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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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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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노봉이귀인지비
    광주시 남구 구만산길 34(포충사)충노봉이귀인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는 포충사에 있다.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와 귀인이 주인을 따라 의병에 참여했다. 금산에서 사망한 고경명과 둘째아들 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이들이었고, 첫째아들 종후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주인과 목숨을 함께 한 의인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노비들을 기리는 비석이다.포충사 홍살문 앞에 있는 커다란 비석은 자연석 바위를 깍아 만든 볼품없는 형상이다. 하지만 이 비석에는  충노 봉이.귀인 지비(忠奴鳳伊貴仁之碑)라고 씌어 있다. 말 그대로 충성스런  노비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 앞에 제단이 설치 된 것으로 보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이들은 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鳳伊)와 귀인(貴人)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둘은 주인은 따라 의병에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60세의 노구로 광주에 모집한 의병 6천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전라도에 침공하려는 고바야가와 다다가게가 지휘하는 제 6군 12,000명과 금산에서 싸워 1592년 7월 9일 전사했다.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 고경명과 같이 싸워 전사한다.이때 같이 참여하다  고경명과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 1561∼1592)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바로 이들이었다. 또한 첫째아들 종후(從厚, 1554 ~ 1593)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맏아들 종후 또한 군사를 일으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으로서  진주성을 사수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9일 만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의병장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1537 ∼ 1593), 삼계(三溪) 최경회(崔慶會 1532 ~ 1593)를 따라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국(殉國)하였다. 이때 주인과 목숨을 함께 받친 의인들이었다.
    2018-06-11 | NO.35
  • 충주박씨효열비각
    광주시 서구 벽진동 벽진마을1961년이 충주박씨효열비각(忠州朴氏孝烈碑閣)
    2018-12-01 | NO.34
  • 하동정씨2효1열정려각
    광주 북구 자라봉로 17(양산동)1864년, 1905년(2005년 중건)이 하동정씨2효1열정려각(河東鄭氏2孝1烈旌閭閣)은 양산동 양지마을(청암아파트 옆) 내에 위치에 있다. 송월당松月堂 정윤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9년(철종 9) 명정되어 그해 효자정려를 세웠다. 당초 목조와가로서 소슬 대문이었다. 은월隱月 정재요와 그의 처 밀양박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1894년(고종 31)에 명정되어 1905년에 세웠다. 양산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정려각 인접지가 높아져서 침수가 우려되어 2005년 옛 정려각을 복원하고, ‘정윤길 정려각’, ‘은월정재요밀양박씨효열각 / 隱月鄭在堯密陽朴氏孝烈閣'을 합하여 ‘하동정씨 2효, 1열 정려각’을 중건하였다.중건된 정려각 내부에는 증 효자 성균진사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 정윤길 지려(贈 孝子 成均進士 通訓大夫 司憲府 地平 鄭潤吉 之閭), 효자 동몽교관 조봉대부 정재요 지려(孝子 童蒙敎官 朝奉大夫 鄭在堯 之呂)와 열녀 정재요 처 숙부인 밀성박씨 지려(烈女 鄭在堯 妻 淑夫人 密城朴氏 之閭)라는 복원된 정려(열녀) 편액이 걸려 있다.
