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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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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열부밀양박씨기행비
    광주시 북구 대촌동 953(대촌식당 맞은편)1969년이 효열부밀양박씨기행비(孝烈婦密陽朴氏紀行碑)는 邊時淵 짓고 李炳玹 쓰다.
    2018-11-13 | NO.20
  • 효열부영천이씨송적비
    광주시 광산구 본량동 풍숙마을(남산동)1984년이 효열부영천이씨송적비(孝烈婦永川李氏頌績碑)는 광산구 본량동 풍숙마을의 북쪽 끝 얕은 산자락에 1984년에 세웠다. 대리석 비각이 갖추어져 있으며 오석에 비문을 음각으로 새겼다.孝烈婦 永川李⽒는 永陽郡 ⼤榮의 后인 惠⺠院主事 秉夏의 女로 ⻄紀 1912年 壬⼦正⽉⼆⼗⽇에 潭陽郡 ⼤⽥⾯ ⼤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孝誠이 ⾄極하여 定省의 節을 다하고 ⿇絲紅⼯에 四德을 兼備하였는데 年⼗九에 羅州 吳龍烈에게 出嫁하였으니 곧 羅城君 諱 ⾃治의 后인 ⼠⼈ 準⽄의 ⼦婦이다. 孝烈婦는 婚禮만을 겨우 마치고 新⾏前에 突然 그 夫君이 臥病했다는 消息을 듣고 바로 달려가서 斷指注⾎을 하고 百⽅으로 加療를 하였으나 마침내 他界하고 말았다. 孝烈婦는 그로부터 ⻝飮을 全廢하고 下從하려고 자리에 누웠으나 媤⽗⺟님의 懇切한 開諭로 옳게 여기어 바로 일어나서 事親奉先의 節을 다하는 한편 紡績을 爲業으로 하여 家勢를 隆昌시켰다. 그후 媤⽗⺟께서 千年을 다하니 ⼀遵禮制로 遂從의 節을 다하였다. 한편 孝烈婦에게 天⾏으로 遺⾎이 있어 ⽣男을 하니 사랑으로 잘 기르고 가르치니 ⽂⺟나 孟⺟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아들 點敎는 자라서 孝烈婦의 뜻을 어김없이 그 家業을 이었으니 孝烈婦의 맺힌 한이 풀렸다. 이 事情을 안 光州鄕校典校 朴夏構와 光州儒道會⻑ 朴種道와 光州 慕聖會 鄭海英 등의 鄕儒가 薦擧하니 ⻄紀 ⼀九⼋⼆년 光⼭郡守 朴炯寅의 表彰을 받은 바가 있었다. 그후 모든 公議가 孝烈婦의 ⾏績은 可謂 ⼤冬松栢이요 昏街明星과 같다고 稱頌을 아기지 않았다. 아, 처음의 뜻을⼋⼗平⽣ 變함 없이 그대로 행하였으니 凜烈의 氣가 九曲에 畜積된바 아니면 어찌 이와 같으리요. 從⼦敎喆 珍敎 亨喆이 抱狀하여 孝烈婦의 ⾄⾏ 卓節은 始終이 예에 變함이 없으며 지금에 부끄러움이 없으나 때가 옛과 달라 旌褒를 물음이 없으니 누가 이를 거두어 光金明珠를 滄海沙礫의 사이에 묻히지 않게 할 것인가. 그러나 고을의 여러 입에 새겨졌으니 어찌 永世不泐⼒함이 아니겠는가⻄起 ⼀九⼋四年 甲⼦ 正⽉ ⽇ 羅州 吳國烈 撰甲⼦ 三⽉ ⽇ 晋州 鄭忠燮 書
    2018-11-10 | NO.19
  • 효열부유인경주이씨기실비
    광주시 남구 석정동 570-12015년이 효열부유인경주이씨기실비(孝烈婦孺人慶州李氏紀實碑)는 학교법인 송원학원 고제철의 맏며느리로 남편이 6.25 전쟁으로 1953년 전사하였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음독하였다가 회생하여 1년여를 와병 중에 1954년 운명했다.고제철 송원학원 이사장 주관으로 이 비를 세웠다.
