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묘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성안의(1561~1629) 광주목사, 1611년(광해군 3)에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
갑진년(1604) 가을에 어버이의 병이 있어 창녕에 돌아왔는데, 잇달아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분암(墳庵)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현판을 달아 놓고 슬퍼하고 돌보며 그리워하는 곳으로 삼았다. 거상(居喪)하는 여가에 고을 사람들의 자제를 가르쳐서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고 한다. 상을 마치고 나서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그곳은 규모가 크고 일이 많아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졌다.
5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침(以忱)은 어진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으며, 차남은 이각(以恪)인데 전부인의 소생이다. 3남 이성(以性)은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자급은 통정대부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저명하였다. 4남은 이념(以恬)이고, 5남은 이항(以恒)이다. 다섯 사위는 참봉 이억(李嶷), 사인 박료(朴炓)ㆍ이천표(李天標)ㆍ이문한(李文漢), 문과 급제(文科及第) 권도(權鍍)인데, 5녀는 모두 후부인의 소생이다. 지평이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하(昌夏), 창리(昌李)이다. 이각이 4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응하(應夏), 경하(慶夏), 강하(康夏), 도하(度夏)이다. 통정(通政)이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갑하(甲夏)는 진사이고, 석하(錫夏), 득하(得夏), 용하(用夏)이고, 문하(文夏)는 참봉이다. 이념이 4남을 두었는데, 명하(命夏), 정하(正夏), 시하(時夏)이고, 대하(大夏)는 생원이다. 이항은 아들이 없어 득하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치면 100여 명이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성스럽고, 형제와는 우애로웠으며, 집안의 식솔을 거느리고 빈객을 접할 때 정성과 신의로써 하여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사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공은 관대하고 온후하며 외모가 준수하여 중인(衆人)들이 거인 장자(巨人長子)로 추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하여 통달한 것이 많았고, 특히 심계(心計)를 잘하였다. 관리의 일을 가지고 결정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났으나 대부분 백성을 사랑하고 옛 법을 지키는 것을 힘쓰고, 겉으로 엄하거나 심히 각박한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다. 분수에 편안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당시에 사우(師友)로 교류한 사람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동계(桐溪 정온(鄭蘊)),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여러 노선생이고, 사서(沙西) 전식(全湜)은 막역한 벗이었다.
공이 돌아가신 지 60여 년 뒤에 창녕 사람들이 부용당(芙蓉堂) 곁에 공을 제사 지내고 이공 장곤(李公長坤)과 병향(並享)하니, 이곳은 공이 평소에 강학하던 곳이다. 현일이 뒤늦게 태어나 공을 알지는 못하지만 공이 영해부(寧海府)의 수령을 맡았을 때 나의 왕부(王父) 참판공이 백성의 예로 공을 섬겼고 공이 매우 우애롭게 대해 주셨고, 나의 선인(先人) 형제가 또 공의 제자(諸子)에게 배워서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 익히 듣고 즐겨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전해 듣고 흠모하였었다. 지금 공의 손자 용하가 가첩(家牒)을 받들고 와서 묘지명을 써 달라고 하면서 선대의 교분을 가지고 거듭 요구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서(序)와 명(銘)을 쓴다.
선비가 혹 덕은 넉넉한데 재주가 부족한 경우가 있고 / 士或德優而才歉
그러므로 두 가지를 겸비하기가 / 故兼二者而有之
자고로 어렵다고 하였다 / 自古以爲難
오직 공은 이미 이 아름다운 덕이 있고 / 惟公旣有此德美
또 그 재능이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기에 충분하였다 / 又其才猷足以濟時艱
그 평생에 세운 공을 돌이켜 보면 / 跡其平生所樹立
어찌 이른바 선인 군자가 아니겠는가 / 豈所謂善人君子者邪
아, 지위가 재능을 따라가지 못하니 / 吁嗟乎位不滿能
그것이 명임을 어찌하랴 / 其如時與命何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 제목 | 발행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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