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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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 홍공(洪公) 신도비명- 홍처량
이조 판서 홍공(洪公) 신도비명- 홍처량(1607~1683)
광주목사(1654.7.14~1656)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약천집(藥泉集)》
약천집 제17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공은 휘가 처량(處亮)이고 자가 자회(子晦)이며 성이 홍씨(洪氏)이고 관향이 남양(南陽)이니, 시조는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열(悅)이다. 5세를 지나 충평공(忠平公) 관(灌)이 있었고 또 5세를 지나 광정공(匡定公) 규(奎)가 있었으니 명망과 덕행과 충성과 공훈이 혁혁하여 서로 이어졌다.
조선조에 들어와 동지성균관사 경손(敬孫)이 있었고, 2세를 지나 관찰사 휘 춘경(春卿)이 있었으니, 문장이 뛰어났고 호가 석벽(石壁)이다. 아들은 도승지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천민(天民)이고, 아들은 금산 군수(金山郡守)로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서룡(瑞龍)이고, 아들은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으로 좌찬성에 추증된 휘 명현(命顯)이니, 이상이 공의 고조와 증조, 조고와 선고이다. 선비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해주 정씨(海州鄭氏)이니, 참판에 추증된 용(鎔)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 40)에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총명과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종조부인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 ) 상공에게 글자를 배웠는데, 일취월장하여 원대한 기국이 될 것을 기약하였다.
경오년 진사가 되었으며, 임신년과 을해년에 연달아 재랑(齋郞)에 제수되고, 정축년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 )에 보임되었다. 기묘년 승정원 주서로 천거되고 한원(翰苑 예문관 )에 들어갔다.
신사년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정언에 제수되어 김영조(金榮祖)를 깨끗한 관직에 의망(擬望)하는 것이 부당함을 탄핵하자, 상은 당색을 표방하여 다른 당파를 배척하는가 의심해서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체직되어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는데, 이후로 비록 여러 번 사헌부에 의망되었으나 여러 해 동안 낙점을 받지 못하였다.
임오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심양(瀋陽)에 갔었는데, 돌아올 때에 그들이 준례로 주는 것을 의주부(義州府)에 모두 남겨 두었다.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직강으로서 기주관을 겸하였으며, 지제교에 뽑히고 홍주(洪州)와 청주(淸州) 두 주의 안핵어사(按覈御史)의 명령을 받았다.
계미년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갑신년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사서(司書)에 제수되었다. 장차 연경에 가려 하였는데, 마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본국으로 돌아왔기에 가지 않았다.
병술년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제수되고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정해년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과 수찬, 교리를 역임하였다. 중간에 헌납 겸 세손강서원찬독(獻納兼世孫講書院贊讀)에 제수되고, 또 이조 좌랑, 겸사서(兼司書), 교서관 교리에 제수되었다.
기축년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고, 경인년 도청(都廳)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해서 암행어사(海西暗行御史)의 명령을 받았다. 신묘년 겸문학으로 승진하였다가 하찮은 일로 파직되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서용되어 사간(司諫)에 임용되었으며, 체직되어 종부시정 겸 편수관(宗簿寺正兼編修官)에 제수되었다. 찬성공(贊成公)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하였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제수되고 집의로 옮겼으나 아직 담제(禫祭)를 지낸 달이 다하지 않았다 하여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갑오년 겸보덕(兼輔德)이 되고 사간으로 있다가 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체직되어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우부승지가 되었다. 봉양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니, 선비와 백성들이 크게 화합하였다.
병신년 승지로 부름을 받고 돌아오자 광주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서 추모하는 마음을 부쳤으며, 대사간과 여러 조(曹)의 참의를 지냈다.
정유년 대부인(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는데 여묘살이하며 상례를 집행하기를 이전의 부친상과 똑같이 하였다. 이로부터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여 상을 벗고는 그대로 선영의 아래에 머물러 비록 소명(召命)이 빈번하였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더욱 공을 등용하고자 하여 이조 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으로 불렀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또 한직(閒職)으로 우대하려 하여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하니, 공은 말씀하기를 “이미 내직을 사양하였으니, 다시 외직을 사양할 수 없다.” 하고 억지로 부임하였다.
