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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광송선생지천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40(화암동)

해광송선생지천(海狂 宋先生支阡)은  송자대전해광집에는 海狂處士宋公墓表로 기록되었고, 해광송선생지천석곡수원지 위 관광도로 동쪽에 있던 묘비를 옮겼다.

호남에는 옛날부터 으뜸가고 위대하며 어질고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세상을 잘못 만나 포부를 가진 채 그것을 실현시켜 보지 못하고 죽어 오래도록 뜻있는 선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로는 해광처사(海狂處士)만한 사람이 없다.
처사의 휘(諱)는 제민(齊民)이요, 자는 이인(以仁)으로 홍주(洪州)사람이다.
왜구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찌르고 죽이는 것을 그치지 않고 왕가의 무덤마저 파헤치는 일이 생긴 데 통분하여 수만언(數萬言)이나 되는 긴 상소를 올렸었다. 그 문장이 호방하고 거침없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를 바라보고 원수를 생각하여 바른 의기가 솟아오르도록 하였다. 공의 원대한 계책은 이전에 당했던 원수를 잊고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욕된 일로 생각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병사를 기르는 일을 핵심으로 보아 간간이 기이한 책모를 내었다.
또 그것을 가지고 책 한 권을 내었으니 와신기(臥薪記)라는 책이었다. 도를 담당한 지방관에게 그 책을 상진(上進)했으나 그 지방관은 내용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음을 이유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세상을 잊고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또 그런 선생에게 맞지 않는 일들을 중한 일로 생각하고 열심히 전념했다. 스스로 ‘해광(海狂)’이라는 자호를 지었다.
그가 죽고 나서 사위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한사(漢師)에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와서 통곡하고서는 공의 탁월했던 평생의 언행들을 종이에다 기록하기를 “우리 장인어른은 명성이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하였다.
처사는 가정(嘉靖) 28년에 태어났으며, 성미가 얽매임이 없었다. 9살 때 난리가 생겼다는 끔찍한 소문을 멀리서 듣고 맨발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발이 아프고 기운이 다한 데다 먹지 못한 날이 5일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모시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자 죽만을 먹으며 3년 동안 통곡하였다.
후에 성현(聖賢)들의 책을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역경(易經)에 조예가 깊었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좇아 배웠는데 토정 선생은 ‘한 글자에도 만 가지로 변하는 이치가 존재한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공은 그 가르침의 뜻을 끊임없이 깊이 생각하였다. 이후 그렇게 깊이 생각하던 도중 서석산(瑞石山)에 들어가 정좌(靜坐)에 들었다가 마침내 깨우쳐서 말하길 “이는 낙서법(洛書法)을 두고 한 애기니 주자(朱子)가 말한 ‘조기변수지용(肇其變數之用)’이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공은 직접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편한 대로 하기를 즐겼다.
하지만 예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하여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당에 알현하고 부부가 서로 외출하거나 집에 들어올 때 마주 절하여 배웅과 마중을 하였다. 남자 종은 내정(內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여자 종은 공이 직접 물건을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여러 아들들을 가르침에 있어 대단히 엄격하여 비록 딸이라도 반드시 소학, 효경, 열녀전을 외워야 했으니 석주 권필의 아내가 어렸을 적에 이상의 글들을 공부하는 데 조금이라도 태만함이 보이면 걱정이 되어 꿇어 앉혀 놓고 “내가 좀 안 본다고 게을리 하면 되겠냐?”라고 나무라곤 했다.
공의 고모가 먼 곳에 거처하고 계셨는데 공은 반드시 한 달에 두 번은 가서 살펴 드리곤 하였다.
한번은 공이 사당에 있는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바다의 섬들을 두루 둘러보고자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사당을 대단히 근신하는 태도로 섬기고 있어서 공의 행동에 놀라 다투어 공을 제지하였다. 공은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때 갑자기 인부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에 공이 글을 지어 하늘을 책망하여 말하길 “나무를 쪼개 배를 만드는 일은 헌원씨(軒轅氏)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라고 하자 죽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살아났다. 배가 다 만들어지자 그것을 타고 바다로 들어갔는데 여러 차례 바람을 만나 거의 뒤집힐 뻔하고, 사나운 호랑이가 무리를 지어 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섬에 다다랐으나 배는 부서져 돌아갈 길이 끊겨 7일 동안을 먹지 못했는데도 죽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배가 멀리서 나타나 다가왔는데 공은 이때에도 기쁜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왜구가 다가오자 양산룡(梁山龍), 양산숙(梁山璹) 등과 기의군(起義軍)을 조직하였다. 의병대의 간부들로 추대 받은 자들은 건재 김천일,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의 여러 현자들이었다. 당시 충용 김덕령이 상을 당하여 집에 있었는데 공의 중표제(中表弟)가 되었다. 공이 집에서 나와 의병대를 이끌라고 북돋았다. 또 공은 제주도에 들어가서 준마를 구해다가 충용에게 주었다. 충용이 이에 격려 받아 몸을 일으켜 의병대를 이끌자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또 공은 왜적과 맞싸우는 관군진영에 가서 천병(天將) 양총병(楊總兵)을 만나 보았다. 본래 양 총병은 공이 왜적의 첩자가 아닌가 오해하여 공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였었다. 더군다나 공이 민간인인데도 전쟁사(戰爭事)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태연자약한 것을 보고 양 총병은 더더욱 의심하였다. 감찰(監察) 민순(閔恂)이 마침 양 총병의 군영에 왔다가 급히 양 총병에게 “이분은 동국고토(東國高士) 송(宋) 아무갭니다.”라고 고했다.

