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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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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한원-세심당이선생유적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1990년, 2005년세심당이선생유적비(洗心堂李先生遺蹟碑)는 1990년에 세웠다가  을축년에 훼손되어 2005년에 다시 건립했다. 호남인물지 광주편에는 자(字)는 청경(淸卿), 호(號)는 세심당(洗心堂), 본관은 광산(光山)고려 충숙왕 때 문과상서좌복야(文科尙書左僕射) 순백(珣白)의 5세손으로 조선 세종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 선제(先齋)의 3남이다. 세종 32년에 생원을 지내고 단종 1년에 문과 장원으로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조참의(吏曺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역임하고 정헌대부예조판서(正憲大夫禮曺判書)에 추증되었다.(광주지. 광산군지. 능주읍지)옛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비문은 더 간략하다.부군의 휘(諱)는 한원(翰元)이요, 자(字)는 청경(淸卿)이요, 호(號)는 세심당(洗心堂)이니 그 선계(先系)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后裔)이다. 고려 현종조(顯宗朝)에 휘(諱) 종금(宗金)이 거란을 토벌한 훈공(勳功)으로 군(君)에 봉(封)하니 광산이씨(光山李氏)가 실(實)로 이 때에 비롯되었다. 왕실계통(王室系統)으로 현관대작(顯官大爵)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울연(蔚然)히 동방(東方)의 거족(巨族)이 되었다. 휘(諱) 순백(珣白)에 이르러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영남(嶺南)의 걸출(傑出)한 선비로서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를 역임하였고 경신년(庚申年)에 충숙왕이 토번(吐蕃 티베트)에 유찬(流竄)되자 오직 공(公)이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元)나라에 글을 보내서 누대(累代)의 정의(情誼)를 극진히 진언(陳言)하여 드디어 풀려나게 되니 충숙왕이 이로써 녹훈(錄勳)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封)하고 충장(忠莊)의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바로 중시조(中始祖)가 되신다.자(子)에 휘(諱) 기(奇)는 중현대부(中顯大夫) 단양부령(丹陽府令)을 지내고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증직(贈職)되었으니 공(公)의 고조(高祖)이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홍길(弘吉)이요, 호(號)는 퇴은(退隱)이니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文人)으로 벼슬은 밀직제학(密直提學)·개성윤(開城尹)·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조(祖)의 휘(諱)는 일영(日暎)이니 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를 지내고 호남의 석학(碩學)으로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실려 있으며, 고(考)의 휘(諱)는 선제(先齊)요, 호(號)는 필문(蓽門)이니 경학(經學)에 널리 통하여 원근(遠近)에서 모두 선생으로 존숭(尊崇)하였다.세종(世宗) 기해년(己亥年)에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에 발탁(拔擢)되어 계묘년(癸卯年)에 사관(史官)·수찬(修撰)·검토관(檢討官)에 배수(拜授)되고, 임술년(壬戌)年)에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병조(兵曹)·예조참의(禮曹參議)·강원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으며, 무진년(戊辰年)에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갔다.돌아와서 다시 공호조참판(工戶曹參判)을 거쳐 문종 경오년(庚午年)에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좌부빈객(左副賓客)·경창부윤(慶昌府尹)에 배수(拜授)되었으며, 왕명(王命)을 받고 고려사·고려사 절요(節要)·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編纂)에 참여하니 임금이 그 상모(狀貌)를 그려서 어소(御所)의 병풍(屛風) 뒤에 붙였고, 순조(純祖) 경진년(庚辰年)에 강진 수암서원(秀巖書院)에 봉향(奉享)하였다.비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보성선씨(寶城宣氏) 절도사(節度使) 중길(仲吉)의 여(女)로 5 남(男)을 두었으니 모두 출중(出衆)한 재지(才智)와 덕행(德行)을 갖추었으며, 공은 제 3자(子)로 세종 병지년(丙辰年) 3 월 20 일에 태어났다.