축하고 조정으로 가기 위해 영동(永同)에 이르렀는데, 병이 심하여 전진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마침내 상소문을 봉함하여 길가에 쓰러져 누워 낭패하고 곤궁한 형상을 아뢰고 인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신은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이 전고(前古)에 일찍이 없었던 변고를 만나시니, 밤늦도록 근심하고 슬퍼하여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신은 이 때문에 간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찢어져 어떻게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생각하옵건대 이 일은 잘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의(大義)로 말하면 진실로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격발(激發)하는 공론과 같이 처단하여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입장에 있어서는 처리함에 혹 미진한 바가 있으면 천하와 후세의 의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 수 없으며, 끝내 성상(聖上)의 몸에 누가 됨을 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진실로 신중히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전대(前代) 제왕의 이미 지나간 자취를 널리 상고하고 옛 성인(聖人)이 변고에 대처한 도리를 깊이 생각하사, 권도(權道)와 경도(經道)의 경중을 참작하고 상도(常道)와 변고에 치우치지 않을 것을 생각하시어 지극한 이치에 당연함을 살피고 성상의 마음에 반드시 편안함을 구하소서. 그리하여 자신에게 있는 도리로 하여금 털끝만치라도 부족함이 없어 진선진미(盡善盡美)하게 하신다면 오늘날 변고에 대처하는 큰 법이 이에 지극함이 될 것이며, 만세(萬世)에 성덕(盛德)의 빛남을 증가하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신은 진실로 전하께서 하늘이 낳으신 인애(仁愛)로 차마 못하는 애통함이 간절하시고 지극한 정(情)을 막기 어려워 이미 이루어진 계책이 정해져 있을 줄을 아오니, 용렬하고 누추한 신이 감히 입을 놀릴 수 있는 것이 아니오나 군주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본심을 속이기 어려우므로 한 가지 아는 어리석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사와 감히 심장을 도려내고 혈성(血誠)을 짜내어 무릅쓰고 올리는 것이옵니다.”
폐주는 답하기를 “경은 잘 조리하고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선생은 또다시 봉사(封事)를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금 신은 엎드려 다시 《춘추(春秋)》의 의리를 생각한 것이 있사온데, 성상께서 결단하시는 참고 자료에 도움이 없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신은 이미 들은 것이 있으므로 감히 숨기지 못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유념하소서.
옛날 노(魯) 나라 양공(襄公) 30년에 주(周) 나라 경왕(景王)의 적신(賊臣)인 담괄(儋括)이라는 자가 난을 일으켜 왕자(王子) 영부(侫夫)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습니다. 영부는 바로 경왕의 아우였는데 그는 실로 담괄이 자신을 옹립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 사실이 발각되어 담괄이 국외로 망명하자, 윤언다(尹言多)와 유의(劉毅) 등 다섯 사람이 함께 영부를 죽이니, 이는 왕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춘추》에 쓰기를 ‘천왕(天王)이 그 아우 영부를 죽였다.’ 하였습니다.
선유(先儒)들은 이것을 논하여 이르기를 ‘무릇 왕이 죄인을 죽이는 것은 《춘추》에 기록하지 않고 반드시 무죄한 사람을 죽인 뒤에야 기록한다.’ 하였습니다. 천자는 자기 마음대로 죄인을 죽일 수 있으니, 영부의 죽음은 마땅히 기록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이와 같이 기록한 것은 영부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성인(聖人 공자를 가리킴)이 그를 무죄하다고 본 것입니다.정상에 근원하고 법을 상고한 뜻이 어찌 깊고 간절하며 매우 드러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또 영부의 죽음은 애당초 경왕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다만 죽이는 것을 금하지 않았을 뿐 입니다. 그런데도 《춘추》의 의리를 해석함에 있어 좌씨(左氏)는 말하기를 ‘죄가 경왕에게 있다.’ 하였고, 곡량자(穀梁子)는 이르기를 ‘너무 심하다.’ 하였으며, 《좌전(左傳)》을 해석한 두예(杜預)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이다.’ 하였으니, 경왕의 누가 됨이 어떠합니까. 그렇다면 경왕의 잘못은 다섯 대부(大夫)가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우연히 이와 방불한 점이 있사오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어리고 몽매하여 무지(無知)함은 또 영부가 알지 못한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의 의논이 그치지 아니하여 반드시 왕명을 받들어 단죄(斷罪)하고자 하니, 이는 또 경왕이 금하지 않은 것보다 심하지 않습니까. 성상으로 하여금 장차 천하 후세에 《춘추》의 의리를 강(講)하는 자에게 변명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은 매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깊이 살피지 못해서이니, 만일 깊이 살핀다면 군주를 인도하여 허물이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함이 신하의 큰 소원입니다. 장차 지난날의 의논을 돌리고 전하의 지극한 정을 받들어 순종함을 생각할 것이니, 신은 반드시 신하들이 그대로 있지 못할 줄을 아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이 전후(前後)에 걸쳐 아뢴 것을 깊이 양찰하시어 사람들의 의논에 동요되지 마시고 대의를 정밀히 살펴 큰 인륜을 온전히 하신다면 성상의 마음이 태연하여 유감이 없고 성상의 몸이 진선 진미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세에서 지금을 보기를 지금에 옛 성인을 보듯이 하여 모두 와서 법을 삼을 것이니, 거룩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이 사사로운 걱정과 지나친 생각이 없지 못한 것은 형률(刑律)을 조사하여 처형하자는 아룀이 계속되고 있사온데 다만 여염집으로 내보냄을 허락하시니, 은혜와 의(義)가 높고 후함이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바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듣는 바에 그 누구인들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대군이 너무 어리고 약하여 기혈(氣血)이 정해지지 못했사온데 깊은 궁궐과 넓은 집의 편안한 곳으로부터 갑자기 낮고 저습하며 좁고 누추한 곳으로 옮겨 거처하여, 추위와 더위가 일정하지 않고 굶주림과 배부름이 제때에 맞지 않으며 어버이를 그리워하고 애태워 울부짖으나 들어 주는 이도 없고 보살펴 주는 이도 없으며 묻지도 않고 구원하지도 않을 것이니, 안개와 이슬에 갑자기 죽어 가지 않을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송(宋) 나라 신하 주희(朱熹)는 일찍이 그의 군주인 광종(光宗)에게 이르기를, ‘한(漢) 나라 문제(文帝)는 젊어서 생각을 잘못하는 바람에 한 자[尺]의 삼베와 한 말의 곡식이라는 동요로 종신토록 괴로워하였습니다. 비록 어진 군주라도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였으니, 이는 깊이 오늘날 우려할 만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 이미 큰 은혜를 내려주실진댄 바라옵건대 더 유념하시어 그로 하여금 살 길로 나아가 후회가 없게 하시면 매우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또 전하께서 자전(慈殿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가리킴)에게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지극히 함은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함께 감복하고 모두 우러르는 바이온데, 불행히도 흉변(凶變)에 감염되고 간사한 의논이 멋대로 일어나 성상의 마음으로 하여금 두려워 편안하지 못하게 하니, 신은 매우 애통하게 여기옵니다.