    2018-12-01 | NO.18
  • 효열부최씨의적비
    광주시 남구 월성동 573. 학촌마을1978년이 효열부최씨의적비(孝烈婦崔氏懿蹟碑)는 김종억(金鍾億)의 처로 효열의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옥은 그 자체가 부서질지라도 그 흰빛은 변하지 않은 것이요, 대나무는 그 자체가 불에 탈지라도 그 절계를 훼손하지 않는다. 최씨 부인의 곧은 절계는 더 더욱 독실하여 마치 가을 서리와 밝은 햇빛과 같았기에 이웃 마을까지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부인의 성은 최씨이고 본관은 탐진이다. 부상(富相)의 딸로 장경공 사전(思全)의 후손으로 1904년(甲辰) 8월 8일 광주시 동곡면 신기마을 본가에서 태어났다. 그 자질은 정숙하였고 심성은 인자하였기에 친정에 있으면서 어버이를 섬길 제 효도하였으며 네 가지 덕목까지 갖추고 있었다.나이 겨우 16세에 김씨 가문으로 출가하여 시부모 섬기기를 친정 부모를 섬기듯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멈추지 않았으며, 몸에 필요한 물건과 입맛에 맞는 음식은 항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부모께서 병석에 눕자 근심 걱정을 하며 탕약을 지성으로 끌이고 북두칠성에 시부모의 수명 연장을 기원하였으나 갑자기 내외분의 초상을 당하여는 땅을 치며 애통하며 예절에 맞게 장례를 마치었다.남편을 모시기를 지극히 정중한 모습으로 하였으며 화려한 몸치장은 좋아하지 않았고 경솔한 태도는 조금도 없었기에 가정은 화목하였으며 세상사람들은 현철한 여인이라 칭송하였다.남편 김종억의 호는 석은(石隱)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니 문민공 탁영(이름은 馹孫)의 후손인 계곤(桂坤)의 아들로 1897(丁酉)년에 동곡면 침산리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품이 인자하고 성품이 관대하여 어버이를 섬길 제 어버이의 뜻을 잘 따랐으며 부인 최씨와 서로 더불어 봉양하는 도리와 초상때 장례를 모시는 절차를 의논하여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마침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우러러보았다.남편이 1940(庚辰)년 봄에 우연히 질병을 얻어 탕약의 효험이 업자 부인은 목욕 재계하고 자신을 남편대신 데려가라고 하늘에 축원하였다. 천명이란 대역하기 어려운 것이기에 홀연히 타계하니 4월 14일이요 향년 44세였다.최씨 부인은 땅을 치며 불러보았건만 따라갈 수 없는 길이기에 어린 자식들을 생각하고 차마 그 뒤를 따르지 않았다. 장례를 모시는 모든 절차를 반드시 옛 예법을 따라 광주시 대촌면 월성리 학촌 앞산 자좌에 안장하였다. 그 당시 부인의 나이 37세에 하늘같은 남편을 잃고 애통함을 억누르며 자녀를 양성 교육하여 혼인할 때를 잃지 않았으며, 그 가문을 잘 보호하면서 40년 가까이 정렬을 지켜왔으니 어찌 순시간에 남편의 뒤를 따라간 아낙네들보다 더 낳지 아니한가?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뀌고 더러운 풍속이 세상에 가득하여 오륜(五倫) 삼강(三綱)이 무너져버린 이때 부인은 굳굳이 정절을 지켰으니 앞에서 이른바 옥이 부서지고 대나무가 불에 타더라도 그 흰빛은 변하지 않고 그 절계는 훼손되지 아니한다는 것이 이 최씨를 두고 지적한 것이 아닌가!부인이 1남 3녀를 양육하였는데 아들 준수(俊洙)는 일찍이 죽었고 딸은 삭령 최순환(崔淳煥) 전주 이성한(李星漢) 청주 김동영(金東英)의 아내가 되었다. 외손자인 현호(鉉鎬) 현관(鉉官)은 최씨의 소생이고, 동채(東彩)와 동주(東柱)는 이 서방 소출이며, 이열(利烈)은 김서방 소출로 나머지 손자들은 기록하지 않는다.아~부인의 효열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한 것이기에 그 사위들이 협력하여 비를 세우기로하고 최순환을 나에게 보내어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누차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우와 같이 대략 기록하고, 무너져간 풍속을 바로잡는데 보탬이 되게 하고자 새기도록 하였다.1978년 1월 하순 월성(月城) 최윤환(崔允煥) 짓고송파(松波) 임종일(林鍾日) 쓰고1978년 3월 일 세우다.