공(公)은 어려서부터 뛰어남이 범상(凡常)하지 않았고 천성(天性)으로 타고난 효우(孝友)와 탁월한 예지(叡智)는 일찍이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부형(父兄)의 엄(嚴)한 가르침을 받고, 또 점필제(?畢齊 김종직) 문하(文下)에서 성리학(性理學)을 탐구(探究)하여 엄하게 스스로 자기 몸을 닦는 방법을 세우니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능히 대학의 덕문(德門)에 들어가고, 능히 중용(中庸)의 도(道)를 닦는 자는 오직 청경(淸卿)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단종 계유년(癸酉年)에 문과에 장원(狀元)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除授)되고 갑술년(甲戌年)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거쳐 을해년(乙亥年)에 이조참의(吏曹參議)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얼마 후에 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오로지 학문만을 닦고 당시의 명유(名儒)들과 교유하며 때로는 혹 한가하면 동산을 배회하며 시냇가에서 바람을 쐬고 소영(嘯詠)하면서 심회(心懷)를 화창하게 펴고 흉중(胸中)을 깨끗이 씻으니 그 수연(愁然)한 의태(儀態)와 강의(剛毅 굳셀 의)한 기상(氣象)은 사람들이 감히 그 한계를 엿볼 수 없었다.중씨(仲氏)가 마음으로 유독 사랑하여 공(公)의 자(字)를 청경(淸卿)이라 지어주고 그 당호(堂號)를 세심당(洗心堂)이라 이름하니 또한 5 형제가 화락하게 지냈던 정경을 엿볼 수 있다.성종조(成宗朝) 갑진년(甲辰年)에 조정에서 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중종조(中宗朝) 정묘(丁卯年) 10 월 2 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뒤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되고 당시 사자(祠字)에 배향하자는 의훈이 있었으나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배(配)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유한정정(幽閑靜貞)한 덕행을 갖추어 능히 부군(夫君)을 승순(承順)하니 사람들이 세상에서 드문 여사(女師)라 일컬었다.공의 묘는 창평(昌平) 도두원(道頭院) 갑좌원(甲坐原)이라고 이르나 임진난으로 인하여 실전(失傳)되고 만산동(萬山洞)에 소재한 군수공(郡守公)의 묘상(墓上)에 제단(祭壇)을 모셨다. 오호라! 공은 첨품(天稟)이 매우 고매하고 기자(氣字)가 유연하며 학문은 부사(父師)의 연원(淵源)이 있고 덕행은 형제간에 화순하는 지정(至情)이 있었다. 안으로 그 심덕(心德)은 너그럽고 넓으며, 밖으로 그 행실은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을 대하고 사물을 처리함에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었으니 거의 평생을 천시(天時)에 따르고 명의(名義)에 처(處)하는 군자(君子)였다.4남(男)을 두었으니 장남(長男) 지선(止善)은 생원이요, 차남(次男) 창선(彰善)은 진사(進士)요, 삼남 삼선(三善)은 문과(文科)로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통례원(通禮院) 상례(相禮)·홍문관(弘文館) 제학(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사남 사선(思善)은 문과(文科)로 현감(縣監)을 지냈다.손(孫)에 염(廉)과 노최련(盧崔連)의 처(妻)는 장자의 소생(所生)이요, 공우(公佑)·공좌(公佐)와 김윤신(金允信)의 처(妻)는 차자의 소생(所生)이요, 공건(公建) 생원 교수(敎授)와 공검(公儉) 승의랑(承議郞)과 이량(李良)의 처는 3 자의 소생이며, 연종(延終), 이원량(李元良)의 처와 이윤수(李允粹)의 처는 계자(季子) 소생이다. 이 밖에 자손들은 사승(史乘)과 보첩(譜牒)에 찬연(燦然)하니 여기에 모두다 기록하지 않는다. (중간 생략)                산 높고 물 깊어 철인(哲人)이 태어나니                 청풍(淸風)과 밝은 달 그 덕이 아름답네.                높은 뜻 빼어나 세상에 우뚝하고                덕교(德敎)는 천인(天人)을 꿰뚫어 무궁하리. -세심당 묘지명 중에서
    2018-06-11 | NO.17
  • 장렬사유적비
    광주시 북구 효령동 636(우곡마을)1957년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蹟碑)는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대로변에 있다. 金亨在 짓고 具哲祐 쓰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큰길가에 세워 놓은 유적비이다. 장렬사는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06년 유림들에 의해 현재의 광주 두암동에 위치하여 김유신 장군 등을 배향하고 있는데 처음 장렬사가 있던 곳에 이 비를 세워 놓았다. 비문 앞에는 '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跡碑)'로 되어 있는데, 장열사유허비로 통용되어 사용하고 있음을 이 비의 소유자인 장열사유적보존회를 통해 알 수 있었다.<광주읍지>에는 장렬사(壯烈祠) 유허비(遺墟碑)라 했다.후손(後孫) 김기주(金基柱)가 이 비를 세워 좌찬성(左贊成) 완산(完山) 이용원(李容元)의 음기(陰記)가 있다.
