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묘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총 9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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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정 최공(최형한) 묘갈문 추기(永思亭崔公碣文追記)
- 錦谷先生文集 卷之十四 / 墓碣송내희(宋來熙, 1791~1867) 정보15년~고종4년영사정 최공 묘갈문 추기(永思亭崔公碣文追記)송내희(宋來熙) 지음 — 『금곡선생문집』 권14 도암(陶菴) 선생(이재)은 사람을 논할 때 결코 가볍게 판단하지 않았다. 이번에 이 갈문(碣文, 묘비에 새긴 글)을 읽어보니, 간결하면서도 증거로 삼기에 충분하다. 이 글을 남긴 영사정 최공(永思亭 崔公)의 이름은 참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세상에는 수사만 요란하고 내용 없는 묘비 글을 남기는 이들이 있지만, 오히려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그중에서도 최공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경위에 관해 반복하여 상세히 논한 대목은 오직 돈신(惇信, 이재의 자) 선생의 신중하고 공정한 문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갈문이 완성된 뒤 다시 정원일기(政院日記)* 살펴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정사년(丁巳年, 1497) 12월 6일, 장령 최형한이 직언으로 극간하다가 궁궐 문 밖으로 끌려 나가 죽었다.”또한 부제학 최명상(崔命相)이 지은 《경주최씨 명현록(名賢錄)》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연산군 시절, 소인배들이 여러 현인들을 모함할 음모를 꾸미던 중, 최공은 대간의 직책으로 강직히 간언하였고, 9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위 두 기록은 날짜까지 정확히 서로 일치한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최공의 죽음은 분명히 무오사화(1498) 이전의 일이며, 《무오당적(黨籍)》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당시 소인배들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면, 무오사화 이전에도 직언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 있었던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또한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는 표현은 곧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자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재가 남긴 갈문 속의 암시적인 문장들 역시 이제는 구체적 사실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만약 이 같은 진실을 후세의 어진 이들이 널리 문헌을 참고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런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지금 그 후손들이 뜻을 모아 이 기록을 묘비에 덧붙여 기록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기존 이재의 원문을 함부로 고칠 수는 없으므로, 그 아래쪽에 추기(追記)의 형태로 덧붙인다. 永思亭崔公碣文追記陶菴先生論人不苟。今觀此碣語。約而足徵。永思公其不朽矣。彼遊辭而謏墓者。適以羞之爾。最以致命一事。反覆詳論者。儘是惇信公正之筆矣。然碣文成後。更考政院日記。則書以丁巳十二月初六日。掌令 崔亨漢。以直言極諫。拿出闕門外而死。又副提學崔公命相所著慶州崔氏名賢錄。略曰。燕山時。少人輩搆誣諸賢。公以臺職論諫。不食九日而死。年月日。與政院記相符。若據此則公之死。果在戊午之先。不見於黨籍固宜。盖宵小醞釀之計。旣是夙搆。則安知無先於戊午。而有盡其言責之機關耶。不食而死。亦可認自盡之義。則前此微辭。幾箇闡發。苟非後承之賢。廣攷書籍。何以得此乎。今其子孫。合辭請補。而原文不敢擅易。略記其事實於下方如此。
- 2025-05-26 | NO.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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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렬의병장 묘역
-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417-3오상렬(吳相烈, 1879~1907)의 이명은 오인섭(吳寅燮)이다. 광산구 본량동 대명동 출신이다. 1907년 후반부터 의병장 김준(金準)과 김율(金聿)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대명동 영사재에서 무기를 제작하였다. 그는 어등산과 석문산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07년 음력 12월에 용진산 사호치(沙湖峙)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묘비는 1984년에 세웠다.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산골 깊숙한 영사재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오상렬 의병장의 묘역은 아직 그날의 전투를 기억하는 듯 의기로 가득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2018-12-02 | NO.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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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자치 원당영각 입구 비석군