    2018-06-17 | NO.17
  •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61-81956년 이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孝烈婦豐山洪氏實蹟碑)는 황산사 아래쪽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비석이다. 주변은 대리석의 돌기둥을 세워 돌담장을 둘러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효열부 풍산홍씨 실적비는 아들인 김선진행적비와 같이 원산마을 황산사 바로 밑 도로변에 있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듣는 바에 의하면 풍산홍씨는 친정에서 효도하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섬기니 시부모가 말하기를 며느리가 나를 잘 섬긴다며 그 남편을 경계하니 그 남편은 매우 사랑하여 마음에 들어하였다. 1922년에 부인의 나이 겨우 22세에 남편이 갑자기 괴질에 걸렸다. 부인께서 밤낮없이 의원을 모셔와 약을 지어 다리는 것을 일삼았으며 똥을 맛보아 그 차도를 징험하였다. 단을 만들어 새벽마다 정화수를 올리고 하늘에게 축원을 하였으며 그가 운명을 하려하자 그는 손가락 피를 남편의 입안에 주입시켜 거의 끊어져 간 수명을 되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누차였다.그는 장차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부인에게 부탁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충효와 절행을 지켜온 가문인데 자신의 대에 미쳐 멈춘 것 같습니다. 이제 내가 불행하게 될 것 같으므로 집안 일을 부인에게 부탁하니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홀어머니와 젖먹이 고아를 잘 보살펴 뒷날 계승을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지하에서나마 눈을 감겠습니다. 하고 곧 바로 운명을 하였다. 부인은 정신을 잃고 땅에 넘어져 기절하였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남편의 뒤를 따라 가려든 마음이 죽어간 남편께서 임종시 부탁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부인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모시는 일까지도 하나 하나를 예절에 맞게 하여 조금도 부족됨이 없게 하였다. 시조부 시조모님 초상을 당하여서는 몸이 수척하도록 서러워하며 괴연을 받드는데 옛 제도를 따랐다. 시어머니에게는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도 하고 눌러주기도 하며 좋은 약을 일찍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 가족끼리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으며 시집을 보내고 장가를 보내어 분가시킬 때는 최대한 인정을 쏟았다. 그 시어머니 초상을 치른 나머지 전답은 모두 팔아 없어졌고 부채는 계산할 수 없었다. 부인께서 밤이 새도록 베를 짜고 바느질을 하여 두어 해에 부채를 모두 청산했는가 하면 문중 토지를 되찾아 종가에 환원하고 남에게 압류된 산지는 거액을 주고 되찾았다. 젖먹이 고아가 점차 성장하자 책을 짊어지어 현화 선생에게 보내면서 항상 경계하라며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을 보고 듣는 것이다하여 벗을 삼지 않으려 하니 너는 모름지기 행동을 독실히 하여 동료들에게 좋은 심덕과 진실을 보이라고 하였다.그는 집안에서 더 은의(恩義)를 베풀면서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도리에 일찍이 게을리하지 않았다. 해마다 마을 굶주린 자들에게는 많은 쌀을 주어 구원을 하였고 아들을 위해 독서실을 지어 이름하여 청제헌(晴霽軒)이라 하였다. 