부모와 자식의 큰 은혜는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으므로 혹 변고에 대처함에 모두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도(常道)와 변고가 똑같지 않고 순(順)과 역(逆)이 형세가 다르므로 이에 대응함도 또한 어렵고 쉬움이 똑같지 않습니다. 한번 기미(機微)를 잃으면 곧 잘못과 누를 이루게 되오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신하들은 궁궐을 지나갈 때에 땅에 엎드리고 정성을 쌓아 어버이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을 군주에게 권했사온데, 지금에 말하는 자들은 마침내 별궁(別宮)에 달리 거처하게 할 것을 청하고 있사오니, 신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감히 그 말씀을 다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오직 옛 성인이 꾸준히 부모를 깨우친 뜻을 깊이 생각하여 반드시 순(舜) 임금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가 없다고 생각하시고 지난날 섬기시던 것을 하나도 변경하지 않으신다면 순 임금과 같이 훌륭한 성인이 되는 것도 여기에서 지나지 않사오니, 오직 더 힘쓰실 뿐이옵니다.
부득이한 것은 종묘와 사직의 큰 계책이요, 스스로 다하는 정성을 펼 수 있는 것은 모자간의 지극한 정이옵니다. 그 스스로 다하는 정성은 많은 말을 할 것이 없고 오직 포용하고 은인(隱忍)하여 더욱 성상의 마음을 굳건히 하심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설령 오고 가는 소문이 있더라도 감히 가까이하지 마시고, 효도와 순종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고 사랑과 공경의 도리를 다하시어 지성으로 간곡히 하여 오랫동안 쌓고 그치지 않으신다면 애연(藹然)히 믿고 감동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지극하고 극진하게 대처함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천하에 부자간이 안정된 것은 순 임금의 공로였사온데 그 기틀이 오로지 전하의 신화(神化)의 운용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신다면 사람들이 의심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흩어지듯 깨끗이 진정되어 모두들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화기(和氣)가 애애(靄靄)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필 별궁(別宮)에 달리 거처하게 해서 서로 간격이 없지 못한 듯이 하여 외인(外人)의 엿봄을 자아내고 의심하는 의논을 야기할 것이 있겠습니까.
간사한 도깨비와 환혹(幻惑 주술)의 변고로 말하면 성명(聖明)의 아래에 또다시 이러한 일이 생길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도로에 전하는 말은 갑(甲)의 말과 을(乙)의 말이 똑같지 않사오니, 신은 진실로 그 단서를 측량할 수 없사오나 또한 놀랍고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들리는 바와 같이 앞장서서 악행을 저지른 진범(眞犯)이 이미 죽음을 당했다면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파생된 잔당들은 혹 큰 동량의 가운데에 내버려 두어 그 정상의 귀숙(歸宿)이 어떠한가를 징험하여야 할 것이니, 이 또한 전하께서 의연하여 동요되지 않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 되옵니다. 백일(白日)의 광명한 아래에 바른 기운이 충만하면 나쁜 음기(陰氣)와 요괴(妖怪)의 재앙이 어찌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올린 말씀은 모두 이미 성상의 마음에 결정하여 홀로 보고 계신 것인데 감히 다시 번거롭게 아뢰오니, 어찌 반딧불과 횃불의 희미함이 해와 달의 밝음에 보탬이 되고자 한단 말입니까. 그 또한 자신을 헤아리지 못한 행위인 것입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장차 물러가며 대궐을 바라봄에 마음이 달려가므로 소회(所懷)를 아뢰어 큰 은혜에 우러러 보답하려 하옵니다. 그리하여 말하기 어려운 것을 꺼리지 않고 마침내 가슴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모두 아뢰오니, 정성이 이르는 바에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옵니다.”
선생은 상소문을 봉함하여 올리고는 곧바로 시골집으로 돌아와 명령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이 때 선생의 아들 장(樟)이 도성에 있었는데, 당시의 일을 목견(目見)하였으며 선생의 상소문을 받들어 읽어 보고는 민망하고 두려워하여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울분을 느꼈다. 그리하여 즉시 다시 차자(箚子)를 만들고 전일에 올렸던 차자를 함께 봉함하여 올리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전일 호서(湖西)에 이르렀을 때에 병으로 길가에 쓰러져 전진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오니, 낭패하여 근심스럽고 위축되었습니다. 이 때 외람되이 성상의 비지(批旨)를 받자오니, 어리석은 마음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이에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며 병든 몸을 이끌고 장차 물러가려 하였으나 애당초 몸을 분발하여 길에 오른 소원을 저버리게 되오니,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에 서운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날을 지체하면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으므로 엉성하고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글을 지어 한번 성상께서 보시도록 하여, 혹시라도 봄마다 대궐을 향하는 정성을 바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차자를 갖추어 북쪽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여 올려보내고 물러왔습니다.