- 광주시 광산구 원당길 1011913년이 오자치신도비(吳自治神道碑)를 비롯하여 오상열 의병장 오성술 의병장 등의 비가 원당영각 인근에 있다.원당영각(元堂影閣)은 1892년 유림 및 후손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양평공 오자치의 영정(보물 1190호)을 배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서울 중구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중이다. 건물은 1975년에 지붕을 보수했으며 1976년에는 대문을 보수했다.영각 뒤편에는 1918년에 건립된 시기재(始基齋)를 비롯하여 모정과 이곳을 알리는 안내판 등으로 구성되있다. 나조오씨 중조라 할 오자치(1426~?)는 1467년(세조13년)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이 공으로 당시 세조 임금이 그의 영정을 하사한 것이라 전해 내려온다. 오자치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세조실록」과「성종실록」에 약간의 내용이 있을 뿐 그 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오자치의 묘와 영당이 용진산 밑 원당리에 있고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일이 일어날때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吳自治神道碑 (정리중)公諱自治吳氏望羅州者爲世名族高麗中郞將偃寔公高祖也曾大父諱季愼中郞將大父諱類達益山郡事考諱愼中進士 贈參判錦城君?李氏 贈貞夫人盖以公貴也公天資湍溫才器夙然性於孝有至誠深愛好讀書弱冠淹貫經史智勇絶倫能於射御錦城嘗有惡獸多像人物又有妖僧偉暴資?一州?然公以一箭一椎函除兩害閏境賴以得安公家甚貧躬執漁樵?難繼欲爲春親以圖祿仕而屢屈科場乃反武科魁讓付宣傳官由主簿經歷求補郡邑政治淸白?之以嚴恕吏民?其德累蒙褒賞之典及遭外憂哭?無節而復甦專以事母爲心益致愉小宛不復有仕進之計 光陵丁亥叛賊施愛據有嶺?朝野憂惶莫過?鋒 廟堂薦公召命勤塾公見國執山俗○郞應命從征 上召人別殿賜西溫慰諭公乃與曺錫文魚有沼等一心效勞身了昌矣石斬獲甚多高原有宜陳之地恐爲賊所奪以車巫騎疾馳先據左執大旗右捲障泥吹作角聲明聞之不敢上我軍遂獲大捷施愛之弟施合方在吉州勢甚?張公興李?等空入賊里縛施合以歸未及營而追騎大至前裏被執公奪身回擊斬施愛而還一軍莫不震?二賦戮餘黨悉平振旅返京遂策高火氣二等勳盖八茂績不下曺魚諸公而以其官階之卑未尋參元勳識者恨之翌年四月陞通政七月進階嘉善封羅城君桑拜兵曹參判公不以勳責自居謙牧思退累疎陳懇曰臣之親年益高養旦不多 上特許以南遝故里恒侍親則務盡順滴時或黃冠野眠逍林泉不復渡漢津也丁內艱廬丁墓則○○○柴毁骨立成疾漸劇竟至不叔壽五十訃開 上震悼賜賻致祭禮葬于元堂山枕良原睿完朝賜不初之典配食 次廟廟庭後 贈吏曹判書諡襄平配呂氏處士孟?女擧二男張世勳府使○○在左贊成羅原石次世翊上護軍日謙右議政錦陽君認進士?庶尹 贈參議長房出也曾玄以下不少錄公氣溫粹才識明敏吏政兵籌周涉?奇通其卓掌英達世鮮倫比而建功身退以成五湖扁周之樂視諸同勳諸人多不保終公之先見不翅超然而可以欽服於百世之下也代久遠且經兵焚(희)文叡巳失立朝履歷生年紀皆僕而難詳矣遂靑蓮李公所撰狀文?括如右以寒公後孫偉才達簿試郡府발難北發??射日 王曰汝征公起家念奮厥義勇?昌天石衡突賊陳敢我道大?敦獻? 王靈斯赫策公鬼勳錫賚進針讓不代願欲赤松歸着老因務盡順澗旣忠且孝垂各竹帛原始要終久矣彬總曾我銘昭揭無垠 施蒙大荒落復之上浣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德殷 宋秉璿 撰十三代孫 駿善書兼篆 崇禎五癸丑十一月日立
- 2018-12-01 | NO.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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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정선-균음당오선생 묘역
-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158 부근(동호동)동학농민군으로 활약한 전현령 오정선(吳禎善, 1861~1923)은 <균음당유고(筠陰堂遺稿)> 3권1책이 1963년 석판본이 있다.
- 2018-12-10 | NO.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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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처대-서송정오처대묘비
-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복호마을1978년서송정오처대묘비墅松亭吳處大墓碑는 종후손 오중렬이 짓다. 進士墅松亭吳公(處大)墓表는 후석유고(後石遺稿)에 실려 있다.조선 숙종 때 광산구 삼도면 지평리 사실마을에 오처대라는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있는 학자가 있었다. 오공은 젊은 시절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자 숙종 임금이 친히 불러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도록 분부를 내렸다. 전례가 드문 특별한 운명이었다. 오공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 이르렀는데 길목에 난데없이 양면에 잔글씨가 빽빽히 쓰인 8폭짜리 병풍이 둘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국의 천자가 사신으로 오는 사람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오공은 그것을 보고 말채찍을 힘껏 후려쳐서 병풍 한쪽을 제치고 지나쳤는데, 자기 앞에 선 오공을 보고 중국 천자는 오는 길에 뭔가를 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오공이 노변에 세워진 '글씨병풍'을 보았노라고 대답하자, 천자가 껄걸 웃으면서 그 병풍에 쓰여진 글귀를 외워 보라고 했다. 오공이 그 글귀를 한 자도 빠짐없이 술술 외우는데 그 말미의 한 구절만을 외우지 못하니 천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신하를 시켜 그 현장을 보고 오도록 하였다. 그 신하가 돌아와서 병풍의 한 가닥이 접어져 있었다고 아뢰었다. 천자는 무릎을 치고 탄복하면서 오공의 깊은 학문을 치하하고 그 자리에서 서송정墅松亭이라는 호를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 크게 환대 했다고 한다. 조사결과 오처대 선생은 숙종 때 인물로 중국사신으로 가 중국천자로부터 서송정(墅松亭) 이라는 호까지 받았지만 선생에 관한 자료가 없어 안타까움이 많이 남는다.