아들 선진(善鎭)이 장성하여 두아들과두 딸을 두었는데 딸은 나주 오근구(吳根求)에게 시집을 갔으며 다른 남매는 아직 어리다.선진이 서울에 유명한 학자들을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고 노닐면서 가풍을 잘 계승한 부인께서도 매양 그 말을 잘 따랐으며 자유로 하지 않았다. 감사공(監司公) 김문발이 세운 칠석동에 있는 부용정이 남에게 소유권을 빼앗겼는데 아들 선진을 명하여 단독으로 거액을 지불하고 되찾으니 온 집안에 화목을 다지는 기운이 가득하였다. 고을 또는 도내선비들이 올린 천장(薦狀)에서 한나라진효부와 영여(令女)의 지극한 행동에 비유하였으며 성균관을 비롯 각 향교또는 서원에서 많은 찬양문을 제출하였다.<비문 원문>之素聞移孝事舅姑姑姑曰善事我敬戒夫子子子甚宜之歲壬戌夫人年才二十二其夫忽羅奇疾夫人不擇晝夜以迎醫合藥爲事舍置餘事嘗糞以驗其差劇湯藥必親手晨昏井花設壇以木兄天及其隕絶以脂血注口幾絶還甦如是者累矣知其將不免囑夫人曰吾家是忠孝節行之家及於身而止今也不幸以家事托夫人善養五王父母與偏慈及乳孤而不絶後嗣則地下之目庶幾可暝奄然而終夫人蒼黃顚制?地氣絶而還甦盖下從之意不勝亡夫臨終之託也初終葬祭一一稱禮而少無遺憾後當王舅姑憂衰毁之節?尊之奉遵古制偏慈在堂抑搔撫問藥餌之供未嘗之絶平日嫂叔??庭無間言嫁娶分戶極稱人情及其哭偏慈也比於前喪尤極備禮疊故之餘田地盡沒負債無弄晨夜績織裁縫不過數載而淸了素來遺業沒數還復宗家山地之見執者以巨額復完家度稱敍乳孤漸長使之負?于弦窩先生門常自戒來力曰寡婦之子非有見焉不與爲友汝須節勵篤行使朋?有好德之實也其於堂內尤盡恩義奉祭接賓之道未嘗懈惰雖在鄕憐之餓每多賑恤之爲子別築讀書之室曰晴霽軒善鎭長成有二男二女女出嫁爲羅州吳根求室餘幼善鎭從京鄕有名之家學業克承家庭夫人每從其所言不自專監司公所築漆石芙傭亭見奪於人命善鎭濁金額而遺復家中雍睦和氣滿室鄕道士林薦狀擬以漢陳孝婦令女之行至成均館各鄕校祠宇儒會所贊湯之狀昏奉 2018.11.28. 수정
    2018-06-15 | NO.16
  • 효열숙부인광산김씨지비
    광주시 광산구 지정동 평지마을 도로변1969년이 효열숙부인광산김씨지비(孝烈淑夫人光山金氏之碑)는 나주정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2018-12-01 | NO.15
  • 효자광산김공광언지려
    광주시 북구 본촌동 319(본촌중학교 왼편)1994년이 효자광산김공광언지려(孝子光山金公光彦之閭)는 김광언(金光彦)의 효행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1년 목조건물로 세웠으나 1994년 석조로 신축했다.金容琪 짓고 李圭垳 쓰다.
    2018-11-13 | NO.14
  • 효자김공기삼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대산동 대야마을1874년이 효자김공기삼기적비(효자김공기삼기적비)는 상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吳東洙가 찬했다.
    2018-12-01 | NO.13
  • 효자박공현주열부창녕조씨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선암동 선암마을 입구1962년선암마을 입구 연못인 선암제仙岩堤와 마을 방풍림이 식재되어 있는 선암방축仙岩防築이 조성되어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충주박씨 효자박공현주열부창녕조씨기적비(孝子朴公現柱烈婦昌寧曺氏紀蹟碑)가 동쪽을 향해 서 있었다.조씨 부인은 6.25  전란 때 자식이 없는 과부가 되어 시부모를 모신 열녀였다.
    2018-11-29 | NO.12
  • 효자사은처사오공효부유인풍산홍씨기행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명곡마을, 가마마을1980년이 효자사은처사오공효부유인풍산홍씨기행비(孝子沙隱處士吳公孝婦孺人豊山洪氏紀行碑)는 나주오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2018-12-01 | NO.11
  • 효자운파고공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토말마을1977년이 효자운파고공기적비(효자운파고공기적비)는 장흥고씨 문중으로 金潤東이 찬했다. 옛 황룡면 토말이다.