    2018-06-11 | NO.16
  • 정경렬공유허비
    광주시 동구 동명로14번길 19-4 옛 경렬사 터(동명동)이 정경렬공유허비(鄭景烈公遺墟碑)는 광주 두방면(斗坊面)의 고비명(古碑名)이다. 원촌리(院村里)에 있다. 현 동구 동명동이다. (조선지지자료)
    2018-07-03 | NO.15
  • 정지-경렬공 정지장군 사적비
    광주시 북구 경렬사길 46(망월동) 경열사1980년광주시 북구 경렬사길 46(망월동) 경열사1980년이 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景烈公鄭地將軍事蹟碑)는 경열사에 있다.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썼다. 민족의 전통이란 결코 하루아침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랜 역사를 거쳐서 되는 것이니 우리 해군 전통도 역시 그러하다.이미 삼국시대부터 高句麗와 百濟의 해군이 모두 다 강성했거니와 新羅에 있어서는 儒禮王 6年(289)부터 戰船을 건조했으며 眞平王 5年(583)에는 船府署를 두어 해군과 戰船을 관장했고 말엽에는 張保皐가 강대한 해군을 거느리고 동양 삼국을 제패했으며 高麗의 王建 太祖와 後百濟의 甄萱도 실상은 다 해군 지휘자들이었다.그랬던 것이 李氏王朝 시대로 들어온 뒤에 차츰 文弱에 기울어져서 壬辰亂 같은 큰 국난을 당했지마는 위대한 영웅 李忠武公이 일어나 해전 사상 역사적인 대승첩을 거두어 나라를 건져낼 수 있었거니와 그도 실상 오랜 해군 전통을 계승한 데서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그러면 李忠武公에게 이어진 우리의 해군 전통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 전통의 산맥 속에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는 또한 누구였던가. 高麗 말엽 해군의 영도자 바다의 영웅 鄭地 장군이 바로 그이시다. 恭愍王 때 中原 대륙에서 元나라와 明나라의 세력이 서로 바뀔 무렵 그 틈을 타고 일어난 紅巾賊들이 大軍을 이끌고 침구해 들어왔고 또 元의 후예 納哈出과 女眞의 三善三介가 침구해 오기도 했으며 高麗의 王室이 부패해짐에 따라 恭愍王이 시해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는 한편 무엇보다 가장 큰 나라의 걱정은 倭寇였던 것이니 倭寇란 日本 연해안 流浪民으로 對馬 壹岐를 근거로 한 해적들인데 우리는 식량과 물품으로 회유도 하고 또 武力으로 응징도 했으나 高宗 이후로 倭寇들의 무수한 침구와 약탈이 끊일 사이가 없더니 鄭地 장군이 그들을 섬멸함으로써 해군의 전통을 확립시켰던 것이다.鄭地 장군은 본관이 河東이요、高麗 忠穆王 3年(1347) 丁亥에 錦城山 榮山江의 정기를 타고 羅州에서 났으니 첫 이름은 准提요. 어려서부터 모습이 장대하고 史書들을 즐겨 읽어 大義를 통했으며 19세에 司馬 장원 20세에 文科 급제 28세에 中郞將이 되었다.恭愍王 마지막 23년 장군은 28세로 왕을 모신 速古赤로서 倭寇 평정 책을 올려 全羅道 按撫使가 되고 다시 이어 상소를 올리되 섬에서 생장한 자들과 水戰을 자원하는 자들로서 해군을 편성하여 五년만 훈련시키면 연해안을 맡기겠다 하였으나 실시되지는 못했었다.다음 해 禑王 元년에 倭寇 두목 藤經光을 죽이려다 실패한 뒤부터 倭寇들은 더 난폭해져서 禑王 3年 장군 31세 되던 해 여름 順天 樂安을 침구하므로 장군은 禮儀判書로서 順天道 兵馬使가 되어 그들을 무찌르고 겨울에도 목 베고 사로잡아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듬해에 倭寇들이 靈光 光州 등지를 침략하므로 그 뒤를 쫓았더니 적들이 玉果縣 彌羅寺로 들어가므로 불을 질러 모두 타죽게 했다. 36세 때 海都元帥가 되어 鎭浦로 들어온 적들을 소탕한 뒤에 戰船들을 새로 건조하여 왕으로부터 金帶와 白金 五十兩을 받았고 때마침 유행병으로 죽은 군사들을 모두 알뜰히 장사지내 주었으며 장군도 병에 걸리자 왕은 특별히 散騎 河忠國을 보내어 위로했다.