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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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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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과동정공적비
    광주시 남구 이장동 166-12012년양과동정공적비(良苽洞亭公蹟碑)는 2012년에 세웠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8-06-11 | NO.32
  • 양산김선생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도야(대산)마을1977년 이 양산김선생유허비(陽山金先生遺墟碑)는 상산김씨 문중이다. 진성 이원영이 짓고 전주 이학용 쓰다.
    2018-12-01 | NO.31
  • 엄이재유적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유적비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문하생인 충주인 송애松厓 박하형朴夏炯(1891~1971)이 글을 짓고 후학인 죽산인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1907~1987)이 글씨를 썼다.
    2018-05-31 | NO.30
  • 열부천안전씨정려유허비
    광주시 동구 지원동(월남동) 녹동마을1974년이 열부천안전씨정려유허비(烈婦天安全氏旌閭遺墟碑)는  녹동마을 앞에 위치해있으며 입석과 함께 있다.
    2018-11-11 | NO.29
  • 오병일-양암처사낙안오씨유적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656-51982년이 양암처사낙안오씨유적비(養庵處士樂安吳氏遺蹟碑)는 현와 고광선의 문인인 오병일에 관한 비이다. 옆에는 양암거사유적비건립위원방명비가 함께 있다.
    2018-06-11 | NO.28
  • 운남처사박공유장비
    광주시 남구 행암동 468-51977년운남처사박공유장비(雲南處士朴公遺庄碑)는 브라운스톤1단지(효천LH천년나무5단지) 옆 도동경로당과 꿈드리유치원 입구에 있다. 1977년에 장흥 위계도의 글과 신천 강인환의 글씨로 써 있다.박공은 밀양박씨로 도동마을에 거주했고 연안조씨와의 사이에 2남 안중 안성이 있다고 한다.
    2018-10-26 | NO.27
  • 운암서원 유허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218(운암서원 내)1905년이 운암서원유허비(雲岩書院遺墟碑)는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을 모신 서원 내에 있다. 숙종 32년(1706) 지역 유림들의 청원으로 북구 운암동 東背 마을 앞 山에 터를 잡아 건립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 해광 송제민을 배향하였다. 숙종 35년(1709)에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제봉(霽峯) 고경명의 사촌동생이자 조선 선조 때의 유생인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 1559~1609)를 추배하였다. 서원에는 그 외에도 송 타(宋 柁) 권 필(權 韠) 신 필(申 鞸) 신한주(申漢柱) 등을 추배하였다. 운암서원은 훼철 이전 장의(掌議) 2인, 색장의(色掌議) 1인, 원생(院生) 13인을 두었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어 1905년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가 1985년 운암서원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무등산 자락 운암서원 자리로 옮겼다. 