- 2018-12-02 | NO.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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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최근덕(崔根德)
- 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최근덕(崔根德)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은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光州)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 적부터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慷慨)해 항상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고 퇴패적(頹敗的)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警戒)했다.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을묘년(1555)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저술하였다. 무오년(1558)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을 찾아뵈었고, 10월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달에 퇴계 선생을 서울에서 찾아뵈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기미년(1559) 3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 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거듭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으며 사관(史官)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올랐다. 주강(晝講)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565)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정묘년(1567)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關西)로 가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사신을 영송(迎送)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昇遐)하여 중로(中路)에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유(名儒)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應待)하되 상(常)과 변(變)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조강(朝講)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 번 옮겨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경오년(1570, 선조3)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餞送)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顧馬山)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歸全)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시매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重望)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퇴(辭退)했다.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使命)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의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臀腫)이 생겼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달려와 병문안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天)이니 모름지기 관념(關念)하지 마시오. 다만 어릴 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體得)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篤實)하지 못해 처음 마음먹은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늠름(凜凜)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眞面目)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단지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길을 재촉해 김공(金公)의 집에 이르러 이틀 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이때가 밤이 4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 적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했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했으며,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옥한 것이 모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儒宗)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卒)하였습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선생께서 평소에 주대(奏對)한 말씀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1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詩文) 6권과 《주자문록》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書簡) 3권과 《양 선생 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상하 2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되던 해인 무인년(1578, 선조11)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顧馬峯) 아래 낙암동(樂庵洞)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공이 본도의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康津)의 언답(堰畓) 30여 석지(石地)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지급해 주었다.