신은 옛 집으로 돌아온 다음 병세가 계속 이어져 지루하게 혼몽하고 아프므로 아직도 문호(門戶)를 출입할 수가 없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기를 신이 올린 차자가 즉시 성상의 앞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여기옵고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엄명(嚴命)이 내려지기를 공손히 기다렸습니다.
신은 궁벽한 시골에 거주하와 도성의 소식을 얻어 들을 길이 없으므로 신의 차자가 전달되지 못한 것을 최근에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 당시에 신의 개돼지 같은 자식이 서울에 있었습니다. 자식은 신의 차자를 보고는 당시의 의논을 두려워하여 신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염려한 나머지 울부짖고 머뭇거리다가 끝내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다만 신이 자식을 가르침에 의리가 없을 뿐만 아니오라 실로 신이 군주를 섬기는 도리가 형편없는 것이옵니다. 성의가 부족하여 한번 생각한 어리석은 소견을 위로 아뢰지 못했으니, 반복하여 이 일을 생각해 보면 죄가 실로 신에게 있사옵니다.
신은 병든 가운데 근심하고 울분하며 부끄럽고 슬퍼 죽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곧바로 다시 듣자오니 다행히도 성상께서 대처하신 것이 신의 차자와 서로 부합하는 듯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리석고 어려 무지한 것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조처하시고, 자전(慈殿) 별궁(別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자는 의논을 중지하여 다시 말이 없으며, 무고(巫蠱)의 옥사(獄事)에 이르러서도 또한 치죄(治罪)하기를 이미 끝마쳐 연루된 무리들이 혹 완전히 석방되기도 하고 혹 나누어 유배되기도 하였다 하옵니다.
우러러 생각하옵건대 전하의 성스러운 덕이 하늘과 같사옵고 성스러운 효도가 일정함이 없으시니, 아침저녁으로 자전(慈殿)에게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시는 것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실 것이며, 아우에 대하여 부모께서 애처롭게 길러 주신 생각이 깊은 궁궐에 거처하실 때에 스스로 그치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는 모두 신이 전일에 아뢴 것이온데 성상의 마음에 먼저 아신 것이니, 이는 왕화(王化)의 큰 근본이요 도심(道心)의 전체가 되옵니다. 신하와 백성들이 사모하고 바라며 사랑하고 기뻐함과 성주(聖主)께서 깊이 살피고 더욱 힘써야 할 것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차자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심히 한탄할 것이 없사오나 어리석은 신의 의혹이 아직도 스스로 풀리지 않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심정은 심상(尋常)한 말을 가지고 같은 무리에게 부탁하더라도 혹 그 말이 중간에 매몰되어 전달되지 못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서운하여 마음에 불평하옵니다. 더구나 국가의 변고가 보통이 아니어서 군상(君上)이 걱정하고 근심하는 즈음에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신하가 간장을 도려내고 혈성을 짜내어 말씀을 올렸사온데 마침내 잘 가르치지 못한 자식으로 하여금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중지하게 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가령 신이 군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한 가닥이라도 병이(秉彝)의 본성(本性)이 있다면 신의 심정과 일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신하들은 정성스러운 뜻을 쌓아 혹 한 마디 말씀으로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 군주의 덕이 더욱 빛난 경우가 있었습니다. 나무꾼과 목동(牧童)들이 천근한 말을 바치면 지존(至尊)께서 겸허히 받아들여, 사람이 하찮다 하여 말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직 도리만을 찾았으니, 성스러운 덕과 성스러운 효도가 무궁한 후세에 드러남이 혹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신의 차자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어찌 충성을 원하는 신하들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수개월 이래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을 잊고 또한 병이 몸에 있는 것을 잊고서 마음이 울렁거려 우러러 저버린 바가 있는 듯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은 오늘날의 사정이 지난번과 크게 변하였음을 잘 아오나 엎드려 스스로 살펴봄에 아직도 근심스러운 마음이 처음과 같사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다시 머뭇거려 끝내 우리 군주를 위해 한 마디 말씀을 외지 않고 죽는다면 충정(衷情)을 아뢰지 못하고 유한(遺恨)을 펼 수가 없을 것이오니, 비록 지하에 가더라도 여한(餘恨)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귀신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감히 옛 글을 수습하여 다시 한 본(本)을 써서 반드시 성상의 귀를 어지럽히기를 바라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신의 작은 정성을 굽어살피시어, 신이 말한 것이 진실로 정성에서 나와 한 글귀와 한 글자가 모두 옛 증거가 있고 감히 일호(一毫)라도 사의(私意)로써 속이는 것이 아님을 양찰하소서. 그리하여 처리하기를 이미 극진히 하고 이미 아름답게 한 것에 다시 더욱 극진히 하고 더욱 잘하기를 도모하신다면 신이 말한 후세에서 지금을 보기를 지금에 옛 성인을 보는 것과 같이 하여 모두 와서 법을 삼아 본받으려 한다는 것이 참으로 그 이치가 있어 분명함이 불을 보는 것과 같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옛날 군주들이 성스럽고 또 지혜롭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만일 취할만한 말이 있으면 비록 혹 미친 자나 눈이 먼 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곧바로 버리고 대번에 따르기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비우고 아집(我執)을 버린 도량이 어찌 더욱 성스럽고 더욱 지혜로워 군주의 덕에 가장 성대함이 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이 때문에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스스로 저상(沮喪)하지 않고 감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아래에 다시 아뢰고 시끄럽게 떠들어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로지 신의 말만으로 아뢰는 것이 아니오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이 도를 따르고 사람들의 말을 널리 채택하시어 성스러운 덕을 넓히소서.
