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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왕후의 지문 - 숙종 7년

인경 왕후의 지문 - 숙종 7년 신유(1681) 2월 22일(병오)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삼가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을 생각하건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깊이 생각하셔서 미리 우리의 금상 전하(今上殿下)를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시고, 이미 또 옛 제왕(帝王)의 흥망 성쇠(興亡盛衰)가 비필(妃匹)로 말미암지 않는 바 없음을 생각하셨는데, 비필(妃匹)의 어짊은 대개 족성(族姓)의 덕미(德美)에 근본하니, 촉(蜀)ㆍ도(塗)ㆍ신(莘)ㆍ지(摯)가 바로 그러하다. 이에 우리 인경 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께서 간택[睿簡]을 받으시어, 신해년 4월 초3일 갑신에 대혼(大婚)의 정례(正禮)를 갖추니, 우리 전하께서 머물고 계시던 제궁(齊宮)에서 친영(親迎)하셨다. 예(禮)를 마치자, 종묘(宗廟)에 고(告)하였으며, 중외(中外)의 군자(君子)들에게 반교(頒敎)하시기를, ‘황류(黃流)의 술을 받힘에 옥찬(玉瓚)에 담기에 합당하니, 믿을 것인저!’ 하셨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씨(金氏)의 적관(籍貫)은 전라도(全羅道) 광주(光州)인데, 그 원류(源流)가 대개 신라(新羅)의 김성(金姓)에서 나왔다. 왕(王)에게 왕자(王子) 흥광(興光)이 있었는데, 장차 국란(國亂)이 있을 것을 알고 스스로 광주(光州)에 피하였다. 그후 잇달아 8대가 평장사(平章事)가 되자, 사람들이 그 사는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 본조(本朝)에 와서 휘(諱) 김국광(金國光)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을 섬겨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아들 휘 김극유(金克忸)는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이었고, 그 증손(曾孫) 휘 김계휘(金繼輝)는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총명(聰明)하고 박달(博達)하여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 휘 김장생(金長生)은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으로써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벼슬이 참판(參判)이었는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원공(文元公)으로, 이분이 왕후(王后)의 고조(高祖)가 되신다. 그 아들 휘 김반(金槃)은 일찍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간흉(奸凶) 이계(李烓) 등을 논박(論駁)하여 배척(排斥)하고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구출(救出)한 것으로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밝혔다. 그리고 그 아들 휘 김익겸(金益兼)은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급제(壯元及第)하고, 병자년정축년의 변란(變亂) 때 마음속으로 구차하게 모면(謀免)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강도(江都)에서 입근(立慬)하였는데, 그 배필(配匹)이 우리 선조(宣祖)의 외증손(外曾孫) 윤성(尹姓)이며, 이분이 김만기(金萬基)를 낳으셨다.
