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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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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성공(成公) 묘지명
    갈암집 제25권 / 묘지명(墓誌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성안의(1561~1629) 광주목사, 1611년(광해군 3)에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공은 휘가 안의(安義)이고 자는 정보(精甫)이며, 성은 성씨(成氏)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고려 때 휘 송국(松國)이 태위(太尉)가 되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고, 본조에 들어와서는 휘 만용(萬庸)이 판도 판서(版圖判書), 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를 지냈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잇따라 나와 동남(東南) 지방의 망족(望族)이 되었다. 증조는 휘가 익동(翼仝)이고, 조는 휘가 윤(胤)이고, 부는 휘가 궤(几)이니,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모(母)는 장연 노씨(長淵盧氏)이니, 호조 참의 휘 사영(士英)의 따님이다. 대가(大家)에서 태어나 덕(德) 있는 집안에 시집와서 아내의 역할과 어머니의 역할을 함에 있어 모두 그 도(道)를 얻었다.공은 어려서부터 영준하고 숙성하여, 겨우 이를 갈 나이에 모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선공이 외출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공이 즉시 뜰 가운데 표(表)를 세우고 달빛에 비치는 그림자를 측량하여 시각을 기록하니, 듣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구두(句讀)를 배움에 미쳐서는 눈으로 본 것은 곧 외웠고, 집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이름 있는 이에게 가서 배웠다. 성장하여서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정 선생(鄭先生)의 문하에 가서 배웠는데, 정 선생이 매우 인정하고 중시하였다. 만력 19년 신묘(1591, 선조24)에 비로소 벼슬을 하였고, 이듬해 여름에 일본이 난을 일으키니, 공이 의병장 곽공 재우(郭公再祐)에게 가서 따랐다. 또 관찰사 백암(柏巖) 김공 륵(金公玏)의 막하(幕下)가 되니 백암공이 경도되어 허여하였고, 이때 공이 막 상처(喪妻)하니, 마침내 맞이하여 형의 손녀서(孫女壻)로 삼았다. 공이 이에 양친을 모시고 영천군(榮川郡)에서 처가살이를 하였고, 피난 나온 친척들이 공에게 의지하였다.갑오년(1594)에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서 봉상시 참봉(奉常寺參奉)으로 옮겼고, 정자(正字)와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봄에 규례에 따라 전적(典籍)에 올랐고, 여러 차례 옮겨 승문원 교검에 이르렀다. 가을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체차되어 예조의 낭관(郞官)이 되었다. 겨울에 관서(關西)의 좌막(佐幕)으로 나갔는데, 당시에 난리를 당하여 기무(機務)가 매우 많았지만 일마다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병신년(1596) 겨울에 조정에 들어와 성균관 직강이 되었고, 이듬해 가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가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 또 이듬해 가을에 조정에서 정신(廷臣) 중에 위망(威望)이 있고 간국(幹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자를 차출하여 군량미를 공급하고 황정(荒政)을 검속(檢束)하게 하였는데, 공이 병조의 낭청으로서 영남 조도사(嶺南調度使)의 임무를 받아 시기 적절하게 일을 처리하여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많았다. 이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유 문충공(柳文忠公)이 영남(嶺南)에 개부(開府)하였는데 자주 세상을 구제할 재능이 있다고 공을 칭찬하였다. 