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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철 미술비평문: 시대와 역사를 그리는 거장의 예술세계
    광주시립미술관, 역사와 현재를 잇는 신학철의 예술적 여정
    신학철은 한국 현대미술, 더 깊이 들어가면 역사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 사회의 격동적인 근대사와 현대사 그리고 광주를 보다 깊이 있게 화면에 담아내며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과 정서를 대변해왔다.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신학철_시대의 몽타주》 전시는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번 회고전은 그의 60여 년의 예술적 여정을 돌아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그의 독창적인 미학을 통해 예술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을 되새길 수 있는 자리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대의 몽타주   신학철의 예술세계는 시대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동시에,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삶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60년대 아방가르드(Avant-garde) 예술 운동과의 깊은 연관을 가지며 자신의 독창적인 미학을 발전시켰다. 아방가르드란 기존의 전통적 예술형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각적 언어와 표현방식을 탐구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신학철은 이를 한국적 상황과 결합시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신학철, 정물, 1965, 캔버스에 유채, 91.3x67.8, 서울시립미술관 소장그의 초기 작업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일원으로서 실험미술에 몰두하며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통해 전통적 미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다. 사진, 콜라주, 오브제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산업사회와 소비사회의 물질적 숭배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현대미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때의 경험들이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에 큰 밑거름이 되고 있다.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을 주도하고,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통해 지속적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왔다. 그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시공간적으로 분할하고 이를 하나의 몽타주로 재구성하는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현대사회의 모순과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예리하게 드러내고 있다.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수많은 자료수집이 필요했을 것이다. 근대사와 현대사에 등장하는 각종 사진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한국사적인 관점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이들 사진을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스케치하고 캔버스에 그리는 방식으로 하였으니 그의 작업과정은 힘든 노동과도 같았을 것이다.이번 전시는 크게 세 가지 섹션으로 나뉘어 그의 작품세계를 시대순으로 탐구했다. 첫 번째 섹션인 ‘해체와 재구성의 신체 몽타주’에서는 그의 초기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이 시기 작품들은 아방가르드 미술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적 현실을 탐구하는 독특한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 작품에서부터 우리는 신학철이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그의 예술적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시대적 현실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분해하고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함으로써 독창적인 시각적 언어를 창조했다.*신학철, 변신 3, 1980, 패널, 종이에 유채, 잡지, 콜라주, 43×39, 국립현대미술관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 <변신> 시리즈는 소비사회와 물질주의의 부조리를 비판하며, 일상 사물을 콜라주 형태로 변형하여 작품에 담았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기존의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탐구하고, 관람자에게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두 번째 섹션 ‘망각된 역사의 소환’은 과거의 역사와 현재를 연결하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순간들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이 섹션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을 비판적 시각으로 탐구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한국근대사-종합>은 한국의 분단 현실과 소비문화의 병폐를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관람객에게 시대의 상흔을 되새길 기회를 제공한다.세 번째 섹션 ‘시대를 위한 기념비’에서는 개인의 삶을 조명하며 그들의 서사를 시대적 맥락 속에서 탐구한다. 그는 노동자, 농민, 중산층 등 다양한 계층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작품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특히 <갑돌이와 갑순이>(1998-2002)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대작이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과 경험을 대서사적 맥락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무려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화면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이 작품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갑돌이와 갑순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는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 속에서 개개인이 겪는 삶의 변화를 생생히 그려낸 작품이다.이 작품은 단순히 한 쌍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수많은 한국인의 집단적 경험을 상징한다. 갑돌이와 갑순이라는 이름은 한국 민중문학과 대중가요에서 자주 등장하는 평범한 이름으로, 그 자체가 익명의 다수를 대변하는 상징적 역할을 한다. 그래도 알만한 얼굴들이 보인다. 전두환 원동석 백기완 박광태 권인숙 이건희 정주영 김우중 등이 보이고 작가 신학철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있다.   한국 사회와 민중의 삶을 조명한 작품들   신학철의 작품은 단순히 예술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실천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서민들의 삶과 이상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참여적 미술을 선보였다. 그의 작업은 민중미술과 서민미술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왔으며, 이는 그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신학철, 모내기, 캔버스에 유채, 162.1 × 112.1cm, 1987(1993 재작업), 개인소장그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단순한 미학적 혁신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개입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대표작 <모내기>는 이를 잘 보여주는 예다. 이 작품은 한국 농촌의 현실을 담아내는 동시에, 도시 소비문화와 군사무기의 폐해를 비판적으로 다루며, 예술을 통한 사회적 실천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러한 작품은 예술의 표현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또한, <한국현대사-초혼>(1993)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인 5·18 민주화운동을 기리며 제작된 작품으로, 그의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은 한국사의 굴곡진 여정을 반영하며, 민중의 항쟁과 희생을 예술적 언어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다.작품 제목 ‘초혼(招魂)’은 영혼을 불러들여 위로하고 기리는 의식을 의미한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억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작품의 중앙에는 피투성이로 일그러진 시신의 형상이 강조되어 있다. 이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익명의 청년들을 상징하며, 억압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희생된 이들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이 작품은 신학철이 중요하게 다룬 주제 중 하나인 ‘개인의 서사를 통한 역사적 재해석’을 잘 보여준다. 그는 거대한 사회적 담론이나 국가적 서사를 넘어, 개인의 경험과 서사를 통해 역사를 조명하려 했다.작품에서 등장하는 희생자들의 얼굴은 극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각 인물의 감정이 세밀히 드러나 보인다. 이러한 묘사는 희생자들이 단순히 역사적 사건의 일부로 소비되지 않고, 그들 각자가 살아 숨 쉬던 개인적 존재였음을 강조한 것이라 여겨진다.   시대를 초월한 상징성과 독창성   신학철의 작품 세계는 그가 사용하는 상징성과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포토몽타주, 콜라주, 사실주의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시대의 단면을 형상화하며, 관람객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관람자와의 소통과 교감을 목표로 한다. 특히, 그의 대표작 <한국근대사> 연작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적이고 억압적인 측면을 그로테스크한 형식으로 표현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역사를 성찰하게 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기둥 형식으로 하늘로 치솟는 전개방식은 보는 이에게 변화의 과정을 실감케 만든다.그의 작품은 시대적 메시지와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상징과 과도한 설명으로 인해 작품의 해석 여지가 제한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인 <모내기>와 같은 작품은 분명히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그러한 명료함이 관객의 상상력을 억압할 가능성도 있다.또한, 그의 <한국근대사> 작업은 민중의 삶을 조명하며 현실을 비판하지만, 예술적 실험과 사회적 메시지의 균형이 때로는 무게를 잃는 듯 하는 경우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점은 그가 예술을 통해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 점에서 오히려 그의 작품이 가지는 독창성을 부각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어떻든 그의 예술세계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며, 그의 작품은 시대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동시에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조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의 예술적 유산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로, 관람객에게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모색하는 계기를 제공한다.그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경험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며, 예술이 가지는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는 과거의 상흔을 예술로 치유하며, 시대를 초월한 예술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2024-12-23 | NO.50
  • 송필용 미술비평문: 역사의 굴곡과 땅과 물의 상징
    광주시립미술관, 2023 오지호미술상 수상작 전시로
    송필용 작가는 한국의 비극적 현대사를 중심으로 민중의 삶과 역사를 탐구하며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해 온 예술가다. 그의 작품은 땅에서 물로 이어지는 상징적 전환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희망, 치유의 메시지를 전달한다.미술비평적 관점에서 그의 작업은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시대적 맥락 속에서 독자적인 시각 언어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추가로 동시대적인 관심에 대한 작가적 시각을 더욱 확장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본다.   초기작: 땅의 역사와 민중의 삶송필용의 초기작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민중의 삶을 묘사하며, 전라도 지역의 토착적 풍경과 문화를 중심으로 한 작품들이다.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땅의 역사>(1987)는 동학농민혁명부터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전라도민이 겪은 비운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기록한 대작이다. 전남대학교의 당산나무와 화순 운주사의 와불, 황폐한 토양을 통해 민중의 고통을 은유하면서도, 도시의 야경 속 어린이의 모습에서 희망을 암시한다. 이 작품은 민중의 애환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작가의 소망을 강렬하게 전달한다.작가는 전라도 풍경과 그 속의 민초들의 삶을 주제로 작업하며, <동학>(1990)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진솔하게 담아냈다. 이 작품은 전통적 색채와 향토적 정서를 통해 땅과 민중의 깊은 연관성을 드러낸다.<땅의 역사 - 백아산>(1995)은 한국전쟁 시기 화순 백아산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들을 중후한 색채와 거친 질감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냉전 시대의 이념적 갈등과 민중의 고통을 상징하며, 비운의 역사를 깊이 성찰한다.   전환기: 물의 형상과 역사적 상징1990년대 이후 송필용의 작업은 ‘땅’에서 ‘물’로 상징적 변화를 이루며, 한국적 자연과 역사적 상처를 동시에 담아내는 작품들로 확장되었다.남도의 자연과 수묵화적 기법을 활용한 <역사가 흐르는 강>(2001)은 담양 누정과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줄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는 조선 문인들의 정신과 남도의 정취를 담아내며, 자연과 역사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금강산 폭포의 청아한 옥빛 담수를 묘사한 <금강옥류>(2020)는 우리 산하가 품은 숭고한 에너지와 역사의 흐름을 형상화했다. 금강산 폭포에서 얻은 영감은 작가의 사회적, 역사적 인식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강렬하게 드러낸다.<구룡폭포>(1999)는 물의 장엄한 에너지를 겸재 정선의 폭포 그림처럼 단순화된 형상으로 표현하며, 김수영의 시 ‘폭포’와 연결된다. 물은 역사적 상처와 치유를 상징하며, 강인한 생명력과 에너지를 암시한다.   근작: 물의 사유와 치유의 메시지2000년대 이후 송필용의 작품은 역사적 서사를 물로 형상화하며 상처와 치유, 희망을 담은 철학적 성찰을 보여준다.<물 시리즈>(1999~현재)는 김수영의 시 ‘폭포’와 민중의 삶에서 얻은 영감을 기반으로, 물의 흐름과 속성을 통해 인간과 역사, 생명력을 형상화했다. 이 작품들은 땅에서 물로 상징적 전환을 이루며, 초기작에서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발전했다.<역사의 흐름>(2022)은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 개개인의 역사적 사명이 모여 올바른 역사를 이룬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흰 물줄기를 강조하며 치유와 정화, 희망을 상징하는 이 작품은 송필용의 조형적 언어가 극대화된 결과물이다.<역사의 샘-5.18 민주광장>(2020)은 5.18 민주화운동 현장이었던 전남도청 앞 분수대의 현재 모습을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들로 표현해했다. <새벽-붉게 물든 정화수>(1987)와 대조적인 의미를 담아 핏빛으로 물들었던 광주가 시간이 지나 민주, 인권, 평화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상징했다.물과 역사의 상징성과 비평적 조언송필용 작가의 작품에서 ‘물’은 단순한 자연의 요소를 넘어 역사, 민중, 인간의 생명력을 담아내는 상징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물은 끊임없이 흐르며 생명력을 유지하는 자연의 속성을 지닌 동시에, 인간과 역사, 그리고 사회적 변화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그는 초기작에서 땅과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며 현실의 고통과 희망을 그려냈다면, 이후 물을 중심으로 한 작업에서는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물 시리즈>와 <역사의 흐름>에서 송필용은 흐르는 물을 통해 민중의 삶과 역사의 상호작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물의 속성은 상처와 치유, 정화, 희망을 담아내는 동시에, 강인한 생명력과 역사의 지속성을 상징한다. 특히, 김수영의 시 ‘폭포’에서 영감을 받아 재현된 물줄기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의지와 강인함을 드러낸다.그는 이처럼 역사의 본질과 인간의 생명력을 탐구하며, 비가시적인 관념적 대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 이는 그의 작품이 단순한 회화적 성취를 넘어, 역사적 성찰과 철학적 깊이를 지닌 예술적 작업으로 평가받는 이유다.송필용의 물은 자연, 인간, 역사가 하나로 융합되는 경지의 은유로, 과거의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미적인 성취를 넘어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서사와 철학적 사유를 통합하며, 한국 미술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개인과 공동체, 현실과 이상,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강렬한 예술적 다리를 구축한다. 비가시적인 역사의 본질을 시각적으로 탐구하는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다만 송필용 작가의 작품은 강렬한 상징성과 철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지만, 관객의 해석을 돕기 위해 상징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할 방법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든다면 필자의 생각일 수 있지만, 물이라는 상징적 주제가 가진 보편성과 추상성을 보완하기 위해 텍스트나 설치 미디어 같은 새로운 매체를 결합해 작품의 메시지를 보다 다층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또한, 작가의 조형 언어는 과거의 역사적 맥락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동시대적 관점에서 물의 의미를 확장하는 시도가 부족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물은 생태 위기, 환경 문제와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소재다. 이러한 시각을 추가한다면, 작품이 현재와 미래의 담론에 더욱 깊이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송필용의 작업은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을 전달하는 데 있어 강력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성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상징의 확장성과 동시대성을 고려한 실험적 접근이 병행된다면, 작가의 작업은 더욱 폭넓은 공감과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2024-12-20 | NO.49
  • 감격 시대가 오다
    2024 한강 노벨문학상 소식을 듣고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소설인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계엄군의 폭력과 그로 인해 희생된 시민들의 이야기를 여러 등장인물의 눈을 통해 그리고 있다. 한강이 202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5.18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5.18이 노벨상을 받았다’라고 다소 과잉 반응을 보이고도 있고, 또 다른 극히 일부에서는 소설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며 볼멘소리하고 있다.한강의 작품에서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을 학살한 것으로 묘사된 부분에 대해, 역사적 사건과의 괴리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소설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고 해도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 작가의 감정, 상상력, 세계관, 그리고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매개체라는 점이다. ‘소년이 온다’는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이고 문학적인 해석을 통해 독자들에게 더 깊은 감정을 끌어내고, 그로 인해 사건의 본질적인 아픔을 전달하고 있다.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했다고 해서 그 내용이 반드시 사실과 일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특히 한강은 작품을 통해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아픔을 겪었던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려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스웨덴 한림원의 평에 따르면, '소년이 온다’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며, 증언 문학이라는 장르에 접근하고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그 역사적 상처를 보듬은 화해와 이해의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메시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또한, 소설을 통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나 반향은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강의 작품은 그 자체로 강렬한 감정적 울림을 주며,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역사적 사건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을 안겨 준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의 소소한 차이점은 예술적 창작의 상상력을 통해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피카소는 일생을 통해서 새로운 미술 세계를 탐험한 위대한 화가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그림 중에서 전쟁과 관련한 것으로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이 있다. 이 작품들도 당시 전쟁의 실제 상황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미술작품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도 소설처럼 작가의 세계관, 미학, 의중을 표현한다.소설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그 사건을 겪은 이들의 내면과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허구로 만들어진 진실이다. 문학의 힘은 그러한 이해와 공감을 촉진하는 데 있어 인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년이 온다’가 5.18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넘어서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에서도 작가 한강이 직시한 5.18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한강은 한국 문학계는 물론 온 국민이 목마르게 간절히 바랐던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충분히 축하하고 기뻐할 국가적 경사다. 작가는 수상 기념 기자회견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 죽음들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사려 깊고 큰 작가정신의 발로로 보인다.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마라톤 선수의 우승처럼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문학은 육체의 능력을 겨루는 올림픽 스포츠와 다르게 인간 정신을 표현한다. 한국에 다른 뛰어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했으면 싶다.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를 휩쓴 한류 즉, k-팝, k-드라마, k-푸드 같은 한국 문화가 세계인들의 지지를 받아온 한국의 위상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한국은 지난 한 세대에 88올림픽, 2002한일월드컵, 세계 선진국가 진입 등 세계의 선두 대열에 올라서는 거인의 발걸음을 디뎠으며,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배출로 일찍이 시인 타고르가 말한 대로 세계문화의 발신지로서 동방의 등불을 높이 들게 되었다. 감격스럽다.