〈김만기는〉 일찍이 병조 판서(兵曹判書)ㆍ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군수(郡守) 한유량(韓有良)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참판(參判)과 생원(生員)을 모두 충청도(忠淸道) 회덕현(懷德縣)의 정민리(貞民里)에 장사(葬事)지냈는데, 술인(術人)이 말하기를, ‘반드시 덕행(德行)이 있는 임사(任姒) 같은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 하였는데, 왕후(王后)께서 과연 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 9월 초3일 을묘 인시(寅時)에 경사(京師) 회현방(會賢方) 사제(私第)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이미 태어났으나, 울음소리가 끊어져 희미하므로, 집안 사람들이 혹시나 하고 염려하였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다친 곳은 없고 성질(性質)이 그러합니다.’ 하였다. 이미 말을 배워서는 말을 가볍게 꺼내지 아니하나, 꺼내면 반드시 이치가 있었다. 그리고 보행은 더디고 느렸으며, 함부로 뜰 계단을 내려가지 아니하였고, 스스로 타고난 존귀(尊貴)함이 있었다. 동배(同輩)와 서로 만났을 때 곁에 있는 자들이 병아리를 희롱하거나 공기놀이를 하거나 배[梨]ㆍ밤[栗]을 다투거나 엿과 떡을 갖거나 간에 평소 꼼짝도 않은 채 단정히 앉아 보지 않은 것같이 하였으며, 함께 먹을 때에는 반드시 기다렸다가 모두 모인 후에야 먹었다. 또 화려[芬華]한 물건을 애호(愛好)하지 아니하였고, 의복(衣服)이 비록 때가 묻고 해졌다 하더라도 싫어하는 적이 없었으며, 곱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가 있어도 부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 주려고 하면, ‘좋다.’ 하면서 절대로 아까와하는 적이 없었다. 나이 7, 8세가 되자, 집안에 깊숙이 들어앉아 나가지 아니하고 예(禮)를 익혀 10세가 되니, 또 조달(早達)하였다. 일찍이 혼인(婚姻)이 있었는데, 마침 노인네[耋艾]들이 모여 구경하고는 또 꽃구경을 하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저 집은 이웃이고, 친척이다.’ 하였으나, 모두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혹시라도 외부의 사람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모(父母)가 말하기를, ‘만약 여자가 아니라면, 마땅히 명유(名儒)가 되어 전열(前烈)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로부터 덕성(德性)이 날로 진보하여 온공(溫恭)하고 화수(和粹)하며 장중(莊重)하고 공손해서, 사람들은 오만하고 게으른 용모(容貌)와 비속(鄙俗)한 말이 있음을 보지 못하니, 육친(六親)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덕선(德選)을 받들게 되니, 이때 대개 10세였는데, 선대왕(先大王)께서 두루 절충[折中]하고 응대(應對)하는 바가 마땅함을 가상(嘉尙)하게 여기셨으며, 여러 여관(女官)들로 모두 말하기를, ‘천제(天帝)의 누이 동생과 같다.’ 하였다. 이미 간선(簡選)되어 별궁(別宮)에 있을 때 부친이 때때로 들어가서 비로소 《소학(小學)》을 가르쳤는데, 단지 한 번 음독(音讀)만 가르쳤으나, 그 뜻을 익숙하게 통하였으며,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읽었고, 또 문득 암송(暗誦)하였다. 그리고 겸해서 《내훈(內訓)》을 한 번 보고는 끝내 잊지 않았고, 사람들이 말하는 고금(古今)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 듣기를 좋아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이미 위로 삼궁(三宮)과 사성(四聖)을 받드는 데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을 다하였고,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감히 몸이 아프다고 해서 혹시라고 폐하는 적이 없었으며, 종일 곁에서 모시면서 공경하고 삼가니, 사성(四聖)께서 권애(眷愛)하심이 매우 돈독하였다. 그러나 은혜에 친압(親狎)하고 사랑을 믿는 뜻은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가지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정사(政事) 때문에 선대왕(先大王)께서 종일 별전(別殿)에 계시니, 왕후(王后)께서 유모(孺慕)함을 금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갑인년에 거듭 대상(大喪)을 두 번이나 만났는데, 애모(哀慕)함이 예(禮)에 넘치니, 시어(侍御)하던 사람들로서 그 순지(純至)한 성효(誠孝)에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중곤(中壼)에 정위(正位)하니, 판서(判書)를 승진시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고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하였으며, 그 어머니 한씨(韓氏)를 서원 부부인(西原府夫人)에 봉하였다. 생원(生員)은 이미 인조조(仁祖朝)에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을 가증(加憎)하고, 후에 광성 보사(光城保社)로 훈록(勳錄)하고, 광원 부원군(光源府院君)으로 추봉(追封)하였으며, 부인 윤씨(尹氏)는 부인(夫人)의 고신[眞誥]을 받았다.
