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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 오공(오두인) 신도비명(陽谷吳公神道碑銘) - 여한십가문초 제5권

양곡 오공(오두인) 신도비명(陽谷吳公神道碑銘) - 여한십가문초 제5권, 왕성순(王性淳) 집(輯) ○ 이기소(李箕紹) 참정(參訂) ○ 공성학(孔聖學) 참정(參訂) / 한 농암 김창협(1651~1708) 문[韓金農巖文]

상(上 숙종) 15년(1689) 기사(己巳) 일에 중궁(中宮 민비(閔妃))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판서 양곡 오두인(吳斗寅) 공과 참판 이세화(李世華) 공, 응교(應敎) 박태보(朴泰輔) 공 등 80여 인이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리고 극력 간(諫)하였는데, 오공이 사실상 그 대표였다. 상이 크게 노하여, 세 사람 모두 곤장을 쳐서 원지로 유배 보냈는데, 도중에 오공은 파주(坡州)에서, 박공은 노량강(露梁江)에서 모두 죽고, 이공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6년 뒤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전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중궁을 다시 맞아들이고, 제일 먼저 충성으로 간하다 죽은 두 공을 떠올리고 특별히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오공에게는 의정부 영의정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충정(忠貞)이라 하였으며, 박공에게는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워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하였으며, 사당을 세워 두 공을 제사 지내라 하는 요청에 대해서도 다 허락해 주었다. 이에 국인들이 모두 기뻐하여, 베 짜는 여자와 나무꾼까지도 다 감탄하고 체읍하며 천도(天道)가 안정된 것을 경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는 오히려 두 공이 이공처럼 살아서 중전의 복위를 기쁘게 지켜보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군자로서는 그렇게 생각지 않을 것이다. 신하로서 국모를 위해서 죽는 것은 대의(大義)지만, 옛날부터 이것을 실천한 사람은 적었는데, 이제 두 공이 충성으로 간하다가 죽었으니, 대의가 비로소 밝혀진 것이다. 간하다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것은 다 천명이지만, 죽지 않은 경우는 그 충렬이 덜 드러나며, 타인에게 주는 감명도 깊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두 공이 반드시 죽어서라야 조정의 여러 신하들을 부끄럽게 할 수 있고, 그 간사하게 화(禍)를 꾸미려는 마음을 막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일의 화가 어찌 그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또 성인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처럼 빨리 회복된 것은 두 공의 죽음이 먼저 임금을 감동시켜서가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실로 두 공이 한번 죽은 힘에 의한 것이니, 어찌 슬퍼해야만 할 이유가 있겠는가?
오공의 자는 원징(元徵)이요, 해주인(海州人)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과묵하여 겉만 꾸미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문장력이 있었다. 10세에 그 아버지 천파공(天坡公)을 따라 황해도에 간 일이 있었는데, 중국의 부총(副總) 정용(程龍)이 사신으로 와서 보고 기특하게 여겨 운(韻)을 내어 주고 시를 짓게 하자, 붓을 잡자마자 바로 써서 한(漢)의 정불식(程不識)에 견줄 만했다. 정공(程公)이 크게 놀라 감탄하고 진귀한 폐물을 많이 주었으나, 공은 모두 사양하고 단지 부채 한 자루만을 받았다. 정공이 더욱 소중히 여기고, 훗날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게 될 것이라 말하고, 그의 시를 《황화집(皇華集)》에 실어, 공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무자년(1648, 인조26)에 진사 초시(初試)에 일등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오르게 되었고, 기축년(1649, 인조27)에는 별시(別試)에 장원으로 뽑혀 성균관 전적, 병조와 예조의 낭관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의 지평, 장령, 집의, 사간원의 정언, 헌납, 사간, 홍문관의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효종 때에는 각도에서 노비(奴婢)를 추쇄(推刷)함에 독촉하고 사찰함이 엄격하였으며, 삼남(三南)에서는 진영장(鎭營將)을 두어 자주 조련(操練)을 행하였으며, 또 대비전(大妃殿)을 위해 궁전을 수리하려고 하였다. 