계묘년 임기가 차서 들어와 병조를 제수한 명령에 사은하고 다시 옛날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갑진년 또다시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나갔다. 이 고을은 궁벽한 산중에 있어서 매년 세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본래 적었다. 공이 이 때문에 비용을 줄이고 재물을 저축하니, 3년이 되자 곡식 수천 석을 얻었다. 이것을 다른 창고에 별도로 보관하여 흉년에 대비하였는데, 공이 돌아온 뒤에 경술년과 신해년의 큰 기근을 당하여 온 고을이 덕을 보았다. 임기가 차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미원(薇垣)과 옥당의 장관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무신년 묘당에서 특별히 천거하여 예조 참판과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로 올리니, 공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나가 은혜로운 명령에 사은하고 돌아왔다.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제수되었다. 개성부는 정상적인 부세 외에 백성들의 호구를 아홉 등급으로 정해서 매월 쌀을 내게 하여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된 지가 오래였다. 공은 마침내 죄를 짓고 내는 속전(贖錢)과 송사할 때 납입하는 돈, 무당의 세, 공장의 세, 질제(質劑)로 바치는 것 등을 모두 모아 5천여 금(金)을 마련하였다. 그런 다음 사람을 골라 나누어 주고는 10분의 1을 이식(利息)으로 거두어 개성부의 경비에 충당하되 조목조목 나열하여 문서를 만들어서 영원히 후일의 법이 되게 하고 매월 쌀을 바치는 것을 없애니,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은택을 입고 있다. 그리하여 개성의 백성들은 공의 송덕비를 크게 드러내어 새겼다.
경술년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신해년 이조 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우부빈객 전의감제조(吏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世子右副賓客典醫監提調)에 임명되었다. 임자년 내섬시(內贍寺)와 승문원(承文院)의 제조에 제수되었다. 계축년 이조 판서로 승진하였는데, 오랜 뒤에 언로(言路)와 다투는 말이 있어 아홉 번 상소하여 체직되고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갑인년(1674, 현종 15)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니, 공은 예조 판서로서 빈전도감(殯殿都監)과 혼전도감(魂殿都監)의 제조를 겸하였으며, 일이 끝나자 품계가 올랐다.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예조에서는 자의전(慈懿殿)이 인선왕후를 위하여 입어야 할 복제를 의논해서 대공(大功)으로 제도를 정하였다. 이에 영남 사람들이 상소하여 성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키자, 현종(顯宗)은 대신(大臣)과 육조의 판서, 삼사(三司)의 장관들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의계(議啓)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상의 뜻과 어긋나 수상(首相)을 중도부처(中道付處)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공은 모여서 의논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도성 밖으로 나가서 함께 죄를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얼마 안 있다가 현종이 승하하자, 공은 또다시 빈전도감 제조에 임명되었으며 일이 끝나자 품계가 올랐다. 공은 사직하여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어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당인들이 뜻을 얻어서 지난번 빈청에서 예를 의논했던 여러 신하들을 매우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간의 계사가 한 달이 넘도록 이어졌으나 상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로 예론(禮論)을 가지고 형률을 적용하고 종묘에 아뢰어야 한다는 청원이 계속 이어서 나오니, 공도 장차 화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감히 녹봉을 받지도 못하고 감히 멀리 떠나가지도 못하여 문을 닫고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렸다.