    2018-11-12 | NO.33
  • 하동정씨효열문
    광주시 서구 풍암동 짚봉산 중턱짚봉산 중턱에는 효열하동정씨행적비와 해봉경주김공기정효자비가 있다. 이 효열문은 30여 년 전에 월산동구 밖 염주마을 가는 길에 세워져 있다가 1998년 5월 짚봉산으로 옮겨 새롭게 단장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효는 만고불세의 시대정신이요. 우리 민족 고유의 덕목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고무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해봉은 모친의 열효정신을 이어 효행에 남다른 모범을 보인 빛나는 행동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해봉의 효자비는 월산동구 밖 염주 마을 가는 길에 삼십여 년 전 세워졌으나 도시개발의 진행에 따라 건물에 가려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이전이 시급하였으니 오늘에 결실을 맺어 선영하에 모친 정씨 열효비와 함께 아담한 새 모습으로 태어나니, 죽마고우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마음 누를 수 없어 이에 몇 마디 적는다. 서기 1998년 5월 1일 이장범 적음
    2018-12-06 | NO.32
  • 함풍이씨효열정려
    광주시 남구 사동 63-2번지. 1830년하동정씨 문중에서 鄭浩直의 처 咸豊李氏의 孝烈을 기리기 위해 1830년에 건립하였다. 정려는 정면 측면 1칸의 골기와 팔작 지붕으로 되어 있다. 주초는 덤벙주초 위에 원주기둥을 세웠으나 주초석은 남쪽 1개에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고 북쪽 1개는 석탑의 옥개석을 덮어 놓았다. 연화문 덤벙주초는 석등의 기단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려각 내에는 효열이씨 정려기와 제효열질부이씨 정려병서의 제액이 걸려있다.기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아~ 우리 가문에 효열부 이씨(李氏)는 즉 함평이씨 기성군(箕成君)의 후손으로 참봉벼슬을 한 희명(熙明)의 7대손 유학(幼學) 정호직(鄭浩直)의 아내이다. 그는 어버이를 섬기는데 노력을 다하였고 남편을 위해 죽었다. 조정으로부터 정여(旌閭)를 세우라는 특명이 있었으며, 그 효열(孝烈) 사례를 뭇 선비들의 글에서 유감없이 찬양하고 있으니 더 이상 찬양문은 필요하지 않다.옛날 나의 아버지 효행(孝行)역시 선비들의 찬양하는 글이 한권의 책을 이루었으며 누차 조정에 천거도 하였건만 아직까지도 포양하라는 어명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자손들의 억울한 마음일 뿐이다. 이제 이 효열이 조상께서 남기신 얼을 자손이 계승하는 그 결과에 하늘의 보답이라는 이치를 어찌 알 것인가! 이와같은 효열 사례에 나 같은 사람도 더욱 관심이 있는데 더구나 그 친 자질(子姪)들이야 언급할 것도 없다. 일찍 죽어간 이씨 두 아들이 상당한 학문과 지식이 있어 이부인(李夫人)의 효열 사례를 상세히 기록해 두었건만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으니 한탄하고 애석한 느낌을 감당할 수 없다. 이거하여 늙고 옹졸한 내가 이 우(右)와 같이 전말(顚末)을 기록한다.경인년 (1830) 10月에 정민영 기록함.題孝烈侄婦李氏旌閭幷書嗚呼惟我孝烈侄婦李氏卽咸豊箕城君之浚參奉熙明七代孫幼學啓鐸之女學生鄭浩直之妻也盖其事親竭力爲夫立節特夢棹稧之 命而孝烈之蹟巳悉於名鄕諸公之贊跋不必架疊而昔我先考孝行於士林聯狀搢縫序跋積成卷軸屢登也報尙未蒙褒揚之 典是乃子孫之抑爵者也今此孝烈安知非祖貽孫述漑根食實之理哉余於是尤有闕興感狀德之記在他人猶曰難愼大况親子侄之門乎夭逝兩子頗有文識渠差生存錄其事序蹟而遭此不幸可不歎惜玆以老拙略記顚末絶以詩曰 維友咸應自身修畵閣蘬然瑞石顯命盡三綱尙禀禀行兼四德儘悠悠漫籤汗簡私門寶爭咏上碑廣世休永使吾家惟戀闕세軒流水亙千秋庚寅冬十月 日 四叔父 鄭旻濚 識
    2018-06-13 | NO.31
  • 홍주송씨효행비
    광주시 서구 용두동 구룡마을1982년이 홍주송씨효행비(洪州宋氏孝行碑)는 위계도가 찬했다.