왕후(王后)께서 이미 궁내(宮內)의 일을 이어받아 주장해 다스리게 되었는데, 반드시 공경하고 삼가면서 옛날의 성비(聖妃)를 모범삼아 후세(後世)에 사가(私家)의 은택(恩澤)을 구하지 않은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항상 성덕(聖德)을 보필(輔弼)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연사(宴私)의 뜻이 동정(動靜)에 나타나지 아니하였고, 잠경(箴警)이 연거(燕居)에 끊이지 아니하니, 우리 전하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조(內助)에 힘입은 바가 진실로 많았다.’ 하셨다. 존속(尊屬)을 접대(接待)하는 데 여러 가지로 주장하는 것이 모두 곡진하여 예의로운 마음이 있었고, 내사(內史)를 다스리는 데 은혜와 위의를 아울러 갖추니,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였으며, 복어(服御)의 여러 가지 일은 반드시 분수에 넘치게 사치한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본가(本家)에 서간(書簡)을 통하면서 안부(安否) 이외의 일에는 언급하지 아니하였고, 묻는 것은 농사[稼穡]가 잘 되었는지 못되었는지, 질역(疾疫)이 치열한지 누그러졌는지 민생(民生)의 질고(疾苦)에 대한 것일 따름이었다.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재이(災異)는 위급하고 두려운 데 더욱 진념(軫念)하셔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말씀 가운데 가득했으며, 성심(誠心)으로 가엾게 여겨 슬퍼하시는 바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하였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 만약 형벌하시고자 하면 풍화(風火)의 조짐을 두려워하셨으니, 우리 성비(聖妃)의 타고나신 자질(資質)의 아름다움과 가법(家法)의 훌륭함은 진실로 속일 수가 없다.
갑인년 이후로 적신(賊臣)이 무함(誣陷)과 패역(悖逆)으로 동요(動搖)시킬 것을 꾀하여, 처음에는 친경(親耕)을, 이어서 친잠(親蠶)을 권하고, 빈어(嬪御)를 갖추게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장차 요염(妖艶)을 미끼로 하여 진출(進出)해서, 이간(離間)하는 계책을 삼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바람과 우뢰(雨雷)가 위세를 떨치는 바람에 친경(親耕)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고 간교한 음모가 중도에서 저지(沮止)되니, 어찌 왕후(王后)의 덕성(德性)이 천지(天地)를 두려워하여 음즐(陰隲)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후 또 예론(禮論)을 청탁하여 장차 한두 신하(臣下)를 도륙(屠戮)하려 하는데, 광성(光城)에 미친 뒤에 따라서 그 이상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왕후(王后)께서는 평안(平安)하고 돈인(敦仁)하셔서 스스로 위태하지 아니하였고, 오로지 종사(宗社)를 걱정하여 옥도(玉度)에 허물이 없었으니, 비록 우리 전하의 신성(神聖)하신 예지(睿智)에 힘입었다 하나, 또한 효성스러운 덕행(德行)이 위로 조종(祖宗)을 감동(感動)시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신년 10월에 두창(痘瘡)에 걸렸는데, 상감을 염려하여 스스로 아픈 것조차 잊었다. 헛소리[夢語]를 하는 데까지 이르러 부원군(府院君)이 여의(女醫)가 진맥(診脈)하는 데 따라 들어가면, 반드시 병을 참고 일어나 앉으면서 몸을 단정히 하여 공경(恭敬)을 다하였는데, 어깨와 등을 곧바로 세우는 것이 병들지 않았을 때와 같았다. 대점(大漸)함에 이르러서 정신(精神)이 조금도 흐려지지 아니하더니, 마침내 26일 신해 해시(亥時)에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詳殿)에서 승하(昇遐)하셨다. 이때 위로 자전(慈殿)의 뜻을 받들어 전하께서 창경궁(昌慶宮)에 이어(移御)하셨었는데, 부음(訃音)을 듣고 몹시 슬퍼하고 상심해 하시고는 내어(內御)에게 명하여 모든 월제(月制)와 일제(日制)의 일은 모두 궐내(闕內)에서 구비(具備)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대개 평일(平日)에 인자(仁慈)하고도 검소(儉素)하셨던 마음을 본받아 저자[市律]와 같이 번거롭고 요란하지 않고자 함이었다.