신은 쌓인 병이 고질이 되고 또 한질(寒疾 감기)이 겹쳐 온몸이 고통스러우므로 기력을 지탱하기 어렵사오나 중도에 그대로 돌아온 마음을 생각하고 또 이 때에 울렁거리는 심정을 생각하와 가슴이 답답하고 격앙되어 스스로 그칠 수 없습니다. 이에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거듭 성상께 아뢰오니, 신은 두려움의 지극함을 다할 수 없사옵니다.”
폐주는 답하기를 “경이 두 번 올린 차자를 보니,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아뢰지 않는 경의 뜻을 훌륭하게 여긴다.” 하였다.
갑인년(1614,광해군6) 봄에 노곡(蘆谷)의 집에 실화(失火)가 있어 서적 수천여 권과 찬집(纂集)한 여러 책이 모두 화재를 면치 못하였고, 오직 《심경발휘(心經發揮)》만이 구출되었다. 선생은 즉시 사천(泗川)으로 옮겨 터를 정하였다.
을묘년(1615,광해군7) 여름에 풍질(風疾)이 갑자기 생겨 오른쪽이 모두 마비되었는데, 침과 약이 효험이 없고 여러 번 목욕을 하였으나 차도가 없었으니, 이는 운수였다. 선생은 비록 고치기 어려운 병환을 앓고 있었으나 또한 일찍이 인간의 일에 마음을 놓지 아니하여 지기(志氣)와 정신이 평상시보다 줄어들지 않은 듯하였으니, 이 어찌 보통 사람으로서 만(萬)에 하나 가능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정사년(1617,광해군9)과 무오년(1618,광해군10) 간에는 조정에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할 것을 청하는 사건이 있었다. 선생은 상소문을 초하였는데 말 뜻이 매우 격렬하고 간절하였으나, 마침 폐주가 유약(柳瀹) 등의 상소에 비답하기를, “옛날 무신년(1608,선조41)에 정모(鄭某)가 은혜를 온전히 하자는 말을 먼저 제창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탈취하였다. 그리하여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다시 은혜를 베풀 곳이 없게 하고 국시(國是)를 혼란시켜 지금에 이르도록 안정되지 못하여 인심이 술렁이고 국세가 위험하니, 멋대로 의논함이 국가에 폐해를 끼침이 이와 같단 말인가.” 하였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는 다시 말을 아뢸 수 없음을 알고 상소문을 올리는 것을 중지하였다.
경신년(1620,광해군12) 정월 1일에 병환이 더하여 점점 위태롭고 심해졌으나 오히려 예서(禮書)를 검시(檢視)함을 폐하지 않았는데, 5일에 유시(酉時)에 사천의 지경재(持敬齋)에서 별세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와 곡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다. 그 전 해에 가야산(伽倻山) 북쪽 모서리가 무너져 내렸으며 별세하던 날 아침에는 사천에 목가(木稼)의 괴이함이 있으니, 사람들은 선생이 별세할 조짐이라고 하였다.
여름 4월 무신삭(戊申朔) 2일 기유(己酉)에 주(州)의 남쪽 창평산(蒼坪山)에 장례하니, 바로 선영(先塋)의 동쪽 간좌(艮坐)의 산이었다. 장례에 모인 자가 4백 60여 명이었으며 경기(京畿)와 호남(湖南), 호서(湖西), 관동(關東)의 선비들도 많이 왔다.
8월에 폐주는 예조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부의(賻儀)를 내리고 제문을 지어 제사하였는데, 이 때 정조(鄭造)가 본도의 감사(監司)가 되어 선생이 별세하였으나 아뢰지 않았으므로 제문에 “부음(訃音)을 늦게 들었다.”는 말이 있었다.
천계(天啓) 3년인 계해년(1623,인조1) 봄에 금상(今上 인조를 가리킴)이 즉위하여 특별히 은전(恩典)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여름에 예조 정랑(禮曹正郞) 전식(全湜)을 보내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를 추증하고 인하여 사제(賜祭)하니, 그 제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령이여 / 有靈
우뚝이 한 세상의 명망을 지니고 있어 / 屹然一世之望
이미 순수한 유자(儒者)가 되었다 / 旣作醇儒
이품의 관직으로 예우하고 / 寵以二品之官
인하여 울창주(鬱鬯酒)를 내려 / 仍釐鬯卣
이 아름다운 명령을 내리노니 / 降玆休命
영령이여 앎이 있기를 바라노라 / 冀乎有知
소미성(少微星)이 정기를 내리고 / 原夫小微降精
맑은 낙동강이 진액(眞液)을 모았도다 / 淸洛鍾液
마음은 아름다운 도에 두어 / 心潛道腴
초연히 외물을 사모함이 없었으며 / 超然無慕於外
다리는 실제를 밟아 / 脚踏實地
탁연히 중도에 섬이 있었다 / 卓爾有立乎中
규모는 먹줄처럼 곧고 수평기처럼 평평하였으며 / 規模繩直而準平
교제하여 만남은 기아(機牙)가 울리고 피리가 응하듯 하였으니 / 際會機鳴而籟應
모든 말과 계책이 / 凡厥聲猷之發
학문에서 나온 것 아님이 없었다 / 無非學問所推
무신년과 계축년에는 / 屬戊申癸丑之年
국가에 인륜의 변고가 있었는데 / 有國家人倫之變
두 번 올린 차자에 은혜를 온전히 하자는 말은 / 兩箚全恩之說
곧은 기운이 한랑 뒤에 한 사람뿐이며 / 直氣寒朗後一人
평생에 간신을 분별한 밝음은 / 平生辨奸之明
선견지명이 노천과 똑같이 아름답다 / 先見老泉與並美