    2024-10-16 | NO.48
  • 곽인식(1919~1988) In Dialog, 소통의 여러 방식
    강릉 솔올미술관, 사후에 주목받는 작가
    유리가 깨졌나? 호기심이 든다. 유리가 깨진 것 같으면서 바탕을 철핀으로 마구 긁어놓은 듯 하다(〈작품 63-G〉, 1963). 도기도 깨졌는데? 너무 불에 구워서 가운데가 벌어진 것 같기도 한데 깨지지는 않았네(〈무제 1981〉, 1981). 아니 이것은 동판이 어디에 부딪혀 가운데가 찢어졌던 것인가?(〈작품 65-5-1〉, 1965). 작가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을 강조한 작품의 과정에 연출이 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곽인식의 작품은 일상적 평면의 캔버스 회화가 아니라 유리 조각, 돌, 나무, 동판, 점토 등 다양한 물질을 화면에 부착하거나 깨거나 찢는 등의 조형적 구성을 해왔다. 주변 사물의 ‘물성’을 탐구해 이를 미술로 적용시킨 물성 탐구의 선구자로 불린다.1919년 경북에서 태어난 곽인식은 193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니혼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서구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경험하는 등 일본에 정착한 재일 한국인 화가이다. 그는 1950년대 중반 이후 초현실주의, 앵포르멜, 폰타나의 공간주의 등 서구 미술의 주요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탐구했다.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미술언어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다. 1954년 요미우리[讀賣] 앙데팡당전 출품, 1957년 ‘신 에콜드 도쿄’ 창립 회원, 1965년 일본국제미술전(도쿄비엔날레)에 초대 출품 등의 활약을 보였다.1960년대 초 노랑, 빨강 등 원색의 물감과 석고로 이루어진 모노크롬 회화 작품을 선보였다. 원색 물감에 석고를 쌓아 텁텁한 질감을 표현한 시리즈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불린다. 그 이후 국내에서도 이러한 표현기법을 답습한 작가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여기에 일상적 오브제인 철사, 바둑알, 유리병, 전구 등을 부착하는 등 사물화의 과정을 거쳤다. 재료의 물질성에 집중한 곽인식은 화면에 변형을 가하거나 돌이나 유리, 철판 등 일상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작품을 창작했다. 이런 방식을 일본에서는 ‘모노파(物派)’, 또는 ‘물상파(物象派)’라는 이름으로 1960년대 이후 각광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사물의 말을 듣는다”라는 표현처럼 재료 자체에 수행적 행위를 가하며 고유한 감각으로 물성을 깊이 탐구했다.   이 시기에 그의 독보적인 작품은 바로 ‘유리깨기’이다.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신주쿠에 고층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새로운 건축자재인 대형유리판이 건물 전면에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당시로는 보기 드문 큰 빌딩의 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유리의 투명성’에 매료됐다. 그는 “너무 커서 눈에 다 들어오지 않기에 크면 클수록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존재”인 유리를 깨뜨리고 붙인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했다. 유리 크기만큼 땅을 파서 그 위에 유리를 놓고 쇠구슬을 떨어뜨려 깨뜨린 다음, 캔버스 위에 깨진 조각을 조심스럽게 다시 붙였다. 이처럼 깨뜨린 유리를 붙여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제시했다. 나중에는 유리작업으로 단색조의 작품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평면 동판을 구부리고 구멍을 내고 칼자국을 내고 자른 부위를 동철사로 꿰매는 행위를 통해 봉합한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이 시기는 국내에서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정치적 대립이 극심했던 상황에 대해 물질의 균열과 봉합을 통해 상처를 극복할 수 없는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읽어볼 수 있다.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전통적인 일본 종이 화지(和紙)에, 작은 타원형의 맑고 투명한 일정한 색상 이미지를 통해 동양적 신비감의 평면 회화를 선보였다. 붓으로 종이에 무수히 많은 타원형 색점을 찍는 과정에서 점 위에 점을 겹쳐 찍음으로써, 앞의 점과 뒤의 점의 차이로 인한 공간감을 보여주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딘가 무릉도원의 세계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 스스로 그동안의 고달픈 수행의 작업과정을 집어던지고 마음을 내려놓은 심적 상황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강릉 솔올미술관 전시에서는 ‘In Dialog’ 프로젝트로 일본에서 활동했던 곽인식의 이러한 작품들이 망라하여 소개됐다. 일본 내에서만 10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재일 한국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평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963년 재일한국미술가연합회는 이사장에 곽인식, 회원으로 곽덕준과 이우환 등이 있었다. 이처럼 곽덕준, 이우환, 김구림, 하야시 요시후미(林芳史) 등 일본의 한국계 작가들과는 물론 국내의 미술계와도 연대를 계속 맺고 있었다. 한국 작가들이 일본으로 와서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거나 편지 등을 통해서 지속적인 교류가 이루어졌다. 1971년 박서보와 1976년 김창열의 편지가 유품에 남아 있다.곽인식은 한때 과거 조총련계 활동으로 인한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한국 방문을 주저했었다. 1982년 현대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을 계기로 33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게 된다. 현대화랑 대표 박명자와 일본미술학교 후배인 서양화가 임직순이 그의 신분을 보증했다. 이후로 1985년 대구 두손화랑과 수화랑,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1996년 서울 미화랑, 2001 서울 가나아트센터, 2002 광주시립미술관, 2014년 서울 갤러리 현대, 2017년 서울 갤러리 신라,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 곽인식》 등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강릉 솔올미술관 전시는 4월 14일까지이다.
    2024-04-10 | NO.47
  • 필립 파레노, 30여년 작품세계 한국 첫 전시
    리움미술관, ‘보이스(VOICE)’에서 소리를 보다
    광주비엔날레 2024 ‘판소리’ 프리뷰 기대할 수도   소리가 미술이 되었다. 캔버스 화면에 물감을 칠하던 미술의 영역이 2차원에서 3차원으로, 공장이나 들판에서 보는 설치미술로, 더 큰 화면의 영상으로, 미디어아트로, 디지털 캔버스로 미술의 영역이 한없이 넓혀지는가 싶더니 소리도 미술의 영역으로 흡수되었다.사실 미술의 대명사 영어인 ‘art’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예술, 기술, 기교, 인공 등으로 번역되는 것을 보면 소리가 미술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소리는 음악의 영역에서 매체의 기능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말이다.1960년대 후반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퍼포먼스와 같은 캔버스에 정착할 수 없는 ‘탈물질화’, ‘비물질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미술가들이 소리와 공간 그리고 장소에 미술로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과정에서 소리가 미술이 되었다면, 이제 음악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오페라와 뮤지컬까지 미술로 해석할 때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은 지나친 과장일까. 이미 이탈리아의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 1885~1947)는 1913년 3월에 소음예술을 통해 ‘미래주의 음악 선언’을 발표하며, 소음(noise)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한 적이 있다. *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막(膜), 14m, 2024그리고 뉴욕 MoMA는 1970년 초에 ‘공간(Spaces)’이라는 전시에서 사운드 스컵쳐(Sound Sculpture)라고 분류되는 마이클 애셔(Michael Asher, 1943∼2012)와 예술 테크놀로지 펄사(Pulsa)의 사운드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독일의 갤러리 잉에 베커(Inge Baecker)는 1975년 뒤셀도르프에서 ‘보는 것과 듣는 것’이란 제목의 전시를 기획했는데, 청각과 시각 분야의 중간에 존재하는 어떤 예술 형태가 가능한가를 생각하게 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이 ‘소리를 매체와 주제로 사용하는 소리에 대한 예술’을 사운드 아트라고 정의한 것처럼, 이제 미술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상과 소리가 혼재된 작품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거나 기쁨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이다.리움미술관이 보여주는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보이스’는 우리에게 다가온 ‘소리미술’의 대표적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예술장르간의 영역이 불투명해지는 지점에서 예술의 물질성을 떠난 영역까지 모두 미술로 융합화시키는 본래의 ‘아트(ART)’로서 해석을 해볼 수 있겠다.파레노의 이번 전시는 90년대부터 최근까지 30여년에 걸친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한국에서 처음 선보이는 그의 전시는 단지 개별적인 작업의 컬렉션이 아닌 일관된 ‘오브제’로서의 가능성을 탐험하면서, 일련의 사건들이 펼쳐지는(unfold) 각본이 짜여진 공간으로 접근하고 있다. 아마도 오는 9월에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의 전시주제인 ‘판소리’가 오버랩되는 일이 우연하지 않을 것 같다. 마치 광주비엔날레 프리뷰 전시를 보는 것은 아닌지.파레노는 전시에서 ‘다수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감성적이고 공감각적인 안무를 연출하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소리미술은 자연의 소리를 증폭하여 들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방법론은 중요하지 않다. 왜 작가는 이런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물질문명에 의한 기후환경 변화를 강조하며,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고통의 소리일 수 있다.미술관 야외 데크에 설치된 기계탑처럼 보이는 14m에 달한 신작 ‘막(膜)’은 마치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 ‘우주전쟁’을 연상시킨다. 미술관측은 색다른 인지력을 가진 인공두뇌(AI)로 미술관 내부에 떠도는 ‘∂A’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전시의 모든 요소를 조율한다고 했다. ‘막(膜)’은 센서기능을 갖고 있어서,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대기오염, 미세한 진동까지 지상의 모든 환경 요소를 수집하고 미술관 내부로 보내면, 유입된 이 데이터는 다채로운 사운드로 전환되고 또 새로운 목소리 ‘∂A’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미술에 생물학, 기후학은 물론 첨단기술의 총아가 모두 동원된 셈이다.눈사람, 물고기 풍선, 피아노 등은 다양하게 혼재된 공간을 연출하며 독특한 소리를 통해 그 자체의 또는 복합적인 소리공간을 만들었다. 매일 아침 스텝이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박스 위에 올려놓으면 눈이 녹아내리는 소리, ‘여름없는 한해’란 제목을 달고 자동연주를 하는 피아노설치작품은 홀로 연주하며 위에서 종이를 갈아 주황색 눈을 떨어뜨리는 모습, 헬륨가스를 적당히 넣은 물고기 풍선이 마치 물속처럼 관람객과 조응하며 공중을 돌아다니는 광경, 빛을 내면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키네틱 조형물 ‘무빙 라이트’는 미술관 바깥의 센서타워 ‘막’으로부터 외부 정보를 받아 이 정보값으로 빛을 발산하며 움직인다.한 모텔의 밤과 낮, 비가 내리는 영상과 장작불의 타는 소리를 증폭시킨 음향효과는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일본 만화 캐릭터에 목소리를 부여한 영상 작품 ‘세상 밖 어디든’(2000)은 배두나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가상인간의 가상언어 혼잣말은 전형적인 기계음이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공언어 창조자가 만든 새로운 언어 ‘∂A’를 습득하며, 말하는 주체로 성장하는 작품이다.파레노의 작품은 여러 층위로 복잡하게 짜여있는 작업 때문인지 하나의 입장이나 매체로 환원될 수 없는 끊임없는 움직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상호의존하며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서 예측불허한 진화를 지속한다는 점에서 시간을 감각하고 경험하는 유동적이고 열린 플랫폼이 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으로 프랑스로 건너와 수학과 미술을 공부한 파레노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유령처럼 부유하고 떠돌면서 순간을 탐닉하고 머물다가 사라진다는 존재라는 입장이다. 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 등을 결합시킨 첨단지향적인 작품들을 여러 영상과 대형 설치작품으로 이야기하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와 시간적 숙명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멈추지 않고 있다.다만 주의할 사항이 있어 보인다. 우울증 환자들에겐 또 다른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화면 구성과 대형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증폭된 소리들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질 것이라는 우려이다. 파레노의 작품은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현대미술의 영역, 기괴한 소리를 싫어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도전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24-04-05 | NO.46