양 총병은 놀라 일어나 직접 포승줄을 끌러 주고 자리로 모셔와 왜적과 싸울 때 사용할 책략에 대해 물었다. 공이 말하길 “병가에서는 지형 상 우세한 위치를 점하는 것을 좋은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급히 진을 옮기라.”라고 했다. 하지만 양 총병은 공의 말을 듣지 않았고 조금 후 과연 패하였다. 공은 병이 위독하게 되자 주위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부축해서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하여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북쪽으로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공경의 뜻을 표한 후 죽었다. 이때가 만력 임인년(壬寅年) 2월 27일이었다. 묘는 광주 서석산 능성동(綾城洞) 간향(艮向)의 평평한 곳에 썼다.
공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증조부는 기손(麒孫)으로 관직은 현감이었고, 조부는 구(駒)로 관직은 사헌부 감찰이었다. 공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정황(庭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냈으며, 돌아가신 어머니는 김씨였고 그 아버지는 윤경(允敬)이었다.
공이 처음에 아내로 맞은 여자는 박씨였는데 눌재(訥齋) 상(祥)의 손녀요. 감역(監役)을 지낸 민고(敏古)의 딸이었다. 이어서 얻은 부인은 김씨니 무공낭(務攻郞) 대형(大亨)의 딸이다. 공은 자녀를 넷 두었는데 타(柁)는 박씨 소생으로 대단히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왜적이 침입해 왔을 때 잡혀 배에 실렸었는데 틈을 타 왜구의 칼을 빼앗아 쳐 죽였다. 거의 다 죽였을 때에 한 왜적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다른 왜적들에게 알리고 다른 왜적들을 데려오니 타는 이에 스스로 바닷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두 딸의 남편들은 양원용(梁愿容)과 김극순(金克純)이다. 타 이외의 공의 다른 세 아들 장(檣), 익(榏), 즙(楫) 및 석주 권필에게 시집간 딸 그리고 양효용(梁孝容)에게 시집간 딸은 둘째부인 김씨의 소생이다.
장(檣) 역시 행적이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부모를 모시고 왜구를 피해 산속에 들어갔다가 적이 부모가 숨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숲 속에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도망쳐 유인했다. 따라서 왜적들에게 잡혔지만 부모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간 후 적장이 그를 아껴 미녀 세 사람을 아름답게 분장시켜 송장에게 마음대로 고르도록 했다. 하지만 송장은 끝내 받지 않고 이후 일본에 온 조선 사신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상과 같은 행적은 형 타와 함께 석주 권필이 기록한 글에 기재되어 있다. 송타의 손자 후(堠)는 진사였다.
공은 본래 당시의 세상사를 다스리는 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공부를 그만두고 제민(齊民)이 되어 스스로 자를 ‘사역(士役)’이라고 짓고 평생을 지냈다.
아! 공이 가지고 있는 포부와 재능으로 세상에서 쓰임을 받았었다면 틀림없이 그가 이룬 사업은 볼만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한 채 그냥 죽었으니 하늘이 공을 낳았던 뜻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그가 작성하였으나 결국 왕에게까지는 전달되지 못한 상소 속에는 공이 품고 있던 대의가 명백히 드러나 있으니 해옹(海翁)이 말한 “하늘 아래 땅 위에 떳떳한 백성은 당장 가시적인 보답을 받지 못해도 만세가 지난 후에 틀림없이 보답을 받아 세상에 그의 떳떳한 행적이 게시(揭示)되어 사람들이 알게 된다. 또한 그럼으로써 왜 나라에 가서 고국에 대한 애국심을 망각한 채 다시 군신관계를 맺은 흐리멍덩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라는 얘기가 공의 경우에 적합하다. 또한 그렇게 생각할 때 공도 이 세상에 백 년 동안 허망하게 왔다 갔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다.