공이 정언(正言)으로서 재해 건으로 상소를 올려 그 폐단을 말하였다. 또 얼마 후에 다시 동료들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추쇄를 완화하고 형옥을 신중히 시행하며, 간쟁(諫諍)을 받아들이고 신하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상소하였다. 상은 그 충직함이 간신(諫臣)으로서 체모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그후 형옥의 건에 대해 약간 편치 않은 뜻을 나타내어 공이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자 수일 뒤에 상이 여러 간관을 불러 위로하는 말씀을 하시고 스스로 그 실언(失言)을 책하였다. 공이 나아가 감사 드리고, 계속해서 전번 차자의 내용대로 시폐(時獘)를 다시 진언하며, 또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말[馬]을 임금이 몸소 임해 훈련시키는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자,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대사간 유철(兪㯙)이 간언한 일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형을 받고 멀리 귀양을 가게 되자, 공이 지평(持平)으로서 여러 차례 간하다가 상의 노여움을 사서 면직되었다. 정언으로 있을 때에, 한 궁노(宮奴)가 신문(訊問)하는 매를 맞고 죽었는데, 내수사(內需司)에서 형조의 관리를 치죄하기를 청하였다. 공은 내관이 형리의 죄를 청하는 조짐이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 죄를 다스리도록 요청하였는데, 그 요청대로 시행되었다. 현종 때에 헌납(獻納)으로 있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수성(修省)하고 절약하며 학문에 힘쓰고 어진 자를 예우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당시의 폐단 몇 가지를 개진하였는데, 모두 다 받아들여졌다. 상이 열병(閱兵)을 하려고 할 때, 공이 홍문관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천재(天災)가 있어 기근과 돌림병이 자꾸 나타나니 출입하는 절도를 삼가서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하자,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금부(禁府)에서 가두어야 한다고 아뢴 일에 대해 상은 특지(特旨)를 내려 경하게 하고 중하게도 하자, 공이 사간으로서 그래서는 안 됨을 논하였다. 또 금부가 아뢴 바대로 고집하지 못한 것은 맡은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탄핵하니 상이 노하여 면직시켰다. 뒤에 다시 집의(執義)로서 무지개 이변을 가지고 상소하였다. 그 내용은 재이(災異)가 혹심한 터에 상하가 모두 예사로 알고 늘 하던 대로 정령(政令)을 내는데, 마땅히 먼저 학문에 힘쓰고 착한 마음을 길러 신명을 대하듯 하여 수성(修省)의 근본을 삼고, 조종(祖宗)에서 어진 이를 초빙하고 찾아가는 근실성을 본받아 상하의 정이 통하도록 할 것, 거짓 노비 장부가 친척과 이웃에게까지 점점 미치어 팔도에 극심한 폐단이 있으니, 마땅히 속히 사정(査正)을 행하여 백성의 어려움을 풀어 줄 것, 대비전의 진연(進宴)과 온천의 행차는 모두 부득이 하지마는, 경우에 따라 줄여서 백성의 힘을 아낄 수 있도록 할 것을 극력 간한 것이었다. 또 밀린 옥사를 해결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풀어 주고, 언로(言路)를 열어서 충언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였다. 수백 마디 말로 간절한 내용을 반복해서 아뢰자, 상은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셨다. 청나라 사람이, 우리가 약조를 위반했다며 사신을 보내 따져 결국 금전을 배상하는 벌로 결말이 났다. 그러자 양사(兩司)에서 함께 대신들이 죽음으로써 감당해 내지 못해 욕이 상감에게까지 미치게 한 데 대해서 탄핵을 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몹시 노하여 말한 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그 상소문을 받아 올렸다고 하여 승지까지 옥에 가두었다. 공이 마침 홍문관에서 당직을 하다가 그날 밤으로 차자를 올려 간쟁하였고, 다음날 또 동료들과 함께 면대하기를 청하여 극진히 논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공은 뜻을 꺾지 않고, 물러나서 다시 차자를 올렸다. 또 뒤에 다시 더욱 간절한 말로 신하들의 복직을 주청하였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았다.