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위로 이건(移建)하였으며,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6년 을미년(1655) 4월에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중창(重刱)을 했고, 12년 신해년(1671)에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 선생과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숙종 9년 계해년(1683)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정조 12년 무신년(1788) 4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광복 전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을 모아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에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기미년(1979)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사림과 본손(本孫)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임술년(1982)에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세웠고, 계해년(1983)에 장판각(藏板閣)을 지었으며, 경오년(1990)에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세웠다. 신미년(1991)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으며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고 사림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裔孫) 대종회(大宗會) 회장 세훈(世勳)과 서원복원회(書院復元會) 회장 세탁(世鐸)이 나를 성균관(成均館)으로 찾아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청탁하니,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 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 2022-04-30 | NO.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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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경현묘지 (庾敬玄墓誌銘)
- 유경현묘지 (庾敬玄墓誌銘)는 1235년(고종22)의 것으로 추정된다. 유경현(1180~1235)은 본관은 무송(茂松).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유자량(庾資諒)의 아들이다.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1227년(고종 14)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관장하였다. 이 해에 상서우승 지어사대사(尙書右丞知御史臺事)가 되고, 1232년에는 우승선으로서 몽고사신 도단(都旦)의 행패를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와 친교가 깊었다.
- 2023-07-17 | NO.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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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사-설강유사선생묘갈명
- 광주시 광산구 1885년瑞山柳氏鍾城府使雪江公諱泗 설강유사선생묘갈명은 덕은 송병선이 짓다.유사柳泗(1503~1571)는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이며 자는 중연(仲沿), 호는 설강(雪江)이다. 남구 유등곡柳等谷(현 이장동 양과동) 출신으로 봉훈랑(奉訓郞, 문관 또는 종친에게 준 종 5품 벼슬) 경흥교수(慶興敎授, 유생을 가르치는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1522년(중종 17) 21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28년(중종 23) 27세 문과(별시別試 병과4丙科4)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무장현감 . 전라도사 . 낙안군수 . 삭주부사 . 종성부사 등을 역임했다. 1545년(인종 1 을사)에 인종이 죽자 새로 즉위한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의 거두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거두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윤파에 가담했던 문신 류인숙柳仁淑ㆍ류관柳灌 등 많은 문신들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을사사화가 5-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또 1547년(명종 2 정미)에 정미옥사까지 이어지니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1558년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량李樑(1520-1571)이 왕의 총애를 기화로 전권을 휘두르며 당파를 만들어 윤근수尹根壽 심의겸沈義謙 등을 제거하려 하자 그를 위시한 권신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했다가 무고로 몰려 권신 이량(李樑)과도 사이가 벌어져 고향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자신이 제례를 제정하여 자손에게 가르치고, 장횡거(張橫渠)의 글을 베껴서 간행하고자 손에 훈계하는 글을 써서 심광언(沈光彦)에게 부탁하여 간행했다. 1563년(명종 18)에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보령에 유배되어 이량이 세력을 잃게 되자 선생을 다시 기용하려고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제수했으나 선생은 나이도 늙고 병이 있어서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58년 고향의 건너편인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곳 노평산魯平山 기슭에 터를 잡아 정자를 처음 세우고 "소강절邵康節 호가지의浩歌之意"를 취해 호가정浩歌亭이라 이름 붙이고 종노지계終老之計로 삼아 서식棲息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이 정자가 불타 없어져 후손에 의해 1871년에 다시 세웠다. 그 후 1932년과 1956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의 건물은 정사각형으로 축조한 대지의 중심부에 정측면 다같이 3칸으로 지어졌다. 저서로 『설강집』2권과 『위친필봉제축유서爲親筆奉祭祝遺書』가 전하고 있으며, 광주의 유림들은 경렬사에 추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류사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 현실에 휘둘리지 않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보면 류사라는 인물의 절개와 지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현실정치에서는 꽃을 피우지는 못했으나 그의 학문적 열의와 절조는 이 땅에 뿌리내려 후세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 2018-12-02 | NO.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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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대장죽파오성술묘비