    2018-12-01 | NO.30
  • 효녀정석남실적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 201-2번지1960년대효녀 정석남 실적비(孝女鄭石南實跡碑)는 옥천사 경내에 위치해 있다. 옥천사에서 정석남이 전답과 임야를 기부하여 이것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건립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1960년대로 추정된다. 1980년대 동성고등학교 부지에 편입되어 비의 흔적이 없어졌다.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대체적으로 효도는 온갖 행동의 근원이기 때문에 남녀(男女)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다 우러러보니 불효를 하고 편안한 자도 있지 않았으며, 또한 효도를 하고 위태로운 자도 있지 않다는 것을 공통된 떳떳한 이치이다. 이러기 때문에 불효한 자식은 재앙을 받으며 약 천만명이나되는 효자에게 하늘은 반드시 보답이 있으니 감응이라는 이치가 있지 않을 것인가!아~ 하늘과 땅이 번복이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어 인간의 윤기가 끊겨 같은 씨족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니 이처럼 참혹한 때에 다행히 여사(女士) 한 분이 있었으니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석남(石南)이다. 동래(東來)정씨 정운선의 따님이며 어머니는 추계추씨(楸溪秋氏)이다.광주시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으니 아들 재장(載長)이도 운수 기박하여 일찍 죽었다. 아들 딸 혈육하나 없는 신세가 되었건만 하늘도 그를 보호해 주지 않았으니, 그 정성이 가엾기만 하다. 그러나 한결같은 효심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 친정 부모님 섬기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섬기는데 마치 남편을 섬긴 것 같이 하였다. 일찌기 과부가 되어 혈혈단신인 그는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었건만 시부모님이 죽자 10리밖 옥녀봉(玉女峰) 동쪽 자락에 안장을 하고 옥천사(玉泉寺) 주지에게 금호답(芩護沓) 3백평과 전(田) 8백평 산(山) 5백평을 바치고 옥천사로 하여금 영원히 향화(香火)를 끊어지지 않게 하였는가하면 묘(墓) 아래 비석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 가엾기만한 정성을 하늘은 어찌하여 도와주지 않았을까.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여 칭송하지 않을 것인가.孝女鄭石南實蹟碑夫孝子百行之源也 高無論男女貴賤人皆仰之而未有不孝而安者亦未有孝而危者通理之常也是以不孝者惹災愆若萬千孝者則天必有報焉不有感膺之理裁嗚呼方令天地飜覆大界陸沈倫綱睪絶同族相殘如彼慘酷之秋幸有一女史姓鄭名石南東來鄭云先之女母楸溪秋氏生於光府早失怙恃自子裁長運命奇薄膝前金之一男女之血續而呱呱此凡生亦無所天之可保其精可謂惕矣然一孝心不衰雖若施孝於父母舅姑恨及於風樹己矣若事君子早年獨寡一辰單身闡顧一世無處可施母死昔年躬白歹無葬於祈外十里許玉女峰東麓口坐原托於玉泉寺住持而禁護畓三百坪田八百坪山址五百坪屬於本寺將營永世香火不絶親墓下亦以宛不離親之意將之意將古亥隧而立短碣表其陰則其實精可矜可慘天胡其然嗟裁不南行過者孰不嘖
    2018-06-13 | NO.29