禑王 9년 37세 때 적선 120여척이 慶尙道로 들어오자 合浦 元帥 柳曼殊가 급히 알리므로 장군은 戰船 47척을 이끌고 급히 蟾津에 이르렀더니 적들이 南海 觀音浦로 들어가 엿보는지라. 그러나 日氣不順으로 風雨가 尤甚하매 將軍은 곧 사람을 智異山神祠에 보내 기도를 올리자 바람 자고 비도 멎어 장군의 전투사상 최대의 격전 끝에 가장 통쾌한 대승첩을 거두고 海道都元帥 楊廣全羅慶尙江陵道 都指揮處置使로서 諸道에 戰船들을 건조하여 海寇를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우리 해군의 위용을 자랑했던 것이다. 禑王 14년 42세 때 李成桂의 遼東 정벌에 같이 종군했다가 중도에서 回軍하자 倭寇들은 그 틈을 타서 南原까지 쳐들어오므로 장군은 그리로 달려가 58級을 목 베고 말 64필을 노획하니 사람들이 장군 아니었다면 3道 백성들이 모두 죽을 뻔했다고 칭송했었다.그러나 장군의 마지막 운명은 기구하여 昌王 元년 43세 때에 禑王을 복위시키려는 金佇 등과 관련되었다 하여 慶州로 귀양 갔었고 다시 李成桂를 반대한 尹彝 李初 등과 연계되어 淸州獄에 갇혔더니 하늘의 돌보심인지 큰 홍수가 나서 저절로 풀려나온 몸이 되었다.그 뒤 回軍한 공로로 2等錄券과 논 50結을 하사받고 석방되므로 光州 別業으로 물러나있었는데 判開城府事로 召命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被召不赴) 향년 45세로 세상을 여의니 恭讓王 3年(1391)10月 15日이었고 光州市 北區 淸玉洞(望月洞)에 禮葬되었다.李朝 太宗 2年 壬午에 景烈이라는 謚號가 下賜되고 墓域 環山 15里와 祭田 五結이 賜牌地로 내려졌다. 장군은 실로 한 시대의 인물이나 또한 문중의 인물만이 아니요 겨레 전체의 영원한 인물이다. 장군의 영전에 삼가 찬송을 바친다.文武를 겸하시고 지혜 용맹 갖추시니.한때의 인물이리까 역사의 영웅이외다.戰艦을 만드시고 해군을 기르시어전통을 세워 주시니 바다의 영웅이외다.사나운 도둑 떼들 장군이 무찌르시니그 은혜 잊으오리까 겨레의 영웅이외다.자기 한 몸 돌보 잖고 나라만을 위하시니진실로 우러러 받들 거룩한 영웅이외다.시대가 바뀌어도 그 정신 빛나시니우리들 가슴마다에 깊이 새길 영웅이외다.장군은 이같이 우리 해군 전통의 초석이 된 역사적 인물이었건마는 뒷사람들이 높이 받들 줄 모르다가 仁祖 32년(1644)에야 3道 선비들이 全南 光州에 景烈祠를 창설하고 장군을 제사 모시더니 高宗 8년(1871)에 大院君의 서원 폐쇄령에 의하여 철훼되었고 뒤에 羅州 老安面 金安里에 사당을 옮겨 모시고 제사를 받들어 왔다.그러다 1974년 봄에 사단법인 鄭地 장군 유적보존회를 창립하고 1977년에 사당 중건에 착공하여 1980년에 준공함과 동시에 光州市 望月洞 장군의 묘소를 우러러보는 곳에 이 사적비를 세우며 거액의 국비와 지방비로써 보조해 주신 정부 당국에 감사를 드린다.後學 文學博士 鷺山 李 殷 相 짓고、 一中 金 忠 顯 씀1980년 12월 일後孫 周 永、 進 基 삼가 세움<추기>경렬공정지장군사적비는 경남 남해에 또 하나가 있다. 이 비는 정지장군유적보존회와 임진성기념사업회, 남면문화재보호위원회의 감수를 받아 1977년 가을에 남해군 남면 상가리 579-1번지 임진성기념각 전정에 세워 보존 관리해 오던 중 기념각은 폐허가 되고 주위는 잡초에 묻혀있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당시 종친회장인 20대손 정인규씨께서 복원을 추진중 남해군과 협조하여 2004년 4월 하순 임진성 주변으로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2018-06-11 | NO.14
  • 지산사유허비
    광주시 남구 지산재길 51(양과동 715-1) 지산재 뒤1985년이 지산사유허비(芝山祠遺墟碑)는 1985년에 세웠다.