  • 루치오 폰타나의 뚫기와 베기 ‘공간 ‧ 기다림’
    강릉 솔올미술관, 새로운 세계에 대한캔버스의 공간 확장 담아
    1.  한 관람객이 묻는다. “이것도 작품이에요?” “음~, 좀 어렵지요.” 관람객의 입장을 생각하여 대답했다.“칼로 베거나 구멍을 냈는데 어떤 의미에요?” “보통은 캔버스 앞면에 물감을 칠하는데 이건 캔버스 속까지 보여주네요.” 일단 캔버스의 현상 그대로를 설명해주었다.“그래서요?” “그럼 이렇게 베거나 구멍 뚫린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관람객의 관심사에 대해 그 생각이 어떤지를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이 있기 마련이다. “어려워서 모르겠어요.” 어려워서 모르겠다는 말은 했지만 속으론 이 정도면 ‘나도 하겠다’라는 눈치가 엿보인다.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는 이렇게 대답했다.“저는 구멍을 뚫습니다. 무한함이 그곳을 통해 지나가고, 빛이 지나가지요. 칠할 필요가 없어요. (…) 모두 내가 파괴한다고 믿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2. 루치오 폰타나는 캔버스를 찢은 최초의 화가로 불린다. 작가는 왜 캔버스를 칼로 쭉 베거나 구멍을 뚫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미학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대중에게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작가의 작품은 행위를 통해 세상에 대한 철학적 가치를 내놓는다. 동의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나중 문제이다. 캔버스는 미술 행위로서의 수단일 뿐 2차원 이상의 대상이나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작가들의 방법론이다.그도 처음엔 캔버스에 어떤 색이든 물감을 전체적으로 칠했을지 모르겠다. 붉은 색상이 유난히 돋보인다. 한국에서는 단색화라고 말하는 일종의 모노크롬 페인팅이다. 1950~60년대에 유럽과 미국의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한국에는 1970년대 열풍이 불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이브 클라인(1928~1962)은 1954년 이후 단색화에 빠져들어 인터내션널 블루(IKB)라는 자신만의 색깔을 선보였고,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와 바넷 뉴먼(1905~1970)의 색면 추상화는 그 이후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3.루치오 폰타나는 1927~1930년 사이에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브레라 미술학교를 다녔고, 193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조각작품을 출품했다. 그 후 추상조각, 또는 구상과 추상이 융합된 작업을 통해 다양한 관점의 연구를 했다. 40세 무렵 그의 작품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1940년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1946년 알타미라 조형예술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때 공간주의 미술의 기반이 되는 ‘백색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캔버스라는 전통적인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술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새롭고 다차원적인 미술 형식을 제안한 선언이었다.이어 이듬해 제1차 공간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을 확고히 드러냈다. 1949년에는 공간주의의 이론적 입장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품 ‘검은빛의 공간환경’(1948~1949)을 제작했다.그는 단색화에 1949년 ‘뚫기(Buchi)’, 1958년 ‘베기(Tagli)’ 연작을 통해 화면을 구상함과 동시에 새로운 공간성을 창조했다는 것이 미술계의 평가이다. 처음엔 캔버스에 대한 모독이거나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캔버스를 파괴하기 위해 구멍을 낸 것이 아닌, 미지의 우주를 발견하기 위해 구멍을 냈다”라고 말한다. 캔버스를 구멍 뚫는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창호지 문에 구멍을 뚫고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에 다름아니다.   4.재미있는 점은 루치오 폰타나 작품을 본 누군가가 바넷 뉴먼의 작품에 비슷한 칼질을 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바넷 뉴먼의 1966년 작품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는 누군가로부터 칼질 테러를 당했다. 이는 일종의 반달리즘(vandalism), 즉 훼손행위(毁損行爲)로 인해 나타난 결과이다.그렇다면 루치오 폰타나는 스스로 반달리즘을 자처한 것일까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최근 뱅크시의 작품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 2006)가 경매회사에서 15억원에 낙찰되는 순간 액자에 설치된 파쇄기로 절반 정도가 잘렸다. 작품은 손상됐지만 이러한 행위가 작품의 가치를 오히려 상승시키게 만들기도 한다.그가 캔버스에 구멍을 뚫거나 베기를 한 그 자리엔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그 흔적에 관심을 가질 것 같다. 뚫기와 베기는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즉흥성에 가까워 보인다. 결과론적으로는 정형적인 모습을 나타내기는 했다.어쨌든 그가 ‘저지른’ 뚫기와 베기를 한 캔버스의 뒷면에는 액자의 내면뿐이지만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구멍에 눈을 대고 들여다봐도 사실은 별 것 없는데도 순간적으로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아니면 또 다른 작은 세계가 숨어있는지도.그의 단색화 작품은 단순한 색상만을 보여주는 단순함으로 캔버스는 ‘아무 것도 없네’라는 텅 빈 공간을 상징적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뚫기와 베기로 인해 단색의 캔버스는 더 이상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문이 된다는 것이다.   5. 또한 솔올미술관에서 전시되는 ‘붉은 빛의 공간 환경’(1967/2024) 등 여섯 설치작품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공간 주제의 작품을 원형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물질성을 넘어 빛과 공간으로 확장된 공간으로 들어간 관람객마저 작품의 일부가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한국에서 처음 미술관 전시를 선보인 김석모 솔올미술관장은 “루치오 폰타나 작품들은 1940년대 후반 그가 제안한 혁신적인 공간주의 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펼쳐 보인다”면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동시대 미술에 의미있는 미학적 물음을 던진다”라고 말했다. 전시는 강릉의 새로운 공공미술관인 솔올미술관의 개관전으로 4월 14일까지 열린다.
    2024-03-29 | NO.45
  • 우제길, 70년 여정을 그린 '빛 사이의 색'
    전남도립미술관, 빛무리를 내려 황홀감 주다
     우제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의 일이다. 광주광역시 충장로 3가 뒷골목에 있는 현산미술관이었다. 당시 개인병원을 운영하며 메세나 활동을 하던 김두원 박사가 세운 미술관으로 에뽀끄가 상주하다시피 하던 곳이다.현산미술관이 1982년 문을 열고 현산문화재단(1983)이 창설되면서 최종섭, 김종일, 우제길, 최재창 등 광주의 추상작가들을 적극 후원하며 광주미술계의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던 시기였다.필자는 당시 화니미술관 전시 담당 책임자로 있으면서 이들과 교류하며 구상미술을 넘어서 추상미술을 가까이하게 됐다. 우제길도 이때 만났는데 늘 얼굴에는 미소가 끊이질 않았고 건네는 말에는 다정함과 장난기 어린 칭찬으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했다.우제길은 1942년 일본 교토에서 출생하여 광주 학강국민학교를 거쳐 광주서중 재학 때인 1955년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당시 방학숙제 그림이 나점석 선생의 칭찬을 받으며 미술부원이 되었고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처음엔 풍경과 인물 등을 그리기 시작해 올해로 만 70년 동안 붓을 잡고 살아왔다. 1969년 에뽀끄에 가입하면서 그의 작업에 큰 변화를 주게 되었다. 이전에는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양수아 선생을 만나 신선한 충격을 받으면서 물감을 칠하고, 페인트를 흘리고 바르는 등 추상작업의 신세계를 경험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한 작품만 선보이고 있는데 1960년작 앵포르멜 경향의 수채화인 ‘My heart’(55×36.4cm)이다.1967년 ‘붉은 띠 있는 추상(Abstraction of Red Stripes)’(117×91.7cm)을 발표하면서 앵포르멜 경향에서 기하학적 추상의 근원이 되는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다. 우제길은 이 작품을 국전에 출품했다가 떨어지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하지만 끊임없는 실험적인 작업을 통해 1972년 전남도전에서 ‘Rhythm 72-3H’로 추상화 최초로 우수상을 받으면서 구상화 중심의 남도화단에 큰 화제가 되었다. 이어 1976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특별상을 받으며 자리를 굳히게 된다. 최종섭은 그를 우보(牛步)라는 별칭으로 불렀고, 사람들은 우잠바, 우태백, 우괴물 등 여러 별명으로 부르곤 했지만 캔버스 앞에서는 늘 긴장감을 놓지 않았던 그의 성취였다.이때가 우제길 회화의 터닝포인트가 되는데 바로 ‘Rhythm 76-3K’(100×80.3cm)라는 작품이다. 이전보다는 굵고 힘찬 느낌을 주며, 빛을 통한 운동의 효과가 두드러져 보인다. 마치 기계 금속 내지는 철판조각 덩어리를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한데 그 틈새 사이로 빛이 비치는 부분만 유난히 강조되면서 어두운 곳 또한 대비적으로 강한 형태를 드러낸다. 이때부터 ‘빛의 작가’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의 작업은 ‘빛’을 모티브로 한다. 처음 시작할 당시 흑백의 극단적인 대조로 만들어진 ‘빛’은 그의 대표적인 표현양식이 되었고, 이러한 어둠의 빛에서 오방색 색채를 사용한 다채로운 색상과 희망의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1980년대에는 기존 추상작업 외에 빛과 직선에서 벗어나 전통적 재료인 한지와 콜라주와 같은 기법을 통해 한국형 미감을 찾으려고 했다. 여기에는 고서를 찢어 붙이는 방식으로 서예나 낙관을 옮기기도 했고, 실크천에서의 감광과정 등 새로운 조형형식을 탄생시키는 복잡한 작업을 했다.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좀 더 굵고 형태를 드러내는 추상작업으로 빛의 연출이 다양해졌다. 기하학적 패턴의 수직, 수평, 대각선, 첨탑형, Z자형 구성을 했는가 하면, 명암을 달리하는 중첩된 색면을 통해 명암이 강조되고 입체감이 돋보이는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작업했다. 또한 흑백에서 벗어나 채도가 낮은 녹색, 붉은색, 황색 등이 화면 전체를 감싸면서 무언가를 치밀어 하늘로 올리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2000년대 들어서도 그의 실험성은 계속 이어진다. 한국 고유의 색이라 할 수 있는 오방색 한지를 이용한 콜라주 작품을 선보였는데, 마치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슷하면서도 대별되는 구조를 보여주었다. 몬드리안은 주로 사각형 면 분할의 색상이라고 한다면, 우제길은 면 분할보다는 사각형 면의 중첩을 보여주는 한지 붙이기 작업을 하였다.2010년대에는 무지개 빛줄기가 쏟아지는 듯한 작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캔버스에 아크릴릭 작업을 하면서 분할된 면에 색이 겹치지 않도록 마스킹 테이프나 한지 등을 붙이곤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사용된 띠지를 ‘재활용’하여 수직으로 뻗어 나가는 콜라주를 함으로써 거대한 빛무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이는 그의 미술관 자료실에 들어가 보면 누구나 감탄하듯이 무엇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고 모으는 습관이 이 작업에도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캔버스에 아크릴 작업 이후 떼어낸 띠지를 패널에 다시 작업한 것이다. 이는 기존 빛의 단면을 묘사한 작업과는 달리 현란한 색의 배치가 이루어지면서도 균형감 있는 기하학적인 빛무리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2020년대의 최근작은 이 세상의 모든 색상을 아름다운 블랙홀로 만들어내고, 평면성이 강조된 색이 비중이 확장되면서 색채의 힘이 훨씬 강력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색의 마술사처럼 기존의 조형성을 벗어나 그리고 싶은 대로 색을 갖고 노는듯한 형상을 보여준다.우제길의 작업을 되돌아보면 10년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작가가 기존 작업을 갖고 평생 헤매고 있을 때, 끊임없는 변화와 새로운 해석으로 캔버스와 색에 대한 그의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대의 작가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설지 궁금하다. 단 그가 한국형 미감을 찾으려 했던 한지 콜라주 작업이 이번 전시에 보이질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이번 전시는 5월 12일까지이다
    2024-03-20 | NO.44
  • 김석출 - 재일디아스포라의 '두드리는 기억'
    일본에서 느끼는 조국에 대한 사랑, 비애 등 그려