병진년(1676, 숙종 2) 나이가 70이 되었다 하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무오년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기미년 강도(江都)에서 투서한 변고가 있었는데, 투서한 내용 중에 재신(宰臣) 아무 아무를 위협했다는 말이 있었다. 공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대궐 아래로 나아가서 한 달이 넘도록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니, 상은 사자를 보내어 대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당시 재상으로 있던 권대운(權大運)과 윤휴(尹鑴) 등은 투서에 들어 있는 여러 신하들을 함께 잡아다가 옥사를 끝까지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시어 이 일이 끝내 중지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 6) 다시 교화가 베풀어지자, 공조 판서와 예조 판서, 삼재(三宰)와 홍문관 제학에 연달아 제수되었는데, 연로하고 병들었다 하여 모두 사양하고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신유년 여러 번 상소하여 치사를 청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계해년(1683, 숙종 9) 3월 서울의 집에서 별세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애도하고 영화롭게 하는 예가 골고루 갖추어졌다. 5월에 적성현(積城縣) 상수역(湘水驛)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례하였다.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정익(廷翼)의 따님이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의 현손이니, 부덕(婦德)이 모두 갖추어져 처음부터 끝까지 잘하였다. 공보다 7년 먼저인 68세에 별세하였는데 공의 묘소 왼쪽에 장례하였다.
5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진사 구성(九成)이고 차남은 부사 구서(九敍)이고 다음은 군수 구령(九齡)이고 그 다음은 구연(九淵), 구용(九容)이며, 장녀는 조묵(趙默)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봉사(奉事) 이홍저(李弘著)와 이홍진(李弘進)에게 출가하였다. 구성은 2남을 두었으니 문도(文度)와 이도(履度)이다. 구서는 3남을 두었으니 상도(尙度)와 병사(兵使) 이도(以度)와 언도(彦度)이다. 구령은 1남을 두었으니 진사 원도(遠度)이다. 구연은 3남을 두었으니 성도(聖度), 신도(信度), 정도(正度)이다. 구용은 1남을 두었으니 위도(偉度)이다. 외손 및 증손, 현손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이처럼 자손이 번성하여 훌륭한 자손들이 뜰에 가득하니, 어찌 공이 스스로 보답을 받는 것이 아직도 다하지 않음이 있어서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루어 미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담박하며 덕성이 깊고 도량이 크며 조행이 견고하고 굳어서, 깨끗하면서도 남을 상하지 않고 빛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온화하면서도 흐르지 않고 유순하면서도 급하지 않았으니, 매우 독실하고 후덕한 군자에 합당하다고 이를 만하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자매와 우애로워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반드시 예를 다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백행(百行)의 근원이요 천륜의 지극함이다. 비록 소원한 친족이라도 그 굶주림과 추위를 마음 아파하여 녹봉을 나누어 주어서 일찍이 미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사람들도 비록 친하고 친하지 않은 차등이 있었으나 언제나 1년에 두 번 위문하는 것을 법도로 삼았으니, 이는 그 참다운 마음과 진실한 덕이 외면으로만 인(仁)을 베푸는 자가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공이 젊었을 적에 이월사(李月沙) 부자는 공의 문장을 지극히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너희 집은 3대가 호당(湖堂)이었는데 앞으로 또다시 이어질 것이다.” 하였다. 장성하자 과장(科場)에서 명성을 날려 과거에 급제함을 턱의 수염을 쓰다듬듯이 쉽게 하였으나 공은 겸손하여 문장을 잘한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말년에 문원(文苑)의 직책을 제수하였으나 또한 굳이 사양하고 머물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공이 스스로 겸손해한 덕이나 의논하는 자들은 공이 미처 대제학이 되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공이 별세하자 자제들이 시문을 수습하여 《북정유고(北汀遺稿)》 약간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가 46년인데, 화려한 관직을 두루 지내어서 밖으로는 수령과 방백을 맡고 안으로는 전형(銓衡)을 관장하였으나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남의 청탁을 받지 않아서 작은 집이 조촐하여 한결같이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사는 집이 소박하고 누추해서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막지 못하였으나 태연하였다.