지붕돌을 갖춘 유허비는 높이 134m, 폭 45cm, 두께 13cm로, 26자 8행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원래 이 자리에는 운암서원을 철폐한 후 1933년에 건립했던 송제민의 재실 영모재가 있었는데 현재는 운암서원 안에 영모재(永慕齊)가 들어서 있는 형태로 되었다.현재 이 비가 있는 곳에 1933년 건립된 해광 송제민외 제실인 영모제와 해광의 묘가 있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기(金世記)가 지었고, 군수 권중은(權重殷)이 썼다.비문東國院設盖出先王之崇報多士之尊慕一自綴享孰不齋恨本院後孫立碣表址請文工宋猥濫措筆只輯院祝以記之曰海狂宋公諱齊民春秋之義訂禎之仁名高東海光照後人滄浪高公諱敬履承連山學辯牛溪誣妙契太極克配院宇花菴宋公諱柁殲賊奮義蹈海殉節兩世同祀千古幷烈石洲權公諱鞸濂洛口䪨孤竹淸風仁主褒贈後儒尊崇靜友申公諱滭拜官不就終身若喪擧義勤王忠孝敢詳道溪申公諱漢柱海翁同配克杞院宇惠心經學矜式○○惟願多士永慕謹守爲百世遺蹟焉 資憲大夫觀察使金世基 謹記 通政大夫行郡守權重殷 謹書 甲申仲冬 日立 비문번역 우리나라에 서원(書院)을 설치하는 것은 대체로 선왕(先王)의 융숭하게 보답하려는 은혜와 많은 선비들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에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번 배향(配享)을 거둔 뒤로부터는 누구인들 한스러워하지 않았겠는가. 본 서원의 후손이 묘갈(墓碣)을 세워 그 터에 표시하고자 나에게 묘갈문(墓碣文)을 부탁하였다. 내가 외람되게 붓을 잡아 다만 서원의 축문(祝文)을 모아서 그것을 기록하였다. 기록에 이르기를, '해광(海狂) 송공(宋公)은 휘(諱)가 제민(齊民)인데, 춘추(春秋)의 의리(義理)와 정정(訂禎)의 어짐으로 명성(名聲)이 동해(東海)에 높았고 광채가 후인(後人)들에게 비추었다. 창랑(滄浪) 고공(高公)은 휘가 경리(敬履)인데, 연산(連山)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우계(牛溪)의 무고(誣告)를 분별하였으며 오묘하게 태극(太極)과 합치되어 능히 원우(院宇)에 배향되었다. 화암(花菴) 송공(宋公)은 휘가 타(柁)인데, 적(賊)을 섬멸(殲滅)하고 의(義)를 떨쳤으며 바다를 뛰어들어 순절(殉節)하여 양대(兩代)에서 함께 제사를 받아 오래도록 아울러 성대하였다. 석주(石洲) 권공(權公)은 휘가 필(鞸)인데, 주돈이(周敦頥)와 정자(程子)의 구운(口䪨)이 있었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맑은 풍모(風貌)가 있어서 어진 임금이 기려 추증(追贈)하여 후세 선비들의 존숭(尊崇)을 받았다. 정우(靜友) 신공(申公)은 휘가 필(滭)인데, 관직(官職)을 제수 받아도 나아가지 않아 종신(終身)토록 상(喪)을 당한 사람같이 하였고 의병(義兵)를 일으켜서 부지런히 임금을 섬겼으니 충성과 효도를 두루 갖추었다. 도계(道溪) 신공(申公)은 휘가 한주(漢柱)인데, 해옹(海翁)과 함께 짝하여 능히 원우에 배향되었고 경학(經學)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삼가 본보기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다만 원컨대 많은 선비들이 영원히 사모하고 삼가 지켜서 백세(百世)의 유적(遺蹟)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자헌대부 관찰사 김세기(金世記) 지음. 통정대부 군수 권중은(權重殷) 씀.갑신년 음력11월에 세움
    2018-06-11 | NO.26
  • 의열사 유허비
    의열사(義烈祠) 유허비(遺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간석(艮石) 이중철(李中轍)의 명문(銘文)이 있다.의열사는 서구 벽진동 벽진서원이 되었다가 서구 풍암동으로 옮겼다. 벽진동 터에는 의열사 유허비가 없다고 한다. 음성박씨 광주문중의 관계자가 확인해주었다.