    해방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 그에게 “조국은 어느 곳일까”라는 질문을 혼자서 조심히 우물거려본다. 작은 키, 모자를 쓴 전형적인 시골 촌로의 모습으로 다가온 그는 여전히 한국의 어느 땅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다.말을 걸어본다. “선생님 작품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5.18항쟁이나 유관순의 만세 모습이 처절한 듯하면서도 아름다움이 가득 들어 있어 눈물이 납니다” 그는 대답한다. “서른 살이 넘었을 무렵 일본에서 TV 뉴스로 본 5.18항쟁의 모습에 포기하려던 화가의 길을 다시 시작했습니다.”그는 1949년 일본 기후현(岐阜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조센징’이라는 핍박받으며 살아왔을 고난의 흔적들이 아우라처럼 다가오지만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부모로부터 내재하여온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남북분단을 거치며 고스란히 자신에게 다가온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압과 차별을 감내하였다.김석출, ‘1980.5.27.’(194×112.1cm×3pieces: 세로×가로), 1980~2000.광주 5.18 자유공원에 있는 옛 상무대 유치장을 들어가기 전에 보았던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5.18청년들의 밀랍인형을 떠올리게 만든다. 광주의 청년들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끌려가는 김석출의 작품은 1981년 일본에서 열린 제1회 《고려미술전》에 출품한 이후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수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당시 체포된 이들은 엄청난 몽둥이세례로 옷이 찢기거나 강제로 벗겨졌으며, 머리는 헝클어지고 곳곳에 피를 흘린 채 상처받은 모습이었으나, 이 작품에서는 그런 흔적을 나타내지 않고 맨발과 포승줄이라는 단순함으로 극도의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다. 오랫동안 이 작품 앞에 서 있으니 당시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주는 데다 눈물이 절로 나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5월, 유관순, 민중항쟁에 대한 작가적 역사의식 뛰어나  여기에서도 두 사람은 맨발이라는 상징성과 흐트러지지 않은 의상으로 폭력 앞에 굴하지 않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화면을 가로지르는 블라인드는 작가가 일본에서 바라본 조국의 현실에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면서도, 40여년이 지난 오늘의 사람들에게 당시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무언의 장벽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진다.김석출, ‘되돌아보는 유관순’(4,000x2,000cm), 2007.또한 1974년작인 수갑을 찬 채 두 손을 앞으로 내민 ‘김지하’와 역시 수갑을 찬 흰색 한복을 입고 법정의 의자에 앉은 여성 ‘열사’는 당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당당함, 의연함, 굴하지 않음 등을 보여주면서 작가 역시 한국의 민중항쟁에 지지하고 있음을 나타낸 작품이라 하겠다.이 밖에도 오사카시립미술관 부설 미술연구소에서 수학(1966~1968)할 당시 작품인 18세 때인 1966년 ‘서울의 하늘’은 베트남 파병(1964~1973) 문제에 대한 엇갈린 시선과 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았으며, 1969년 ‘재일의 인권을 위해’(1969~1990)는 오사카적십자사 셔터가 닫히려는 순간을 통해 재일동포의 인권을 강조했다.1980~2000년은 5.18 연작시리즈로 ‘5월의 광주’를, 2000년 이후에는 ‘유관순’을 통해 조국에 대한 맑은 그리움을, 1992년작 ‘돌아갈 수 없는 다리와 재일3세(꿈)’는 1976년의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당시 느꼈던 전쟁 촉발에 대한 불안감을, 2021년작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남북분단과 이산가족의 슬픔을 담은 역사적 증거물로 현실적인 아픔을 노래한다. 그의 가족은 경북 출신의 부모가 1939년 징용공으로 일본에 간 이후 해방을 맞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가난에 시달리다 1955년 오사카로 이주한다. 3년 뒤 부친이 사망하고 모친은 막내인 김석출 등 7남매를 홀로 인력사무소 일을 하며 키웠다. 이미 한국에는 일본에 가면서 남겨둔 두 딸이 더 있었다. 이후 1964년 둘째 형이 반대를 무릅쓰고 북송선을 타는 등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에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져 살게 되었다. 재일디아스포라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이다.이번 김석출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작가들이 역사적 진실에 대한 두드림을 함께 했으면 하는 공유의식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이슈와 장면에 대한 작가적인 시선으로 화폭에 스토리를 그려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석출은 1949년 일본 기후현에서 출생, 1955년 일본 오사카 사카이시로 이주해 현재까지 그곳에서 거주하며 활동하는 재일동포 2세 작가이다. 그의 부모는 경상북도 군위군 출신인 김만택과 정복례이며, 그들은 1930년 결혼 후 빈곤한 생활을 못이겨 1939년 징용공으로서 일본으로 간다. 그의 가족사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남북분단에서 발생한 비애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의 혼란 그리고 억압과 차별을 겪어 온 재일동포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듯 김석출의 예술세계는 자신의 개인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24-03-19 | NO.43
  • 박소빈, 무등 신화와 용의 스토리
    그녀는 ‘용과의 무한한 사랑’을 꿈꾼다
    그녀는 용을 품었다. 20대, 구례 화엄사 대웅전에서 만났다는 용은 일주문을 지나 커다란 몸을 스멀스멀 움직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속으로 빠져들었다. 용은 그녀와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몸살을 앓기 시작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용의 부활 - 무등의 신화, 2023, pencil, coloring, bronze powder on paper, 230x600cm전시 오픈 때 작품을 본 뒤 두 달여만에 다시 찾은 광주시립미술관 3층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몸속에서 용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용은 가끔 그녀의 연필 끝에서 바깥바람을 느끼고 있다고나 할까. 그녀의 용은 화면 가득하게 춤을 추는 듯,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세상 이야기를 하는 듯 관객에게 전하는 오르가슴은 사뭇 충격적이었다.그녀가 선묘(善妙)였던 것일까? 선묘는 지금의 산동성 봉래시 인근으로 알려진 당시 당나라 등주(登州)로 불교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의상대사를 사모했다.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의상은 선묘를 보리심(菩提心)을 내도록 만들었다. 선묘는 의상이 깨달음을 얻도록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원을 세웠다.의상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선묘의 집에 들러 감사의 말을 전하고 배를 탔다. 미처 의상을 따라가지 못한 선묘는 두 번째 원을 세워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신라에 도착해서도 의상이 부처님 말씀을 전하도록 줄곧 옹호하였다. 그리고서 지은 절이 부석사(浮石寺)였다. 의상은 이곳에서 화엄종을 창건하였다.그녀가 화엄사에서 용을 느끼고, 열병을 앓은 뒤 마주한 스토리는 부석사의 의상과 선묘였다. 아마도 그녀는 전생에 선묘였다는 윤회설을 체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그리기 시작한 용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박소빈(朴素贇)은 이렇게 말한다. “용은 보통 사람에겐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하지만, 신화 이상의 에너지를 갖고 이제 나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라면서 “그림이 내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바로 영원한 사랑이나 꿈을 용의 이야기로 펼쳐가는 데 있다”라고 했다.* 21살, 시대의 자화상, 1991, oil on canvas, 180x147cm이번 전시에서 박소빈이 선보이는 작품은 남들과 다른 누드로 선보인 ‘21세, 시대의 자화상’(180x147cm, 1991)을 비롯하여 입구 첫 공간에 배치된 ‘용의 부활- 무등의 신화’(230x600cm, 2023), 중국 금일미술관에서 49일간의 퍼포먼스로 진행되었던 가로 17m의 대형작품으로 출구에 전시된 ‘부석사 설화- 새로운 신화창조’(145x1700cm, 2017) 등이 눈여겨 볼만하다.그녀의 작품은 대부분 연필을 이용하여 엄청난 몸동작이 수반된 용틀임을 화면에 담아낸다. 한 자리에 서서 가만히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갈수록 작품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또 실제로 용이 꿈틀거리며 전시장 공간을 휘저으면서 나에게로 덮쳐오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만든다.‘용의 부활- 무등의 신화’는 오른편 아래쪽에 1980년 5월 도청앞 분수대 광장에 모인 광주시민들의 함성을 그리고 있다. 용은 입으로부터 뿜어낸 엄청난 여의주들로 도청 앞 함성을 감싸 안고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작가가 9살 때 겪은 5.18의 모습과 충격을 검은 연필로 끊임없는 원을 그리면서 힘찬 에너지를 전달하려는 듯한 강한 울림을 준다. 광주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부활이라는 신화를 작가의 시각에서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부석사설화 - 새로운 신화창조, 2017, pencil, bronze powder on paper, 145x1700cm‘부석사 설화- 새로운 신화창조’는 배를 타고 당나라를 떠나는 의상대사 일행을 선묘가 용이 되어 거센 풍랑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배치한 배는 용이 떠받쳐 옮기는 형상으로 부석사의 창건설화에 맞닿아 있다. 왼쪽 위 끝에 중국중앙TV(CCTV)라는 랜드마크와 같은 건물과 이 작품을 49일 동안 그렸던 금일미술관의 모습을 배치한 것은 그녀가 이곳에서 작업한 장소성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천국의 사랑’(245x600cm, 2022)은 작품 중앙에 엄마의 뱃속에 잉태된 생명과 오른쪽 아래 끝에 태양 안에 살고 있다는 삼족오(三足烏)가 생명성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통해 그 영원성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 볏이 있는 삼족오는 한국 고유의 삼족오이며 봉황과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용과 연계된 상징성을 강화하고 있다.* Heaven in Love, 2022, pencil, bronze powder on paper, 245x600cm특히 연필심의 검은색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종이용 반사 재료인 청동분말로 된 브론즈 파우더를 이용하여 어두운 곳에서도 눈에 띌 수 있는 효과까지 고려하였다는 점은 재료의 다양성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라고 하겠다.중간중간에 지난 3년간의 코로나 팬데믹 시간에 고립된 공간에서 주술처럼 써 내려간 박소빈의 갑골문자와 같은 새로운 문자작업은, 용에 대한 그녀만의 천수경이며 주기도문처럼 느껴진다. 마치 무한 반복인 듯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읽히는 이야기들을 문자로 토해내는 작업은 지루한 일상에 대한 싸움이고 도전이었을 것 같다.전시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입구 한쪽에 있는 특별코너인 다큐멘터리 영화 ‘공空: 박소빈’을 볼 필요가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중국 북경 출신의 청년 영화 감독 관얼(关耳, Gran Zheng)이 제작한 박소빈 작가의 중국 북경 활동을 기록한 실험적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리고 출구를 나가기 전에 박소빈이 말하는 자신의 작품세계와 용에 대한 그녀의 꿈을 잠시 시청하는 시간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훨씬 높일 수 있을 것이다.그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스케일, 화면마다 숨겨져 있는 상징, 그녀의 자전적인 스토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광주의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지난 몇 년간 보여주었던 작품전 가운데 가장 깊이 있게 울림을 경험한 감동이었다. 그녀의 작품에 대해 윤진섭(2013)이 “박소빈 회화의 정서적 울림은 선묘의 깊이 있는 축적에 기인하거니와, 거기에 덧붙여 엄청난 크기의 화면은 그 자체 송고함을 더한다”라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2024년 3월 24일까지 전시가 이어진다. 아직 이곳 미술관 전시장을 둘러보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할 것 같은 전시임이 분명하다.    *작가 박소빈과 필자 정인서  
    2024-03-10 | NO.42
  • 음악극 ‘나두야 간다’에 대한 평
    10월 5일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된 음악극을 보고