  • 효부고성이씨기행비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번지 신기마을 뒤편 양양재(洋洋齋) 1984년이 효부고성이씨기행비(孝婦固城李氏紀行碑)는 원래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과 구암마을 앞 사이 들판에 비각을 갖추어 1984년에 세웠다. 비석의 내용은 김해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행한 효행 사실을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 위계도가 찬하고 신천 강인환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은 도시개발로 인해 양양재로 옮겼다.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광주 사는 김해김씨 김호송(金鎬松) 늙은이가 벽부산(霹富山)에 있는 나의 집을 찾아와 그 아내 고성 이씨의 행적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나의 처가 17세에 나의 집으로 출가하여 공경히 시어머니의 뜻을 계승하였다. 어머니의 생모 즉 나의 외할머니 밀양박씨가 아들이 없었으므로 우리 어머니가 모셔와 봉양을 하였다. 박씨가 풍병을 만났는데 20년간을 부축하여 기거(起居)하도록 하였는가 하면 똥 걸레를 빨고 목욕을 시키는 일까지도 이씨가 항상 담당하였다. 나의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가 나이 50에 정신이 혼미하여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고 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더러워진 요, 이불과 의복을 세탁하여 수시로 바꿔 주었는 데 엄동설한에는 그 손등이 찢어졌다. 또 나의 어머니께서 간혹 굶주린다고 하실까 두려워하여 고기를 잡아 봉양을 할때 사내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자 나의 처(妻)가 말하기를 자녀(子女)의 신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고 4년동안을 하루와 같이 하였다. 자식하나 없어 락(樂)을 부칠 곳이 없는 사람이나, 먹을 것이 없는 가난에 시달린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아 조금도 개의치 않았으니 나 또한 그를 위로 해주고 싶다. 방언(方言)에 이르기를 아내의 덕화를 언급하는 것은 왕이나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직 나는 이 경우와는 다르다. 내가 능히 할 수 없는 일을 그대가 능히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대의 정성에 감동되어 글 한편을 써 줄 것을 요청한다고 하였다. 나 역시 그 애기를 듣고 감동되어 사양하지 않고 써 줄 것을 허락하였다.光州老大 金海金鎬松이 訪余于霹菩山中之 寓舍하야 道其妻 固城李氏之行하여 日君이 十七世에 歸于吾家하여 敬承姑之志하고 及吾母之母 密陽朴氏가 無嗣하니 吾母迎而養焉하다 朴氏嬰風痺하야 二十年을 起居須人하니 滫瀡與屍溲洗滌을 君이 常擔之하고 吾母海州崔氏年將八十에 昏耄하여 不能自持하고 又不省事하니 衾褥衣服之泗穢를 隨時易之할세 常隆冬에 手軍皮裂하며 且恐吾母之或有飢寒色하야 求胞而供之하니 人有難之者어든 君日女子의 分上에 當爲之事라하고 四年을 如一日하다. 渠無一子而無寄樂이나 但茹苦耐艱을 怡然不介意하니 吾亦慰之하다 諺에 云하되 言妻德은 爲狂이라하나 然이나 惟吾則異於是하야 吾之所不能을 而君이 能爲之하이 是以로 吾感君之誠하야 請爲數行文이라하여 늘 余亦聞而感之하야. 不辭而諾之하다. 噫리 當今象族之制散하야 子而不承其文하고 婦而不養其始어늘 惟李氏는 不然하야 遠及姑之母하니 是는 可以爲一世楷範矣라 安得李氏之行하야 以警夫澆俗混世之爲婦女子者하노라
    2018-06-14 | NO.28
  • 효부의령남씨열녀광산김씨지려 / 孝婦宜寧南氏烈女光山金氏之閭