공이 전후로 삼사(三司)에 가장 많이 근무하였고, 또 오래 있었는데, 일이 있을 때마다 거론을 할 때면 상의 뜻에 거슬리는 것이라도 피하지 않았고, 또 지나치게 남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도 않았으며, 오직 잘못을 바로잡기만을 주장했을 뿐이다. 간혹 시강원의 사서, 문학이 되기도 하고, 성균관의 직강, 사성이 되기도 하였으며, 상의원, 제용감의 정(正)이 되기도 하였고, 두 번이나 사국(史局)을 겸하여 인조와 효종 두 임금의 실록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삼자(三字)의 직함을 띠고 나가서는 경상 도사(慶尙都事), 고산 찰방(高山察訪), 해운판관(海運判官), 북청 판관(北靑判官),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냈고, 그사이에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가기도 했으며, 또 호남 지방에 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도사가 된 것은 영남의 유생들이 재차 시험장을 어지럽게 하자 특별히 공을 보내서 진정시키도록 한 것인데, 마침내 무사하게 되었다. 고산 찰방이 된 것은 한 현관(顯官)으로 경솔한 자가 있어 배척을 하였는데, 이조에서 그 사람을 두둔하고 도리어 공을 내쳐서 권세를 보인 것이었다. 북청으로 나간 것은 장령(掌令)으로 있다가 갔는데, 당시 서울에 무뢰배들이 있어 무리를 지어 칼을 품고 다니면서 싸움을 하였다. 공이 포리(捕吏)를 보내어 체포하도록 하였는데, 왕손 집안의 종도 그중에 끼어 있었다. 공에게 부탁하여 사정을 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더욱 급히 체포하게 하였다. 하루는 지평 민유중(閔維重) 공과 함께 조정에서 물러 나오다가, 어떤 사람이 민공의 어자(御者)를 때려 피를 보게 하였다. 공은 왕손 집의 종이 자신을 원망하여 해치려다가 그 사람이 잘못 맞은 것임을 알고, 즉시 민공과 같이 부중(府中)에 앉아서 급히 잡아 신문하다가 마침내 매를 맞아 죽게 했다. 그 일이 알려지자 상이 노여워하여 둘 다 면직되었으나, 곧 승정원의 진언으로 제자리에 복직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사헌부에서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둘 다 외딴 시골로 좌천이 되었다. 대신과 삼사(三司)가 서로 연달아 힘써 구제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공은 그날로 부임하여 마음을 다하여 봉직하였고 조금도 좌천된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사(御史)가 되어서는 여러 진군(鎭軍)의 실정을 검열하도록 명을 받고 있었는데, 도신(道臣 관찰사)이 어떤 읍의 수령에게 사정(私情)을 두어, 전에 이미 병기(兵器)의 일로 위에 잘 보고하여 승진이 되어 있었는데도, 이번에 또 공에게 잘 보아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이 그 읍에 도착해 보니 사실은 그와는 반대로 아주 형편이 없었다. 공이 바로 위에 보고하여 치죄하게 하였으나, 간관은 공이 도신을 함께 탄핵하지 않은 것을 허물하여 파직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내 서용(敍用)되었다. 정미년(1667, 현종8) 겨울에 영녕전(永寧殿) 수리도청랑(修理都廳郞)으로서 공을 세워 통정(通政)에 오르고, 곧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승지로 승격되었다. 얼마 있다가 상소하여 한 고을을 얻어 나가서 모친을 공양하고, 또 스스로 최선을 다하자 드디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임지에 가서는 토호(土豪)들을 누르고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자제들을 교육하고 학교를 일으키며, 검약하고 절약하여 축적에 힘썼다. 때마침 신해년(1671, 현종12) 대기근에 이것을 풀어 구휼하여 백성이 굶어 죽는 것을 면하였다. 조정에서는 타읍의 유민(流民)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으나, 공은 집을 더 짓고서 유민들을 맞아 먹임으로써 많은 무리를 살렸다. 감사와 어사가 보고하여 포상하도록 하자, 상은 말[馬]을 내려 주고 또 더 유임하여 백성의 희망에 따르도록 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병조의 참지, 참의, 승지를 지냈다. 병진년(1676, 숙종2)에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질환이 있다가 회복하였는데, 시약(侍藥)에 힘쓴 공로로 가선(嘉善)에 올라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이 되고, 한성부 우윤, 호조와 형조의 참판, 행판결사(行判決事)를 역임하였고, 그사이에 부사(副使)로 연경에 가기도 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는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로서 역모의 옥사를 국문하는 데 참가하여 한 자급 승진되었고, 도승지와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그사이에 나가서 경기 감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 겨울에 특별히 공조 판서에 제수되고, 개성 유수로 나갔다가 얼마 안 가서 바뀌었다.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상(喪)에는 능상(陵上)을 감동(監董 역사(役事)를 감독함)하여 정헌(正憲)으로 승진하였고, 한성판윤 겸 지의금도총관에 임명되었으며, 병인년(1686, 숙종12)에는 평안 감사로 나가게 되었다.