    눈물이 찔끔거렸다. 눈물방울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슴이 약간 저리는 정도로 눈물을 머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극이 끝나자 일어서서 박수를 쳐댔다. 이렇게 좋은 연극, 더욱이 우리 광주가 낳은 시인 용아 박용철의 인생을 재미와 가슴 시린 연출로 1시간 반 동안 담아낸 역량을 높이 평가한다.음악극 ‘나두야 간다’는 2020년에 초연된 창작 작품이다.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 일본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정지용과의 삼각관계(?) 속에서 문학적 공감과 갈등 다시 화합하는 과정을 그렸다. 특히 일제강점기 하에서의 우리말로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이들 세 사람이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음악극은 연극적 플롯이 아니라 서사극의 형태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서로의 역할과 장면 등에서 무대 위에 소품과 의상들을 늘어놓고 현장에서 갈아입고 출연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물론 이 극은 일부 즉흥극이나 애드리브가 아니라 치밀하게 짜여진 대본임은 분명하다.이 극은 박용철의 대표적인 시, 그리고 극에서 연출되는 박용철의 생애와 어울리는 시들에 창작 음악을 입힌 음악극이다. 시와 음악이라는 다르면서도 사실은 하나인 시어들에 덧붙여 필요한 장면마다 어울리는 영상을 배경으로 하는 시청각적 연출을 선보였다. 보는 이로 하여금 몰입감을 주어 1시간 30분의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공연 내용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과 문화적 탄압을 받던 시절, 일본 유학 중 만난 박용철과 김윤식이 귀국하면서 김윤식의 권유로 시를 쓰기 시작한 박용철의 결혼과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극예술’ 등의 잡지를 자비로 출간하는 모습, 그리고 잡지 발간에 지나친 과로로 인해 폐결핵으로 사망하는 과정을 ‘팩션’으로 만든 작품이다.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 하지만 민족의식이 꿈틀거리는 젊은 청년들에겐 문학으로나마 우리 말을 지키고 우리 문학을 완성시키고 싶었던 그들의 꿈에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동참시키게 만들었다. 갑자가 “그럼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라는 자기반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장치였다.이번 공연을 선보인 극단 까치놀은 광주 서구문화센터 공연장 상주단체로 광주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 7월과 8월 세 번에 걸쳐 광주서구문화센터와 빛고을시민문화관 무대에 극을 올린 바 있다. 이 극을 본 사단법인 용아박용철기념사업회 김보곤 이사장이 광산 출신의 박용철 극을 광산에서 해야 한다며 유치해 10월 5일 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예정에 없던 공연이 이루어졌다.극단 까치놀은 1985년 창단, 현재 36년의 역사로 ‘훌륭한 예술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연극을 사랑하자’라는 구호로 순수연극의 대중화와 지역문화자산 발굴, 레퍼토리 작품화 등 지역 연극의 발전을 위해 활동 중인 전문 예술단체이다.특히 ‘나두야 간다’는 광주에서 활동하는 한보리 작곡가가 우리 지역 시인들의 시를 음악으로 풀어내자는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안다. 박용철의 대표적인 시어들을 음악으로 만들어 소개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또 출연진들도 가수 수준은 아닐지라도 애써 노래부르는 모습들에 더욱 박수를 보내고 싶다.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전문 연극단체라면 배우들의 극중 발음이 명확하게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대본에 충실해야 하고 애드리브도 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달력이다. 11명의 출연진 가운데 2명 정도가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아 대사의 앞뒤를 이해하는 데 애를 먹었다. 물론 박용철의 생애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어 큰 문제는 아닐 수 있고 극 전체의 흐름에 중대한 장애는 아니었다. 창작음악은 시의 느낌도 있고 시대적 상황에 맞추려 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암울하거나 처진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음악을 아마추어 수준의 출연진이 노래를 불렀으니 더더욱 음악적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좋은 음악은 작곡도 중요하지만 부르는 이가 누군가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떠나가는 배’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나두야 간다’가 제목인 것으로 착각할만큼 알려져 있다. 이는 가수 김수철의 ‘나두야 간다’에서 일부 싯구들을 차용한 덕분이다. 이 극에서도 전체를 한보리의 창작곡으로 접근하겠다는 의지도 필요하겠지만 관객들에게 익숙한 김수철의 두 소절을 끌어다가 시의 초반부 네 소절을 편곡하여 들려주었다면, 그리고 합창으로 불렀다면 관객들이 재미있게 따라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이 음악극에서 가장 ‘눈물’을 짜냈던 박용철의 죽음 장면 이후 같은 네 소절을 슬픈 음악으로 끌고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마지막에 박용철의 ‘시적 변용에 대하여’를 낭독하는 장면은 사족처럼 느껴져 이 극의 감동을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2021-10-05 | NO.41
  • 하정웅미술관, 네 가지 색깔의 위험한 作亂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2021 ‘어떤 날, 어떤 이야기’ 11월 28일까지
    전시는 제목처럼 ‘어떤 날,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가의 시점에서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가거나, 경험을 소재로 하거나, 지난한 지루함을 견디고 촬영한 영상을 보여주거나, 오래도록 반복작업 과정에서 건져낸 돔성당의 정문을 바라보는 듯한 파편들이었다.전시는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었고 작가의 구상을 디스플레이 하는 과정에서 미술관의 노력이 돋보였다. 관람객들의 기분이 좋아지는 전시 효과 덕분에 작품에 대한 접근과 이해에 군더더기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광주시립미술관과 수원, 부산, 대구시립미술관에서 각각 3~4명의 작가를 추천하고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작품 특성과 장르 등을 고려하여 미디어, 설치, 회화, 공예라는 네 영역의 작가를 선정했다. 이번 ‘빛 2021’전은 작가들의 다음 전시작품에 따라 성장가능성을 점쳐 볼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작가에 따라 전시에서 한 번 보여준 작품을 다음 전시에 또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유사한 작품을 보여주어 새로움을 느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개인전이나 초대전과 같은 자신의 작품 역량을 어느 정도 보여준 전시였다면 다음 전시에서는 그를 넘어서는 작품으로 관객을 찾아야 한다. 작가의 창작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변화를 통해 관객과 지속적인 대화를 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문소현, 정정하, 문지영, 이윤희 작가의 작품(시계방향으로)문소현은 전시장에 들어서면 정면에 'Night Life'라는 제목처럼 네온사인과 빌딩조명을 드로잉하는 작업을 통해 현대인의 밤의 환락과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영상에 몰입하다보면 우주의 저편으로 시간의 통로 속에 빠져드는 미아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되돌아오면 현실세계는 다시 욕망덩어리라고 깨우쳐주고 있다.정면에 있는 이 작품을 기준으로 양쪽에 각 세 편씩의 '공원생활'이, 전시장으로 들어섰을 때 관람객 입장에서 보면 뒤편에 '터지는 폭죽들'이 배치됐다. 이러한 공간구성을 통해 전시장 중앙에 서있는 관람객을 ‘재미있다’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잠시이고 ‘기괴하거나 무섭다’라는 전이된 장면에서 인간도 한갓 나약한 존재임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아마 문소현은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이 아니라 '터지는 폭죽들'처럼 불빛을 보고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스러져 죽는 존재이며, 스톱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보여준 '공원생활' 시리즈처럼 인위적인 세상 속에서 누군가의 조종을 받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문소현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보여주고 있다. 문소현에게 던지는 질문은 인간의 욕망과 기괴함이 갖고 있는 문제에서 인간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관점이다. 다음 작품에서 그러한 관점이 표현된 시각을 보고 싶다. 정정하는 색에 굶주려 있는 것 같다. 미술가는 색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색’을 정리하고 자신의 색을 찾아가는 경우는 우리 주위에서 드문 것 같다. 그는 부모님의 페인트 가게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고객이 희망하는 색을 조색하여 판매하는 과정에서 색에 대한 문리가 트인 작품이 'Light Pixel'로 표현됐다.빨주노초파남보, 우리가 어려서부터 무지개색으로 생활화된 색의 영역을 정정하를 통해 훨씬 더 많은 색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받았다. 이러한 각각의 색은 빛으로 표현된다. 그의 이번 전시는 회화라기보다는 빛으로 만든 설치이다. 정정하의 말마따나 “나는 어떤 인간인가?”라는 질문으로 작가로서의 욕망을 색을 통해 분출하려는 시도가 형광페인트를 활용한 '아름다운 두려움'으로 나타났다.이번 작품은 페인트와 인테리어 현장에서 사용하는 줄눈 튜브, 공업용 레진 등으로 이루어졌다. 흔히 미술가들이 사용하는 물감이 아니라 그의 생활전선에서 얻어진 것들로 작품이 진행됐고 작품은 비정형 이미지를 통한 형식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형식이 '빛에 대한 연구'로 드러났다. 우리는 평소에 무관심하게 보는 빛을 그는 어떤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정정하에게 부탁하는 것은 이번 전시에서 빛을 모으고 정리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다음에 같은 작품을 보여주는 한계를 갖지 말길 바란다. 이번 전시가 끝나면 'Light Pixel'의 각 편린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함으로써 소통을 이어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이윤희는 도자작품을 하는 데 이번 작품은 유럽 중세시대의 작품을 보는 듯 하고 돔성당 입구 정문과 주변 벽에 붙어있는 조상들을 보는 듯 했다. 단테의 ‘신곡’을 연상시키고 로댕의 ‘지옥문’을 재현하는 듯한 형상들을 오마주했다. 곳곳에 해골들이 기본으로 등장하고 상징적인 기호들이 더해져서 죽음이나 지옥을 표현했다. 한국판 '신곡'은 다르다고 하면 모두가 하얀 도자를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벽면 작품을 제외하고는 입체 작품이 전시장 중앙에 두 줄로 배열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작품마다 소녀상이 있는가하면 배트맨처럼 두 눈의 주변을 가린 소녀의 두상들이다. 또 10여개의 단일 작품 제목을 모두 '무제'로 처리했다. 이는 일본위안부 사건으로 논란이 된 ‘평화의 소녀상’과 연계하는 듯한 암묵적 메시지도 보인다. 도자의 특성은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빚고 굽고, 다시 색칠하거나 붙이거나 굽거나 하는 것이다. 수차례의 가마굽기 반복작업과 섬세하고 화려한 마감으로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단테가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한 존재”라고 했다는 점에서 정말 수고롭게 고생한 이 작품도 물질적으로 ‘나약’한 존재성을 갖고 있다.이윤희는 이번에 단테의 '신곡'을 오마주했다면 다음에도 같은 작품을 보여주기보다  한국적인 죽음과 지옥문이 보고 싶다. 같으면서도 다른 10여개의 작품 제목을 '무제'로 하는 무책임보다는 작가의 영감에서 드러나는 작품 제목을 부여하든가 아니면 시리즈로 번호를 부여하는 게 더 나을 듯 싶다. 문지영은 큰 화면의 가족의 모습을 통해 사랑을 그렸다. 작품의 제목은 '엄마의 신전' 시리즈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동생이다. 동생은 시각장애와 지적장애가 있다.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하면서 작가는 남들과 다른 모습의 동생을 작품 속에서 자신으로 치환시켜 그 아픔을 대신 감내하려는 흔적이 보였다.작가는 가족이 등장하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눈을 덧칠하거나 가리는 등의 수법으로 동생의 고통에 동참했다. 어머니는 동생이 빨리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자주 절에 가고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작가의 마음에 남은 그 흔적들이 오늘까지 이어져 이번 작품에서 대중에게 약자에 대한 인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작품을 보면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한 붓터치가 눈길을 끈다. 가족사진을 보는 것처럼 화면 전체를 넓게 사용하는 붓칠이 편안해보였다. '가장 보통의 존재'(2014~2015) 연작시리즈와 4~5년이 지난 '엄마의 신전' 시리즈는 동생을 매개로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가족의 슬픈 역사를 보는 듯 하다. 그는 어떤 가족이야기를 그리고 싶은 것일까 짐작만 갈 뿐이다.문지영은 '가장 보통의 존재'와 '엄마의 신전'을 통해 장애를 가진 동생과 이를 둘러싼 엄마의 기도가 포함된 가족이야기를 풀었다. 또 다시 같은 류의 스토리로 작품을 구성하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성에 대한 다른 주제로 접근하는 노력이 필요해보인다. 네 명의 작가는 네 가지 색깔을 보여주지만 귀결점은 ‘인간성’으로 느껴진다. 작품마다 정말 어떤 날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갖고 있는 인간성은 어떤 것인가이다.네 명의 작가에게 주문한다. 작가는 창의적인 존재이고 예술성이나 철학성과 같은 어려운 담론을 담기도 하지만 관객과 소통하는 작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던져야 한다. 어떤 작가들은 평생을 같은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는가 하면, 어떤 작가들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좀 더 발전하거나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보여준다. 정답은 없지만 작가는 늘 앞서가고 실험적이며 관객의 감동을 자아내는 작품이 긴 생명력을 갖는다고 믿는다.