군신(群臣)이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인경(仁敬)이라 하였는데, 주(註)를 살펴보건대, 인자함을 베풀고 의(義)를 행한 것을 인(仁)이라 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경계(儆戒)한 것을 경(敬)이라 한다. 능호(陵號)를 익릉(翼陵)이라 하고, 전우(殿宇)를 영소전(永昭殿)이라 하였다. 길(吉)한 날을 가려 신유년 2월 22일 병오 묘시(卯時)에 예장(禮葬)하였는데, 흠위(廞衛)와 의물(儀物)은 모두 간략한 것을 따랐다. 능(陵)은 경기도(京畿道) 고양군(高陽郡)에 있는데, 도성(都城)에서 20리가 된다.
근신(近臣)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해 보건대, 한유(韓愈)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서는 석인(碩人)을 노래하여 이에 종친(宗親)을 서술하였고, 《예기(禮記)》에서는 아내를 얻는 것을 논하여 반드시 효제(孝悌)를 가려서 대대로 행의(行義)있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삼가 우리 성비(聖妃)를 살펴보건대, 그 세족(世族)의 출신을 추구해 보면, 진실로 왕자(王者)의 후예(後裔)로서, 고려(高麗) 5백 년 동안 이어져 오며 찬란하게 빛났고, 본조(本朝)에 와서는 명경 대유(名卿大儒)가 조손(祖孫)에 서로 잇달아서, 마침내 성녀(聖女)가 태어나 경실(京室)에 와서 내치(內治)를 성취하고 왕화(王化)를 도왔으니, 근원(根源)이 크고 내[川]가 풍성한 것은 마땅히 그러한 것이지만, 만약 신성(神聖)하신 우리 현종(顯宗)이 아니었더라면, 비록 성덕(盛德)이 많다 하더라도 어떻게 간선(簡選)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처음에 인선 대비(仁宣大妃)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원(文元) 김 공(金公)은 진실로 우리 선고(先考) 문충공(文忠公)의 스승이었는데, 이제 내가 그 자손(子孫)과 함께 왕가(王家)의 지어미가 되었으니, 또한 한결같이 기이하다.’ 하셨다.
아! 우리 성비(聖妃)의 씨족(氏族)의 덕행(德行)과 아름다운 일들이 이와 같이 성대(盛大)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복록(福祿)을 누리시면서 우리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인자하신 은택(恩澤)을 함께 입게 할 것인데, 하늘이 불인(不仁)하셔서 갑자기 하령(遐齡)을 막으시어 우리 삼성(三聖)으로 하여금 위에서 비도(悲悼)하게 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으로 하여금 울부짖게 하시니, 어찌 이른바 신(神)이란 진실로 밝히기 어렵고, 이치란 추고(推考)할 수 없다는 것인가? 비록 그렇다고 하나, 인(仁)이란 선행(善行)의 으뜸이고, 경(敬)이란 덕행(德行)의 기틀이고, 익(翼)이란 사려(思慮)가 깊고 원대한 것으로서, 지금 올린 시호(諡號)는 능호(陵號)와 더불어 실상(實狀)을 잘 나타내었으므로, 하늘 위에서 빛날 것이며, 영문(令聞)이 그쳐지지 않을 것이니, 공성(孔聖)께서 말한 바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이름에서 얻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에 신은 가만히 깊이 느껴 거듭 슬퍼하는 바가 있는데, 기억하건대, 옛날에 일찍이 성조(聖祖)를 모시던 별전(別殿)에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거처(居處)하시던 동합(東閤)을 가리키면서 성사(聖嗣)의 시기가 늦어짐을 깊이 한탄하셨는데, 하늘의 종방(宗祊)을 도우심에 미쳐서 우리 전하께서 탄생(誕生)하셨지만, 성조(聖祖)께서는 이미 미처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우리 성비(聖妃)께서 공손히 종사(宗事)를 반드는 데 미치면, 항상 말씀하시기를, ‘많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성조(聖祖)의 영혼을 위로해 드려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제 곤의(坤儀)가 비게 되어 갑관(甲觀)을 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성비(聖妃)의 덕행(德行)으로써도 끝내 성조(聖祖)의 유택(遺澤)을 입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슬프도다.”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제술(製述)하여 바치었다.】