효종과 현종 무렵의 선배 제공들을 하나하나 열거해 보면 우리 국가를 도와서 비록 각각 훌륭한 명성을 이룬 분이 있기는 하지만, 행실이 충성스럽고 겉과 속이 순수하며 당파를 초월하고 청렴함과 근신함을 지켜서 출세를 추구하는 벼슬길에 초연하여 세상에 때 묻지 않은 것으로 말한다면 진실로 공과 같은 분을 볼 수가 없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도에 있어서는 비유하면 더울 때에는 냉수를 마시고 추울 때에는 따뜻한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이 하여 공이 스스로 앎이 반드시 깊었을 것이니, 후인들이 감히 이렇다 저렇다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의 평소 한가로운 취미와 담박한 뜻은 바로 천부적으로 얻은 것이요, 중년에 10년 동안 초야에 거처함은 진실로 공이 즐거워서 하신 것이다. 그러다가 거류하던 곳에서 돌아와 마침 전형의 자리를 맡았으며 연달아 국상을 만나고 뒤이어 당화(黨禍)가 일어났으니, 이때를 당하여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를 당인들이 번번이 조정을 더럽힌다고 지목해서 비방하는 말을 분분히 하여 위로 성상의 총명을 현혹하였다. 이 때문에 공은 이 당시 어쩔 수 없어서 머뭇거리며 감히 결단하여 떠나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경비(傾否)한 뒤에 이르러서는 지위와 명망이 비록 높았으나 나이가 많고 고질병이 들어서 이미 당세(當世)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경전을 인용하여 떠나가려 하였으나 성상의 은혜로운 뜻이 간곡하셨다. 그래서 비록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봉직해서 나아가 신하의 근력을 다하는 떳떳한 예를 바치지는 못했으나 또한 몸조리를 잘하여 은혜로이 길러주는 성상의 아름다운 뜻을 받들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공은 이때에 조정을 돌아보고 성상을 앙모하여 반드시 떠나가는 것을 고상함으로 여기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공이 전후로 대처함이 또한 각각 때에 맞는 의리가 있으니, 어찌 구차하게 이러했을 뿐이겠는가.
기억하건대, 내가 처음 석갈(釋褐)하고는 기주관으로 승정원에 들어가서 승지로 계신 공을 섬기게 되었는데, 공은 나를 가르쳐 주시고 권장하여 이끌어 주셨으며, 공이 동전(東銓)에 판서로 계실 적에 내가 또 소재(少宰)로 보좌하여 높은 풍모를 익숙히 듣고 훌륭한 덕을 상고한 지가 오래였다. 지금 공의 아들 군수 군(郡守君)이 공의 신도비문을 짓는 일을 나에게 부탁하니, 내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위와 같이 차례로 쓰고 명문을 짓는다.

인조께서 재위하신 지 / 仁祖御國
이십칠 년이었는데 / 卄有七載
많은 선비를 양성하여 / 作成多士
여러 대에 쓰게 하셨네 / 爲用累代
아름다운 홍공이 있었으니 / 有美洪公
실로 이때에 태어나 / 實際斯會
행실로써 안을 삼가고 / 行以飭內
문장으로 밖을 화려하게 하였다오 / 文以華外
윤음을 관장하고 전형을 맡았으며 / 掌綸司銓
겸하여 과거를 관장하였으니 / 重以制科
옥서와 은대에 / 玉署銀臺
군주를 보좌함이 실로 많았네 / 補拾實多
또한 밖으로 나가 / 亦出于外
백성들의 풍속을 무마하였으나 / 撫摩氓俗
풍수의 슬픈 마음 지극하여 / 悲纏風樹
마침내 영화로운 녹봉 사양하였네 / 遂辭榮祿
평소 마음에 간직한 바는 / 雅志所存
한 산과 한 강이었다오 / 一丘一壑
십 년 동안 한가로이 있으면서 / 優游十年
농사 지어 먹고 살았네 / 代食稼穡
마침 반열에 들어왔다가 / 適入班行
시국이 변한 때를 만나니 / 遭時嬗變
후회하는 마음 비록 깊으나 / 噬臍雖深
그물과 덫에 걸리지 않았네 / 罟擭不罥
참소하는 자들 빨리 그침은 / 讒之遄沮
군주의 현명함 때문이었으나 / 維君之明
믿음이 평소 깊음은 / 信之素孚
또한 공의 정성이었네 / 亦公之誠
산과 같이 동요하지 않았으나 / 如山不動
공은 절로 사람들에게 미쳤도다 / 功自及物
세도가 평탄해지자 / 世路云夷
나이가 이미 노년에 이르니 / 年已至耋
힘을 다하여 대열에 나아감 / 陳力就列
억지로 할 수 없었네 / 有不可勉
치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 乞身懸車
또 윤허를 받지 못하니 / 又不得允