    2021-10-03 | NO.40
  •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거대한 일상을 보다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을 통한 형상미술
    정인서(2021.06.21.) 광주에서 부산까지는 불과 3시간, 늘 심정적으로 멀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고속버스에 오르니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섬진강 휴게소를 거쳐 부산 노포 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바로 도시철도가 연계되어 버스로 한 번 환승하여 벡스코 건너편에 자리한 부산시립미술관을 찾았다.바쁜 일상 속에 묻혀 사는 도시인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다른 도시로 탈출(?)하는 몸부림으로 다소간의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광주에서는 늘 눈에 익힌 작품들만 보아온 터라 다른 작품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1980년대의 미술은 흔히 민중미술로 귀결된다. 부산도 그러했다.우리 미술계는 1970년대까지 추상적이고 관념화된 모더니즘에 대한 구상미술이 전면부에 등장했다. 1980년대는 구상미술과 민중미술이 혼재된 시기였다. 필자는 1980년대 초반 광주의 한 미술관 전시담당으로 있으면서 지역작가를 중심으로 한 <구상작가 11인전>을 연 바 있다. 구상미술은 자연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거나 약간의 인상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되는 미술이었다. 추상미술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어느 정도 형상을 갖추고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구상미술은 관람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런데 부산시립미술관이 일을 저질렀다. 부산시립미술관이 마련한 <거대한 일상: 지층의 역전(3.31~8.22)>은 추상미술이나 구상미술과는 다른 ‘형상미술’을 들고 나선 것이다. 강렬한 색감, 인체에 대한 새로운 묘사, 욕망의 표현, 일상에 대한 주목 등 이전과는 다른 표현을 한 작가들에 주목했거나 민중미술로 분류되었던 작품들에 대해서도 해석을 달리 하는 역전을 시도한 것이다.이 전시의 부제는 ‘1980년대 부산미술조명전’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부산에서 유의미한 역사적 발자취를 남긴 작가들을 재인식함으로써 한국미술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겠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형상미술'의 재조명을 시도하고 있다.전시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기존 구상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대상의 묘사와는 달리, 대상의 왜곡과 변형, 강렬한 색채를 통해 현실에 대한 자각과 표현을 시도한 작가들의 움직임을 새롭게 맥락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후 ‘형상미술’로 불리게 된다.”물론 지금은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났다. 그래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새로운 '형상'으로 드러내려 한 1980년대 부산미술을 돌아보면서 한국미술사를 새로이 접근하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고나 할까. 이번 전시는 1980년대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작가 26명 작품 120여점과 1980년대 한국미술계를 아우르는 아카이브(archive) 등 당시의 시대정신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작품 구성은 현실의 자각, 표현의 욕구, 욕망에의 추동, 일상의 중요성 등 키워드로 분류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민중미술의 시기로 인식되는 1980년대 한국미술을 ‘형상미술’로 재고해야 한다는 도발적인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추상에서 형상으로의 회복을 현실의 표정을 통해 드러낸 ‘현실의 표정-형상의 전개’, 일상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에 대한 표현적 시도를 다루는 ‘표현의 회복’, 형상미술의 다원성을 드러낸 강렬한 표현주의적 시도를 보여주는 ‘뒤틀린 욕망’, 마지막으로 거대한 일상 속 삶의 체취를 다각적인 시선으로 풀어낸 ‘격랑의 시대’로 전체적인 구성이 이루어졌다.물론 ‘형상미술’이라는 구체적인 개념 정립이 미술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도를 통해 그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술평론가 김종길은 “형상은 재현, 묘사, 모방을 뜻하는 미메시스이기도 하다”면서 “전통의 맥락에서 형상의 개념은 표현주의에서처럼 작가의 관심이 사물의 재현이라는 형식의 문제보다는 내용이 비중을 둔 경우이며 작품이 ‘시대적 리얼리티’를 내포하고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늘 ‘개념’이라는 틀을 중시하면서도 여기에 갇혀 작품을 해석하다보면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때로는 작품 자체에 몰입하여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것이다. 어떻든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 시선은 표현보다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데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전시장 도입부 ‘현실의 표정’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 한다. 송주섭의 ‘세대’라는 작품이다. 주름진 피부가 메마른 땅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매우 말랐다. ‘세대’(147×78cm, 1982)는 지층의 표질을 인물의 표정으로 옮기면서 인간의 삶도 저러할진대 이 땅의 역사는 어찌했을 까라는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틀에서 설명되는 작가 그리고 작품이었지만 시대의 고난을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겠다. 그런가하면 ‘세대’(73.5×54cm, 1984)는 더 기괴해지면서 얼굴 표정이 바위덩어리, 또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를 연상시켰다.전시장을 빠져나오는 마지막 ‘격랑의 시대’에서 안창홍은 ‘위험한 놀이’(73×105cm, 1983)를 통해 시대 상황을 개인주의적 화법으로 그려냈다. 중세시대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재현하면서 눈을 파내 억눌린 개인의 심리를 자극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경기대 교수 김복기는 이번 전시를 인간 존재에 대한 응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상, 인간 내면의 의식과 감춰진 욕망의 표출, 소소한 일상을 다룬 작품들로 분류하고 있다. 이런 관점으로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늘 반복적인 틀에 갇혀 사는 것처럼 단순해 보이지만 사람마다 나름의 복잡다단한 얽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부산에서 만난 ‘거대한 일상’을 통해 내 삶의 지층을 역전시키는 의식적 경험을 얻어간다면 참으로 좋으리라. 이 전시가 새로운 표현형식을 창안하거나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반드시 찾아봐야할 전시임이 분명하다. 전시장 내부는 다양한 가벽 설치를 통해 관람객들의 동선을 쉽게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 어린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의 관람도 눈에 띄었다. 미성년이 보기엔 다소 민망한 작품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작품엽서와 관련 텍스트를 활용한 콜라주와 색칠하기 등은 상당히 좋은 체험학습이라고 생각되었다. 
    2021-06-21 | NO.39
  • 그들은 왜 파리로 갔나
      파리로 간 작가들을 만나러 갔다. 벚꽃이 만개한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들은 파리에서 벚꽃을 보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에펠탑 근처에 벚꽃이 만발하고 웬만한 공원에서도 벚꽃 군락이 자태를 뽐낸다.벚꽃 아래에서 파리로 간 작가들을 만난다는 약간의 들뜬 마음을 갖고 종종걸음으로 걸었다.처음 만난 작가는 이성자(1918~2009)였다. 붉은 하늘 아래 우주의 별들이 우리 오방색으로 형태를 이룬 모습은 신비스럽고 고향의 향수가 묻어나는 듯 했다.김환기(1913~1974)는 멀리서 석조다리 위에 빛나는 야간 조명등 불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그에게 빛은 흔들거리는 네모를 통해 세상의 시각은 가까이보다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오늘의 광주 작가들은 세상과 얼마나 교류하고 있을까? 자신의 작품 경향에 따라 중국이든, 인도든, 유럽이든, 미국이든 무한한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하다.그들을 만날 시간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지난 넉달간 광주에 체류하며 우리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시간이 이제 짧다.3월 31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열리는 있는 <파리로 간 예술가들>의 손짓이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이 전시를 기획한 홍윤리 학예연구사는 "세계 속에서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담기 위해 노력했던 작가들의 작품을 시립미술관 소장품과 하정울 컬렉션으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면서 "우리 광주 예술의 축을 이루는 작가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생각하고 세계화에 더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광주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1980년대 초반 만났던 김창열과 영국 회고전을 앞둔 구순의 박서보(1931~ )를 40여년만에 다시 만나는 기쁨이 나에겐 너무 좋았다.나도 코로나가 끝나면 파리로 가고 싶다. 이제 파리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의 다른 작가들을 만나 한국의, 아니 광주의 미술을 이야기하고 싶다.변종하(1926~2000)는 1980년의 대답을 평화로 노래했고, 요즘 물방울 값 좀 제대로 받고 있는 김창열(1929-2021)은 케이옥션에서 ‘싹쓸이’ 대접을 받느라 기분이 좋단다.2차 대전 이후 전 세계 예술인들의 로망으로 변한 파리는 한국의 예술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에서 최첨단의 도시였고 전통 서구문화의 집성지로 세계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몽마르트언덕으로 대변되는 파리는 다양한 현대미술의 유파들이 각축전을 벌이면서 들고 나왔다.파리로 간 우리 예술가들은 남관(1954)을 시작으로 김흥수(1955), 박영선(1955), 김환기(1955), 권옥연(1957), 이응노(1958), 이세득(1958) 등이 1950년대 전후 파리 화단에 선보인 작가들이었다.1960년대 아직은 6.25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변종하(1960), 문신(1961), 김창열(1969)을 비롯하여 1970년대에는 이항성(1975) 등이 큰 바다를 건너갔다.그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시원을 이룬 작가들이어서 더욱 그렇다.
    2021-03-27 | NO.38
  • 진정한 광주인, 박광옥
    그때 회재 박광옥(朴光玉) 선생은 20여 년간의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 집에 돌아와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경상도 상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회재는 수레를 타고 달려가 광주목사 정윤우를 급히 만나 전라도 순찰사 이광에게 어서 가서 왜군을 막기 위해 북쪽 요새지 길목에 군사를 미리 보내 방어하도록 하라고 전한다. 그래야 서울을 호위하고 호남을 보존할 수 있어서다.당시 순찰사 이광은 서울로 가던 중 마침내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자 도중에 후퇴하고 도망쳐버렸다. 회재는 통곡하며 창의사 김천일, 첨지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울 것을 결의하고 후방에서 군사와 군량과 무기를 조달했다.김천일은 회재에게 편지를 보내 “한편은 전장에 나가고 한편은 지방에서 방비하는 것이 국가를 위하는 일이다. 기반이 흔들리면 이 일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앞장서서 싸우는 것은 오직 공의 협조에 달렸다”고 회재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회재의 후방 지원이 그만큼 절대적이었던 것이다.이때 도원수 권율 장군이 광주목사로 왔다. 수원에서 패전당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권율을 지원하기 위해 회재는 다시 누구의 명령도 없는데 이웃 고을들에 격문을 보낸다. 사사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아 권율에게 복속시켰다. 이리하여 다시 권율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이런 회재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권율이 뒤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회재가 선비들을 보내어 마을마다 드나들면서 의병을 모집하니 겁을 먹고 응하지 않던 주민들이 그 의로움에 차츰 호응하였던 것이다.회재의 정성에 권율이 탄복하고 군사를 모으는 일은 오로지 회재를 믿고 위임하였다. 이런 사정을 듣고 조정에서 복직하라는 어명이 떨어져 회재는 나주목사로 부임한다. 회재는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해 있는데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며 불편한 몸에 다시 관복을 입고 임금이 어디에 있으며 이때가 어느 때냐며 줄곧 나라를 지키는데 혼신을 다했다.회재는 직접 전장에 나갈 계획이었지만 의병을 모집하고 뒷바라지하느라 무리한 탓에 피곤이 겹친 데다 어릴 때 얻은 옛병마저 재발했다. 후방에서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한 탓에 결국 병으로 인해 예순여덟의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전장에 나가 직접 전투에 참여한 누구 못지않게 큰 공을 세운 회재는 임진왜란 시기 하나의 빛나는 별이었다. 몸은 성치 않은 데다 관직을 그만둔 처지인데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가와 임금을 위해 헌신한 모습을 우리 역사 어디서도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가히 청사에 기록되어 전할 인물이라 함직하다. 회재 박광옥의 이러한 애국 행위는 이미 어릴 적부터 닦아온 공부와 가풍과 한 인간의 고결한 성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갑자기 발현한 것이 아니다.어려서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는 어른처럼 상을 치렀고 뒷날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는 너무 슬퍼 묘소에 여막을 짓고 3년 복제를 하여 온 고을이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을 정도다.한평생 출세를 위해서 높은 벼슬아치의 문앞을 찾아가지 않았고 부임하는 고을마다 먼저 향약을 세워 청년들을 가르쳤다. 그야말로 선비관리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살 법도 하지만 근검절약하는 검덕(儉德)이 생활 신조였다.나라에서 주는 녹봉밖에는 아무것도 더 취하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니면 손대지 않고 그것을 누구에게 주지도 않았다. 아는 지인들이 자리 부탁을 하면 크게 꾸짖었다.젊어서 늙음에 이르기까지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책을 놓지 않았다. 특별히 문장에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문장이 중후하고 아름다워 옛 문장의 정취가 담겨있고 필법이 자유분방하였다.만년에는 더욱 주역, 계몽, 가례 등 글에 힘써 통달하였다. 어린 서질부터 기대승 선생과는 교우를 하였고, 사암 박순, 옥계 노진과도 우의가 깊어서 서로 존경하는 사이로 지냈다.안타깝게도 광주의 인물 회재 선생을 아는 이는 많지 않는 듯하다. 학교에서 자기 고장의 역사와 인물을 잘 가르치지 않아서다.회재 같은 고향 인물들을 가르쳐서 진정한 광주정신을 후대의 핏줄에 흐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광주사람을 양성하는 길이 아닐까. 회재 선생은 지금 광주 서구의 벽진서원에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오는 11월 22일 광주유림회관에서 광주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주최로 처음으로 임진왜란 시절 회재 선생의 활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열었으니 선생의 위상을 다시 내세울 때다. 광주시의 관심이 요구된다.출처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