이어 근친(覲親)하기 위해 휴가를 받았는데, 총독사(摠督使) 윤승훈(尹承勳)이 평소 공에게 유감을 가지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관직을 비우고 직차(職次)를 이탈했다고 무고하여 드디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는데, 문충공이 치계(馳啓)한 데 힘입어 용서받게 되었다. 공이 풀려나온 뒤에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기민을 구휼하여 군국(軍國)이 이에 힘입었다. 경자년(1600) 가을에 일을 마치고 조정에 돌아오니 성적(聲績)이 혁혁하였다. 시의(時議)가 장차 화요직(華要職)을 맡기려 하였는데, 공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걸군(乞郡)하여 외직으로 나가 영해 부사(寧海府使)가 되었다. 지친 백성들을 무마하고 학교를 널리 권장하여 정사를 한 지 4년 만에 온 경내가 치적을 칭송하였다.갑진년(1604) 가을에 어버이의 병이 있어 창녕에 돌아왔는데, 잇달아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였다. 장사를 지낸 뒤에 분암(墳庵)을 지어 영모(永慕)라는 현판을 달아 놓고 슬퍼하고 돌보며 그리워하는 곳으로 삼았다. 거상(居喪)하는 여가에 고을 사람들의 자제를 가르쳐서 성취시킨 자가 많았다고 한다. 상을 마치고 나서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그곳은 규모가 크고 일이 많아 평소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졌다.공이 폐단을 혁파하고 쇠잔한 백성을 소생시키며 결재를 지체시킴이 없었고, 퇴청(退廳)한 뒤에는 번번이 고을의 현자를 초대하여 강론하고 술 마시고 시를 지으며 즐기니, 암행 어사가 공장(功狀)을 올릴 때 뛰어난 치적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상이 총애하여 관작을 높여 주려 하였으나 그때 방해하는 자가 있어 그 일이 마침내 취소되었다.신해년(1611) 봄에 규례에 따라 광주목(光州牧)으로 옮겼는데, 공의 뒤를 이어 남원 부사가 된 자가 당시 재상의 뜻에 따라 공의 허물을 캐내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광주 목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당로자(當路者)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어 영천(榮川)으로 돌아왔다. 한가히 지내면서 심신을 수양한 지 13년이었는데, 자주 점잖고 덕 있는 선배들과 교유하고, 또 유인(幽人), 일사(逸士)와 더불어 즐거이 임천(林泉)에 모여 배회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당시에 광해(光海)의 정치가 어지럽고 세도(世道)가 크게 무너졌는데, 공은 흔들리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아 고을과 나라에서 존중받았고, 도(道)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일에는 반드시 솔선하여 사림(士林)의 수창자(首倡者)가 되었으나, 집안의 자제들은 알지 못하게 하였다. 계해년(1623)에 반정(反正)하여 노성(老成)하고 현달(賢達)한 사람을 불러들였는데, 공은 사성(司成)으로서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옮겨졌고, 다시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옮겨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공이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공주(公州)로 갔고, 돌아와서는 호종한 공로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어 제주 목사(濟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조정의 의론이 그가 늙은 것을 걱정하여 가지 않기를 바랐으나, 공이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어려움을 사양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즉시 떠나서 임지에 가서 어질고 관대한 정사가 많으니, 백성과 아전들이 사모하였다. 병인년(1626) 봄에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숭정(崇禎) 무진년(1628, 인조6)에 서용(敍用)되어 서함(西銜)에 부직(付職)되었고, 곧이어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사양하고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2월 모갑(某甲)에 집에서 고종(考終)하니, 향년 69세였다. 이해 모월 모일에 군(郡)의 동쪽에 있는 석현(石峴)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생전의 명(命)을 따른 것이다. 