    2018-06-11 | NO.13
  • 지암대종사 조계종창종사적비
    광주시 서구 마륵복개로150번길 22(치평동)지암대종사(智庵大宗師) 조계종창종사적비는 향림사 경내에 있다. 지암대종사는 우리나라 최초 사설유치원 건립(강릉포교당 금천유치원),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참사 (대한민국 원년 12.29), 태고사(조계사)를 창건했다.
    2018-06-12 | NO.12
  • 진천사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진곡동 진곡마을1935년이 진천사유허비(眞泉詞遺墟碑)는 김동수가 찬했다.진천사 유허비는 진곡동 진곡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사우는 임진왜란(1592)때 소실되었고 현재 당시의 구비 2기와 새로이 대리석으로 개각된 비각이 단장되어 있다. 유허비의 초건 시기는 숭정기원후 을해(1635)에 해당된다.진천사는 손재 박광일(1655~1723)을 기리는 사당이다. 광산구 하남동부터 오선동까지 손재로는 그를 기리는 도로명이다. 손재 박광일은 학문에 전념하여 책에 통하였고 태극 음양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였다. 손재는 왕자사부와 시강원자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30대에 기사사화(조선 숙종 때 소의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로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 등이 일어나자 어지러운 세상이 싫어 평생 시골에 살면서 학문과 도덕과 의리를 넓히는 데 힘썼다. 사람들은 그의 학덕을 기려 광주 진천사와 강진 남강사에서 제향하고 있다.2015년경 진곡산업단지가 건설되면서 진천사유허비는 이전할 예정이었다. 진곡마을에 오성재와 후암정(2016년 무너짐)이 있고 직진하면 가작마을 농로를 따라 산을 돌면 진천사가 있었다. 유허비가 옛것과 새것이 있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리중) 於當世湛樂齊閔先生諱師夏亦以忠信之資聞風興起受業于遜諸先生與之淵源師友者也文肅公以經世之才兼賁國之文故 恭靖大王擬爲大用而天下假壽自 上甚悼惜醴流源長奎星緊精於一門之內諸名德崛起爰有井世之閔先生相孚樹量錦?闕臭光耀於百載豈不盛歟遺風餘韻與山水俱長故湖南章甫追寓其義墻 英廟中祠享于眞洋洋陟降?或如在世敎丕變至有大同?院之禍矣識者奈飮痛何自後遺址荒??廢殆不辨識正朱夫子所歎沼平臺傾鞠爲灌恭樵兒牧子嘯歌擲?於其上者是也行路指點至有咨嗟永歎夫使人心如此者果何如哉鄕省人士懼彌久而彌失其處立小石以識之?幸後日天日復彰則豈無攘剔?祐起立門庭以復其舊者歟諸先生事績?見於國采野史欲知諸先生者斯可考焉遜齊先生之後孫魯宣致多士意竭文於顧惟不敢曠感之梁不能以老昏辭 崇禎紀元己亥五月 日 通訓大夫行弘文館侍讀 金東洙 謹識
    2018-12-01 | NO.11
  • 창효각 彰孝閣
    남구 군분로77번길 26 부근   남구 주월2동 월산마을(명지아파트 뒤)은 마을 주변이 소구릉의 야산으로 둘러진 곳에 자리한다. 남구 주월동과 서구 풍암동 사이의 노인고개라고 부르는 왼편에 난계정蘭溪亭이 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월산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짚봉산 등산로와 갈라지는 첫길 왼편으로 오솔길 따라 100여m 가다 보면 뽕나무밭 뒤에 채소밭보다 높은 곳에 창효각彰孝閣이 있다. 중추원의관난계김공이상비(中樞院議官蘭溪金公彛常碑)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다.  
    2020-03-16 | NO.10
  • 청심당이선생유적비(淸心堂李先生遺蹟碑)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2002년청심당이선생유적비(淸心堂李先生遺蹟碑)는 2002년에 세운 것으로 행주 기우하가 글을 쓰고 17세손 이상휴가 글씨를 쓰고 후손인 화순의 이계휴, 이원휴와 강진의 이문한이 건립했다.