    1740년 宜寧南氏와 光山金氏 두 부인의 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晋州河氏門中에서 목조와가로 건립
    2020-03-02 | NO.27
  • 효열녀광산이씨정려 / 孝烈女光山李氏旌閭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1892년 光山李氏의 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유림들의 천거로 순종이 命旌하여 목조와가로 지은 정려
    2020-03-02 | NO.26
  • 효열부고령신씨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사호동 원사호마을1983년이 효열부고령신씨기적비(孝烈婦高靈申氏紀蹟碑)
    2018-12-01 | NO.25
  • 효열부김해김씨기적비 / 孝烈婦金海金氏紀蹟碑
    광주광역시 광산구 오선동1765년 金海金氏(朴孝東의 妻)의 孝烈의 뜻을 기리고자 儒林들의 뜻을 받들어 門中에서 석조로 건립
    2020-03-02 | NO.24
  • 효열부동래정씨사적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본촌마을1982년이 효열부동래정씨사적비孝烈婦東萊鄭氏事蹟碑는 동호동 본촌마을에 위치해 있다. 계산 유인경이 모친 동래정씨의 효열을 알리는 내용으로 1980년에 세웠다. 비문은 이상복이 썼으며, 비의 건립은 증손 유내현이 했다. 다른 기록에는 1988년 나주 나성균이 찬하고  자 노학, 손 원철이 세웠다 한다.桂山 柳公寅敬孝行碑文孝는百行之本으로百行이非孝不立이요萬行이非孝不行이니이에孝를讚美치아니하리요 舊錦治之北章本坊에한孝子가났으니公의姓은柳요貫은文化요諱는寅敬이요字는子賢이요 號는桂山이니始祖는高麗開國功臣大承公諱는車達이요中祖는 端廟郞臣西山先生諱는自湄요壬亂功臣諱希達의九世孫이며章錫命輔興潛基永은高曾祖稱의諱요子는珪烈桂烈이요 孫은在月과傍孫은在沃이요曾孫은乃鉉이요玄孫은浩瑩浩雄浩傑이며外孫은蔚山金堯雲靑松沈相德錦城羅昌柱豊山洪鍾款慶州李鳳載光山金伯訓이로다公은生甫八歲에父親基永公이患憂危重하여母親東來鄭氏가石斤指注血枚口延壽祈願함을보고公이또한쇠망치로破指注血하여甦生캐하니孝童으로名聲이振世하나數年後에父親喪을當하여昊天罔極哀痛하고疊疊山中梁山幽谷十里許의元堂墓所에呼哭徘徊하다가黃昏에歸家하면白虎가護衛하였으니 可謂出天之孝로다幾年後에桂峰山下癸坐原에緬奉하고墓下에서平生을居廬하였으며詩書에能하여京鄕各地의名士와詩文을交流하였고偏母를至誠으로奉養하다가親患10年에侍湯如一로以盡其誠하고母親別世에哀毁骨立하여侍墓三年에盡其情禮하니子孫이濡梁家訓하여孝孝承承하도다1918年戊午七月十五日享壽六十八歲로考終于寢하시니鄕里는咸하였고儒林은이行蹟을羅州와後에光山郡誌에登載하였도다이碑를墓下에세우니後人이여 矜式하소서西紀1982年 壬戌 2月 10日 曾孫乃鉉세움 慶州 李相福 글씀
    2018-11-18 | NO.23
  • 효열부문화류씨실적비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 고암마을, 경위도좌표: N 35˚10´52.8″, E 126°40′36.5″  1944년이 효열부문화류씨실적비(孝烈婦文化柳氏實跡碑)는 문화류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柳寅瑗이 찬했다.
    2018-12-01 | NO.22
  • 효열부문화유씨행적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이장동) 복수마을1964년장흥고씨 문중에서 건립한 효열부 문화유씨 행적비는 이장동 복수마을에 있다. 장흥고씨 문중에서 1964년에 건립한 비석이다. 비문은 김준식이 편찬하고 김정회가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몸소 효도와 열행을 실천하여 천만년 강상(綱常)을 책임하고 아름다운 풍속을 세워 한 시대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었으니 최근 고재열의아내 문화류씨이다.