그 후 19년 뒤 정해년(1647)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또 아들 이성(以性)이 영국 공신(寧國功臣)이 되었기 때문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공은 두 번 장가들었는데, 전부인(前夫人) 황씨(黃氏)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근(謹)의 따님이고, 후부인(後夫人) 김씨(金氏)는 호조 참판 계선(繼善)의 따님이다.5남 5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침(以忱)은 어진 행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으며, 차남은 이각(以恪)인데 전부인의 소생이다. 3남 이성(以性)은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역임하였고 자급은 통정대부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저명하였다. 4남은 이념(以恬)이고, 5남은 이항(以恒)이다. 다섯 사위는 참봉 이억(李嶷), 사인 박료(朴炓)ㆍ이천표(李天標)ㆍ이문한(李文漢), 문과 급제(文科及第) 권도(權鍍)인데, 5녀는 모두 후부인의 소생이다. 지평이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하(昌夏), 창리(昌李)이다. 이각이 4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응하(應夏), 경하(慶夏), 강하(康夏), 도하(度夏)이다. 통정(通政)이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갑하(甲夏)는 진사이고, 석하(錫夏), 득하(得夏), 용하(用夏)이고, 문하(文夏)는 참봉이다. 이념이 4남을 두었는데, 명하(命夏), 정하(正夏), 시하(時夏)이고, 대하(大夏)는 생원이다. 이항은 아들이 없어 득하를 후사로 삼았다. 내외의 손, 증손, 현손을 합치면 100여 명이다.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효성스럽고, 형제와는 우애로웠으며, 집안의 식솔을 거느리고 빈객을 접할 때 정성과 신의로써 하여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또 남의 과실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들과 구차히 영합하려 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사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공은 관대하고 온후하며 외모가 준수하여 중인(衆人)들이 거인 장자(巨人長子)로 추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박학하여 통달한 것이 많았고, 특히 심계(心計)를 잘하였다. 관리의 일을 가지고 결정함에 있어 남보다 뛰어났으나 대부분 백성을 사랑하고 옛 법을 지키는 것을 힘쓰고, 겉으로 엄하거나 심히 각박한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다. 분수에 편안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영리를 도모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 당시에 사우(師友)로 교류한 사람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동계(桐溪 정온(鄭蘊)), 창석(蒼石 이준(李埈)) 등 여러 노선생이고, 사서(沙西) 전식(全湜)은 막역한 벗이었다. 공이 돌아가신 지 60여 년 뒤에 창녕 사람들이 부용당(芙蓉堂) 곁에 공을 제사 지내고 이공 장곤(李公長坤)과 병향(並享)하니, 이곳은 공이 평소에 강학하던 곳이다. 현일이 뒤늦게 태어나 공을 알지는 못하지만 공이 영해부(寧海府)의 수령을 맡았을 때 나의 왕부(王父) 참판공이 백성의 예로 공을 섬겼고 공이 매우 우애롭게 대해 주셨고, 나의 선인(先人) 형제가 또 공의 제자(諸子)에게 배워서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 익히 듣고 즐겨 말하였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전해 듣고 흠모하였었다. 지금 공의 손자 용하가 가첩(家牒)을 받들고 와서 묘지명을 써 달라고 하면서 선대의 교분을 가지고 거듭 요구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서(序)와 명(銘)을 쓴다.명은 다음과 같다.선비가 혹 덕은 넉넉한데 재주가 부족한 경우가 있고 / 士或德優而才歉또한 재능은 많은데 행실이 불완전한 경우도 있다 / 亦有多能而行不完그러므로 두 가지를 겸비하기가 / 故兼二者而有之자고로 어렵다고 하였다 / 自古以爲難오직 공은 이미 이 아름다운 덕이 있고 / 惟公旣有此德美또 그 재능이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기에 충분하였다 / 又其才猷足以濟時艱그 평생에 세운 공을 돌이켜 보면 / 跡其平生所樹立어찌 이른바 선인 군자가 아니겠는가 / 豈所謂善人君子者邪아, 지위가 재능을 따라가지 못하니 / 吁嗟乎位不滿能그것이 명임을 어찌하랴 / 其如時與命何