    2018-06-11 | NO.9
  •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산 239(충민사)1982년이 충민공전상의장군정려각유허비(忠愍公全尙毅將軍旌閭閣遺墟碑)는 충민사 부근 전상의 장군 예장석묘 입구인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산 239에 세워져 있다. 충민공 전상의 장군의 충신정려각은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화산마을에 세워졌으나 제 2 순환도로로 인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대리석으로 제작하였고, 국한문혼용체로 음각되어 있다. 현재 천안김씨문중 소유이며, 비문은 양성인(陽城人) 이종일(李鍾日)이 지었고, 천안후인(天安后人) 김운령(金雲靈)이 썼다.비문 이 遺墟趾는 全尙毅 將軍의 忠臣旌閭閣이 建立되어 있던 곳이다. 全尙毅將軍은 西紀一六二七年 丁卯胡亂때 龜城府使로 安州城 싸움에서 最後까지 싸우다가 殉節하였다. 將軍의 字는 希元이요 號는 龜城으로서 本貫은 天安이다. 始祖 歡城君 聶의 四五世孫이며 天安府院君 樂의 一六世孫으로 容의 아들이다. 西紀一五七五年 二月 一七日 光州郡 陶泉面에서 태어나 一六0三年에 武科에 及第하고 內外官職을 두루 歷任하였다. 一六一七年七月 吳允謙과 같이 回答使로 日本에 건너가 壬辰倭亂때 붙들려간 一五0餘名의 同胞를 送還해 오는데 큰 功을 세우고 內禁衛預差로 奉職타가 一六一八年 八月에 禦侮將軍에 任命되었고 李适의 亂이 平定된 뒤 龜城府使로 左營將을 兼하였다. 一六二七年 一月一四日 淸나라 太宗이 三萬 大軍을 이끌고 義州에 侵入하니 南以興 金浚과 安州城을 防禦케 되었는데 將軍은 中營인 百祥樓에 陣을 치고 五日間 敵과 싸웠으나 勢窮力盡하여 最後까지 싸우다가 殉節하였다. 이로써 仁祖는 江華島로 世子는 全州로 避難할 수 있게 한 戰功으로 丁卯胡亂은 바로 收拾될 수 있었다. 亂이 平定된 뒤 二月 七日 兵曹判書에 追贈되고 七月 二六日 無等山 아래 平頭山에 禮葬하였다. 一六八日年 平安道 安州의 忠愍祠에 配享하고 一六八四年 八月에 忠臣 旌閭를 命하니 同年 十一月 이 터에 忠臣閣을 건립하게 되었다. 뒤에 光州의 景烈祠와 濟州의 橘林書院에 進享되었는데 一八六八年 祠宇는 毁撤되었고 이 곳 忠臣閣은 頹落되어 一九四六年 撤去하였다. 이에 將軍의 遺蹟을 保存하기 위하여 一九八二年에 社團法人 忠愍公 全尙毅將軍 遺蹟保存會를 建立 一次事業으로 이 곳을 길이 保存하고자 이 碑를 세우다. 西紀 一九八二年 八月 二八日 陽城人 李鍾日 撰 天安后人 全雲灵書 社團法人 忠愍公 全尙毅 將軍 遺蹟保存會理事 全相均 全永稷 會長 全富一 副會長 朴載龍 副會長 金孟鍾 理事 崔奇泳 理事 李承萬 理事 金雲鍾 理事 高在均 理事 金基東 理事 全東錫 理事 金琪鍾 監事 羅琪洙 監事 安秉湜 監事 全泰鍊 財務 全福燮 幹事 全善基 特志者 崔奇泳 特志者 全德成 特志者 全富一 特志者 全孟鍾 特志者 全雲鍾 特志者 全基東 特志者 全善漢 特志者 全昌燮 特志者 全蒙錫 特志者 全大鉉 特志者 全泰鍊 敷地提供者 全容萬
    2018-06-11 | NO.8
  • 취병조형유허비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안길23(도촌동) 조형어린이공원1873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8호,  비각은 없으며 낮은 철제 난간으로 비를 보호하고 있다. 이 취병조형유허비(翠屛趙珩遺墟碑)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조형(1606∼1679)을 기리기 위해 그의 6세손인 광주목사(光州牧使) 조운한(趙雲漢)이 세운 것이다. 조형의 자는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이며,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승지 희보(希輔)의 아들이다. 이 비는 그 형식이 특이하다. 비신이 이수와 1석이며, 비좌는 별석으로 되어 있다. 전체 높이 95㎝, 너비 120㎝, 두께 28㎝이다. 비신에 비해 너비가 너무 넓어 일반적인 석비와는 구별되고 있다. 비문은 비신의 전면과 후면에 새겨져 있다. 여느 비석과 달리 전액이나 제명이 없어서 이채롭다. 전면에는 조형의 간략한 인적사항과 생년월일, 그리고 이곳이 그가 태어난 산실이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적혀 있다. 말미에는 당시 광주목사光州牧使였던 6세손 조운한趙雲漢(1739-?)이 계유년癸酉年에 비를 세웠음이 기록되어 있다. 후면 비문의 내용은 전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으로서, 후손들이 떠나버려 밭으로 변한 곳이 산실 자리임이 분명하기에 그곳에 비를 세워 기념한다고 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이다. 서자와 각자는 미상이다.비는 개석, 비신,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석과 비신의 재질은 응회암이고, 하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개석과 비신이 별개의 돌이 아닌, 하나의 통돌로 다듬어져 특이하다. 비신의 형태 또한 세로보다 가로가 길어서 대단히 이례적이다. 비신의 상태는 양호하나 곳곳에 풍화와 지의류에 의한 손상이 드러난다. 하대석은 장대석을 짜맞추어 세 단으로 구성하였다. 