-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417-31978년義兵大將竹坡吳成述墓碑는 종후손 전 국회의원 오중렬 짓다.광산구 본량동을 가다보면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죽파(竹坡) 오성술 선생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선생은 1884년 5월 15일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오영선과 나주 임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인수, 자는 성술, 본관은 나주이다.선생의 가문은 전형적인 지방 양반가였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윤택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부친이 참봉 벼슬에 있었으며, 훗날 선생이 거의할 때 50여 두락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충당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선생은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기에 더욱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일제의 정치적·경제적 침탈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1907년 용문산에서 거의했다.먼저 가재를 털어 의병기금을 마련, 김태원의 의진에 입대해 활약했다.오성술 선생은 몸을 담고 있던 의진의 의병장 김태원은 호남 창의대장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욱 적과 격렬히 접전을 전개하다가 1908년 4월 광주 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이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과 함께 의진을 수습하고, 일부 잔병은 조경환이 인솔했다.선생은 적과의 접전에서도 적극적이었으나 군자금 모금도 소홀하지 않았다.1908년 1월 10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제등 일가를 습격해 3인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한 후 방화했다. 그리고 나주에서는 밀정 황도현의 재산을 몰수한 후 살해했다.1909년 1월 30일에는 광주 대기면에 살던 일본인 삼십내의 집을 습격해 2천500엔 상당의 물품을 몰수했다.이러한 일련의 모금 활동이 적에게 알려지고, 마침내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됐다.뒤따라 박영근, 심남일, 강무경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왔는데 이들 중 특히 심남일과는 일찍이 남평에서 회동해 군사문제 제반에 걸쳐 상의한 바도 있었다. 오성술은 광주 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후에 공소했으나 기각, 1910년 9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내 평생 시름없는 사람이라 자위했건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져 그 걱정뿐이네 술 속의 취기는 밤낮이 없건만 글 속에 대의는 춘추를 지녔구나 집안이 기울어도 천금 부자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붓을 내던지니 오직 백성 시중들 생각만 하네.세상살이에 마음속 일을 알기 어렵지만 분노 그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生平自謂我無愁 天步艱難是可憂 酒褒微?罔晝夜 書中大義有春秋 傾家不顧千金富 投筆唯思萬戶候 處世難知心內事 慨然此外更何求-광산저널(2007)
- 2018-12-02 | NO.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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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긍-사은부사 이긍 묘역
- 광주시 북구 각화동 산 28 부근태봉 서쪽 자락에 이긍李兢1389-1433의 묘가 있다. 북구 군왕로 311 휴먼파크서희스타힐스아파트 건너편이다. 국가에서 이곳에 묘를 쓰도록 하였다. 연고가 없는 광주에 묘를 쓰게 된 데에는 광주의 유력인사였던 그의 장인 광산인 이초 李椒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405년(태종 5)과 1427년(세종 9)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후 1433년(세종 15) 당시 명나라 사은부사로 북경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압록강 첨수참括木站에서 인타깝게 생애를 마감하였다.그가 죽은 뒤 묘를 광주에 쓰게 되면서 광주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증손 계인 繼仁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선조의 묘와 가까운 오치동으로 이사해 오면서 함평이씨가 오치동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 2018-12-07 | NO.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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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제-필문이선제신도비