    2022-04-29 | NO.7
  • 필문이선제부조묘
    광주시 남구 원산동 535-1필문이선제부조묘는 조선초의 문신인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나라에 공훈세운 것을 기리어 신주를 영원히 모시도록 하는 부조지전(不祧之典)으로 건립한 사당이 부조묘이다.광주시 민속자료 제7호이다. 1843년(중수). 부조묘는 포충사 뒤쪽 산기슭에 있으나 원래의 위치에서 50여m 왼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필문은 광주 대촌(大村) 출신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세자빈객(世子賓客),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문종(文宗)때는 정인지(鄭麟趾) 등과 『高麗史』편찬에 참여 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鄕約)을 베풀어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 오현당(秀巖書院 五賢堂)과 죽산사(竹山祠)에 배향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앞마루를 둔 맞배집이다. 앞마루는 반폭칸으로 개방하였으며, 툇마루를 놓았다. 공포( 包)는 쇠서 하나를 내어 가운데에 연꽃무늬를 둔 초익공(初翼工)으로 위부분에 용머리 장식을 하였고 마루의 대들보 쪽에는 구름무늬로 처리하였다. 가구(架構)는 고주(高柱) 5량형(梁形)으로 되어 있으며, 도리(道理)는 장혀(長舌)를 받친 국도리를 걸쳤다. 그리고 마루 기둥의 주심도리(柱心道理) 외기둥 위는 납도리를 사용하였고, 두심도리 장혀와 창방 사이에는 소로(小累)를 둔 원반(原盤)을 하나씩 놓았다. 막돌초석 위에 정면만 민흘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마루 밑은 호박돌 위에 동바리 기둥으로 처리하여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밑벽막이 없이 개방하였다. 문은 쌍여닫이 문으로 띠살문이며, 겹처마이다. 고설삼문(高設三門)과 양측의 맞담 위에 기와를 얹어 담을 돌렸으며, 뒤쪽은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다. 부조묘의 뒷산 언덕에 필문의 묘(墓)와 묘비(墓碑)가 있으며, 이곳에서 500여m 떨어진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은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리는 수령(樹齡) 600여년의 노거수(老巨樹)가 있어 유서 깊은 이곳의 유래를 상상하게 한다.필문 이선제는 자는 가부 본관은 광주이다. 광주 대촌 출신으로 밀직제학이었던 이홍길의 손자이며 일영의 아들로서 세종1년(1419)에 문과에 급제하고 1423년 고려사를 개수할 때 사관으로서 앞서 정도전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 이인복 등의 급경록에 의존함으로써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하여 그 부분은 원전에 따르게 했다.세종13년(1431)집현전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형조와 병조의 참의 강원도 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지냈고 세종30년 (1448)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해 집현전 부제학 정찬손, 우찬성, 김종서, 이조판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 개찬을 관장하였으며 뒤에 세자빈객,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을 베풀어 미풍양속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었다. 이곳 이외에도 강진의 수암서원 과 죽산사에 배향되었다.고설삼문과 양측으로 맞담위에 기와를 얹은 담을 돌렸다. 부조묘의 뒤쪽 산언덕에 필문의 묘와 묘비가 있다.*수정 2023.11.21
    2018-06-15 | NO.6
  • 필문이선제신도비명