차마 곧바로 떠나갈 수 없어 / 未忍便訣
또다시 머뭇거렸다오 / 且復遲遲
나아가고 물러남 어찌 일정하랴 / 進退何常
오직 때에 마땅하게 할 뿐이라오 / 唯適於時
저 상수(湘水)의 물가를 보건대 / 睠彼湘源
옷과 신을 묻은 곳이니 / 衣履攸寄
실로 공이 평소에 / 寔公平日
돌아가고 싶어하던 땅이라오 / 思歸之地
내 명문을 지어서 / 我作銘詩
유허에 나열하니 / 列于遺墟
유풍은 이미 멀어졌지만 / 遺風旣遠
증거하여 믿음은 처음과 똑같으리라 / 徵信如初
[주-D001] 질제(質劑) : 
무역할 때 사용하는 문서를 이른다.
[주-D002] 기미년 …… 있었다 : 
기미년은 숙종 5년(1679)이다. 이해 3월 12일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나온 흉서를 임금께 극비에 아뢰었다. 내용은 다음 계해년(1683, 숙종 9)에 인조반정 60주년을 맞아 소현세자의 손자인 임천군(林川君)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것이다. 재신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허적(許積)을 말한다. 《肅宗實錄 5年 3月 19日》
[주-D003] 삼재(三宰) : 
재신(宰臣)의 반열이 이상(貳相)의 다음이란 뜻으로 참찬을 가리킨다. 이상은 두 번째 정승이란 뜻으로 찬성(贊成)을 가리킨다.
[주-D004] 이월사(李月沙) 부자 : 
월사는 이정귀(李廷龜)의 호이며, 그의 아들은 호가 백주(白洲)인 명한(明漢 : 1595~1645)으로, 이들 부자는 모두 문장으로 유명하여 부자가 이어 대제학이 되었다.
[주-D005] 호당(湖堂) : 
독서당(讀書堂)을 이르는바, 연소한 문관 중에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학업을 연마하게 한 서재이다. 세종 8년(1426)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제도를 만들고, 성종 22년(1491)에 시행하였다가 정조 때 없앴다.
[주-D006] 경비(傾否) : 
비색한 운수를 기울여 형통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숙종 6년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가리킨 것이다. 《주역(周易)》 비괘(否卦) 상구(上九)에 “상구는 비색함을 기울게 하니, 먼저는 비색하고 뒤에는 기쁘다.〔上九 傾否 先否後喜〕” 하였다.
[주-D007] 석갈(釋褐) : 
갈옷을 벗는다는 뜻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함을 이른다. 갈옷은 원래 천한 자가 입던 모포(毛布)인데, 이것을 벗고 관복을 입음을 이른다. 그리하여 벼슬에 처음 입사(入仕)함을 이르는 말로 쓰였으나 후대에는 문과급제한 자에게 모두 새옷을 입혀 유가(遊街)를 시켰으므로 문과에 급제함을 이르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주-D008] 소재(少宰) : 
이조 참판을 가리킨다. 이조를 천관(天官)이라 하는바, 판서는 태재(太宰), 참판은 소재에 해당된다.
[주-D009] 풍수(風樹)의 슬픈 마음 :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비유하는바, 옛날 효자인 고어(皐魚)의 시(詩)에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하였으므로 이 말을 축약한 것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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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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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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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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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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