-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1-61996년필문이선제신도비(蓽門李先齊神道碑)는 원래 1912년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64~1919)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95년에 이가원(1917~2000) 박사의 추기 비문을 받아 1996년에 세웠다. 한 비에 시기를 달리하여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있는 셈이다.마을 입구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 신도비는 전서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의 전서를 집자하였다. 이 비와는 다르게 1957년(정유)에 곽종석 찬 비문의 신도비도 있었다.공적이 있어 나라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명하였는데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 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는 1988년 필문 이선제의 위업을 기리 위해 필문로(蓽⾨路, 남광주-서방사거리)의 가로 명을 지정하였다. 재실인 여재각(如在閣, 1960년 건립)도 함께 있다.그리고 제청골 골짜기에는 양심당(養⼼堂)이 있다. 이선제의 큰 아들인 이시원이 시묘살이 하던 터라 한다.신도비 원문은 《면우선생문집》권47(한국문집총간 344집 122쪽)에 실려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었다고 하는 600년쯤된 왕버들이 있다. 괘고정수라 한다.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글이 써 있다.光國佐理功臣嘉善大夫行吏曹參判藝文館提學問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慶昌君 贈正憲大夫曺判書藝文館大提學蓽門先生李公神道碑銘 幷序 參贊 俛宇 郭鐘錫 謹撰 文正公 眉臾 許先生穆 集篆際聖朝啓運英碩雲興贊成右文之治類多以經論謨譙章翰詞頌假鳴於一時其能游心理域率履法門循聖賢之塗轍而進則訃君以當道退則倡學一方俾來者有可繼焉盖亦十不二三矣時則有若慶昌君篳門先生李公者其庶乎爲先覺於草昧之世而不洋於行藏之正其學足以有爲其功足以開後者乎先生諱先齊字家父蓽門號也其先新羅之金也至麗祖時有諱宗金以功賜今姓封光山入傳而日珣白翰林以忠 贈尙書左僕射是生奇丹陽府今 贈密直副使生弘吉密直提學生日映府使贈兵曹參判娶密直副使草溪鄭允吉之女以共武甲子生公干光之泥館山下幼而眉字淸瀅神采照人寡言笑重作止儼乎有成人儀屆就傳穎悟絶倫博經史通大義旣而嘆曰人之性天也非學無以知性知天下知性天無以爲人遂慨然有求道之志閒權楊村梅軒先生兄弟者遂邃性理之學從之難疑講質渙然有得踐行米篤而所适益精徵蔚有斯文之望 莊憲王甲午府策選第一由翰施玉著歷敭淸華亞長銓曺賓客 曺筵啓沃論思懇懇於出治之本嘗啓曰今之言者以富國强兵爲先務然此覇政之餘習人君正必正朝延百官萬寐則國安有不富兵安有不强又曰古者擇士入學學成然後論之論定然後宮之今不擇賢否不論高下槪取功今文詞之未望其謀國之無缺不亦難乎又言宜選有德之士置之儲宮興之起居出入如莊嶽之聽齊語則此宗杜生靈無疆之福時 上勵勵精圖治虛心采納春注日深倚以公輔繪公像於御屛以龍之甲辰遭外艱丙午居內憂時喪紀廢壞百日卽吉公獨行三年之制哀毁踰節情文兩旨造主立祠一依於禮人多化之嘗爲藝文館提學鄭麟趾金銚望等受命撰麗史錄光國勳封慶昌君退老于鄕上疏請陞光山爲洲牧建喜慶堂選一鄕文學地淫之士別爲需籍以獎育又立約于鄕倣藍田遺意春秋會集而勸規之於光之士皆敦尙經行民俗丕變爲湖南之純享年七十一而經葬于萬山洞亥原後 贈吏曹判書藝文館大提學高齎峰先生敬命以先生存倡學之功嘗疏請陞享聖廡而不報識者恨焉士林立祠宇康津之秀巖以俎頭祀之者淸心堂詞元玄孫履素齊仲虎來孫東巖發南溪洁從享焉其數之垂于家者遠而不替德之入于人者以以不忘斯可以觀矣配貞夫人寶城宣氏節度使仲吉女生五男始元判中樞調元吏議 贈禮判翰元校理贊元修撰享元副提學孫曾而下詵善詵然不可勝紀先生之墓久闕神道之刻后孫承鎰以其門父老之命走四百里于伽倻之西徵銘於鐘錫今距先生將五百年劫灰屢晹文獻寢泯其徵言懿蹟固有不可得以悉孝矣謹據夫性齊許文靈公傳之狀與後孫承愚之錄最其槪而爲之銘曰郁郁文化莊靈之世號爲鄧隆來汝 王佑篳門不閉風雲之從其稱差覇學不貴藝沃于 宸哀王肅不舍罘罳有繪贊我笙鏞衣冠孲孲損護孝悌湖學螵螵陽海之老有會有詣載篤于耶歸 歸箇箇鳳翥邁以奕厥宗千載起懦光山麗君子攸宮湖天不夜湖樹不髮孰識其功通政大夫前議政府參贊弘文館 經筵官兼侍講院書筵官苟一郭鐘錫撰文正公眉叟 許先生穆集篆 丁酉 三月日立번역광국좌리공신 가선대부 호조참판 세자좌부빈객 증정헌대부 리조판서 예문관대제학 필문선생이공신도비명[서문을 함께 쓰다.]참찬 후한 곽종석이 삼가 짓고 문정공 미수 허목선생의 전자를 집서하다.성군의 명대를 즈음하여 인걸이 많이 태어나 문학을 숭상한 정치를 도왔다. 거의가 경륜모모와 장한사송으로서 일시에 이름을 올렸으나 그 능히 성리학에 전념하여 법문을 따르고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고 나아가서는 군상을 대도에 어긋나지 않게 받들고 물러난 즉 일방을 거느려 후학으로 하여금 가히 이어가게 한 사람은 대개 열에서 둘셋도 못되었다.그대 경창군 필문 이선생 같은 이가 있어 거의 초매한 세상에 선각이 되고 행장의 정직함이 도에 배반함이 없어 그 학문은 족히 써 하옴이 있고 그 공은 족히 써 후학을 깨우침인져. 선생의 휘는 선제요, 자는 가부이며 필문은 그의 호이다. 그의 선계는 신라의 김씨이다.고려 때에 휘 종금의 공으로 광산을 봉하니 팔전하여 순백은 한림이니 충으로 상서좌복야로 증직하였고, 아들 기는 단양부령으로 밀직부사를 증직하였고, 그의 아들 홍길은 밀직제학이요, 그의 아들 일영은 부사로 병조참판을 증직하였는데 장흥위씨 평장사 문하시중 충의 딸과 밀직부사 초계 정윤길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종 기묘년에 광주 이관 산하에서 선생을 출생하였다.어려서 미우가 맑고 신채가 훌륭하였다. 언소를 적게 하고 기거를 무겁게 하여 엄연히 성인스러웠다. 좀 자라서 두뇌의 명석함이 뛰어나 경사를 널리 보고 대의를 통달하였다.이윽고 탄식하여 가로되 사람의 성정은 곧 하늘이니 학문이 아니면 성정과 천리를 알 수 없고 성과 천을 알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개연이 구도의 뜻이 있어 양촌 권근, 매헌 권우 선생 현제가 성리설에 공부가 깊다는 말을 듣고 스승으로 섬겨 강론하고 질문하여 환연히 득함이 있어 더욱 독실히 실천하고 더욱 공부가 정밀하여 유림 간에 물망이 높았다.세종 기해년에 제일등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옥서로부터 청화아장 전조빈객을 역이하였다. 위연에서 군상에게 치국의 근본을 간간히 논하였으며, 일찍이 아뢰어 가로되 이제 말하는 사람들이 부국강병으로서 먼저 할 것을 생각하나, 그러나 이는 패정이 여습이니 인군이 정심하여 조정 백관 만민을 바로 잡은 즉 국가가 어찌 불부하며 병이 어찌 불강하리요.또 가로되 옛날에 선비들을 뽑아 학교에 들여보내 학문이 성공한 뒤 인품을 의논하고 의논을 정한 뒤 벼슬을 시키더니 이는 현부도 가리지 아니하여 고하도 의논하지 않고 대개 공령문사만 취하니 그 모국의 무결함을 바람이 또한 어렵지 않나이까. 또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유덕한 선비들을 뽑아 세자 곁에 두고 같이 기거하며, 출입하기를 장악에서 제어를 듣는 것 같이 한즉 종사생령의 무궁한 복이나이다.그때 상이 정치를 한번 잘하자는 뜻으로 마음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상의 총애가 일심하여 재상으로 추대 하였다. 공의 초상화를 어병에 그려 총애를 받았더니 갑진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병오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그때 상기가 퇴패하여 백일로 탈복할세 공께서 홀로 삼년상을 행하여 쇠훼가 절도에 넘고 정문이 겸하여 극진하였으며,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한결같이 예를 따르니 사람들이 많이 본받았다.