    필문이선제신도비명은 광주시 남구 원산동 대로변(대촌사거리와 포충사 사이 도로변)에 있다. 필문이선제유허비와 함께 1957년에 세웠다.光國佐理功臣嘉善大夫行吏曹參判藝文館提學問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慶昌君  贈正憲大夫曺判書藝文館大提學蓽門先生李公神道碑  際 聖朝啓運英碩雲興贊成右文之治類多以經論謨譙章翰詞頌假鳴於一時其能游心理域率履法門循聖賢之塗轍而進則訃君以當道退則倡學一方俾來者有可繼焉盖亦十不二三矣時則有若慶昌君蓽門先生李公者其庶乎爲先覺於草昧之世而不洋於行藏之正其學足以有爲其功足以開後者乎先生諱先齊字家父蓽門號也其先新羅之金也至麗祖時有諱宗金以功賜今姓封光山入傳而日珣白翰林以忠贈尙書左僕射是生奇丹陽府今 贈密直副使生弘吉密直提學生日映府使贈兵曹參判娶密直副使草溪鄭允吉之女以共武甲子生公干光之泥館山下幼而眉字淸瀅神采照人寡言笑重作止儼乎有成人儀屆就傳穎悟絶倫博經史通大義旣而嘆曰人之性天也非學無以知性知天下知性天無以爲人遂慨然有求道之志閒權楊村梅軒先生兄弟者遂邃性理之學從之難疑講質渙然有得踐行米篤而所适益精徵蔚有斯文之望莊憲王甲午府策選第一由翰施玉著歷敭淸華亞長銓曺賓客 曺筵啓沃論思懇懇於出治之本嘗啓曰今之言者以富國强兵爲先務然此覇政之餘習人君正必正朝延百官萬寐則國安有不富兵安有不强又曰古者擇士入學學成然後論之論定然後宮之今不擇賢否不論高下槪取功今文詞之未望其謀國之無缺不亦難乎又言宜選有德之士置之儲宮興之起居出入如莊嶽之聽齊語則此宗杜生靈無疆之福時上勵勵精圖治虛心采納春注日深倚以公輔繪公像於御屛以龍之甲辰遭外艱丙午居內憂時喪紀廢壞百日卽吉公獨行三年之制哀毁踰節情文兩旨造主立祠一依於禮人多化之嘗爲藝文館提學鄭麟趾金銚望等受命撰麗史錄光國勳封慶昌君退老于鄕上疏請陞光山爲洲牧建喜慶堂選一鄕文學地淫之士別爲需籍以獎育又立約于鄕倣藍田遺意春秋會集而勸規之於光之士皆敦尙經行民俗丕變爲湖南之純享年七十一而經葬于萬山洞亥原後 贈吏曹判書藝文館大提學高齎峰先生敬命以先生存倡學之功嘗疏請陞享聖廡而不報識者恨焉士林立祠宇康津之秀巖以俎頭祀之者淸心堂詞元玄孫履素齊仲虎來孫東巖發南溪洁從享焉其數之垂于家者遠而不替德之入于人者以以不忘斯可以觀矣配貞夫人寶城宣氏節度使仲吉女生五男始元判中樞調元吏議 贈禮判翰元校理贊元修撰享元副提學孫曾而下詵善詵然不可勝紀先生之墓久闕神道之刻后孫承鎰以其門父老之命走四百里于伽倻之西徵銘於鐘錫今距先生將五百年劫灰屢晹文獻寢泯其徵言懿蹟固有不可得以悉孝矣謹據夫性齊許文靈公傳之狀與後孫承愚之錄最其槪而爲之銘曰郁郁文化莊靈之世號爲鄧隆來汝 王佑蓽門不閉風雲之從其稱差覇學不貴藝沃于宸哀王肅不舍罘罳有繪贊我笙鏞衣冠孲孲損護孝悌湖學螵螵陽海之老有會有詣載篤于耶歸歸箇箇鳳翥邁以奕厥宗千載起懦光山麗君子攸宮湖天不夜湖樹不髮孰識其功 通政大夫前議政府參贊弘文館 經筵官兼侍講院書筵官苟一郭鐘錫撰 文正公眉叟 許先生穆集篆 丁酉  三月日立
    2018-10-21 | NO.5
  • 하천 고운 묘역
    광주시 남구 압촌동 산 23-1의병장 고경명의 조부 하천霞川 고운高雲 묘소로 가기 전에 재실 송산재松山齋가 있다. 고운(1479∼1530) 본관 장흥. 자 종룡從龍, 호 하천霞川이다. 그의 아들은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손자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묘역에는 2기의 묘가 앞뒤로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앞쪽 묘는 고운, 묘 뒤쪽은 고운의 부친인 자겸自儉 묘이다. 고운은 중종 14년(15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조광조 등과 친교가 있어 기묘사화 때 화를 입어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내려 왔다가 중종 25년(1530)에 세상을 떠났다. 후에 형조좌랑에 추증됐다.
    2018-12-12 | NO.4
  • 함평이씨기성군신도비
    광주시 북구 각화동1937년箕城君 神道碑는 시조 언彦의 11세손인 이긍 기성군파로 1937년 敏龍, 敏璿(민선),敏性,啓翼,啓宗 주간하에 후손의 성력으로 건립했다.1997 문중 회장 이윤범李玧範을 중심으로 후손들의 성력으로 각화동 경외로 옮겼다. 
    2018-12-04 | NO.3
  • 해광송선생지천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40(화암동)이 해광송선생지천(海狂 宋先生支阡)은  《송자대전》과 《해광집》에는 海狂處士宋公墓表로 기록되었고, 이 해광송선생지천은 석곡수원지 위 관광도로 동쪽에 있던 묘비를 옮겼다.호남에는 옛날부터 으뜸가고 위대하며 어질고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세상을 잘못 만나 포부를 가진 채 그것을 실현시켜 보지 못하고 죽어 오래도록 뜻있는 선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로는 해광처사(海狂處士)만한 사람이 없다.처사의 휘(諱)는 제민(齊民)이요, 자는 이인(以仁)으로 홍주(洪州)사람이다.왜구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찌르고 죽이는 것을 그치지 않고 왕가의 무덤마저 파헤치는 일이 생긴 데 통분하여 수만언(數萬言)이나 되는 긴 상소를 올렸었다. 그 문장이 호방하고 거침없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를 바라보고 원수를 생각하여 바른 의기가 솟아오르도록 하였다. 공의 원대한 계책은 이전에 당했던 원수를 잊고 우호 관계를 맺는 것을 욕된 일로 생각하여 백성을 보호하고 병사를 기르는 일을 핵심으로 보아 간간이 기이한 책모를 내었다.또 그것을 가지고 책 한 권을 내었으니 《와신기(臥薪記)》라는 책이었다. 