    2018-12-01 | NO.10
  • 효자유헌김해김공유적비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 하산마을孝子幽軒金海金公遺蹟碑는 월성 최윤환이 짓고 낙안 오동규가 쓰다.
    2018-12-02 | NO.9
  • 효자윤광훈 열부나주임씨 효열실적비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과 구암마을 사이 도로변효자윤광훈 열부나주임씨 효열실적비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세상에 지극한 행동과 기이한 절개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참으로 적다. 행동이 진실로 백가지나 되지만 자식의 효행이 근본이 되는 것이며 절개를 지키는 것은 여자가 행실 중 가장 어려운 일이다. 백년 사이에 열녀 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백리(百里)거리에 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드물게 배출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한 시대에 효자와 열녀가 함께 배출되는 것은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며 한 가문에서 효자와 열녀가 함꼐 배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어쩌다가 있기도 하는데 하물며 효자의 아내가 열부(烈婦)가 되었고 열부의 남편이 효자가 되는 경우는 오직 보기 드물 뿐만 아니라 듣기도 드문 일이다. 어느날 나의 벗 윤종림(尹宗林) 군이 책 한권을 가지고 백운동에 있는 집으로 찾아와 나에게 보이니 즉 함안 윤광훈(咸案 尹光訓)의 효행과 그 부인 나주임씨의 열행(列行)을 담고 있는 실록(實錄)으로 즉 종림(宗林)의 족(簇)선조 고비(考妣)가 되는 분이다. 이제 공께서 세상을 떠나 신지 100년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예의(禮義)의 가르침이 폐지되지 않았고 오륜(五倫) 오상(五常)이 모두 끊기지 않았다. 이처럼 휼륭한 효행과 정열(貞烈)이 한 가문에서 배출되었건만 어찌하여 정려(旌閭)를 세우라는 나라의 명을 받지 못하였을까. 이제 사론(士論)과 향의(鄕議)로써 무너져 버린 천지의 법도와 끊어져버린 백성들의 도덕을 되찾으려 하니 아~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공께서는 어려서부터 효도하고 근면하였기에 가정이 비록 가난하였지만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고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여 그 마음과 그 몸을 함께 봉양하였다. 이때 임씨부인(林氏夫人)의 내조가 지극하여 이것저것 신경을 쏟았다. 어머니 병세가 위독해지자 병에 좋다는 약품을 먼 곳까지 달려가 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매번 하느님꼐 기도를 하고 똥맛을 보아 병세의 차도를 짐작 해본 결과 점차 더 위독해지자 자신을 손가락을 깨물어 어머니의 입안에 피를 흘려 반일(半日)의 수명을 연장하기까지 하였다. 수명은 정해진 것이기에 마침내 구원할 길이 없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예절은 한결같이 옛 예법을 준수하고 풀자리에서 잠을 자고 국물을 마시며 3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몸이 수척하여 마침내 질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였고 자식이 없으니 조카 단(袒)을 아들로 삼았다.임씨부인은 본래 부도(婦道)를 잘 지킨다는 소문이 있었다. 남편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북두칠성(北斗七星)에 절을 올리고 남편을 대신하여 자기를 잡아가라고 하니 그 정성은 가히 하늘은 감동시킬만 하였건만 마침내 남편의 수명을 연장해 주지 않아 갑자기 죽어갔다. 