공은 부지런히 청정(聽政)하고 은혜로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는데, 봉급 이외에는 실 한 오라기도 개인적으로 취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서도(西道)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청렴함을 칭송하고 있다.
앞서 공의 둘째 아들 오태주(吳泰周)는 현종대왕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정묘년(1687, 숙종13) 여름에 공주가 죽자 상은 특별히 벼슬을 쉬고 돌아가 보살피도록 하였으며, 드디어 지중추부사에 명했는데 기사년(1689, 숙종15) 봄에는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공은 젊어서 과거에 수석 합격으로 등조하여 청화(淸華)한 관직을 거쳤으나, 본래 성품이 겸손하고, 또 붕당을 지어 나라를 병들에 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항상 깨끗하게 자기의 분수만을 지킬 뿐 세상에서 어울려 지내려고 하지 않았다. 뛰어난 의론을 잘 세워서 세상의 추중하는 바가 되었으며, 오직 날마다 문을 닫고 책을 읽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통정(通政) 이상이 되어서는 대개 한산한 자리에 많이 있었고, 그 아들이 부마(駙馬)가 되자 더욱더 겸손한 태도를 지녀 조정의 시의(時議)에는 하나도 간여하지 않았다. 이때에 군소배들이 정권을 잡고 계속 큰 옥사를 일으켰는데, 공은 지의금부사로 세 번이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자, 당국에 회부하여 관직을 삭탈하였다. 4월에 상이 중궁을 폐하도록 하교하니, 공이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네 조정의 후한 은혜를 입고 공경 재신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내 어찌 죄를 입고 물러나 있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편지로 동지 몇 사람을 모아 함께 상소할 것을 의논하였다. 박공도 마침 여러 명사들과 이 일로 회의를 하던 참이라, 공이 있는 곳을 듣고 거기에 와서 모였다. 혹자는 상소문의 글이 너무 준열하면 아무 이익도 없고 해만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공은 이르기를,
“사태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는데, 죽음을 걱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소문이 들어가고도 어둡도록 비답이 내리지 않자, 공들이 모두 대궐 밖에서 명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공이 말하기를,
“우리가 설사 그만두고 흩어져 간다 해도 한 조정에 있는 것이니, 한 번 상소하고 말 게 아니라 우리의 요청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합시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아마도 공의 말과 같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하였다. 과연 밤 이고(二鼓)에 상은 급히 보여(步輿)로 인정문(仁政門)을 나와 정국(庭鞫) 설치를 재촉하니, 유사(有司)는 그것을 준비하느라 겨를이 없었고, 대궐 내외가 진동하였다. 공과 이공이 먼저 붙들려 오고 박공이 그 뒤에 왔다. 좌우에서 보는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고, 공은 또 늙고 병든 데다 몸이 약해서 사람들이 더욱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의 행동거지는 태연하기가 평일과 다름없어 보였다. 당시에 임금의 노여움이 대단히 심하여 그 화를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둘러서서 바라볼 뿐 입을 다물고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이 공의 상소가 흉악하고 참혹하다고 지목하여, 공이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으나, 말의 조리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날 사형을 감해 의주(義州)로 귀양 보내라는 명을 받고 겨우 출옥하니, 서울의 남녀가 길을 메우고 떠들썩하게 앞을 다투어 편여(箯輿) 앞에 나가 충신의 면모를 보고자 하였다. 끝내 작고하자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그때 나이가 66세였다.
공의 신장은 6척이 못 되며 용모는 온화해 보이고 입은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 같지만, 일단 변을 당해서는 충절로써 자립하여 신하의 도리를 드러내고 사람의 기강을 세워 백세에 전할 만하였기 때문에, 군자들이 그가 지킴이 있었던 것을 믿게 되었다. 상소하는 일을 방금 의론할 때, 어떤 이는 공의 처지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주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자제들도 이런 이유로 울면서 간했지만 공은 다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더러 그가 특히 벼슬이 높기 때문에 앞장섰다 하니 감개하고 분발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임을 어찌 알겠는가?