도를 담당한 지방관에게 그 책을 상진(上進)했으나 그 지방관은 내용에 껄끄러운 부분이 있음을 이유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이에 공은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세상을 잊고 한편으로는 농사를 짓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또 그런 선생에게 맞지 않는 일들을 중한 일로 생각하고 열심히 전념했다. 스스로 ‘해광(海狂)’이라는 자호를 지었다.그가 죽고 나서 사위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한사(漢師)에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와서 통곡하고서는 공의 탁월했던 평생의 언행들을 종이에다 기록하기를 “우리 장인어른은 명성이 후세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하였다.처사는 가정(嘉靖) 28년에 태어났으며, 성미가 얽매임이 없었다. 9살 때 난리가 생겼다는 끔찍한 소문을 멀리서 듣고 맨발로 피난길에 올랐는데, 발이 아프고 기운이 다한 데다 먹지 못한 날이 5일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모시는 데 효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하자 죽만을 먹으며 3년 동안 통곡하였다.후에 성현(聖賢)들의 책을 읽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역경(易經)》에 조예가 깊었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좇아 배웠는데 토정 선생은 ‘한 글자에도 만 가지로 변하는 이치가 존재한다.’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공은 그 가르침의 뜻을 끊임없이 깊이 생각하였다. 이후 그렇게 깊이 생각하던 도중 서석산(瑞石山)에 들어가 정좌(靜坐)에 들었다가 마침내 깨우쳐서 말하길 “이는 낙서법(洛書法)을 두고 한 애기니 주자(朱子)가 말한 ‘조기변수지용(肇其變數之用)’이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공은 직접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편한 대로 하기를 즐겼다.하지만 예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하여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당에 알현하고 부부가 서로 외출하거나 집에 들어올 때 마주 절하여 배웅과 마중을 하였다. 남자 종은 내정(內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여자 종은 공이 직접 물건을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여러 아들들을 가르침에 있어 대단히 엄격하여 비록 딸이라도 반드시 《소학》, 《효경》, 《열녀전》을 외워야 했으니 석주 권필의 아내가 어렸을 적에 이상의 글들을 공부하는 데 조금이라도 태만함이 보이면 걱정이 되어 꿇어 앉혀 놓고 “내가 좀 안 본다고 게을리 하면 되겠냐?”라고 나무라곤 했다.공의 고모가 먼 곳에 거처하고 계셨는데 공은 반드시 한 달에 두 번은 가서 살펴 드리곤 하였다.한번은 공이 사당에 있는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바다의 섬들을 두루 둘러보고자 했다. 마을 사람들은 사당을 대단히 근신하는 태도로 섬기고 있어서 공의 행동에 놀라 다투어 공을 제지하였다. 공은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그때 갑자기 인부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에 공이 글을 지어 하늘을 책망하여 말하길 “나무를 쪼개 배를 만드는 일은 헌원씨(軒轅氏)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라고 하자 죽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살아났다. 배가 다 만들어지자 그것을 타고 바다로 들어갔는데 여러 차례 바람을 만나 거의 뒤집힐 뻔하고, 사나운 호랑이가 무리를 지어 큰 소리로 울부짖어도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 섬에 다다랐으나 배는 부서져 돌아갈 길이 끊겨 7일 동안을 먹지 못했는데도 죽지 않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배가 멀리서 나타나 다가왔는데 공은 이때에도 기쁜 기색을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왜구가 다가오자 양산룡(梁山龍), 양산숙(梁山璹) 등과 기의군(起義軍)을 조직하였다. 