시신을 거두어 혼인 때 입었던 의복을 입혀 입관(入棺)을 하였으며 장례를 마치고 제사를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해 봉행 하였다.영연(靈筵)을 철거하는 날 종족들에게 말하기를 남편 살아서의 의를 지키고 남편 죽어서는 절개를 지킬 것이며 나 죽은 뒤 일은 단이 있으니 족히 염려 될 것이 없다. 하시고 조용히 자진하여 공의 뒤를 따랐다. 아~ 공의 독실한 효행은 검루(黔屢)의 짝이 될 만 하고 유인(孺人)의 곧은 열행은 백주(栢周)의 짝이 될 만 하니 그 효행과 그 열행은온 부부들의 귀감이 될만한 일이요 어찌 함안윤씨가문에게만 찬사가 있어야 되겠는가. 요즈음 온통 세상은 도덕성이 무너져 부자간의 은혜와 부부간의 도리가 한결같이 새 집승과 같은 세상으로 변화하였다. 어린 후배들이 효도와 열행을 알 수가 없어 세상 도덕을 귀로 듣고자 해도 들을 수 없으며 눈을 씻고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다. 휼룡하기만 한 효행을 이제야 돌에 새기니 두루 일어보고 자식이 해애할 도리와 아내가 해야 할 도리를 알았으면 한다.世之有至行奇節蓋鮮矣行固百行而子孝爲本節具不一而女烈爲難百年而得一人焉不爲曠百里而得一人焉不爲罕苟於郡國或一時並出者猶爲罕見以一家而湃時共有者殆絶 無而僅有耳况又孝子之妻爲烈婦烈婦之夫爲孝子者非惟見之之罕柳亦聞之之罕也曰吾友尹君宗林袖一冊示余於白雲僑舍乃咸安尹公諱光訓孝行其夫人羅州林氏烈行之實錄則宗林之族先祖考妣也今距公之世己越百餘春秋矣當時禮敎不盡廢倫常不盡絶以若篤孝貞烈箤于一家者胡篤末蒙旌閭之典今以士論鄕議欲圃不朽於天綱嶊地維頹而民慈睪攵絶之今日乎吁其悲哉公從少孝勤家雖淸貧供甘旨安寢處志體俱養林夫人內助極備左右就養及先妣疾谷尤藥品饌材利病之物無遠不求每號天供禱嘗糞審症症漸危絶輒石斤指注血于口能延得半咎之回甦大限有定竟莫之救其喪葬之儀純終之道一遵古禮而寢若啜粥三年如一日柴毁骨立終成疾不起无嗣取姪坦爲子林孺人素以婦道著聞及公病篤拜斗析代誠可感天而竟未之延遂奄忽焉襲歛取婚聘時綠衣納于棺中殯葬祭尊彈誠奉行及撤靈筵語宗族曰生守義也死從節也後事事有坦在他無足慮俄而從容自裁竟下從焉盖其錄衣之納公棺者盖有所光定也噫公之篤孝可伍黔屢孺人之貞烈可疋柏舟其孝其烈爲夫爲婦傳咸安氏有辭者豈從耳哉今天下陸沈父子之恩夫婦之道一化爲鳥有後生少輩矇不知孝烈之爲0事世道駿欲則耳求聞而無聞也欲拭目求見而無見也猗此孝烈侍今而勒之石遍八時人之聸陰爲人子而不知養生送死之始終者爲人妻而不知
    2018-06-14 | NO.8
  • 효자정계흥지려 / 孝子鄭啓興之閭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봉정마을에 1875년 鄭啓興의 효행의 뜻을 기리고자 羅州鄭氏門中에서 건립한 정려이다.봉정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관동면 수각리(水閣里) 봉정리(鳳亭里) 평지리(平地里) 오동촌(五洞村)을 합하여 법정리인 나주군 평동면 지정리(地亭里)로 하였다. 1949년 광산군으로 되었다가 1988년 광주직할시 승격때 광산구 평동출장소 관내 지정동 제14통 봉정부락이 되었다, 평지(平地)와 봉정(鳳亭)의 끝글자를 합하여 지정(地亭)으로 한것같다. 희여치산(希汝峙山) 아래의 오동촌(五洞村)을 합하여 봉정이라 한다.산세와 물이 좋아서 오래전부터 마을이 생성된 것 같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주로 1차산업에 종사하며 수박, 무등이 유명하다.
    2020-03-02 | NO.7
  • 효자죽우당남평문공봉기기적비
    광주시 북구 청풍동 209-5 청품쉼터1959년효자죽우당남평문공봉기기적비(孝子竹友堂南平文公鳳歧紀積碑)는 무등산 청품쉼터에 있다. 문봉기의 자(字)는 성우(聖遇), 호(號)는 죽우당(竹友堂). 조선시대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2018-10-22 | NO.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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