옛날 한문공(韓文公)이 딸을 이름난 사람에게 시집보내고서는 사돈집 사람의 묘비를 써 준 일이 있었지만 석주 권필을 사위로 맞아 권필이 공의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공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게다가 공의 행적은 사실 석주 권필과 같은 명인이 훌륭한 문장으로 써서만이 아니라 그 행적 자체로 지금과 이후에 혁혁히 빛날 수 있으리라! 비록 그렇지만 석주 권필이 없었다면 이와 같이 오늘날 공의 행적이 밝혀질 수 있었겠는가. 내 경우 이렇게 공의 묘표(墓表)를 쓰게 된 이유는 장(檣)의 손자 규(奎)와 진곡(眞谷) 박상현(朴尙玄)이 와서 간곡히 묘석(墓石)에 새길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썼다. 송시열이 짓고, 기우만이 쓰다.


湖南古多魁偉賢俊之士其不遇而抱負以死長爲志士之痛者又無如海狂處士者也處士名濟民字以仁洪州人當倭寇創殘之餘痛憤陵寢之變上疏數萬言其文汪洋放肆使人望洋而其義正其猷遠益以忘讐修好爲辱保民養兵爲要而間有奇謀異策出於意表者又爲一冊子名曰臥薪記請於道臣以進則道臣格不聞遂乘舟入海與世相忘耕鑿訓誨高尙其事自號曰海狂益旣歿而女壻權石洲韠自漢師千里來哭錄其平生言行之卓卓者書在紙上曰庶幾吾舅名不沒於後世也處士生於嘉靖己酉負氣不羈九歲其考凶音遠至徒步卽發足繭氣竭不食者五日事母夫人至孝反喪歠粥三年後讀聖賢書最湥於易從李上亭之菡游土亭謂曰有一字萬變之理公潛思不置後至瑞石山入靜乃悟曰此洛書法豈朱子所謂肇其變數之用者耶然他人莫得其詳也公不事生産樂弛置自便然甚謹於禮日必早起謁廟夫婦必相拜出入迎送男僕不敢入內庭與女僕不親受授敎諸子甚嚴雖女子必通小學孝經列女傳石洲內子少時氣或惰慢則惕然危坐曰豈可以暗昧惰行乎姑母遠居必一月再往省嘗欲斬祀木爲舟徧游海島邨人事祀甚謹爭來止之公不聽忽役夫多立死者爲文以責之曰刳禾爲舟制自軒轅死者皆立蘇舟成遂入海遇風幾覆者數又猛虎群吼而略不怖嘗之一島舟敗路絶不食七日而猶不恒死忽有船自遠而至而亦無喜色倭寇至與梁山龍山璹等謀起義旅所推者金健齋千鎰趙重峯憲高齊峯敬命諸賢也時金忠勇德齡丁憂在家公中表也公勉起之又入濟州求駿馬以授之忠勇旣起.賊不敢近又往見天將楊總兵元楊疑其爲倭諜將加害公神氣自若楊固異之矣關監察純適在楊營急告曰此東國高士宋某也楊驚起自解縳引坐問策公曰兵家以得地形爲策急宜移陣楊不聽俄而果敗公疾革命左右扶起正衣冠北向長跪而卒是萬曆壬寅二月二十七日也墓在光州瑞石山綾城洞艮向之原公之系曰曾祖麒孫官縣監祖駒司憲府監察考庭篁文科正字妣金氏其考允敬也公初娶朴氏訥齋先生祥之孫監役敏古之女繼媲金氏務功郞大亨女男女各四人柁朴出也甚有孝友行倭寇時被執載船乘機奪倭劒擊殺之殆盡有一倭投海而泅率衆倭以來遂自投水二女壻梁愿容金克純也檣楫榏及女適石洲及梁孝容者金出也檣亦奇士奉父母避倭山谷賊迫父母所匿自林藪出走故爲倭所得以免其父母旣入日本賊將愛之妝美女三人使自擇終不肎受後從信使歸國與兄柁俱載石洲所記柁孫爲進士公始以濟物濟時爲心旣知其不能則於其名去偏傍爲齊而字曰士役益曰士不能得時行志則寧爲編戶服田以供賦役而已何必獻賦求仕哉此公之平生始卒也噫以公之志之才爲世所用則其事業必有大可觀者而只恁麽死了天之所以生公者抑可意歟.然其未達之疏大義炳然晦翁所謂天經地義民彛萬世必報者昭揭宇宙亦以愧夫南渡委靡之君臣公亦不可謂虛過百來年者也昔韓文公以女嫁名人刻人之墓公之以意氣相感得石洲爲壻亦足以畱名況其赫赫者著見於今與後自耶雖然微石洲烏能闡發如此哉檣之孫奎介於朴眞谷尙玄來請墓石之文云時崇禎栴蒙赤奮若孟春恩津宋時烈述奇宇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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