의병대의 간부들로 추대 받은 자들은 건재 김천일,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등의 여러 현자들이었다. 당시 충용 김덕령이 상을 당하여 집에 있었는데 공의 중표제(中表弟)가 되었다. 공이 집에서 나와 의병대를 이끌라고 북돋았다. 또 공은 제주도에 들어가서 준마를 구해다가 충용에게 주었다. 충용이 이에 격려 받아 몸을 일으켜 의병대를 이끌자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또 공은 왜적과 맞싸우는 관군진영에 가서 천병(天將) 양총병(楊總兵)을 만나 보았다. 본래 양 총병은 공이 왜적의 첩자가 아닌가 오해하여 공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였었다. 더군다나 공이 민간인인데도 전쟁사(戰爭事)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태연자약한 것을 보고 양 총병은 더더욱 의심하였다. 감찰(監察) 민순(閔恂)이 마침 양 총병의 군영에 왔다가 급히 양 총병에게 “이분은 동국고토(東國高士) 송(宋) 아무갭니다.”라고 고했다. 양 총병은 놀라 일어나 직접 포승줄을 끌러 주고 자리로 모셔와 왜적과 싸울 때 사용할 책략에 대해 물었다. 공이 말하길 “병가에서는 지형 상 우세한 위치를 점하는 것을 좋은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급히 진을 옮기라.”라고 했다. 하지만 양 총병은 공의 말을 듣지 않았고 조금 후 과연 패하였다. 공은 병이 위독하게 되자 주위에서 시중을 들던 사람들에게 부축해서 일어나도록 해달라고 하여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북쪽으로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공경의 뜻을 표한 후 죽었다. 이때가 만력 임인년(壬寅年) 2월 27일이었다. 묘는 광주 서석산 능성동(綾城洞) 간향(艮向)의 평평한 곳에 썼다.공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증조부는 기손(麒孫)으로 관직은 현감이었고, 조부는 구(駒)로 관직은 사헌부 감찰이었다. 공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정황(庭篁)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냈으며, 돌아가신 어머니는 김씨였고 그 아버지는 윤경(允敬)이었다.공이 처음에 아내로 맞은 여자는 박씨였는데 눌재(訥齋) 상(祥)의 손녀요. 감역(監役)을 지낸 민고(敏古)의 딸이었다. 이어서 얻은 부인은 김씨니 무공낭(務攻郞) 대형(大亨)의 딸이다. 공은 자녀를 넷 두었는데 타(柁)는 박씨 소생으로 대단히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왜적이 침입해 왔을 때 잡혀 배에 실렸었는데 틈을 타 왜구의 칼을 빼앗아 쳐 죽였다. 거의 다 죽였을 때에 한 왜적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다른 왜적들에게 알리고 다른 왜적들을 데려오니 타는 이에 스스로 바닷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두 딸의 남편들은 양원용(梁愿容)과 김극순(金克純)이다. 타 이외의 공의 다른 세 아들 장(檣), 익(榏), 즙(楫) 및 석주 권필에게 시집간 딸 그리고 양효용(梁孝容)에게 시집간 딸은 둘째부인 김씨의 소생이다.장(檣) 역시 행적이 기이한 인물이다. 그는 부모를 모시고 왜구를 피해 산속에 들어갔다가 적이 부모가 숨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숲 속에서 나와 다른 방향으로 도망쳐 유인했다. 따라서 왜적들에게 잡혔지만 부모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 잡혀서 일본으로 들어간 후 적장이 그를 아껴 미녀 세 사람을 아름답게 분장시켜 송장에게 마음대로 고르도록 했다. 하지만 송장은 끝내 받지 않고 이후 일본에 온 조선 사신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상과 같은 행적은 형 타와 함께 석주 권필이 기록한 글에 기재되어 있다. 송타의 손자 후(堠)는 진사였다.공은 본래 당시의 세상사를 다스리는 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공부를 그만두고 제민(齊民)이 되어 스스로 자를 ‘사역(士役)’이라고 짓고 평생을 지냈다.아! 공이 가지고 있는 포부와 재능으로 세상에서 쓰임을 받았었다면 틀림없이 그가 이룬 사업은 볼만 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한 채 그냥 죽었으니 하늘이 공을 낳았던 뜻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그가 작성하였으나 결국 왕에게까지는 전달되지 못한 상소 속에는 공이 품고 있던 대의가 명백히 드러나 있으니 해옹(海翁)이 말한 “하늘 아래 땅 위에 떳떳한 백성은 당장 가시적인 보답을 받지 못해도 만세가 지난 후에 틀림없이 보답을 받아 세상에 그의 떳떳한 행적이 게시(揭示)되어 사람들이 알게 된다. 