이는 순전히 오랑캐의 세상에 / 純是夷虜之世
우뚝 솟은 돌기둥과 같은 공로이다 / 截然砥柱之功
큰 음악은 화합하기 어려워 / 大音難諧
옛 경쇠와 함께 사수(泗水)에 침몰되었다 / 同古磬之沈泗
깨끗한 의표를 그 누가 취할 것인가 / 淸標誰挹
백 그루의 매화가 동산에 가득하다 / 有百梅之滿園
세도가 비색(否塞)하고 통태(通泰)함의 상승을 / 世道否泰之相乘
한 몸으로 자임하였고 / 以一身而自任
절문이 상세하고 간략함의 다름을 / 節文詳略之有異
여러 학설을 모아 절충하였다 / 輯衆說而折衷
내 생각하건대 사문의 쇠함이 / 言念斯文之衰
오늘날에 이르러 심해져 / 式至今日而甚
도가 장차 버려짐에 / 道之將廢
그 재주를 다 쓰지 못하였다 / 未盡用其才
지금에 죽었으니 / 今也則亡
때가 같지 않은 한탄이 있으며 / 不同時有歎
전형이 아득히 머니 / 典刑邈矣
그리워함에 매우 서운하다 / 懷想惄如
아 슬프다 / 嗚呼
옛 성인을 잇고 후학을 열어주니 / 紹往開後
이미 도를 호위한 공로가 있으므로 / 旣有衛道之功
제사를 지내고 품계를 올려 / 致祭加階
선비를 높이는 법을 보이노라 / 宜示崇儒之典

가을에 고을 사람들이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아뢰어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종사(從祀)하였다.
선생의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은 진실로 빼어나고 특이하였으나 집안 대대로 쌓아온 것을 살펴보면 절행(節行)과 문학의 기맥이 실로 유래가 있었다. 또 한훤당(寒暄堂)의 독후(篤厚)하고 순정(純正)한 덕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그 남은 법을 받듦이 내외손(內外孫)에 구분이 없다. 그렇다면 정씨(鄭氏)의 집안에 주입되고 물들어 이어온 것이 어찌 심상하겠는가.
선생이 가정에서 얻은 것이 이미 이와 같고 또 일찍 사문(斯文)의 종사(宗師)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리하여 퇴도(退陶)의 문하로 들어가 연원(淵源)의 학문을 들어 귀숙(歸宿)할 곳이 있음을 알았으며, 높은 풍도(風度)를 남명(南冥)에게서 전습(傳習)하고 고상한 취미를 대곡(大谷)에게서 이어받아 기개(氣槪)와 지조(志操)를 자뢰하고 도움이 또한 많았다.
세상에 이른바 유자(儒者)들이 한갓 구이(口耳)의 학문에만 종사하고 마음과 몸으로 실천하지 아니하여 다만 부귀와 영달을 얻는 것을 급하게 여길 줄만 알고 일찍이 자신을 위하는 진유(眞儒)의 본업(本業)을 듣지 못한 것은 모두 과거의 병통 때문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과거에 스스로 얽매이지 아니하여 산림에 은둔하고 강호(江湖)에 거처하며 몸소 농사를 짓고 성시(城市)에 은둔한 자들은 간혹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나 저들은 마침내 청고(淸高)함을 숭상하고 현적(玄寂)함을 사모하였다. 그리하여 숨고 궁벽한 것을 깊이 찾아 지나치게 괴이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며,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인륜을 어지럽혀 영영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자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지키는 것을 도리의 지극함으로 여기고 있으나 끝내 한 절개의 선비와 좌도(左道)로 돌아감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성현(聖賢)의 인의 중정(仁義中正)함과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큰 사업을 알지 못하니, 어찌 이들을 참다운 유학자라 이를 수 있겠는가.
선생은 이미 속학(俗學)이 사람의 재주와 성품을 어지럽힘을 알았으며, 또 진유(眞儒)의 사업이 평실(平實)하고 광대(廣大)하여 한 절개와 한 재주로 이름을 이룸에 그치지 않으며 별다른 법식과 이상한 방법으로 상도(常道)에 위반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반드시 옛 성현의 전체대용(全體大用)의 학문을 따라 법으로 삼고자 하였으므로 그 뜻이 일찍이 소성(小成)에 스스로 안주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서 친히 접견한 분으로는 퇴계(退溪)를 표준으로 삼았고, 송(宋) 나라의 유자(儒者) 중에 대성(大成)한 분으로는 회암(晦庵)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마음을 제재하고 몸을 다스리며 집안에 거처하고 관청에 있으며 군주를 섬기고 백성을 대하는 것을 한결같이 두 선생을 법으로 삼았다.
스스로 일찍 가정 교훈을 잃은 것을 영원한 한(恨)으로 여겨 자친(慈親)을 섬길 때에 한결같이 뜻을 봉양함을 효도로 여겼다. 그러나 또한 오랫동안 모시고 받들 수 없자, 스스로 지극히 하고 극진히 한 것은 예로써 장례하고 예로써 제사하는 것일 뿐이었다.
선생은 안행(雁行)에 있어서는 막내였으나 백씨(伯氏)가 일찍 요절하고 중씨(仲氏)가 출계(出繼 남의 집에 양자감)하였으므로 마침내 임시로 제사를 대행하여 몸을 마치도록 스스로 정성을 다하였다.