일찌기 예문관 제학이 되어 정인지, 김도 등으로 더불어 명령을 받아 고려사를 찬하니 광국훈으로 경창군으로 봉하였다. 향리에 퇴로할세 상소하여 주목의 고을로 승격하고 일향문학의 선비들을 뽑아 별도로 유적을 만들어 장려하며 기르며, 또 향약을 세워 남전여씨 유의를 모방하여 춘추로 회합하고 권하며 따르게 하니 이에 광주 사림들이다. 경행을 돈상하여 민속이 크게 변하여 호남의 순향이 되었다. 나이 팔십에 돌아가시니 만산동 해원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에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을 증직하였다.제봉 고경명이 선생께서 창학의 공이 있다하여 일찍이 문묘에 배향할 것을 소청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니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순묘 경진년에 사림들이 강진 수암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니 아들 청심당 조원과 현손 중봉, 중호와 내손 동암 발과 남게 길이 같이 배향되었다. 그 가르침이 가문에 미친 것이 이와 같이 멀어도 없어지지 않고 덕이 남에게 미쳐 오래도록 잊지 않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부인은 정부인 보성선씨이니 다섯 아들을 낳았다. 시원은 판중추요, 찬원은 수찬이요, 조원은 이조참의로 이조판서를 증직받았고, 한원은 교리요, 형원은 부제학이요, 손증 이하는 하도 많으니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선생의 묘에 오래도록 신도비가 없더니 수혼 승일이 그 문중 부로의 명으로써 사백리 길로 가야산 서쪽에 와서 종석에게 비명을 청하니 생각해 보면 선생께서 졸아가신지 오백년이 지난지라 난리를 여러번 지나 문헌이 없어져 그 중요한 말과 아름다운 사적이 진실로 가히 다 알지 못한지라 삼가이 성재 허문헌공 전의 행장과 후손 승우의 기록을 상고하여 그 요점만을 뽑아 명을 짓노라. 명에 이른다.성한 문화여! 세종시대에 가장 훌륭하였으니 어찌 왕을 돕지 않을까? 필문을 닫지 아니하였으니 풍운의조화로다. 그 패도를 부끄러워하며 학문은 재주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왕의 마음을 깨우치니 왕께서 버리지 아니하여 공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그 공적을 칭찬하였도다.의관이 줄줄이 늘어짐이며 읍양하고 효제하도다. 호남의 학문이 융융함은 양촌 권근과 매헌 권우의 제자로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학문이 독실하니 면면개개가 봉황새와 붕조와 같이 상서스러워 그 씨족을 빛내도다. 천재에 게으른 사람들을 깨우침이여! 광산의 고을은 군자의집이로다. 호남에 광명을 주었으며, 호남에 몽매함을 면하게 하였으니 누가 그 공을 알리요? 임자년.*수정 2023.11.21.
- 2018-06-11 | NO.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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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헌-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
- 광주시 북구 오치동 956-8(오산정 내)1923년이 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朝鮮遺民梧山李公之碑는 오산梧山 이용헌李龍憲의 묘비로 현와 고광선高光善이 짓고 종2품 가선대부 전 참판 이우명李愚明이 쓰다. 오산정 앞에 있었다. 오산정은 부친을 위해 아들인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이 지었다고 한다.현재 오산정과 이 묘비는 사라졌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이 비석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 753번지 해림농원 부근에 있다. *2020.4.21. 수정
- 2018-11-12 | NO.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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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퇴은 이홍길 신도비
- 광주시 남구 원산동필문 이선제의 부친인 퇴은退隱 이홍길李弘吉 신도비퇴은 이홍길(1324~1406)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초명은 계방桂芳. 호는 퇴은退隱. 본관은 광산光山. 밀직부사기의 아들로 이장동 출신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업에 탁월하고 시문에 밝았으며, 역리에 통달하여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제학과 개성윤을 역임하고 상호군이 되었다. 시국의 어지러움을 알고 있던 차 1388년(우왕 14)에 이성계가 왕명으로 중국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 왕을 내쫓고 최영을 유배시킨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벗 삼아 도리를 밝혔다.고려가 망하고 조선에서 누차 관직을 높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계를 지켰다. 항상 선악화복을 모든 자질에게 일깨워 가르쳤다. 이때 상을 당하여서 당시 백일 탈상의 고려 풍속을 독단으로 주자의 가례를 본받아 삼년상을 치루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이 고장에서도 이 풍속을 따르기 시작 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에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2019.1.8. 수정
- 2018-12-17 | NO.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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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령 최공의 묘갈명(최형한)
