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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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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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자증통훈대부사의사정정덕방지려
    광주시 동구 운림동 1691937년이 효자증통훈대부사의사정정덕방지려(孝子贈通訓大夫司儀寺正鄭德邦之閭)는 서산정씨정려 내內에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정리중)
    2018-11-11 | NO.5
  • 효자참봉배공묘갈명병서
    광주시 서구 풍암동 운리마을미상이 효자참봉배공묘갈명병서(孝子參奉裵公墓碣銘幷序)
    2018-12-01 | NO.4
  •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16-8 황산사 아래1956년황산사 아래 천선당 김선진행적비가  있다.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했다.  행적의 내용은 노조모와 편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향리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풍적비 옆에는 풍산홍씨 실적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효행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선진 효자는 홀로된 어머니를 모실 때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였으며 어머니의 명령이 있으면 거역하는 일도 없었고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어버이를 모시는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항시 비통하게 여기며 눈물을 흘렸고, 애절하지 아니할 때가 없었다.14세에 평택임씨 석주(錫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후손으로 법도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단정하고 얌전하여 김효자와 좋은 배필이었다.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집안 모두가 화목하며 얌전한 며느리라는 칭송이 높았다. 그 뒤 남편은 부인에게 어머니 봉양을 당부하고 현와(弦窩) 고선생(高先生)을 찾아가 2년여 글공부를 하였다.효자는 23세에 태학생(太學生)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을 닦으면서 훌륭한 선비들과 함께 어울렸으니 이는 자신의 문견(聞見)을 넓히려는 것뿐 아니라 어머니의 열행을 표창하고자 하는 성심이 있었기 때문이다.서울시내 큰 선비님들 모두 다 김효자의 효성에 감동되어 찬양하는 글을 써 주었으며 원근(遠近)을 막론하고 선비 모두 다 홍씨(洪氏)의 특별한 열행을 알게 되었고 각 고을 향교 통문과 각처 서원에서 보내 온 글은 한권의 책이 되었다.김문발이 세운 부용정(芙蓉亭)이 타인의 소유가 된 것을 김효자가 단독으로 완원시켰으며 또한 해마다 7월 백중이 되면 쌀 두어 섬으로 온 마을 궁핍한 분들에 나누어주었다. 1944년에는 일본 사람이 교묘한 계획으로 물품을 이용하여 민간인들에게 이익을 착취하는데 도청 군청 면사무실까지 모두 동화가 되었다. 김효자가 단독으로 거역 파괴운동을 전개하여 이 부정을 신문에 기재 보도하였으니 이는 모두 다 김효자 30년 전 일로 어머니 명령을 받들어 거행한 것이다. 세상 모두가 대의남자(大義男子)로 칭찬하였건만 불행하게도 단명하여 34세의 나이로 1949년 11월 2일에 죽었다. 하늘은 어찌하여 수명을 주는데 인색하였을까 김효자가 겨우 청장년 시절을 살았지만 그 의로운 행동은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다. 