백씨인 참찬공(參贊公)은 품성이 순수하고 바르며 지행(志行)이 돈후하고 확실하여 원대한 업(業)을 기약하였는데, 조비(祖妣)의 상(喪)을 대행하다가 지나치게 훼손하여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항상 말씀하기를, “우리 두 아우의 인사(人事)는 우리 선백씨(先伯氏)를 따라갈 수 없는데 불행히 일찍 별세하시니, 이는 우리 두 아우가 평생토록 애통해하는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백씨가 아들이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 중씨인 서천군(西川君)과 의논하고 서천군의 셋째 아들인 직(㮨)을 양자로 삼아 뒤를 잇게 하였으며, 또 과부가 된 형수를 한 집에서 받들었는데 섬기기를 한결같이 노친과 같이 하였다. 또 두 조카딸을 시집보내되 정(情)과 예(禮)를 다하였으며, 또 말년에는 백씨의 묘소를 창산(昌山)에서 옮겨 선영(先塋)의 곁으로 반장(返葬)하고 손수 묘지문(墓誌文)을 찬술하였다.
서천군이 대종가(大宗家)로 출계하여 도성에 거주하니, 선생은 매양 따로 사는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오고 가며 서로 만나는 즈음에 사랑하고 화락함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을 보는 자들은 서로 화합함을 기뻐하고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백씨의 행장(行狀) 역시 선생이 지은 것이다.
내외의 조카와 생질들을 보기를 일찍이 슬하(膝下)의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달리한 적이 없었으며, 미루어 동성간(同姓間)에 화목하고 이성간(異姓間)에 화목하며 믿고 구휼하는 도리를 행하여, 만나는 바에 따라 그 정을 다 하였다. 먼 지방의 손님과 벗, 지방의 친척에 이르러서도 오직 힘이 닿는 대로 반드시 구휼하고 반드시 두루하여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다. 선생의 후덕함과 진실한 행실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억지로 힘쓰는 자가 따라갈 수 있겠는가.
선생은 생각하기를, “이 학문의 진결(眞訣)이 진서산(眞西山)의 《심경(心經)》한 권에 모여 있는데 그 주해(註解)를 보면 취사 선택에 분명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등 여러 선생의 말씀 중에 본의(本意)를 발명함이 있는 것을 모아 추가로 넣되 옛날 주석을 줄인 것이 많으며, 또 부록을 붙인 다음 이 책을 이름하여 《심경발휘(心經發揮)》라 하였다. 이것을 정사(精寫)하여 책을 나눈 다음, 원근(遠近)의 동정(動靜)에 일찍이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조석으로 항상 보았으니, 이는 마음으로 체득하고 정신으로 안 것이 아니겠는가.
문하에 이른 선비들에게도 그 사람의 미칠 수 있는 바에 따라 열어 주고 인도한 것이 대개는 이 책 속에서 스스로 체득한 것에 벗어나지 않았다.
선생은 체(體)를 분명히 알고 용(用)을 알맞게 하는 학문을 하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였으므로 나가면 군주를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이 세상을 경륜하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여러 직책을 준례에 따라 봉직하고 주현(州縣)에서 조금 시행한 것으로 말하면 뜻을 지극히 하고 사업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병으로 사퇴한 것이 항상 많았으며, 외지에서 임무를 맡았을 때에는 임기를 마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선조(宣祖) 때에는 비록 불우(不遇)하다고 이를 수 없으나 또한 경륜을 다 폈다고 이를 수 없다. 승진하고 품계를 더한 것도 모두 일에 따라 공로를 보답한 것이었고, 자못 덕이 있는 자에게 명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는 옛 도가 아니었으니, 어찌 선생의 덕에 걸맞는 관작과 지위라 할 수 있겠는가. 폐조(廢朝 광해군을 이름) 때에 있어서는 말이 쓰여지지 못하였으니, 화를 면한 것만도 다행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뜻이 행해졌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선생은 어렸을 때에 스스로 자신의 재주가 충분하다고 여겨 이르기를, “우리 인간은 우주 사이의 허다한 일에 자신의 책임으로 삼지 않을 것이 없으니, 그렇다면 일의 대소(大小)와 정조(精粗)를 막론하고 모두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산수(算數)와 병진(兵陣), 의약(醫藥)과 풍수(風水) 등의 학설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 이치를 연구하여 대략을 터득하였다. 그런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다른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풍월(風月)을 읊거나 아름다운 문장에 치우쳐 내실이 없이 뜻을 상실하는 데로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착실하고 평정(平正)한 글을 지었으니, 말을 만들고 뜻을 운용함이 대체로 주서(朱書)에서 법을 취한 것이 많았다.
옛것을 독실히 좋아하여 이르기를, “천서(天敍)와 천질(天秩)의 떳떳한 법은 오직 고인(古人)이 다하였는데, 고인의 법이 모두 예의(禮儀)와 위의(威儀)의 삼백 가지와 삼천 가지 가운데에 있다. 천 년 이후에 태어나 천 년 위로 거슬러 올라가 마치 그 사람을 접견한 듯하고 그 세대를 볼 수 있는 듯한 것은 고인들이 만들고 행한 예(禮)가 아직 책 속에 남아 있어 지금 또한 상고하여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후세의 사람이 마땅히 어떻게 옛 사람의 몸을 따르고 옛 사람의 도를 행하여 서는 바가 있음을 알고 행하는 바가 있음을 알아 종사하고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처음에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의거하여 한 몸과 한 집안에 준행하였으며, 예는 단 하루도 폐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대전(大全)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주공(周公)의 《의례(儀禮)》와 대씨(戴氏)의 《예기(禮記)》가 있으니, 이것이 바로 원류(源流)이다. 총괄하면 집안과 지방과 나라가 되고 조목으로 나누면 길례(吉禮), 흉례(凶禮), 군례(軍禮), 빈례(賓禮), 가례(嘉禮)가 되니, 이륜(彛倫)을 펴고 의칙(儀則)을 세우는 것이 모두가 여기에 있다. 비록 잔결(殘缺)된 것이 많으나 유추하여 다 알 수 있다. 또 역대에 가감한 제도를 참작하고 양송(兩宋 북송과 남송을 가리킴)의 제유(諸儒)들의 의논으로 질정(質正)한다면 예(禮)의 본말이 이에 갖추어진다.”고 여겼다.