    2019-11-15 | NO.37
  • 정인서 문화비평 47 광주시립미술관 역사를 새로 써보자
    문화도시 광주의 명맥을 유지하는 시설 가운데 광주시립미술관을 빼놓을 수 없다. 3년만 더 있으면 개관 30주년이라는 한 획을 긋는 지역미술관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미술관 다음으로 역사가 가장 오래 된 미술관이기도 하다.이런 역사를 가진 미술관답게 서울에 지역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공간인 광주전남갤러리를 인사동에 열었고 다른 미술관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중국시장을 겨냥한 북경창작센터의 운영은 괄목할만한 성적 가운데 하나이다.여기에 하정웅 선생의 기증작품을 전문으로 전시하고 청년작가 육성과 지역 중견작가들의 일대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획전을 여는 하정웅미술관, 사진전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전시관, 금남로 분관(민간위탁), 갓 새내기 청년작가를 위한 청년예술인지원센터 운영, 국제레지던시 운영 등 참으로 많은 시설을 관리하고 있다.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인력 대비 전시기획이 너무 많다 보니 볼만한 전시가 부족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블록버스터급의 전시가 없다는 점이 늘 아쉽다는 평가였다. 지역 작가 작품 구매도 편향적이거나 단 한 작품이라도 좋은 작품을 사들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역 미술계의 요청도 있었다.물론 이는 모두 예산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같은 예산으로라도 좋은 전시기획을 할 수 있고, 지역 기획자를 길러내는 일에 나서서 공동큐레이터제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역할 모색이 필요하다. 시립미술관이 전시기획 공모전을 여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나 싶다.일이라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고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게 사람의 일이다. 전임 미술관장들에게 어려차례 이런 이야기를 해봤지만 좋은 아디이어지만 ‘예산’을 이유로 늘 실행하지 않았다. 이번에 광주시립미술관이 ‘가보고 싶은 공립미술관 1위’를 목표로 5개년 혁신 발전방안을 발표했다. ▲국제적 수준의 전시기획 시스템 정립 ▲맞춤형 교육프로그램 운영 및 홍보방식 다양화 ▲경험하고 즐기는 복합문화공간 구축 ▲소장품 분야별 특성화에 맞춘 작품 수집·관리 ▲하정웅미술관 활성화 등 5개 중점과제와 24개 세부사업으로 구성했다고 한다.이 발전방안은 전승보 시립미술관장 취임 1년을 맞아 ‘도시감성을 풍요롭게, 상상력이 넘치는 미술관’을 비전으로 제시한 가운데 마련된 것이다. 더불어 대중성, 창의성, 다양성을 기반으로 미술관 정체성을 정립해 ‘가보고 싶은 공립미술관 1위’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시립미술관 5개년(2019~2023) 혁신 발전방안’을 제시한 것이다.특히 국제적 수준의 전시 개최를 위해 2020년에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전으로 ‘별이 된 사람들’전을 기획해 선보인다고 한다. 이 전시에서는 5·18 당시 광주시민들이 보여준 ‘집단지성과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숭고미’를 중심으로 관람객의 감동을 유도하고, ‘분노와 슬픔에서 희망의 시작’이 되는 5·18의 확장과 세계화를 도모한다고 하니 사뭇 기대가 된다. 내년 광주비엔날레와 맞물려 대규모 전시로 세계적인 개념미술가인 ‘리암 길릭(Liam Gillic)’전을 기획할 예정이다. 그는 일즈버리 출생으로 데미안 허스트, 사라 루카스, 안젤라 블로흐 그리고 헨리 본드 등과 함께 1990년대 초기 yBa의 멤버 중 한 명이다. 오늘날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리크리트 티라와니트 등과 함께 ‘관계미학’의 컨텍스트 속에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노년층으로 접어드는 베이비부머세대(1955~1965)의 본격적인 은퇴 시기에 중장년층을 위한 문화복지 활동과 풍요로운 여가생활 지원을 위해 ‘실버미술학교’ 개설 등 교육문화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운영한다.창작지원프로그램을 활성화하기 위해 중국, 독일, 대만 이외에 교류 대상국을 다변화하고, 지원 작가 인원을 확대한다. 이는 지역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작품 역량 확대에 크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5개년 혁신 발전방안의 또 다른 축은 미술관과 미술관이 위치한 중외공원에서 머물며 체험할 수 있는 편의시설 확충이다. 사실 그동안 미술관과 비엔날레관, 민속박물관이 같은 공간에 있지만 머무르고 체험하는 공간이 부족했다.방문객 편의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내년에 본관 1층의 자료실을 2층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라이브러리 아트라운지’를 조성한다. 카페테리아는 2022년 운영을 목표로 시민들이 한눈에 중외공원을 볼 수 있는 카페레스토랑으로 증축, 개보수한다.중외공원 일대에는 이미 발표된 바 있지만 2023년까지 아시아 문명·문화를 테마로 하는 문화정원, 자연체험 미로정원, 문화예술회관과 중외공원을 잇는 공중보행로인 하늘다리 개설 등 ‘아시아 예술정원’을 조성한다.이 밖에도 하정웅미술관 활성화를 위해 하정웅미술관에 수장고를 신축해 문화 예술의 협업기능과 연구 교류의 아트플랫폼 역할을 하는 아시아 아트 아카이빙 플랫폼을 건립한다.언제 찾아가도 “정말 좋은 전시를 볼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거나 “좋은 체험을 할 수 있어 기억에 남는다”는 관람객의 반응이 기대가 된다. 그런 광주시립미술관의 새역사를 꿈꿔본다.
    2019-09-28 | NO.36
  • 광천동 시민아파트, 이대로 사라지는가?
    서대석 광주 서구청장
    옛 전남도청 앞 작은 천막. 오월의 어머니들이 뜻을 같이하는 지역민들과 함께 옛 전남도청 복원을 외치며 농성에 들어간 지 740여 일이 지났다. 폭염과 비바람에도 한겨울 눈보라에도 노구의 어머니들은 한치의 흔들림 없이 바위처럼 버텨왔다. 38년전 5·18 최후의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을 목숨과 바꿔 지켜냈던 내 자식들의 숨결과 정신을 온전히 간직하기 위한 어미의 심정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5·18 민주 항쟁도 어느 새 38년이 지났다5·18의 정신은 한치의 변함이 없는데, 5·18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어쩌면 세월에 흔들리고, 옅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볼 때가 아닌가 싶다. 현재 5·18의 흔적들 중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옛 국군통합병원 부지와 옛 505보안대, 광천동 시민아파트 정도에 불과하다.상무대 영창은 상무 신도심 개발로 형태만 복원됐고, 광천성당 안 들불야학 터는 도로 개설로 외벽 일부만 남은 상태다. 5·18 최후의 항쟁지였던 옛 전남도청 건물마저도 아시아문화전당 건립 당시 훼손돼 이제 와서야 원형 복원이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옛 국군통합병원과 옛 505보안대의 경우, 광주시에서 5·18 사적지로 지정하여 원형 보존을 전제로 국가 폭력 피해자 치유 시설과 역사 공원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참으로 반갑고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광천동 시민아파트는 그 사정이 녹록치 않다. 광주시 서구 광천동 650-7번지에 자리한 시민아파트는 지난 1970년 7월 사용 승인을 받아 준공된 광주 최초의 연립 아파트다.6·25 피난민들의 거주지 마련을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광주·전남 최초의 노동 야학인 ‘들불야학’이 광천동 성당 교리실에서 시민아파트로 옮겨진 이후에는 노동 운동과 5·18 민주 항쟁의 근거지가 됐다.특히 80년 5월 당시 항쟁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계엄군의 폭력 진압을 규탄하는 ‘투사회보’가 시민아파트에서 제작됐다.모든 언로가 통제된 상황에서 투사회보는 5·18의 진상을 알리는 유일한 창구였고, 광주 시민들의 투쟁 의지를 하나로 묶는 구심이었다.38년 전 그렇게 서슬 퍼런 군부 독재에 맞서 광주 항쟁의 주춧돌을 놓았던 시민아파트가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얼마 전 지역의 뜻 있는 문화예술인들은 5·18 역사 공간인 시민아파트가 사라지게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시민아파트 앞에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보는 내내 젊은 시절 그 곳에서의 뜨겁고 치열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얼마 남지 않은 5·18 역사 공간으로서 시민아파트가 소중할 수밖에 없으며, 원형 보존에 대한 절박함이 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물론, 시민아파트 원형 보존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인 광천동 재개발 지역 주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과 첨예하게 맞물린 복잡하고도 민감한 사안이다.2400여 명의 재개발 조합원들의 재산권 및 주거권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며, 불가능한 일 만도 아니라고 본다. 시민 공동 자산화 방안은 시민아파트 원형 보존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재개발 사업으로 훼손되거나 없어질 위기에 있는 역사적 공간을 시민 공동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다.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공간 보존과 지역 주민들에게 쾌적하고 편리한 주거 환경 제공을 위한 재개발 사업은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시민아파트 원형 보존은 범시민적인 공감대가 이뤄져야 하며, 무엇보다 재개발 지구 주민들의 동의가 선행돼야 한다.지방 정부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원형 보존의 당위성을 중앙 정부에 알리고 행정, 재정적 지원을 이끌어 내야 한다.전문가와 5·18 관련 단체 등과 함께 시민아파트에서 이뤄졌던 활동들에 대한 뒷이야기들을 발굴하여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승화시킨다면 더욱 좋겠다.청년 강학들의 올곧은 신념은 이 땅에 불의한 정치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씨앗이 돼 왔다. 40년 전 그 자리에 있던 야학당의 불은 꺼졌지만, 그 혼불만은 영원히 빛났으면 하는 바람이다.전남도청 건물처럼 허물었다 복원하는 우를 되풀이해서야 되겠는가? 세월이 지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의 한 점이 된다. 미래 이 자리에 서 있을 세대들이 지금의 우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현재 우리의 몫이다.아직 늦지 않았다. 이제라도 시민아파트가 원형 보존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광주일보 2018년 09월 14일>2018년 09월 14일
    2019-05-08 | NO.35
  • 문화원은 일을 하고 싶다
    최석환 광산문화원 사무국장
    지역의 전통문화를 발굴 보존하고 각종 문화행사를 주최하는 곳이 지방문화원이다. 문화원의 주요 역할은 향토문화 사업을 통해 원천 소스를 발굴하여 문화브랜드로 개발하는 것이다. 문화원이 발굴한 원천콘텐츠는 나무뿌리이며, 문화브랜드는 줄기라고 볼 수 있다. 발굴된 소재는 스토리텔링으로 관광, 연극, 영화 등 2차 가공된 열매로 열린다. 광산문화원에서는 인물브랜드를 통해 문학제, 음악회, 인문강좌 등을 열어 시민과 함께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그 열매를 생활문화 속에서 맛본다. 문화원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방문화원은 광주·전남에 27곳이 있지만 대부분 인력부족과 예산지원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방문화원의 현실은 향토문화 및 문화진흥을 위한 사업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힘들다. 정부 부처 공모사업을 통해 운영되지만 사업비가 부족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치기 어렵다. 사업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무엇보다도 관심을 촉발할 콘텐츠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일본의 ‘도깨비 마을’처럼 문화 보급 및 창달을 위한 일거리를 문화원에 주어야 한다. 문화원에 마중물이 들어와야 지역 내 문화브랜드를 강화시켜 지역 경제를 문화 산업으로 기반을 조성 할 수 있다. 또한 문화원이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문화 관련 유관단체 및 활동가들이 다수여서 행사가 겹치는 일이 많다. 문화원에게 지역 내 문화행사를 통합하는 구심점으로서 특화된 역할을 줘야한다. 이는 문화원은 대민업무를 보고 공익을 담당하는 단체의 성격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자료를 총체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문화원 중심으로 구축하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 지정된 문화재의 관리와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 운영, 비지정 문화재 발굴 등 향토사업과 관련된 보존 사업들을 지역 문화 행사와 연결하여 문화원을 구심점으로 유사단체와 협력해 갈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 및 제도 개선을 할 수 있도록 기관 지원을 해야 문화원이 허브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문화란 이해와 배려 속에 존중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에 대한 지원은 간섭보다는 지켜보는 것이다.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하되 즉각적인 성과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교통에 대한 지원, 건축에 대한 지원, 복지에 대한 지원 등은 효과가 바로 나타난다. 문화에 대한 지원은 다르다. 문화 데이터 구축, 지역 향토자료, 역사 관련 발간물의 경우 성과 위주의 다른 사업과 비교해서는 안된다. 예향 광주에는 문화 발전을 위해 일하는 문화 활동가들이 많다. 문화원은 문화활동가들이 모이고 다양한 문화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지원해주고 있다. 문화활동가들의 부족한 인력과 예산을 문화원이 대신해 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원없이 계속된 재능 기부 활동을 바라면 이들은 지친다. 문화 활동에 대한 의욕과 초심은 사라지게 된다. 똑똑한 한 명의 문화기획자가 그 지역 경제를 성장시키지는 것을 우리는 선진국에서 많이 보아왔다. 문화기획자를 ‘비행기 조종사’ 양성하듯이 귀하게 투자하고 정성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시민들의 눈높이는 높고 문화원에 대한 지원은 적으면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지금 같은 시스템에서는 문화 활동가들의 열정과 사명감이 사라지고 퇴보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문화원도 다양한 시대 변화에 맞춰 동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문화원은 많은 향토 사료와 문화 자원을 갖고 있다. 이를 문화 브랜드화하여 콘텐츠 개발로 이어질 수 있도록 현실적인 지원과 제도적 보완에 적극 나서주길 기대해 본다.<무등일보, 2019.5.7.>
    2019-05-07 | NO.34
  • 정인서 문화비평 39, 옛 전남도청, 복원일까 재현일까?