각 단은 사각 평면인데, 위로 갈수록 폭이 줄어들고 있다. 각 단의 높이는 큰 차이 없이 비슷하되, 지면과 만나는 하단의 높이가 위의 두 단에 비해 조금 낮다. 하대석의 이러한 형태 또한 여느 비에서는 볼 수 없는 남다른 모습이다. 이수는 우진각 지붕 모양이며 용마루와 내림마루의 우동은 큼직하고 낙수면은 약간 경사져 있다. 비좌는 직사각형이며 2단을 이루고 있다.조형은 1626년(인조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파방되고, 163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대교를 거처 사국(史局)으로 옮겼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고,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1651년(효종 2)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와 보덕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655년 대사간이 되어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츠를 만나고 돌아왔으며 『부상일기(扶桑日記)』를 남겼다.1657년 도승지·대사간이 되었고 1659년 동지성균관사로 성균관 좨주 송준길(宋浚吉)과 사학규제(四學規制)를 마련하였으며,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형조판서가 되고 1661년(현종 2) 공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가 되었다.1663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판윤이 되었다. 이때 동대문 밖 금산(禁山)의 소나무 남벌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그 뒤 지의금부사·우참찬·공조판서·좌참찬·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여 양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풀려나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2023.07.17 수정
    2018-09-06 | NO.7
  • 통정대부병조참의오상욱사적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가마마을이 通政大夫兵曹參議오상욱사적비
    2018-12-01 | NO.6
  • 편방사유허비
    편방사(片坊祠) 유허비(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최초의 경렬사는 인조 22년(1644)에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74번지에 편방사(片坊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이곳은 정지 장군이 말년에 낙향했던 곳이 광주목 편방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렬공 정지 장군만을 모시다가, 1718년에 그의 9대손인 금남군 정충신을 비롯하여 설강(雪江) 유사(柳泗), 송설정(松雪亭) 고중영(高仲英), 구성 전상의, 송암(松菴) 유평(柳坪), 고중영의 아들 구암(龜岩) 고경조(高敬祖), 시은(市隱) 유성익(柳聖翊) 등을 추가하여 8현을 모셨다고 유허비에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이 경렬사를 팔현사(八賢祠)로 불렀다. 그러던 중 경렬사는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 1893년(고종 30년)에는 그 자리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지게 되었다. 지금은 경열사 경내로 옮겨졌다.이후 일제강점기 때인 1921년에는 정지 장군의 문중에서 나주 노안면(老安面) 금안리(金鞍里)에 이 사우를 다시 설치하여 경열사라 이름 하였다. 현재에는 나주경렬사(羅州景烈祠)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9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8-06-18 | NO.5
  • 평택임씨 삼강유허비/ 정려각
    광주시 광산구 탑동길 93(지산동 277-1 탑동마을 )1915년이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사한 임영수(林英秀)와 그 아들 임계(林桂) 그리고 남편에게 절의를 지킨 아내와 며느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비갓을 갖춘 화강암제로 되어 있고, 현재 평택임씨문중 소유이다. 비문은 기우만(奇宇萬)이 짓고, 후손 임철주(林哲周)가 썼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무랑(宣務郞) 임영수(林英秀)가 중심인물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때의 명신(名臣)인 충정공(忠貞公) 임언수(林彦脩)가 그의 선조이고, 조부인 임백근(林百根)은 현령(縣令)이었으며, 부친 임휴(林畦)는 의행(義行)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나 정국이 어지러워 벼슬길을 달가워하지 않고, 손수 소나무,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는 ‘삼청(三淸)’으로 자호(自號)하였다.