공의 증조는 휘가 오정방(吳定邦)이요, 경상 병사(慶尙兵使)이다.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폐하기 위하여 백관을 위협하여 정의(廷議)를 열었을 때에, 대답해서 말하기를,
“신은 무부(武夫)로서 《사략(史略)》 제1권의, ‘잘 다스려 간악한 데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한 구절을 읽었을 뿐입니다.”
하여 듣는 자가 장하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조부의 휘는 오사겸(吳士謙)으로, 종친부 전부(典簿)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효성스럽기로 유명했다. 천파공(天坡公)의 휘는 오숙(吳䎘)으로, 벼슬은 경상 감사를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문장과 정사(政事)로 이름이 있었으나 일찍 작고하여 더 이상 쓰이지는 못하였다. 어미는 증 정경부인 고성 이씨로, 병조 참판 휘 이성길(李成吉)의 딸이었다. 공은 원래 천파공의 아우 사복시 주부 증 이조 판서 휘 오상(吳翔)의 아들이었는데, 이 부인에게 아들이 없어 그 후사(後嗣)가 된 것이다. 공은 세 번 장가 들었는데, 여흥 민씨(驪興閔氏) 판서 민성징(閔聖徵)의 딸과 원주 김씨(原州金氏) 감역(監役) 김숭문(金崇文)의 딸은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고, 상주 황씨(尙州黃氏) 부사 황연(黃埏)의 딸은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자녀는 5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 오관주(吳觀周)는 생원(生員)이고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딸 중에서 군수(郡守) 남택하(南宅夏)의 처는 민씨의 소생이고, 직장(直長)으로 있는 아들 오정주(吳鼎周)와 시집가기 전에 죽은 딸 하나는 김씨 소생이며, 오태주(吳泰周)ㆍ오진주(吳晉周)ㆍ오이주(吳履周)와, 현감(縣監) 김창열(金昌說), 수찬(修撰) 최창대(崔昌大), 김영행(金令行), 이재(李縡)에게 시집간 딸들은 황씨 소생이다. 남택하는 진사인 남도규(南道揆), 남도진(南道振) 두 아들과 민승수(閔承洙)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 김창열은 2남 1녀, 김영행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나이가 어리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독실한 효성으로 50년간 어머니를 모시면서, 그 뜻을 조금도 어긴 일이 없으며, 늙어서 중부(仲父) 지사공(知事公)을 모셨는데 예절을 잘 갖추었다. 평생 가산(家産)을 묻지 않았고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종족으로 그 집에 더부살이하는 자가 늘 10여 인이 있었다. 관리로서의 본분을 엄격하게 지켜 감히 누구도 사사로이 청탁할 수가 없었는데, 늘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와 선배들의 훌륭한 일을 이야기하기 좋아하여, 듣는 자가 지루한 줄을 몰랐다. 공은 5월 7일에 작고하였고, 7월 9일에 장사 지냈는데, 장지는 양성(陽城) 천덕산(天德山)의 선영 손향(巽向 건방(乾方)에서 손방을 말함)으로 하였다. 나는 젊어서 공과 가까이한 것은 아니나, 공이 작고한 뒤 내 딸을 공의 아들 오진주(吳晉周)에게 시집보내게 되었다. 이제 도위공(都尉公)이 공의 묘 앞에 비를 세우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남에게 묘지명을 써 주지 않는 줄을 잘 알지마는, 한집안 같은 사이에는 다 거절하지는 못할 터라, 제 동생이 그대의 사위가 된 것을 빙자해서 감히 요청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여러 번을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다음과 같이 묘명을 적는다.