이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은 바로 선생이 말년에 편집하였는바, 종신토록 유념한 것이다. 초(抄)하여 정(定)한 것으로는 관의(冠儀), 혼의(婚儀), 장의(葬儀)와 계의(契儀) 등이 있는데 예를 좋아하는 자들이 지금에 혹 이를 따라 행하고 있으니, 또한 선생의 예학(禮學)을 볼 수 있다.
선생은 김동강(金東岡)과 나이가 서로 비슷하고 거주하는 곳이 또 가까워 젊었을 때로부터 서로 종유(從遊)하여 사귀는 도가 물처럼 간격이 없었다. 뜻이 같고 소견이 부합하여 두 분이 서로 틈이 없어 추존하고 신중(信重)함이 시종 싫어함이 없었다. 남명(南冥)의 높은 풍도(風度)를 추앙하고 퇴계(退溪)에게 정맥(正脈)을 돌린 것은 바로 평소 두 분이 서로 의논하여 정한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동강을 위하여 지은 만장(挽章)에 “하늘이 다하도록 사모하고 특별히 흠모한다.”는 말로 그 경중(輕重)을 다하였으며, 두 번이나 제문을 지어 제사하여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뜻을 나타내었으며 행장을 지어 충정(忠貞)의 도를 드러내었다.
또 동시에 같은 고을에 착한 선비가 많았는데, 가까운 고을에 있어서는 김공 면(金公沔), 박공 성(朴公惺), 곽공 준(郭公䞭)이 가장 추종하며 학문을 강론한 분들이었다.
정인홍(鄭仁弘) 역시 당초에는 정직한 선비로 이름이 났었다. 그는 일찍 남명을 사사하여 고제(高弟)로 일컬어지니, 선생도 평소에 자못 허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이 본래 편벽되고 어두웠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여 언론이 크게 어그러졌다. 선현(先賢)들을 헐뜯고 비방하여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며 좋아하고 싫어함이 사람들의 상정(常情)과 크게 위반되었으므로 선생은 마침내 그와 절교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도리어 감정을 품고 선생을 비방하여 원한을 쌓았다. 그리하여 선생이 별세하자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위안으로 삼았었는데, 그 후 3년 만에 과연 스스로 실패하여 극형을 받고 말았으니, 선생의 취사(取捨)가 분명하고 또 결단성이 있음을 여기에서 대략 볼 수 있다.
선생이 저술한 책으로는 《갱장록(羹墻錄)》, 《성현풍범(聖賢風範)》, 《고금충모(古今忠謨)》,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심경발휘(心經發揮)》,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심의제도(深衣制度)》, 《무이지(武夷誌)》, 《곡산동암지(谷山洞庵誌)》, 《와룡지(臥龍誌)》, 《역대기년(歷代紀年)》, 《고문회수(古文會粹)》가 있는데, 화재(火災)를 당한 뒤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심경발휘》와 《오선생예설》, 《오복연혁도》, 《심의제도》, 《무이지》, 《역대기년》뿐이다.
또 부임하는 고을에는 모두 지(誌)를 만들어 그 고을의 산천과 방곡(坊谷),인물의 사적을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었는데 모두 보전되지 못하였으며, 또 일찍이 한훤선생(寒暄先生)의 《경현록(景賢錄)》을 가지고 자못 추후에 수습하여 모으고 더 기술하여 속록(續錄)을 만들었으나 또한 화재에 불타고 말았다.
저술한 산문(散文)으로 말하면 이미 병화(兵火)의 날에 유실되고 노곡(蘆谷)의 화재에 불타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선생은 평소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뜻이 맞는 곳을 만나면 노닐며 그대로 버리고 떠나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혹 자주 가서 그치지 않았으며, 혹 곳에 따라 서재(書齋)를 두어 머물고 쉬는 장소로 삼은 것이 서너 곳이 넘었는데, 이는 모두 문도들이 마련한 것이었다.
부인(夫人) 이씨(李氏)는 선계(先系)가 광주(光州)에서 나왔는바, 선고(先考) 휘(諱) 수(樹)는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였다. 봉사는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암(嵓)의 6대손인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우(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온순하고 착하고 신중하여 한결같이 선생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는데 선생보다 11년 앞서 별세하였다.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 장(樟)은 급제하여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으나 또한 먼저 죽었으며, 장녀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강린(姜繗)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 노승(盧勝)과 부사(府使) 홍찬(洪澯)에게 출가하였다. 도사는 평안 도사(平安都事) 조광익(曹光益)의 딸을 취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유희(惟熙)는 성품이 효성스러워 선생의 상을 대신 집행하다가 너무 슬퍼하여 요절하였으며, 차남은 유숙(惟熟)과 유도(惟燾)이고딸은 노증(盧增)에게 출가하였다. 강씨(姜氏)는 1남을 두었는데 유징(有徵)으로 생원(生員)이며, 노씨(盧氏)는 1남을 두었는데 형우(亨遇)이고, 홍씨(洪氏)는 1녀를 두었다.