    2018-06-18 | NO.25
  • 이기손-금재 이기손 장군 건립사실기
    광주시 광산구 송정공원로 8-13, 송정공원李起巽將軍義積碑建立事實記 李起巽, 1877~1957현 주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산동 109번지 옛 주소 : 전남 광산군 본량면 북산리 110 사적지 : 한말 의병장 이기손의 생가터 이기손은 오준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국운이 쇄하자 구국운동에 나섰다.1907년 황제 폐위 및 군대 해산이 모두 일제의 내정간섭에 의한 것임을 알고 광산·나주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스스로 의병장이 된 이기손은 의병을 이끌고 진도·완도 연안의 외적을 격퇴시켰다. 이어서 장성의 기삼연 의병부대의 부장 전해산·김죽봉과 상의하여 호남의 서부지방 즉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었다. 일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으로 의병의 무장을 마친 이기손은 본격적인 의병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龍鎭山 전투에서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노획하였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병을 사살하였다. 이어 전남 무안군 지도에 설치한 일본군 해군본부를 습격하기 위하여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군을 섬멸하였다. 또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1908년 이후 병력과 장비를 증강시킨 적의 의병 토벌대와 접전하기에는 중과부적이므로 의병을 해산시켰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 사촌沙村에서 패전한 후 전해산 의병부대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적에게 체포당하였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錦山에 은신하였다. 그후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동안 그의 가족 중 2남은 옥고로 인하여 사망했고 부인은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1915년에 귀국하여 충청도 금산에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생가는 한말에 건립하였으나 현재는 멸실된 상태이다. ※ 2019.09.30 수정
    2018-12-19 | NO.24
  • 이남유허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삼각마을1964년이 이남유허비(李南遺墟碑)는 김규태(金奎泰)가 찬했다.
    2018-12-01 | NO.23
  • 이시원-양심당묘정비급유허비창립기적비
    광주시 남구 임암길11번길 73-1이 양심당묘정비급유허비창립기적비(養心堂廟庭碑及遺墟碑刱立紀蹟碑). 
    2018-06-11 | NO.22
  • 이시원-양심당이선생유적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원산동 535-1)2005년 1월이 양심당이선생유적비(養心堂李先生遺蹟碑)는 남구 이장동 출신의 양심당 이시원의 비석으로 안동 권희문이 찬하고 종후손 이병모가 글씨를 썼다. 예문관제학 이선제의 아들이다.
    2018-06-11 | NO.21
  • 이시원-양심당이선생유허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2-3양심당이선생유허비(養心堂李先生遺墟碑)는 필문 이선제의 큰 아들인 양심당 이시원(李始元)의 유허비이다. 원산마을 입구 삼거리에 필문 이선제의 신도비는 왼편에, 양심당유허비는 오른편에 세워져 있다. 양심당은 아버지  필문의 시묘살이를 마친 후 서식처이자 후학자의 강학터로 지은 당호이기도 하다. 그는 이 마을 출신으로 일찍 과거에 올라, 홍문관제학, 예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지금의 광주시 남구 원산동 뒷산 제청골에 양심당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현재 광주시 남구 원산동 구만산길 입구에 그의 유허비만 위치하고 있다. 또한 바로 그 뒤에 유적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2018-06-11 | NO.20
  • 이조원-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李先生遺墟碑)