    300억원 들여 복원한다는 데... 박제공간이 아닌 활력 드러내야
    1980년 광주5·18민주화운동의 상징이며 최후 항전지였던 옛 전남도청을 복원한다고 한다. 건물을 복원하는 것도 의미는 있지만 여기에 덧붙여 5·18 당시의 시민군의 항전 모습을 함께 재현한다는 계획도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5·18세대는 물론 5·18 이후의 세대들에게 공감을 주고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은 “옛 전남도청을 ’80년 5월 당시 모습으로 원형 복원하여 5·18 민주항쟁의 숭고한 뜻을 계승하고 역사의 교육장으로 보존하겠다”면서 “5·18 관련 망언 등 역사왜곡을 차단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전국화·세계화하는 기틀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그런 점에서 이번 복원에 거는 기대가 크다. 복원대상은 전남도청 본관·별관·회의실, 도 경찰국 및 도 경찰국 민원실, 상무관 등 6개 동이다.이들 건물의 5‧18당시 주요 활동 거점이었던 시민군 상황실과 방송실이 자리한 도청 본관 1층 서무과, 수습대책위원회가 있었던 2층 부지사실 등이 주요 복원 대상이다.시가 내놓은 복원의 방향은 조선대 산학협력단의 용역결과를 토대로 80년 5·18당시의 모습으로 원형복원을 기본 전제로 한다. 전체적인 예산은 300억원 규모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주된 기본 원칙은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성에 근거한 복원, ▲5·18민주화운동 공간의 상징성을 살리는 복원, ▲5·18민주화운동정신 계승과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지향하는 복원이다.여기에 5‧18민주화운동의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승화한다는 배경에서 출발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함께 상생할 수 있는 복원을 기획하였다. 이러한 계획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복원한다는 것은 기억의 가치를 위해 하는 것이다. 역사성과 장소성을 가진 옛 전남도청은 우리에게 중요한 기념물이다. 기억하고 남기고 싶어 하는 열망이 담겼다.복원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은 자신들과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 사람들에게 우리의 열망을 전달하고 싶은 욕구를 담으려는 것이다.하지만 그러한 욕구 때문에 국내에서 여러 차례 진행된 복원 사례를 보면 실패의 경우가 많다.대표적으로 2011년 경남도가 1천500억원 가량을 들여 추진했던 '이순신 프로젝트'가 곳곳에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원형 복원됐다는 거북선은 수입산 목재가 사용됐고 거북선 잔해 찾기와 ‘이순신밥상’ 사업이 실패로 끝난 바 있다. 말은 원형 복원이지만 실제로 그게 가능한 것일까. 숭례문, 서울역사, 서울 성곽, 청계천, 덕수궁 중명전, 안동 임청각, 양양 낙산사 등이 ‘원형 복원’되었지만 현장을 가본 사람이라면 옛 느낌을 갖지 못할 것이다.그저 옛 모습을 모방한 새로운 현장일 뿐이다. 지금 광주시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이미 훼손된 상태인 데다 새로 설치했던 엘리베이터와 화장실, 안전을 위해 구축했던 철재빔을 철거하고 천정까지 뚫렸던 공간을 다시 층을 나누어 만든다고 옛 전남도청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것일까.설마 지워지고 메워진 총알 자국을 다시 파는 우는 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기념과 기억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활력과 의미를 주지 않으면 기억도 도태될 것”이라는 김동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장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이번 복원 사업들이 어떻게 진행될 지는 구체적인 발표자료를 봐야 알겠지만 지나치게 박제된 듯한 복원이 아니었으면 한다.필자 개인적으로 볼 때는 모두 복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원형 복원이라는 것 자체가 올바른 용어가 아니다. 사실은 ‘재현’에 가깝다.이미 사용되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 일부 익숙해진 시민들도 있다. 모두를 복원하기보다 전당 연결통로 등 기존에 있었던 건물을 복원하고 일부 주요 공간의 5·18을 재현하는 선에서 이루어져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2019-04-12 | NO.33
  • 정인서 문화비평 36, 교통문화지수 특광역시 1위 ‘통계의 맹점!’
    교통문화지수가 14위에서 2위로 껑충 올라간 도시가 있다. 바로 광주다. 반가운 소식에 깜짝 놀랐다.특별히 교통문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도 아닌데 이처럼 지수가 큰 폭으로 올라갔다니 박수 치고 환영할 일이다. 광주 시민의 교통문화지수가 높아진 일에 고맙기 그지 없다.이처럼 교통문화지수가 단 1년만에 급격한 변화를 보인 것에 좀 의아한 감은 있다. 시민들의 의식 수준이 갑자기 높아진 것으로 해석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광주광역시는 최근 국토교통부 주관으로 실시한 ‘2018년 교통문화지수 평가’에서 전국 순위는 제주도에 이어 2위로, 전년도 전국 14위보다 12계단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또 특·광역시 중 1위를 차지한 것이다. 교통안전공단이 (주)리서치랩에 의뢰해 지난해 10월 16일부터 18일 사이에 횡단보도 정지선 준수율 등 8가지의 운전행태, 횡단보도 신호 준수율 등 3가지 항목의 보행행태, 지자체 교통안전 전문성 확보여부 등 7가지 항목의 교통안전을 조사 분석한 결과이다.당연히 이 결과를 신뢰할만 하다. 이 결과를 신뢰한다면 광주의 교통문화 수준은 이제 탄탄대로에 있다고 봐야 한다. 더욱이 올해는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개최도시로서 세계에 ‘문화도시 광주’를 알리는 해이다. 교통문화는 물론 문화중심도시로서 '아트폴리스' 다운 면모도 아울러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18가지 조사항목 가운데 어떤 항목들이 잘한 것이고 어떤 항목들이 못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봐야 부족한 내용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발표 결과를 들여다보면 이렇다. 우리나라의 연도별 교통문화지수는 2014년 76.70에서 2015년 78.11, 2016년 81.38, 2017년 81.56이고 올해는 83.20(새로운 지수 75.25)으로 꾸준히 높아졌다.광주는 새로운 지수를 적용할 때 제주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80점대를 넘어선 81.17을 차지했다.5개 자치구별로 고른 지수를 보였는데 남구가 81.56으로 특광역시 자치구 중 9위, 광산구가 81.34로 11위, 동구가 81.27로 12위, 서구가 81.20으로 13위, 북구가 80.87로 12위를 차지했다.광주의 교통문화지수 항목별로 어느 수준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보고서를 꼼꼼히 찾아봤다.8가지 항목을 측정한 운전행태는 55점 가운데 45.56으로 17개 시도 중 10위인 C등급, 3가지 항목의 보행행태는 20점 가운데 16.60으로 9위인 C등급이다. 이것으로만 보면 광주의 교통문화지수가 높을 리 만무하다.항목별 지수를 보면 운전행태는 전국 평균인 45.61에도 못미쳤고 보행행태는 전국 평균 16.53을 살짝 넘어선 수준이었다. 도로 현장의 교통문화는 '꽝'이라는 것이다.그런데 7가지 항목의 교통안전 25점 가운데 19.01로 2위인 A등급이었다.A등급을 차지한 교통안전은 어땠길래 2위로 나타났을까. 이 자료는 수집가능한 최근 조사자료로 2017년 7월부터 2018년 6월까지의 자료이다.이를 한걸음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광주는 교통안전 정책과 예산 등에서 타시도에 비해 교통안전 이행수준이 월등히 높았다. 13점 기준의 교통안전 실태는 전국 평균이 3.94인 반면 광주는 무려 10.11로 제주보다 높은 1위를 차지했다. 이는 지자체의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 바람직한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2점 기준의 교통사고 발생 정도는 전국 평균이 9.16으로 광주는 8.90으로 13위였다. 사고가 제법 나고 있다는 것이다.구체적으로 보면 인구 및 도로연장당 자동차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0.76명으로 전국 평균 1.25명보다 크게 낮았다. 반면 인구 및 도로연장당 보행자 사망자수가 1.05명으로 전국 평균 0.75명보다 높았고, 사업용 자동차 대수 및 도로연장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도 3.72명으로 전국 평균 2.49명보다 높은 수준이다.광주의 교통문화지수가 껑충 뛴 것은 교통안전 이행수준의 점수가 높은 것이 반영된 때문이었다. 즉 지자체가 노력하는 정책적인 노력을 매우 잘하고 있으나 그 정책이 교통현장에서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도로상에서의 교통문화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 분석 결과이다.다행히 이러한 교통사고 가운데도 지난해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는 1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은 바람직스러운 결과이다. 어린이 안전은 어떤 안전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전체적인 분석을 할 때 광주시가 지향해야 할 것은 ‘교통문화지수 특광역시 중 1위’라고 보도자료를 배포하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수치가 나왔는지 심도 있는 결과 분석을 내적으로 들여다봐야 했다.시의 정책과 예산 노력도 중요하지만 도로 현장에서 교통안전 기초질서 등 교통사고를 줄이는 노력과 사업용 자동차의 안전운전을 더욱 강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9-02-11 | NO.32
  • 요즘 문 닫는 가게들
    요즘 심기가 좀 불편하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어서다. 그 가게들이 나하고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1도 없지만 ‘임대 문의’ 딱지가 텅 빈 가게의 쇼윈도우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동네가 쇠락해가는 듯 썰렁한 느낌을 받는다.경기가 오죽 안좋으면 임차인이 나가고 새로 들어올 사람이 없을까. 이 동네만 그런 것은 아닌가보다. 신문을 보니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핫한 동네들도 빈 가게들이 늘고 있다 한다. 전에는 회사 다니느라 가게들이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 상관없이 지냈는데 나이 들어 한갓지게 살다보니 눈에 잘 뜨이는가싶다.신문을 보면 동네 단위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수출공단, 내수기업들도 사업이 안된다고 울상이란다. 수출전선에 있는 기업들이 인력을 감축하고 아예 팔려고 내놓는 등 활기가 식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정부가 올해는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니 닫았던 가게들도, 가동률이 떨어진 기업들도 다시 기운을 차리게 될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사실 내 개인으로야 가게가 되든 안되든 기업이 휘청거리든 말든 쌀독 바닥에 있는 쌀 긁어서 밥해먹고 살면 되니 신경 쓸 일 없이 살아도 되겠지만 내 심사는 그렇지만 않다.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눈 감고 모르쇠 할 수가 없다.천원 짜리 물건 살 때도 카드로 긁던 내가 언젠가부터 현금으로 지불한다. 카드 수수료라도 안 물게 도와주자는 마음에서다. 내 눈에 뜨이는 가게들의 시무룩한 모습은 마치 빙산이 덩어리째 무너지는 북극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하얀 빙산조각이 바다에 조각나 떨어지는 지구온난화 현상과 겹쳐 보여 살짝 겁이 나기도 한다.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닫으면 나라 경제가 잘 안돌아간다는 징조가 아닐까. 나라가 경제가 안좋아지면 종당에는 우리집 가계에도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식당에 갔을 때 손님들로 북적거리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뭐랄까 안도감 같은 것이 든다.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실제로 경기가 대체적으로 안좋아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무언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진다. 미국은 거의 완전고용 상태, 일본도 인력이 없어 로봇을 동원해서 일을 시킬 정도라는데 우리나라는 외딴 섬에 가 있는 모습이다.최근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또 다른 현상이 보인다. 단지마다 한 개 꼴로 마트가 있었는데 이것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어느 날 죄다 편의점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내력을 듣자니 마트는 이익이 적어 편의점으로 변신했다는 것.마트가 서민들의 시장이라면 편의점은 젊은이들의 간이 구멍가게다. 편의점은 대체로 마트에 비해 물건값이 비싼 편이다. 맥주는 한 캔에 몇 백원 차이가 날 정도다. 값이 싼 마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뽀대나는 편의점이 들어서니 다른 선택지가 없다. 울며 겨자먹기로 주민들은 다소 비싼 편의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편의점에 가보았더니 웬걸 주인이 마트 주인이다. 말인즉슨 마트는 이익이 별로 나지 않아 편의점으로 바꾸어 탔단다. 그 사정을 이해는 하면서도 서민들의 부담은 그만큼 늘어난다는 사실이 걸린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고 가계부에 주름살을 짓게 하는 환경변화다.돈이 도는 것이 경제일진대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부동산 관련 세금도 올라가고 아파트 관리비도 올라가고 각종 서비스, 음식, 식재료값 같은 기초생활비도 슬금슬금 기어 올라간다. 자연히 가계장부도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다. 자연 나도 돈을 덜 쓰게 된다.소비심리가 위축되면 연쇄적으로 가계, 기업, 대기업으로 파장이 올라가지 않을까. 요새 돈이 넘치는 쪽은 정부인 것 같다. 한 마디로 경제권은 가장이 아니라 정부가 쥐고 있는 형국이다. 세금이 몇 십조 더 걷힌다고 하니 정부는 살 판 났다.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모두들 정부에 손을 벌리고 있다. 우리 좀 도와달라는 거다. 정말 요즘 같아선 '국민 못해먹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적이 걱정스럽다.
    2019-01-29 | NO.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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