또한 그럼으로써 왜 나라에 가서 고국에 대한 애국심을 망각한 채 다시 군신관계를 맺은 흐리멍덩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라는 얘기가 공의 경우에 적합하다. 또한 그렇게 생각할 때 공도 이 세상에 백 년 동안 허망하게 왔다 갔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다.옛날 한문공(韓文公)이 딸을 이름난 사람에게 시집보내고서는 사돈집 사람의 묘비를 써 준 일이 있었지만 석주 권필을 사위로 맞아 권필이 공의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공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게다가 공의 행적은 사실 석주 권필과 같은 명인이 훌륭한 문장으로 써서만이 아니라 그 행적 자체로 지금과 이후에 혁혁히 빛날 수 있으리라! 비록 그렇지만 석주 권필이 없었다면 이와 같이 오늘날 공의 행적이 밝혀질 수 있었겠는가. 내 경우 이렇게 공의 묘표(墓表)를 쓰게 된 이유는 장(檣)의 손자 규(奎)와 진곡(眞谷) 박상현(朴尙玄)이 와서 간곡히 묘석(墓石)에 새길 글을 써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썼다. 송시열이 짓고, 기우만이 쓰다.湖南古多魁偉賢俊之士其不遇而抱負以死長爲志士之痛者又無如海狂處士者也處士名濟民字以仁洪州人當倭寇創殘之餘痛憤陵寢之變上疏數萬言其文汪洋放肆使人望洋而其義正其猷遠益以忘讐修好爲辱保民養兵爲要而間有奇謀異策出於意表者又爲一冊子名曰臥薪記請於道臣以進則道臣格不聞遂乘舟入海與世相忘耕鑿訓誨高尙其事自號曰海狂益旣歿而女壻權石洲韠自漢師千里來哭錄其平生言行之卓卓者書在紙上曰庶幾吾舅名不沒於後世也處士生於嘉靖己酉負氣不羈九歲其考凶音遠至徒步卽發足繭氣竭不食者五日事母夫人至孝反喪歠粥三年後讀聖賢書最湥於易從李上亭之菡游土亭謂曰有一字萬變之理公潛思不置後至瑞石山入靜乃悟曰此洛書法豈朱子所謂肇其變數之用者耶然他人莫得其詳也公不事生産樂弛置自便然甚謹於禮日必早起謁廟夫婦必相拜出入迎送男僕不敢入內庭與女僕不親受授敎諸子甚嚴雖女子必通小學孝經列女傳石洲內子少時氣或惰慢則惕然危坐曰豈可以暗昧惰行乎姑母遠居必一月再往省嘗欲斬祀木爲舟徧游海島邨人事祀甚謹爭來止之公不聽忽役夫多立死者爲文以責之曰刳禾爲舟制自軒轅死者皆立蘇舟成遂入海遇風幾覆者數又猛虎群吼而略不怖嘗之一島舟敗路絶不食七日而猶不恒死忽有船自遠而至而亦無喜色倭寇至與梁山龍山璹等謀起義旅所推者金健齋千鎰趙重峯憲高齊峯敬命諸賢也時金忠勇德齡丁憂在家公中表也公勉起之又入濟州求駿馬以授之忠勇旣起.賊不敢近又往見天將楊總兵元楊疑其爲倭諜將加害公神氣自若楊固異之矣關監察純適在楊營急告曰此東國高士宋某也楊驚起自解縳引坐問策公曰兵家以得地形爲策急宜移陣楊不聽俄而果敗公疾革命左右扶起正衣冠北向長跪而卒是萬曆壬寅二月二十七日也墓在光州瑞石山綾城洞艮向之原公之系曰曾祖麒孫官縣監祖駒司憲府監察考庭篁文科正字妣金氏其考允敬也公初娶朴氏訥齋先生祥之孫監役敏古之女繼媲金氏務功郞大亨女男女各四人柁朴出也甚有孝友行倭寇時被執載船乘機奪倭劒擊殺之殆盡有一倭投海而泅率衆倭以來遂自投水二女壻梁愿容金克純也檣楫榏及女適石洲及梁孝容者金出也檣亦奇士奉父母避倭山谷賊迫父母所匿自林藪出走故爲倭所得以免其父母旣入日本賊將愛之妝美女三人使自擇終不肎受後從信使歸國與兄柁俱載石洲所記柁孫爲進士公始以濟物濟時爲心旣知其不能則於其名去偏傍爲齊而字曰士役益曰士不能得時行志則寧爲編戶服田以供賦役而已何必獻賦求仕哉此公之平生始卒也噫以公之志之才爲世所用則其事業必有大可觀者而只恁麽死了天之所以生公者抑可意歟.然其未達之疏大義炳然晦翁所謂天經地義民彛萬世必報者昭揭宇宙亦以愧夫南渡委靡之君臣公亦不可謂虛過百來年者也昔韓文公以女嫁名人刻人之墓公之以意氣相感得石洲爲壻亦足以畱名況其赫赫者著見於今與後自耶雖然微石洲烏能闡發如此哉檣之孫奎介於朴眞谷尙玄來請墓石之文云時崇禎栴蒙赤奮若孟春恩津宋時烈述奇宇萬記
    2018-11-12 | NO.2
  • 후석오준선묘역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158오준선吳駿善(1851~1931)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字)는 덕행(德行), 호(號)는 후석(後石)이다. 현재의 광산구 삼도동 도림에서 출생하였다. 기정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인 <후석유고>를 남긴 한말 유학자이다. 특히, 그는 1910년 망국 직후 일제가 지급한 이른바 은사금(恩賜金)을 거부하였으며, 용진정사(湧珍精舍)를 지어 1917년부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한말 의병장의 열전-기삼연, 고광순, 김준, 전수용-을 저술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후손들이 이곳에 그를 안장하였다. 후석 오준선 묘역은 나주오씨의 제각인 빙설당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2018-12-02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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