그 어머니는 지금도 70의 나이로 건강을 누리고 있으며 선조님의 부용정 역시 아무 탈이 없고 관리 도적 행위도 없으니 기타 제반 일은 가히 미루어 짐작하겠다. 아~ 김효자로 하여금 지금까지 생존하게 하였다면 행정가들 본을 받아 변화하였을 것이니 어찌 몸을 닦고 행동을 독실히 하는 선비라고만 하겠는가.<원문>省以日溫淸如時一經慈候之命則勿逆勿怠恒時悲痛者幼孤不能盡誠於嚴君皇靡逮讀主衰蓼莪之淚省楸顔丁不及其返而息無時不切十四歲?平澤林錫周之女琴湖諱亨秀后生長于壺則之門端莊幽閒德配君子誠孝事舅姑堂內和集皆以貞婦稱君自後奉偏慈命負?于弦窩高先生門二十一杖策于鹿洞書院責課數年二十三復往從太學生于成均館學業成家遍遊於長德宿儒之門非直以博吾聞見以其慈候表彰之誠心也京鄕鴻碩皆感君誠孝而贈之以?善之筆用是遠近士友皆知洪氏特節之行各郡通狀及散處院宇兪文積以卷軸監司公所築漆石芙蓉亭爲人所執君濁0金額而還完且每歲百種之節以白米數石賑恤鄕里之窮之歲甲申日人以巧?之物品欲取利于民間自郡道廳以至各面室皆和同之君獨力拒破之大運動元解至於新聞記載此皆君三十前事而奉行親命者也世皆以大義男子稱之不幸短命以三十四己丑十一月二日切其奈天壽何可欲者君之生世也?逾壯年其行義之起越乎老成如許孝烈之親化疾尙今康寧七十而先祖芙蓉亭天然無患冠賊之行肆見?而破之諸盤從可推矣噫使君至今在世則行政者取法不法者見化豈徒爲修身篤行
    2018-06-15 | NO.3
  • 효자통정대부서산정공봉서지려
    광주시 동구 운림동 5691937년이 효자통정대부서산정공봉서지려(孝子通政大夫瑞山鄭公鳳瑞之閭)는  효자 통정대부 서산정공봉서지려(孝子通政大夫瑞山鄭公鳳瑞之閭)는 서산정씨 정려각내에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비문 정리중)粤昔 英孝大王丁巳之歲湖南断御史李永益以光州鄭瑞孝行若共妻田氏孝烈雙行若其 德邦孝行事請旌褒以其曾孫東鉉奔走而暴之也竟蒙允, 賜ft復其嗟乎伊來年間子姓弱未遑建設迺於丁丑之秋公六世砰 以其王考萬在遣託承命於其祖母河ǐ鄭氏出遺財將設 閻與其宗孫 錫及郷浦i 別擇瑞 山下武陽之地樹礎以石材藥之侈其旌使鄭賢九鄭潤 莞謁余以記之辭不獲照拨 綱錄及光2誌閱其狀公字賢擧號晚梧官通政大夫以其孝也孫系出瑞山高FR壁::功臣都僉讀端山君諡喪,烈公諱仁鄕后淸白吏吏曹判祺諱珣十一世孫高祖諱有伸蚊樞曾祖諱得祥祖諱萬弼,諱朝海嘉妣貞夫人全州李氏秀女公以肅廟庚寅二月九日生卒於州窮丁亥十二月二1,六日亨年五十四歲葬於德林山先を下負乾原 碣初配水原崔氏致大女無育繼配秋城田氏萬鐘女擧三男二女男長曰德孝男時民次ㄩ德悌男浜民五氏次日德邦男喆民彦民福民女敏哲文哲奎南平人 ǐ耽津崔宗勳以下: 之惟貝鉉福民2R男也公生潁悟在匍匐,2,跪足飲乳絶不啼哭室堂無烂歳惟嬉疾走仆地被親責.自其後行步安祥終身疾走六歲失持俯伏床下哀哭競殒九歲小學2团抗應對進退之節毫無 錯晨昏之省自有定刻里人之以鄭小學 六歲而冠以敬身爲箴俗有百會 1而公獨然處髮初無虧損家甚貧菽水難繼公肃則耕漁以供甘旨夜則侍親讀書面目。手足胴坻自不知勞侍親齊湞史不雖手執,,剉2煎之一不委他夜不解带呼天願保及其危篤其妻淑夫人田氏斫指進血幸得甦明年親病又篤田氏ㄡ斫指進血以廷三日意遭娘夫婦哀毁斐至減性公盧墓三会 寺????繡衣金順掩足從造虞見其實行嘉而餽之公以哀毁成崇屢年呻吟郤而田氏連裂五指灌血以廷三日之命公託田氏以教育子女言訖而逝田氏恤在郎欲下城了指六年在天成扶持哀懇行往坐臥緊不捨田氏不能自我以効遺也忍 十年自成藥00餌。効而至絶德邦斷指進血甦而廷三日德邦居喪易,,主亦盧墓三年繃衣李公勉昇邡鳴呼有是夫而有足婦有是父是母而有是乎卓行異蹟,詳萃一家所以系人口林州守之篤直根句寔啓前後相繼加之以肖孫束鉉額而暴之竟有是 命又有萬,在之孝思經營遺滷未果而歿喪若孫重其遺不私其道財而紈 中以玄怷没阿錫昞冕之輩ffi其但 綱欲堡却有三孝烈之門巍然若靈光以警萬目奚獨爲鄭氏之幸其亦有補於世散云爾嘉善大夫巫文館1 提學原任何閣檢校待敎世子宮侍講院檢校說書藝文館檢校制誥完山李範錫撰ill政大夫行侍俎亮侍倂違城徐丙斗書並篆
    2018-11-11 | NO.2
  • 효자함안윤공광훈 열부유인나주임씨 효열실적비
    광주시 남구 행암동 9, 구남마을 광유재 앞1986년효자함안윤공광훈열부유인나주임씨효열실적비(孝子咸安尹公光訓 烈婦孺人羅州林氏 孝烈實蹟碑)는 1986년에 세웠다.관산 고광열이 글을 짓고 전주 이학용이 글씨를 썼다.
    2018-06-11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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