나는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생의 행장을 지으려면 진실로 이 일을 소중히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솜씨를 가리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도(道)를 깊이 알고 덕(德)을 실제로 숭상하며 또 덕행을 잘 표현하는 자가 아니면 어찌 그 붓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나 역시 덕을 숭상하는 정성은 진실로 남에게 뒤지지 않으나 다만 늦게 문하에 이르러 선생의 젊었을 때의 일을 보지 못하였으며, 또 질병으로 쓰러져 일찍이 열흘이나 한 달 동안 강석(講席)의 끝에서 모시지 못하였으니, 평소 행하신 일을 어떻게 자세히 알겠는가. 더구나 스스로 도리를 봄이 이미 정밀하고 깊지 못하니, 또 어찌 선생의 도덕의 성대함을 엿보고 헤아려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이제 잘못된 촉탁을 받고는 스스로 굳이 사양할 수 없으므로 마침내 여러 기록을 의거하여 감히 글을 엮어 만들었으니, 보는 자는 이 대략을 근거하면 또한 다 기술하지 않은 여러 행실을 상상하여 알 것이다. 평상시 가르침으로 문인(門人)들과 수작한 것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각자 사문문견록(師門聞見錄)을 기록해 두었고 또 각기 서술한 장편(長篇)이 있어 평소 심복(心服)한 것을 다 표현하였으니, 이러한 내용은 모두 이 행장에 넣지 않았다.
천계(天啓) 4년(1624) 9월 일에 옥산(玉山) 장현광(張顯光)은 삼가 짓다.
[주-D001] 와룡사(臥龍祠)의 고사(故事) : 
와룡은 중국의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의 호인바, 와룡동이라는 골짝에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을 세운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하지 않다. 《한강집(寒岡集)》에는 와룡암(臥龍菴)으로 되어 있는바, 영유(永柔)에 세운 와룡사(臥龍祠)가 아닌가 생각된다.
[주-D002] 백록동(白鹿洞)의 옛 규칙 : 
백록동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에 있는 골짝인데 주자(朱子)가 남강군 지사(南康軍知事)가 되어 이 곳에 서원(書院)을 설치하니, 이것이 서원의 시초이다. 주자(朱子)는 일찍이 백록동 서원의 학규(學規)를 오교지목(五敎之目), 위학지방(爲學之方), 수신지요(修身之要), 처사지요(處事之要), 접물지요(接物之要)의 다섯 가지로 규정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주-D003]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 
《대학》의 세 가지 강령과 여덟 가지 조목으로,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삼강령,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팔조목이라 한다.
[주-D004] 해유(解由) : 
관청의 물품을 맡아 관리하던 벼슬아치가 교체할 때에 후임자에게 그 사무를 인계하고 호조(戶曹)에 보고하여 책임을 면하는 것을 이른다.
[주-D005] 정순(呈旬) : 
조선조에 낭관(郞官)이 사임할 때 열흘마다 한 번씩 세 번에 걸쳐 사임원서(辭任願書)를 내는 것을 이른다.
[주-D006] 억계(抑戒)의 스스로 경계함과 삼성(三省)의 독실함 : 
억계(抑戒)는 춘추 시대 위(衛) 나라 무공(武公)이 지은 억시(抑詩)로 위의(威儀)를 삼가고 말조심을 강조한 내용이다. 삼성(三省)은 세 가지 살피는 것으로, 증자(曾子)는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살피노니,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면서 충성스럽지 않았는가, 붕우와 사귀면서 신실(信實)하지 않았는가,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을 복습하지 않았는가 하는 일이다.” 하였다. 《詩經 大雅 蕩》 《論語 學而》
[주-D007] 하릉군(河陵君) :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린(鏻), 아우인 하성군(河城君)이 명종(明宗)의 양자가 되어 대통(大統)을 승계하니, 바로 선조(宣祖)이다.
[주-D008] 역변(逆變)이 지친(至親)에서 일어났으니, : 
역변은 반역을 도모한 변고를 이르며 지친(至親)은 지극히 친하다는 뜻으로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 진(珒)을 이른다. 당시 형인 임해군을 왕으로 옹립하여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이에 불안을 느낀 광해군과 그 추종 세력들이 임해군이 역모를 했다고 무함하여 진도(珍島)로 유배시켰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주-D009] 광무제(光武帝)가……편안하게 한 것 : 
반측(反側)은 불안해하는 모양이다. 광무제 유수(劉秀)는 왕랑(王郞)을 토벌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왕랑과 통하여 자신을 비방한 편지 수천 장을 입수하였으나 이것을 거들떠보지 않고 제장(諸將)들을 모아 놓고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반측하여 불안해하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편안하게 하려 한다.” 하였다.
[주-D010] 문제(文帝)의……동요(童謠) : 
문제가 반역을 꾀한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을 촉(蜀) 땅으로 귀양보내자, 유장은 울분을 품고 탄식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한 자의 삼베도 꿰매어 옷을 만들어 서로 입고, 한 말의 곡식도 방아 찧어 나누어 먹어야 하는데 형제간이 서로 용납하지 못한다.”는 노래를 지어 문제를 비난하였다.
[주-D011] 유사(有司) : 
유사는 담당관으로 여기서는 사헌부의 대사헌인 정구(鄭逑)를 가리킨 것이다.
[주-D012] 역월(易月)의 제도 : 
날짜를 달로 바꾸어 계산하여 상기(喪期)를 단축함을 이른다.
[주-D013] 수황(壽皇) : 
송 나라 효종(孝宗)의 존호로 정식 명칭은 지존수황성제(至尊壽皇聖帝)이다.
[주-D014] 무고(巫蠱)의 옥사(獄事) : 
무고는 동물이나 모조품을 만들어 상대방을 저주(詛呪)함을 이르는바, 이 역시 인목대비와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려는 음모에서 날조된 것이다.
[주-D015] 목가(木稼)의 괴이함 : 
목가는 나무나 풀 위에 서리가 내려 눈처럼 된 것을 이른다. 무송(霧松), 수가(樹稼), 수개(樹介), 수괘(樹掛), 수빙(樹氷), 상고대라고도 하는데, 옛날에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재변(災變)이라고 생각하였다.
[주-D016] 노천 : 
송(宋) 나라 때의 문장가인 소순(蘇洵)의 호. 동파(東坡)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의 아버지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3부자가 들어 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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