옛날에 사람을 볼 때엔 / 惟古觀人
으레 마지막 절개를 보는 법 / 必觀末節
평상시에 선비는 누구라도 / 士方平居
높은 절도 보이지만 / 罔不揭揭
변고 닥치면 / 變故臨之
자립하는 자 적도다 / 鮮能自立
오직 공의 진실함 / 惟公恂恂
안으로 독실하게 지조를 지키네 / 內篤操執
뽐내지 않고 꾸미지 않으며 / 不矜不飾
다투어 달리지 않도다 / 不競而馳
물러나 조용히 거하니 / 退然而居
세상에 아는 사람 없도다 / 衆莫之知
그러나 의를 위해 일어서면 / 及其奮義
그 용기 맹분과 전저가 무색하네 / 勇奪賁諸
그 의리가 무엇인가 / 其義伊何
곤극을 도와 일으켰도다 / 坤極之扶
신하들 조정에 가득하지만 / 有臣盈廷
나라에 화가 있음을 다행으로 알아 / 幸國之禍
구할 생각 아니하고 부채질하여 / 匪匡伊助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부었도다 / 如膏於火
공이 불길 뒤집어쓰고 / 公犯其焰
죽음으로써 충성하여 / 以死易忠
강상(綱常)을 드높이고 / 揭是彝常
간흉을 징계했네 / 懲彼奸凶
이에 나라가 바로 서니 / 國與有立
이치는 끝내 틀리지 않네 / 理罔終忒
임금의 마음 잘못을 깨달아 / 宸心悔悟
태양같이 빛나고 / 如日斯赫
휘황한 우리 유적 / 煌煌褕翟
곤의를 회복했네 / 復我壼儀
왕은 말하기를, 슬프다 / 王曰噫歟
충신을 생각하니 / 忠臣予思
무엇으로 추증할꼬 / 何以贈之
상공의 존엄함을 / 上公之尊
무엇으로 정표할꼬 / 何以旌之
정문을 세웠다네 / 棹楔于門
추증하는 법을 크게 갖추니 / 追典大備
구천에 영광이라 / 榮施九幽
자초지종 따져 보니 / 自初幾時
6년 세월 흘렀도다 / 木行半周
누가 말했던가, 하늘은 / 孰云皓天
반드시 천추에 돌아온다고 / 必千秋返
충성을 하려는 모든 사람들아 / 凡欲爲忠
마땅히 이것을 알고 힘쓰라 / 尙宜知勉
풍성한 비석 높이 섰네 / 豊碑屹屹
적성산의 등성이에 / 赤城之崗
시를 짓고 깊이 새겨 / 作詩深刻
길이 길이 빛내고자 / 用昭無疆
[주-C001] 김창협(金昌協) :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안동인(安東人)이다. 숙종 임술년(1682) 문과에 장원, 벼슬은 홍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D001] 정불식(程不識) : 
한(漢)나라 사람으로 처음에 장락위위(長樂衛尉)를 지냈는데 나중에는 이광(李廣)과 더불어 변군(邊郡)의 태수가 되었다가 호(胡)를 쳐서 일시에 명장이 되었다. 《漢書 卷54 李廣傳》
[주-D002] 삼자(三字)의 직함 : 
봉조하(奉朝賀)를 말한다. 봉조하는 종이품(從二品)의 관리가 벼슬을 그만둔 뒤에 임명되던 벼슬이다.
[주-D003] 그때 나이가 66세였다 : 
‘그때 나이가 66세였다[時年六十六]’가 《농암집(農巖集)》에는 빠져 있다.
[주-D004] 경상 병사(慶尙兵使) : 
《농암집(農巖集)》에는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되어 있다.
[주-D005] 감역(監役) : 
《농암집(農巖集)》에는 ‘학생(學生)’으로 되어 있다.
[주-D006] 맹분과 전저 : 
맹분(孟賁)은 전국 시대의 용사(勇士)로 물속에서는 교룡(蛟龍)을 피하지 않았고, 육지에서는 호랑이를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노성(怒聲)을 발하면 하늘까지 울렸다고 한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진 무왕(秦武王)이 용사를 좋아하여 제나라 맹분의 무리가 갔는데 맹분은 소뿔을 산 채로 뽑을 수 있었다.” 하였다. 전저(專諸)는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이다. 오의 공자(公子) 광(光)을 위하여 왕료(王僚)를 죽이고자 비수를 고기 뱃속에 숨겨가지고 들어가 그를 찔러 죽였으나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주-D007] 유적(褕翟) : 
유적은 황후(皇后)의 제복(祭服)을 말한다.
[주-D008] 곤의(壼儀) : 
곤의는 곤전(坤殿)을 말한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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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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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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