아~ 아침햇살에 기러기 노래하였건만 부부의 정을 느낀 것은 반년도 채 못되었고 저녁 노을에 까마귀 우니 천만년 사별이라는 흉측한 소식이 갑자기 알려졌다.누가 알았을까 16세 어린 나이 꽃다운 세월인데 희미하고 아득하기만한 억천(億千)의 고통을 잘 견디어 낼 줄이야, 여자의 삶을 저 연약한 풀과 티끌과 같다는 뜻으로 개가할 것을 깨우쳤건만 자식이 없는 홀어미의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렸고, 그리하여 가을 서리가 내린 매서운 날씨와 같은 아낙네의 정조는 마침내 사방 사람들의 숭앙하는 대상이 되었으니, 그 열행이야 말로 그 결과가 어떠한가, 의지하며 살았던 친정부모님을 이별하고 돌아와 자식 잃은 시부모를 모셨네. 이 한 몸 처절한 생각을 온전히 감추어 버리고 넉넉한 오로지 두 분 시부모 마음을 편안하도록 잘 섬겼으며, 아침 음식을 장만하기 위하여 등불을 밝히고 길쌈을 하였으며, 낮에는 곡소리를 대신하여 시부모와 이야기를 하였다네, 시부모가 돌아가시자 조카를 세워 승중손(承重孫)으로 삼았다.무너져 간 가정을 들추어내어 끊긴 가문을 계승하였고, 제물을 깨끗이 준비하여 흠향하도록 하였다오, 죽은 시부모 섬기기를 생존 했을 때와 같이 하였다. 큰 행동이 여기에 있었으니 사소한 행동은 가히 추측된다. 그 효도하는 것이 또 이다지도 대단하다. 그런데 이러한 한 분에게 보답하여야 하는 하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에게 준 자품은 이처럼 풍부하였건만 그 사람에게 준 수명은 어찌 이다지도 인색하다는 것인가. 아~ 큰 기강이 이미 무너졌고 염치가 모두 죽어버렸다. 여인들이 실절(失節)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생이별하는 것을 잘 하는 일이라고 한다.우리의 의관(衣冠)은 오랑캐의 복장 속으로 빠져버렸고 인류(人類)는 짐승으로 변화해버렸다. 이와같은 시대에 국정을 도울만한 자손을 보내어 홍문관(洪文館)에 돌아가게 했고, 대중을 깨우치는 쇠방망이를 빌려 오랑캐를 일깨우는 북을 울렸으며, 이미 소용돌이친 광란(狂瀾)을 되돌렸고 장차 무너져 버릴 인간의 기강을 확고히 심어놓았으니, 바닷물이 마른다 해도 돌이 녹아버린다 해도 이분의 공적은 가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요 하늘같이 땅같이 장구(長久)한 이분의 공적을 기필코 묻혀버리지 않을 것이다.그분에게 수명을 주는데 인색한 것은 그분에게 사후의 복을 많이 누리게 하고자 했던 것이니 이제야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감히 고증없이 이 글을 썼겠는가. 세상 여론에 의해 이 글을 서술한 것이다.1964년 10월 15일 영광 김준식 짓고안동 김정회 쓰다躬烈孝而任萬古之網常樹風聲而集一世之觀廳者近古高君在烈夫人文化柳氏是月嗚呼贋雝旦浹半襈之情思烏啼夕暉忽報千古之凶信誰知二人妙少之光陰能抵億于迷范之塵劫唆披弱州車巫塵之諷可啞匹婦之無知繫此秋霜烈日之威竟爭四隣之仰止其於爲烈也何如也若夫歸訣倚門之爺孃還侍西河於姑舅渾藏悽絶一巳之思專事寬譬而堂之心朝供因於續燈書哭代以唯諾逮尊章之下世立滋子而承重擧廢而繼絶精禋而致享事死如事生事之如事存六經在此細節可推其於爲孝也又何如哉然而不能無說於報施之天稟其姿之何若是其豊而賦其命之何若是嗇也噫大防之壤廉耻道喪以失節爲當然以生離爲能事衣冠淪於世服人類化爲素翔于時也送相國之孫而歸弘文之門借警衆之鐸而鳴膺犭犬之鼓回狂瀾于旣倒植人紀於將瀡海可枯石可爛斯功不可抹夫之長地之久斯蹟必不扌垔嗇其命乃聃以厚其餉於是乎知天意之攸在矣敢無稽而饒筆舌依輿論而述銘章 歲在甲辰冬十月旣望 靈光 金駿植 撰 安東 金正會 書2018.11.28. 수정
    2018-06-15 | NO.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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