무관(武官)인 임영수(林英秀)는, 계사년(1593년)에 경성(京城)에서 순국하게 되고, 그의 아들 임계(林桂)는 복수를 생각하던 차에, 정유재란(1597년)이 발발하자 이복남(李福男)의 막하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그는 용성(龍城 남원)에서 왜군을 막다 성이 함락되어 전사한다. 임계(林桂)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건 자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식도 아버지를 이어 죽었는데 나 또한 남편을 따르겠다.”하고는 자진(自盡)하였다. 며느리도 같은 날 자진한다. 이후 ‘이괄(李适)의 난’ 때 임계(林桂)의 아들인 임광윤(林光胤)의 명으로 그의 두 아들 임은(林嶾)과 임두(林㞳)는 공주(公州)까지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하였으며,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임광윤(林光胤)은 군사를 모집하여 가던 중에 화의소식을 듣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남편이 순국했다고 아내가 따라서 죽는 것은 권장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忠)과 효(孝)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덕목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기초적인 것이다. 이 〈평택임씨삼강유허비(平澤林氏三綱遺墟碑)〉에 새겨진 금석문을 통해 4대에 걸친 집안의 사연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는 평택임씨(平澤林氏) 집안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해줘야 한다. 보답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해주고 그 집안이 자긍심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집안의 희생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기에 엄숙한 마음으로 이러한 일을 전하고 기념해야 할 의무가 있다.三綱遺墟碑銘 幷序 湖南爲忠義淵海而平澤林氏爲一指平澤氏爲忠義古家而宣務家又其一指宣務公諱英秀忠貞公彦脩忠簡公成味父子爲高麗名臣寔公六世以上祖百根縣令淸白爲治解紱歸山以終厥世考畦進士薦行義授寢郞昏朝政亂不樂仕進手種松竹栢自號三淸宣務公薦宣傳至部將癸巳殉義于京城子處士桂志切復讐當於丁酉赴李福男幕領兵入龍城城陷立慬妣吳氏聞變曰夫死不死爲有子子又繼父而死吾亦從夫遂自縊子婦鄭氏曰舅死於國姑死於夫夫死於父吾何獨生同日縊死子光胤崩迫累絶廬墓終制自號寸草堂盖自傷於春暉莫報也以上庠主推太學掌議昏朝疏斥廢母浩然歸田里甲子逆适之變遣二子嶾㞳扈 駕至公州丙子典義餉聞媾成痛哭而還士林立祠錦江浚孫將立石於遺墟魯升魯駿俾宇萬記其蹟嗚呼三綱爲極天罔墜底道理其關重於世敎者何如而其生也一門又一里又一家何其偉哉寒山一片雖林氏之私而其補風化豈少助也哉銘曰臣死君爲忠子死父爲孝婦死夫爲烈所在各盡其道胚胎三綱篤生寸草聳珍之南錦江之濱山明水麗生長有村水不忍廢地不忍荒立石而頌碑曰三綱不墜之義古有今亡反今而白是樹風聲 歲乙卯陽復月 日 幸州奇宇萬 謹撰 辛巳十月 日 宗後孫 哲周 謹書 十二世孫 一周 十四世孫 漢京 謹竪
    2018-06-11 | NO.4
  • 하남정씨 락토당계양재 양세 유허비
    광주시 서구 유촌동 373-2 1995년하남정씨 락토당계양재 양세유허비河南程氏樂土堂桂陽齋兩世遺墟碑는 정광현 정극화 부자의 유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하남정씨대종회가 관리하고 있다. 1995년에 태인 박래호朴來鎬가 짓고 장흥 高光烈이 썼다. 서구 유덕동주민센터에서 2백여미터 떨어져 있닌 낙류정 입구 뒤편에 있다.정광현程光顯(1524~1595)의 자는 중본仲本이며 호는 락토당이다. 중국 송나라 伊川의 후손으로 부친은 정세존程世存, 모친은 광산 김기남金麒南의 딸이다. 선조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성주군사로 재직할 때 이몽룡의 ‘촛농 떨어지는 곳에 백성들의 눈물도 떨어지고[燭㴃落時民㴃落]’의 시구를 좌우명으로 삼고 청렴 행정을 펼쳤다. 이임 때 지색紙索뿐인 여장이 군민들을 감격케 하여 거사비去思碑가 세워졌다. 모리배들의 무고로 향리에 돌아와 락토당樂土堂을 세우고 남전여씨향약과 백록동학규를 실천하였다. 정극회程克和(1556~1618)는 락사당의 둘째 아들로 호가 계양재桂陽齋이다. 자는 관부寬夫이다. 기암畸庵 정홍명鄭鴻鳴 등과 학문을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의곡을 모아 운송하여 국토 수복과 왜적 소탕에 전력을 다하여 충성을 바쳤다. 선조가 그 전공을 가상히 여겨 공조참판에 증직하였다. 후손들이 뜻을 모아 조상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웠다.
    2018-05-25 |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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