    광주시 남구 원산동 868-11957년청심당이선생유허비(淸心堂李先生遺墟碑)는 대촌사거리와 포충사 사이 도로변에 있다.청심당 이조원(李調元, 1433~1510)은 필문 이선제의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천품이 고아(高雅)한 그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독학으로 학문이 대성하였다.  부친 필문의 학통을 이어 문장과 도학이 당세의 종사(宗師)라 추앙되었다.학행이 뛰어나 정헌대부 예조판서를 증직하였다. 현재 수암서원(秀巖書院) 오현당(五賢堂)에 배향하고 있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원산마을 대로변(포충사와 대촌사거리 사이)에 세워졌다. 현재 광산이씨 문중 소유이다. 비문은 서흥(瑞興) 김규태(⾦奎泰)가 지었다.비문 光州府南二十里有長者洞卽故淸心堂李先生諱調元杖屨所也先生光山之世而尙書僕射珣白之后慶昌君蓽門先生先齊之子也克守庭訓敎力於格致誠正之學  成宗朝擧遺逸歷正郞執義吏曺參議 轉至慶尙全羅兩道按廉使旌명於便蕃詣闕頌辭後値昏朝先生旣辭曰聞七十致仕未聞七十入仕臣寧墜身於銅柱豈可輔惡於瓊宮乎居喪廬墓終制 仍築室冢傍以寓畢生之慕而引進後學名碩多出于門佔畢金先生宴過贈詩曰巨族五元家一元遯跡嘉右文今世上母使玉音遐 今誦其詩慕其人槩想德學風節固己炳烺千秋矣十六世孫季休不忍遺址荒廢辨巨資竪穿碑乞銘於奎泰聞址之傍有柳名掛波亭者枯死復甦枝葉甚茂抑先生德蔭益長驗兆於此耶 吁亦奇矣爲之銘曰 惟心惟一 灑落淸通 炳幾割戀 芥視寓鍾 發揮家學 忠孝是崇 樂育英秀 繼開其功 爰有哲裔 追慕靡窮 盟珉丹刻 精彩勝空 慶延霽月 稱柳光風 儀型彷彿 陟降心翁 彊圉作噩春正月上元 瑞興 金奎泰 撰 丁酉三月 日 立 비문번역 광주부 남쪽 이십리에 장자동이 있다. 고 청심당 이조원 선생의 소요처이다. 선생은 광산이 세거지로 상서 복야 순백(珣白)의 후예이다. 경창군 필문 선생 선제의 아들이다. 격물치지 성정의 학문에 대한 가정교육을 잘 지켰다. 성종 조에 유일로 천거되어 정랑 집의 이조참의를 거처 경상 전라 양도의 안렴사를 전전하였다. 성대한 은전이 내려져 대궐에 나아가 송사하였다. 후에 혼조를 만나 선생이 이미 사직하며 말하기를 “나이 칠십에 관직을 그만둔다는 말은 들었지만 나이 칠십에 관리에 나아간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이 차라리 동주에서 몸을 추락시킬지언정 어찌 궁에서 나쁜 보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상을 당해 여막에서 복을 마치고 그대로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사모하는 마음을 본받고자 하였다. 후학들을 끌어들여 석학들이 그의 문에서 나오게 되었다. 점필재 김 선생이 시를 주어 말하기를 “巨族五元家 一元遯跡嘉 右文今世上 母使玉音遐”라고 하였다. 지금 그의 시를 읽어보고 그 사람을 사모하니 대개 생각건대 덕학과 풍절은 진실로 천년동안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16세손 계휴(季休)가 차마 유지가 황폐해 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큰돈을 마련하여 비석을 세우는데 나에게 명문을 부탁하였다. 듣자니 유지의 곁에 괘고정이라는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말라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가지와 잎이 무성해졌다고 한다. 대체 선생의 덕음이 여기에서 더욱 자라났음을 징험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또한 기이한 일이로다. 다음과 같이 명을 한다. 정유년(1957) 1월 15일 서흥 김규태 씀
    2018-06-11 | NO.19
  • 이종-율원군사당유허비
    광주시 광산구 장덕동 1291-1(수완지구 근린5-4호 공원)율원군(栗元君) 이종(李宗) 사당(祠堂) 유허비(遺墟碑)<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북쪽 30리의 거리인 완동(莞洞)에 있는 비석이다. 그의 후손인 긍의(兢儀) 기섭(起攝) 강호(康五) 등이 서로의 힘을 모아 설치(移建)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일은 오로지 옛날의 그 유지(遺志)를 그대로 묵힐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율원군사당유허비는 이재만가옥 동쪽 편에 있는데  율원군의 자는 유안(幼安), 호는 이력(履歷), 휘는 이종(1432~1476)으로 효령대군파이다. 시호는 양경(襄頃). 대군의 손자로 보성군 갑(갑)의 차남이다. 1467년 5월에 장용대장 대호군이 되었다. 원래는 광산구 장덕동 527에 있었으나 택지개발로 인해 광산구 장덕동 1291-1(수완지구 근린5-4호 공원)로 이재만 가옥(등록문화재 제146호)이 옮길 때 함께 이전했다.
    2018-06-18 | NO.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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