【원전】 38 집 519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 촉(蜀)ㆍ도(塗)ㆍ신(莘)ㆍ지(摯) : 
모두 고대 중국 후비(后妃)의 출신지를 말함. ‘촉’은 황제(皇帝)의 아들 창의(昌意)의 아내 촉산씨(蜀山氏)의 딸의 출생지이고, ‘도’는 우(禹)임금이 아내 도산씨(塗山氏)를 맞이한 곳임. ‘신(莘)’은 문왕(文王)의 아내 태사(太姒)의 출신지이고, ‘지’는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의 출신지임.
[주-D002]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주-D003] 황류(黃流)의 …… 합당하니, :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의 “아름다운 저 옥찬(玉瓚)엔 황류(黃流)가 그 가운데 있도다[瑟彼玉瓚 黃流在中]”에서 인용한 말임. 옥찬은 울창주(鬱鬯酒)를 담는 구기 비슷한 잔을 말함이고, 황류는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만든 술임. 울금(鬱金)의 뿌리를 넣으면 술빛이 황색(黃色)으로 변하고 향기가 난다고 한다. 여기서의 뜻은 향기로운 술이 아름다운 잔과 또 어울렸다는 것으로, 왕과 왕비가 서로 훌륭한 배필이었음을 의미함.
[주-D004]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05]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주-D006] 입근(立慬) : 
절개를 위해 생명을 버림.
[주-D007] 술인(術人) : 
음양(陰陽)과 복술(卜術)에 능한 사람.
[주-D008] 임사(任姒) : 
태임(太任)ㆍ태사(太姒).
[주-D009] 숭정(崇禎) …… 신축년 : 
1661 현종 2년.
[주-D010] 전열(前烈) : 
선현(先賢).
[주-D011] 덕선(德選) : 
간택.
[주-D012] ‘천제(天帝)의 …… 같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대명(大明)의 ‘견천지매(俔天之妹)’를 그대로 인용하였음. 곧 주 문왕(周文王)의 비(妃) 태사(太姒)가 몹시 현숙(賢淑)하여 존숭(尊崇)하기를 마치 천제(天帝)의 누이동생과 같이 한다는 것임.
[주-D013] 혼정 신성(昏定晨省) : 
저녁에 부모의 이부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 안부(安否)를 묻는 것.
[주-D014] 유모(孺慕) :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르듯이 깊이 사모함.
[주-D015]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주-D016] 갑인년 : 
1694 숙종 즉위년.
[주-D017] 예론(禮論) :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복제(服制)에 대한 논의.
[주-D018] 경신년 : 
1680 숙종 6년.
[주-D019] 두창(痘瘡) : 
천연두(天然痘).
[주-D020] 석인(碩人) : 
《시경》 국풍(國風)의 한 편명으로, 제(齊)나라 태자(太子) 득신(得臣)의 누이동생 장강(莊姜)이 위(衛)나라 장공(莊公)에게 시집갔을 때의 광경을 묘사한 시임. 이 시의 첫머리에 장강의 혈연 관계를 밝히고 있는데, 이를 인용하며 종친을 서술한 것이라고 한 것임.
[주-D021] 경실(京室) : 
왕실(王室).
[주-D022] 하령(遐齡) : 
긴 수명.
[주-D023] 갑관(甲觀)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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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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