- 陶菴先生集 卷三十一 / 墓碣[一]이재(李縡, 1680~1746) 숙종6년~영조22년장령 최공의 묘갈명이재(李縡)가 짓다 ― 『도암선생문집』 권31, 「묘갈(一)」 옛날 연산군 시대에는 사화(士禍)가 극심하여, 한때의 현인과 군자들이 무차별하게 제거되고 베어졌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나는 예전에 호남 출신 유생들과 교류하며, 신참봉 응순(辛參奉 應純)이 편찬한 자료를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장령 최형한(掌令 崔亨漢)은 경주(慶州) 사람으로, 생원 최영원(生員 永源)의 둘째 아들이다. 연산군이 무도하고 방탕하던 시절, 그는 직언을 감히 올리고 궁궐 아래에서 명을 기다리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분이 바로 그 사람이다.”나는 최공이 시대를 잘못 만나 충정을 품고 억울하게 죽은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긴다. 하지만 당시 실제 사정을 가장 정확히 기록한 것은 《무오당적(戊午黨籍)》인데, 거기에도 최공에 대한 내용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혹시 그가 죽은 일이 무오사화 이전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점은 단정할 수 없다.최씨 집안의 가승(家乘, 족보)은 병화(兵火)로 모두 소실되어, 선배 문인들의 글 속에 일부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최공은 성화 경자년(1480)에 진사가 되었고, 그로부터 4년 뒤인 계묘년(148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이후 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복상을 마친 뒤 관원 추천으로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으며, 사신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옥과현감에 제수되었고, 이어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장령(掌令)이 되었다.이것이 최공의 관력(官歷)이다. 옥과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하향을 안타까워하였다. 이때 탁영 김일손(金馹孫)이 ‘송최옥과서(送崔玉果序)’를 지어 보냈고, 거기서도 그의 문학이 뛰어나고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다고 칭송하였다.최공은 광주에 세거하였으며, 고을 서쪽 건지산(巾之山) 자락에 조상의 묘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집과 겨우 한 길(1리) 떨어진 곳에 정자를 짓고 ‘영사(永思)’라 이름 붙였으며, 《성용재기(成慵齋記)》에는 그의 효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그는 한 시대의 문인·관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그러나 유독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에 대해 믿을 만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아, 옛사람들은 임금에게 간언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물러나거나, 직위 아래에서 죽음을 택하곤 하였다. 혹은 분노와 울분으로 뜻을 펴지 못해 자결로 그 뜻을 드러내기도 하였다.최공은 물러나지도 못했으니, 그의 죽음은 이 두 경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올린 직언의 내용이나 죽음의 구체적 방식(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약을 복용했는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런 일은 마땅히 국사 편찬자가 상세히 기록해야 할 일이며, 후세 사람들이 이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그러나 후대에서 알든 모르든, 그것이 최공의 진실한 삶의 가치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掌令崔公墓碣 往在燕山之世。士禍罔極。一時賢人君子。芟刈斬伐。殆不可勝記。至今思之。可爲於邑。余從湖南士友。得辛參奉應純所爲輯錄者讀之。有曰掌令崔亨漢。貫慶州。生員永源之第二子也。燕山荒淫無度。乃敢抗直。待命闕下。遂自盡焉。公卽其人也。余竊悼公遭時之不幸。懷忠掩抑而死。然當時事實。莫詳於戊午黨籍。而公則無少槪見。豈公之死。在於戊午之先歟。是未敢知也。崔氏家乘。盡逸於兵燹。惟得於先輩文字者。略有可据。蓋公成化庚子進士。越四年癸卯及第。連喪二親。服闋始由館薦拜司憲府監察。充書狀朝燕。比還出監玉果縣。旋授靈巖郡守。入爲掌令。是公履歷。而其赴玉果也。朝廷咸惜其去。濯纓金公馹孫作序以將之。謂公文學優贍。引重甚盛。公世居光州。州之西巾之山。親墓在焉。去家纔一里。公作亭於其側。名曰永思。成慵齋俔爲記文。稱道其孝。公之見推於一代名士大夫者如此。而獨恨夫致命一事。無足以考信者。嗚呼。古之人諫於其君。而不聽則去。否則死於職下。又往往憂憤鬱塞。無以見其志。則寧引决以自快焉。公旣不能去。則其死也。固不出於斯二者矣。然其抗直之辭。不可得以詳。而况所謂自盡者。或引敺或仰藥。其事不一。則不知公所處。又果如何也。是則國史氏必有大書特書者。後之人當自知之。然知不知。於公亦何加損焉。公字倬卿。其先自麗朝政丞雞林府院君光位始。其後孫潞中領郞將。郞將之子仲濟縣監。輯錄所稱生員。其子也。公外祖曰生員陰城朴繼陽。公娶靈光金氏。郞將孝本之女。三男三女。男長彥漴生進兩試。次彥泓進士。次彥冲生員。女爲進士宋驌,參奉丁需,參奉張俔妻。彥漴男松年文科縣監。彥泓男栢年部將。春年參奉。彥冲男應期,應世,應時。張壻之子以吉司諫。三房子孫甚蕃。而俱以儒業承家云。公之墓亦在巾之山。八世孫進士洛及沃。來請樹隧之文。余謂公之事迹。固微而不章。而乃其心則蓋所謂天理民彝之不可泯者。理必終顯於世。盍少遲之。洛作而言曰。雖然。願且得子之言以眎諸後也。余不能辭。銘曰。我聞濯纓。節行之士。餘事文章。闊步高視。而獨於公。引重若是。聲氣之同。孰疑其死。百世之後。請徵國史。
- 2025-05-26 | NO.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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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의 장군 예장석묘(묘비)
- 광주시 북구 화암동 산239전상의장군예장석묘(全尙毅將軍禮葬石墓)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상의(1575∼1627)의 장군의 묘소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이다. . 장군은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3년(1625)에는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광해군 9년(1617)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동포 1500여 명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 또한 인조 5년(1627)에 후금이 인조의 친명정책을 구실삼아 3만 대군으로 침략하자 안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다. 그러나 구원병이 오지 않자 모든 장병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누각 위에 올라 싸우다 53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관직이 높여졌으며, 숙종 10년(1684)에는 안주의 충민사에 헌종 15년(1849)에는 광주의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정부인 풍천 임씨 및 광산 김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묘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묘역 근처에는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 2018-07-02 | NO.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